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시원한 글쓰기
오도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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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기는 생각보다 쉽지 않다. 굳이 시나 소설처럼 문학작품이 아니더라도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 글 한 줄 쓰기는 어렵다. 그래서 페이스북의 담벼락 글이나 트위터의 기발한 140자 글을 읽다보면 주눅들 때도 많다. 하물며 기자들의 기사, 정치인들의 발표문, 변호사들의 변론글, 작가들의 작품,  고전작품을 생각하면 기가 질리기도 하다. 글 쓰기는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글 쓰기는 글로 밥 먹고 사는 사람들만이 가능한 것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한글이 어떻게 세상에 나왔을까 생각해보자. 한글이 대중들에게 베포되기 전에는 중국의 한자가 조선 사회의 유일한 글이었다. 당연히 사대부와 양반들만이 글을 사용했고, 백성들은 글에서 소외된 채 착취받고 고통받기만 하였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도구가 없었다. 역사시간에 배운대로만 말하면, 세종대왕이 약670년 전에 백성들의 어려움을 '어엿비 너겨' 집현전 학자들과 한글을 만든 것이다. 이제 한국인들은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그렇다면 누구나 글을 읽고 쓰는 것은 가능하다. 다만 글을 써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글을 써보지 않았을까?
한국인이 글을 읽고 쓰는 것은 초등학교 입학 전후에 시작한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일기도 쓰고 작문도 한다. 그런데 국가가 주도하는 제도교육 12년과 대학교육 4년을 경과해서도 사람들은 글 쓰기를 두려워 한다. 교과서나 교육 취지만 고려하면 중학교만 나왔어도 글쓰기는 충분할 것이다. 그럼에도 중졸이든 고졸이든 대졸이든 모두가 어려워 한다. 왜 그럴까?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첫번째는 제도교육 12년이나 대학교육 4년 동안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쉽고 자유롭게 펼치고 서로 나누고 배우도록 하지 않고 학교가 제도교육의 틀에 맞추어 가르치기 때문이다. 특히 성적 위주, 시험 위주, 대학입시 위주로 이루어지는 학교 교육은 아이들에게서 말과 글을 빼앗아 갔다. 심지어 논술마저도 대학입시에 맞추어 성적이 나올 수 있는 논술을 가르치고 있으니 오죽할까 싶기도 하다. SNS상에서 자주 목격하는 욕설과 비방은 무섭기까지 하다. 이념을 떠나 정치적 적대관계를 떠나 세상과 사람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 테두리에 가두어 놓고 배설하는 욕설은 민망하기 그지 없다.
두번째는 글쓰기의 상품화와 독점화다. 이놈의 자본주의 사회는 무엇이든지 상품화한다. 무엇이든지 상품가치를 매기고 그에 따라 차별을 부추긴다. 소위 전문가라는 작자들이 이상한 기준과 수준을 설정해 놓고 자신들의 잣대에 맞으면 상품화를 부추기고 조금이라도 다르면 폄하하고 비하한다. 글의 내용과 진심을 보려하지 않고 6하 원칙이니 문법과 상징을 들이댄다. 그렇게 글쓰기를 밥벌이로 하는 자들이 글쓰기를 독점해 버렸다. 언론이나 인터넷 포탈, 논문지나 잡지마저도 엘리트나 유명인들의 글만을 모아놓고 마치 그런 글들이 최고인양 장벽을 친다. 그렇기 때문에 중학교 출신도, 대학 출신도 글쓰기에 주눅이 들고, 16년이라는 시간과 돈과 노력을 투입한 다음에도 여기 저기를 찾아다니면서 글쓰기 강좌에 다시 등록한다. 이게 무슨 낭비인지... 그런 사회적인 현실은 글쓰기가 학력이나 직업, 자산이나 소득에 따라 자연스럽게 차별이 이루어진다.
 
한국사회의 많은 부분이 그렇듯이 글쓰기라는 표현행위도 분위기 상으로는 많이 대중화되었다. 글쓰기라는 행위가 보편화 되었다기 보다 '글쓰기에 특별한 계급이나 자질이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생각이 보편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신, 그런 보편화는 기존 구조에 의해 또 다른 상품화를 가져온다. 유명인들이 어떤 책을 읽었는지, 어떻게 글을 잘 쓰게 되었는지, 어떻게 글을 쓸 것인지에 대한 교재나 강습이 광범위하게 생겨났다. 하지만 스스로의 필요성과 자질을 토대로 자신의 글쓰기를 유도하지 않는 대부분의 글쓰기 교재나 교양강좌는 '상품화' 내지 '밥벌이'에 그치고 말 것이다.
 
그런 현실에서 이 책은 의미가 크다. 저자가 애기하는 글쓰기는 우리가 기억하는 '작문'이나 '논술'과는 차원이 다르다. 기존 학계나 전문가가 말하는 '작문법' 같은 것이 애초에 필요 없다. 저자는 보통 사람들처럼 시가 뭔지도 모르고 시인이 되었다. 그렇게 시작하여 오랫동안 좌충우돌하던 자신의 경험에서부터 청소년, 농민,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글쓰기 수업을 하며 마주쳤던 어려움을 정감 있는 말투로 풀어놓는다. ‘글’이라고 하면 왠지 어렵게 느껴진다. ‘말’은 곧잘 하면서도 ‘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는 게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글이라면 말과 달리 뭔가 좀 그럴듯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마련인데, 바로 이런 생각을 깨는 것이 이 책의 목표다. 글을 쓰려면 머리가 지끈거리는 사람, 쓰고 싶은 이야기는 넘치는데 펜을 잡으면 손가락이 딱 굳어버리는 사람, 먹고살기도 바쁜데 무슨 글쓰기냐고 생각하는 사람들... 이들의 가슴속 응어리를 풀어줄 ‘속 시원한 글쓰기’의 세계를 제시한다.
 
저자가 말하는 글쓰기의 핵심은 "자신을, 꾸미지 말고, 거침없이 토해내라"다. 글쓰기가 어려운 이유는 내 행동, 내 생각, 내 모습을 그대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좀 더 멋지게 꾸미고 싶은 마음에, 잘 알지도 못하는 성인군자나 유명학자의 말을 인용하거나 이런저런 비유를 끌어와 표현을 부풀리곤 한다. 내가 진짜로 느낀 것도 아닌데 마치 그런 것처럼 써내려간다. 멋지게 꾸미고 싶은 마음은 그만 내려놓고, 자신이 하려는 이야기에 집중하자는 게 저자의 조언이다. 자기가 아니면 그 누구도 쓸 수 없는 이야기가 있으니 말이다. 지구 위에서 사는 수 십억 사람 중에서 유일한 것은 내 생각과 느낌일 뿐이기 때문이다.
책에는 저자가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만난 수강생들의 글과 신문이나 잡지에 소개된 평범한 사람들의 글이 많이 인용되어 있다. 화려한 글이 아니라 그 자신이 아니었으면 하지 못했을 이야기를 솔직하게 적어낸 이런 글들을 보고 있으면 삶에서 우러나오는 글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된다. 더불어 누구나 좋은 글을 쓸 수 있으리란 자신감이 생긴다. 즉 ‘글이라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내 속에 있는 얘기를 옆의 친구에게 말하듯 그대로 글로 옮겨 보라.’ 이것이 글쓰기와 친해지는 첫 걸음이다.
 
"‘말과 달리 뭔가 좀 그럴듯해야 하고, 입에서 제멋대로 나오는 소리가 아닌 고상한 단어를 골라 써야 할 것 같다. 형식도 있어야 하고, 문법도 알아야 글을 쓰는 거 아닌가.’ 언뜻 들으면 맞는 말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선 이 말을 지겹도록 되풀이해 ‘씹을’ 것이다. 이 생각을 깨야 글쓰기는 골치 아프고 어려운 일이 아니란 걸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p.12)
그리고 "글을 쓸 때는 솔직하게, 쓰고 나선 뻔뻔하게"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솔직하게 글을 쓰는 데 성공했다면 이제 남에게 보여야 한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글로 썼는데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그 글은 제 생명을 잃는다. 물론 남에게 보이는 일이 쉽지는 않다. 그래서 조금은 뻔뻔해질 필요가 있다고 이 책은 강조한다. 처음 한두 번이 어렵지 한번 뻔뻔해지면 그다음에는 쉽다는 것이다.
우선 주변 사람들에게 쓴 글을 보여주고 반응을 들어보라. 그냥 ‘좋네’ 하고 마는 사람들은 아마 제대로 안 읽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냥 글만 휙 던져주지 말고, 쓴 글을 직접 읽어줘라. 옆에서 속삭이듯 읽다보면 스스로 입에 걸리는 부분도 나올 것이고 자기한테는 문제가 없지만 듣는 사람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대목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런 부분을 고쳐나가면 한결 좋은 글이 된다. 그래서 SNS에 올려 지인들의 생각과 의견을 겸허하게 듣거나, 서로 멘토가 될 수 있는 한 두명이 필요할 수도 있다.
글쓰기 선생으로서 저자의 역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수업이나 주변에서 만난 평범한 사람들의 좋은 글을 신문사나 잡지사에 보내도록 끊임없이 독려한다. 일단 활자로 찍혀 나온 자기의 글을 경험하게 되면, 주변에서 말려도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글은 소통하려고 만들었다. 감추고 있으면 글이 제 생명을 잃는다. 남에게 보이는 일이 쉽지는 않다. 제 속살을 보이는 일과 같은데 어찌 쉽겠는가. 하지만 세상에 드러내야 글쓰기가 왜 즐겁고, 행복한지를 알 수 있다. 글쓰기의 참맛은 소통에 있다. 나는 뻔뻔함이 지나칠 정도다. 글 한 꼭지를 쓰면 온갖 호들갑을 떨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보여준다. 글 좀 쓰는 사람이 있으면 발목을 붙들고 귀찮게 한다."(p.64)
 
책의 후반부에서는 기사 쓰는 요령, 인터뷰하는 법 등을 소개한다. 시민기자나 르포작가가 될 수 있는 자신감을 불어넣는다. 샛길로 새고, 이렇다 할 질문을 던지지 못하고, 마냥 침묵만 지키고 있었던 인터뷰도 멋진 취재의 일부라고 이야기한다. 실제 저자의 경험담과 그를 바탕으로 한 기사문으로 확인하고 나면, 독자들도 '나도 한번 해볼까?"라고 마음 먹을 수 있다.
 
