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은 말수가 너무 많은 인간이 바보 천치가 아닌 경우를 이때껏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 P107

조지는 밀가루가 묻은 로즈의 손이 보기 좋았다. "예, 날씨도미리 알아 둬야 합니다. 그렇고말고요." 스스로도 인정하다시피조지는 눈물에 대해 잘 모르는 만큼이나 사랑에 대해서도 잘 알지못했지만, 그래도 그곳에 앉아 있으니 즐거웠다. 그리고 자기 딴에는 훨씬 더 흥미진진한 주제로 넘어가기 직전인 지금 이 대화도즐거웠다. 

바꾸어 말하면, 그는 사랑에 관하여 알아야 할 것을 다알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 자신도 함께 있는 기쁨을. - P118

"버뱅크 씨." 나중에 주방에서 함께 커피를 마시며 로즈가 말했다. "제가 근심에 빠졌을 때 버뱅크 씨는 두 번이나 이곳에 계셨어요. 그런데 저는요, 자주 근심에 빠지는 사람이 아니에요."
- P122

로즈가 피아노를 칠 때면 필은 자리에서 일어나 거실을 떠났다. 그는 로즈가 음을 틀린 순간을 더없이 정확하게 파악하고 일어섰기 때문에, 로즈는 그가 집을 나섰거나 아니면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다시 피아노를 칠 엄두가나지 않았다. 로즈는 필의 취향이 조지보다 훨씬 더 고상한 것은아닌지, 그래서 필이 자신을 속으로 비웃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로즈가 주지사에게 잘 보이려고 연습하는 것을 알고서.
- P168

필은 자신이 집 뒷문을열었을 때 로즈가 연주를 멈추는 것을 몇 번이나 눈치챘다. 문을여는 것만으로도 로즈의 연주를 더 훌륭하게 따라 하는 것과 다름없는 효과가 있었다. 그 여자의 성질을 긁는 일은 그렇게 식은 축먹기였다. 손을 떠는 꼴이 어찌나 고소하던지, 손을 떨다 못해 커피까지 엎지르지 않던가! 필은 스스로를 동정하는 인간들을 혐오했다.
- P170

필은 자기 가족을 굼뜨고 거치적거리는 얼간이와 응원자와 몽상문으로 여겼고 필을 제외하면, 그들은 실제로 그런 존재였다. 어떻게 한 인간이, 어떻게 한낱 인간이, 자신이 꿰뚫어 본 남들의 내면을 남들 스스로도 보게 하는 힘을 지녔을까? 그런 권능을 필은 어디에서 얻었을까?  - P183

필은,
아아, 남의 약점을 찌르는 법을 그는 너무나 잘 알지 않던가. 맙소사, 덜 아문 상처의 딱지를 들추는 법을.
- P265

그러나 소년에게는 필이 높이 사는 점이 하나 있었다. 열린천막 앞을 지나가며 기묘한 방식으로 조롱을 당하는 동안에도 소년은 결코 걸음을 멈추지도, 쭈뼛거리지도 않았던 것이다. 

소년은아예 어떤 소리도 못 들은 양 태연하게 걸어갔고, 자신을 구경하며 히죽거리는 남자들 앞을 다 지나간 후에는 고개를 들고 버드나무의 지저분한 둥우리를 올려다보았으며, 그 속에서 아직 몸도 못가누고 꼼지락거리는 새끼 까치들이 지지배배 지저귀는 소리에귀를 기울였다.

필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손으로는 가죽 밧줄을 닿으면서, 소년은 엄마에게 돌아갈 때 앞서 왔던 길을 다시 갈 필요가 없었다.

