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책탑을 쌓으며
눈을 뜨기 힘든 7월의 초, 어느 고운날 아침 북플은 말했다. “4월부터 읽은 책은 0권!”이라고.
많은 분들이 8월 결산페이퍼를 올리고 계신데, 나는 8월 마지막까지 0권은 유지하고 있다.ㅠ
나도 못난 글이나마 페이퍼를 쓰고 싶은데, 읽은게 없으니 쓸 수 있는 이야기도 딱히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읽지 않고 구입만 해 온 20여권의 책이 있다!”
올해, 4월 이후 업무관련 서류와 사무실 규정집 외에는 활자라고는 쳐다도 보지도 않았지만, 7월의 어느날부터 나도 모르게 한권, 두권 사모아서 한층, 한층 책탑을 이루어낸 걸 보면, 뭔가를 읽고 싶고 읽은 것을 이야기하며 나누고 싶은 욕망이 많이 억눌려 있었던 모양이긴 하다.
나에게 이 20여권의 책들이 지독하게 나를 지배하고 있는 고난의 독서정체기를 벗어나게 해 주길 희망하며, 다른 북플님들 독서후기 쓸고 계실때 도서구입기로 책읽기의 마음을 다 잡아보도록 하자.
대체로 후기를 읽거나 상세한 정보없이 마음이 끌려서 사모은 책들이다. 사두고 그냥 박아두는것 같아 꺼내서 만듬새도 보고, 앞뒤표지도 살피면서 몇시간째 궁상중이다.
좀 더 느낌을 가지고자 적절한 수준에서 처음 문장과 마지막 문장을 적어 보았다.
2. 여름휴가가 가고 싶어서.ㅠ.ㅠ (제목만 보고 구입한 책)
새로 옮긴 부서는 여름휴가가 없다. 메뚜기도 한철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여기있는 나는 사시사철 메뚜기 모드이지만 특히나 7~9월은 정말 높이, 멀리, 다방면으로 뛰어다녀야만 하는 올림픽 메뚜기로 변신한다.
그런 메뚜기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날 알라딘은 여름 휴가지에서 읽을 책이라는 리스트로 유혹하는 것도 모자라서 무드 램프까지 준다고 유혹한다. “3만원 이상이면 여름휴가에 분위기 업 램프까지”라고.
이 정도의 유혹에 버티면 이건 더운 날씨에 고생하는 알라딘MD에 대한 모독이다. 이루지도 못할 걸 뻔히 알지만 책읽는 휴가를 상상하면서 화끈하게 구입하구선 에어컨 옆 책장으로 시원하게 모셨다. 그래도 4권 중 2권은 읽기 시작했으니 나의 본격적인 휴가는 이제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나머지 2권은 여전히 책장에서 시원하게 대기중이다.
(1) 칼의 노래(김훈)
ㅇ 이 훌륭한 문장들을 지금과 같은 심정으로 읽으면 김훈 작가님께 정말 미안해 지는데, 정말 죄송해지는데,,,,,,나는 주인공 이순신장군에 내가 존경하고 마음의 빚같은 걸 가지고 있는 누군가를 어느 순간부터 겹쳐서 읽고 있다.
그분이 겹쳐져서 문장이 더더욱 아리고, 상황을 묵묵히 바라보며 견디는 한 인간의 시선, 생각, 마음 때문에 더더욱 진도는 더뎌나간다. 이제는 오랜만에 느끼는 울컥함을 더 진하게 붙잡고 싶은 마음에 느리게 느리게 조금씩 조금씩 읽고 있다. 가끔은 맥주를 곁에 두구선!
- (처음)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 (마지막) 세상의 끝이...이처럼...가볍고....또...고요할 수 있다는 것이..., 칼로 베어지지 않는 적들을......이 세상에 남겨놓고....내가 먼저...., 관음포의 노을이......적들 쪽으로......
