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진화 - 최초의 언어를 찾아서
크리스틴 케닐리 지음, 전소영 옮김 / 알마 / 2009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언어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한 사람은 갈릴레오였다. 그는 24개의 자음과 모음으로 한정된 알파벳만으로 무한한 생각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챘던 것이다(촘스키 사상의 향연 p167) 실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자음과 모음, 기껏해봐야 24개의 조각들이 단어를 만들고 문장을 만들어 표현하는 것이다. 그 조각 모음은 실로 놀라운 무한 표현력을 발휘하면서 우리를 동물과 다른 개체로 구분지어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늘상 우리가 말하고 쓰는 언어에 대한 중요성을 자각하지 못한다. 만약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우리의 표현 수단은 몸짓 언어와 그림 언어로 대체될 것이고 아무래도 표현 능력은 한정적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인류 발전은 꿈도 못 꾼 채, 어느 숲 속 나무줄기에서 늘어지게 낮잠자는 삶에 만족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사실 그런 일상도 나쁜 것도 아니지! 하지만 그 재미난 책을 못 읽어!). 그렇다면 언어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이 책은 그 언어의 기원을 말하고 있다.  

현재 우리의 언어학은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언어학에서는 대세이다. 그런데 지금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을 반격하는 또 다른 언어론이 등장하며 서로 언어학의 새 지형 판도를 짜려고 시도하고 있다.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은 인간은 누구나 언어문법을 타고 났다고 생각 한다. 그래서 우리가 만 두돌이 지나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생성문법론에 반격을 가하는 사람이 스티븐 핑커와 폴 블롬 그리고 촘스키의 한 때 제자였던 필립 리버만이다. 새로 등장한 핑커와 블롬, 그리고 리버만의 언어학도 진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촘스키의 진화론적 언어와 다른 점은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은 굴드의 진화론적 관점에서 서 있다는 것이다. 언어를 인간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갑작스레 생긴 부산물로 본 것이다. 반면에 핑커와 블룸은 언어가 순차적으로 진화했다고 보는 도킨스의 적응주의 관점에서 보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언어는 본질적으로 순차적이라고 생각한다. 순차적 의사 소통의 기초 단위는 명사와 동사, 그리고 이들을 하나로 엮을 때 사용하는 구조와 소리의 규칙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리버만은 우리의 뇌 속에 언어를 담당하는 기관이 따로 존재한다고 보는데, 퍼그슨씨병이나 뇌를 다친 사람들의 임상실험에서 그는 우리의 뇌 속의 기저핵이 언어를 담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개인적으로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이나 핑커의 순차적인 언어론에 대해 어떤 이론이 맞다, 안 맞다 할 능력은 없지만 아이들을 키우면서 관찰한 결과 촘스키의 생성문법론도 그리고 순차적인 언어론도 다 일리는 있다고 본다. 아이를 기관에 맡기느니 그 돈으로 책 사자! 주의여서 아이들과 있는 시간이 다른 엄마들과 많았던 나로서는 아이들의 언어를 자세히 관찰 해 볼 기회가 많았다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은 태어나면 목을 가누고, 뒤집고, 기고, 앉고,서고, 걷고 순차적으로 누구한테 배우지도 않는데 본능적으로 한다(아, 그럴때마다 그 환희란...)  

그리고 언어를 하는 데 있어서 정말이지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을 지지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이들은 한살 무렵부터 엄마라는 한단어를 시작해 불과 몇 달 사이에 신기하게도 문법적으로 체계를 갖춘 언어를 말한다. 빠른 아이들은 두 돌이 되기도 전에 어른을 능가하는 말들을 한다. 말이 늦는 아이들은 몇년동안 말을 하지 않다가 갑작스레 말문이 터지면 완벽하게 문법적으로 맞는 말들을 쏟아낸다. 그러다가 점차 자라면서 순차적으로 언어의 단순한 의미에서 추상적인 사고의 언어가 가능해 진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세심한 리스닝의 세계가 열려 있다고 보는데, 이 책의 저자에게서 그런 추론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기는 부모의 언어를 배우면서 자신이 노출된 언어에 맞게 소리의 레퍼토리를 조정한다. 그들은 모국어의 소리뿐만 아니라 전형적인 억양패턴도 구사하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커가면서 다재다능한 발음능력을 확실히 잃어버리므로 결국 어떤 언어의 소리는 발음할 수 없게 된다(p217)"  

