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권혁범 외 지음 / 삼인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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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파시즘(fascism)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1차 세계 대전 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조직한 파시스트당을 중심으로 형성된 정치적 이념, 20세기에 등장한 독재, 전체주의 체제나 운동을 총칭함"으로 정의한다. 전체주의나 독재의 특징은 정치경제와 사회문화적으로 '획일성'과 '일체성'을 강조하고 구현하는 시스템이라 할 수 있다. 즉 존재의 다름이나 생각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체제와 이데올로기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파시즘은 경제체제와는 관련이 없다. 자본주의도 파시즘으로 구현할 수 있고 사회주의도 파시즘으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파시즘의 반대는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파시즘은 20세기 내내 지구 상에 수 없이 등장했다. 이탈리아나 독일(히틀러) 뿐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도 천황제를 덧씌운 파시즘이었고 2차 세계대전 후 구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도 파시즘 체제였다. 그리고 스페인의 프랑코, 중동의 왕국, 아프리카와 남미의 쿠테타 국가, 북한의 김일성 체제와 남한의 박정희, 전두환 체제도 파시즘이었다. 메카시즘이 불던 1950년대 당시의 미국도 파시즘 체제였다고 할 수 있고...

이 책은 지난 20세기 전세계에 불어닥쳤던 '물리적, 폭력적 파시즘'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실제 우리나라의 경우도 폭력적, 물리적 파시즘은 외형상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헌법과 제도가 파시즘을 제어하는 (불안정하기는 하지만)기능을 유지하고 있고 형식적, 절차적, 제도적 민주주의는 갖추어져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저자들은 '파시즘'을 체제나 운동, 이념에 국한하지 않고 문화와 이데올로기까지 확장하려는 것이고 '파시즘'이 가능한 일종의 하부구조를 분석해 내려는 것이다. 과거 독일이나 이탈리아, 북한이나 남한을 생각해 보면, 파시즘 체제는 모든 것을 무력으로만 지배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 이탈리아에서도 수백 만명이 나치즘과 파시즘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한반도 남북의 민중들도 마찬가지였다. 

파시즘이 무서운 것은 그 폭력적인 내용이 상층에서 외형적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아래의 피지배 계층에서도 다양하게 의식, 무의식 속에 뿌리내리게 되는 현상이다. 파시즘이 개인 속에, 가족 속에, 각종 집단 속에, 문화 속에 자리잡으면 그 자체로 '살아 숨쉬는 바이러스처럼' 우리를 지속적으로 내면화되고 규정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한국의 경우에도 봉건왕조에서부터 20세기 후반 군사독재체제까지 수백, 수천 년간 이어져온 파시즘 체제가 지배층 뿐 아니라 피지배층의 머리와 몸 속의 유전자 속에 박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민중들이 파시즘 체제에서 살아온 것은 굴복하고 체념하는 양태가 크지만 자발적으로 동의하고 편승하는 모습도 적지 않게 파시즘 체제가 유지되는 구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지배층이나 소위 수구우익집단들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대안세력이라 할 수 있는 운동권이나 좌파세력들 중 많은 이들이 역시 '자신만이 절대적 정의를 독점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이러저러한 딱지를 붙임으로써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하려는 권력지향적 말과 글쓰기가 여전히 지배적이며, 좌파들의 논쟁 또한 권력지향적 문화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심지어 공공적 논의를 아예 사유화하려는 조짐까지 엿보인다(p.10)" 2000년 임지현씨의 이런 지적이 무려 12년이나 지난 2012년 5월에도 나타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한국의 파시즘은 안보와 국익과 효율과 편리와 시간을 내세운 획일화와 단순화와 전체주의를 의미한다. 주사파니 당권파니 반민주주의니 종북세력이니 하는 것은 이름만 바뀐 것 뿐이지 않을까? 구체적인 사실이나 근거, 사람과 행위를 명시하는 것이 아니라 '00빠'니  '00주의'나 '00파'를 제시하는 것은 편리와 효율을 가장한 집단적인 낙인찍기에 불과하다는 것이 틀린 말인가?
물론 저자가 지적하는 현상이 12년 후에 갑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2000년 이후 활성화된 인터넷 사이버 공간에서도 계속되어 왔다. 사이머 공간의 의사소통 역시 쌍방향적 민주적 의사소통의 방식보다는 언어와 논리의 폭력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현실 정치공간의 논리를 그대로 재현해왔다. 즉 파시즘적 현상을 비판하는 논리 자체가 파시즘의 인식 지평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사회구조와 경제체제, 법과 제도, 정치제도와 사회운동 등 다양한 현상들의 물밑에서 우리의 일상과 의식을 옭아매고 있는 한국사회의 파시즘적 결이 바뀌지 않는 한, 진정한 변화는 어렵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라고 말한다. 나 역사 전적으로 동의한다.

이 책은 그런 모습과 현실을 '우리 안의 파시즘'으로 규정한다. 임지현을 비롯한 권혁버! 김기중, 박노자, 김은실, 권인숙, 김근, 김진호, 전진삼, 문부식은 사회 구조 속에 도사리고 있는 반공주의 회로와 권력을, 전체저의적 법 질서의 토대로서 주민등록제도를, 인간성을 파괴하는 한국의 '군사주의'를, 한국 근대화 프로젝트의 문화 논리와 가부장성을,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우리들의 언어 안의 파시즘을, 한국 교회의 승리주의 파시즘을, 파시즘의 증식로로서 한국 건축을 통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파시즘을 진단한다.
임지현은 일상적 파시즘의 재상산구조이 학교교육이 있다고 분석한다. 학교교육은 지배 권력의 요구에 따라 권력의 사회문화적 통제 원리를 담고 있을 뿐아니라 교실 내의 일상적 생활 속애서 은영중에 특정한 사회적 규범을 배우도록 한다. 그 규범을 거부하는 학생들은 문제어, 지진으의 아름으로 타자화된다. 그는 체벌 금지를 전후해 나타난 '왕따' 현상을, '명령적 복종 단계를 벗어나 근대화돤 규율 권력이 학생들에게 강제하는 자발적 복종의 극단적 결과'라고 주장한다. 전교조에 대한 역대 정권의 과잉 반응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 1997년 서울대학교가 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타교생이나 졸엄생들의 도서관 출입을 막기위해 학생생증 바코드를 만들었던 것도 공공성 대산 생산성이 대학과 대학생을 지배하고 있는 특권의식일 것이다.
또한 그는 가족이기주의와 가부장주의, 부계 혈통주의, 민족지상주의는 서로 아어지면서 획일을 강요하는 강압적 동질성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개인의 권리는 민족과 국가의 이르으로 무시되고 민족은 같은 혈통이라는 보호막 아래 추상적인 일반의지를 표명하는 획일적 실재로 파악된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혼연일체의 민족이라는 신비적 모델로 대변되며, 그것은 독재권력을 정당화한다."

