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돌베개인문.사회과학신서 50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198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강추!! [서평] 박세길 저 <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를 읽고 / 2012. 2., 303쪽, 돌베개)

외세에 대한 의존, 민주주의와 상식의 실종, 헌법 유린, 기득권끼리 장난치는 정치, 공직자들의 파렴치, 95% 가까운 국민의 민생파탄, 분단체제의 고착화, 남북화해와 평화와 통일에 대한 혐오...
이 모든 것들이 일제 강점 후 100년이 지나서도, 해방 후 68년이 지나서도, 한국전쟁 종료 후 65년이 지나서도, 1987년 6월 항쟁 후 26년이 지나서도 계속되고 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외형적인 민주적 절차와 경제규모는 OECD 10위권으로 인정받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의 내실과 국민들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근혜 정권의 안하무인을 목격하면서 드는 질문이었다.
나는 그 이유를 한국현대사에서 찾아보기 위해 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1945년 해방에서 1950년 6월 한국전쟁 직전까지 다룬 한국현대사 1편은 2013년 한국사회의 뿌리를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기존의 편견과 상식과 제도권 정보에 의존했던 기억과는 달리 해방 후 5년간 한반도에서는 아주 잠깐의 희망과 열정, 그리고 그 뒤를 이은 5년간의 끔찍한 학살과 탄압과 파괴가 이어졌던 것이다.

저자는 방대한 기초자료와 언론기사, 증언과 인터뷰 등을 취합하여 한국현대사를 새롭게 재조명하였다. 일제의 식민사관이나 친일파 출신의 국사편찬위원회, 제국주의자 미국의 관점이 아닌 오로지 한민족과 민중의 관점에서 기존의 사건과 사실을 재발견하고 재해석했다.

저자의 결론은 한민족과 민중 스스로의 일제로부터 해방과 통일된 자주독립, 평등평화 국가를 수립할 수 있었음에도, 미군정의 군화발과 친일파들의 부역 아래 아래 한민족과 민중의 염원은 처절하게 꺽여나갔던 것이다. 한민족과 민중은 해방 후 5년 동안 자주독립과 평화통일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미군정과 친일/친미파 앞잡이들과 끝없는 항쟁을 이어나갔다는 것이다.
나 역시 책을 덮은 후 저자의 결론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친일과 사대주의, 부정과 부패의 뿌리는 오래 전부터 자라나고 있었고, 도려내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현대사 1편을 읽고 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하게 된다. 좀 더 자세한 정리내용은 개인 블로그(http://blog.daum.net/hy2oxy/8691548)를 참조하면 유익할 것이다.

1. [일제의 강제 공출과 징용]
100년~70년 전의 일이지만 다시금 일제의 만행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일제는 식민지 침략 후반부터 100만명 이상의 조선인을 강제로 징용하여 일본 내륙과 동남아, 태평양 지역의 식민지에 보내 노동력을 갈취하고 학살하였다.

"일제는 군량미 조달 목적으로 조선 전역에서 강제적인 공출을 실시하였다. 이 공출제도에 의하여 쌀 생산고의 43.1%(1941년), 45.2%(1942년), 55.7%(1943년)가 강탈되었으며 1944년에는 63.8%에까지 이르렀다."(p.17)

2. [일제 강점기 국내외 항일 투쟁]
8.15 해방이 '외세에 의한 일방적인 해방'만은 아님을 이제 조금씩 깨닫게 된다. 억지 논리와 자기세뇌가 아니라 드러난 수치와 기록과 흐름으로... 저자가 전해주는 식민지 시대의 각종 수치와 통계는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이 땅의 민중들과 독립투사들이 국내외에서 항일 투쟁과 생존권 투쟁을 끊임없이 진행했음을 알려준다. 한민족은 일제와 싸운 전세계 민주진영의 한 축이었다.

"1945년을 맞이하여 중국의 중경에서는 김구가 지도하는 임시정부의 하부 조직으로서 '한국광복군'이 조지괴어 한반도 진공을 위한 맹훈련에 돌입하고 있었고, 만주 일대에서는 소부대 항일 무장단체가 계속적으로 국경 주위에 출몰하여 일제의 후방을 교란하였다.
또한 중국 연안에서는 1942년 '조선독립동맹'이 조직되어 화북 일대에서 일본군과 항전을 전개함과 동시에 역시 국내 진공을 꾀하고 있었으며, 국내에서도 1944녀누8월 여운형의 지도로 서울에서 비밀리에 '건국동맹'이 결성되어 국외에서 독립을 꾀하는 조직과 연락을 계속 취하면서 해방을 맞을 날을 적극 준비하였다.[한국의역사, 조선사연구회 엮음]"(31~32)

3. [8.15 해방을 준비한 한민족의 활동]
해방 후 한반도에서 벌어진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활약은 한민족과 민중에 대해 굉장히 놀랍고 존경스러운 모습이었다. 21세기가 도래한 현재에도 제대로 조직하지 못하고 있던 수준을 해방 후에 한 달 만에 달성했다는 것은 저자의 주장대로 일제의 폭압 속에서도 한민족과 민중은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면서(굳이 예건하지 않더라도) 비밀리에 엄청난 의식화와 조직화를 준비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하여 총독부로부터 사실상 항복을 받아낸 가운데에서 극히 신속하면서도 광범위하게 건국준비위원회가 도처에서 결성되어 갔다. 그리하여 8월 말 경에는 전국적으로 145개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부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건국준비위원회는 지방 수준에서부터 인민위원회로 신속히 전환하여 갔고, 북측의 상당 부분과 남측의 일부 지역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해당 지역의 민중의 손에 의해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인민위원회는 남쪽은 말할 것도 없고 북쪽에서도 대부분 소련군이 진주하기 이전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게 민중들의 자발적인 건국사업을 바탕으로 하여 드디어 1945년 9월 6일 전국에서 모인 1,000여명의 민중 대표들이 서울에서 회합, 역사적인 '조선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선포하였다."(p.34~37)

4. [해방 후 미군은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
그간 한국의 제도교육과 주류 학계, 언론에서 일방적으로 던져주던 정보와 달리 해방 후 미군과 소련군, 특히 미군은 일제의 총독부를 대체하겠다는 입장이 명확했다. 즉 미군은 해방자가 아니라 일제를 대신한 점령자, 군사통치였던 셈이다.
1910년 일제의 한반도 합병은 강박에 의한 '강점'이었다. 일제의 패망 이후 선택은 한민족, 민중 스스로 하는 것이지, 일제의 식민지를 미국이 양도받겠다는 것 그리고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존속시키는 조치는 우리 민족에게 치욕이자 분노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일본의 8.15 항복 선언 이후) 일본과의 전쟁에서 얻어낸 정치적 소득을 규정지은 '일반명령 1호'를 공표하였다. 이 명령은 모든 작전지역에서의 일본군은 연합국의 항복 접수에 협력할 것과 무엇보다도 (조선, 필리핀 등)해당 지역의 승인받지 못한 무장 저항단체에 항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지시하고 있었다. 즉 맥아더가 선정하는 정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세력에게 이양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한국현대사의재조명, 조이스 콜코/서대숙]
8월 14일 청진과 나남에 소련군이 상륙하였으며 16일에는 원산에서 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이러한 소련군의 진공 추세에 비추어 볼 때 한반도 전체가 소련군에 의해 장악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였다.
당시 미군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부대가 한반도에서 600마일 이상 떨어진 오키나와 주둔 미군이었다. 이러한 상태에서 미국은 한반도 내에서 향후 자신의 지위를 보장받기 위하여 38선을 경계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할 것을 소련에 제의하였고, 소련은 미국의 제안을 별다른 반대 없이 받아들였다. 서울에 진출한 소련군은 그 즉시 38선 이북으로 되돌아갔다.
훗날 미국 의회에서 국무성 딘 러스크 대령은 미국이 38선을 제안한 것은 '서울을 미군의 점령 하에 두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증언했다."(p.42~43)

5. [해방 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의 행보]
미 군정은 애초부터 한반도 민족을 일제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괌이나 필리핀을 스페인 전쟁의 '전리품'으로 취득한 것처럼 일제와의 전쟁의 전리품으로 한반도 남단을 자신들의 식민지 확충의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다만, 괌이나 필리핀과 한반도 남단이 다른 것은 한반도 북단에 존재하는 소련 때문에 국제사회의 눈치를 봐야하는 것과 한반도의 민족과 민중들이었다.
미국 내 군국주의, 제국주의 세력들의 식민지에 대한 탐욕과 삐뚤어진 태도와 불합리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가, 그들의 매카시즘이 한반도에도 확장된 셈이다. '반공주의'에 눈이 어두워 진실이 무엇인지, 정의가 무엇인지 바라보지 못하는 태도는 21세기 한국에서도 똑같은 '반공주의'와 조금 다른 '종북'이란 이름으로 여전하다.

"9월 9일 서울에 진주한 24군단의 하지 중장과 아베 총독이 조선총독부 회의실에서 항복 조인식을 가졌다. 때맞추어 총독부 건물에 게양되어 있던 일장기는 내려지고 그 대신 성조기가 높이 솟아올랐다.
미군정은 과거 일본 총독부의 지위와 체계를 그대로 인수하였다. 총독부 일본인 관리들도 상당 기간 그대로 유임되었고 이후에는 자문역할로서 미군정을 보좌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항복 조인식은 일본 식민 통치의 근본적 해체가 아니라 통치권을 일본에서 미국의 손으로 이양하기 위한 절차라고 해도 조금도 틀린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절차를 거친 미군정은 그 즉시 자신만이 한반도 남단의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하였고 그에 따라 (한민족과 민중이 스스로 구성한) '인민공화국'은 간단히 부정되었으며 궁극적으로 미군정의 무력에 의해 분쇄되었다."(p.47~48)

6. [한반도 점령 후 미 군정의 통치방식]
미 군정이 한반도의 해방군, 해방자가 아니라 일제 강점 지배를 이은 미제 강점임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두 가지다. 제도와 사람.
미 군정은 일제가 공포, 시행하던 식민지 법과 제도를 그대로 시행하여 한반도 남단이 자국의 군사적, 경제적 식민지임을 만방에 과시하였고, 미 군정청과 경찰에 이어 국방경비대의 수뇌부에 일본군 말단 장교와 친일파들을 기용함으로써 한반도 남단의 민족과 민중들의 염원인 식민지 청산과 매국노, 친일파 청산을 가로막았다. 가로막기는 커녕 그들을 부활시켰고, 더 강력한 지원자와 배후로 버틴 셈이다.
일제의 동양척식회사보다 더 거대한 자산을 신한공사 명의로 탈취한 미 군정은 일제보다 더 거대한 식민지 통치자인 셈이었던 것이다. 일제든 미군정이든 한민족과 민중이 한반도를 점령해 달라고 식민지로 통치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몇십, 몇백 명의 매국노, 친일/친미파, 사대주의자들 말고는...