아이하고 영어 공부를 하면서 더욱더 촘스키의 생성문법을 실감하는 것이 아이에게 처음엔 파닉스 위주의 영어를 공부하게 하였는데, 도저히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영어그림책으로 통문장 위주로 영어공부를 함께 하는데 이게 명사 위주의 파닉스보다 휠씬 더 효과적이었다. 길어서 혹시 잘 따라오지 못할까 걱정스러웠는데, 문장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듣는 것도 더 효과적으로 영어문장을 더 잘 이해한다. 리스닝도 그렇고 문장을 따라 읽는 것도 파닉스보다 더 세심하게 듣고 잘 읽는데, 얼핏 아이하고 영어공부를 하며서 아이들에게는 언어를 쉽게 받아 들일 수 있는 뭔가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더랬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짧은 문장에서 긴 문장으로 옮겨가는 데 있어서 아이가 받아들이는데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촘스키와 핑커 이론을 반반씩 이해가 되었다는. 

문제는 이 책이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이 가지고 있는 오류, 즉 언어는 어쩌다 우연히 획득한 부산물이라는 관점을 촘스키 자신이 수정하도록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리 촘스키의 거대한 벽을 함부로 하지 허물어 트리지는 못했다. 촘스키의 생성문법론이 미국 언어학의 막강한 지배 이데올로기인데다 영향력이 큰 좌파 정치학자라는 점을 무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 책에서 단지 촘스키가 이제 그의 고집을 꺽고 언어의 진화를 말하자고 한다고 한다. 향후 그의 이론이 그가 스키너의 이론을 허물어뜨린 것처럼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그의 이론을 뛰어넘지 않는 언어학이 나오지 않는 이상 그의 아성을 무너뜨리기는 쉬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굴드의 발생학 진화가 흔들리는 이상, 그의 언어학도 수정을 가할 때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  

개인적으로 이 책 무지 재밌게 읽었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아이들의 말문이 틔였을때의 그 신기함때문에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알파벳 그림책에 관심을 가져 수집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어느 정도 호기심이나 의문을 해결해 준 책이었다. 만약 언어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그림도 그리고 음악 같은 문화를 심오하게 추상적으로 표현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 언어는 극궁적으로 소통이 목적이기도 하지만 무한한 표현 수단이기 때문이다. 언어세계의 생물학적 진화에 혹은 언어에 관심을 갖는 분이라면 강추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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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온난화에 속지 마라>를 리뷰해주세요.
지구온난화에 속지 마라 - 과학과 역사를 통해 파헤친 1,500년 기후 변동주기론
프레드 싱거.데니스 에이버리 지음, 김민정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지배적인 이론에 대해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는 대안 이론은 언제나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수 십년 아니 수백년을 지배한 이론(예로 천동설 같은)이 굴러 오는 새 이론(예로 지동설)의 과학적인 증명을 통해 굴복함으로써 인류 역사는 거듭 비약적인 발전을 해 왔기 때문이다. 지배적인 이론에 대한 의심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어떠한 지배적인 이론에 대한 의심은 문제를 제기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지배 이론을 낳았고, 그러한 사이클은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계속 될 것이다.

이 책은 우리의 시대에 지배적인 환경이데올로기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산화탄소에 의한 지구 온난화는 우리가 지구를 오염시켜서 그런 것이 아니고 지구 역사의 사이클상 그렇다는 것이다.     

지금의 따뜻한 온난화는 적어도 백만 년 전부터 1,500여년(+-500년) 주기를 가지고 나타나는 자연적 기후 변동 현상의 한 부분인 것으로 보인다(p11).