천막 뒤를 돌아서, 남자들의 비웃음과 조롱하는 눈길을 피할 수도있었다.
소년은 돌아섰다. 그러고는 열린 천막들 앞을 다시 똑바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휘파람 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 P301

피터는 헌든에 있는 깔끔한 자기 방이 그리웠고, 친구와 함께 두는 체스가 그리웠다. 홀쭉한 몸을 흐느적거리듯 움직이는 그친구는 고등학교 교사의 아들이었는데 피터와 마찬가지로 이때껏 친구를 사귀어 본 적이 없었고, 한번 웃음이 터지면 참을 줄을몰라서 몸이 축 늘어지고 눈물이 그렁그렁할 때까지 킥킥거렸다.
피터는 하느님이 내려 주신 이 친구와 함께 각자가 그리는 미래에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애가 탔다. 그 미래 속에서 한쪽은 이름난외과 의사였고 다른 쪽은 이름난 영문학 교수였다. 둘은 처음에는장난이었지만 나중에는 꽤 진지하게 서로를 ‘박사님‘과 ‘교수님‘
으로 불렀다. 다만 남들 앞에서는 절대로 그러지 않았다.
- P305

피터의 눈은 끝까지 로즈의 시선을 놓아주지 않았다. "어머니가 이러지 않아도 되게끔 제가 처리할게요."
로즈는 묻고 싶었다. 처리하다니, 네가 무슨 수로?  - P311

그러나 피터가 드넓게 구불구불 이어진 언덕을 넘고 또 넘은까닭은 단지 승마 연습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남모르는 외진 곳을돌면서 소년은 오랫동안 생각하고 오랫동안 탐색하며, 기도에 가까운 행위에 몰두했다. 간절한 탄원의 형태를 띤 그 기도를, 소년은 자기 아버지의 이름으로 드렸다.
- P319

그러나 필은 알았다, 뼛속 깊이 잘알았다. 추방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그래서 그는 세상을 혐오했다. 세상이 먼저 그를 혐오했으므로.
- P348

그의 지성과 서글서글함, 젠체하지 않는 소탈함, 공평무사함 같은 것들에 관하여. 물론 그들은 필의 밴조 연주 실력과 명랑한 휘파람, 소년 같은 장난기, 그가 붉게 트고 흉터투성이인 억센 손으로 만든 작품들 또한 기억했다.  - P356

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 주시고저의 하나뿐인 소중한 것, 개의 아가리에서 빼내 주소서.
-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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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워 오브 도그
토머스 새비지 지음, 장성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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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 주시고, 저의 하나 뿐인 소중한 것, 개의 아가리에서 빼내 주소서. p.363



여기 몬태나 주에 잘난 인물이 하나 있다. 때는 금주법이 시행되던 서부의 시골 마을. 인근에서도 부유하기로는 최상위권에 드는 집안인 버뱅크의 대목장에는 순둥이 조지 버뱅크와 냉혈한인 형 필 버뱅크가 함께 살고 있다. 성격이 극과 극임에도, 게다가 방이 16개나 되는데도 40대 미혼남인 이 둘은 한 방에서 지낼 정도로 나름 우애가 좋은 편이다. 이 중에서 잘난 쪽은 찔러도 피한방울 안 나올 것 같은 형. 필 버뱅크다. 그는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동생 조지는 같은 대학에서 제적을 밥먹듯이 당했다. 이쯤이면 누구나 두 형제의 이미지가 그려질 것이다. 다정하지만 느리고 말 수가 없는 조지에 비해 필은 날카로운 언어로 상대에게 모욕을 주는 걸 즐긴다. 그는 한마디로 약자가 강자에게 당하는 걸 보면 약자의 무능을 탓하는 성격이다. 그럼에도 명석한 두뇌와 부유하지만 잘난척하지 않고 나름 털털한 이미지에 지역에서 존재감은 그의 재산을 능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지성과 서글서글함, 젠체하지 않는 소탈함, 공평무사함과 같은 것들에 관하여, 물론 그들은 필의 벤조 연주 실력과 명랑한 휘파람, 소년 같은 장난기, 그가 붉게 트고 흉터 투성이인 억센 손으로 만든 작품들 또한 기억했다. p.356






