"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그리스의 모든 참전 영웅은 집으로 돌아갔다. 다만 율리시스만이 사랑하는 아내가 기다리는 조국과 떨어져 있었다."

이타카로 돌아가는 일에 대해 의논하던 ‘신의 의회‘를요약할지 말지 고민스러워 그만 펜을 내던져버렸다. ‘신의 의회는 중요한 대목인데, 인간의 영웅적인 노력, 고귀함과 허영, 동시에 작가의 운명관을 그대로 반영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올림포스 산 위에서 열린 ‘신의 의회‘ 대목을 뺀다는 건 이 작품이 지닌 초세속적인 일면을 모조리 생략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또 신성의 개입을 생략하면 그 자체로 시인의 아름다움과 신덕의 면모를 표현할수 없다.  - P123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물속에 얼마나 오래잠겨 있었는지, 아무도 몰래 숨어 있던 물거품이 고요한연못 위로 갑자기 끓어오르는 것처럼 이런 생각이 들었다.
- P124

"율리시스가 처한 상황은 그가 트로이 전쟁에 출전하기전 이타카에서 처한 상황, 그의 아내가 구혼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그 상황이죠. 나중에 율리시스가 왜 이타카로돌아가길 싫어했는지, 그가 왜 아내를 만나기 두려워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할게요. 그전에 가장 중요한 사실을 하나 더 말씀드리죠. 

오디세이는 호메로스가 우리에게 믿게한 것처럼 넓은 지역을 무대로 삼아 일어난 모험담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런 모험담과는 반대로 율리시스의 마음속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린 드라마죠. 그러니까 오디세이에서 일어난 모든 모험은 곧 율리시스의 무의식이 원하는것들을 상징하고 있어요. 몰티니 씨, 당신은 프로이트 이론을 물론 알고 있겠죠?"
- P182

나는 별장이 보이는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바다는햇빛 아래 빛나며 떨고 있는 듯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자 물빛이 달라졌다. 푸른빛인가 하면 진한 보랏빛, 또 초록으로 빛났다. 이곳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잔잔한 수면 위로 깎아 세운 듯 수직으로 솟아오른 섬 바위들이 나를 반기듯 날아오르는 것도 같았고, 헤엄쳐 오는 것도 같았다.

그건 마치 햇빛을 받아 반짝이며 날아오는 화살처럼 보였다. 이런 경치를 보고 있자니 느닷없이 죽고 싶은 생각이들었다.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았다. 바다에 몸을 던지면 가장 멋지게 죽을지 모른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죽으면 삶에서 얻지 못했던 순수성을 되찾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에밀리아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 P244

저 멀리 작은 배 한 척이 수평 선을 따라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배를 쳐다보며 배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 상상했다. 일꾼들은배를 닦거나 갑판 청소를 할 테고, 요리사들은 접시를 닦고, 사무를 보는 직원들은 늘 그렇듯 선실의 책상에 앉아있을 것이다. 
갑판 아래 기관실에서는 웃통을 벗어 던진남자가 석탄을 퍼 아궁이에 넣고 있을 것 같았다. 

저 배는너무 멀리 있어 내게는 작은 점에 지나지 않았지만, 실제로 보면 굉장히 크고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 운명의 순간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 P255

"그러면 바티스타와 같은 생각인가요?"라며 그는 뜻밖의 빠른 어조로 물었다. 전혀 짐작하지 못한 말이었다. 나는 레인골드와 의견이 다른 것이 바티스타와 같은 견해임을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예상치 못한 말이 나를 화나게 했는지도 모른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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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3-19 1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같이 달리고 계신가요?

너무 재밌었습니다. 감흥과 흥취가
참 대단했습니다.

전 바로 <권태> 달리고 있습니다.

청아 2021-03-19 15:06   좋아요 1 | URL
리뷰쓰고 있어요.ㅋㅋㅋㅋ읽다가 너무 집중해서 눈이 아플지경이었습니다. 다른 소설도 궁금해요!
 

이런 생각이 마음 한편에 자리하자 깊은 곳에 숨어 있던고통이 되살아났다. 어딘가를 얻어맞은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얼마나 얼굴을 찡그렸는지 파세티 부인이 근심 어린듯 고기가 연하다며 나를 안심시켰다. 나는 미래에 대한계획을 말하는 파세티에게 거짓으로 귀 기울이는 척 위장하면서도 나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고통의 실체를 분석해보려 애썼다.  - P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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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1-03-18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통의 실체를 분석해보려고 애쓰다가는 더 고통스러울 것 같아요.. ㅎㅎㅎ

청아 2021-03-18 18:02   좋아요 0 | URL
그렇죠~ 이 사람은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어요ㅋㅋㅋㅋ
 