두 저자는  그 예로 1984년 덴마크의 윌리 단스고르와 스위스의 한스 외슈거가 그린란드에서 처음으로 채취한 빙하 코어에서 나온 산소 동위원소를 분석한 발표 - 이 25,000여년 동안의 지구 기후 역사는 뚜렷한 주기를 가지고 기후가 변해왔다는 것이다- 와 역사적 지역적 문헌을 통한 기후 사이클를 예로 들었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1,500여년의 주기에 해당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우리 지구가 더워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온난화 덕에 우리는 질병에 걸린 위험이 줄어들고 환경을 지키기 위해 1500억 달러 이상의 비용이 드는 교토의정서를 파기하면 제 3세계 국가에게 보건, 교육, 수자원, 위생시설을 공급할 수 있고 테크놀로지에 의존하는 우리의 삶은 더욱 더 편리해지고 유기농을 고집하는 대신 화학비료를 쓴 덕에 우리는 더 많은 식량자원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들이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산업화 덕에 우리의 삶은 윤택해졌고 식량 걱정 없으며 테크롤노지적 삶은 편리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편리한 삶을 포기할 만한 용기도 가지도 있지 않을 것이다. 어쩡쩡한 환경보호주의자들에게는 이들의 말은 솔깃한 주장일 수 있다.  

하지만 온난화가 1500여년 주기론의 한 부분일지라고 환경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환경주의자들을 보조금이나 더 타내려고, 온난화를 뻥튀기 했다고 애쓰는 부류들로 분류하는 저자들의 시각엔 심한 반발을 일으킨다. 너무 근시안적이고 환경오염에 대해 낙관적이며 우파적 탐욕이 그래도 여과되지 않고 드러난 주장이다. 

저자들의 이론대로 지금의 온난화가 1500년 주기설이라고 치자. 지구가 탄생한 이후 18세기 전까지 지구의 환경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어떠한 변수도 존재하지 않았다. 올 초에 읽은 18세기에 최초로 미국 땅 원정에 올랐던 루이스와 클락의 <불굴의 용기>라는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이 수 천년동안 변하지 않은 땅을 처음으로 밟고 간다고 한 대목이었다. 그 때 그 문장 읽으면서 든 생각이 아, 우리 인류가 이렇게 세계를 누비고 지형을 바꾸고 한 것이 일세기도 되지 않았구나, 였다. 사실 우리가 지구를 성형하기 시작한 것이 일세기 조금 넘어서이다. 산업화의 시작으로 지구와 인류는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며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오염은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금까지 지구 수십억의 역사상 오염이라는 변수가 나타난 것은 일세기 남짓이다. 산업화가 가져온 오염이 지구의 환경을 변화시키지 않았을 것이라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으며 1500년 주기설을 뒷바침한다 치더라도 지금 지구는 심한 오염이라는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이 책의 어느 부분에서 더운 여름에 에어콘을 켜지 않고 살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라는 뉘앙스의 글은 이 책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드러내주고 있다. 아프리카 여인의 비참한 삶을 이야기하면서 교토의정서를 파기하면 교토의정서를 지키는데 드는 비용 1500억달러를 보조할 수 있다라는 인도주의적 발언에 감흥하기 보다는 그들의 입 발린 립서비스에 짜증이 날 정도였다.  