"미 군정은 스스로를 일본의 총독부와 동일시했고 일본이 이 땅 위에 설치해 놓은 모든 기구를 고스란히 인수하여 다시 사용하였다. 친일 경력이 분명한 자들이 미 군정의 주위에 포진하였고 반봉건적인 지주 소작관계는 근본적 개혁 없이 계속 온존되었으며 억압적 식민 통치 체계 역시 그 완교한 생명력을 유지해 나갔다. 미 군정에 협력했던 대표적인 세력 중의 하나는 친일지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한민당이었다. 또한 미 군정은 영어를 사용할 줄 아는 한국인들을 우선적으로 고용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부유한 지주계급 출신이었다.
우선, 미 군정은 치안유지의 문제를 과거 일본인들이 만들어 놓은 경찰 기구를 그대로 인수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이러한 미 군정 정책의 결과 경찰 간부의 8할은 과거 일제의 주구 노릇을 하던 자들로 채워졌으며 특히 그 중에는 북의 친일파 처벌을 피하거나 ?i겨 내려온 친일파 중 상당수가 포함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경찰의 횡포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극심하였다. 경찰의 창설과 더불어 더불어 그 활동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온갖 파쇼적 법령체계가 난폭스럽게 등장하였다. 1945년 11월 2일의 군정법령 21호는 다음과 같다. '앞으로 새로운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혹은 앞서 폐기된 것이 아닌 모든 현행 법과 과거의 총독부가 공포한 규정, 명령, 지시 및 각종 문서들 중에서 1945년 8월 9일까지 유효했던 것은 합법적 당국(미 군정)에 의하여 폐기될 때까지 계속 발효한다.'
이리하여 1908년의 군사법령, 1910년의 정치집회금지법, 1936년의 선동문서통제령, 심지어는 1907년의 치안유지법 등 악명 높은 일제 시대 법률들이 그대로 효력을 유지하게 되었으며 경찰 총수 조병옥은 이러한 맥락에서 1912년에 제정된 일본 법률을 근거로 1946년 가을 무렵에 독립군과 애국자들에 대한 대량 예비검속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태는 적어도 1948년 4월 8일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물론 그 이후에는 더욱 가혹해졌다."(p.61~62)

7.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진실과 거짓]
한국인들은 해방 후 신탁통치 관련 내용에 있어서도 친일파 관료와 정치인, 교육자, 지식인들에게 철저하게 속았다. 미국과 친일수구세력의 언론 조작과 허위선동은 이미 미국이 한반도를 점령하면서부터 시작되었고,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뿌리는 속일 수 없다"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당시 조건에서 한민족의 통일독입국가 수립에게 가장 최선의 방안이었고, 교과서와는 달리 대부분의 독립세력과 민주세력, 민중들은 환영했다. 모스크바 결정 과정과 내용을 왜곡,조작하고 이를 이용해 독립,민주세력을 공격한 자들은 미 군정과 한 줌 친일파였다.

"해방된 조선을 분열시키기 시작한 신탁통치는 최초에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구상되었다. 루즈벨트는 테헤란과 얄타회담 등 연합국 수뇌가 회동한 자리에서 한국(조선)에 대해, 최고 30년에 이르는 신탁통치의 실시를 제안하였다.[한국분단사, 조순승]
미국은 자신을 포함하여 소련, 영국, 중국 등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실현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한반도를 자신의 수중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왜냐하면 영국과 중국(당시 장개석 정부)은 미국의 동맹국이면서 영국은 동아시아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중국은 미국에게 예속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소련이 반대하더라도 숫적으로 고립됨으로써 신탁통치의 주도권은 미국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러한 맥락에서 신탁통치는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는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미국이 차지할 수도 있는 방안으로 등장했다.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소,영 삼상회의에서 미국은 이러한 기대를 그대로 드러냈다. 회담에서 미국은 본격적인 신탁통치 체제가 수립될 때까지 조선을 미,소 양군 사령관을 우두머리로 하는 단일정부를 설치할 것을 제안했다. 조선인은 단지 행정관, 고문관, 조언자의 역할이었고 그 기간에 단일 민족정부를 수립한다는 조항은 전혀 없었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조선 민중의 공통된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임시 조선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긴급함을 밝히고 가능한 한 속히 장구한 일제 식민통치가 가져온 참담한 결과를 청산할 것을 요구하는 귀절을 협정의 최종안에 삽입하도록 압력을 가했다.[한국분단사, 조순승]
다음으로 미국은 미,소,영,중 대표들로 구성된 행정부가 신탁통치 기간에 입법, 사법, 행정에서 전권을 행사하도록 짜여져야 하며 그 기간을 5년으로 하되 10년으로 연장할 수 있고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련은 이 기간에도 임시 조선정부가 주권을 행사하도록 하고 4개국은 단지 조선의 독립과 민주적 발전을 위해 필요한 제반 원조를 하는 후견적 위치에 머물러야 하며 기간은 5년 이내로 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후견제 실시 여부도 임시정부와 미소 공동위원회의 협의를 거쳐 최종 결정할 것을 요구했다.[한국분단사, 조순승]"(p.53~55)

8. [해방 후 미 군정 독재에 대한 민중항쟁]
해방 후 항일 투쟁세력과 민중들의 대중조직의 즉각적, 전국적 조직화를 살펴보거나 처음에는 미 군정의 활동을 지켜보다가 1946년 초부터 미 군정의 본질을 깨닫고 항거와 항쟁을 이어나간 남한 민중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달리 잘 조직되었고 민중들의 자유와 평등, 통일 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해 처절하게 싸웠다.
미 군정은 일제 총독부의 관리를 군정청에 고용하고, 총독부 경찰을 미 군정의 보호 하에 경찰로 변신시키고, 일본군과 만주군 전력자를 군대로 변모시키고, 친일 부역자들에게 일제 자산을 불하함으로써 민족반역자들을 미 군정의 통치기구에 이용함으로써 민족반역자를 처단해야 하는 한반도의 과제를 가로막은 것이다. 이승만이나 한민당은 미 군정의 앞잡이이자 괴뢰일 뿐이었다.

"1945년 11월 초 전국의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이 결성되었다. 전평은 1946년 2월에 이르러 조합원 수가 57만명에 달하는 규모에 이름으로써 사실상 전국의 노동자 대부분을 조직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곧이어 1945년 12월 8일, 당시 가장 많은 인구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을 조직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서울에서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의 결성대회가 개최되었다. 전농이 발표한 조직체계와 가입원 수는 전국 13개 도 연맹, 군 단위에 188개 지부, 면 단위에 1,745개 지부가 있으며 조합원 수는 약 330만 명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밖에도 전국청년단체총동맹, 전국부녀총동맹, 조선문화단체총동맹, 학병동맹 등 다양한 대중단채들이 광범위하게 건설되었다.
청년단체는 1945년 12월 초 전국 13도의 2,397개 단체 72만 3,305명 회원의 대표 639명 중 602명이 참가, 결성했다. 부녀동맹도 1945년 12월 80만 명의 회원을 대리하여 대표자회의를 통해 결성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성된 각종 민주적 대중단체들은 일부 정당과 손잡고 상설적인 공동전선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1946년 2월 15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결성대회를 가졌다. 주 구호는 '주장하자 인민의 권리, 건설하자 민중의 국가' 기본 노선은 1. 조선의 모든 애국적 민주세력의 공동전선 2. 제국주의 침략세력과  그 하수인 격인 일체의 매국 도당에 대한 공동의 투쟁기관 3. 자주적이며 민주적인 통일정부를 위한 공동의 준비기관[연표한국현대사, 김천영]
이상과 같이 단기간 내에 광범위한 대중단체가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지난날 숱한 고난 속에서도 꺽이지 않고 지속되어온 항일 투쟁의 뚜렷한 성과물이었. 또한 각 단체의 강령을 통해 표현되고 있듯이 당시의 한국 민중은 자신들이 쟁취해야 할 목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듯 한국 민중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 나가기 위하여 조직적, 의식적 준비를 해 나가는 가운데, 미 군정에 의해서 강요되어지던 온갖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파탄은 필연적으로 대규모 민중항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P.72~74)

9. [미소 공동위원회의 파탄과 민중들의 염원]
미 군정이 모스크바 협정과 미.소 공동위원회를 파탄으로 몰고가는 상황은 한반도만의 상황으로 전후관계를 분석하기에는 어려울 것이다. 저자의 말대로 1947년 봄 '트루만 독트린' 등 미국의 대외 군사외교정책이 '소련과 중국 봉쇄'로 구체화되면서 미국 정책을 극우보수세력이 지배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으니까.
처음 한반도에 상륙한 미국은 한반도를 일제의 '식민지 전쟁 전리품'으로 그냥 낼름 먹으려고 시도한 것이다. 하와이나 필리핀처럼. 그럼에도 미국측이 식민지 통치 -> 30년간 신탁통치 -> 10년간 신탁통치 -> 임시정부 선 수립 -> 일제 잔재 청산 등으로 계속 탐욕을 줄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반도 민중들의 가열하고 단결된 투쟁과 소련의 견제 때문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모스크바 삼상 협정에 의해 개최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1946년 3월부터 3개월간, 1947년 5월부터 3개월간 진행되었으나, 모스크바 협정을 극렬 반대하는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단체를 한반도 사회단체에서 제외하자는 소련의 주장을 미국이 거부함으로써 결렬되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평가는 당시 남한 민중의 요구가 무엇이었으며, 미.소 양국이 이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가능해질 것이다. 여론조사는 이란 평가에 큰 시사점을 준다. 미.소 공동위원회가 진행되고 있던 1947년 7월 3일 '조선신문기자회'에서는 서울 시내 주요 지점 10개소에서 일제히 통행인 2,495명에 대해 임시정부의 형태와 방법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발표한 결과, 시민들의 압도적 다수가 한민당과 한독당을 배척(72%)해야 하고 국호는 조선인민공화국(70%)으로, 정권형태는 인민위원회(71%)로,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68.3%)하기를 원하였다.
그리하여 한국 민중은 모스크바 협정 실현을 촉구하는 투쟁을 광범위하게 벌여나갔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7년 7월 27일 남한 전역에서 민주주의민족전선 주최로 개최된 '임시정부 수립촉진 인민대회'였다. 전국적으로 수백 만명이 미소 공위의 성사와 임시정부 수립을 촉구했다."(p.95~97)

10. [미국의 남한 단독선거 강행과 2.7 구국투쟁]
한민족과 민중의 의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엔에 한반도의 운명을 떠넘긴 미군정과 친일파들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은 거셌다. 전국적으로 무려 200만 명이 2.7 구국투쟁에 참여하였다.