민주진보세력의 끝없는 내분과 분열상, 가족과 조직 내의 불협화음은 외부 이데올로기의 공세 뿐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생과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끝없는 성찰과 혁신'은 말이나 글이 아니라 결과로 드러나야 할 것이다.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꼭 일을 것을 권한다...
 
* 인상 깊은 문장 :
 
"파시즘의 유산은 우리 안에 넓고 깊숙이 잔존해 있다. 권력자만이 아니라 그에 저항하는 자들까지도 매료시키고 사로잡는 권력의 위력. 모든 것을 가격으로 환산해야 직성이 풀리는 물신주의. 살아 남기 위한 나날의 각박한 생존 경쟁. 승리자가 되지 않고는 삶을 영위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초조함과, 승리하면 모든 것을 짓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권위주의. 이 모든 것 속에 파시즘은 오늘도 살아 있다.(p.255)"
 
"이제 문제는 신체에 직접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저개발된 권력으로서의 군부 파시즘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그것은 더 이상 재발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 또 재발한다 해도 새삼 그 폐해를 지적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투명할 정도로 가시적이며, 따라서 타격지점도 명백하다. 문제는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굴종하게 만들어 일상 생활의 미세한 국면에까지 지배권을 행사하는 보이지 않는 규율, 교묘하게 일상과 정신을 조작하는 고도화되고 숨겨진 권력 장치로서의 파시즘이다. 나는 그것을 '일상적 파시즘'이라 부르겠다. 일상적 파시즘은 전체주의 체제로서의 나치즘이나 이탈리아의 파시즘과는 존재 양식을 달리한다. 그것은 사람들이 체제의 배후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 전통이라는 이름의 문화적 타성들, 설명하기 힘든 본능과 충돌들 속에서 천연덕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말 그대로 '보이지 않는 테러'인 것이다. 일상적 파시즘은 그러므로 잡식성이다.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민주정이든 전제정이든 무엇과도 손쉽게 짝을 이룬다. 그것은 남과 북의 동질성을 확보해주는 연결고리이다. 일상적 파시즘은 한반도의 속살이다."(p.30)
 
"후쿠야마의 비유이 의하면, 한국 사회는 말 안장 형의 사회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비대한 국가 기구와 혈연정 배타성에 사람들의 의식을 묶어두는 가족이 각각 큰 비중으로 사회의 위와 아래를 장악하는, 그렇기 때문에 중간 허리에 해당하는 시민 사회가 발전하지 못한 사회라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국가 기구와 가족은 각각 위와 아래로 분절되어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맞닿아 있다. 연고주의가 최소한의 관료적 합리성마저 밀어 내고 국가 기구를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군부독재가 무너지고 민간 저우가 들어서면서, '소통령'이라는 독특한 용어가 나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 년 전에 폴란드의 한 외교관이 내게 이렇게 물은 적이 있다. 왜 한국의 신문들은 선거 관련 보도를 하면서, 각 당의 정강 정책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허구한 날 몇몇 보스들의 이름만 거론하고 사람들의 계보만 그리냐고. 중앙의 정치가 그러하다면, 지방 정치에서는 종친회, 동문회, 향후회의 등장이 라장 중요한 예측 지표가 된다. 전통의 위력 앞에서 이러한 현상에 대한 비판은 곧 힘을 잃는다.이러한 현상은 기본적으로 사상 운동이나 시민 사회 운동을 억압해 왔던 한반도의 20세기가 낳은 기형아이다. 아념적 지향이나 공적 이해를 중심으로 모이는 것이 기본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모든 집단 행위는 가문이나 동창회 또는 향후회의 형식을 빌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과도하게 성장한 국가의 권력 기구가 위로부터 파시즘을 강제하는 정치적 기제라면, 확대된 가족주의 혹은 연고주의는 밑으로부터 파시즘을 담보하는 견고한 문화적 기제이다. 가족이나 지역의 특수 이해를 넘어서 공적 이해를 추구하는 시민 운동의 부재는 결국 국가 권력에게 공공적 이해에 대한 해석의 독점권을 부여했다. '충'의 덕목을 강조하는 국가 권력은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자신의 특수한 이해를 보편적 이해라고 강변했다.
국가 권력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세력 또한 조국과 민족이라는 코드를 공유암으로써, 국가 권력의 정통성을 문제삼았을 뿐 국가 권력이라는 존재 자체가 정당한가 하는 물음은 제기하지 못했다. 조국과 민족이라는 추상의 헤게모니를 둘러 싼 국가 권력과 저항 운동의 투쟁 속에서, 구체적인 인간들의 삶은 관심의 뒷전으로 물러났고 규율 권력은 조용히 일상 생활 속에 침투했다. 그리고 끝내는 저항 운동 자체가 권력의 코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사회의 이 같은 특징은 '근대'를 보는 독특한 시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다양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동도서기(東道西器)'론으로 압축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가 자본주의 동도서기론이라면,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사회주의 동도서기론이다. 양자의 공통점음 기술로서의 근대는 수용하지만, 해방으로서의 근대는 부정한다는 것이다.
한국적 민주주의가 프랑스 대혁명의 성과들을 서구적인 것이라고 건너뛰었다면, 주체사상은 노동해방의 의미를 민족해방이라는 이름으로 거부했다. 한국적 민주주의와 주체사상은 결국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민중을 억압하고 동원하는 동원 이데올로기라는 특징을 공유했다. 동원 체제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호응을 필요로 하였는데, 해방의 논리보다는 전통의 논리가 그러한 필요를 만족시켰다. 남과 북이 공히 학교 교육에서 '충'과 '효'를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한 것 등이 그러한 예이다. 그것은 일상생활의 영역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가부장주의 또는 부계 혈통두의와 결합함으로써 파시즘의 아비투스를 강화시킨다. 위로부터의 파시즘과 밑으로부터의 파시즘이 변증법적 자기발전을 시작하는 것이다.
가부장주의나 부계 형통주의는 자연스럽게 혈통적 민족관으로 이어진다. 사회 전체가 가족주의적 연계에 의지하는 한, 그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혈통적 민족관은 인간의 정체성이 자율적 의지가 아니라 출생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출생에 의한 선험적 정체성은 사유하는 자아를 부정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민족에 속해 있다." 식민지와 분단이라는 역사적 경험은 이 명제를 정당화하기에 충분하다. '우리'라는 당일한 정체성을 요구하는 반제국주의 투쟁에서 파생된 이 명제는 이제 획일을 강요하는 강압적 동일성을 의미한다. 그 결과 개인의 권리는 민족의 이름으로 무시되고, 민족은 같은 혈통이라는 보호막 아래 추상적인 일반 의지를 표명하는 획일적 실재로 파악된다. 국가와 개인의 관계는 혼연 일체의 민족이라는 신비적 모델로 대변되며, 그것은 독재 권력을 정당화한다. 문제는 그것이 권력의 의지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 사회가 일반적으로 공유하는 집단 정서라는 점에 있다. 남과 북의 권력이 사용하는 담론 구조가 같은 것은 물론, 남한 운동의 담론도 같은 구조 속에 있다. 그 결과 남한의 운동은 남과 북의 정치권력 앞에서 이론적으로 무장해제 당했다."(p.41)