이 책 속에 담겨있는 평범한 이들의 글은 몇 번이나 내 마음을 흔들었다. 유명학자나 기자들이 쓴 것보다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려운 글, 현란한 글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을 말해주는 글, 우리의 마음을 대시하는 글이 더 감동적인 이유다. 그 중에서 기억에 남는 시 한 편이 있다. 노동자 시인인 박노해씨의 <이불을 꿰매면서>가 내 양심을 계속 찔렀다.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속옷빨래를 하면서
나는 부끄러움의
가슴을 친다
 
똑같이 공장에서 돌아와
자정이 넘도록
설거지에 방청소에
고추장단지 뚜껑까지
마무리하는 아내에게
나는 그저
밥 달라
물 달라
옷 달라
시켰었다
 
동료들과 노조 일을 하고부터
거만하고 전제적인
기업주의 짓거리가
대접받는 남편의 이름으로
아내에게 자행되고 있음을
아프게 직시한다
 
명령하는 남자,
순종하는 여자라고
세상이 가르쳐준 대로
아내를 야금야금 갉아먹으면서
나는 성실한
모범 근로자였다
 
노조를 만들면서
저들의 칭찬과 모범표창이
꼬리에 매단 방울소리임을,
근로자를 가족처럼 사랑하는 보살핌이
허울 좋은 솜사탕임을
똑똑히 깨달았다
 
편리한 이론과
절대적 권위와 상식으로 포장된
몸서리쳐지는 이윤추구처럼
나 역시
아내를 착취하고
가족의 독재자가 되었었다
 
투쟁이 깊어갈수록
실천 속에서 나는
저들의 짜꺼기를
배설해낸다
 
노동자는
이윤 낳는 기계가
아닌 것처럼
아내는
나의 몸종이 아니고
평등하게 사랑하는 친구이며
부부라는 것을,
우리의 모든 관계는
신뢰와 존중과
민주주의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잔업 끝내고 돌아올
아내를 기다리며
이불호청을 꿰매면서
아픈 각성의
바늘을 찌른다."
 
[ 2012년 9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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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정신세계
피터 톰킨스 외 / 정신세계사 / 199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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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도 생각한다. 식물도 감정이 있다. 식물도 인간에게 반응한다...
이런 주장은 나와 비슷한 세대의 사람들에게 해방 이후 근대식 제도교육을 받은 대다수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이야기일 수 있다. 보통사람들은 학교에서 '이동성'을 큰 기준으로 동물과 식물을 구분하고, '감정과 생각'을 기준으로 동물과 사람을 구분한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단순히 배웠기 때문이기 보다 상식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서 그것이 '맞는' 말이라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드러난 사실은 우리의 상식과 많이 다르다. 저자들은 식물도 동물처럼 움직이기도 하고, 인간처럼 생각하고 감정을 느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얼핏 아는 상식과는 다르게, 과거 학자들 중에서 식물이 움직이고 영혼도 있다고 주장한 이들이 존재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식물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말했고, 18세기 진화론을 제창한 찰스 다윈은 모든 덩굴손들은 독자적인 운동 능력을 갖고 있다고 증명한 바 있다. 철학자 괴테와 슈타이너는 식물이 서로 반대인 두 방향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뿌리는 중력에 끌리듯 땅속으로 파고들고, 가지는 반중력에 떠밀리듯 허공으로 뻗어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1960년대 들어서부터 식물이 단순히 살아 숨을 쉴 뿐만 아니라, 상호 교감도 나눌 수 있는 존재, 즉 혼과 개성을 부여받은 창조물이라는 철학자들의 직관을 받쳐 줄 증거들이 속속 제시되기 시작했다. 많은 탐구자들과 과학자들이 새로운 자연학과 초자연학을 발견한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증거와 실험들에 대해 말해준다.

1966년 백스터(Cleve Backster)는 거짓말 탐지기의 사용법을 연구하던 대학 연구실에서 탐지기의 전극 하나를 열대 관목인 드러시너 앞사귀에 연결했다. 그리고 그 드러시너에게 물을 부었을 때 잎사귀가 영향을 받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는 나무가 물을 흠뻑 빨아들이면 전도율이 낮아질 것으로 예상했으나 검류계의 저항치는 낮아지지 않았다. 대신 그래프에는 톱니 모양의 전기 흐름이 그려졌다. 나무가 마치 감정에 자극을 받은 사람이 나타내는 것과 유사한 반응을 보인 것이다. 인간의 반응을 검류계에서 확실하게 나타날 수 있게 하는 방법은, 그 사람을 위협하는 것이다. 나무에 대한 그와 같은 실험 시도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주었다. 이른바 '백스터 효과'였다.
"백스터는 잎사귀를 불에 태워 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가 불을 떠올리면서 성냥을 가져오려고 움직이기도 전에 검류계의 바늘이 급작스럽게 움직이면서 그래프의 도표가 위로 쭈욱 올라갔다. 그가 그 방을 나와 성냥 몇 개를 가지고 다시 돌아봐 보니, 도표에는 또 다른 급격한 감정의 변화로 보이는 기록이 남겨져 있었다. 그가 짐짓 거짓으로 잎사귀를 태우려는 시늉을 해보이자, 이번에는 전혀 아무런 반응이 나타나지 않았다. 식물이 인간의 의도가 정말인지 거짓인지를 확실히 구별할 줄 아는 것처럼 말이다. ..... 그 이후 상추, 양파, 오렌지, 바나나 등을 비롯하여 25가지도 넘는 식물과 과일들을 실험했지만 관찰한 결과는 모두 비슷했다."(p.20)

이와 비슷한 실험은 구소련의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연구 수준으로 진척되었다.
"뿌리를 뜨거운 물 속에 담그자, 보리 싹이 내 눈 앞에서 문자 그대로 비명을 질렀다. 이 식물의 '소리'는 대단히 민감한 특수 전자장치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었는데, 넓적한 종이 밴드 위에는 이 불쌍한 식물이 지르는 '끝없는 눈물의 골짜기'가 그대로 기록되어 나타났다. 단말마를 발하는 보리 싹의 고통을 말해 주듯, 기록계의 펜은 흰 종이 위에다 심한 기복을 그려 댔다. 그저 식물 자체만을 보아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잎사귀는 여전히 푸르고 줄기도 곧게 서 있건만, 식물의 '조직체'는 이미 죽어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 내부의 어떤 '두뇌' 세포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말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19세기 인도의 과학자 자가디스 찬드라 보스(Jagadis Chandra Bose)는 식물 연구를 통해 물리학, 생리학, 심리학을 통합해 식물생리학을 탄생시켰다. 당시 그는 식물의 생장모습과 움직임을 무려 1억배나 확대해 볼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하였다. 그는 자연의 다양헝 속에서 보여지는 기본적인 통일성이 있음을 밝혀냈고, "어디에서부터 물리적 현상이 끝나는 것이고, 어디서부터 생리적 현상이 시작되는지를 구분하기란 매우 어렵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식물도 금속이나 동물의 근육 조직 처럼 여러 가지 자극에 반응을 보였다. 동물처럼 식물에게도 신경 조직이 있는 것이다.

