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
로버트 달 지음, 배관표 옮김 / 후마니타스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로버트 달은 평생 민주주의 연구에 헌신해 온 미국의 21세기 대표적 정치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 책에서 법인 자본주의로 인한 경제적 불평등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왔다는 진단에 그치지 않고, 법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정교화하려 하고 있다.
사유재산권을 절대 불가침의 자연권으로 정당화하는 법인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조목조목 비판하는 데서부터 시작해, 법인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보겠다고 선언한 저자가 제기하는 질문은 다음과 같다. "국가에서는 인정할 수 없다던 권위주의적 통치 체제를 기업에 대해서 인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기업은 민주화할 수 없는가?" 무엇이 미국 정치학계의 주류에 우뚝 선 노학자에게, 퇴직 이후 발간한 첫 책에서, 이토록 대담한 주장을 하도록 만든 것일까? 
이 책과 함께 읽은 김상봉 교수의 <누가 기업의 주인인가>에서는 철학적 분석을 통해 '노동자 경영권'의 근거와 정당성을 논증했다면, 이 책에서는 정치적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관점에서 '노동자 경영권'의 정당성과 필요성을 역설한다. 두 사람은 논증의 출발점과 구조는 다르지만 결론은 동일하다. 다만, 김상봉 교수가 '노동자 경영권'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반면 로버트 달은 '자치 기업'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작년(2011년) 7월 28일 공정거래위원회는 자산 기준 5조 원 이상 55개 상호출자 제한기업집단의 주식 소유 현황 등을 분석한 결과를 공개했다. 조사 결과 38개 재벌그룹 총수 일가의 평균 지분율은 4.47%로 나타났다. 특히, 이 가운데 총수가 있는 38개 재벌그룹을 보면, 에스케이그룹(0.79%)과 삼성그룹(0.99%)은 총수 일가가 1% 미만의 지분으로 그룹을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총수 개인으로 보면 구자홍 엘에스(LS)그룹 회장이 0.04%,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이 0.05%의 지분율로 그룹을 지배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지분율도 0.54%에 불과하다. 평균 5%도 되지 않는 주식 소유로 수백조 원대의 기업들을 한 가족이 또는 한 개인이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0년, 한진 중공업 경영진은 경영 실적 악화를 이유로 170명을 정리해고한 다음날, 176억의 배당금을 나눠 가졌으며, 20억 원을 들여 용역을 투입,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그리고 최근 6대 재벌기업에 정치인을 할당해 집중 로비를 벌이도록 한 전경련의 문건이 공개되어 새삼 충격을 던져 주었다. 여기에는 정치권을 향한 재계의 공공연한 로비뿐만 아니라 최고 경영자의 국회 청문회 불참까지 공모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두 가지 사건은 21세기 법인 자본주의의 얼굴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다. 
과연 이와 같은 법인 자본주의에서 재벌 총수와 노동자는 정치적으로 평등하며 똑같이 정치적, 경제적 기본권을 보장받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간다고 할 수 있을까? 2012년 들어 정치권에서 난무하는 '경제 민주화'가 실제로 가능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로버트 달이 책의 1장에서 토크빌을 빌어 지적하는 것 역시 바로 위와 같은 현실이다. 1831년 아메리카 대륙의 평등한 조건 속에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바라보았던 토크빌은 평등이 자유를 위협할 것이라고 진단했지만, 오늘날 우리는 정반대의 상황에 놓여 있다. 법인 기업의 자유가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이것이 정치적 자원의 불평등에까지 이어지면서 결국 민주주의가 허울에 불과한 것으로 되어 버린 사회가 바로 그것이다. 달의 분석에 따르면, 이런 불평등을 초래한 자유는 경제적 자원을 무제한으로 축적할 자유와 경제활동을 위계적 통치 구조를 지닌 기업으로 조직화할 자유이며, 따라서 오늘날 우리의 운명은 법인 기업의 자유에 맞서 평등을 보호할 대안을 모색하는 데 달려 있다. 

저자는 토크빌이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제시한 시대적 조건과 문제의식을 기초로 토크빌이 고민하던 시대에서 270년이 지난 현대사회의 자유와 평등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그 때 당시 토크빌은 미국 시민들의 '평등한' 정치적, 경제적 수준이 오히려 '다수에 의한 소수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가져올 위험을 우려했다. 하지만 토크빌의 우려와 달리 미국의 상황, 그리고 자본주의의 상황은 꺼꾸로 진행되었다. 특히 '사적 자유'를 근거로 무한하게 확대된 '기업의 자유'는 경제 영역에서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자본과 경영자의 독재를 정당화시켜 버린 것이다. 그리고 기업의 '무한 자유'는 왜곡된 경제적 자유를 통해 '시민들의 정치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불평등과 자원의 불평등을 심화,확대시켰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는 기업의 소유와 통제로 인해 나타나는 불평등을 줄임으로써 정치적 평등과 민주주의를 강화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대안적 경제구조의 가능성을 모색하였고, 결론으로 '자치 기업'을 제시한다.

로버트 달은 민주주의와 정치적 평등, 그리고 경제적 자유에 대한 논증과 민주적인 경제 질서, 그리고 기업 내 민주주의에 대한 권리의 측면에서 자신의 논증을 펼친다.
저자는 '사적 자유'로부터 출발한 '사유재산권'이 기본권이라는 기존의 주장이 논증의 근거가 부족하거나 권리의 범위를 제대로 정의하지 못해 부적절함을 논리적으로 비판한다. 사유재산권은 최소한의 자원, 특히 생활에 필수적인 자원 채집, 자유와 행복 추구, 민주적 절차 그리고 기본권 실현에 필요한 자원들에 대한 권리를 보장할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시민의 대표들은 "민주적 절차를 통해 민주주의, 공정성, 효율성 등의 가치를 추구하고, 바람직한 인간성을 함양하며,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수적인 최소한의 개인적 자원을 확보할 수 있도록 기업을 어떻게 소유하고 통제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가능한 대안으로써 '기업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통치하는 기업 체계', 즉 '자치 기업'을 제안한다. 그는 자치 기업이 "정의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신장시키는 데 공헌하고 시민들 간의 이익, 목표, 관점, 이데올로기 등의 대립을 일소해 주지는 못하지만, 이익 갈등을 줄여주고 모든 시민들이 국가 통치에서 정치적 평등과 민주적 제도들을 유지하는 데 대한 동등한 이해관계를 갖도록 해줄 것이고, 공정성의 기준에 대한 좀 더 확고한 합의에 이를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라고 말한다.
기업 내 민주주의에 대한 권리라는 측면의 논거는 단순한 논리로 출발한다. 그것은 "만약 국가 통치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면 기업 통치에서도 역시 그 정당성을 인정해야 하며, 기업 통치에서 민주주의의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면 국가 통치에서도 그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p.120)"이다. 