[ 2012년 6월 0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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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스쿨 상
이석범 지음 / 살림 / 199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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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만 교수의 <서울대의 나라>를 읽는 중 책 속에 소개되어 알게된 소설책이다. 이 작품은 김경문 작 <대학 서열 깨기>등 다른 책에도 부분 인용되어 있다.


아내와 이혼한 후 아이를 키우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가 운좋게 강남의 신생 사설학원에 강사로 들어간 주인공(정민수)와 학원을 중심으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입시 위주의 파행적 교육 현장과 그 속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비리를 충격적(?)으로 고발한 소설이다.
 
일곱 살짜리 아들 하나를 둔 34세의 정민수... 그는 2년 동안 단 한 편의 명시 [수녀의 거기]를 쓴 '세상과 멀리 떨어져 살았던' 시인이기도 하다. 그런데 최근 '무가치한 남편 가슴에 비수를 꽂자'는 '무남비' 운동의 행동대장인 똑똑하고 무서운 아내 류은영으로부터 버림 받아, 아들과 함께 서울에 버려지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아내가 던져 준 6백만원을 달랑 들고서 드디어(!)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주인공...
 
강남 대보동(대치동?)에 위치한 신설 사설학원의 원장 강붕구는 의욕적으로 학원 수강생을 모집하기 위하여 강사를 새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정민수는 길가에서 정보지를 보고서 국어 및 논술강사로 대보학원에 찾아간다. 학원에서 뜻밖에 대보학원의 기획실 차장인 군대 동기 황재섭을 만나게 되고 운좋게 강사로 채용된다. 황재섭은 자신의 아버지가 학원사업을 하다 주변 동료의 배신으로 사업에 실패하고 죽은 뒤 학원가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으로 군대시절 별명이 '황도끼'였다.
새로 강사를 채용하면서 대보학원에는 상담실장  문영달을 주축으로 하는 강사진으로 구성된 '문영달 사단'과 황재섭을 주축으로 하는 '황재섭 사단'이 학원 강의시간과 수강생을 두고 치열하게 암투를 벌인다. 강붕구 원장은 겨울방학을 맞아 '윈터 스쿨' 즉 고2 수강생을 3개월 동안 기숙학원에 받아 '대박'을 노린다. 그는 다른 학원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신문광고를 1면에 내면서까지 의욕적으로 학원사업에 착수함과 동시에 학원 내 강사들의 무한경쟁을 노리고 또 다른 임석중 사단까지 끌어들인다. 각 사단은 고등학교 교감이나 선생들을 찾아다니면서 룸쌀롱 접대를 통해 수강생 공급을 청탁하고 선생들과 거래를 맺고 유명인사의 부인들과 경제력이 있는 학부모들에게 '서울대 학벌서열 구조'라는 협박과 회유를 통해 고액 사설과외(일명 '돼지')를 만들어낸다.
정민수는 '황재섭 사단'의 국어,논술강사로 활동하면서 고액과외까지 할 수 있게 되면서 '새로운 서울 생활'에 대한 기대감에 부푼다. 비록 단칸방에 어린 아들과 살고 있지만 아들이 혼자 유치원에 다니고 밥을 먹고 지내는 것을 조금만 참으면 된다고 다짐한다. 그는 학원의 경리인 최보경과 함께 아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이브를 보내면서 그녀에게 애정을 느낀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담임을 맡은 교실의 삼수생 김단(서파공, 서울대 파괴 공작대의 행동대장)과 박교수의 학벌사회, 입시만능주의에 대한 비판과 반발을 겪으면서 그 자신도 심리적 갈등을 겪기도 한다.
학원 바깥에서는 수능시험 시즌이 다가오면서 연쇄 폭탄테러가 발생한다. 테러는 수능시험을 관리하는 국립교육평가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테러는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수능 일정에 따라 강동교육청, 세원외고, 수능 고사장 신구중학교, 연세대+고려대, 빌라 학원강사의 거주지에서 연이어 발생한다. 과연 누가 테러범일까?
 
'윈터 스쿨'의 수강료는 어마어마하다. 기본 180만원에 오피스텔 숙박료가 50만원씩 3개월이다. 그것만 해도 3개월에 18억원에 육박한다. 하지만 이에 더하여 돼지치기의 경우 국,영,수 돼지 40만원이 3개월이면 학부모들은 950만까지 부담해야 한다. 그럼에도 윈터스쿨은 수강생 1천명으로 시작된다.
 소설은 학원장과 강사들의 갈등, 학원 내 사단들의 암투, 강사들과 학부모들의 거래, 학원과 고등학교 선생들의 결탁, 주인공과 최보경의 연애, 주인공과 이혼한 아내의 갈등, 연쇄 폭탄테러, 윈터스쿨 기간 중의 수강생 변사체 발견 등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크라이막스를 향한다.
 