비비안 윌리, 피에르 폴소뱅, 도로시 리털랙 등은 여러가지 실험 결과를 통해 식물들이 음악에 반응하고 감정을 느끼며 인간들과 교감한다는 것을 증명해냈다.
"비비안 윌리는 자신의 집 정원에서 범의귀 잎사귀 두 개를 뜯어다 하나는 침대에, 하나는 거실에 놓아 두었다. 그녀는 한달 동안, 아침마다 일어나 침대의 잎사귀에를 바라보고 계속 살아있으라고 말하고, 거실의 잎사귀는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한달 후 그녀가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거실의 잎사귀는 갈색으로 변한 후 썩어 가고 있었는데, 매일 관심을 기울여 주던 침대의 잎사귀는 여전히 싱싱함을 유지하고 있었다."(p.38)
"전자 전문가인 피에르 폴소뱅은 백스터의 '정신 감응 장치'를 자신의 방에 설치하고 검류계와 한 그루의 필로덴드론을 연결했다. 그가 전기에 감전되는 실험을 하여 충격을 받자, 검류계의 바늘이 갑자기 뛰었다. 그 뒤에 그가 직접 전기 충격을 받지 않고 단지 그 때의 느낌을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식물에게 똑같은 반응이 일어났다. 특이했던 현상은 그가 집 안이 아니라 멀리 떨어진 사무실이나 타지로 출장을 떠나서 고통이나 충격, 기쁨을 느꼈던 동일한 시간에 필로덴드론이 반응했다는 것이다."
"제라늄은 자신에게 물을 주고 흙을 다듬어 주고 상처를 치료해 준 사람과 자신을 비틀고 ?고 자르고 불태웠던 사람을 기억했다. 후자의 사람이 나타나자 식물의 반응 측정기의 기록계의 바늘이 아주 거칠게 움직였다. 자신을 괴롭히던 사람이 자리를 뜨고 마음씨 좋은 사람이 다가오자 제라늄은 그제서야 안정을 되찾았는지, 기록계에는 아주 평온하고 부드러운 파장이 나타났다."
"오르간 연주자이자 메조소프라노 가수인 도로시 리털랙은 호박, 옥수수, 백일초, 금잔화 등을 대상으로 2주일 동안 동일한 생장 조건 속에서 음악이 식물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했다. 한 쪽은 고전 음악을 틀어주고, 다른 쪽은 시끄러운 록 음악을 틀어주었다. 록 음악을 들려준 쪽의 식물들은 처음 이상하게 키만 자라더니 나중에는 형편 없이 작은 잎을 내거나 발육이 아예 중단되어 버렸다. 금잔화는 2주일도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렸다. 고전 음악을 들은 식물들은 음악 쪽으로 줄기를 뻗어 나갔고, 훨씬 상태가 좋았으며 금잔화는 꽃을 피우기까지 했다."(p.193)

저자들의 실험과 연구 이야기를 읽다 보면, 20세기 이후 현대과학이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학계는 실험 결과로 입증되는 식물 사이의 교감이나 식물과 인간의 교감에 대해 아직 어떤 과학적 이론을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모든 물질과 생명체에서 발하는 '오라(aura)', 식물의 '에너지장', 생물 파동과 방사성, 생물학적 플라즈마체, 토양의 자기정화, 생물학적 화학원소 중가 등에 대해 여전히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인간이 과학적 발견과 성과를 거듭하면 할수록 인간이 알아야할 대상과 목록이 늘어날지도 모른다는 느낌도 든다. 인간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많은 현실에서, 인간이 모르는 분야에서 인간이 모르는 지속적인 진화와 변화가 지속된다면, 어떻게 인간의 과학이 그것을 ?아갈 수 있을까... 인류는 지구와 우주와 생명체에 대해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겸손함이 필요함체 이어 식물의 정신세계와 생물계의 오묘함은 우리가 지구의 토양과 먹거리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경고해 준다.
"오늘날 대부분의 스테이크는 유독한 살충제를 뿌려서 기른, 품질 낮은 단백질이 함유된 잡종 사료를 180일간 강제로 먹여 키운 소의 고기로 만들어진다. 그 농약은 곧장 쇠고기의 지방질에 투입되어, 그것을 먹는 인간에게 심장병을 일으키게 한다. 또 가축업자들은 가축의 무게를 20% 이상 불려서 수백만 달러의 초과 이윤을 얻기 위해, 가축들에게 디에틸스틸베스트(DES)를 먹이는데, 이것은 인간에게 암을 유발시킨다."(p.308)

우리의 고정 관념과 '상식'은 식물과 동물, 동물과 인간, 인간과 자연을 전혀 다른 차원에서 다루면서 서로를 분리하지만, 실제 적지 않은 실험과 사례는 그러한 우리의 '상식'이 맞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우주와 자연과 생명체에 대해 아는 것이 극히 미약하다.  이 책은 식물의 모습을 통해 그것을 알려준다.
식물은 무기물에서 유기물을 창조하는, 경이로운 생명 현상을 영위함으로써 무생물과 생물 사이의 중개자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식물은 생명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은 식물을 언구함으로써 식물 뿐만 아니라 무생물과 생물, 나아가 인간까지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러한 유기적인 긴밀성에 대한 인식은 결국 인간의 오만을 질타한다. 사실 인류가 그렇게 자랑하는 문명의 건설은, 식물의 창조적인 생명 활동에 비하면 단지 하나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오만함과 자연에 대한 파괴행위 더 이상 지구와 생명체를 망가뜨리지 않도록 모두가 성찰해야 할 것이다.

[ 2012년 9월 24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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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주기자 : 주진우의 정통시사활극
주진우 지음 / 푸른숲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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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나는 꼼수다' 멤버 4인 중 마지막 주진우 기자가 발간한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웃음을 선사했던 나꼼수... 작년부터 이어진 나꼼수의 활약상에 대한 보답으로 책을 구입했는데 벰버 4인의 책 <닥치고 정치>, <달려라 정봉주>, <보수를 팝니다>, <나꼼수 에피소드>, <주기자>까지 모두 재미있게 읽었다. '나는 꼼수다'가 MB정권의 폭압이라는 조건 보다 멤버들 스스로의 내공과 노력에 의해 탄생하고 유지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나꼼수는 4.11 총선에 선수로 뛰어들면서 인기가 많이 시들었다. 김용민 후보는 낙선했다. 야권의 패배에 일조했다는 비난도 제기되었다. 민주통합당도 나꼼수도 열성지지자들은 '사실상 승리'라고 자위하기도 했다. 선수와 응원군은 역할이나 움직임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나꼼수가 4.11 총선에 직접 뛰어들어 쓰라린 패배감을 맛보았던 것이 나꼼수의 도약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김어준의 <닥치고 정치>는 김어준식 화법으로 독자들에게 정치에 대한 혐오증을 털고 정치에 다시금 관심을 유도한다. 나꼼수가 인기를 얻기 전에 발간했다. 한국정치판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어떤 세력들이 어떤 생각으로 정치판에 몸담고 있는지, 유명 정치인들에 대한 평가와 보수 및 진보세력에 대한 평가를 담았다. 자신이 친노세력이고 문재인씨를 대통령 후보로 지지하는 이유를 밝힌다. 소위 '좌파'에 대해 따끔하게 일침을 가한다.
정봉주의 <달려라 정봉주>는 나꼼수에서 끝없이 '깔때기'를 들이대는 정치인 정봉주가 그렇게 가볍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주통합당 내의 대다수 정치인보다 훌륭하다. 주관을 가지고 있고, 대의를 위해 자신을 내던질 줄 아고, 계파와 대세에 휘둘리지 않으며 대중적이기까지 하다. 장래 가능성이 커 보인다.
김용민의 <보수를 팝니다> 역시 나꼼수의 김용민을 다시 보게하는 책이다. 보수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던 김용민이 어떻게 진보적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보수진영 속에서 자란 덕분에 보수세력이 어떤 자들인지 잘 알고 있다. 정치평론가로서의 자질도 엿보인다. 다만, '4.11총선은 사실상 승리'라는 생각은 동의하기 어렵다. 심판이나 관객과 선수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배운 것이 좋은 경험일 것이라 생각한다.

 

"사회에 보탬이 돼야 한다. 이것은 신념이 아니라 간지다"

 

나꼼수에 출연하기 전까지 주진우 기자는 그쪽 판에서만 이름난 군소매체의 기자에 불과했다. 그는 최근 우리사회의 역사적 흐름을 결정지은 장면들을 되돌아보며, 기사를 쓰던 당시 상황과 현재에서 바라보는 의미를 되새긴다. 이 책을 읽다보면 아무도 몰랐던 야화를 탐정에게서 듣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그는 사실 기자라기보다 탐정이라는 이름이 더욱 잘 어울린다. 그만큼 그는 디테일에 강하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특종캐치실력과 취재실력을 갖춘 그는 취재원의 마음을 사로잡는 법과 추적과정의 에피소드 등의 개인적 이야기도 함께 털어놓는다. 나꼼수 방송에 배경으로 깔리는 '누나야~'가 괜한 삽입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의 취재는 확실하고 구체적이다. 그동안 우리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고 있는 대형사건들의 전말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과 권력계층이 어느 정도의 사람들인지 알 수 있다. 이들에게 맞서며 얻은 경험을 들려주는 저자를 통해 두려움 없이 사회의 병든 곳을 들추고 약자에 편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래는 주기자의 삶의 자세를 말해준다.
저자는 사실 기자라기보다 탐정에 가깝다. 사람들이 주진우 기자에게 가장 흥미로워 하는 것은 디테일이다. 어떻게 다른 기자들이 만나지 못한 사람을 단독으로 만나고, 매번 특종을 하는지에 그 취재기법에 대한 궁금해한다. 그가 어떤 방식으로 진실에 접근해가는지, 어떻게 취재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추적해가는 과정에서 있었던 에피소드 등 비교적 개인적인 이야기는 ‘꼼꼼한 뒷얘기’에 담았다.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성격의 꼭지들을 통해 시대적 상황을 재조합하는 시사성과 판단력, 감춰진 이면을 듣는 충격과 공분, 그리고 사회의 어둠 속에서 온몸을 던져 싸우는 배트맨의 실사판과 같은 주진우 기자의 캐릭터, 라는 세 가지 읽을거리를 동시에 준다.