(2) 바덴바덴에서의 여름(레오니드 치프킨)
ㅇ 나에게 바덴바덴은 88서울올림픽의 개최를 알려준 도시로 기억되어 있다. ‘여름휴가는 역시 유럽이지!’ 생각하면서 바덴바덴에서 뭔가 퐁당퐁당 사랑이 던져졌다가 튀어져 오르는 느낌이 들 것 같아 구입했다.
조금씩 읽고 있는데, 이러한 나의 기대와는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소설의 전개에 여름휴가는 망했다고 선언할 수 밖에 없을것 같다.
이 책은 작가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여행을 중심으로 삶의 여정을 따라가는 내용인 것 같다.(그래도 스캇님이 여러사진을 붙인 리뷰를 남겨두어서 유럽 시간여행 비슷한 건 한 걸로 간주하자! ㅠ.ㅠ...왠지 퐁당퐁당 사랑느낌은 1도 없을 것 같은..ㅠ.ㅠ)
하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올해가 도끼쌤 탄생 200주년이라고 들어서 도끼샘 책 한권은 꼭 읽자고 마음먹었는데 일타쌍피다. 이번주까지 완독이 목표이다.
- (처음) 나는 한낮의 기차를 타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이었고, 그 겨울의 절정인 12월 말이었으며, 게다가 기차는 북방의 레닌그라드를 향해 들리고 있었다.
- (마지막)창밖으로는 페테르부르크의 겨울밤이 아득하고, 거리 저 아래편으로는 전차가 굉음을 내며 지나갔다. 모쟈의 램프가 흠들리고, 집도 정박한 배처럼 흔들렸다.
→ 처음과 마지막 글에서 왠지 <설국>의 향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스캇님의 후기로는 <설국>을 느끼지 못할 것만 같은 슬픈 예감이 스친다.
(3) 울분(필립로스)
ㅇ 작년에 읽었던 <에브리맨>에서 저항할 수 없는 운명을 담담하게 받아 들이는 작가의 문장들이 너무 좋았다.
나에게 <에브리맨> 잘 우려낸 설렁탕 같은 구수함과 담백함이 교차하여 남아있는 작품으로 기억된다.
그렇지만, 그 짙은 한 그릇의 설렁탕은 펄펄 끓어대는 뜨거운 열의 결과였음을 잊지 않고 있기에 이열치열의 마음으로 그의 작품도 (얇아 보이는 걸로) 구입했다.
제목만으로 구입한 이 책을 받아들고 “울분을 참아내는 내용일까?” 아니면 “울분을 토해내는 내용일까?”하는 상상을 잠시 해보았다. 그러나, 참다참다 폭발해야 울분이지 그냥 폭발하면 짜증일거라는 생각을 하며, 작가가 그리는 울분이 공감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
- (처음) 1950년 6월25일 소렴과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지원으로 무장한 북한의 정예 사단들이 38도 선을 넘어 남한으로 들어가면서 한국전쟁의 고통이 시작되었고, 나는 그로부터 두 달 반 정도 뒤에 뉴어크 시내에 있는 작은 대학 로버트 트리트에 입학했다.
- (마지막) 매우 평범하고 우연적인, 심지어 희극적인 선택이 끔찍하고 불가해한 경로를 거쳐 생각지도 못했던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을
→ 일단, 우리나라 이야기로 시작하는게 시선을 사로 잡는다. 냉전시대에 방황하는 청춘이 토해내는 처절한 울분으로 전개될 것인가?ㅎ
(4)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
ㅇ 이 책은 김영하 북클럽에서 소개되었다고 해서 구입하고 싶었는데 서점에서 표지를 보고 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싶다. 겉표지는 시원한 숲에 오두막 집을 설계해 간다는 느낌인데, 속표지를 보면 정성스레 깍은 나무토막이 나오는게 너무 인상적이었다.
사실은 영화<건축학 개론>의 감성을 느껴보고 싶었다. 수지도 만나보고!ㅎ
- (처음) 여름 별장에서는 선생님이 가장 일찍 일어난다.