작가는 단순히 사설학원의 비리만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교육이 인격도야나 아이들의 장래성, 가능성을 계발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전투논리 위에 입각해 있음을 말한다. 따라서 교육에 대한 우리의 근본 이념, 근본 방향 자체를 바꾸는 데 있음을 아프게 지적하고 있다. '서파공'이나 테러범 '하니바머'의 등의 존재는 단순히 소설적 뼈대를 위한 장치들이 아니라, 소설이 제기하는 문제의 깊이와 넓이를 증명해주는 장치라 할 수 있다. 컴퓨터 통신에 서파공이라는 아이디로 쓴 글들의 제목을 보면 무엇을 문제제기 하는지 알 수 있다.

 
올해 내내 아이들과 학생들의 자살 소식이 잇다른다. 지금 어디에선가 우리의 아이들이 입시지옥에 짓눌려, 시험성적과 경쟁에 시달려, 왕따와 좌절에 못이겨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의 아이들, 미래의 아이들, 미래의 우리 사회를 위해 대학입시경쟁과 서울대 중심의 학벌서열구조에 대해 더 이상 방관하거나 끌려다녀서는 안된다.

[ 2012년 6월 0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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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 슬라보예 지젝 인터뷰 궁리 공동선 총서 1
인디고 연구소 기획 / 궁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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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슬로베니아 철학자의 이름은 친구에게서 몇 번 들은 적은 있지만 구체적으로 관심은 없었다. 언젠가 친구가 페이스북에 올린 지젝의 글을 읽으면서 든 느낌은 '무지 어렵고 현학적이네..'였다. 그랬던 지젝이 나와 어떤 인연인지 세미나 교재로 다시 등장했다. 다행하게도(!) 지젝의 저서를 번역한 책이 아니라 국내 '인디고 연구소'측이 지젝과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발간한 책이다.


지젝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 사이에 존재하는 장벽이다. 그가 '새로운 아파르트헤이트'라 부르는 이 장벽은 전근대적인 차별정책에 비해 보다 치밀하고 노회한 성질을 띠고 있다. 예컨대, 자본가의 착취 방식이 공정 영역을 사유화함으로써 그 지대를 물리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 자본가들의 이윤을 남기는 방식이 지적 재산권을 경유함으로써 보다 세련되고 뻔뻔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 라는 개념은 현대사회에 적용하기 어려운 마르크스 정치학의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이라는 개념을 현실의 조건에 맞도록 확대, 발전시킨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공정 영역의 사유화' 역시 현대 들어와서 자본가들이 이윤을 취하는 교묘한 방식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IMF 체제 이후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국내외 자본에게 사회간접시설의 개발권을 제공하면서 시작되었기에 실감할 수 있다. 현대통령인 이명박이 서울시장 때부터 지금까지 국가시설 전반을 통채로 넘겨주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하여 지젝은 오늘날 자본가들의 지배 체제야말로 민주주의를 거스르고 있으며 오히려 여론 독점과 이윤 독식이라는 경제적 독재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특히 프롤레타리아의 자본주의적 삶을 북한 인민의 삶에서 가져오는 정치철학절 재치는 한반도에서 같은 민족과 문화라는 공통성을 지닌 우리들에게 씁슬한 유머로 다가온다.

오늘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일을 하는 계층이 아니라 실업자나 빈곤층 등 배제된 자다. 그는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모든 영역에서 발생하는 배제된 자들까지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으로 포괄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개념을 재정의한다. 프롤레타리아적 입장은 분노 자본이 자유롭게 운집하고 폭발하는 저항의 거점이 됨으로써 혁명의 새로운 주체들이 탄생하는 열린공간아 된다는 것이다. 안정된 고용을 누리는 노동자 계급이 이익집단화되고 정치경제적 이익을 공유하는 메카니즘에 속해버린 현대 자본주의 구조에서 지젝의 이런 지적은 크게 공감이 된다. 지난 2010년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오큐파이 투쟁, 99% 투쟁이나 튀니지, 이집트 혁명도 그런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폭력이 대판 지젝의 통찰력도 우리에게 필요해 보인다. 우리가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문제는 "폭력은 늘 여기에 있다"는 사실 자체라는 것이다. 진보적 좌파의 폭력에 대해서만 여론의 초점이 맞추어지로 있지만, 좌파의 방어적 폭력을 초래하는 진짜 폭력이 노회한 방식으로 이 세계에 늘 상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상존하는 폭력에 노출된 대상은 배제된 자들이다. 그는 '이론과 철학의 부재'가 포함된 자는 물론이고 배제된 자들조차 이 세계에 상존하는 폭력의 현실에 대해 인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박탈한다고 주장한다. 직접적 폭력이 아닌 자본과 공권력에 의한 경제적, 제도적, 문화적 폭력이 현실 구조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굳이 이론과 철학으로 규정해야 인지할 수 있다는 말이 좀 거창하기는 하다. 우리나라의 경우 일상적으로 경찰과 검찰의 폭력이 난무하고 있지 않은가?

인디고 연구소는 폭력이 포함된 자와 배제된 자를 가르는 장벽의 원인이자 결과라면, 그것이 필연적으로 '공동선'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으로 유도한다. 지젝은 공동선을 '공동'과 '선'으로 분리해서 접근한다. '공동'은 보편성의 문제를 함축하는데, 보편성이야말로 배제된 자와 포함된 자를 가르는 장벽을 허물 수 있는 진정한 해방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선과 악을 초월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보편성의 세계가 아니라, '선'의 규준을 투쟁으로써 쟁취하는 '구체적 보편성'의 세계야말로 좌파에게 주어진 또 다른 실천적 과제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인간윤리의 범주가 될 '선'이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선'은 점유, 혹은 투쟁과 쟁취의 대상이다. "공동선은 단순히 전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가 결정을 내려야 하는 성질의 문제"인 것이다. 그렇다면 지젝에게 오늘날의 궁극적 '선'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배제된 자들의 정치사회적 침입과 복원이다.

