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까지 역사서에 기록된 주요 사건들은 실제 벌어진 일이었을 확률이 높다. 헤이스팅스 전투는 1066년에 발생한게 맞을 테고, 콜럼버스는 미 대륙을 발견했으며, 헨리 8세는 부인이 여섯 명이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실도 진실일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 진실을 기록하는 게 어느 정도 가능했다. 당장 지난 전쟁(1차 세계대전)에 관한 정보가 그랬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전쟁 관련 항목 중 일부에는 독일이 출처인 내용들도 실렸다. 사상자 수 같은 수치는 중립적인 정보로 간주됐고, 사실 어느 쪽에서나 이의없이 받아들이는 진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일이 불가능하다. 나치 버전으로 쓰인 전쟁과 나치가 아닌 이들이 묘사하는 전쟁 사이에는 어떠한 공통점도 없다. 이 중 어느 쪽이 역사로 남겨질지는역사적 증거가 아니라 전투의 결과가 결정할 것이다. - P93
이런 식의 일은 늘 일어난다. 셀 수 없이 많은 증거가 있지만, 그중 검증이 가능한 증거를 하나 들겠다. 1941년과1942년 루프트바페가 한창 러시아를 공습하던 당시, 독일 라디오는 독일 공군이 런던 시내를 초토화하고 있다는이야기로 자국 청취자의 귀를 즐겁게 했다. 자, 우리는 그런 폭격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독일이 영국을 정복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이 무슨 쓸모란 말인가? 미래의 역사가들은 폭격이 있었다고 할까, 없었다고 할까? 히틀러가 살아남는다면 폭격은 실제 벌어진 사건으로, 히틀러가 패배한다면 폭격은 없던 일로 기록될 것이다. - P95
나는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해야 하는 단 하나의 이유가, 적어도 우리가 전쟁에서 이기면 적보다 거짓말을 적게 할것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전체주의가 정말로 무서운 이유는 그들이 잔혹 행위를 저지르기 때문이 아니다. 전체주의는 객관적 사실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과거만통제하는 게 아니라 미래도 통제하려 든다. - P96
버나드 쇼는우리가 중세 시대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속고 미신적이라고 말했다. 현대사회의 경솔한 신념을 보여주는 예로 쇼는 지구가 둥글다는 광범위한 믿음을 꼽으면서 보통의 사람들은 지구가 둥글다는 믿음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단 하나도 대지 못한다고 적었다. 그게 20세기적 사고방식에 맞는 듯하기 때문에 그냥 저항 없이 받아들일 뿐이라는 얘기였다. 쇼의 말에는 분명 과장이 섞여 있지만, 여기엔 현대 지식에 관한 시사점이 들어 있어서 좀 더 생각해볼 만한 가치가있다. 우리는 대체 왜 지구가 둥글다고 믿는 걸까? - P97
자신은 인종차별적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사례를 수없이 거론한다. 착한유태인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자신이 원래부터유태인 혐오주의 감정을 품었던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유태인이 하는 짓거리를 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바뀌었다고 강조한다(히틀러 역시 <나의 투쟁>에서 매우 비슷한 주장을 했다). - P113
아이디어 자체는 새롭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주목하는내용은 끊임없이 변한다. 예를 들어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는 성경 구절은 마르크스 이론의핵심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자신의이론을 주창하기 전에는 크게 영향력이 없던 구절 아니었던가.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던 구절이다. 누구도 그 구절을 읽고 법과 종교, 도덕률이 재산 소유관계 위에 있는 상부구조라고 추론하지 못했다. 복음서를 통해 예수가 처음말한 건 맞지만, 이 말에 의미를 불어넣은 건 마르크스다. 마르크스의 분석이 있었기 때문에 대중은 정치인, 종교인, 재판관, 윤리학자, 자산가의 행동 동기를 끊임없이 의심하기 시작했다. 권력자들이 마르크스를 치가 떨리도록 증오하는 이유다. - P126
살아있는 동안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은 오웰은 전쟁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쟁과 파시즘, 강제수용소, 고무 경찰봉, 원자폭탄‘에 관한 글이다. 오웰은 자신이 이런 주제를 논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필요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표현했다. "침몰하는 배에 타고 있다면, 머릿속이 온통 침몰하는 배에 관한 생각일 수밖에 없다." 오웰은 전쟁이 불러오는 희생과 부조리를 강력하게 비판했지만, 전쟁을지지하기도 했다. 스페인 내전에서 돌아온 직후 오웰은 전쟁 반대 노선을고수하는 독립노동당에 가입했는데, 막상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당론과 달리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돌아섰다. 전쟁에는 반대하지만 조국인 영국의 참전을 지지하는 모순적 태도에 대해 그는 이렇게 해명했다.
"전쟁이란 어느 악을 선택할 것이냐는 물음이다. 나는 조국 영국의 제국주의를 겪었고, 그 폐해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전쟁 상대가 독일의 나치즘이나 일본의 제국주의라면 ‘차악‘으로 영국을 지지하겠다."
오웰은 모든 결정이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인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 경고했다. 그런 생각은 유치원을 졸업하면서 버렸어야 한다고 비꼬았다.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해서 그게 옳은 일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피할수 없어서 전쟁을 치르더라도 그게 옳다고 정당화할 수 없으며 그 행위가온당한 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옮긴이) - P130
공산주의나 파시즘을 물리치려면 우리도 그들만큼 광신적으로행동해야 한다고 결론짓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 말에 절대 동의할 수 없다. 광신적인 믿음을 타파하려면 반대로 광신적이지 않게, 지성을 활용해 행동해야 한다.
호랑이처럼 행동해서는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은 두뇌를 사용해 소총을 만들지 않았던가. - P131
이보다 더 인상 깊은 현상을 꼽자면 아마 지난 2년 동안폭증한 문학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사람들의 독서량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증가 폭의 일부는 외딴 군부대에 있는 수많은 군인 때문이었다. 여가 시간에 할 일이 없으니 말이다.
독서는 현존하는 오락거리 중 가장 돈이 덜 들고 자원낭비가 없는 방식이다. 책을 수만 권 찍어도 하루치 신문을찍는 것보다 종이가 적게 든다. 그리고 책 한 권이 만들어지면 재생지 공장으로 갈 때까지 수백 명의 손을 거치게 마련이다.
독서량이 눈에 띄게 늘었고, 책을 읽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뭔가 자꾸 배우게 됐다. 그러다 보니 시중에나오는 책의 수준도 현저히 오르는 결과를 낳았다. 빼어난문학작품이 나오지는 않지만 그래도 3년 전과 비교하면 일반 독자가 읽는 평균적인 책의 수준이 올라간 건 분명하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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