"북측과 소련이 반대할 것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결정을 강행하는 것은, 결국 미국의 의도는 한반도 남북에서 점증하는 민족해방세력의 위세로 인해 한반도 전체를 속국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남쪽에서만 자신들의 군사력과 친일파를 동원하여 친미 식민지 또는 위성국가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고, 이를 위해 모든 정당성과 규약을 무시하고 유엔이라는 명의를 도용하여 강제로 한반도 남단에 자신의 뜻에 맞는 허울뿐인 정부를 구성하려는 것이었다.
국토 양단의 위기로부터 벗어나고 민족의 주권을 되찾기 위한 한국 민중의 의지는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2.7 구국투쟁의 불길로 치솟았다. 전평 산하 30만 명의 남한 노동자들은 일제히 전국적인 총파업에 돌입함으로써 투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전신, 철도 등 노동자의 파업은 미 군정의 손발을 마지시켰다. 노동자들의 총파업에 고무되어 전국의 각급 학교도 일제히 동맹휴학을 선언하고 대대적인 가두시위에 나섰다. 이에 발맞추어 일부 미 군정 관리들까지 포함하는 각계 각층의 민중들이 미국의 단독선거 방침에 반대하며 투쟁의 대열에 합류했다. 농촌에서의 투쟁은 미 군정의 야수적인 탄압에 대항하려 무장투쟁으로의 전환이라는 새로운 양상을 띠어가고 있었다. 전국적으로 무려 200만 명이 2.7 구국투쟁에 참여하였다.
이에 대해 미 군정과 친일 군경은 야수적인 탄압을 자행하여 100여명이 무참하게 학살되고 8,500여 명이 투옥되었다."(p.104~107)

11. [망국적 단독선거의 강행 : 민족통일전선의 형성]
1945년에서 1948년까지를 살펴보면, 1948년 8월 제정된 헌법과 이승만 정부(?)는 한국인이 선출하거나 승인한 정부가 아니라 미군정과 친일파가 선출하고 승인한 정부일 뿐임을 알 수 있다. 박근혜 정권이 한국 유권자가 아니라 국정원과 경찰, 선관위가 선출한 것처럼... 물론 1948년 8월까지 미군정이 식민지를 군사,정치적으로 점령통치하기 위해 직접 또는 친일파 군경을 동원해 학살한 민중들의 숫자는 수천~수만 명에 이른다.
5.10 단독선거 실시의 결정 주체와 과정, 5.10 선거를 위한 투표등록 과정, 선거 전후 자유의 박탈과 폭력의 난무, 강압적인 투표 강요, 투표율, 투표 및 개표 관리 등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5.10 선거 자체가 무효이고 따라서 현재 기득권자들이 애지중지하는 제헌국회와 이승만 초대 정부 자체가 원천무효임을 말해준다. 그들은 역사적으로도, 보편적 민주주의 관점으로도 정당성이 없는 집단인 것이다.

"한국 민중이 성스러운 3.1 운동을 기념하고 있던 1948년 3월 1일 유엔 임시위원단은 5월 10일 이전에 남한 단독선거를 치르겠다는 모욕적인 발표를 단행했다. 이렇듯 미국의 강요에 의한 민족분열의 징후가 명확해져 감에 따라 조국을 수호하시 위한 한국 민중의 투쟁은 보다 끈질기고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또한 미국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미 군정과 타협적인 자세를 취했던 남한의 애국적인 인사들과 정당, 사회단체들도 망국적 단독선거 강행에 반대하는 투쟁에 나섰다. 드디어 4월 19일 평양에서 남북 56개 정당 시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한 가운데 '남북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연석회의는 26일까지 공식회의를, 30일까지는 남북요인회담을 개최하여 남한 단독선거 분쇄와 통일조국 건설의 방도에 대해 폭넓은 의견을 교환하였고,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미국은 단독선거를 강행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미 군정은 미군을 한반도에 증파하고 전 미군에게 특별경계령을 내려 철저히 무장하도록 하였다. 또한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을 중심으로 선발한 국방경비대로 하여금 경찰업무를 수행하도록 하고, 경찰과 별도로 그들이게 한국 민중을 구속 수사할 수 있는 권한을 부당하게 부여하였다.
그리고 모든 경찰(총독부 경찰 출신이 대부분인)로 하여금 중무장한채 요소요소를 지키도록 조치하였고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민중들을 영장없이 구속할 수 있고 필요에 따라 무차별 살상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 이것도 모자라 미 군정청은 온갖 부랑 악질 청년들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고는 경찰을 도와 민중 탄압에 나서도록 조치하였다. 미군정은 5.10 투표 당일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한 후 장총을 든 경관, 곤봉을 든 우익청년단원을 길목마다 배치하였고 부산과 인천 앞바다에는 미군 군함을, 하늘에는 공군기를 띄워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남조선 단독선거 반대투쟁 전국위원회는 선거 보이코트를 위해 한국 민중이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선거기관 공격, 매국적 선거 입후보자에 대한 처단, 지서 등 미군정 행정기관에 대한 타격 등 단독선거를 분쇄히기 위한 민중들의 투쟁이 세차게 타올랐다. 남한 전역에서 파업과 동맹휴학, 철시가 진행되었고 군정관리들과 경비대원의 일부도 단독선거 반대에 동참하였다.[이상 연표한국현대사, 김천영]
5.10 선거는 대다수의 애국인사들이 불참을 선언한 가운데 오직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만이 입후보한 채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온갖 회유와 협박을 통해 민중들을 투표장으로 내몰았건만 다분히 과장했을 것이 뻔한 미 군정의 공식집계조차 전체 남한 인구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숫자만이 투표에 참여했을 뿐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이라는 정부의 최초 형태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유엔은 미국의 요청에 의해 대한민국을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했다."(p.118~124)

12. [이승만 정권의 정체]
 탄생 자체가 정당이 없고 폭력으로 점철된 이승만 정권이니 탄생 직후 온갖 폭력기구와 파쇼악법을 제정한 것은 필연일 것이다. 21세기인 현재 미국과 한국 사이에 체결된 대부분의 협정과 합의서,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법률과 제도는 이미 일제가 강요한 조약과 협정 그리고 미군정이 강제한 조약과 협정에서 시작된 셈이고... 
따라서 이승만 정권은 역사적으로도,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정당성, 정통성이 없는 정권이라 할 수 있다. 정치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미국이라는 외세를 등에 엎고 친일파 매국노들을 편에 서서 애국자, 독립투사, 민중들을 끝없이 학살하고 고문하고 빼앗고 짓밟으며 거짓과 폭력으로 세운 헌법과 정권이 무슨 정당성이 있을까...

"미국의 남한에 대한 영속적 지배는 각종 조약과 협정에 의해 보다 확고해지고 합법화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미군의 철수 여부와 관계 없이)이승만 정권은 이러한 예속 조약에 의해, 미국의 이해에 따라서 국정 전반을 풀어나갈 수밖에 없는 허약한 존재였다. 대표적인 예를 살펴본다면 미국과 이승만 정권은 (정부수립이라는 형식을 갖춘 8월 15일 이후 9일만인) 1948년 8?r 24일 남한 땅에서의 미국의 계속적인 군사지배권을 보장하는 다음과 같은 '과도기간 잠정적 군사 및 안전에 관한 행정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와 함께 1948년 9월 1일에는 '한미 재정 및 재산 이양에 관한 협정'을 제결하였다. 이 협정을 통해 미국인과 미국 회사들이 그때까지 누려오던 온갖 특권은 그대로 유지되도록 보장되었고 그들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한국 내의 재산을 점유할 수 있도록 용인되었다. 또한 이 협정을 통해 미국은 미 군정 시절 자신들의 과도한 통치비용으로 인해 말생한 모든 부채를 이승만 저원에게 떠넘길 수 있게 되었으며 마찬가지로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기지를 위한 토지공여 및 시설유지 비옹을 전부 한국 정부가 부담하도록 할 수 있게 만들었다."(p.124~126)