전셰계적인 정치경제 그리고 철학적 분위기는 어떠한 형태로든 자본주의가 영속한다고 생각하거나 자본주의 이후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정치철학절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독점된 여론이나 지식계층에서 자본주의 이후의 세계가 '불가능'하다고 선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지젝은 자본주의 이후의 공동의 세계를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는 상징계적 억압의 사실을 끊기 위해 지금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로 재사유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경계 흐리기는 '가능한 것'의 영역을 확장시킨다. 이를 위해 지젝은 보다 복잡한 오늘날의 세계적 자본주의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예각적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이론의 정치화()가 시급하다고 진단한다. 이는 곧 정치적 주체의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마르크스와 레닌,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노동자계급과 프롤레타리아라는 테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에게 지젝의 발상과 사유를 한 번쯤 접하기를 권하고 싶다.

연구소의 소개에 따르면 지젝은 라캉과 마르크스, 헤겔을 접목한 독보적인 철학으로 '동유럽의 기적'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석학이라 한다. 독특한 영화해석과 문화비평을 내놓는 철학자로 유명하며 미학, 정치이론 등 다양한 지식을 철학에 자유자재로 접목하는 독특한 사유를 통해 대중문화로 철학을 더럽히는 'MTV 철학자'라 불리기도 한다. 남동유럽의 소국 슬로베니아 출신으로 파리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전체주의와 인종주의에 반대하는 운동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현실정치에도 적극 가담하기도 했다.

[ 2012년 6월 0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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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셰익스피어를 입다 셰익스피어 에세이 3부작
안경환 지음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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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문학. 나에게는 둘 다 어려운 대상이다. 물론 보통사람들에게 가장 거리가 먼 대상이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 곁에 아주 가까이 있기도 한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보통사람들에게 법'은 아무래도 어렵고 권위주의와 권력의 냄새를 본능적으로 느낄 것이고 소설을 제외한 시, 연극 등 대부분 문학 역시 일반인들에게는 멀 것이다.(그 거리는 비교할 수 없이 크지만...) 하지만 우리가 세금을 내고 운전면허를 따고 병역의무를 지고 다른 사람과 계약을 체결하는 것은 법률행위를 하는 것이고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는 것은 문학을 가까이 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법과 문학 모두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50년 전에는 여성과 장애인을 차별하거나 경찰이 길가는 젊은이를 붙잡아 두들겨 패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사람들은 법에 의해 처벌받는다. 문학 역시 시대적 상황에 맞는 구성과 주제와 표현방식을 달리한다. 법은 인간의 정의를 주레로 하여 현실적 문제를 주로 다루고 있고 문학은 인생을 주제로 하여 인간의 보편적 문제를 다루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학에 비해 법은 딱딱하고 비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법과 문학 모두 단어와 문장이라는 수단을 사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지만 그 단어와 문장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정반대다. 법과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수단이지만 대체로 법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하고 문학은 공감을 얻는다. 특히 한국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법과 법률가들(변호사, 판사, 검사)은 대중들에게 가장 큰 불신과 비난을 받는 직종에 속한다. 왜 대중들에게 공감과 지지를 얻지 못하는지는 자신들 스스로가 더 잘 알 것이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이유는 법률가들 스스로가 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법의 적용과 판단이 대상자의 지위고하에 따라, 빈부에 따라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법률가들이 불신과 부정의 대상이 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여러가지 역사적, 태생적인 이유도 있고 제도적, 구조적, 정치적 이유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일부 법률가들은 법의 본래 취지에 맞는 활동과 역할을 펼치고 있다. 그들이야말로 대중들에게 공감을 얻고 정의와 평등을 위해, 헌법의 정신에 따라 올바른 법률적 행위와 판단을 위해 노력하는 '진정한 법조인'인 것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소속 상당수 변호사들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어떻게 민변의 적지 않은 변호사들은 일반적인 법률가, 변호사들과 다른 자세와 태도를 보일까? 아미 작고하신 조영래 변호사나 지금 서울시장인 박원순 변호사를 통해 왜 그런지를 알 수 있는 방법도 있지만 다른 방법도 있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노력'하는 법률가들이다. 그들이 노력하는 내용은 스스로 공평무사한 자세와 태도를 갖추기 위래 애쓰고 법에 대해 더 연구하고 공부하는 것도 있도 대중들에 대해 알려고 노력하고 공감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그런 노력을 하는 민변 변호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법과 문학의 간극을 줄이고자 시도한다.  그는 서구사회에서 법이 대중화된 이유 중 하나를 셰익스피어를 통해 찾는다. 그는 "법과 문학의 본질과 효용에 대한 의문과 호기심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작품의 총체적 이해와 사회의 통합적 지성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아니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전공인 법학 뿐 아니라 자신의 인생 전반에 걸쳐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는 "지난 수 십 년, 셰익스피어는 나의 친절한 스승이자 친구였고, 작품의 수많은 인물은 내 꿈을 휘젖는 연인이었다"고 말한다.

이 책에서 우리는 '영국의 대문호'로만 알고 있던 셰익스피어와 그의 작품의 다른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셰액스피어는 '소송만능주의자' 수준으로 일생동안 숱한 송사에 휘말려 살았다고 한다. 저자는 많은 자료조사를 통해 셰익스피어가 실존 당시의 보통 사람보다 자신의 재산적 이해관계에 민감했으며 재산을 얻고 지키려고 기꺼이 법절차에 의존했다고 말한다. 정확하지 못한 기억으로 증언을 한 적도 있고, 담합성이 강한 소송에 동참하기도 했다. 기록에 나타나지 않은 다른 소송이 있었을 가능서도 높다고...^^ 그렇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셰익스피어의 대다수 작품 속에는 소송이나 재판와 관련된 내용이 상당히 많다고. 그것은 그가 활동하던 엘리자베스 시대는 소송 폭주 시대였기 때문이기도 하다.(한 해 평균 1백만 건 이상이였다고...ㅋ)
물론 소송과 관련한 사건들이 셰익스피어의 작품 소재나 줄거리에 반영되기는 했지만 그의 작품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과 생애, 갈등과 반목, 애정과 애증 등 인류의 보편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다.