해마다 대목장의 소떼를 팔기위해 이동할때면 필과 조지를 필두로 고용된 카우보이들이 따라 나선다. 열차에 1000마리 가량의 소떼를 싣기위해 이동하는거다. 인근에 도착하면 기다리면서 연례행사처럼 만찬을 즐기고 술집도 들른다. 그러기를 수십년.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술도 거의 마시지 않고 자신의 카우보이들이 즐기는 걸 바라보는 냉혈한 필에게 이 지역에 온지 얼마 안된 눈치없는 의사가 그만 술에 취해 필에게 이러쿵 저러쿵 장광설을 풀어놓은 것이다. 술에 취한 걸 딱 질색하고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말 거는 것도 거슬려 하는 필은 사람들 앞에서 그의 셔츠를 찢고 걸레 뭉치처럼 벽에 던진다. 이런 일을 감당할 만한 배짱을 가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국 가난했지만 선량했던 모욕당한 의사는 하루하루 마르고 말 수가 없어지더니 얼마후 목을 매어 자살한다. 그 끔찍한 상황을 그의 아들이 발견한다. 아들은 소란 스러웠던 술집의 '비극'도 목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 오래된 말이지만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기이한 인연이 이어져 동생 조지와 죽은 의사의 아내가 눈이 맞아 부부가 된다. 그리고 버뱅크 목장으로 들어와 그녀의 아들도 이곳에서 함께 살게 된다. 의사가 자기 때문에 자살했다는 사실을 아는 필은 당연히 동생이 의사의 미망인과 결혼하는게 못마땅하다. 게다가 돈을 보고 그 여자가 들어왔다고 믿는다. 그래서 로즈를 로즈만 빼고 누구도 모르게 괴롭히고 경멸한다. 로즈는 시아주버님의 피말리는 시월드를 경험하며 하루하루 멘탈이 붕괴된다. 엄마가 괴로워하다 알콜에 빠지게 된 사실을 알게 된 아들 피터. 

4살때부터 글을 읽었고 심심풀이로 아버지의 의학서적을 읽다 지금은 의사를 꿈꾸는 피터는 아버지의 유언이 된 말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걸림돌'을 치우게 된다. 어떻게 치우는 지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읽어보시기를!




자신의 감춰진 비밀 때문에 경멸당할 것을 두려워해 오히려 평생 타인들을 경멸하는 필, 그는 예리한 지성을 가졌지만 그에게 모욕당했던 의사의 아들은 더욱 뛰어났다. 복수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흥미롭다. 그리고 역시 사랑은 뜨겁게하고 복수는 차갑게 해야 한다. 이 작품은 베네딕트 컴버베치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소설을 다 읽기도 전에 궁금해 먼저 보게됐다. 개인적인 생각에 역시 원작에 미치지는 못했다. 소설에서는 필만큼 의사의 아들 피터의 상황도 디테일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영화는 아마도 몸값 때문인지 필로 분한 컴버베치에 과몰입되어 있는 인상이다. 그러다 보니 맥락이란 스타킹에 구멍이 숭숭 나 있어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들은 대체 그 구멍을 어떻게 매꿀지 내가 다 걱정이 된다 .(정작 나도 아들 피터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구나. 스포가 될까바 그런거라고 우겨본다.)


그러나 필은 알았다. 뼛속 깊이 잘 알았다. 추방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그래서 그는 세상을 혐오했다, 세상이 먼저 그를 혐오했으므로.p.348


놀랍게도 이 이야기는 작가 토머스 새비지의 자전적 삶을 옮겨놓았다. 물론 그가 영화처럼 실제로 복수를 감행한 것은 아니다. 그랬다면 그는 자칫 작가가 되지 못하고 감옥에 오래 있었을지 모른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복수를 소설로 감행하는 것도 나름 달콤한 방법인듯 싶다. 어떤 방법이든지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작의 공간이란 얼마나 광활한가! 새삼 소설의 기능에 감탄하며 여운을 곱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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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kang1001 2022-03-09 13: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이달의 리뷰에 당선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청아 2022-03-09 13:15   좋아요 2 | URL
예! thkang님 감사해요~♡🤭

러블리땡 2022-03-10 00: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청아 2022-03-10 00:22   좋아요 2 | URL
러블리땡님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scott 2022-03-10 23:2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미님 뛰어난 리뷰!
당선 추카 합니다!
건강은 많이 나아 지셨나요?