해방 후 70년 동안 한국사회를 지배한 상류층 기득권자들은 미국이라는 나라를 맹목적으로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이 추종해 마지 않는 미국 민주주의의 내용과 역사를 알기 위해 참고할 만한 책은 알렉시스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다. 그래서 로버트 달이 <미국의 민주주의>를 자신의 논증을 위한 자료로 선택했다는 것은 한국의 주류 기득권층이나 주류학자들에게 의미가 있다.
토크빌은 정치적 평등과 민주주의, 자유가 미국이라는 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았다. 그리고 그 가치를 위해 네 가지가 요인을 강조했다. 네 가지는 "1. 경제적 풍요나 물질적 번영의 확대, 2. 권력과 사회적 기능들이 상대적으로 독립된 다수의 결사체, 조직, 그리고 집단으로 분산되는 것, 3. 헌법에 의한 권력 집중의 제한, 4. 사람들의 관습 및 문화(p.55~58)"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취약한 이유는 아마도 네 가지 모두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토크빌이 제기한 두 번째, 즉 '독립된 다수의 결사체'는 한국사회의 민주주의에서 반드시 환기시켜야 할 문제라 할 수 있다. 한국은 종교적인 부분이나 동창회, 향후회 같은 학연, 지연을 제외하고는 정치, 직업, 경제, 사회, 문화 부분에서 '독립'된 '다수'의 '결사체'가 턱 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의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강화시키려면 자발적인 독립 결사체로써 정당, 후원회, 노동조합, 농민회, 직업조직, 직능조직, 계급조직, 계층조직, 시민단체, 문화단체 등에 대한 국가적, 제도적 지원이 훨씬 강화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18대 대통령 선거가 한창인 요즘, '빅3'로 불러지는 박근혜, 문재인, 안철수 후보의 정책과 공약을 살펴보면 토크빌이 이야기하는 '민주주의의 조건'에 한참 밑도는 수준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토크빌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두 가지 종류의 평등을 강조했다. 그것은 '정치적 자원의 평등'과 '권력의 평등'이다, 토크빌이 말하는 정치적 자원의 평등은 "정부에 대한 시민으로서 법적 권한 뿐만 아니라 지식과 부, 소득, 사회적 지위에 있어서도 어느 정도 평등한 상태에 도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런 정치적 자원들이 어느 정도 평등하게 분배된다면 권력 배분, 즉 정부를 통제하는 권력의 배분에 있어서도 대체로 평등해질 것"(p.18)이라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사회경제적 평등의 달성 정도가 정치적 평등의 달성 정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말한 것이다.
요즘 한국 정치계에서는 투표시간 연장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억압적인 기업문화와 열악한 노동조건, 자영업자 등을 고려할 때 투표시간 연장은 충분히 필요하고 의미있는 조치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유권자가 누구를, 어떤 정당을 자신의 어떤 판단과 기준으로 선택할 것인가'라는 문제에 부딪히면 투표시간 연장은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까지는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하루하루 먹고 사는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유권자들, 고용과 소득이 불안정한 비정규직들, 정보와 언론에서 소외되는 저소득층은 투표시간을 몇 시간 추가로 보장해 준다고 하여 자신의 이익과 이해관계를 기준으로 정치적 입장이나 의견을 가지기 어렵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투표권만 주어지면 정치적으로 평등하다는 한국사회의 일반적인 인식이 얼마나 부족하고 본질을 꿰뚫지 못하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이 문제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경제적 민주주의의 본질적인 내용과 관련이 있다.

아무튼, 김상봉 교수의 '노동자 경영권'이나 저자의 '자치 기업'이 당장 한국 경제영역에서 거론되기 어렵지만 앞으로 꾸준하게 문제제기하면서 일반적인 '상식'과 '인식'을 고쳐가야 할 것이다.

* 인상 깊은 문장 :
- 토크빌과 그 이전 사람들이 미래에 나타날 새로운 경제 질서가 어떤 모습일지 제대로 예상했더라면, 평등과 자유의 문제를 아마도 다르게 보았을 것이다. 과거의 시각에서는 시민들 사이에서의 평등이 자유를 위협했다면, 새로운 현실에서는 법인 기업의 자유가 오히려 시민들의 정치적 삶에 영향을 미치는 자원의 불평등을 조장했기 때문이다.(p.11) 

- 미국인들은 법인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대안이 과거 민주주의에 헌신했던 자신들의 삶에 더 부합하지 않을까 끈기 있게 자문해 본 적이 결코 없었다.(p.85) 

- 기업도 국가와 마찬가지로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정치 체계다. 그렇다면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업 내의 통치자와 피통치자 간의 관계도 민주적 절차의 기준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게 맞지 않을까?(p.124)

- 기업이 쇠퇴할 때 노동자들이 감수해야 할 고통이 투자자들이 겪는 고통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면 돈 많은 투자자들이 시황에 따라 주식시장을 드나드는 것보다 노동자가 한 직장을 그만두고 구직 시장에서 새로운 직장을 구하는 것이 훨씬 어렵고, 손해도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을 내다보는 눈이 웬만큼 있는 노동자라면 합리적인 투자자나 경영자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장기적인 효율성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p.132)

- 어떤 소유 형태가 좋을지 판단하기 전에 그것이 자본주의적인지 사회주의적인지부터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질문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질문일까? 정말 중요한 질문은 소유 형태에 어떤 꼬리표가 붙어 있는지가 아니라 그 소유 형태가 사람들이 자신의 기본 가치를 실현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이다. 자본주의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자치 기업 체계가 자본주의로 분류되지 않으면 자치 기업 체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주의에 집착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굳이 그렇게 단순하고 융통성 없는 이데올로기적 관점으로 따지자면, 협동조합 소유는 이쪽에 속할 수도 있고, 저쪽에 속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양쪽에 속할 수도 있고,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을 수 있다.(p.161)