물론 나는 물리학자도 아니고 기후학자도 아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맞을 지도 모르는 이론에 너무 반발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설사 그들의 1500년 주기설이 맞다하더라도 지구 환경을 지키자는 환경주의자들을 비난할 생각도 없고 좀 불편하더라도 화학연료 덜 떼고 대중교통 이용하고 싶다. 이 책은 미국의 우파가 어떻게 그들의 정책을 정당화하고 인도주의적 운운, 립서비스 해 가며 탐욕스럽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라면 물불 안 가리는 지 알 수 있는 책이다. 제발 이 이론이 해프닝으로 끝나길 바랄 뿐이다. 그들에게 북극 곰에 관한 다큐멘타리 영화나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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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린 톰슨에 대한 최초 관심은 서남희씨가 열린어린이에 연재한 것을 한권의 책으로 묶어 단행본으로 낸  <그림책과 작가이야기>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콜린 톰슨에 대해 짧지만 알찼던 그에 대한 설명과 그림은 그림책 매니아인 나에게 어떤 스파크같은 불꽃이 튀었다. 이 겹겹히 쌓인 그림과 비범한 내용의 그림책을 꼭 구해보리라. 어찌어찌하여 이베이까지 뒤져 그의 그림책을 몇 권 건졌고 , 처음으로 구했던 작품이 바로 위의 <Looking for atlantis>라는 작품이다. 처음 이 작품을 편지함에서 꺼낼 때의 기분을 아직도 잊지 못하겠다. 결제를 다 하고 한 십일을 기다리다 받았는데, 그 십일간 책이 혹 도착하지 않을까 싶어 노심초사 했었다. 구하고 싶은 책을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찾다가 손에 넣었을 때의 그 감격이란.  

 

 

주인공의 할아버지는 세계 구석구석을 누비며 바다에서 모험을 하며 일생을 보냈다.

 

소년이 10살이었을 때 할아버지는 집에 돌아와 임종을 맞이하고 소년에게 아트란티스를 찾아보라며 자신의 체스트(chest)를 유품으로 준다.  

 

소년은 할아버지의 유언에 할아버지의 체스트를 열어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유품을 뒤적인다. 그 안에는 금화, 굴비, 다이아몬드 같은 귀중품이 있었지만 색소폰 아래, 천달러 지폐 밑에 문이 하나 있는 것을 소년은 발견하지 못한다.

 


 

할아버지가 말한 아틀란티스를 찾기 위해 다락방을 뒤지는 소년, 이 장면은 이 그림책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소년이 알 수 없는, 감지 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가 열려있는데. 

 여기저기 찾아보고... 







 

찾다가 못 찾고 실망해 계단아래 앉아 있는 소년의 모습.

 

낙담해 있는데 할아버지의 앵무새가 다치자 소년은 급히 지하실로 내려가 앵무새를 안고 있는다. 점차 더욱 더 어두워지고 소년은 눈을 뜨고, 눈을 감는다.  순간, 소년은 뭔가를 깨닫는다. 

 

집아래 서 있던 그 곳에 태양이 떠 오르며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여기가 바로 아틀란티스군요.   


작품마다 비슷비슷한 다층적인 그림을 보여주는 콜린 톰슨의 이 그림책은 1993년 작이다.  여타 다른 그림책 작가들의 친밀함이나 친근감 같은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컬트적인 분위기의 이 그림책은 현재 아마존에서는 절판으로 올라와 있다. 현재의 그림 스타일은 <플러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스푸키하면서 유머스럽고 익살스러운 친근한 모습으로 많이 변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현재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그가 왜 중년 시절에 그린 진지하면서도 내면적인 그림책을 다시 내지 않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의 그림책이 아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그림책은 아니다. 귀엽고 애교 많은 캐릭터도 익살스럽거나 개그스러운 내용은 없다. 하지만 어찌 세상을 귀엽고 이쁘고 익살스럽게만 볼 수 있을 수 있겠는가.

콜린 톰슨은 집에 집착하는 그림책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한다. 소년이 아틀란티스를 찾는장면마다 보여지는 것은 집안의 모습이다. 특히나 다락방에서 아틀란티스를 찾는 장면은 너무나 매혹적이다. 환상적이면서도 몽롱한. 그가 집을 집중적으로 그리는 이유는 뭘까? 그는 "집에는 끝없는 변화와 가능성이 열려 있고 .... 무엇이든 일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상상할수 있으니깐요(그림책과 작가이야기,p197)"라고 답한다.  