 

"내 짱돌쯤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거 안다 / 꽃길이었다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 뜨거울수록 뜨거운 맛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 하지만 피하지 않고 맞서겠다. 혼자 피하면 쪽팔리는 거다 / 나는 힘을 함부로 쓰는 자들에게 짱돌을 계속 던질 거다 / “넌 정말 나쁜 새끼야.”쫓아가서 욕이라도 할 것이다 / 그래서 깨지고 쓰러지더라도. 진실을 파묻지 마라 / 나는 17살 주진우다"

 

이 책에세 정통시사활극이라는 부제에 걸맞게 지난 십여 년간 우리사회의 역사적 흐름을 결정지은 장면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노건평 게이트를 비롯한 참여정부 때 벌어진 대부분의 게이트, 신정아 사태, 장자연 사건, 순복음 교회 세속, 김용철 변호사와 삼성 특검, 에리카 김과 BBK메모 특종, 그리고 최근 나경원 1억 원 피부과와 이명박 대통령의 내곡동 사저 논란 등 최근 10년여 간 우리 정치사회를 뒤흔든 굵직한 사건 현장에 늘 그가 있었음이 '나꼼수'를 통해 알려진 셈이다. 정봉주 전의원 못지 않은 주기자의 인기는, 팬들이 성역 없이 ‘우리 편에서’ 싸우는 살아 있는 기자의 발견에 놀라고 또 환호를 보낸 것이다.
주 기자를 직접 따라다니는 듯한 긴장감 넘치는 추적극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물론 재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통시사’란 말은 장식적인 수사가 아니다.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사건의 전말, 그리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이 있다. 그는 ‘자 봅시다’라며 그만의 시각과 경험에서 나오는 팩트 추적으로 뉴스에서 본 사건들의 실체를 파고든다. 주 기자의 손가락 끝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 사회를 지배한 기득권과 권력계층이 얼마나 황당하고 무능하며, 뼛속까지 이기적인지 알 수 있다.
 
언젠가부터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는 전혀 언론처럼 보이지 않는다. 기사와 논조에서 균형과 공평함은 커녕, 사실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조작이 난무한다. 언론이 아니라 권력인 것처럼 행사한다. 돈과 권력에 미친 몇 사람이 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해 재벌을 꿈꾼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들에게 저널리즘은 없다.
하지만 한겨레,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등 소위 '진보언론' 역시 "저널리즘이 없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수 많은 기사들은 직접 취재나 검증 없이 취재원으로부터 받아쓰기로 이루어진다. 담합과 작당이 눈에 보인다. '진보 상업주의'라는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재벌과 광고주의 영향력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다. 조중동을 비판하면서 조중동을 닮아가고 있다. 주기자의 반이라도 따라갔으면 한다. 주기자는 감성적이고 착하지만, 그렇다고 김어준이나 다른 멤버처럼 '묻지마 친노'도 아니다. 그는 팩트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보장하면 검찰이 부당한 특권을 내려놓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검찰은 독립을 소외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달려든 거다, 검찰은 정권의 개가 되고 싶었다. 개 노릇 그만해도 된다니까 안 예뻐한다고 물어뜯은 거다. 검찰 조직의 민주적 통제를 위해 참여정부는 검경 수사권 조정과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를 추진했다. 하지만 바로 무산됐다. 제도 개혁 없이 검찰의 정치적 중립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순진했다. 아니 무능했다. 문재인 이사장도 마찬가지다."

 

"2007년 10월,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 비자금에 대한 양심선언을 결심하고, 언론의 취재가 시작됐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가장 그리고 열성적으로 움직인 것도 공무원이었다. 대검찰청, 청와대, 정부 고위 관료가 삼성의 논리로 김변호사를 매도하고 삼성을 두둔하고 나섰다. 한 정부 고위 관료는 김 변호사를 정신적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반론을 펴기 위해 시사인 편집국을 찾은 삼성 홍보팀 고위 간부는 그 관료와 똑같은 논리를 폈다. 어휘마저 비슷했다."

 

"나는 참여정부를 많이 비판했다. 애정을 가지고 마구 돌을 던졌다. 청와대에 미리 알리고 걸러가며 썼지만 아무튼 참여정부의 게이트 기사를 계속 썼다. 안희정씨와 관련된 나라종금 사건, 이광재 실장과 관련된 썬앤문 게이트, 신례륜 전의원이 관련된 굿머니 사건... 굿머니 사건은 신 의원이 불법 대부업체에서 돈을 받은 사건이다. 사건의 제보자 김진희씨는 청문회에 나가 스타가 됐다.
노 전대통령의 형인 노건평씨는 사람 좋은 시골 영감이었다. 하지만 순박한 만큼 정치세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노인이었다. 대통령 당선 후 나에게 전화해 아들의 취직청탁을 할 정도였다. 아는 "어르신, 절대 그런 말 하시면 안된다"라고 신신당부했지만 "그래 알았다"라고 흘려들었던 것 같다. 노건평씨에게서 계속 빨간불이 들어왔다. 첫 알람은 경찰청에 건 인사청탁 전화였다. 두 번째는 국세청에 전화건 인사청탁. 두 번째는 기사가 나가고 문재인 민정수석에게서 전화가 왔다. "제가 잘 정리하겠습니다." 나도 알겠다고 하고 의견도 드렸다. 이후에도 노건평씨 관련 정보를 청와대에 몇 번 알렸다. 주변에 전담 마크맨을 두고 관리해야 한다고. 그런데 이 문제에 관해서 청와대는 아주 무능했다. 결국 비극은 건평씨에게서 시작됐다. 처남 민경찬 게이트가 터졌고, 건평씨는 세종증권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민경찬 게이트는 남상국 대우건설 사장의 인사청탁 건이었고, 남사장은 결국 자살하여 노 전대통령 탄핵에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

 

"나는 이런 일이 반복된 원인을 노무현 정부의 인사에서 찾는다. 노무현은 진보개혁 세력에서도 변방이었다. 동교동계를 비롯한 민주당 주류에게 놀림과 핍박을 받았다. 민주당 대선 후보가 된 다음에도 내부에서 단일화를 해야 한다는 사람들에게 시달렸다. 그래서인지 참여정부에서는 DJ쪽 사람들이 배제됐다. DJ를 지탱하던 진보개혁 세력의 주류 학자군, 재야군까지 소외됐다. 사람이 너무 없었다. 뜻이 있는 사람들이 따라오리라고 생각했는데 당연히 안 움직였다. 결국 대선에서 이회창쪽에 줄을 선 사람들을 그냥 썼다. 어떤 사람을 발탁했는지 청와대는 알지도 못했다. 임명장을 받은 사람도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참여정부에서 잘 나가던 사람들이 뒤통수를 친 예는 셀 수도 없다. 송광수, 임채진, 김홍일, 이인구, 김성호, 운진식, 허준영, 어청수..."

 

"참여정부 인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홍석현 회장이라고 생각한다. 참여정부 시절 미국대사관 정치 파트 누나들하고 친하게 지냈다. 하루는 한 누나가 참여정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언론인이 중앙일보 홍석현과 월간조선 조갑제라고 말했다. 내가 비웃자, 그녀는 정색하면서 "대통령이 홍석현 회장을 너무 좋아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알아보니 그 순간 청와대는 삼성과 허니문이었다. 특히 홍석현 회장에게 사랑의 작대기를 날리고 있었다. 신문쟁이들은 안다. 중아일보에허 노 대통령은 애초에 안중에도 없었다. 그리고 2004년 12월 홍석현 회장을 주미대사로 임명한다. 그가 천 여개의 차명 계좌를 만들어 262억원의 세금을 포탈한 것을 알고도, 부동산 투기를 목적으로 위장 전입을 한 것을 알고도, 불법 대선자금을 심부름하고 검사들에게 떡값을 뿌린 안기부 엑스파일의 실체를 알고도, 무엇보다 민주 보다 독재 편에 서고, 국민보다 재벌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도 홍석현 회장을 임명했다."

 

"나는 참여정부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람이 문재인 이사장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참여정부의 한계를. '문재인이 문제다'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그는 2인자였다. 대통령이 가장 의지하는 사람이었다. 청와대에서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을 지냈다. 이 자리는 손에 흙도 묻히고 피도 묻히면서 끌고 가야하는 자리다. 진흙탕 정치판에서 역사를 위해 전진했어야 하는 자리였다. 적을 달래기도 하고 협박하기도 하면서. '딜'을 하면서 말이다. 어떻게든 한 발짝이라도 전진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4대 개혁입법이 줄줄이 좌절됐다. 사람 좋고 깨끗한 문재인 실장. 그를 인간적으로 좋아한다. 하지만 정치인 문재인에게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 문재인 실장이 맡은 자리는 사람이 좋아만 가지고 되는 건 아니었다.
노무현 정부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잘못했가는 평가에 대해 "우리가 뭘 잘못했나요. 조중동이나 수구세력이 못하게 막아서 그렇지"라고 답하곤 한다. 그건 무능하가는 말밖에는 안된다."