- 일터에서의 자치 문제는 그 결과를 보고 정당성을 찾을 필요도 없으며 국가 통치에서 자치가 당연한 권리이듯 일터에서도 자치는 당연한 권리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것이 내가 논증하고자 하는 것이다. 국가 통치에서 민주적 절차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민주주의를 버리고 수호자주의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어불성설이듯이 기업 통치에서 민주적 절차가 불완전하다고 해서 수호자주의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볼 수는 없다.(p.163) 

- 경제적 자유도 여타 자유들 가운데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미국인들은 경제적 자유가 개인적이고 양도할 수 없는 재산권도 포함한다고 이해해 왔다. 소유권을 기업에 적용해 보면, 이는 국가가 정해 놓은 한계 내에서 기업을 통치할 권리를 수반한다. 과거 농장과 소기업의 운영을 정당화하던 소유권의 논리는 규모가 큰 법인의 통치에까지 확장되어 비민주적 통치를 정당화하고 합법화했으며, 이는 거의 통제할 수 없는 권위의 지배 아래 일하는 모든 이들의 대부분의 삶에 깊숙이 침범해 들어갔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국가 통치에서는 용납할 수 없다던 통치 체계를 기업 통치에서는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p.172)

[ 2012년 11월 02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 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
김상봉 지음 / 꾸리에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12월 대통령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큰 정책화두 중 하나가 '경제민주화'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대통령 후보들의 말과 행동에 언론과 사람들이 휩쓸려 다닌다. 경제민주화란 도대체 무엇일까?
정치민주화가 정치 영역에서 '주권재민'과 자유, 평등, 절차 공정성이라면, 경제민주화는 경제 영역에서 동일한 내용을 담보하는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 한국 대선에서 거론되는 경제민주화는 추상적인 재벌개혁이나 사회적 안전망, 공정경제나 상생경제 수준일 뿐이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정치민주화 관점을 적용한 경제민주화란 무엇일까?
 
이 책과 로버트 달의 <경제 민주주의에 관하여>는 경제민주화의 본질 중의 하나인 주식회사 기업의 소유권과 경영권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저자는 원래 '서로주체성'에 관한 담론을 재기해 온 철학자이다. 그는 <학벌없는 사회>에서도 사람들의 주체성을 박탈하고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학벌체제를 폐지하기 위해 '학벌 없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 바 있다.
이번 책에는 마찬가지 '서로주체성'이라는 철학적 개념에 근거하여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기업 형태인 '주식회사'를 분석하였다.
 
저자는 "왜 경영자를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면 안되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야기를 꺼낸다. 한 국가의 구성원들이 대통령을 뽑듯이, 대학의 총장을 학교의 구성원들이 뽑듯이 회사 사장도 노동자들이 뽑으면 안되는가를 묻는다.
그는 개인기업은 기업주의 사적 소유재산이므로 그것의 운영권 역시 당연히 소유주 개인에게 속하는 것이 옳지만, 주식회사는 원래 주인이 없는 기업이므로 얼마든지 노동자들 또는 종업원들이 경영권의 주체일 수 있으며 스스로 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한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저자는 노동자 경영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라는 법 조항을 상법애 신설하자고 주장한다.(대신 경영진을 감시할 감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하는 것으로...)
 
"사적 소유와 사회적 소유 모두 '소유'를 기준으로 한다. ... 위대한 철학자들이 자유가 소유에 기초한다고 생각한 것은 자유를 선택의 문제로 오해했기 때문이다."(p.104) "하지만 자유는 근본에서 보자면 대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스스로 형성하는데 존립한다" "자유는 자기가 하는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p.105)
 
저자의 추론을 요약하면 이럴다. 저자는 자유와 소유에 대한 근본개념을 비판하면서 경영권을 다룬다. 자유의 전제가 소유는 아니다. 사람이 소유의 대상일 수 없듯이 권력도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주식회사 법인은 법에 의하여 경제 영역에서 사람과 같은 '인격'을 부여했기 때문에 특정인의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주주의 유한책임과 주식양도 자유의 원칙 등을 고려할 때 주주는 주식에 대한 소유권과 배당권을 가질 뿐 경영권을 가질 근거가 없다. 또한 국가마다 주식회사의 지배구조와 경영권 구조가 다르다. 경영권은 소유권이 아니라 권력에 해당하기 때문에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기업경영을 칸트의 유기체 개념으로 추론한다면 관료적이고 독재적인 기업조직은 기업의 구성원들의 서로주체성을 침해할 수 밖에 없다. 경영진을 종업원 총회에서 선출하는 것은 서로주체성 관점에서도 타당하다.
 
"권력은 사물적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다. ... 소유권이 아니라 정당성만이 권력의 문제인 것이다"(p.120)
"자본주의의 근본 모순은 다른 어디도 아니고 사물의 소유권과 경영권을 뒤섞어버린 데서 비롯된다"(p.130)
 
주식의 소유와 주식회사의 소유의 본질과 차이점, 경영권의 독자성과 특별함에 대한 저자의 철학적, 법적 해석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부분도 있다.
"법인 역시 그 자체로서는 인격이 아니지만 법에 의해 자연인과 마찬가지로 법적인 권리주체로서 인정된 인격이다"(p.151)
"엄밀하게 말하자면, 주식회사에서 소유와 경영이 분리될 수 밖에 없는 까닭은 주식이 너무 광범위하게 분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주식회사의 본질상 주식의 소유와 기업의 경영권 사이에 아무런 필연적 관계도 없기 때문이다" "주식회사의 경우에는 소유권 자체가 어떤 근원적 불안정성 속에 있기 때문에 경영권 역시 동요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p.171)
"하나의 주식 속에 주식회사에 대한 어떤 소유권도 들어있지 않다."(p.175)
"주식회사의 주주는 주주의 유한책임의 원칙에 기대어 경영의 실패에 따른 무한책임을 회피할 수 있다. 바로 이 무책임성 때문에 주식회사는 아무리 한 사람이 모든 주식을 소유한다 하더라도 참된 의미에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다"(p.177)
"주주들은 기업경영에 대해 관심도 책임도 없다. 오로지 배당과 주가상승만을 원한다. 불만이 있으면 처분하고 떠나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 무책임성이 주식회사의 본질적 특성이다. ..... 따라서 주주총회에서 선출되는 이사회는 주주들의 대표기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주식회사는 법인으로서 소유의 주체는 될 수 있지만, 소유의 대상은 될 수 없다"(p.179)
 