"초임 판사의 생애 첫 재판이다. 배당된 사건은 원로 판사에게도 어려운 사건이다. 그런데도 신출내기 판사는 만인을 경탄시킨 명판결을 내린다. 원고는 절대로 잘 수 없는 사건이라고 확신했다. 부자 상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차용증서를 받았다. 빌려준 돈을 제날짜에 못 받았다. 그래서 증거를 들고 법원에 갔다.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두 사람이 합의하여 서명한 계약서의 내용이 약간 특이하다. 만약 채무자가 빌린 돈을 갚기로 한 날짜에 갚지 못하면 자신의 심장 가까이 살 일 파운드를 채권자에게 준다는 내용이다. 법대로 따르겠다는 약속을 이미 했다. 거짓말도, 유혹도, 사기도 없었다. 그야말로 완전한 자유의사로, 내용을 너무나 잘 알고 맺은 계약이다.
피고도 각오하고 있었다.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사건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바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빚쟁이의 자비, 법원의 관용 뿐이다. 엎드려 비노니 그저 목숨이라도 부지하게 해달라는 애원 뿐이다. 젊은 판사의 입에 한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다.
그러나 경천동지의 일이 벌어졌다. 재판을 시작할 때만 해도 판사는 모든 사람의 예상대로 원고의 법적 주장에 동조하면서 피고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권고했을 뿐이었다. 판사로서의 자신의 권한은 그뿐이라는 것을 암시하면서. 그러나 완강한 채권자는 요지부동이다. 심지어 채무자가 원금의 3배에 해당하는 대금을 위약금으로 변상하겠다는 청약마저 일축하고 오로지 계약서에 적힌 대로 '살'로 '특정이행'할 것을 요구한다. 이때 판사의 태도가 돌변한다. 느닷없이 계약서에 적힌 내용의 기슬적인 흠을 문제람아 피고의 책임을 면제해준다. 계약서에 적힌 내용은 불법이고 따라서 무효하는 것이다. 납득할 수 있는 판결이다. 그러나 판결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태도를 표변한 판사는 이제 폭군으로 변한다. 돈을 빌려준 채권자를 살인미스로 몰아 그의 전 재산을 내놓으라고 명령한다.
'법아 그러나 어쩔 수 없다'며 소극적으로 채권자의 자비를 호소하던 판사는 일순간 고도의 사법적극주의자가 되어 경각에 몰린 생명을 구하고, 마침내 위태롭던 정의를 세운다. 신참판사의 명판결(?)은 신화가 되어 대에 길이길이 전승된다.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창작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위광을 업고 지구를 정복한다. 셰익스피어가 내놓은 문제의 판결은 그리스도교 문화권의 최고 명판결로 후세인의 칭송을 받는다."

위 안용문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베니스의 상인>의 주요 내용이다. <베니스의 상인>은 복수극이라고 한다. 고리대금엄자인 원고는 자신을 공공연하게 고리대금업자로 비하하고 심지어 '목을 따 죽일 개'라고 부르며 수염에 침을 뱉는 등 오랜 세월에 걸쳐 모욕을 준 피고를 법을 통해 복수하려는 것이었다. 원고는 사적 복수를 공적 복수로, 물리적인 직접 복수에서 제도를 통한 복수로 형식과 절차를 변한 근대화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반대편인 피고의 복수 역시 잔인하다. 위기에서 벗어나 처지라 바뀐 피고는 원고를 파멸시키기로 작심한다. 판사의 판결에 따라 자신의 몫이 된 원고의 재산의 절반을 자신을 수탁자로 하는 신탁을 창설한다.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향후 원고가 취득할 모든 재산을 신탁재산에 납입할 것을 약속하라고 강요한다. 그뿐 아니라 유대교안 원고를 기독교로 개종하라고 정신적인 자산마저 빼앗는다. 그로써 원고의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려는 것이다. 이로써 '명판결'이라는 법적인 정의와 별도로 법과 정의가 무엇인지, 복수가 무엇인지, 둘 중 누가 궁극적인 가해자고 피해자인지 독자들과 관객들에게 생각토록 한다.

이 이외에도 저자는 책 속애서 <헨리 6세>를 비롯하여 우리도 들은 기억이 있는 <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왕>, <로미오와 줄리엣> 등 12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그 작품들 속에는 법률가에 대한 증오, 법에 대한 부정, 정치적 갈등, 세대간 갈등, 오명, 명예, 공평 등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법은 시대의 거울"이기에 모든 문학 작품 속에 법이 투영되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법을 빼고 읽어도 문락이 되지만, 법과 함께 읽으면 더욱 큰 문학과 세상이 보인다"고.. 그는 시인을 높게 평가한다. "시인은 위대하다. 시는 어떤 예술 장르보다 정교하고 차원 높은 언어의 마석이다. 시는 역사보다 더욱 진실하고 철학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절이 있다. 역사는 특정 시기에 치중하지만 시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취지다. 문학이야말로 인간 삶의 주제를 더욱 깇이, 선명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창의적인 작가라 내면의 진힐에 더욱 용이하게 접근하도록 인도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시인도 시대의 입법가이자 판관이라고 말하고자 한다.

법락자이면서도 법률전문가들의 독점물로 전락한 법을 문학의 아래에 위치히키는 저자의 입장과 법철학이 의외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공감하게 된다. 법 역사 사회적인 합의로 규정되는 '인간의 창작물'에 불과한 것이고 역사적일 수 밖에 없다는 데 동의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든, 인간이 만든 법이든 모두 불안전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끝없이 고민하고 연구하고 갈등하는 것이 본질일 수 밖에 없다. 법규의 문장에 구속되는 법률전문가들은 자격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사법고시에 합격한 사람들, 로스쿨 학생들, 전현직 법률가(판사, 검사, 변호사, 교수 등) 모두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다. 또한 삶에 대한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뭇 학생들과 법에 대해, 셰익스피어에 대해 궁금해하는 지인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 2012년 5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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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5
이권우 지음 / 그린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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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책을 멀리하다가 다시 집어들기 시작한 지 벌써 5년 째... 이제 나에게 책은 의식주와 더불어 삶과 생활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책을 고르고 읽다 보면 '왜 내가 이 책을 골랐을까'라는 생각이 들면서 읽기를 포기하는 책도 있고 '와! 이런 책도 있었네. 왜 내가 아직 몰랐을까?'라고 감탄할 수 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하루 24시간, 365일 중에서 어떤 책을 어떻게 골라 나의 삶과 생활 속에서 반영할 것인가는 언제나 남게되는 숙제다. 가끔씩 '내가 과연 잘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 때면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어차피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나는 남들이 음악이나 운동을 즐기거나 술을 마시는 등의 여가시간을 보낼 때 책을 읽는다. 그 속에서도 왜 내가 책을 읽는 지, 어떻게 읽을 지에 대해 늘 생각하면서 좀 더 바람직하고 적합한 책 읽기를 고민하곤 한다. 이 책은 그런 와중에서 고른 것이다.