몇년전에 받아 보았을 때는 그저 멋진 그림에 감탄한 정도였는데, 요즘 다시 꺼내 읽으면서 다층적인 그림뿐만 아니라 이야기도 다층적일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딸만 둔 작가에게 소년은 어떤 존재일까?  자신의 어린 시절의 분신일까? 아니면 주변의 사내 아이들이 겪을 수 있는 내면적인 고통을 아틀란티스에 비유한 것일까?  

소년의 아틀란티스가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단지 이 그림책이 소년의 성장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긴 했다. 소년에서 어른으로 나아가는 과정, 정신적으로든 신체적으로 그가 성숙하고 완성된 모습으로 나아갈 수 있는 곳.  내가 누구인지 내가 설 곳이 어디인지 몰라 방황하고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그런 사춘기의 한 과정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어린아이가 볼만한 책에 가깝다기 보다는 청소년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들에게 알맞은 책이 아닐까 싶다. 개인의 정체성 확립은 제대로 된 어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고 지나야 하는 과정이다. 다른 세계로(성인) 편입되어야 하는 통로이기도 하고. 아틀란티스는 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내면화한 비유적 세계가 아닐까 싶다.     

사내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푸념일지 모르겠지만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갈수록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품 안의 자식이라고 아이가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  조금씩 조금씩 변해간다. 우리 성장할 때와 달라서 요즘 아이들은 확실히 빠르다. 부모의 말에 되받아치기는 말할 것도 없고 순간적으로 반항적인 눈빛을 쏘대기도 한다. 아, 처음 애가 반항적인 눈빛을 보여줄 땐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무시하고 넘어가야지 했던 사항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그래, 네가 감히 나를 그런 식으로 쳐다봐. 한바탕 해볼테면 해보자라는 오기까지 발동했다. 아이와 한바탕 큰 싸움으로까지 번지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도 있었다. 우리 아이 나이 또래에 나나 남동생이나 엄마를 그런 식으로 몰아부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엄마를 그 어린 나이에도 연민의 눈으로 보았다. 월급도 제대로 갖다 주지 않은 아빠때문에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며 우리를 키운다는 것을 그 어린 나이에도 알고 있었기에. 반항은 커녕 절대적인 순종으로 그나마 맘 고생이 심한 엄마의 부침을 덜어주고 싶었다. 학교 다니면서 엄마에게 가장 미안했던 순간이 아침에 준비물 사야된다고 돈 달라고 해야할 때였으니 어린 나이에도 세상 물정 어느 정도는 알았던 셈. 하긴 뭐 우리 세대에 이런 일은 비일비재한 일이 아니었는지.  물질적 풍요가  한 아이의 성장에 가능한 인자일지 모르지만 필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도 한 아이의 고통적인 성장이 새로운 세계를 접할 수 있는 준비와  더 넓은 세상을 껴안기 위한 통과의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세상의 모든 사춘기 청소년들이 자신만의 아틀란티스를 꼭 찾기를. 세상 사는 게 뭐 그리 호락호락한 게 있겠니. 세상살이는 다 네 몫어치다.  

덧: 요즘 같아서는 능구렁이 10마리 데리고 사는 게 더 낫다 싶다. 도대체 말도 잘 안하고 입만 뽀루퉁하게 나와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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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질문하고 내 맘대로 답하고.. 

1. 당신은 몇년 차 하루키빠인가?  

한 18년차인 것 같다. 대학 초년 시절에 <상실의 시대>를 읽고 그를 처음 알았는데 지금 내 나이 마흔이니깐 20년이 채 못 되는 거 같다. 그 땐 읽을 게 없어서 어쩔 수 없이 한국문학을 많이 읽었던 때인데, 그의 <상실의 시대>를 읽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일본문학에 대한 호기심과 함께 우리 문학하고는 다른 신선하면서도 독특한 느낌을 받았다.<상실의 시대>가 히트치는 덕분에 그의 초기작들이 우리 나라에 거진 다 발간되었고, 그의 초기작이 나오는 족족 다 사다 읽을 정도로. 최신작은 물론이고.