저자가 자신의 논증을 하는 가운데 동의하기 어려운 대목도 적지 않다. 대부분 저자의 논증에 결정적인 하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내가 생각하지 못하는 결함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저자가 말한 '국가권력이 기업을 통제하지 못한다'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국가가 기업을 통제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근본에서 보자면 이처럼 기업이 세계화를 이끄는 주체인 까닭이다"(p.39) 국가권력이 기업을 통제하지 못하는 부분은 민주주의가 작동하느냐의 문제인데, 그렇다면 경제민주화도 노동자 경영권도 물거품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이 어떤 세력구도로 구성되어 있는지에 따라 다르다. 그 측면에서는 미국,영국과 유럽 국가가 다르고 한국과 일본이 다르다.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간의 참된 '만남'을 방해하는 지배체제는 결국 자유를 열망하는 인간의 손에 해체될 수 밖에 없는 것이 역사의 엄연한 철칙이다"(p.41) '고대 로마제국 이후 중세 유럽의 종교권력의 장악은 역사의 필연'이라는 글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전형적으로 서구식 세계관과 역사관의 결정론적 함정이라 생각한다. 자유와 '만남'의 힘과 억압과 지배의 힘은 유동적이다. 지난 5천년간 인류의 역사는 지배세력이 거의 주도했고 가끔 자유와 '만남'이 주도했을 뿐이다.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집필하기 위해 대영도서관을 소유할 필요도, 멘델스존이 교향악을 작곡하기 위해 교향악단을 소유할 필요도 없다", "노동자가 기업의 노예가 아니라 기업의 자유로운 주인이 되기 위해 기업을 반드시 소유해야 할 필요는 없다"라는 표현도 동의하기 어렵다. 노동자가 자유를 위해 기업의 소유권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과 마르크스, 멘델스존의 경우는 연결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와 맨델스존은 노동자처럼 누구에게 구속,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도서관은 '이용'하는 것이고 교향악은 '관람'하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이 타당함과는 별개로 노동자 경영권의 현실적인 제약조건도 많을 것임을 느낀다. "자본가가 아무리 많은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통해 노동자를 노예적으로 지배하는 권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p.75)
그동안 자본가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수 백년 동안 이어져온 초과이윤 착취를 욕망해왔다. 그 욕망이 자본가와 자본주의, 주식회사를 자탱해 온 '본질'알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욕망을 구조적으로 차단한다면 자본가의 창업이나 자본주의 자체의 유지가 가능할까? 자본가는 기업을 설립하거나 기업에 투자하지 않을 우려도 있다. 소위 자본 파업이 성립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가 독일의 노사결정제도(직장평의회, 감독이사회), 미국의 주주자본주의, 일본의 종업원 중심주의와 한국의 재벌 자본주의를 비교한 대목이 있다. 독일과 미국은 제도적으로 운영되고 일본은 사회적 관습과 문화로 유지되고 있지만, 모두의 공통점은 '공공성'이다. 한국의 재벌 자본주의에는 손톱 만큼의 공공성의 흔적도 없다. 삶의 질이나 국가의 수준이 드러나는 것이라 무지 우울했다.
 
[ 2012년 10월 30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용 인간의 맛
도올 김용옥 지음 / 통나무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역사를 '진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나는 역사를 '중용'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역사정칙주의(historicism)'라는 것은 인류 역사의 미래를 확정적으로 예견할 수 있다는 모든 망상을 의미한다. 물론 마르크시즘이나 공산주의도 그러한 망상의 한 전형이다. 기독교 종말론의 사관이나 헤겔의 변증법적 사관 또한 그러한 망상의 전형임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인류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인간 존재를 '해방'의 대상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자유주의자'도 아니며, '평등주의자'도 아니다. '중용'은 하나의 주의가 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나를 '중용주의자'라고 부르지는 않겠지만, 하여튼 나는 이러한 문제에 관하여 철저히 '중용'의 입장을 취한다. '중용'은 오직 자유와 평등을 포섭하는 가치로서만 우리의 심성에서 꽃을 피운다."(p.15)
 
도올의 <맹자, 사람의 길>을 읽고 도올의 동양고전 해석에 맛을 보았으니 이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책의 서문에서 위와 같은 도올의 '선언'을 접하니, 서양식 가치관에 회의적이었던 나로서는 이 책에 대해 적지 않은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나 역시 서구식 가치관에 부정적이다. 서구식 가치관은 아직도 너무 이분법적이다. 기독교적 세계관은 사람이든 상황이든 '천사 : 악마'로 규정하고, 근대 가치관은 세상을 '진보 : 후퇴'로만 규정한다. 삶과 죽음, 좌파 대 우파, 정의와 불의, 착취와 억압, 적과 아군... 하지만 삶은 죽음을 안고 시작한 것이고, 좌파가 없이는 우파가 불가능하다. 여자 없이 남자가, 낮이 없이 어찌 밤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식으로 사람이나 세상을 나누게 되면 오히려 서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부정하는 꼴이라 할 수 있다. 자유 없는 평등이 어떻게 가능하며, 평등이 없이 어찌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하겠는가. 그렇다면 서구식 가치관을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관은 무엇일까? 동양고전에 대한 학습은 새로운 가치관을 찾기 위한 여정일 것이다.