청아 2022-03-10 23:59   좋아요 1 | URL
네~♡ 스콧님. 덕분에 많이 좋아졌어요. 안그래도 잘 못썼는데 쉬었더니 갈수록 더 안써집니다.😅

페넬로페 2022-04-06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읽고 영화보고 다시 왔습니다.
미미님 리뷰 읽을 때 제목을 까먹었는데 소설 다 읽고 딱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가 생각나더라고요.
다시 와서 보니 그 말이 제목으로 있네요 ㅎㅎ

청아 2022-04-06 14:07   좋아요 1 | URL
페넬로페님 이 영화 보셨군요~^^♡ 이 책은 소설과 영화 다 봐야하는 작품같아요. 제인 캠피온 감독이 원작을 읽게끔 영화를 만들었단 생각도 들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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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는 칭얼대지도 보채지도 않고부모가 쥐여 주는 장난감을 고분고분히 갖고 놀았다. 아이는 따돌림이 무엇인지 일찌감치 깨닫고는, 모든 것을 다 보는지 아니면아무것도 안 보는지 알 수 없는 우묵하고 무감정한 눈으로 삶을관조했다. 공놀이에는 절대 끼지 않고 책 읽기와 고독을 즐겼으며, 햇빛을 끔찍이 싫어해서 볕에 나갈 때면 언제나 일단 멈춰 서서 눈을 찡그리고 눈썹 위로 손차양을 했다.
- P48

아들의 습관적인 고립이 어쩌면 의사나 과학자의 무심한 태도가 아니라 신비주의자나 사제의 내적 침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충격을 받았다. 아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그는 불경하게 들리는 자신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피터?"
"금방 들어갈 생각이었어요." 태연한 목소리였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구나."
"관찰하고 있었어요."
"관찰하다니, 뭘?"
"달을요."
- P50

닭장의 닭들이 불구이거나 별난 구석이 있는 동족을 죽을 때까지 쪼아 대듯이, 동급생 아이들은 피터를 괴롭히고 조롱하고 암사내라며 놀려 댔다. 독기를 품은 그 말은 피터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녔다. 그러나 피터가 아이들에게 덤빈 적은 아버지가 주정뱅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뿐이었다. 

피터보다 몸놀림이 날쨌던 또래아이들은 슬쩍 피했다가 피터를 둥그렇게 에워싸고 서서는, 신이나서 눈을 반짝이며, 모질게 파고드는 ‘이‘ 소리를 똑같은 입모양으로 발음했다. 피터는 알았다. 그 아이들의 아버지들도 그리고할아버지들도 일찍이 또 다른 원을 이루고 서서, 누군가 다른 외톨이를, 다른 괴짜를 괴롭혔으리라는 것을, 그 아이들의 아이들도장차 똑같은 원을 이루고 서리라는 것을.
- P50

그렇게 아이들을 찬찬히 돌아보며 피터는 노회한 늙은이에게나 어울릴 지혜를 터득했다. 그들을 대적할 때에는 자신의 방식대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방식이 아니라, 피터가 깨달은 또 한 가지는, 지금 느끼는 이 새롭고 차갑고 불편부당한 증오의 표적이 단지 눈앞의 아이들만이 아니라 평범하고 부유하고 남부러울 것 없이 안온하게 살아가는 자들, 그러면서 그가 남몰래 그리는 ‘고든‘이라는 성의 이미지를 감히 더럽히려 드는 자들 모두라는 사실이었다.
- P51

 그렇게 피터는 가족의 좌절과그칠 줄 모르고 흐느끼는 바람 소리에 맞서 꿈의 책을 지었다. 그것은 도래할 세상의 청사진이었다. 피터는 훌륭한 외과 의사가 되어 그 세상을 불러올 사람이었다. 그 세상이 오면 그는 프랑스의학자들 앞에서 논문을 발표하고, 모르는 사람들이 그의 아름다운어머니와 상냥한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동안 옆에 조용히 비켜서 있을 터였다.
- P52