- (마지막) 노란 잎에 감싸인 여름 별장의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저녁이 되어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졌어도 오래된 장작이 다 탈 때까지 우리는 말없이 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장작이 타고, 타다 무너지는 것을 싫증도 내지 않고 바라보며 그 소리를 듣고 있다.
→ 어두워지고 장작이 타는 아련했던 대학 엠티감성!ㅎ 여름휴가에 제격일 듯 한데, 나는 이 책을 가을 즈음에 읽지 않을까 싶다.
3. 술먹다가 구입한 책
(5) 우리시대의 영웅(미하일 레르몬토프)
ㅇ 직장동료들과 저녁 술자리를 하다가 이문열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그분의 정치성향에 대한 비판과 작가의 정치성과 작품에 관한 열띤 토론을 빙자한 술주정으로 제법 오랜시간을 낭비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도 이문열 삼국지외에도 몇권을 읽은 것 같은데, 그날 술자리에서는 왠일인지 군대시절 읽었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제목만아련하게 떠올랐다. 내용은 기억에 없지만 막연하게 뭔가 <데미안> 같은 느낌의 소설이라는 느낌만 있었던것 같다.
술자리를 마치고 뚝방길을 비틀거리며 걸어오는데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읽고 싶어져서 오랜만에 알라딘에 접속해서 구매를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이틀뒤 사무실로 배달된 책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작가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우리 시대의 영웅>이라는 소설이었다.ㅠ.ㅠ
문동 세계문학 전집에 있으니 언젠가는 읽게 될 것만 같긴 하지만..ㅠ.ㅠ
- (처음) 나는 티플리스에서 역마차를 타고 오는 길이었다.
- (마지막) 나는 그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얻어낼 수 없었다. 대체로 그는 형이상학적인 토론을 좋아하지 않는다.
→ 티플리스에서 역마차타고 와서 설교나 철학을 전파하는 종교인 내지 지식인의 장렬한 좌절이야기 인가?ㅠ
(6, 7) 죄와 벌 1,2 (도스토예프스키)
ㅇ 러시아 문학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이름이 많기도 하고, 길기도 하며, 더불어 복잡하기도 하고 발음도 어렵다.
그러나, 나에게 “라스콜로니코프” 또는 “로쟈”라고 불리는 <죄와 벌>의 주인공은 이 책을 읽은지 10여년이 지났지만 지워지지 않는 이름이었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뭔가 고개를 당당하고 빳빳하게 쳐들어가는 인물이라면, 이 친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세상을 바라보다 외투속으로 기침을 쿨럭이면서 고개를 숙여가는 이미지로 기억된다.
술자리에서 올해가 도끼샘의 탄생 200주년이라는 소식을 듣고 다른건 몰라도 이 형님 작품은 꼭 한번 읽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자본으로 결심을 굳건하게 하기 위해 민음사판이 책장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동판을 두권 구입했다.
책 표지가 강렬하다!(나는 도스토예프스끼에서 앞뒤를 따서 도끼쌤인줄 알았는데, 책 표지를 보니깐 그냥 도끼쌤이 타당하다!)
도끼로 노파를 살해하는 장면, 살해이후에 주인공이 겪는 심적 고통의 울림과 벌의 무게가 책을 읽지 않아도 완독수준으로 전해진다.
지금 읽고 있는 <바덴바덴에서의 여름>이 생각지도 못하게 도끼형님에 관한 내용이라서 도끼형님 책읽기가 올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라는 세뇌를 지속적으로 그것도 견고하게 있다.
- (처음) 7월 초 몹시 무더운 저녁 무렵, 한 청년이 S골목의 세입자에게 빌려 살고 있는 골방에서 거리로 나와 망설이듯 천천히 K다리로 향했다.