<맹자>를 읽고서도 느낀 바지만, 이 책을 한 번 읽는 것으로 내가 <중용>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없다. 초등학교부터 지금까지 서구식 가치관과 학문, 문서 등에 익숙한 내가 수 천년간 이어져 내려온 동양식 가치관에 입각하여 '중용'의 지혜를 앍어내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논어>가 공자의 말과 대화를 그대로 정리한 것이라면, <중용>은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공자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도올은 1장 '천명장(天命章)'에서 중용의 철학이 양 극단의 '중간'이라는 생각을 근대식 편견이고 단견이라며 배격한다. <논어>에 나오는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도올은 "'중용'이라는 덕성을 규정하기 위한 철학적 논술의 맥락이 아니라 제자들의 언행이나 위인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대체적인 경향성을 평론하는 단편적 표현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라 해석한다. 
도올이 해석하는 '중용'은 "직선의 가운데가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위와 감정의 발현태의 원초적 저변을 형성하는 잠재태이며 그것은 직선적인 것의 중간이 아니라 모든 상황에 대한 원융한 구심점 같은 것"이다. '중(中)'이란 "희(喜), 노(怒), 애(哀), 락(樂)이 아직 발현되지 않은 순결한 심적 에너지의 근원 같은 것이다. 미발(未發)이기 때문에 그것은 치우침이 없으며 분별심이 없으며 모든 가능성을 내포하는 것이다. 즉, '가운데'가 아닌, 모든 감정이 동적인 평형(平衡)을 아루고 있는 원초적 상태와 같은 것"이다.(p.93/ 음.... 이처럼 이해하기가 무지 어렵다..ㅋ)
6장 '순기대지장(舜基大知章)'에도 '중용'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양단의 중앙이 아니라, 모든 극단의 상황들을 충분히 고려해보고 그 숙성된 상황 변수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결단이라는 뜻"(p.163)이다.

12장 '군자지도(君子之道)'와 '부부지우장(夫婦之愚章)'에는 내가 도덕시간에 배웠던 '삼감오륜(三綱五倫)'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하지만 도올은 명나라에서 전해진 '삼강오륜'은 애초 공맹사상에 없었다고 말한다. 원초적인 규정은 <중용> 20장의 '오달도(五達道)'인 군신, 부자, 부부, 곤제, 붕우관계다. 고대의 중국 유가사상가들은 인간관계를 이 다섯 관계로 통칭한 것이다. 사람은 혼자가 아닌 '인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장에는 동양식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던 부부관계의 중요성이 나타나 있다. "우리가 새삼 깨달아야 할 중대한 사실은 오륜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전체적인 종합적인 평면에 놓고 본다면, 그 가장 본질적인 관계는 부부관계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아버지와 엄마라는 부부관계 없이는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부부관계는 부자관계, 형제관계에 선행하는 것이며, 가장 본질적인 관계가 된다." 
 
<중용>에 대한 도올의 현대적 재해석에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부분이 많다. 예를 들어, '중용'은 부부관계가 자연적 당위성과 문명적 당위성의 합체적인 성격으로 본다. 도올은 "<중용>의 부부예찬은 세계문명사에 유례를 보기 힘든 선진적인 것. 더군다나 '일부일처제'를 전제로 하고 있다."(p.171~172)고 설명한다.
13장 '도불원인장(道不遠人章)'에서 <논어>의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에 대한 추가 해석은 서구식 가치관과의 비교 또한 훌륭하다. <중용>의 '시저기이불원(施諸己而不願) 역물시어인(亦勿施於人)'은 기독교 성경의 마태복음 7장 12절과 대비된다. 마태복음은 "자신에게 베풀어 보아 원치 아니하는 것은 또한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 또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Whatever you wish that men would do to you, do so them)"인데, '시저기이불원 역물시어인'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도 좋아하리라는 보장이 없기에 '사랑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사랑은 나를 기준으로 하는 '베품'이 아니다. 부정형의 명제만이 인간세에 보편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p.198)고 설명한다.
17장 '순기대효장(舜基大孝章)'에서 '효(孝)'에 대한 개념도 조선 이후 한반도에서 받아들인 '효'와 다르다. 도올은 "효를 단순히 개인덕 덕성의 성취의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효를 중국 인문문명의 전범을 세운 초창기 혁명가들의 너무나도 리얼한 사회적 덕성의 성취로 파악하고 있다", "혁명(革命)은 천명(天命)을 가는(革) 것이다. 혁명을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명(受命)이 필요하다. 수명이란 명(命)을 하느님에게서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독(愼獨)과 수신(修身)을 통하여 성취하는 것이다. 그 신독과 수신의 연속성을 보장하는 것이 바로 효(孝)이다.", "효는 본원적으로 생명의 창조를 위한 절대적 선(善)의 체험이다."(p.233)라고 설명한다.

23장 '기차치곡장(基次致曲章)에서 서양적 사고방식과 동양적 사고방식의 근본적 차이, 근대니 현대라는 개념이 동양에 무의함을 역설하는 대목도 특별하다. 질문의 중요성이 제기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너 요즈음도 마누라 패냐?" 누군가 갑자기 이렇게 물으면 뭐라 답해야 하는가? Yes or No? 평소에 아내를 패던 사람이라면 모르되, 근본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인간은 과연 근대적이어야 하는가? 인간의 역사은 서양사가 말하는 '근대(modern period)'을 구현해야만 하는가? ... 서양의 근대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기준은 종교적 가치와 결부되어 있다. 근대 이전이란 반드시 이성보다는 계시를 중시하고, 합리적 사유보다 비합리적 사유를, 개인의 자유의지보다는 신에게의 복속을 높게 평가했다. 이런 종교가 없던 사람들에게 '모던'이란 전혀 무의미한 언어일 수 있다"(p.294)
 
종합하면 이렇다. 중용은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일상을 중시한다. 하늘의 명령(天命)은 일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용의 사상은 일상을 대하는 나의 태도와 삶의 자세에 인간의 길이 있고, 인간의 힘이 나오고, 인간의 맛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맛은 멋이다. 중용의 함양은 그 인간의 매력을 키우는 것이다.