2. 그는 당신에게 어떤 작가인가? 

최초의 전작작가이다. 그의 <상실의 시대>는 우리 세대의 있어서 폭풍같은 작품이었다. 그의 글쓰기는 쉬운 듯 가벼우면서 진지하였다. 그의 작품 속에는 가벼운과 무거움이라는 추가 균형있게 자리 잡고 있는 듯 하였다. 그래서 그런가. 일단 그의 작품은 어렵지 않다라는 인식이 자리 잡아서 그런지  출간 되면 즉시 구입해 읽었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책장을 보니 책장 한 자리를 하루키의 책이 다 차지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책을 읽고 살아온 날이 꽤 되었지만 어떤 작가들은 처음엔 좋았다가 몇 작품 읽고 나가 떨어졌는데, 하루키만큼 20여년 동안 전작을 구비할 만큼 어필한 작가이고, 20여년 동안 관심을 갖고 있는 진행형의 작가는 하루키가 처음이다.  

3. 하루키의 작품중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사실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한 권을 꼽으라고 한다면 <해변의 카프카>이다. 그리고 단편중에선 <렉싱턴의 유령>에 실렸던 <침묵>이란 작품이다. <침묵>에 등장한 오사와라는 인물이 혹시 하루키의 분신이 아닐까하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짧지만 강렬한 캐릭터 묘사에 놀랐던 작품이다. 더불어 가장 실망한 작품을 꼽으라고 하면 <어둠의 저편>이리라~~  

4. 그의 책에서 풍기는 느낌이나 인상은?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재즈 느낌이 날 때가 있다. 경쾌한 느낌이 날 때도 있지만 한 낮에 내리쬐는 끈적한 나른함이라든가 나른한 오후의 한 줄기 시원한 바람같은. 담배연기 퍼지는 몽롱하면서 즐겁게 웃는 듯한.

5. 하루키가 듣는 음악을 좋아하는가? 

그의 작품 속에 녹아 든 재즈분위기는 좋아하지만 재즈는 그렇게 와 닿지 않는 음악쟝르이다. 그냥 그의 작품 속에서 느낄 수 있는 재즈 분위기가 좋을 뿐이다. 단지 <상실의 시대 또는 노르웨이 숲>에서 틀어 준 존 레논의 <노르웨이 숲>은 존 레논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불러왔다. 80년대 초반에 음악을 들은 사람들에게 존 레논은 오노 요코와의 퍼포먼스가 강한 뮤지션이었지, 음악성이 뛰어난 뮤지션은 아니었다. 그의 <이매진>이라는 곡도 사실은 세월이 흐른 지금에서야 서서히 명곡으로 자리 잡은 곡이다. 그 때 그의 대표작은 <이매진> 한곡이었다.  비틀즈는 폴 메카트니의 밴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카트니의 진취적이면서도 실험적인 음악성, 레코딩 기법등등  존 레논의 자리는 크지 않았는데, 하루키를 통해 처음 비틀즈 시대의 존 레논을 알게 되었다.  

6. 그의 에세이가 좋은가 ,소설이 좋은가? 

물론 그의 소설이다. 그의 글은 에세이든 소설이든 어느 분야에도 빠지지 않는다. 심지어 <의미가 없다면 스윙은 없다>라는 음악에세이에서 그가 락스타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미국소설가 레이몬드 카바와 비교해가면서 쓴 에세이를 보더라도, 그는 남다른 시각과 접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난 브루스에 대한 쓴 글을 몇 편 읽었지만 그런 식으로 멋지게 쓴 작가는 처음이었다. 하루키옹, 나이를 괜시리 먹은 게 아니구려~~~   

소설은 단순히 이야기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곳에 농축된 상상력과 그 상상력을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캐릭터가 제 자리를 잡아 이야기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하루키의 캐릭터만큼 이야기를 멋지게 이끌어가는 인물들도 없다. 캐릭터가 풀어헤친 이야기를 따라 가며 읽는 재미, 그건 에세이만큼 강렬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7. 하루키의 최신작 1Q84에 대한 기대는? 