이 책 <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는 지식 습득을 위한 책읽기를 넘어, 자신의 인생을 변화시키고 사회적 소통을 위한 책읽기를 새롭게 제안한다. 책은 '우리의 내면을 성장시킴과 동시에 통용되는 기성가치에 의문을 불러일으켜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힘이 있고,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타인의 아픔과 고통, 기쁨에 대해 공감할 수 있도록 하는 힘'이 있다. 한마디로 책읽기는 우리의 삶, 우리의 세계를 변화시킨다. 책읽기가 가진 이런 힘을 역설하고 있는 이 책은 부모와 자녀 간에 소통이 잘 되지 않는 현실에서 세대 간 소통을 유도할 수 있고, 입시 너머의 진정한 공부를 추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 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책 읽기가 이성적으로는 어른 아이를 따질 필요 없이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삶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오랜 근현대사를 통해 책 읽기는 커녕 하루 세끼 밥 먹고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를 겪었고 어려서부터 책과 가까이 살아오지 못했기 때문에 문화나 습관에서 책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왔다. 이에 더하여 지배 집단 역시 장기적으로 사회의 숙성과 발전을 계획하기 보다 당장 국가안보와 경제성장을 위한 노동력 확충에 급급했기에 단순한 읽고 쓰고 말하고 암기하는 교육 이외에 근본적인 교육이나 책 읽기는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남북분단을 거치면서 그나마 깨어있던 지식인들 역시 갈가리 찟겨지고 사라지면서 우리 사회에 지성이나 인문이나 문화는 자리잡기 어려운 상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지금부터라도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체를 의해 책 읽기가 필요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은이 이권우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다독가이자 서평과 강연을 하며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도서평론가이다. 단순히 좋은 책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소개해 왔다. 이 책이 말하는 것 역시 크게 보면 이 두 가지 독서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하고 활동하며 내놓은 그의 산 독서론이 이 책에 집약된 것이다. 그는 속독과 다독이 판치는 책읽기 풍토에 반해, 느리게 읽기, 깊이 읽기, 겹쳐 읽기, 그리고 토론과 쓰기가 어우러진 책읽기를 강조하여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책읽기 방법을 새롭게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삶과 만나는 ‘호모 부커스’의 독서법이다. 저자는 책 읽기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말할까?

그는 책읽기가 자기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기초 체력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고, 내면을 점검하고, 자신과 맺고 있는 다른 모든 것과의 관계를 고민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일상에 파묻혀 있는 우리에게 책읽기는 습관적으로 보내는 일상을 낯설게 보도록 해주며, 삶의 조건들에 대해 거리를 두고 다시 살펴볼 수 있는 깊이를 더해 준다. 이를 밑바탕으로 우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모습의 나를 창조할 수 있고, 삶의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다른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상상력의 힘을 얻을 수 있다.
나 역시 저자의 이런 주장에 공감한다. 나 자신이 나를 객관화시켜 돌아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다. 책의 도움을 받을 때 가능할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 인간이나 우주에 대한 학문적 성과, 과거의 사례와 평가 등을 통해 어제 그리고 현재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돌아볼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저자는 책 읽기가 단순히 개인적인 성찰과 소양을 쌓는 것 뿐 아니라 사회문화적으로 창조성을 키우는 기반이 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책읽기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한다고 말한다. 이 책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지옥의 묵시록>과 영화의 원작인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 <암흑의 핵심>을 예로 들어 책읽기가 창조하는 가치에 대해 말한다. 현대 영화사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지옥의 묵시록>은 20세기 초반 출간된 <암흑의 핵심>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코폴라 감독은 단순히 책을 영화로 옮긴 것이 아니라, 시대 배경을 베트남 전쟁으로 바꾸고, 미국의 대외 정책을 반대하는 영화로 새롭게 업그레이드했다. 만약 코폴라 감독이 <암흑의 핵심>이라는 책을 읽지 않았다면 <지옥의 묵시> 같은 걸작은 결코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책읽기가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이처럼 새로운 아이디어와 가치를 창조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 주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학부모들이 아이들의 창의적 소양이나 미래의 잠재성을 생각할 때 충분히 고려할 만한 주장이다.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책을 읽는 문화나 습관을 접하지 못하면 스스로 책을 읽는 습관을 갖추기가 무척 어렵다. 부모가 책을 읽지 않으면서 아이들에게만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도 하거니와 부당한 행위다. 아이들에게 지시나 강요보다 모범만한 것이 없다. 그런 면에서는 교사들도 마찬가지이고 소위 어른들, 선배들도 마찬가지다.