13. [단독선거를 저지시키려는 남한 민중의 무장항쟁]
1948년 여순 봉기를 돌이켜보면 1980년 5월 광주항쟁이 비교됩니다. 여순 봉기는 동포와 민중에 대한 학살을 거부하여 군인들이 일으킨 의거였고, 광주항쟁은 군인들이 전두환 살인마의 학살명령을 충실히 이행했기 때문이다. 비록 여순 봉기로부터 시간도 많이 경과되었고 미군과 박정희 군사독재자가 군인들을 집요하게 세뇌한 점, 작전권을 쥐고 있는 미국과 '하나회'를 주축으로 사설 군대조직을 가동했던 전두환의 책임이 분명하지만 수많은 광주시민의 목숨을 꺼리낌없이 앗아간 공수부대와 계엄군들은 역사와 민족 그리고 민중에게 큰 범죄를 저지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아직도 초급 장교와 하사관, 병사들 중에서 대다수가 학살의 범죄를 참회하거나 진실을 밝히지 않고 있는 것은...ㅠ
저자는 4.3 제주 항쟁과 여순 봉기 그리고 기타 광범위했던 당시의 무장항쟁을 자연발생적이고 불가피한 측면으로 분석, 평가했지만 오히려 그 이후의 역사적 결과는 당시의 무장항쟁이 자연발생적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전면적으로 진행되었다면 상당히 달라졌을 것이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역사에 가정은 없는 것이지만...)
1948년 8월 미군정이 한민족과 민중들의 염원과 요구에 반하여 이승만과 친일파 일부로 단독정권을 수립한 것은 역으로 미군정과 친일파가 야금야금 한반도 전체를 집어 삼키려다고 포기하고 남쪽에만 괴뢰정권을 세우려 한 것이기에 한민족과 민중 전체에게 선전포고를 단행한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에 대해 비록 낫과 망치, 죽창 밖에 없지만 남북한 민중들이 끊임없이 싸웠던 것이다. 이미 한반도는 1948년 8월부터 '미군정+친일파'에 의해 분단된 채 정당성 없는 집단의 학정을 감수하느냐 아니면 한민족과 민중 전체의 힘으로 스스로 친일파를 척결하고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느냐는 기로에서 전쟁이 시작된 셈이다.

"1946~7년 미.소 공동위원회의 파탄과 미국과 이승만 일파의 단독선거에 의한 민족분단 음모를 알아챈 후, 1948년 들어 2.7 구국투쟁과 단선단정 반대투쟁을 경과하면서 남측 민중의 반미 반이승만 투쟁은 무장투쟁 단계로 발전하여갔다. 2.7 구국투쟁 이후 한반도 남단 각지에서는 농촌을 거점으로 한 야산대라는 초보적인 무장조직이 등장하였다. 야산대는 광폭한 탄압을 헤치고 효과적으로 투쟁을 벌여나가기 위한 민중의 자위조직으로서 정치활동을 위주로 낮은 단계의 무장항쟁을 수행하여 나갔다.
이러한 야산대의 활동은 4.3 제주 민중항쟁 등 지역적 봉기라는 계기를 맞이하면서 급속히 본격적인 유격전으로 진입하게 되었다. 대체적으로 볼 때 본격적인 무장항쟁의 불길을 당긴 4.3 제주 민중항쟁과 그것에 의해 촉발된 여순 봉기 그리고 계속되는 군대 내의 항쟁 등은 당시 해당 지역과 군 내부의 불가피한 사정에 따른 자연발생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미군정과 이승만의 친일파 군경은 단선단정에 반대하는 한반도 남단의 민중들을 학살하다시피 탄압하였다. 미군정은 제3세계의 민족해방운동 탄압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지고 이승만의 친일파 군경을 직접 지휘하여 제주 민중과 여수, 순천 일대의 애국적인 군인들과 민중들을 엄청나게 학살하였다.
미 군정과 이승만 친일 군경은 제주의 경우만 해도 8만6천명 살상, 1만5천호 방화, 7만8천 두의 소와 2만2천 필의 말 그리고 2만9천 마리의 돼지 도살, 곡류 13만5천 석, 고구마 4백2십만 관, 면화 9만7천 관, 소채 9십만 관 소각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제주 민중들에게 안겨주었다.[연표한국현대사, 김천영]
또한 여수, 순천 봉기를 탄압, 학살한 결과는 이승만 정권이 축소 발표에 따르더라도 6천명의 사망에 달하였다. 2만3천 명의 민중을 체포 투옥되고 5천호의 가옥이 미군정과 친일 군경의 방화에 의해 소실되었다.[잠들지않는남도, 노민영] 여순 봉기 후 미 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군대 내 저항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정작업에 착수하여 1949년 7월까지 4,700명을 총살시키거나 투옥시켰다."(p.135~160)

"농촌에서 출발한 전국적인 야산대와 여순 봉기로 비롯된 군인들의 유격대 전환으로 한반도 남단의 대부분 지역에서는 유격전 수행을 위한 준비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여순 봉기를 계기로 군장병들이 대거 입산함에 따라 야산대는 유격대로 전환되어 갔다. 이들 유격대는 대체로 1945년 5월까지는 생존 및 횔동에 필요한 지반을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이른바 유격전구를 창설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렇게 해서 형성된 유격전구는 한반도 남쪽 지역 133개 군 중에서 118개 군에 달했다. 요컨대 남한 지역 내 대부분이 무장투쟁의 도가니로 변화된 것이다. 남한 내 유격대의 활동은 1949년 6개월 동안에만도 수십 만명의 인원이 친일 군경과 수천 번의 교전을 치렀다."(p.161~167)

14.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 그리고 전쟁전야]
한국전쟁은 베트남 전쟁처럼 어느날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가깝게는 미군정이 1948년 한반도 남단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시점이 전쟁의 개시 시점이고, 조금 멀게는 1945년 9월 35년간 한반도를 점령한 일제를 대신하여 미군정이라는 제국주의자들이 한반도 남단을 점령한 때가 전쟁의 개시 시점인 것이다. 아주 멀고 크게 본다면 19세기 말 서구와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를 침탈하기 시작한 때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1945년 8월 이후 5년간 한반도, 특히 남단에서 전개된 상황만 보더라도 5넌 내내 통일된 자주독립국가를 위한 대다수 한민족과 민중 대 미군정과 친일파와의 전쟁으, 연속이었다.

저자가 제시한 자료와 근거를 살펴보면, 저자의 논리는 미국의 '남침 유도설'을 제기하는 것으로 분석된다. '남치 유도설'의 가장 강력한 주창자는 미국의 동아시아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 교수다. 그는 저자도 자주 인용하고 있는 <한국전쟁의 기원>의 저자다. 올해 커밍스 교수는 연합뉴스 등 한국 언론과 한국전쟁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그는 “1940년대 후반의 미군정 기록들을 열람했다”며 “이는 한국의 고위급 관료들도 볼 수 없는 자료로서 한국인들이 알지 못하는 한국전쟁에 관한 내용들이 많다”고 말했다. 또 “한국 전쟁동안 미국이 한국에서 한 일들은 매우 끔찍하고 중대한 전쟁범죄“라며 “한국 전쟁의 발발은 미국에게 막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19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의 기원'에 대한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해방 후) 한국이 둘로 나눠지고 2개의 다른 정부가 나타나면서부터 본격 전개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한국을 둘로 나누는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6·25 발발 20여년 전인 1930년대에 있었던 충돌도 얽혀 있다. 김일성 등 북한 게릴라와 게릴라를 쫓던 일본군 사이의 갈등이 대표적인 예", "남침을 감행한 것은 김일성이 남측 경찰과 군에 있는 과거 일본군 협력자를 제거하고 싶었기 때문" "한국전쟁은 20여 년에 걸친 오랜 기원을 가진다. 내전이 일방의 침략 감행으로 시작됐다는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다"

"1949년 상반기까지 남한 전역 133개 군 중에서 118개 군에 결성된 유격전구의 유격대는 하반기 동안 수십 만명의 병력으로 친일파 군경과 7천 여회의 전투를 치뤘다. 유격대는 한겨울에 친일 군경 토벌대의 보복공격을 버텨낸 후 1950년 3월부터 공격을 개시하였는데, 4월 한달 동안 전투회수 3천 여회에 참가인원은 6만5천 명에 달했다.
1950년 5월 30일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세력이 불과 30석 밖에 당선되지 못했고 대미 자주노선와 평화적 협상에 의한 남북통일을 주장하는 진보적 인사들은 130여 명이 대거 당선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상태로 계속 갔으면 이승만 정권은 조만간 붕괴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연찮게도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즉시 미군의 대규모 군사개입이 진행됨으로써 가까스로 위기에서 구출될 수 있었다."(p.167~169)

"1949년 한 해 동안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 지역에서는 역사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갖는 일대 사건들이 계속 발생한다. 소련은 핵무기 실험에 성공했고 중국 대륙에서는 미국의 앞잡이 장개석이 ?i겨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었다. 베트남에서도 프랑스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중국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동맹국들에게 외교와 무역을 금지시키고 중국의 유엔가입도 막았다. 동시에 미국은 '패전국인 일본을 아시아의 후방 병참기지로 전환시키고 한반도, 대만, 베트남을 각자 군사적 진공을 위한 교두보로 삼으며 최종적으로 중국 대륙의 회복을 목표로 한다'는 전략방침을 수립하였다.[1960년대, 김성환 역] 따라서 베트남 전쟁에도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1950년 6월 초 일본의 병참기지화를 반대하는 일본공산당을 불법화 조치했다. 뒤이어 동경 시내에서의 모든 공개집회와 시위를 금지하는 비상계엄령을 발동하고, 24명의 공산당 간부와 당 기관지 편집인을 추방했으며, 1만2천명의 노조원과 공무원을 정치적인 이유로 해직시켰다. 미군정은 한국전쟁 발발 9일 전인 1950년 6월 16일 전 일본 지역에 일체의 공개집회와 시위를 금지시키고 전시동원체제에 착수하였다.[1960년대, 김성환 역]"(p.176~183)

"대규모 전면전에 대한 북의 준비상태를 알려주는 사례로서, 미군 정보팀이 북의 문서를 입수하여 연구한 끝에 밝혀낸 사실은 '노동당 상임위원회의 일급 비밀 작업계획이나 북의 고위 장교들은 전쟁이나 공격에 대해 전쟁 전까지 아무런 구체적인 지시를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한국현대사, 로버트시몬즈]
또한 1950년 7월 맥아더 사령부의 보고 과정 중 한 장교가 특파원에게 '전쟁이 시작된 6.25 당시 북은 동원계획을 수행하지 않았다. 오직 6개 부대가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전투준비가 되어 있었다. 전쟁 수행에는 13~15개 부대가 필요함에도...' [비사한국전쟁, 스토운]"(p.184~190)