<중용, 인간의 맛>은 도올이 2008년 발간한 <중용한글역주>를 어렵게 느낄 일반대중을 위하여 쉽게 쓴 책이다. 그러나 이미 나와 있는 <중용한글역주>의 요약본은 아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서도 그 전체의미를 새롭게 발전시킨 것이다. 중용사상에 대한 새로운 통찰이 들어있고, 현대인의 삶에 짠한 도움을 주는 자기계발의 풍요한 내용이 번득이다. 그래서 사상가로서의 도올 김용옥 교수의 면모가 더 잘 발휘된 작품이다. 본문의 중국어 발음이 붙어있고(중국어 음운학 전공의 최영애 교수 고증), 또 정확한 한국어 발음이 붙어있어 암송에도 편리하다. EBS특강은 이 책을 기준으로 하여 진행된다.
도올선생의 EBS 방송강의와 함께, 이 책은 이러한 심오한 고전인 <중용>을 전 국민에게 이해시키고, 그들이 일상적 삶속에 매일매일 실천하게 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게 구성되어 있다.
도올 선생은 이 책의 보급이 "우리나라를 “중용의 나라”로 만들기 위한 거대한 장정의 출발"이라고 말한다. 21세기 문명의 주축이 미국에서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동양 전통문명의 가치관 속에서 서양문명의 성과를 어떻게 조화시키느냐가 관건이고, 그 핵심에 중용이 있다. 이 중용의 사상을 우리 국민이 선도하여 21세기 세계문명을 향도하여야 한다. 온 국민이 중용을 배워 익히는 나라, 곧 “중용의 나라”이다."

도올 김용옥 선생은 고전학자이면서 사상가이다. 하지만 그는 골방에 박혀 학문만 파고드는 고루한 학자는 아니다. 이 땅의 민중들과 이 민족의 아픔과 미래를 걱정하는 따뜻한 인간이기도 하다. <중용, 인간의 맛>(2011. 9), <맹자, 사람의 길>(2012. 3), <사랑하지 말자>(2012. 8)를 읽으면서 느낀 점이다.(내가 동서양철학의 역사와 핵심을 꿰뚫지 못하는 관계로 도올의 '몸 철학'이 미래의 시대정신이 될 지 여부를 아직 헤아리기 어렵다...^^)
 
[ 2012년 10월 26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 진실 교육을 말하다 - 21세기 대한민국의 비밀스런 현주소 대한민국 진실 시리즈 1
김동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떤 사회적 곤경을 헤쳐나가려면 첫째, 질문을 잘 던져야 하고 둘째, 해답을 잘 찾아야 한다. 이 책은 질문은 잘 던졌는데 해답은 엉뚱한데서 찾은 전형적인 사례로 보인다.


한국 교육 문제의 근원적인 문제는 무엇일까.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좋은 대학의 졸업장을 얻기 위해 가정의 전부와 젊음의 대부분을 바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사회의 공공연한 지지를 얻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러한 물음에 의문을 제시하며 교육의 새로운 가치와 제도의 변화를 통한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저자는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를 과잉된 교육열에서부터 찾기 시작했다. 청소년들,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성적의 압박을 못 이겨 자살하는 일까지 심심치 않게 발생하고, 기숙형 재수학원의 광고가 일간지 광고란을 도배하고 있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과열된 형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학 입학 경쟁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교육열은 이미 도를 넘어 거대한 열기에 휩싸여 있다. 저자는 한국의 교육현실을 사회학의 한 개념인 '약탈 국가'에 빗대어 '약탈적 교육 체제'라고 규정한다.
교육열의 원인은 무엇일까. 저자는 그 이유를 '숭문주의'와 '시험만능사회', 그리고 '서울대의 학벌 독점'에서 찾는다.

교육열이 발생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 분야에 가치를 둔다는 것이다. 이 가치는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고 경제적인 것일 수도 있다. 저자는 학문, 공부, 시험, 대학, 성적, 학벌, 교수, 자녀교육 등등의 개념들이 숭문주의적 가치관에서 나온 것이며 상당히 허구적이고 극복되어야 할 가치라고 지적한다.
돈을 모아 대학에 기부하는 것을 숭고한 행위로 인정하고 대학과 교수의 권위를 최고로 여기는 사회 분위기는 과연 타당한 것일까.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 가는 것을 최고로 여기는 교육의 풍조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청년실업 문제, 인재상의 변화, 세계화 등의 사회변화만 보더라도 이미 이러한 가치관들이 허구적이며 구시대적인 발상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사회가 변하고 있다. 계속되는 청년 실업 문제는 대학과 성공이라는 연결고리를 의심하게 만든다. 더 이상 대학과 학벌은 성공의 필수 조건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인재상의 변화가 있다. 기업들은 더 이상 스펙위주의 인재를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실질적인 업무능력과 인간됨을 중요한 능력으로 생각하며 유연하고 창의적이며 재치가 넘치는 인재를 찾고 있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여전히 점수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온실형 인재를 키워내고 있으니 지금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걸고 ?아 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저자의 해답은 간단하다. 숭상되고 있는 그러한 가치들에 대해 재평가하고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물론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교육환경이 이미 변하였음을 인식하고 가치관의 변화를 추구한다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험만능주의도 심각한 현상이다. 한국사회는 '시험형 인간'을 대량생산하고 있다. 특히 객관식 시험의 폐해는 정도를 넘어섰다.(객관식 시험의 폐해에 대해서는 김덕영의 <입시공화국의 종말>에서 충분히 다루고 있다) 대입 수능시험 뿐 아니라 공무원 시험, 각종 고시, 편입시험, 진급 시험 등 모든 분야에서 실력이 아닌 객관식 점수로 우열을 가리고 당락을 결정하며 순위를 매긴다. 주관식 시험 역시 단답형 객관식 시험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어느 분야에서도 세상은 이제 더이상 흑백논리로 작동하지 않는다. 정답은 여러 개가 있을 수 있고,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정답을 토론하고 합의하면서 결정하고 있다. 한국사회는 시험이라는 환상, 종교를 타파해야 한다.

서울대의 학벌 독점은 여러 학자와 전문가들이 지적한 바 있다. 저자의 독특한 관점은 서울대-고대-연대가 독과점하는 'SKY 독점'이 문제가 아니라 '서울대 독점'이 문제엠을 강조한다. 특히 서울대 학벌을 '국가학벌'로 규정하면서 역사적, 헌법적 관점에서 서울대 국가학벌의 문제점을 파헤친다. 그는 교육파시즘과 국가학벌이라는 관점으로 서울대와 북한의 김일성대의 공통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학벌독점을 바라보는 관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컸다.