"어이구, 우리 아들이야 당연히 훌륭한 의사감이지." 조니는혼자 앞날의 계획을 세우며 그렇게 말했다. "애가 평소에 책을 어떻게 읽는지 알아? 눈도 깜빡이질 않아. 당신도 눈치챘어? 바로그거야, 부릅뜬 눈, 우리 아들은 사실을 사랑해."
- P55

피터는 정말로 사실을 사랑해서, 자기 방에 틀어박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읽었다. 열두 살에 이미 베살리우스의 해부학 그림을 베껴 그렸고 히포크라테스와 베르길리우스의 책, 또 아버지가 이제는 포장도 뜯어보지 않는 의학 저널도 띄엄띄엄 읽었다.
- P55

그러나 잠에서 깬 조니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볼 뿐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이번에는 로즈가 남편에게술을 한잔 마시라고 권했다. 로즈의 남편은 위스키가 고통을 없애준다는 말을 자주 했고, 지금 그는 고통 속에 있었으므로.

(또 위스키다ㅎ) - P63

"그림이에요. 아버지."
아버지라, 조니는 속으로 생각했다. 맙소사, 얼마나 무거운말인지, 얼마나 무거운 책임인지. 그렇게 생각하며 그림을 받아들었다. 그림은 다 해서 열 장이었고, 모두 강가에 자라는 식물의뿌리 구조를 그린 것들이었다. 조니는 눈을 감고 입술을 지그시물었다. 이토록 훌륭한 그림이라니, 여기에 비하면 그 자신의 솜씨는 얼마나 형편없던가! "정말로 자랑스럽구나. 나는 이렇게 잘그리질 못했는데."
- P64

어느 늦은 가을날 오후, 눈을 몰고 올 찬 바람의 냄새가 강렬할 무렵, 조니는마을 뒤편의 산속에 왕진을 다녀왔다. 그곳에 사는 임신부에게서사산된 아기를 받고 오는 길이었다.

운 좋은 아기야, 운도 좋지. 조니는 생각했다. 그 아기는 결코좌절할 일도, 냉혹한 자연의 섭리 앞에 두려워 떨 일도 없었다. 약한 자가 강한 자에게 무너지는 그 섭리 앞에. - P65

피터가 벽을 따라 달아 놓은 선반들은시커떻고 묵직한 조니의 의학 서적 때문에 아래로 살짝 처져 있었다. 선반 위에는 박제한 땅다람쥐와 토끼 외에 비커와 증류기 같은 화학 실험 기구도 함께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피터는 학교에서 겪는 나날의 수난으로부터, 아이들의 조롱과 험담으로부터 벗어나 안식을 얻었다. 그곳에서 의심할 것 없는 자신만의 세계에빠져들었다. 창고에 있는 자기 책상 앞에 앉아 있을 때 피터의 눈은 내면을 향했다.  - P66

피터는 남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 주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어머니에게만은 예외였다.
- P76

예전에 이곳에 출몰하던 주정뱅이는 양치기였다. 그 양치기는 암캐 한 마리를 술집에 데리고 들어왔는데 필은 인간들이 있는집에 짐승을 들이는 짓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 암캐는 양치기의발치에 엎드려 코를 킁킁대다가, 고개를 들어 주절주절 떠드는 주인의 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얼간이는 사람들의 귀가 욱신거릴 때까지 자기 개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그 암캐가 얼마나 영리한지, 얼마나 빨리 달리는지, 얼마나 날쌘지, 얼마나 믿음직한지,
얼마나 고분고분한지, 그리고 정말이지 얼마나 귀여운지도.
- P78