15. [한국전쟁의 발발과 초기 상황의 중요한 진실]
한국전쟁의 기원과 성격, 그리고 전개 양상은 '남침-북침'이 그다지 의미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한국 정부는 지속적으로 '남침설'을 주장하고 있는데, 저자의 문제제기나 인용된 책들에서 제기된 사항들은 '북침설' 또는 '남침유도설'에 대한 근거로 사용될 수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한국의 군 관료나 정치인, 기득권자들은 항상 '전쟁불사'를 외치지만 정작 위기가 닥치거나 전쟁이 나면 제 몸과 재산을 들고 36계 줄행랑을 치는 비겁하고 이기적인 자들임을 일제 시대와 미군정 시대에 이어 전쟁 중에도 여실히 보여준다.
또한 이승만과 친일파 도당의 남침설이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한국전쟁의 진실이 보여주는 바는 대통령과 군대의 간부로서 경계와 전쟁에서 패배하고 민중의 생명과 재산을 파괴당한 이승만과 군 간부들은 처형되고 숙청되고 감옥으로 가야 마땅한 것이다. 이것은 경계에 실패한 '천안함, 연평도 사건'에서 주요 관련 지휘관들이 징계, 투옥되지 않고 승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별개 문제이기는 하지만, 당시 미국 내 극우보수세력과 군군주의자들은 유엔을 내세우면서도 유엔의 결의와 절차를 무시하고,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도 자국 내 헌법과 절차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범법자, 무법자라는 것이 분명하다.

"한국전쟁은 적어도 이미 4.3 제주항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여순 봉기와 전면적인 유격전을 거치면서 최소한 10만 명 이상의 희생다를 양산하면서 치루어진 적대적인 두 세력(미국+친일파 분단세력 : 독립군+민중 통일세력) 간의 대규모 무력충돌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전쟁이었다고 보아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1950년 6월 본격적인 전쟁이 발발하기 훨씬 전부터 38선에서는 남-북 군대간의 대소규모 충돌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었다. 미 국무성의 한 관리 역시 1950년 4월에 "38도선은 실질적인 전선이다. ... 전투가 계속 진행되고 있고 아마 1,2천 명의 전투원이 실제 교전하고 있다."고 말했다.[한국현대사, 로버트 시몬즈]
한반도에서의 전쟁 발생 보고를 받은 워싱턴의 분위기는 예상과는 달리 비교적 차분한 편이었다. 대통령 트루만은 고향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고, 그래서 에치슨 미 국무장관이 백악관을 진두지휘하며 지체없이 한국전쟁에 대한 개입을 결정하고 지시했다. 사실상 오늘날까지도 에치슨이 무슨 권한으로 이렇듯이 난해한 문제를 그토록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 심각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미군의 한국전쟁에 대한 최초의 개입은 미국 의회의 승인도 받지 않은 채 시도되었다. 미군의 개입에 대한 미국 의회와 동맹국들의 사후 승인은 남측 군대가 형편없이 패전만을 거듭하고 있는 위태로운 상황이 적절히 이용됨으로써 이루어졌다.
미군은 군사 개입 직후부터 공군기와 군함을 동원하여 남한 지역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탄세례를 퍼부었다. 맥아더는 폭격함에 있어 한반도의 기후와 지형, 남-북 군대의 구별, 군인과 민간인의 구별 등이 여의치 않게 되자 '정확성이 없더라도 38선과 서울 사이의 좁은 회랑지대를 폭격할 것'을 결정하여 실행에 옮겨졌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6월 30일 맥아더는 북측에 대한 폭격 명령을 내려 평양 비행장을 급습, 폭격하였다 
7월 1일 미 지상군의 선발대의 부산 도착을 시작으로 13일까지 대부분이 도착하자, 7월 14일 맥아더는 이승만으로부터 '한국군의 지휘권을 양도'받았다. 이른바 '대전협정'이라 불리는 이 통고는 조약이나 협정에 의한 문서화도 없이, 국회 비준도 없이 곧바로 7월 17일부터 실시되어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한국전쟁, 조지프 굴든] 작전권의 이양과 함께 주한 미군에 대한 치외법권을 보장하는 조치가 취해졌다."

16. [한국전쟁에서 몇 가지 중요한 진실]
한국전쟁은 수많은 인명의 피해를 가져왔다. 특히 240만 명의 죽음에서 군인이 수십 만명 밖에 되지 않았던 것을 고려하면 20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며, 대부분은 미군과 이승만 친일 군경의 행위였다고 본다. 미군의 경우 무차별 폭격, 미군 리지웨이 중장의 '몰살작전', 미군과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이 가장 큰 피해를 미친 것이라 할 수 있다. 미군의 전쟁 범죄는 이 책에 나오듯이 황해도 신천군의 민간인 학살, 원주/홍천지역 등의 네이팜탄 사례, 세균전, 민주정부 때 밝혀진 노근리와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 저의 아버님이 직접 경험한 익산역 500여 명 폭탄 투하 몰살사건 등이 드러난 사례일 뿐이다.(북측이 주장하는 미군과 친일 군경의 황해도 민간인 학살 숫자만 18만 명에 달한다.)
이승만과 친일 군경의 학살은 무수히 많은데 대표적인 것이 국민보도연맹 학살과 거창양민학살 사건이다. 학살된 사람이 최소한 수십 만명에서 거의 백여 만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참여정부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이 공식 사과할 정도였다.

"1950년 7월 미군은 한반도 남,북을 가리지 않고 소위 '융단폭탄'을 퍼부었다. 미 공군기의 폭격으로 인하여 남쪽 주요 철도를비롯하여 길목, 터널, 집하장, 창고 등 일체의 보급 연관시설과 민중들의 생활과 직결된 61만채의 주택, 1만5천동의 학교, 1만7천개의 공장이 완전히 잿더미로 변했다.[민족과통일, 노중선]
1951년 1월 15일 '런던 타임즈'는 원주지역 미군이 초토화작전을 추구하면서 22개 마을을 불태웠고 300개의 건초더미에 방화했음을 보도했다. 2월 5일자 '뉴욕타임즈'는 미군이 F-80 공군기를 동원하여 철원, 금촌, 춘천, 춘천리 근처의 마을 공격에서 로케트, 네이팜탄뿐 아니라 폭탄으로 강타당했음을 보도했다. 또한 24대의 F-51 무스탕 비행편대는 홍천 지역에 5천 갤론의 네이팜탄읓 퍼부어댐으로써 일대의 모든 마을과 건물을 불태워버렸다.
3년간애 걸친 전쟁은 쌍방의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24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또한 이 기간에 한반도 전체에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각종 시설은 대부분 파괴되었다.[한국전쟁, 고지마노보루]"(p.295)

"중국은 한국전쟁 발발 1년 전인 1949년 10월에 국가를 세웠고 아직 장개적 국민당 잔당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지 못했그며 수십 년간의 전쟁 참화를 딛고 경제를 전설해야 하는 시급한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어한 시기에 터진 한국전쟁은 결과적으로 중국의 이같은 과제 해결을 극히 곤란하게 만들었고 시간적으로도 상당히 지연시키고 말았다. 한국전쟁은 중국으로서는 결코 원하지 않은 시기에 원하지 않은 형태로 발생함 셈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중국의 이런 기대는 결국 깨지고 말았다. 중국이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훨씬 이전에 미 공군기가 만주지역읓 폭파해버린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 정부는 다수의 민간인 사상자 명단을 제시하면서 수십 차례에 걸쳐 항의하였다. 그러나 11월 16일에 워싱턴에서는 압록강 철교를 폭파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현대조선사, 콩드] 이렇게 하여 미국의 한반도에 대한 전쟁개입은 최초의 38선 원상회복에서 시작하여 38선 돌파, 만주 폭격이라는 단계적 확대 과정을 거치기 되었고, 중국의 한국전쟁에 대한 참전은 자국 영토가 직접적인 공격대상으로 되고 있는 상황에서 추진되었던 것이다. 이 점이 미국의 개입과 서로 다른 측면일 것이다."(p.220~222)

"한국전쟁은 붕괴 직전의 이승만 친일 정권이 되살아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 정권은 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지원 하에 60만 대군으로 급성장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유격전의 형태를 띠고 있던 남한 민중의 저항을 완전히 분쇄할 수 있었다.
또한 범람하는 군수물자는 이승만에게 풍부한 정권 유지 비용을 공급해주는 원천이 되었다. 전쟁 중 자금확보를 위한 수많은 불법행위 중 가장 빈번히 사용된 것은 석유, 자동차 부속품, 식품 원로 등과 간이 상품가치가 있는 전쟁물자를 공공연히 팔아먹는 일이었다. 보다 교묘하게 거금을 남기는 방식은 60만 대군의 부식비를 유용하는 일이었다. 또한 계약을 맺을 때뿐 아니라 불량품이 검사를 통과할 때 뇌물이 공공연히 요구되었다.[1960년대, 김성환 외]"(p.261~267)

[ 2013년 9월 0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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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 책과함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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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강상중, 현무암 저, 이목 역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엇는가>를 읽고 / 2012. 09., 350쪽, 책과함께

홍익표 의원의 '귀태(鬼胎, 태어나서는 안될 존재)' 발언 논란으로 '귀태'라는 단어와 이 책에 대해 관심이 생킨 데다가 페이스북에서 이정희 대표가 소개하여 읽게 되었다.

괴물 같은 독재자로 최후를 마친 마사오 다카키, 즉 박정희한테서는 피 냄새가 가시지 않는다. 그리고 '쇼와의 요괴'로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권세의 정치가로 불렸던 기시 노부스케는 A급 전범이라는 어두운 과거가 지워지지 않는다.
국가의 재건과 총력안보라는 외형적 '돌격적 근대화'를 달성한 박정희는 한국의 노년층과 보수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지금도 '민족중흥의 기수'로 변함없이 살아 있다.
끝없이 권력을 추구한 마키아밸리스트 기시 노부스케야말로 전쟁 전에는 국가개조의 핵심관료로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고, 전후에는 보수합동을 낳은 주인공으로서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오름과 동시에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의 틀을 만들고 미일안보조약 개정을 주도했다.