(1930년)
(우크라이나)농민들의 폴란드(로의) 도피는 국제적 망신거리였으며 스탈린과 정치국에는 심각한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이는 수가 제법 되는 우크라이나소수 민족과의 정치적 화해를 준비하던 폴란드 당국이 집단화 과정과 결과를 알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폴란드 국경 수비대는 참을성 있게 난민과 면담했고, 집단화 과정과 실패에 관한 지식을 얻었다.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자신들의 비극을 막아달라고 애원한 농민도 있었다.  - P71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 탈출할 때도, 폴란드는 간첩을반대 방향으로 보내 우크라이나인의 반란을 조장했다. 그들의 선전포스터는 스탈린을, 국민이 굶주리는데도 곡물을 수출한 배고픈 차르Hunger Tsar‘라고 불렀다. 1930년 3월 정치국 위원들은 폴란드 정부가 개입할 수도 있다"며 두려워했다. - P71

스탈린과 소련 지도부는 폴란드를 전 세계를 포위한 자본주의 체제의 서쪽 영역으로, 일본을 동쪽 영역으로 간주했다.  - P71

일본은 러시아를 제물로 삼아 군사적 강국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일본은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 제국을 물리쳐, 태평양항구를 확보하기 위해 러시아인이 건설한 철도를 장악함으로써 세계열강으로 부상했다. 스탈린도 잘 알고 있었지만 폴란드와 일본은 모두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그리고 소련 내의 민족 문제에 관심이 있었다. 

스탈린은 아시아에서 굴욕을 겪은 러시아의 역사를 통감한 듯했다. 그는 일본인에 대한 피의 복수를 맹세하는 노래인 ‘만주의 언덕에서on the Hills of Manchuria‘를 좋아했다. - P72

다음 농작물 파종을 위해 따로 보관하는 종곡은 모든 농장의 필수품이다. 종곡의 선별과 보존은 농업의 기본이다. 인류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에종곡을 먹어치우는 일은 심각한 자포자기와도 같은 행위였다. 
종곡에 대한 통제권을 집단농장에 빼앗긴 개인은 자신의 노동력만으로살 수 없게 되었다.
- P75

1931년 소련령 우크라이나는 (온전한)수확량의 절반 이상을 빼앗겼다. 많은 집단농장에서 징발 목표량을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은 종곡마저 넘기는 것이었다. 12월 5일, 스탈린은 아직 연간 요구량을 충족시키지 못한 집단농장에 종곡을 넘기도록 명령했다. 

아마도 스탈린은 농민이 식량을 숨기고 있으며, 종곡을 빼앗겠다고 협박하면 숨긴식량을 넘기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기의 농민 대다수에게는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1931년 말이 되자 이미 수많은 농민이굶주리기 시작했다.  - P77

코시오르는 ‘공산당청년회‘ 회원이 1932년 6월 18일에 부친 편지를 받았는데, 당시에는 너무나 익숙했을 광경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집단농장원은 밭으로 나간 후실종됩니다. 며칠이 지나면 그들의 시체가 발견되고, 사람들은 늘 있는 일인 양 아무런 감정도 없이 시체를 묻습니다. 

이튿날에는 어제 남의 무덤을 팠던 사람의 시체가 발견됩니다." 같은 날인 1932년 6월18일, 스탈린 본인도 소련령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존재한다는 것을사견임을 전제로 인정했다. 

그 전날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식량 원조를 요청했다. 스탈린은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그의 응답은 소련령 우크라이나의 모든 곡식을 계획대로 징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과 카가노비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 당장의 곡물 수출에 차질을빚어서는 안 된다"는 데 동의했다.

(수출을 했어...) - P78

1932년 상반기에 자신의 변혁을 밀어붙이면서, 스탈린이 골몰한 문제는 국민의 고통이 아니었다. 집단화 정책의이미지가 손상될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그는 굶주리는 우크라이나농민이 조국인 공화국에서 이반하고 있으며 "징징거림으로써" 다른소련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36 - P79

우크라이나 교외 지역에서 지역 정당 활동가들이 지켜봐야 했던세계는, 모스크바의 무미건조한 명령서나 선전물이 아닌, 우크라이나어린이들이 부르던 동요에서 훨씬 더 잘 드러나고 있다.