하지만 저자는 책의 결말에서 국가학벌을 해체하기 위해 제시하는 해법을 엉뚱하게 제시한다. 그의 해법은 단순하게도 국가학벌의 해체다. 그리고 정부가 교육과 대학에서 손을 뗀 후 대학교육을 시장에 맡기자는 것이다. 시장에 맡기면 시장 논리에 따라 자연스럽게 국가학벌이 사라짐과 동시에 시장 경쟁을 통해 능력껏 대학서열체제도 해체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국가학벌'이 대학교육 및 교육문제의 핵심이라고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그로서는 국가학벌 해체와 시장 논리가 아주 자연스럽게 도출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교육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결말은 다분히 단순한 도식으로 보인다. '국가냐 시장이냐'라는 이분법적인 논쟁은 이미 학계서도 다루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시장 논리라는 해법의 근거를 한국 경제와 재벌의 역사라고 제시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의 경제와 재벌의 역사가 오랜 관치경제와 정부의 일방적 지원으로 이루어져 왔고, IMF 이후 재벌이 살아남고 죽은 것 역시 정부의 힘이 작동했다는 것을 부정한다. 또한 사학의 부실과 부패의 원인이 '대학서열구조와 국가의 과도한 통제'라고 주장하는데 이 또한 사학법인의 현실을 모르는 안타까운 말이다.
저자의 주장은 전형적인 시장만능주의로 해석될 여지가 커 보인다. 심지어 교육애서 신자유주의를 추구하는 주장들과도 맥락이 비슷해 보인다.

* 인상 깊은 문장 :

- "아침 7시에 등교해 정규 수업에 야간 자율 수업에 독서실과 학원에 그리고 집에서 새벽 2시까지 복습에 더구나 방학도 휴일도 없이 몰아치는 이 끔찍한 지옥불 과정을 통과하고 난 대부분의 청소년은 이른바‘소진(消盡) 효과’때문에 더 이상의 고급 지력을 발휘할 기력을 잃고 만다. 마치 광맥이 바닥난 광산과 같다."(p.07)

- "오랫동안의 시험 만능 체제는 이 체제에 익숙해진 ‘시험형 인간’이라는 새로운 인간형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시험이 있는 곳에 그 시험의 전제였던 공부와 학문은 사라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국·영·수 과목은 조선 시대의 사서삼경의 역할을 대체하고, 객관식 시험 대비를 위해 공부하는12년 기간은 우민화 교육임을 지적하고자 한다."(p.113)

- "필자는 대학서열화를 이해하고 풀어가는 키워드로서 ‘국가학벌’이란 개념을 사용했다. 국가학벌이란 국립대학과 그 출신들이 국가권력을 등에 업고 이를 사유화하여 하나의 이익집단이 된 것을 말한다. 이 국가학벌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국립 서울대학교다."(p.168)

[ 2012년 10월 23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통령의 자격 - 국가 명운을 결정짓는 2012년 대선의 필독서
윤여준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1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저자는 200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당시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의 선거 전략가 역할을 했다. 이후로 '범보수의 제갈량', '한나라당의 전략통', '대한민국의 장자방'이라는 별칭을 얻고 있다. 2002년 대선에서는 패배했지만 그 이후의 선거에서는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그의 주요 경력을 살펴보면, 종합경제일간지 재경일보(www.jknews.co.kr)회장직을 역임하고 현재 지방자치를 연구하는 한국지방발전연구원 이사장(www.kldi.re.kr),
2004년 한나라당 선거대책위원회 상임부본부장, 2003년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소장, 2002년 한나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미디어대책위원회 위원, 2000년-2004년 제16대 국회의원 1998년 한나라당 총재 정무특보 등을 엮임했다.

 

그런 저자가 지난 9월 올해 대통령 선거에서 유력한 야권 후보인 민주통합당 문재인씨의 선거캠프로 영입되었다.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막연하게 '국민통합'이라는 명분은 어불성설이다. 한국사회는 '국민이 분열'된 것이 아니라 '정치권'과 '언론'이 분열되어 있는 것이고, 5%의 기득권과 정치권이 95%의 대다수 국민과 민중을 분열시키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나라당의 전략통이 변절하거나 변심하여 야당의 캠프로 들어온 것인가? 이에 대한 설명은 신문기사 몇 쪼가리로 알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최근 발간한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윤여준씨는 서문에서부터 자신의 논리 전개에 적용한 객관성과 공정성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 '합법적 폭력의 행위 주체'로서의 '국가'를 강조함으로써 의사결정 과정과 국가의 주인인 유권자의 중요성에 대해 소홀하고 있고, '인민주권'을 거론하지만 국가운영의 원리로 내세우지 못하여 국가주의와 관료중심의 '통치'를 방조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해방 이후 자유민주주의가 합의되었고, 독재 치하에서도 전체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였다"고 말하지만, 실제 한국의 현대사에서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합의는 1987년 6월 항쟁 이후 개헌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즉, 그 이전에는 한국사회에서 통용된 이념은 반공주의와 숭미사대주의, '잘살아보세'에 불과하다. 특히 박정희 군사정권 체제와 유신체제는 독일의 히틀러식 군사파시즘과 왕조체제를 추구했다고 할 수 있다. 윤여준씨의 말은 자칫하면 박근혜 후보의 "내 아버지의 꿈은 복지국가였다"라는 궤변이 성립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또한 저자는 '정치권의 극한 대결'이 어떤 이유로 어떤 구체적인 모습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한 사실관계 없이 정치 혐오만 강조한다. 지금까지 권위적이고 일방통행식 정치로 상대 정당과 유권자의 거센 반발을 일으킨 것이 누구인가? 국회에서 사전 협의나 공론화 과정 없이 국회 본회의 날치기를 한 측이 어디인가? 이 문제를 자세히 살펴 보면 답이 나온다. 한국 현대정치사 중 18대 국회에서 한나라당의 날치기가 107건이나 되는 등 보수정당이 극한대결을 주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즉, 저자는 '양비론'을 통해 한나라당과 새누리당을 편들고 있는 셈이다.

 

 

본론에 들어가도 윤여준씨의 한계와 오류는 다수 발견된다. 저자는 특이하게도 사회민주주의 등 진보진영의 이념과 정책의 존재를 인정한다. 이 부분은 말 뿐이기는 하지만 긍정적이 볼 수 있다. 물론 사회민주주의 등 진보적 이념의 실현 가능성에 회의적이라 분석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보수진영의 이념과 정책이 실천을 통해 실패로 평가되었으므로 진보진영도 실천해본 후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부적절해 보인다.