이처럼 두 사람에게는 반대의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하며, 두 사람은 많은 부분 공통점을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일제가 전쟁에서 패망하고 해방이 이루어진 후 68년이 지난 후, 박정희의 딸이 한국의 대통령 후보가 되고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가 일본 수상이 된 2013년에 두드러진다. '독재자와 요괴의 자식들'로...

그렇다면 두 사람, 그리고 두 가계의 공통점은 뿌리는 무엇일까?
저자는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의 가계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뿌리를 만주국에서 찾는다. 일제가 대륙을 침략하면서 괴뢰국으로 세운 만주제국. 박정희를 '군인'으로 변신시킨 것도, 기시 노부스케를 '정치가'로 단련시킨 것도 훗날의 '독재자'와 '요괴'의 요람의 땅이었던 만주였다.

만주괴뢰국, 만주제국은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에게 어떤 경험이었고 그들은 어떻게 연결되었나? 왜 그들은 '귀태'라 불리우는가?
이 책은 이 두 가지에 대한 저자의 설명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젊은 시절의 박정희의 맨얼굴, 지금까지 이름 이외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기시 노부스케에 대해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와 조선인들에게 만주가 어떤 땅이었고, 일제가 만주땅을 어떻게 강점하고 어떤 방식으로 괴뢰국을 세웠으며 그 과정에서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유익한 정보를 제공한다.
두 사람은 모두 냉전이라는 조건에서 미군에 의해 목숨을 부지하고 복권되었고, 한국전쟁 후 미군의 필요에 의해 집권한 후 만주제국의 경험을 자국에서 실험했다.

독자들은 이 책을 박정희의 통치방식, 근대화 방식과 기시 노부스케의 전후 일본 재건 방식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공통점은 만주제국에 뿌리를 두고 만주인맥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연계는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다시는 재발해서는 안되는 인물들이기도 하다. 따라서 저자의 표현 그리고 홍익표 의원의 주장처럼 그들은 '귀태'가 맞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사실 이 책의 주제는 '귀태'가 아니라 '만주제국'이다. '귀태'는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에 대한 조사와 설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책 속에 단 한 번인가 나올 뿐이다. 홍익표 의원 역시 저자처럼 기본적인 한국현대사 속에서 일반적인 인식을 문장 속에 표현한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홍 의원의 표현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와 새누리당, 극우보수언론은 쌩난리를 첬고 민주당 지도부는 공개적으로 사과했다.
이런 상황은 한국 정치권을 주도하는 인라들의 역사인식이 초라한 것을 떠나 전근대적이라 할 수 있다.

현재와 같이 한국사회를 주도하는 기득권자들이 귀태를 귀태라 주장하지 못하고, 친일파를 친일파로 부르지 못하고, 다까끼 마사오를 다까끼 마사오로 부르지 못하고, 쿠테타를 쿠테라라 부르지 못하고, 친미사대주의를 친미사대주의로 부르지 못하고, 작전권이 없음을 굴욕으로 느끼지 못하고, 경제 예속을 예속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문화 종속을 종속으로 느끼지 못하고, 학문 식민지화를 식민지화로 느끼지 못하고, 분단과 정전체제를 전쟁위기로 느끼지 못하고, 극우세력 콤플렉스를 '국민의 눈높이'로 생각하고, 반북 세뇌를 보편 상식이라 느끼고, 재벌의 착취를 착취로 느끼지 못하고, 비정규직화를 분열책과 노예화로 느끼지 못하면, 우리 사회와 민족은 대를 이어서도 친일파가 득세하여 식민사관이 국사를 대체하는 것을 멍청하게 지켜보게 되고,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해외에서는 미국의 식민지라 손가락질 하는데 독립국가로 자위하고, 극우파시즘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하느님'처럼 전지전능한 북의 '위협'이라는 공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NLL과 같은 종북공세에 끌려다니고, 하루 4~5만원 벌어 재벌과 극우세력에게 5~6만원을 갖다 바치고, 알량한 기득권을 위해 서로가 서로를 짓밟으면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성공과
출세를 향해 질주할 것이다. 어차피 저 성공과 출세의 꼭대기 자리는 1%로 제한되어 있음에도...
2013년 9월 1일 현재 한국인들은 '귀태'를 청산하지 못한 대가를 처절하게 치르고 있다. 부정선거와 유신회귀와 정치공작으로...

참고로, 박정희(다까끼 마사오)가 귀태(鬼胎)인 이유 중 몇 가지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의 내용과 페이스북 친구분의 글을 일부 인용한다.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 만주군관학교 지원서류에서 "한 번 죽음으로써 충성함 박정희(一死以テ御奉公 朴正熙)"라고 쓴 혈서에 첨부되었던 박정희의 각오 내용

"박정희는 1940년 4월 만주신경군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고, 2년만에 수석 졸업, 일본 육사 57기에 3학년으로 편입하고 1944년 4월 졸업한다. 이 후 1944년 7월 만주군 보병 제 8사단에 배속되었고, 12월 23일 정식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박정희의 보병 제8사단은 중국 항일 팔로군부대와의 전투가 주 임무였다."

"해방 후 박정희는 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학 단기과정을 마치고 한국군에서 육군 소위로 임관하여 군인생활을 시작한다.
1948년에는 육군본부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 여수 순천 사건이 발발하고 한국군 내의 남조선로동당 조직책이었던 박정희도 체포되어 1심에서 무기징역을 받고, 2심에서 징역10년으로 감형됨과 동시에 형 집행정지 선고를 받고 강제 예편된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박정희는 다시 현역 소령으로 복귀하였다."

"만주군관학교 출신 선배 인맥의 지원에 힘입어 군부 내에서 인맥을 확보하였던 박정희는 1961년 5.16일 군부 쿠테타를 일으켜 장면정부를 무너뜨리고 군사정부를 수립하였다.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국정원은 박정희가 군부쿠테타를 일으킨 직후 본격적인 군사정부수립 이후 설립하였던 비밀정보조직인 중앙정보부를 전신으로 하고 있다."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급기야 1972년 10월 유신을 단행해 기존 헌법을 전면 중단 폐기하고 대통령 명령에 의한 초법적 긴급조치권, 국회의원정수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임명할 권리, 대통령 간선제 및 6년 연임제 등을 포함하는 유신헌법을 발효시킨다. 이 과정에서 국회는 무력화되고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은 금지된다."

[ 2013년 9월 0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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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별 여행자
무사 앗사리드 지음, 신선영 옮김 / 문학의숲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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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무사 앗사리드 저, 신선영 역 <사막별 여행자>를 읽고 / 2007. 8., 248쪽, 문학의숲

법정스님의 추천 도서 34번째인 이 책 역시 나에게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사하라 사막에서 대대로 살아언 유목민 투아레그족의 열세 살 소년이 어느 날 사막에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주워 읽고 생텍쥐베리를 만나기 위해 오랜 준비 끝에 파리로 간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편리해 보이는 문명. 그는 그 문명의 이면에서 비인간적이며 허구적인 삶으로 엮어진 맨얼굴을 발견한다. 그 문명세계가 서구 문명의 하나인 파리의 모습이지만 서구문명, 특히 프랑스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황금만능주의에 오염된 미국의 문화가 범람해 있는 한국의 모습은 더욱 비참하게 느껴진다.

사막에서 온 여행자는 문명 세계를 살아가는 서구인들의 풍경과 관습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은, 비록 많은 걸 소유하지는 않았지만 자유롭게 살아가는 또 다른 세계에서 온 여행자의 시선을 전하고 있다. 그의 시각을 통해 독자들은 자신들이 잃어버린 모습을 발견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파리에 도착한 그는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의 기적, 자동문의 마법,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음식에 감탄한다. 동시에 문명인들의 결핍된 열정, 고독을 감춰 버리는 높은 건물, 뭐든 빨라야 하는 조급증, 있는 그대로보다 더 많이 가지려는 끝없는 욕망을 발견한다.
그는 이 경험을 토대로 우리가 자랑해 마지않는 이 문명이 벗어나 있는 참된 길에 대해 묻고 또 묻는다. 입는 옷 색깔 때문에 ‘푸른 사람들’이란 별칭으로도 불리는 투아레그족은 스스로를 ‘자유인’이라는 뜻의 ‘이모하’라 부른다고 한다. 

소설보다 더 놀라운 이 실화의 주인공 무사 앗사리드는 파리의 첫날 밤 호텔에서 사막의 천막 속 아이들이 함께 잘 수 있을 만큼 넓은 호텔 침대와 마법처럼 열리는 자동문, 다양한 식물과 꽃, 넘쳐나는 음식에 감탄한다.
하지만 그는 며칠 만에 그처럼 많은 것을 가졌건만 문명세계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음을 발견한다. 삶의 한 부분 한 부분을 소중하게 음미하지 못한 채 앞만 보며 달려가는 문명인, 이웃과 단절된 채 고독하게 욕망을 좇으며 살아가는 도시인은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다.
문명세계의 사람들은 기적으로 가득 찬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 즉 이 순간의 행복을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상에서 인간에게 가장 적대적인 곳 중 하나가 사하라 사막이라 할 수 있다. 그곳에 인디고빛 두건과 푸른색 베일을 둘러 쓴 신비의 부족이 있다. 새로운 물과 풀을 찾아 유목생활을 하는 투아레그족.
그 투아그레족 젊은이는 사하라 사막의 삶과 문명세계의 삶을 비교하면서 단봉낙타가 내딛는 발걸음의 리듬에 맞춰 한걸음씩 나가가는 삶과 테제베를 타고도 더 빨리 가지 못해 조급해 하는 삶, 자연의 신호에 응답하는 삶과 기술의 발견에 응답하는 삶, 단순함과 복잡함, 관계 중심적인 삶과 이해 중심적인 삶, 진지함과 가벼움, 본질적인 것에 충실한 삶과 현실적인 것에 충실한 삶의 충돌을 보여준다.