스탈린 아버지, 이걸 보세요
집단농장은 정말 정말 멋지다나요.
오두막은 망가졌고, 헛간은 꼴랑 내려앉았죠
말은 몽땅 지쳐서 주저앉았죠
오두막에는 망치와 낫이
헛간에는 죽음과 굶주림이 있대요
소는 한 마리도 남지 않았고, 
돼지도 몽땅 사라졌대요
꼴랑 벽에 걸린 스탈린 아버지 사진만 있대요.
아빠 엄마는 집단농장에 계세요
불쌍한 아이는 혼자 울면서 걸어 간대요
빵도 없어요, 기름기도 없어요
공산당이 모조리 쓸어갔어요
친절함도 부드러움도 쓸려갔어요
아버지가 자기 자식을 잡아먹어요
당원은 아버지를 때리고 밟고
우릴 시베리아 수용소로 보내버리죠38 - P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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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경)
소련령 우크라이나 도시의 시민들은 배급 대기열의 자리를 잃지나않을까 하는 걱정, 굶어 죽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그들은 도시가 유일한 영양 공급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도시는 지난 5년 동안 급성장했고, 도시에 진입한 농민은 노동자와 점원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농부의 자녀는 훨씬 더 오랫동안 도시에서 거주한 유대인, 폴란드인, 러시아인과 함께 가게에서 얻은 음식에 의존해야 했다. 

시골에 있는 그들의 가족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굶주림의 시기에는 도시 거주자가 시골에 의존한다. 독일과 미국에서 농민은 대공황 시대에도 굶주리지 않았다. - P58

공원을 산책하는 연인은 무덤을 파헤치지말라는 경고문을 봐야 했다. 의사와 간호사는 병원에 도착한 굶주린사람들을 치료해선 안 됐다(음식 제공도 금지였다). 시 경찰은 굶어 죽은 거리의 부랑자들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겼다. 소련령 우크라이나 도시의 경찰은 하루에 아이 수백 명을 체포했다. 1933년 초반하리코프 경찰이 매일 달성해야 하는 할당량은 2000명에 달했다.  - P59

소련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은고향인 베르디체프에서 가족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객실 유리창너머에서 빵을 구걸하는 여인을 만났다. 사회주의 건설을 돕고자 소련에 온 정치적 망명자 아서 케스틀러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오랜시간이 지나 그가 한 회상에 따르면, 하리코프 기차역 밖에는 여자농민들이 머리는 심하게 흔들리고, 사지는 막대기 같고, 배는 부풀고튀어나온 소름 끼치는 아기를 차창 쪽으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는우크라이나 아이들이 술병에서 꺼낸 배아" 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21세기의 도덕적 목격자로 인정받는 이 두 사람이직접 목격한 내용을 글로 적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 P61

1933년의 대규모 기아는 1928~1932년 실시한 스탈린의 첫 번째 5개년 계획의 산물이었다. 이 기간에 스탈린은 공산당 최상부를 장악했고, 산업화와 집단화 정책을 강행했으며, 패배한 국민을 이끌 무서운아버지로 부상했다. 그는 시장을 계획경제로, 농민을 노예로,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의 불모지를 강제수용소 단지로 바꿔버렸다. - P63

각 지역에서 ‘트로이카라 불리는 3인 집단이 농민의 운명을 결정해야 했다. 국가 경찰, 지역 공산당 대표, 국가 징세관으로 구성된 트로이카는 항소권 없는 극형(사형, 추방)을 빠르게 내릴 권한이 있었다.  - P64

1930년 첫 넉 달 동안, 11만3637명이 부농이라는 이유로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 강제이주해야 했다. 이는 농가 약 3만 채가 텅텅 비고, 놀란 주민들은 갑작스러운 사건에 대비할 시간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 P65

우크라이나 농민은 포로수용소로 추방되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었는데, 1920년대 중반부터 계속 그런 추방에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미 전통 민요처럼 된 비가가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오 솔롭키, 솔롭키여!
너무나 멀고 먼 길이여,
내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고
두려움이 영혼을 부수네.
- P65

솔롭키는 북극해의 섬 위에 세워진 포로수용소였다. 우크라이나농민의 마음속에 솔롭키란 고향에서 추방당하면서 느끼는 모든 고립과 억압, 고통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 지도부에게 솔롭키란 추방자의 노동력이 국가의 이익으로 바뀌는 최초의성과를 나타내는 이름이었다. 1929년, 스탈린은 솔롭키 모델을 소련 전체에 적용하기로 했고, ‘특별 정착지‘와 강제수용소 건설을 명령했다. - P66

소비에트 당국은 특별 정착지의 포로 중 5퍼센트가 사망하리라 예상했지만, 현실에서는 10~15 퍼센트에 달했다. 백해의 주요 도시인 아르한겔스크에 살던 어떤 사람은 이런 일들이 말도 안 된다고 토로했다. "경제적인 차원에서 부농을 없애는 거랑, 신체적인 차원에서 그들의 자녀를 학살하는 건 다르죠. 그건 너무 야만스러워요." 아이들은 최북단 지역에서 죽어갔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관도 없이 시체 서너 구를 한데 모아 묘지로 옮길 정도였다. 볼로그다의 한 노동자 집단은
"세계 혁명으로 가는 여정이 반드시 "이 아이들의 시체를 지나야 합니까"라고 외쳤다. - P67

노동자 2만5000명이 경찰 숫자를 보강하기 위해, 또한 농민들을 압도하기 위해 교외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마을의 음식 부족이 농민 때문이라고 교육받은 노동자들은 "부농으로 수프를 끓여 먹자"며 결의를 다졌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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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3-18 10: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미미님이 읽으신 수용소 군도시대에 맞물리는 역사네요.
도대체 얼마나 많은 생명이 처첨하게 짓밞혀야 하는지

1930년대 우크라이나 대기근 참상을 폭로한 영국 기자의 실화를 다룬 영화 ‘미스터 존스‘ 영화
미미님에게 사알짝 추천합니다.