 

"2008년 이명박과 검찰, 언론에 뭇매를 맞는 과정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노 전 대통령 측이 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고 했을 때, 나는 문재인 실장이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의 더러운 플레이에 단호하게 대응을 했어야 했다. 문재인 실장은 심성이 착해서 그럴 수는 없었다. 검사들은 진흙탕에서 더러운 싸움을 하는데 문 실장과 주변 사람들은 정도를 지키려고만 했다.
나는 문재인 실장과 그 주변의 대응 방식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꼿꼿하고 멋있고 다 좋다. 좋은 사람인 거 다 안다. 하지만 그 모습은 동네 불량배들한테 훈계하는 박사과정 대학원생 같다. 그런 사람이 훈계하면 시골 불량배가 말 듣나? 나는 맞붙어 싸워햐 한다고 생각한다. 헌데 참여정부쪽 사람들은 이렇게 말도 안되는 싸움에서 너무 무기력했다."
 
아무튼 나꼼수 멤버 4인의 책을 다 읽고나니 주진우 기자가 가장 인상에 남는다. 멤버 중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 가장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은 주기자다. 정보 없이, 팩트 없이 어떻게 시사방송이 가능하겠는가.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활동하면서도 전혀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가장 어리면서도 가장 넉넉하다.
언론, 삼성, 검찰과 경찰, MB정부, 친일파, 사회적 약자들까지 주진우 기자는 권력형 비리와 부패에 맞서면서 얻은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다. 우리를 대신해 진흙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주진우 기자는 신념이란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쪽팔리니까’, 혹은 ‘우리라도 이래야지 안 그러면 어떡하겠어 뭐’ 이런 식이다. 주진우 기자가 살아온 인생은 나름 고단했고, 앞에도 진흙탕길이 펼쳐져 있다. 하지만 그는 신념이 아닌 태도로 움직이기에 비장하거나 결연하지 않다. 밝고 따뜻하게 웃으면서 계속 간다. 이 사회의 병든 곳을 도려내고, 아픈 사람을 찾아 치유하려고. 그래서 이 책은 정통시사활극인 동시에 ‘인간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이 책은 감춰진 진실의 폭로가 아닌, 대한민국의 가치와 염치에 관한 보고서다.

 

이 책은 대한민국의 가치와 염치에 관한 보고서다. 두려움도 거칠 것도 없이 행동하는 양심 있는 기자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사회악을 환멸하되 사회에 절망하진 말자. 우리 사회에 이런 기자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강자에게는 당당함으로, 약자에게는 겸손함으로 세상에 보탬이 되겠다. 이상과 정의 그리고 진실을 위하여는 그 어떤 타협도 하지 않겠다. 꽃 길이었으면 가지 않았을 것이다. 뜨거울수록 뜨거운 맛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김어준, 정봉주, 김용민과 골방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앞이 훤히 뚫려 있지 않았다. 감옥으로, 그래서 지금은 그냥 잡혀가는 데 같이 가는 거다. 내 입장에서는 몇 회 하고 빠지는 게 제일 멋있어 보이고, 내 일로 돌아가기에도 좋다. 근데 같이 가는 거다. 의리 때문이지 그렇게 재미있지는 않다.
지금은 모든 전투를 이겨야 하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분명히 깨질 수 있다. 어쩔 수 없다. 나도 그렇고 나꼼수도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피하지 않고 맞서겠다. 혼자 피하면 쪽팔리는 거다.
나는 안다. 세상을 뜻대로 살아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하지만 웃으면서 가겠다. 철들지 않고 살다 소년으로 가겠다. 오늘도 비굴하지 않은 가슴을 달라고 기도한다."(p.346)
 
[ 2012년 9월 2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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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거부하는 아이 아이를 거부하는 사회 - 입시문화의 정치 경제학
조한혜정 지음 / 또하나의문화 / 1996년 12월
평점 :
품절


이 책은 1996년에 초판이 발간되었다. 그리고 내가 인터넷을 통해 구입한 것은 2011년에 출간한 것이다. 그만큼 여전히 이 책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려 15년이나 지났음에도 학생들의 교육현실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일까? 진보교육감이 들어서고 혁신학교가 운영되고 많은 이들의 노력이 경주되고 있음에도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일까?
 
나는 학생들을 무조건 학교나 학원에 붙잡아 놓으면 학생들이 공부할 것이라는 생각에 반대한다. 아이들은 바보가 아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쯤이면 나름 자신의 지혜와 생각을 가지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것이 생물학적 본능에 따른 것이든, 가정교육이나 매스컴, 다른 학습에 따른 것이든...
약간의 우연과 편차가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학생들을 아침 일찍, 또는 밤 늦게까지 붙잡아 놓고 공부하기를 강요한다고 하여 대부분의 경우 성적이 향상되지 않는다. 다른 어떤 인간의 활동도 그러하듯이 공부는, 학습은 스스로가 해야한다고 느껴야, 호기심과 재미와 흥미를 느껴야 시작할 수 있고 집중할 수 있다. 또 운동과 놀이와 여가와 휴식과 함께 적절하게 시간이 분배되어야 학습에도 집중할 수 있다.
따라서 학생들을 오랫동안 책상에 붙잡아 놓는 것으로는 그들의 공부를 강제할 수 없다. 오히려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고 싶지 않은 것을 강제함으로써 학생들의 반발과 저항감만을 키울 뿐이다. 부모나 교사들과의 소통만 어려워질 뿐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사회의 가정과 사회 현실을 돌아보면 학생들을 붙잡아두는 것 이외에 딱히 대안도 없다는 것이 더 비극이다. 저자가 책에서 "만약 야간학습을 없앤다면 가정과 사회는 이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라고 나에게 묻는 듯이 말할 때 머리 속이 꽉 막혔다. 3시, 4시에 학교를 마치고 돌아온 학생들에게 가정이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어려서부터 공부만 강조하던 부모가 학생들과 어떤 것을 '교육적으로' 할 수 있을까? 가정이 어렵다면 학교나 사회는 해 줄 수 있는 게 있을까? 학생들이 방과 후에 자신들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을 하도록 지원해줄 공간과 교재와 프로그램이 있는가? 학생들이 알아서 축구하는 것 말고, 당구치는 것 말고, PC방 가는 것 말고 무엇이 준비되어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나 역시 당장에는 방법이 없다. 직장에서 빨라야 7시에 퇴근하는 부모의 경우, 또는 밤 늦게 퇴근하는 부모의 경우 가정에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학교도 사회도 정부도 대책이 없다. 아주 극히 일부의 학생만이 YMCA나 시민단체, 소모임에 참가할 수 있는 것 뿐이다. 그럼 나머지 학생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학생들을 정규 시간 이외의 추가 시간에 학교에 붙잡아 놓는 것에 반대한다. 차라리 학생들이 초저녁에 거리에서, 술집에서, 당구장에서, PC방에서 떼지어 몰려다니는 것이 사회문제가 되어 교육청이나 정부가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학교와 교육청, 정부, 가업, 시민단체에서 준비를 하여 단계적으로 학생들의 시간과 공간과 프로그램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학생들을 우리에 가두어 놓는 소나 닭처럼 대하면 그 학생들의 미래도, 우리사회의 미래도 암담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학생들, 청소년들의 문제를 교육제도나 학력,학벌주의 관점이 아니라 학생들이 직접 몸담고 있는 현실 속의 문화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전인교육이나 바람직한 교육제도의 측면이 아니라 학생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감당하고 있는 모순적인 삶의 현장을 바라본다. 어른들이,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학생들에게 어떤 문화적 영향을 제공하고 있는지, 학생들이 가치관과 경험을 어떻게 형성해 나가는지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독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줄 것이다.

저자가 가장 중요한 문제로 진단하는 것은 입시제도와 그에 따른 학교,학생문화다. 저자는 우리 모두가 병적인 입시제도에 '사채시장의 공모자들처럼 너무나 깊숙하게'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안정된 상태로 유지'되어 개혁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한다.

"정당성의 위기를 수시로 겪어 온 국가 권력은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패한 교육 공무원은 자기 주머니를 챙기기에 바빠서, 청렴하고 충실한 관리와 교사들은 불합리한 규칙이나마 열심히 지키면서 맡은 바 '도리'를 다하느라, 그리고 어머니들과 일선 교사글은 각자 자신 나름의 사랑법으로 맡은 바 '도리'를 다하느라고 입시 브로커들과 팀이 되어 잘 짜여진 드라마 한 편을 완성해 냈다"(p.05)

저자는 장기간 부실했던 제도교육의 폐해가 대학에서도 발견되는 것을 발견하며 위기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일제와 급격한 산업화와 정당성을 상실한 국가주의에서 교육문제의 뿌리를 찾는다.