기억 속의 미서 전쟁 무렵, 미국과 에스파냐가 쿠바에서 전쟁을 하던 지난 세기 끝 무렵에 그는 얼마나 되바라진 소년이었던가. 그때는모든 도시의 모든 공원에서 관악대가 군가를 연주했고,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에는 어김없이 불꽃놀이 축제가 열렸다. 지나가 버린, 자랑스러운, 숨을 거둔 시절이었다. 그의 눈길이 브롱코 헨리에게 처음으로 머물렀던 때도 그 시절의 어느 날이 아니던가?
- P89

목장 저택 앞의 언덕에 점점이 드러난 바위에서, 언덕 자락을 여드름처럼 흉하게 뒤덮은 세이지브러시 덤불에서, 그는 질주하는 개의 놀라운 형상을 보았다. 개의 날씬한 두 뒷다리는 튼튼한 양어깨를 앞쪽으로 떠밀었다. 더운 김을 뿜으며 아래로 수그린 주둥이는 북쪽 산의 골짜기와 능선과 산그늘로 도망 다니는 겁에 질린 어떤 것 - 어떤 생각 — 을 쫓고 있었다. 그 추적이 어떻게 끝날지 필은 머릿속으로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개는 먹잇감을붙잡을 운명이었다. 그는 눈을 들어 산을 보기만 해도 그 개의 숨결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개가 그토록 또렷이 보이는데도 그 형상을 알아본 이는 필 말고는 딱 한 사람뿐이었고,
조지는 결코 그 한 사람이 아니었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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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2-16 00: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단은 개의 모습을 한 풍경을 묘사한 것 같네요.
잘읽었습니다.
미미님, 오늘은 정월대보름날입니다.
보름달 사진을 찍어왔으니, 구경오세요.
올해도 건강하고 행복한 한해 되세요.^^

청아 2022-02-16 08:24   좋아요 1 | URL
네~♡ 지금 달려갑니다ㅎㅎ

2022-02-16 08: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2-16 09: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름다움"은 마음 저 깊은 곳, 성이 자존심과 어우러지는 곳에살며 계속 외부에서 부여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든 거두어갈 수 있는 것으로 편리하게 정의된 까닭에, 여성에게 못생겼다고 말하면 정말못생긴 느낌이 들어 못생긴 것처럼 행동할 수 있고, 자신이 경험하는한에서는 자신이 정말로 못생겼을 수 있다.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면
상처받지 않았을 곳에서 말이다.
- P70

크래프트가 소송에서 진 날 섹스 산업 바깥에서 여성, 일, "아름다움"이 융합되어 한층 광범위한 질병의 순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때 여성들은 그런 일이 내게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 하고 자신에게말했을지도 모른다.
- P71

미국 법은 어떤 여성도 "올바로 보여" 재판에서 이기지 못하도록 법적 미로를 만들어 권력구조의 이익이 보호되도록 발전했다. 세인트 크로스는 너무 "늙고", "못생겨서" 직장을 잃었고, 크래프트는 너무 "
고", "못생기고", "여성스럽지 않고, 옷을 올바로 입지 않아서 직장을잃었다. 그래서 어쩌면 여성은 자신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예쁘게보이고 여성스럽게 입기만 하면 고용 분쟁이 벌어졌을 때 자신에게 공정할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 P72

아름다움이 성희롱을 유발한다고 법은 말하지만, 무엇이 성희롱을유발하는지를 결정할 때 법은 남성의 눈으로 본다. 
⭐⭐⭐ - P82

여성의 외모가 해고와 성희롱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는 탓에, 여성이 옷으로 말하는 것이 지속적 의도적으로 잘못 읽히는 것이다. 