또한 이 책은 책읽기의 또 다른 의미로 ‘타인의 슬픔과 고통을 상상하는 힘’을 제시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만 자신의 바쁜 일상에 매여 타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책읽기는 이런 우리에게 다양한 경험의 세계를 체험하게 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겪는 어려움을 상상하게 한다. 여행가 한비야의 책을 읽고 국제 봉사활동에 관심을 가졌으며, 결국 봉사단체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사람들을 보면 이 책이 말하는 ‘상상력’의 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책을 통해 이 세상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바로 이것이 책읽기가 가지는 가장 큰 의미라 할 수 있다.
나 역시 저자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저자는 책읽기의 의미를 제대로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까지 현대인들에게 요구되는 책읽기는 ‘속독’과 ‘다독’이었다. 많은 정보를 빠른 시간에 습득해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힌 현대인들에게 이 두 가지 방식은 필수 불가결했을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와 같은 일본의 대표적인 다독가들의 책이 우리나라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이런 현대인의 요구에 잘 맞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도리어 느리게 읽으라고 주장한다. 사실 빨리 읽으려는 강박관념 때문에 놓치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인상 깊은 구절도 빨리 읽을 때에는 발견 못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빨리 읽으면 저자의 생각을 비판하면서 읽을 수 없다. 천천히 읽으며 꼼꼼하게 읽어야 저자의 생각이 갖는 타당성을 독자 나름의 기준으로 판단하게 되고, 비판할 수 있다. 느리게 읽기는 실용적인 책읽기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첫 걸음이다.
한 권의 책을 느리게 읽는 것만큼 깊이 읽는 것이 중요하다. 깊이 읽기란 한 작가의 책을 모두 찾아 읽는 ‘전작주의 독서법’의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깊이 읽기는 이런 전작주의 독서법을 발전시켜, 관련 주제의 책들까지 찾아 읽는 것을 말한다. 한 권의 책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내용도 깊이 읽기를 통하면 한 작가의 세계관이나 한 주제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가능해 진다. 가령 최근 한국 경제 상황에 대해 관심이 생겼다고 가정해 보자. 처음에는 간단한 입문서를 찾아 읽게 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국 경제를 지금 왜 위기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깊이 읽기를 한다면, 좀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경제원리를 다루는 책을 찾아 읽게 된다. 경제학 관련 책을 여러 권 찾아 연속선상에서 읽게 되면, 각각의 책을 따로 읽을 때보다, 또는 한 권의 책만 읽을 때보다 지식의 총량은 수십 배가 된다. 깊이 읽는 독서법은 우리의 지식을 넓히기 위해 꼭 필요하다.
깊이 읽기가 한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면, 겹쳐 읽기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깨닫게 되는 효과가 있다. 이 책은 겹쳐 읽기의 예로 <로빈슨 크루소>와 <로빈슨 크루소의 사랑>,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들고 있다. 험프리 리처드슨의 <로빈슨 크루소의 사랑>은 혈기왕성한 남자였던 로빈슨 크루소가 자기의 성적 욕망을 어떻게 충족시켰을까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 책이고, 미셸 투르니에의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로빈슨 크루소에 내재되어 있는 서구중심적인 사유를 비판하며 새롭게 써 내려간 <로빈슨 크루소>다. 이렇게 겹쳐 읽기를 통해 우리는 자칫 재미있는 소설에 그쳤을 <로빈슨 크루소>의 한계에 대해 고민하게 되고, 새로운 가능성을 알게 된다. 이 책은 겹쳐 읽기를 통해 책읽기를 다양한 사유들이 서로 경쟁하는 전쟁터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내가 책을 읽을 때 가장 주의해야할 문제다. 나 역시 '빨리' 읽으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많은 책을 읽다보니 빨리 읽게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여러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한 권의 책이라도 제대로 '내 것'이 되기위한 태도가 필요하다.
저자의 주장처럼 나도 재작년부터 간혹 느리게 읽기와 깊이 읽기(전작주의), 그리고 겹쳐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 법정스님의 저서,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저서, 조정래 작가의 작품, 공지영씨의 작품 등을 읽었고 한미FTA와 양자역학, 진화생물학 등을 겹쳐읽기 시도했다.

저자는 또한 느리게 읽고, 깊이 읽고, 겹쳐 읽는 독서법을 완성하기 위해 이 책은 친구들과 함께 읽고 토론해 보라고 권한다. 책은 읽기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단순히 많은 양의 책을 읽는 것보다는 한 권의 책을 읽더라도 함께 읽고 토론할 때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함께 읽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칠 때 비로소 그 책에 담긴 내용을 비판적이고 창조적으로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클린턴 전 대통령의 아내이자 2008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던 힐러리는 책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킨 대표적인 인물이다. 원래 공화당의 열혈 지지자였던 힐러리는 고등학교 시절 열린 모의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민주당 후보 역할을 맡게 된다. 어쩔 수 없이 민주당의 정책을 다룬 책을 읽던 힐러리는 어느 순간 민주당 지지자로 바뀐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토론을 준비하는 과정은 이처럼 자기 자신의 생각을 다시 정립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 책은 힐러리의 예를 통해 다른 사람과 토론하기 위한 책읽기가 얼마나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보여 준다. 
중요한 지적이다. 혼자만 책을 읽게되면 나 만의 생각으로 해석하고 받아들이게 되어 또 다른 관점을 잃게될 우려가 크다. 주변에 책을 읽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 남녀노소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전반적으로 책을 읽지 않는다. 바빠서 여유가 없어서 그렇다곡들 한다. 하지만 그들은 술자리는 자주 갖는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여러 세미나에 참석하려고 애쓰고 있다. 사는게 바빠서 참석률이 저조하기는 하지만...ㅋㅋ

그리고 저자는 책읽기의 완성은 ‘쓰기’에 있다고 말한다. 다양한 사유를 담은 책을 읽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읽은 책의 내용을 자신만의 언어로 쓰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글을 쓰면서 차분히 책의 내용을 정리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글로 쓸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책 내용 중 어떤 부분을 이해 못하고 있는지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책을 읽고 꼭 ‘독후감’을 쓰라고 말한다. 우리는 독후감을 통해 저자의 내면과 만날 수 있고, 책의 내용을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 더 큰 감명을 받을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학교에서 배워 왔던 딱딱한 ‘독후감’ 형식은 모두 버리라고 이 책이 말한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책을 통해 자신이 느낀 점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 쓰기 편한 방식을 만들면 된다. 만약 저자와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면 가상대담의 형식으로 독후감을 써도 좋고, 편지 형식으로 써도 좋다. 딱딱한 형식을 벗어나면 자신의 삶에 진솔한 글쓰기가 가능해지고 이렇게 글을 씀으로써 비로소 책읽기가 완성된다.
나 역시 책을 일은 후 대부분의 경우 독후감 내지 서평을 쓴다. 처음에는 책을 요약하기도 힘들었는데 지금은 조금 익숙해져서 감상을 써보려고 애쓴다. 그래도 책을 읽는 양이 늘어나면 독후감이 '숙제'가 되기도 한다. 느리게 읽기와 독후감 쓰기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는 것과 실제 책 속에서 보았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생활 속에서 구현하기는 천지차이다. 나 스스로를 돌아보면 더욱 그렇다...ㅠ 하지만 어쩌랴. 계속 노력하는 수 밖에...^^

[ 2012년 5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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