"이제 교육의 위기는 대학의 현장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대학 강의실에서 기계적인 학습에 길든, 초등학생보다 낮은 감성 지수를 가진 '모범생' 출신 학생들을 만나면서, 또한 '학습'에 대해 체질화된 거부감을 갖고 있는 자칭 '날라리' 출신 학생들을 만나면서, 나는 더욱 교육에 대해 절망한다. 요즘 나는 우리가 주요 수술을 할 시기를 놓쳐 버렸다는 악몽에 시달린다. ...
장기화된 우민화 교육 속에 대학 자체도 종이 호랑이로 존재해 왔음을 본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가? 어디에서 급진적 실험과 미래를 만들어 갈 상상력과 에너지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왜 준비를 하지 않을까? 문제는 입시 위주 교육을 해결한다고 끝날 일이 아니다.
 (중략)
요약하면, 이제까지의 교육은 일본 제국주의가 잡아 놓은 틀을 그대로 이어 온 극히 보수주의적인 교육으로서 자생력을 기를 기회가 허용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루어져 왔다. 해방전에는 식민지 통제를 위해, 해방 이후에는 정권의 정당성 확보와 양적인 경제성장을 위해 교육이 수단화되어 왔던 것이다. 곧 교육의 초점은 산업화를 추진하는 국가 주도적 경제정책에 순응하고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정권에 대해 침묵하는 탈정치화한 대중을 만드는 데 맞추어졌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학교가 어떻게 하면 국가 발전에 공헌할 수 있을까?'만을 물어 왔지 '학교가 어떻게 하면 인간의 성숙에 공헌할 수 있을까?'를 애써 묻지 않았던 것이며, 이 결과 학교는 사회의 모든 부조리를 그대로 안고 있는 관료 조직의 한 하부 조직으로 전락해 버렸다.
학교는 인간을 길러 내는 선발의 기능만 하는 공장이며, 여기서 독창성과 협력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무수한 기계적 인간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생력을 기르지 못한 교육계와 획일적 관리제도로서의 교육 제도는 교육 주체자들의 자생력을 억업해 왔고, 문화적인 자원을 더욱 크게 늘려 가야 하는 후기 산업사회 시대로 들어서면서 그 위기감은 점점 커지고 있다. 이런 위기 사황이 오래 지속되는 가운데 생긴 패배주의 역시 상황을 극도로 악화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p.84)

저자는 교육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시급하고 근본적인 것은 '기르는 것에 가치를 두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지배와 경쟁, 소유와 통제, 그리고 집단주의적 원리로 움직이는 사회의 기본 구성원리를 바꾸어 낼 수 있어야 한가는 것이다. "그래야만이 학생들도 삶을 소중하게 일구기 시작할 것이다."
저자는 실험교육 현장을 통해 학생들이 일상적으로 접하고 있는 교육과 문화 현실을 분석한다. 그리고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의 경우 '자기학습을 바탕으로 한 개방교육'이 필수적임을 역설한다.

어제(9월 18일) 일간신문 한겨레에서 현재 경찰에 신고되어 있는 가출 청소년이 2만명이며, 실제로는 약 20만명의 청소년이 가출하여 우리사회의 음지에 존재한다는 기사를 읽었다(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52252.html).
저자는 학업을 중퇴한 학생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청소년들이 몸담고 있는 학교, 가정, 소비공간, 대중매체 등 여러 영역 간의 괴리와 분열, 또는 결탁을 지적한다. 어찌보면 "입시에 대한 압박이 아니라 이 영역들 사이의 '괴리'가 청소년들을 정신 분열증적 상황으로 몰아넣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학교 중퇴자를 외형적으로 학교를 떠나는 학생들 뿐 아니라 교실 내에서 학습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까지를 포괄적으로 인식해야 함을 강조한다. 저자는 현재 교육,문화현실을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중퇴자들을 많이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한국사회의 문제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한국사회의 그리고 학업 중퇴자들의 문제를 더 이상 '불우 청소년'을 구제하는 차원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총체적 위기 관리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문제라고 주장한다.
또한 저자는 학교가 21세기를 살아갈 학생들을 위한 장소로서 '턱없이 부적합하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학교와 가정과 일반사회가 드러내 보이는 상호 모순적인 구성원리 석에서 이중생활을 하면서 전반적으로 '불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은 결국 '학교 붕괴'의 또 다른 설명이 된다.

저자의 결론은 근본적으로 학생들의 이중생활을 청산하기 위한 사회 전체의 근본적, 구조적인 수술이다. 그리고 단기적으로는 가출 청소년과 학습을 포기한 학생을 위한 '문화 공간과 프로그램의 제공'이다. 그리고 대안 교육에 착수하는 것이다.
 
"이제 교육 문제의 핵심은 경쟁에서 이기는 아이를 기르는것이 아니라 자포자기 하지 않고 세상을 버티며 살아가는 아이를 길러내는데 있다. 탈근대적 흐트러짐 속에서 자기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을 기르는데 있다. 그래서 논의의 초점은 좁은 의미에서의 교육이 아니라 청소년 문화와 그들의 '주체형성'에 놓여야 하는 것이다.
십대에 형성된 주체는 한 인간이 긴 인생을 통해 만들어갈 삶의 폭을 결정한다. 그리고 개개 구성원 들의 삶의 폭은 곧 그 사회의 미래를 가늠한다. 어떤 사회를 만들것인가? 우리의 탐색은 그래서 학교를 훨씬 벗어난다. 세대 문제, 상징 자본 ,일상의 정치 , 입시 문화의 정치 경제학, 이런 새로운 단어들을 불러들인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다."(p.45)

물론 저자가 제도교육의 입시제도를 그대로 두자고 인정하거나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 역시 입시제도의 조속한 개혁을 주장한다. 하지만 입시제도가 쉽사리 바꾸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학생들의 이중생활과 저급한 문화로의 편입을 마냥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청소년들의 성 문화에 대한 저자의 의견을 소개한다.
 
"지금 청소년들 사이에 만연한 성과 사랑에 대한 지대한 관심은 전쟁상황을 방불케 하는 긴장된 입시 준비 상태와 그 동안 근대화 과정에서 급속하게 붕괴되어 온 인간 관계의 구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리고 타산적인 상업주의는 그 붕괴 상태를 최대한 이용하면서 돈을 벌어들인다.
그나마 사회를 지탱해 오던 가정이 최근 급속하게 붕괴되면서 대안이 주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점점 더 자극적인 감성에 집착하는 경향이 번지고 있다. 죽음을 불사하는 폭주족, 깊은 몰입의 관계를 꿈꾸며 끊임없이 이성 관계의 절정에 대해 생각하는 아이들, 무료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아이들, 부모와 어른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아이들에게 비밀스런 공간과 행위를 제공하는 성은 매우 유혹적인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청소년들은 대중 매체를 통해서 많은 지식을 주워들었고, 쉽게 음란물을 접할 수 있다. 비록 그들이 알고 있는 성지식이 파편화된 지식이며, 성기 중심의 성일지라도 많은 청소년들은 자신들이 알 것은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실은 더욱 성교육이 어렵다.
청소년들 중에는 호기심에서 이성을 만나 여러 가지 탐험을 해보고, 그러한 직접 체험을 통해서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되기 보다 다양한 인간 관계를 배워가고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들에게 성은 더 이상 출산이나 결혼과 관련된 행위가 아니라 의사 소통의 한 방법이며 인간 관계를 배워 가는 방식인 것이다. 기성세대는 이러한 사실을 인정해야 하고, 그들 세대의 관계 맺기가 건강한 형태로 나아가게 도울 준비를 해야 한다."(p.232)
 
[ 2012년 9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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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이야기 세트 - 전3권
앙드레 보나르 지음, 김희균.양영란 옮김, 강대진 감수 / 책과함께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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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인들은 자신들의 문명의 뿌리를 고대 그리스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유럽과 북아메리카 대륙에는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된 지명이나 인명이 많다. 그리스의 신화와 전설도 21세기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학문과 문화가 재해석된다. 우리나라에서도 화제가 되었던 영화 <300>과 <알렉산더>, 그리고 <트로이>가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그만큼 서구인들과 서구문화, 그리고 서구에서 출발한 학문들은 고대 그리스를 잘 알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오히려 그리스의 실제 역사는 우리에게 낯설다. 우리나라에는 그리스 ‘신화’ 이외에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책은 많지 않다. 서구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고대 그리스에 대해 알려면 신들의 이야기가 아닌 그리스 신화를 창조해낸 그리스 사람들의 실제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적절하다. 저자 앙드레 보나르는 역사의 눈으로 그리스를 바라본 전문가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새로운 그리스인의 모습과 생활상, 그 사상까지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그리스는 신화가 아니라 인간이 살아간 역사이고 문화인 것이다.