-(마지막) 하지만 여기에서 이미 새로운 이야기가, 한 인간이 점차 새로워지는 이야기가,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가고 지금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새로운 현실을 알아가며 점차 다시 태어나는 그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것은 새로운 이야기의 주제가 될 수 있겠지만, 지금 우리의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을 맺는다.
→ 책구입이 7월말경인 듯 한데, 첫문장 또한 그 시기다. 이정도면 운명이다.<죄와 벌>의 첫문장이 문학사의 손꼽히는 명문이라고 사무실 동료(자칭 한떄 문학소년)가 말해주었다. 내용을 알고 있어서인지 '망설이듯 다리를 건넌다'는 문장에서 게임은 끝났다는 생각이 들긴 하다.
4. 다시 만나고 싶은 나의 반항인이여!
ㅇ (8. 이방인) “뫼르소=카뮈, 카뮈=뫼르소” 뫼르소는 상상할 필요가 없다. 카뮈사진을 보면 그냥 뫼르소이다. 작년에 만났던 최고의 캐릭터 뫼르소!
부조리한 시대를 향한 이 친구의 무덤덤하지만 강력한 저항을 다시 느껴야만 할 것 같아서, 느껴야만 해서 구입했다.
서점에서 을유판 카뮈사진을 보고 머릿속은 이 책을 한권 더 구입하는 것이 부조리임을 알았지만, 가슴은 저항을 일찌감치 포기했다는 걸 직감했다.
- (처음)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일지도 모르겠다.
- (마지막) 모든게 완성되도록, 내가 외로움을 덜 느끼도록 하려면, 내게 남은 일은 나의 사형 집행일에 구경꾼이 많이 와 주기를 바라는 것, 그들이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이해 주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다.
→ 이 책은 말이 필요없지! 작년에는 강렬한 마음으로 읽었다면, 올해는 차가운 머리로 좀 더 몰입해 보고 싶다.
ㅇ (9. 시지프신화, 10. 반항하는 인간) 한때, 문학소년임을 자부했던 나의 사무실 술 친구는 카가의 부조리한 시대에 맞서는 개인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고찰한 작품이 <시지프신화>라면, 이러한 철학의 소설적 구현이 <이방인>이라고 한다.
아울러, 부조리에 맞선 집단에 대한 성찰이 <반항하는 인간>이고, 이에 대한 소설적 표현이 <페스트>라는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를 치맥을 퍼마시며 해 준 기억이 있다.
민음사에서 <반항하는 인간>을 출간하였다기에 서점에 구경갔다가 표지에 낚여서 <시지프신화>도 구입했다. 아마도 <페스트>도 문동판으로 한 권 살 거라고 확신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ㅠ
<시지프 신화>
- (처음) 정말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 (마지막)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만으로도 인간의 마음을 가득 채울수 있다.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 첫 문장에서 끝났다. 역쉬 카뮈형님이시다.
<반항하는 인간>
- (처음) 범죄에는 감정적 범죄와 논리적 범죄가 있다.
- (마지막) 최고조의 긴장이 절정에 이르러 곧은 화살이 더없이 단단하고 더없이 자유롭게 퉁겨져 날아갈 것이다.
→ 나는 뫼르소는 되지 못할 순응인 인 듯하다. 카뮈의 앞뒤 두 문장에 좌절하고 싶다.ㅠ
오랜만에 돌아온 북플에서 많은 분들의 이야기가 그간 알게 모르게 나에게 많은 위로, 격려, 재미, 감동 등을 가져다 주었음을 새삼 느끼면서 북플님들의 훌륭한 페이퍼에 비루한 글을 보태본다.
재미가 없더라도 의지를 굳게 다지는 측면에서 나머지 10권의 구입기도 써 볼 작정이다.
그러면,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두 개의 탑이 쌓아지게 되는 건가?ㅎ 근데 탑 쌓는 재미가, 이 오랜만에 느껴보는 재미가 찰지도록 감동지기도 하다. 묘하게 묘하게...
모두들 편한 밤 되세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