그는 우리가 오래도록 가지고 있었지만, 오늘날 잃어버리고 있는 참된 삶을 위한 기억이 무엇인지 묻는다. 그리고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힘 중 하나는 있는 그대로의 우리 자신과 조화를 이루어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막은 늘 비어 있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을 다 가지고 있다. 유한한 이 삶에서 우리는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우리는 왜 그토록 불안한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는 우리 삶을 장식하고 있는 복잡한 그 많은 것들은 허구일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한다. 이 책과 함께 사막별 여행자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본다면 사라져 가는 유목민 문명이 들려주는 행복의 방법과 마주하게 될 것이다.

법정스님은 추천서에서 "가난하지만 소박하고 지혜로운 유목민의 삶이, 도시의 사막에서 끝없이 표류하고 있는 오늘 우리들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스님의 말씀을 그대로 느낄 수 있었다.

* 인상 깊은 문장 :

"여행은 자기 자신에게로 떠나는 것이며, 또한 그 여행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삶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순간에는 소유해야 할 것도 잃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34쪽)

"유목민들은 늘 새로운 초목을 찾아 길을 떠난다. 황폐해진 땅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땅과 새로운 날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시간들 속에는 배움이 있다. 나는 삶을 여행하며 내가 가진 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다른 이들이 가진 것들을 나누어 받는다. 알고, 배우고, 깨닫는 것, 그것은 여행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며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이유가 된다."(12~13쪽)

"우리는 인내심을 통해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인내를 통해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머무를 수 있다. 우리 부족에 이런 말이 있다. “서두르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다.” 죽은 사람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관조할 시간도 없이 소멸을 향해 내달리기만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내심은 시간과 짝이 되어 여유 있는 행동을 하게 해 줌으로써 자신에게 충실하도록 도와준다. 참을성이 있으면, 우리 자신에게서 벗어나는 일이 결코 없다. 실제로 서두르다 보면 흥분하고 놓치는 것들이 많아져, 우리의 온 존재는 조화를 잃어버린다. 지각했을 때 버스를 기다리는 일은 성급한 사람에겐 고통이겠지만, 시간에 머무를 줄 아는 사람에겐 매우 풍요로운 시간이 될 수 있다.
행인들과 예쁜 여자들, 거리에서 펼쳐지는 삶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면 버스는 뜻밖의 선물이 된다. 더 이상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쳐 지나는 삶만으로도 우리 자신이 풍부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128쪽)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불멸의 작품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만들어지고, 흐르는 세월은 그것에 영혼을 불어넣는다. 우리 조상들은 말했다. “인내의 끝에는 하늘이 있다.” 나는 사람들이 “시간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몹시 놀랐다. 시간은 우리 것인데! 시간에 전념할 줄 안다면, 시간의 곡선을 따를 줄 안다면 시간은 우리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건 언제나 기다림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다. 때로는 현실로 이루어지기도 하는 기다림의 신기루를 양식으로 삼으며..."(130쪽)

"투아레그족 사람들이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배우고자 하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이다. 이는 곧 진정한 자아와 만나고, 자기 안에 평화를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는 배움을 얻기 위해 이 세상에 왔고, 그 배움을 통해 성장한다.
우리가 이 삶에서 겪는 모든 경험들은 영혼의 성장을 위해 주어진 것들이다. 삶이라는 커다란 운동장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되고, 그 경험을 통해 삶을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배움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자기 안에 평화를 발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타인들과 조화를 이루는 것 또한 우리가 배워야 할 중요한 사항이다. 타인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살려면 먼저 자기 자신과 평화로워져야 한다."(34쪽)

[ 2013년 8월 2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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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난당한 패스워드 - 한국 인터넷에서 살아 남는 법
김인성 지음, 이상.내리 그림 / 홀로깨달음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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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김인성 저 < 도난당한 패스워드 : 한국 인터넷에서 살아 남는 법 >을 읽고 / 2013. 06., 303쪽, 홀로깨달음

이 책은 네티즌의 자발적인 소셜펀딩 기부금으로 완성된 소셜 웹툰이고, 완벽하게 무너진 한국의 보안 현실을 고발하고 그 속에서 생존하는 법을 알려주는 만화책이다.

저자는 한국의 보안 현실이 직면한 위기를 고발하고, 그 속에서 생존하는 법을 알려주는 가이드북이자 한국 IT의 총체적인 모순이 집결된 보안 분야를 집중적으로 파헤친 모습을 만화로 그려냈다.
그는 허점이 많은 공인인증서, 마이크로소프트 - 윈도우 - 인터넷익스플로러로 단일화되어 단 한 개의 악성코드로도 전 국가가 초토화되는 보안 환경. 해킹 사고가 나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기업, 북한 탓만 하는 관계 당국, 세계화를 가로막는 한국식 보안 체계 등을 짚어내며 보안의 개념과 원리, 한국식 보안의 작동 방식과 문제점을 알기 쉽게 전달한다.

아마존과 이베이 그리고 페이팔을 사용하면서 내가 느꼈던 쾌적함과 국세청이나 은행 사이트, 쇼핑몰을 사용하면서 무지하게 불편함을 느낀 원인을 알게 된다. 그리고 내가 느꼈던 그 불편함은 기호의 문제가 아니라 보안 시스템 구조 자체에서 파생된 문제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보안 시스템 구조'라는 것은, 한국의 공인인증 기관은 미국을 포함하여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국가들에서 인터넷 표준으로 사용되는 국제표준 보안방식인 'SSL(Secure Socket Layer)'이 요구하는 검증을 받지 않고 있는 것을 말한다. 이 때문에 한국의 인증서는 국제 사회에서 신뢰성 있는 인증서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 세계화와 글로벌 스탠더드를 외치는 정부기관과 정치권, 대기업, 은행, 보안업체들이 실상 국제 표준을 어겨가면서 까지 폐쇄적인 보안 시스템을 운영하고 그로 인하여 전 세계 해커들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국제 표준 보안방식은 포털이나 은행, 기관 등이 보안을 책임지는 구조인 반면, 한국식 보안 방식은 한마디로 말해 개인에게 보안의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우리가 은행의 인터넷뱅킹을 시작하려고 할 때 다운로드 받는 여러 개의 프로그램은 결국 "보안의 책임은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컴퓨터 시스템에 설치하는 것에 불과하고, 컴퓨터나 인터넷 보안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개개인의 컴퓨터, 인터넷 유저들은 국내 보안업체의 시스템과 국내외 해커들의 장난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한국의 정보기관이나 수사기관이 미국 CIA만큼 국내외 해커의 위치를 추적하거나 그들을 막거나 잡아낼 능력도 없다.

정부와 정치권의 '개인에게 책임을 떠 넘기는' 방식은 제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의식의 문제이기도 하다. 정부나 정치권은 유권자 개개인의 인권과 복리를 책임지기 위해 주권자의 권한의 일부를 잠시 '위임'받은 것이다. 그렇다면 인터넷 보안은 정부와 정치권이 개인에게 책임을 떠맡기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구조적이고 시스템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세금을 낼 이유도 없고 직책을 받거나 월급을 받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인터넷 사용자 개개인이 IT나 인터넷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제도와 시스템으로 보안을 해결하려 하지 않고 개인에게 인증서를 잘 간수하라거나 백신 프로그램을 컴퓨터에 설치하는 식으로 보안을 해결하려는 태도는 공직자로서 근본이 안된 것이다.

물론 한국사회 전체가 이렇게 인터넷 보안을 엉망으로 구축하는 이유를 따지고 들어가 보면 보안업체의 이익과 보안업체와 연루된 수많은 정부기관 관계자들의 이해관계 때문임을 알 수 있다. 국제 표준 보안 방식을 이용하면 국내 보안업체의 존재 이유가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이 웹툰이 인터넷에 연재될 때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진실을 알고 싶어하는 독자를 위해 이 만화는 끝까지 연재했다.

그런 상황과 구조가, 농협이나 청와대, 정부기관의 인터넷 보안이 뚫리면 인터넷 보안의 구조나 시스템에 대한 문제제기나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가장 손쉬운 해결책인 '북한 카드'를 꺼내는 것이다. 여기에 '북한'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조선일보와 같은 극우보수 언론이나 어용방송이 그런 근거도 없고 허무맹랑한 '북한측 소행'이라는 기사를 남발하는 것이다. 
'북한'을 내세우면 모든 문제가 잠재워지고 아무도 떠들지 못한다는 한반도의 분단체제와 반북 이데올로기를 치졸하게 이용하는 것이고, 이런 계기를 통해 반북 이데올로기를 또다시 재생산하는 것이다. 남북화해와 협력, 남북교류와 평화협정이 IT산업과 같은 경제의 투명성과 발전을 위해서도 절실하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국내 최고의 보안업체라는 안랩의 성과나 사업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왜 그동안 안철수 씨가 국내 보안 시스템과 제도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진실을 저 너머에 있다."는 말이 새삼 다가온다.

IT산업이나 인터넷, 정보통신(핸드폰 포함) 분야에 대해 기존 언론이나 전문가들이 떠드는 내용이 아니라 좀 더 소비자에게 진실한 것들이 궁금한 사람들은 저자 김인성 교수가 발간한 <한국 IT산업의 멸망>(2011, 북하우스)를 읽기를 추천한다.