 

<그리스인 이야기 3부작>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다루면서도 논문이나 연구서가 아니기 때문에 인용이나 복합한 고증 내용은 포함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보통 우리가 딱딱하게 여기는 지배자나 왕 중심의 '통사'도 아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에서 실제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인문과 사건, 그리고 문화와 작품을 중심으로 그리스 역사를 풀어간다. 자연을 이겨내고 문명을 이루어가는 그리스인의 발자취를 찾고 설명해준다. 그래서 이 책에는 그리스 문명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 즉 그리스 문명을 기획한 고대 그리스인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 책은 투튀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나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흥망사> 같은 통사가 아니다. 그래서 이 책에는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다른 재미가 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뒷세이아> 등 고대 그리스 문인들의 작품을 문명으로 나아가는 그리스 시인의 역작으로 평가하는 등 고대의 작품에 대한 저자의 안목이 탁월하게 느껴져 절로 감탄이 나올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리스인 이야기 1>은 호메로스에서 페리클레스까 통치 시기까지를 이야기한다. 그리스 문명의 탄생에서 민주주의의 완성 단계까지를 다룬다. 그리스 문명 탄생의 역사적 배경, 그리스 문명 초창기의 사건들, 그리스 민족의 전쟁사인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녹아 있는 인본주의, <오뒷세이아>를 통해 본 그리스 민족의 바다 정복기, 그리스 최고의 서정시인 아르킬로코스와 자유주의 시민의 탄생, 미지의 뮤즈 삽포와 사랑의 아름다움, 아테네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기원 그리고 상업의 발달과 솔론의 사회개혁, 노예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통해 본 그리스 민주주의의 한계, 인간 중심의 철학인 그리스의 종교, 그리스 비극의 정점인 <오레스테이아> 3부작, 아테네 민주주의의 완성자 페리클레스 등을 다룬다.
<그리스인 이야기 2는 소포클레스에서 소크라테스의 죽음까지를 이야기한다. 과학의 시대, 철학의 시대, 문학의 시대였던 그리스 문명의 전성기를 다룬다.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와 그리스 비극의 풍경, 그리스의 조각 예술, 탈레스와 데모크리토스를 통해 본 그리스 과학의 태동, 다시 소포클레스와 <오이디푸스>, 그다지 주목받지 못하지만 매우 중요한 그리스 시인인 핀다로스, 지리학자이자 여행가로서의 헤로도토스, 의학의 아버지 힙포크라테스와 그리스 의학, 아리스토파네스의 그리스 희극, 그리스 문명의 쇠락 혹은 방향 전환,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학자 소크라테스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리스인 이야기 3>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까지를 이야기한다. 즉 그리스 문명의 황혼기를 다룬다. 그리스 3대 비극의 마지막 주자 에우리피데스, 헤로도토스와 함께 그리스 역사의 쌍벽을 이루는 투퀴디데스, 소크라테스를 이어 그리스 철학을 집대성한 플라톤, 세상 모든 것을 집대성한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 활동과 그가 만든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그리스 문명의 양상들, 에라토스테네스와 아르키메데스 등 근대 학문에 영향을 끼친 과학자들, 끝으로 인간의 구원을 설파한 에피쿠로스에 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고대 그리스의 본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선입견 속에 깊이 새겨진 '신화'를 깨뜨릴 것을 요구한다. 다른 지역, 다른 민족과 마찬가지로 그리스, 그리고 그리스인도 처음에는 "원시적인 종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리스 중의 그리스'라 할 수 있는 "고대의 아테나이에서도 미신 같은 것이 존재했고, 원시인에게서나 볼 수 있는 '엽기적인 풍속'도 그대로였다"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기원전 5세기에 벌어진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총사령관 "데미스토클레스는 승리를 위하여 디오뉘소스 신에게 아테나이 최고집정관의 친조카들을 제물로 바쳤다. 그는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세 사람의 목을 졸라 죽였다". 오늘날 유물론의 창시자로 알려져있는 데모크리토스는 "월경 중인 여자 아이들은 수확을 앞둔 밭 주위를 하루에 세번 뛰어다녀야 한다고 생각했다. 월경 때 흘리는 피가 해충을 박멸하는 항생제 역할을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렇게 미개한 원시 종족 수준이었던 그리스인들이 자연의 법칙을 깨달아 알고 자연에 대해 반격을 가하는 과정이 바로 '문명'임을 말한다. 발칸반도에서 여러 번 남하한 그리스인들은 원래 유목민이었다. 그러다가 헬라스라는 땅에 나려와 자리를 잡고 척박한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그들이 상업을 하게 된 것은 단순히 모자란 것들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올리브나무애서 나온 기름과 포도에서 짜낸 포도주를 이웃 아시아 땅에서 만든 옷감과 교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배를 타기 시작한 것은 늘어나는 인구를 먹이기 위해 밀과 보리를 흑해 북쪽에서 얻어오려면 바다르루건너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유목민이었다가 농민이 되었기에 그리스인들은 바다를 알지 못했다. 바닷가에 살던 원주민에게서 새롭게 배운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어에는 '바다'라는 단어가 없었고 원주민들이 썼던 단어 '탈랏사(thalassa)'를 베껴 쓸 수 밖에 없었다.
밭에서 힘든 노동을 하고 사나운 배를 타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그리스인들은 다른 원시인과 마찬가지로 '노동요'를 부르기 시작했다. 저자는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노동요의 리듬을 개발해서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 것이 시, 즉 서사실고 설명한다. 오래된 영웅들의 삶을 풍부하고도 절제된 리듬에 담아낸 것이다. 노래를 부르다 보면 사람들의 가슴 속에는 희망과 용기가 솟아났다. 그 중에서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일리아드>와 <오뒷세이아>다.
이렇게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와 서정시, 극시들은 언어로 빚어낸 그리스의 과거와 현재가 담겨 있다. 그 속에는 그리스인들의 고통과 희망이 들어 있다. 상상의 세계 속에서 마주치는 꿈과 환상이 있다.

그리스인들은 무섭고 사나운 자연의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세상의 창조주로서 '신'을 상정하게 되고, 그 신들에게 의지했다. 신들의 형상은 가장 이상적인 인물의 형상으로 삼았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인들은 자연을 극복하고 인간을 좀 더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수학을 만들고, 천문학을 개발했다. 물리학과 의학의 기본 지식을 차근차근 쌓아나갔다. 그리스 지역의 지리적 현황과 경제구조는 그리스가 자연스럽게 도시국가로 발전되도록 이끌었다. 도시는 문명의 힘으로 사회가 되고, 도시 안에 사는 사람들은 평등하게 문명을 향유할 권리를 가졌다. 그래서 불완전하게나마 그리스인들은 민주주의를 고안한 최초의 민족이 되었다.

이 책에서는 문학작품, 특히 비극에 대한 저자의 소개와 분석이 뛰어나다. 이 시기의 그리스 문학작품은 당시 그리스인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삶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신과 자연과 인간에 대해 고민했는지 말해주고 있다. 대표적인 비극 작품인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3천년이 지난 현 시점에서도 현대인들의 가슴에 무언가를 던져 준다. 아니 저자인 앙드레 보나르가 <안티고네>라는 작품 속에서 현대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느껴야 하는지 알려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소포클레스의 천재성과 예술성을 밝혀낸다. 나는 작품의 작가인 소포클레스보다 작품을 현대적으로 해석한 저자에게 더 큰 공감을 얻게 되었다.

 

에우리피데스는 작품 <메데이아>는 자연과 신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가던 인간이, 원칙과 제도, 그리고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던 인간이 스스로의 정념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저자는 그 '악마적 힘'을 통해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복잡한지, 즉 우리도 알지 못하는 우리 마음의 복잡다단함이다. 또한 우리 안에 깃들어 있는 이 힘은, 우리 자신이 그 힘에 대항할 수 없고, 그 힘은 우리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극적"임을 말한다. 저자는 또 에우리피데스의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에서 세계의 무질서, 무정부주의적인 감정, 의지의 불안정성에서 비롯되는 비극성을 읽어낸다. 그리고 <박카이>에서는 "전지전능함을 통해 발현되는 신의 위대함을 포착"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전체는 인간에 대한 순수한 사랑으로 불타오르게 한다. "신들은 아무리 진노했다고 해도 우리 인간들처럼 행동해서는 안된다."라고...

아테나이 법정에 제출된 소크라테스에 대한 기소장에는 두 가지 죄목, 즉 '신을 믿지 않는 죄'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가 적혀 있었다. 그는 신성이라는 확고한 실체에 대해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사실만을 유일하게 말고 있다"고 공공연하게 선언했기 때문이다. 재판관들은 죄의 유무에 대한 판결에서 유죄 281표, 무죄 220표로 그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죄인에게 어떤 형벌을 내려야 할지를 두 번째 재판에서 결정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한 선처를 바라는 대신 "나에게 보상을 달라.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외쳤다. 두 번째 재판은 거의 만장일치로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자신에게 사형을 선고한 판관들에게 말했다. "명심하십시오! 사람들을 죽인다고 해서 진실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진실은 한층 더 강력하게 공격해 올 것입니다. 진실을 위해 종사하는 자들의 소리는 선한 사람이 됨으로써만 멈추게 할 수 있습니다."