오늘 하루 멋지게 ٩(๑❛ᴗ❛๑)۶

청아 2021-03-18 10:30   좋아요 1 | URL
아 스콧님!! 👍👍이 책 초반에 그 기자가 나와서 안그래도 궁금했었어요!! 워낙 통찰력이 좋으시니 맞춤 추천까지 완벽하심! 마냥 저는 감동할 뿐입니다! 꼭 찾아볼께요~♡
♡ヾ(*´∀`*)ノ♡
 

한번은 잠시 북부 이탈리아로 출장을 가야 했는데, 역에 배웅 나온 그녀가 그렁그렁고인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그때는 에밀리아가 슬퍼한다는 것을 모른 체했지만, 출장내내 슬퍼하던 그녀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아 혼자 온 것을 후회했다. 그날 이후 그녀와 함께 가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일을 포기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나갔다 온다고 해도 그녀는 예전처럼 슬퍼하거나 같이 가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았고, 대개읽던 책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알았어, 저녁때 봐, 식사 시간에 늦지마" 라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가끔은 오히려 내가 좀 더 오래 집을 비우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 P16

침대 한쪽에는자신의 잠옷을 잘 펴서 개고 그 옆에 내 잠옷을 놓았으며,
이부자리를 잘 정돈하여 그 위에 베개를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아침에는 항상 나보다 먼저 일어나 주인집 부엌에서아침을 준비해 쟁반에 받쳐서 들고 왔다. 

그녀는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신중하고 조용하게, 그러나 온 정성을 다해 모든 일을 처리했는데, 그런 모습이 마치 임무에 몰두한 열정 넘치는 스파이 같았다.
- P20

이들이 대화를 나누는 방 안에는 담배 연기가 자욱하고, 책상 위에는커피 잔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출근한 작가들은 저녁이 가까워질수록 마치 고집 센 여인을겁탈하려 마구 뒹군 듯 옷이 구겨지고 땀에 찌들어 형편없이 흐트러진 상태가 되고 만다. 

틀에 박힌 형식의 영화제작 현실은 영화에 흥미와 매력을 느껴 큰 결심으로 이계통에 나선 시나리오 작가들을 강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 P49

"훌륭해. 자넨 유능한 작가야."
"그 생각, 꼭 자네 시나리오에 넣어야 해."
이런 말을 들으면 모욕감마저 느껴졌다. 하지만 아무리그런 마음으로 내키지 않는 일을 한다 해도 시나리오 작가로서 의무를 저버리진 못했다. 

시나리오를 쓴다는 것은 사륜마차에 비유할 수 있다. 네 마리 말 중 기운 센 한두 마리가 힘차게 끌면, 나머지 말들은 함께 끄는 척하지만 실은 끌려가는 것이다. 나는 이 작업이 환멸을 느낄 정도로 싫었지만 언제나 마차를 끄는 힘센 말이 되곤 했다.
- P50

나는 병이 생겼는데도 의사에게 가기를 망설이는 사람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 P52

그 무렵 내가 처한 상황을 직시할 용기가 있었다면, 나는 분명 하던 일을 그만두고사랑 역시 포기했을 것이다. 나중에 깨달았지만 내 인생은의미 없이 지나갔다. 하지만 난 용기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시간이 흐르면 다 해결되리라 믿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렇게 되지 않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불안감까지 생겨났다. 에밀리아는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않았으며, 나는 일에 대해 염증을 느끼며 따분하고 우울한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 P53

"꼭 말해주고 싶은데 리카르도, 자넨 마치 마구간 냄새로 집을 찾아가는 말과 같아. 난 사흘 정도는 걸려야 끝낼것 같은 일을 두 시간 만에 해내다니 놀라워. 돈을 더 많이벌려고 하니 영감이 막 떠오르나 봐?"

사실 파세티는 외모와 달리 심하게 둔한 성격이었는데,
그런 그가 싫진 않았다. 그와 나의 관계는 보상을 주고받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서로 도움을 주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파세티는 신경질적이진 않았지만 상상력이부족했고 그런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으며, 기본적으로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상상력도 풍부하고, 병적이라 할 만큼 예민하고 복잡한 성향을 지녔다.
그의 어색한 농담조를 흉내 내려 나도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감독님 말이 맞아요. 
돈이 생기니까요."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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