[ 2013년 8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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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에 反하여 희망하라 - 한총련을 위한 변명
최진섭 / 살림터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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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서평] 최진섭 저  < 희망에 반하여 희망하라 : 한총련을 위한 변명 >을 읽고 / 1999. 05., 312쪽, 살림터


이 책은 지난 2008년을 끝으로 활동이 종료된 학생운동 조직인 '한총련(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지메(왕따)' 현상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책이다. 특히 1996년 '연세대 사건'과 1997년 '프락치 오인 치사 사건' 발생 후, 한총련에 관한 한 우리 사회의 누구도 선뜻 한총련의 원군이 되지 않으려 하며 언론과 지식인 사회도 마찬가지였던 태도에 대한 비판서라 할 수 있다.
책이름 '희망에 反하여 희망하라'는 성서에서 인용한 말이다.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로마서 4장 18절) 후세의 사람들이 '믿음의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1985년 '전학련(전국학생총연합)'으로 시작된 학생운동 연합조직은 1987년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을 결성하고 그 해에 6월 민주항쟁을 주도하면서 군사독재정권의 6.29 선언을 끌어내고 대통령 직선제와 87년 헌법 개정이라는 성과를 냈다.
1987년 대선에서 야권의 단결을 이끄는 데 실패하여 대선에서 패배하였지만 1988년 그 해 5공비리와 광주항쟁 청문회를 이끌어내어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보냈고, 1989년 임수경 방북으로 오랫동안 금기로 묶여있던 '통일'을 대중운동의 광장으로 끌어냈다.
1990년 3당 합당과 1992년 대선 패배라는 극우보수세력에게 역공을 당하는 과정에서도 꾸준하게 학생운동 조직역량을 키워냈다.

전대협을 계승하여 1993년 출범한 한총련은 1993년 대학생 8~10만명이 모여 출범식을 거행했으며, 출범식 참석 인원이 1994년 조선대 5만명, 1995년 경북대 4만명, 1996년 전북대 16만명(?)으로 급격하게 늘어난 것처럼 강력한 대중조직으로 거듭났다. 이에 따라 한총련은 1995년 군사쿠테타와 광주시민 학살을 저지른 전두환, 노태우의 구속 기소와 사형 판결을 이끌어내는 데 가장 큰 힘을 발휘했다. 
한총련은 해방 후 친일파가 한국의 기득권으로 정착하도록 만들어 주고 군사독재정권과 재벌 독점을 지원해 준 미국에 대해 정확한 역사인식과 해결방향을 제시했다. 즉 반외세 투쟁과 평화통일 투쟁도 거세게 벌였다.
극우보수세력과 김영삼 정권은 이후 한총련에 대한 대대적인 이념공세와 폭력탄압으로 반격했다. 이런 탄압은 1996년 '연대 사태'와 1997년 '프락치 치사 사건' 그리고 학생회 간부에 대한 폭력적인 한총련 탈퇴 강요라는 반인권적적인 행태와 불상사를 낳았다.
한총련 조직은 급격하게 위축되었으며 1997년 출범식은 한양대가 봉쇄되어 무산되고 고려대에서 5천명이 정리집회, 1998년 조선대 5천명, 1999년 경희대 5천명까지 정체되다가 2000년 부산대 2만명, 2001년 한양대 5만명, 2002년 서울산업대 1만명으로 부침을 격었으며 이후 침체를 거듭하다가 2008년 한총련 의장 선출에 실패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한총련 탄압에는 보수적인 사법부도 기여했다. 1999년 6기 한총련이 대법원에 의해 국가보안법상 이적단체로 판결되어 정부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았고 언론과 정치권, 지식인들로부터도 마녀사냥을 당했다. 이후 강령과 규약을 일부 변경한 2004년에도 또다시 대법원이 이적단체로 규정하여 시민단체와 학생회들의 반발이 거세게 일었다.
국가보안법은 1999년 방송사 전화여론조사에서 시민들의 66%가 개정 내지 폐지에 찬성한 대표적인 악법이고, 국제앰네스티 등 국제사회에서 매년 폐지를 촉구당하는 상황이며, 참여정부 시절 폐지를 추진하다가 좌절된 바 있다.
한총련이 대법원에서 이적단체로 판정된 주된 이유는 한총련의 투쟁 목표인 '주한미군 철수'와 '연방제 통일' 등이 단순히 북이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이유였다. 그렇다면 '일본의 전쟁범죄 사죄와 보상' 역시 북이 주장하는 것이기에 국가보안법 상 찬양,고무이고 그런 개인은 이적행위이며 조직은 이적단체가 되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된다. 즉 국가의 주인인 국민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국가보안법 자체가 위헌이고 정당성이 없는 것이다.

특히 한총련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전대협동우회 등 전대협 출신 일부가 한총련에 대한 극우보수정권과 언론의 탄압에 대해 침묵하고 동조함으로써 후배들에 대한 마녀사냥이 동참한 것이 한총련 세대들에게도, 사회운동측에게도, 한국사회 전체에서도 뼈아픈 일이었다. 한총련에게도 비판받을 면들이 많았을테지만, 비판과 왕따(배제, 마녀사냥)은 전혀 별개다.
소위 민주정부라 불렸던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서 연거푸 한총련을 탄압하면서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를 지키지 못한 것과 국가보안법을 폐지 내지 전면 개정하지 못한 것은 민주정부가 대다수 국민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지지를 받지 못하고 헌법을 올바로 세우지 못하는 큰 이유 중 하나인 셈이다. 극우보수세력의 전가의 보도인 국가보안법과 분단트라우마를 획기적으로 개선시키는 데 필요한 제도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다.

1998년 11월 한국기독교회관 2층 강당에서는 '한총련 이적규정 철회를 위한 목요기도회'가 열렸다. 이날 기도회에서 강연을 맡은 강희남 목사의 연설, 1998년 10월 목요기도회에서의 홍근수 목사의 강연, 1998년 가을 김종맹 목사의 조선대 교지 인터뷰 일부를 소개하면,
"3.8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학생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서 '나는 죄인이다'고 자책한다. 한총련만이 민족의 예속에 분노하고 저항할 줄 안다. 한총련은 아직도 살아 있는 민족의 양심이다. 국민들은 나라가 외세에 종속되어 있고 외국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데도 분노할 줄을 모른다.
구한말의 어느 선비는 글 배운 사람들이 사람 노릇하기 힘들다고 했다. 수많은 선비들이 총들고 싸우거나 자결로써 외세에 저항했다. 그런데 지금 대다수 지식인이 분단이 역사를 방관하고 있다. 역사는 이들의 태만함과 비겁함을 묵인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은 지식기사에 불과하다. 이들 모두를 합쳐도 몸을 던져 싸우는 한총련 학생 하나만도 못하다.(강희남 목사)"

"한총련 학생들이 꽉 막힌 역사의 출구 앞에서 고난을 당할 때, 우리 기성세대는 무엇을 했고 무슨 말을 했는가? 우리는 한마디로 말해서 비겁하고 용기가 없어서, 역사에 대해서 무책임하여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만일 예수님이 이 사회에 오신다면, 그는 틀림없이 좌경, 용공, 빨갱이라고 낙인찍히고, 유죄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할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에수님이 빨갱이로 규정된다면 예수의 제자로서 좌경이면 어떻고 용공이면 어떻습니까?(홍근수 목사)"

"지금 우리 사회는 재야단체가 실종된 위기시대라고 생각한다. 군부독재시대에 많은 재야인사들이 탄압 속에서도 투쟁했지만 문민정부 들어서면서 재야가 유명무실해지고 군부독재 시절의 재야인사들이 모두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도 되는 등 자기의 자리를 확고히 차지하고 있다. 노동자들과 학생들만이 외롭게 고통당하고 있고, 대부분의 재야인사들은 관망만 하고 있을 뿐이다. 한총련은 한국 학생운동사의 정통성을 잇는 큰 동맥이다.
이제는 새로운 재야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한학협(한총련학부모협의회)은 순수한 학부모들로 구성할 것이고 만약 학부모들의 한계점이 나타난다면 순수한 인권단체들과 함께 연대해서 문제를 풀어볼 생각이다. 시작은 순수하게 한총련 학부모들로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21세기 우리의 통일조국을 이끌어나갈 사람들이다. 학생들을 훌륭하게 여기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부모가 자식들을 억압하고 무시하면서 키운다면 삐뚤어질 수밖에 없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역사가 증명해 주듯이 대통령이라고 해서 학생들을 탄압하고 무시한다면 그 정부는 성공할 수 없다. 학생들을 탄압한 정권은 망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의 정부가 성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역사를 지고 나갈 젊고 귀중한 학생들의 입장을 존중해 주고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김종맹 목사)"(p.272~275)

그 때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그분들은 여전히 똑같은 말을 하실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 같다. 한총련의 왕따 과정을 살펴보니 작년 통합진보당에 대한 엄청난 언론 왜곡 공세와 마녀사냥, 왕따와 종북공세가 떠오른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한국사회에 꼭 들어맞는 교훈이다.
1990년대 중후반 이후 한총련이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당할 때 이를 지지,지원해주 않고 오히려 분단 마녀사냥에 가담한 선배들, 지식인들, 정치인들의 과오가 너무나 컸다. 그리고 참여정부 시절 국가보안법을 폐지 내지 개정하지 못한 당시 국회의원들, 장관들, 청와대 참모들, 지식인들, 언론인들, 학자들, 법조인들은 모두 국가 범죄, 극우보수세력의 악행을 저지하지 못한 죄를 저지른 셈이다.
당사자들은 지금이라도 뼈를 깍는 각오를 하고 국가보안법 폐지에 나서야 한다. 국가보안법이 이 땅에서 존재하는 한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총련은 '이적단체'에서 복권되어야 하며, 역사는 그들을 '민족자주와 평화통일의 전사'라고 평가할 것이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악법의 거미줄로 둘려싸여 있는 사회에서 있을 곳은 감옥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양심을 버려 준법서약서를 써서 사면되느니 차라리 감옥을 택하는 사람들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는 최진섭의 시각은, '반백 년이 넘도록 분단의 마취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등을 내리치는 죽비가 되어 독자 가슴을 울릴 것이다."(편집자의 말)

* 이 책을 통해서 박노해(박기평) 시인이 왜 최근까지도 민주진보진영측 대다수 사람들에게서 신뢰와 애정을 받지 못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동안 막연히 주변 친구 몇 명에게서 박 시인의 사적인 평판에 대해서만 들어왔는데, 이 책을 통해 박 시인이 1990년대 말 악명 높은 '준법서약서'에 날인하고 감옥에서 나왔고 당시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알게 된 것이다.
비록 10년이 훨씬 넘은 과거의 일이지만, 현재 박 시인의 모습과 당시의 모습은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아니면 당시 생각과 행동의 연장선인가. 사람의 일이란 참 모를 일이다.

[ 2013년 8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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