여성이 일할 때 입는 옷(머리와 유방, 다리, 엉덩이는 물론이고 하이힐과 스타킹, 화장, 보석까지)이 이미 포르노의 액세서리로 전용된 탓에, 판사가 어떤 여성이든 젊은 여성은 희롱해도 좋은 방종한 여성이라고 믿고, 나이 든 여성을 보면 해고해도 좋은 보기 흉한 노파라고 믿을 수 있는 것이다.
⭐⭐⭐ - P83

남성은 유니폼을 입고 여성은 유니폼을 입지 않은 결과, 여성이 직장에서 육체적매력으로 즐거움을 주는 일뿐만 아니라 그에 따른 처벌도 온전히 떠맡아 합법적으로 처벌받거나 승진할 수도 있고, 모욕을 당하거나 강간을당할 수도 있게 되었다.
- P83

직업에 필요한 아름다움이라는 자격 조건은 최근에 기회평등법으로 위협받게 된 착취의 근거를 다시 고용 관계 속에 슬그머니 밀어 넣는 작용을 한다.  - P87

 돈은 성보다 역사의 임무를 훨씬 효과적으로 수행한다. 여성의 자부심이 낮은 것이 어떤 남성 개인에게는 성적 가치가있을지 몰라도, 사회 전체에는 금전적 가치가 있다. 오늘날 여성의 신체적 자아상이 부정적인 것은 성별 경쟁의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시장의 요구에 따른 결과다.

⭐⭐⭐⭐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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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5 11: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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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15 1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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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묶기를 맡은 필의 동생 조지는 형의 충고에 얼굴을 붉혔다. 형이 삯일꾼들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해서 더 부끄러웠다. 조지는 퉁퉁한 몸집에 무뚝뚝하고 점잖은 사내였고, 필은 그런 동생을갈구는 것이 즐거웠다. 아무렴, 남을 갈구는 것이야말로 필에게는 사는 낙이 아니던가! - P12

 욕구에 초연한 필을 일꾼들은 얼마나 우러러보았던가!  - P14

"나 같으면 그렇게 안 웃을 거요, 선생." 화이티가 툭 던지듯말했다. "필은 선생 같은 사람은 한 쉰 번쯤 너끈히 샀다가 팔았다.
가 할 양반이오, 이 협곡 일대에서는 자기 동생 빼고 아무라도 그렇게 할걸. 나는 필이 우리 가게 의자에 앉는 것만으로도 자랑스럽다고, 아주 어깨가 다 으쓱해." 싹둑 싹둑 싹둑. "필하고 그 동생은 짝꿍 같은 사이요."
- P15

필은 둘이 함께 알던 친구들에게 자기가 무슨 장난을 쳤는지 떠올리곤 했다. 짓궂은 해코지였다. 필은 머리가 비상한 학생, 조지는 느리지만 꾸준한 학생이었다.
- P15

필과 달리 조지는 독서가가 아니었다. 조지에게는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같은 주간지 정도가 한계였다. 무슨 어린애처럼, 조지는 동물이나 자연을 다룬 이야기에서 감동을 받았다.
필은 아시아》나 《멘토》,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같은 교양 잡지와 동부의 고상한 친척들이 크리스마스에 여남은 권씩 보내주는여행서 및 철학서를 읽었다. 

필은 예리하고 예민하고 호기심이 강한 정신 — 명철한 정신 —— 의 소유자였기에 소를 사러 온 상인이나 외판원을 당황케 했다. 그들은 필처럼 옷을 입고 필처럼 말하는 사람, 필 같은 머리와 손을 지닌 사람은 틀림없이 어리석은 까막눈일 거라 지레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필을 잘 모르던 사람들은 그의 습관과 외모 덕분에 귀족에 대한 자신들의 선입견을고쳐 자기 멋대로 사는 귀족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 P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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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2-02-14 2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제인캠피온 감독 영화 원작이군요.
내용을 잘 몰라서 책소개 읽고 왔는데, 인물 사이 복잡한 느낌이
우리 나라 아침 드라마의 불편한 사이 같아서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근데 이 책을 찾아본 건 인용된 문장 첫번째의 ˝소 묶기˝가 낯선 단어라서 였어요.
잘읽었습니다. 미미님, 좋은하루되세요.^^

청아 2022-02-14 21:45   좋아요 2 | URL
1000마리 넘는 소 농장을 운영하거든요.
1900년대 카우보이 복장 을 한 이미지예요^^* 영화랑 비교해 봤는데 소설이 더 재밌는것 같아요^^* 서니데이님도 굿밤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