 

저자는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고발한 자들보다 훨씬 더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고 추측한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한 적이 없다. 다만 그는 그냥 사는 것보다 재대로 사는 것을 원했기 때문에 시민법정의 판결을 받아들였을 뿐이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아테나이 시민들이게, 후손들에게, 그리고 21세기의 우리에게까지도 원칙을 말하고자 했을 뿐이다. 부당하게 살아남지 말라고...
저자는 플라톤이 "역사를 배제하려 했다"고 평가한다. 플라톤은 아주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세속의 도시, 시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타락한 민주주의 대신에 모든 영혼이 사후의 내세에서 만나게 되는 곳, 즉 천상의 도시, 천상의 왕국인 신성한 세계를 내세웠다. 그는 신과 밀접했던 그리스의 문화와 종교 대신에 신과 인간이 완벽하게 분리되는 내세와 유일신의 토대를 닦은 셈이었다. 플라톤이 그러한 종교의 기초를 닦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저자는 그리스 문명의 쇠락이 단순한 쇠락이 아님을 주장한다. 아니 문명의 역사 자체가 탄생과 소멸, 그리고 소멸하는 과정 속에서 새로운 탄생이 이어짐을 말한다. "문명이나 신앙은 죽지 않기 위해서 새로운 사고방식을 탐구하고, 새로운 시와 지혜의 세계를 창조하며, 늙어갈수록 희망과 확신을 가져야 할 새로운 이유를 스스로 부여한다. 그러므로 문명의 쇠퇴기는 동시에 새로운 발견의 시기이기도 하다. 문명은 변화를 거듭할 뿐 죽지 않는다. 문명의 삶이란 말하자면 항구적인 태어남이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저자의 해석으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한 그리스 도시국가의 멸망은 '현대식 '국가'라 할 수 있는 왕조를 탄생시키면서 다시 태어났고, 그리스 문학의 비극과 희극으로 신과 인간의 경계가 무너지고 사회와 사상의 격변을 통해 플라톤에 의해 기독교의 토대를 마련한 것이다.

* 인상 깊은 문장 :
- "아킬레우스와 헥토르, 그들은 기질이 전혀 다른 두 종류의 인간이면서, 인류의 두 시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위대한 아킬레우스는 통재로 불타고 있는 한 시대에서 마지막 빛을 발한다. 약탈과 전쟁으로 얼룩진 아카이아인들의 시대는 이제 아킬레우스와 함께 사라져가고 있다. 훗날 우리 속에서 언제든 다시 부활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그리고 그 자리에서 헥토르는 새로운 시대를 선언한다. 가족과 땅과 공동체를 지키고자 하는 시민들의 시대가 왔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단지 잘 싸우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타협할 줄도 안다. 협정을 맺을 줄도 안다.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다음 세대에서 더 넓은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할 것이다.
<일리아드>가 위대한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위대한 시편은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라는 상반된 인간형을 통해서 인간의 고결함과 정의로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있었고, 그들이 인류의 역사를 번갈아 가며 이끌어왔으며, 지금 우리의 마음 속에서도 계속 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p.94)

- "오뒷세우스는 지혜로운 인간의 상징이다. 인간의 지혜는 실질적이고 창조적이다. 세상에 대한 의미 없는 지식을 쌓아놓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상황이 닥칠 때마다 적절한 대안을 제시할 줄 아는 그런 지혜다. 신과 적들은 인간이 가는 길목마다 방해꾼을 심어놓고 인간을 끊임없이 불행의 나락으로 인도한다. 그런 상황에서는 지혜만이 인간을 구할 수 있다. '재주꾼' 오뒷세우스가 이기는 이유다."(p.121)

- "혹시라도 그리스가 민주주의를 발명했다고 한다면, 그 발명품이란 어린아이의 입안에 난 이와 같다. 반드시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할 민주주의였다. 곧이어 그리스는 죽고 새로운 민주주의가 다시 태어날 것이다."(p.235)

- "신을 끊임없이 의인화해서 그리스 종교가 노리는 바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이 도달해야 할 목표를 설정해서 보여주는 일이다. 인간이 다다라야 할 최후 지점이 올림포스의 산이다. 그 간격을 그리스 사람들은 끊임없이 좁혀가고 있다. 그리고 어느 시점에 이르면, 다시 말해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면, 신은 인간의 세계로 내려와 도시와 공동체의 우두머리가 될 것이다."(p.260)

-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 등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이 보여주는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의 투영이다. 그래서 진보적이다. 아픈 부분을 자극하고 혁명을 독려한다. 얼핏 보기에는 화해를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현실에서 화해하기 위해서는 투쟁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불의에 맞서 싸우라고 부추긴다. 그래야 공동체에 화해가 있고 발전이 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비극은 진보를 넘어 혁명적 자세에 가깝다."(p.279)

-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판관들과의 대화였다. 이 대화야말로 아테나이 민중들과 나누는 결정적인 대화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진의를 알리고자 시도했으며, 자신의 임무를 설명했다. …… 다시 말해서 자신의 목숨을 몇 년 더 연장해주는 차원을 떠나 사회의 병폐 중에서도 최악의 병폐인 불의로부터 시민들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했다. 피고 소크라테스가 주도한 논쟁의 최종 목표는 아테나이의 구원이었던 것이다. “당신들이 나에게 사형을 선고한다면, 그 결정은 내가 아닌 당신들에게 부당하게 해를 입히는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나는 지금 나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나는 지금 당신들을 변호하고 있습니다.”"(p.478~479)

- "에우리피데스는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로서의 경력을 쌓아가는 동안 이처럼 갈림길에서 망설이는 그의 모습을 우리는 자주 보아왔다. 신이란 곧 전지전능함이며, 전지전능함이 신을 정당화하는 요건이라면, 디오뉘소스는 분명 정당화될 수 있다. 그가 어떤 행동을 하건 말이다. 소포클레스도 말했듯이, “신들이 무슨 짓을 하건 그건 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 신은 우리에게 죽음을 부여할 뿐 아니라, 우리를 우리와 더불어 이 세계를 춤추게 하고 노래하게 하는 본질적인 힘이다. 신은 사는 기쁨, 쾌락이며 동시에 고통이다. 신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눈부신 신비다. 그러니 에우리피데스는 질서정연하고 이성적이고 명쾌한 정의로 이루어진 세계를 버리고 광기의 신과 총체적인 흐름 속에 자신을 맡기는 동물적인 기쁨만이 중요시되는 박코스 행렬에 합류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p.86~87)

- "플라톤이 구상한 국가는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균형 잡힌 국가, 그 어떤 힘도 예정되어 있는 확고한 질서를 흔들 수 없는 국가라고 하는 거짓 이미지를 선사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바로 이 점이 플라톤이 우리에게 제안하는 국가의 가장 이상한 면이다. 절대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니. 그가 제안하는 국가에서는 진보가 철저하게 배제된다. 이 국가는 영원히 완벽한 존재로 제시된다. ... 요컨대 플라톤은 역사를 배제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 역사는 배제하려 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인간은 역사를 만들고 역사는 인간을 만든다. ... 플라톤이 [국가]를 쓰면서 민주주의의 사망신고서를 작성하고 있다고 믿었던 그 세기로부터 여러 세기가 지난 후, 민주주의를 향한 행보는 안정된 중세 기독교 사회에서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코뮌과 더불어 보란 듯이 재개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1789년 ... 1848년에도 ...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세계를 뒤흔든 열흘 ...”로 이어진다. 인류의 역사는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p.168~169)

- "젊은 왕은 또한 칼뤼아나(그리스식으로는 칼라노스라고 하며, 브라만을 뜻한다)라는 이름을 가진 고행자에게 커다란 애착을 보였다. 죽을 날이 가까워오는 것을 느낀 그의 요청에 따라 알렉산드로스는 장작더미를 쌓게 했다. 이윽고 장작더미에 올라간 칼뤼아나는 놀란 군대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마디 탄식도 업이 불꽃 속에서 타죽었다. 친구의 자발적인 죽음을 차마 지켜볼 수 없었던 알렉산드로스는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상당한 세월이 흐른 후 기독교의 제사장에서 견유 철학자로 변신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페레그리노스가 올륌피아에서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죽음을 택한다. 이렇듯 알렉산드로스가 인도를 지날 무렵에는 그리스식 지혜와 힌두식 지혜가 마주치고 있었다."(p.298)

- "칼리마코스는 영리한 사람이었다. 그는 동시대인에게 이제는 고전이 된 과거의 위대한 시인들의 모방을 장려하지 않았다. ... 그는 구닥다리 시 장르는 죽은 지 오래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호메로스가 부활하는 일도, 비극 작품들이 다시 소생하는 일도 없을 것이었다. 그는 서사시가 명맥을 이어가기 위해 헛되이 매달리고 있는 연작시의 상투성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자신의 격언시에서 “나는 연작시를 증오한다. 누구나 지나가는 상투적인 그 길.... 나는 공동 우물의 물은 마시지 않을 것이다. 대중적인 것들은 나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고 토해냈다."(p.441)

- "크고 작은 혁명들이 우리가 사는 우주를 전복시킨다... 혁명은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놓으며, 때로는 이 흐름을 가속화한다. 새로운 계급, 새로운 민족, 계급 없는 민족들이 이 세계를 관통한다. 에피쿠로스가 남긴 유산은 그들의 것이다. 그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몽테뉴는 에피쿠로스에게서 잊고 있던 조상을 발견했으며, 그래서 그와 한 가족이 되었고, 그의 생각을 이어받았다... 헬베티우스는 ‘행복’에 대해서 장문의 시를 썼고, [쾌락 예찬]이라는 글도 남겼다. 아나톨 프랑스, 앙드레 지드 등도 그에게 동조한다... 카를 마르크스는 에피쿠로스를 인간 해방자들 중의 한 명으로 예우한다.
인류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했는가? 인류는 신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했는가? 아직은 그렇지 못하다. 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에피쿠로스가 다시 부상한다. 언제나의 모습 그대로, 하늘의 은하수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늘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p.594~595)

 

[ 2012년 9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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