저자는 국민의정부와 참여정부가 '진보 정부'라고 평가하고 싶겠지만, 두 정부는 사회민주주의 등 진보적 이념에 근거하지도 않았고 실제 정책 추진도 신자유주의와 형식적 민주주의가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 '진보 정부'라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는 '민주정부' 정도가 적당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아주 보수적이거나 우편향일 경우 그 왼쪽에 존재하는 이념을 모두 싸잡아 진보라 인식할 수는 있다. 이는 최근 일부 수구우익 진영이 박원순 시장과 안철수 후보에 대해 '종북좌파'라고 주장하는 것과 맥락이 같다.)

 

 

저자는 '리더쉽'이라는 정치적 용어를 사용하는 대신 '스테이트크래프트(통치 리더쉽)'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그런데 그의 '스테이트크래프트'는 인민주권에 기초하지 않고 구성원들을 통치, 관리, 육성하는 개념으로 설정하고 있다. 따라서 인민주권이 아니라 통치-피통치로 대통령과 인민을 관계시켜 민주주의의 확장성과 가능성을 애초에 제한시킨다. 전근대적인 사고와 현대적인 시대정신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는 정치체제, 정치적 상황, 국가운영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 정치권과 유권자 사이에서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언론, 관료, 지식인, 경제인, 학자들을 무시하여 정치와 리더쉽의 실체에 접근하는 데 실패한다. 특히 공정언론 상실에 대한 지적이 없기 때문에 현대 정치의 작동구조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이 부재함을 드러내고 있다.

저자가 안철수 후보의 캠프에 합류한 이헌재씨나 몇몇 학자들과 다른 점은, 그가 '87년 체제'를 설정하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87년 체제'가 정치권에 '흑백논리'를 가져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1987년 전후 흑백논리를 이끌어 온 집단은 항상 민정당-새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과 보수언론이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무시하고 있다. 실제 지금도 대구 등지에서는 일반 유권자가 '김대중은 빨갱이. 문재인과 안철수도 빨갱이'라고 애기할 정도다.

 

 

이 책은 '대통령 자격론(자질론)'이 주요 발간 목적이다. 저자는 대통령의 자질로 몇 가지를 제시한다. 그 중에서도 보수진영이나 우파진영에서 우월해야 할 대북관, 안보관의 기준이 크게 부실하다. 대북관의 경우, 최대 현안을 평화와 공존이 아닌 북핵과 견제로 둠으로써 북핵 문제 및 남북관계 처리과정에서 약속을 지키지 못한 측이 미국과 남한이라는 사실을 왜곡한다. 그리고 안보관을 말하지만, 지난 15년을 돌이켜보면 민주정부 10년의 안보가 김영삼 정부와 이명박 정부 10년보다 평화롭고 안정적이고 튼튼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

저자의 자질론에 근거하여 현재의 대통령 후보들을 평가해 보면, 적어도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는 '불가'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문재인 후보의 캠프로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ㅎ

 

저자가 역대 대통령을 자신의 '자질론'에 근거하여 평가한 것을 보면, 문재인 후보가 왜 저자를 '국민통합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영입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윤여준씨의 역사인식은 박근혜 후보에 비해 특별히 낫다고 말할 수 없다.

저자의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거의 '찬양' 수준이다. "박정희의 강렬한 공적 열망과 치열한 문제의식, 개인적 물적 욕망을 자제한 헌신적인 자세, 그리고 현장을 장악하면서 끊임없이 관계자들을 독려하는 스테이트크래프트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귀감이 된다.", "그 역사 인간적으로 적지않은 약점을 안고 있으며 공인으로서도 많은 시행착오를 겪은 지도자였다.", "그러나 항상 공적인 것을 앞세우면서 진정성이 있고 성실하고 매사에 두려워하는 진지한 자세로 국정에 임한다면 자신과 시대의 한계, 그리고 좁은 이념의 폭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아무리 상황이 불가피하였다 하더라도 시대정신을 정면으로 거슬러 또 자신의 육체적,정신적 한계를 뛰어넘어 장기간 스테이트크래프트를 성공적으로 발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반면교사의 교훈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p.321)
그리고 김대중 전대통령과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거의 '폄하' 수준이다. 노무현 전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요약하면, "참여정부는 양김 이후 지역주의적,권위주의적 리더쉽을 극복하고, 새로운 민주적 국가운영의 원리를 제시하고 실천해야할 과제를 부여받았다.", "그 점에서 노 전대통령은 올바른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 사회적 약자 문제를 국가운영의 핵심과제로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받을 수 있다.", "그러나 소수파 출신으로서 정치적으로 외롭고 이념적으로 비타협적이며 계층적으로는 현상타파적인 의식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결과, 급진적 사회정책과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신자유주의적 개혁노선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한 채 방황하였다.", "국가와 헌법, 특히 대통령직과 스테이트크래프트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지 못한 채 이념과잉의 아마추어리즘에 토대를 둔 코드정치, 편 가르기 정치, '뺄셈의 정치'로 일관한 결과 새로운 국가운영 전략을 제시하지도 새로운 국가운영의 주도세력울 창출하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국정 자체를 혼란과 갈등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문제는 그의 실패가 한 정권의 실패로 끝나지 않고 향후 국가운영에 엄청난 혼란과 후유증을 안겨주었다는 사실이다."(p.494)로 되어 있다.

 

 

이 책을 나서 저자를 문재인 캠프에 영입한 결정에 대해 내가 내린 결론은 무척 부정적이다. 기본적으로 '범보수'의 전략통으로 평가되는 인사, 전두환 - 노태우 - 김영삼 정부의 청와대에 근무하면서 17년간 한국의 정치경제의 민주화에 역행하는데 일조해온 윤여준씨를 문재인 후보가 받아들이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이 책을 읽어보는 중에도 전체적으로 정치를 '통치'로 인식하고 유권자를 주인이 아니라 '관리대상'으로 생각하는 그가 문재인 후보의 정책이나 국정운영에 도움이 될 지 의문이다. 

 

 

[ 2012년 10월 21일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