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경) 소련령 우크라이나 도시의 시민들은 배급 대기열의 자리를 잃지나않을까 하는 걱정, 굶어 죽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뿐이었다. 그들은 도시가 유일한 영양 공급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도시는 지난 5년 동안 급성장했고, 도시에 진입한 농민은 노동자와 점원이 되었다. 우크라이나 농부의 자녀는 훨씬 더 오랫동안 도시에서 거주한 유대인, 폴란드인, 러시아인과 함께 가게에서 얻은 음식에 의존해야 했다.
시골에 있는 그들의 가족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이 흔한 일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굶주림의 시기에는 도시 거주자가 시골에 의존한다. 독일과 미국에서 농민은 대공황 시대에도 굶주리지 않았다. - P58
공원을 산책하는 연인은 무덤을 파헤치지말라는 경고문을 봐야 했다. 의사와 간호사는 병원에 도착한 굶주린사람들을 치료해선 안 됐다(음식 제공도 금지였다). 시 경찰은 굶어 죽은 거리의 부랑자들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겼다. 소련령 우크라이나 도시의 경찰은 하루에 아이 수백 명을 체포했다. 1933년 초반하리코프 경찰이 매일 달성해야 하는 할당량은 2000명에 달했다. - P59
소련 작가 바실리 그로스만은고향인 베르디체프에서 가족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객실 유리창너머에서 빵을 구걸하는 여인을 만났다. 사회주의 건설을 돕고자 소련에 온 정치적 망명자 아서 케스틀러 역시 비슷한 경험을 했다. 오랜시간이 지나 그가 한 회상에 따르면, 하리코프 기차역 밖에는 여자농민들이 머리는 심하게 흔들리고, 사지는 막대기 같고, 배는 부풀고튀어나온 소름 끼치는 아기를 차창 쪽으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그는우크라이나 아이들이 술병에서 꺼낸 배아" 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은 21세기의 도덕적 목격자로 인정받는 이 두 사람이직접 목격한 내용을 글로 적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 P61
1933년의 대규모 기아는 1928~1932년 실시한 스탈린의 첫 번째 5개년 계획의 산물이었다. 이 기간에 스탈린은 공산당 최상부를 장악했고, 산업화와 집단화 정책을 강행했으며, 패배한 국민을 이끌 무서운아버지로 부상했다. 그는 시장을 계획경제로, 농민을 노예로, 시베리아와 카자흐스탄의 불모지를 강제수용소 단지로 바꿔버렸다. - P63
각 지역에서 ‘트로이카라 불리는 3인 집단이 농민의 운명을 결정해야 했다. 국가 경찰, 지역 공산당 대표, 국가 징세관으로 구성된 트로이카는 항소권 없는 극형(사형, 추방)을 빠르게 내릴 권한이 있었다. - P64
1930년 첫 넉 달 동안, 11만3637명이 부농이라는 이유로 소련령 우크라이나에서 강제이주해야 했다. 이는 농가 약 3만 채가 텅텅 비고, 놀란 주민들은 갑작스러운 사건에 대비할 시간이 거의 또는 전혀 없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 P65
우크라이나 농민은 포로수용소로 추방되는 것의 의미를 알고 있었는데, 1920년대 중반부터 계속 그런 추방에 시달려왔기 때문이다. 이제는 이미 전통 민요처럼 된 비가가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오 솔롭키, 솔롭키여! 너무나 멀고 먼 길이여, 내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고 두려움이 영혼을 부수네. - P65
솔롭키는 북극해의 섬 위에 세워진 포로수용소였다. 우크라이나농민의 마음속에 솔롭키란 고향에서 추방당하면서 느끼는 모든 고립과 억압, 고통을 상징하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 지도부에게 솔롭키란 추방자의 노동력이 국가의 이익으로 바뀌는 최초의성과를 나타내는 이름이었다. 1929년, 스탈린은 솔롭키 모델을 소련 전체에 적용하기로 했고, ‘특별 정착지‘와 강제수용소 건설을 명령했다. - P66
소비에트 당국은 특별 정착지의 포로 중 5퍼센트가 사망하리라 예상했지만, 현실에서는 10~15 퍼센트에 달했다. 백해의 주요 도시인 아르한겔스크에 살던 어떤 사람은 이런 일들이 말도 안 된다고 토로했다. "경제적인 차원에서 부농을 없애는 거랑, 신체적인 차원에서 그들의 자녀를 학살하는 건 다르죠. 그건 너무 야만스러워요." 아이들은 최북단 지역에서 죽어갔는데, 그 수가 너무 많아 관도 없이 시체 서너 구를 한데 모아 묘지로 옮길 정도였다. 볼로그다의 한 노동자 집단은 "세계 혁명으로 가는 여정이 반드시 "이 아이들의 시체를 지나야 합니까"라고 외쳤다. - P67
노동자 2만5000명이 경찰 숫자를 보강하기 위해, 또한 농민들을 압도하기 위해 교외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마을의 음식 부족이 농민 때문이라고 교육받은 노동자들은 "부농으로 수프를 끓여 먹자"며 결의를 다졌다.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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