기대 된다! 기대 된다! 하늘에 솟아오르는 로켓만큼이나~ 

하루키의 이 작품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내가 11살 무렵 바카라의 <아이캔 부기>에 빠져 음악을 듣기 시작해 그 문화적 영역이 책과 영화까지 확대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데, 대중문화든 순수 문화든 간에 지난 30여년 동안 그 문화적 수명을 다 하며 거장이나 거물의 반열에 오른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생각나는 우리 시대의 거장을 들라하면 클린트 이스트우드정도. 이 십년전만 해도 그도 더티하리 시리즈로 유명세를 날렸지만 그냥 스타였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영화를 감독해 평론가들에게 엄청난 지지를 받더니 상업적 헐리우드에서 점차 자신만의 영화를 만들어내며 20여년 사이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오홋, 놀라워라~~ 사실 이스트우드같은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며 멋진 작품을 내는 그런 인물 거의 없다.

동시대를 살면서 내가 젊었을 때 좋아했거나 주목했던 작가, 감독 또는 뮤지션이 거장의 반열에 오르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행복하다. 잠시 반짝하고 스쳐 지나가는 문화적 인물들이 세고 센  대중문화 영역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자신의 재능을 끊임없이 펼치는 작가(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의 인물들도)를 수 십년 동안 바라보며 그의 신작에 흥분하고 셀레고 기대한다는 것은 그가 거장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 아닐까.  

그의 저력이 이번 신작에 아낌없이 펼쳐 졌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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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아빠가 지난 목요일부터 연수라 오늘 일요일 늦은 시간에나 온다. 음하하핫, 유부남들은 서운할지 모르겠지만 완죤 천국같은 나날들을 보내고 있다. 애엄마한테 진정한 휴가란 바로 이런 것. 아이들하고 대강 밥 차려 먹고 대강 공부 봐주고...시간이 제법 남아 돈다. 남아 도는 시간, 책이나 읽을까하다가 좀처럼 활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아 유투브에서 음악 서핑하고 있다는. 나이 딱 마흔이 되니깐 이상하게 10대 시절에 남동생하고 함께 들었던 음악들이 마구마구 떠오른다. 영화도 그렇고. 언젠가 말했지만 난 재즈나 클래식보다 10대 시절에는 남동생하고 락을 들으면서 성장했다. 딱 메탈리카까지 듣고 클래식으로 전환했다는. 락음악은 다시 안 들을 줄 알았는데 요즘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락 음반 들으면서 10대 들은 음악들이 새록새록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역시 다시 들어도 좋구나라는 말밖에.

Layla

 

제프 벡과 지미 페이지가 한 무대에 섰다. 한 40대 정도로 보이는데 젊어서 그런지 역시 힘이 있다...(옛날 라이브라서 라이브 녹음은 젤로 후짐)

   

이 화면보면서 나이 든 연주자들의 모습이 보여 짠했다는. 저 나이에도 아직도 락을 좋아해 음악하고 같이 늙어가는구나.

    

일렉하고는 다른 맛이 나는 언플러그드

에릭옹, 원더풀~~ 원더~~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 하리오.    

나중에 아들애나 보여주려고 유투브 영상보고 이거 질렀다.  노트북 오디오가 후져서 제대로 음이나 감상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만서도. 그냥 돈 더 주고 음반 살 걸하는 후회도 되고. 그래도 음반은 에릭옹의 모습을 볼 수 없잖아! 에릭 옹이 이렇게 멋질줄이야.  나 아무래도 나이 든 남자한테 끌리는 이유가 뭐야. 마돈나를 롤 모델로 삼아야 하는데, 흑, 이영애를 롤 모델로 삼다니. 

 슬슬 이제 청소나 해야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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