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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이반일리치의 죽음 ㅣ 펭귄클래식 2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은정 옮김, 앤서니 브릭스 서문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1년 12월
평점 :
판매중지
어떤 얼빠진 인간과 냉면을 먹으면서 추천 받았던 필립로스의 <에브리맨>과 톨스토이의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몇일 전에 이틀에 걸쳐서 읽어 내었다.
두 작품 모두 주인공의 장례식장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대체로 삶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진중하게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작품이었다. 다만, 톨스토의 작품이 좀 더 도덕적이고 직접적인 메시지를 던져주는 느낌이라면, 필립로스의 작품은 보다 은은하게, 독자가 알게 모르게 그 의미에 스며들게 해 주었다는 느낌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물론 톨스토이의 작품도 아직까지 뭔가 느낌은 있는데 구체적으로 머리속에 정리되지 못하고 있는 점들이 많은걸 보면 이렇게 구분하는 것도 무의미 할 지 모르겟다.
<이반일리치의 죽음>에서 주인공 이반일리치는 자신의 삶을 선택함에 있어 자기 내부의 기준이나 판단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집단에서 보편적으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어 행동하고, 자신의 욕심을 참아가면서 집단의 가치 아래서 적당하게 구성원들과 어울리며 외부생활(법관 사회)을 하면서 이 집단에서 도태되지 않고 꾸준히 선두권에서 성장해 간다. 중요한건 그는 자신의 삶에 충실했고, 결고 비도덕적인 삶을 살았거나 비난받을 수단으로 집단에서 성공을 이룬 것은 아니였다.
자신의 내부생활인 가정도 이러한 외부적 기준으로 꾸려 나갔다. 그는 자신의 신분유지 내지는 향상을 위해서 적당한 계층의 아가씨와 결혼을 하였으며, 자신의 속한 외부집단의 기준에 맞는 가정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내에게는 식사, 집안돌보기, 잠자리를 요구하였고 외부생활에서 통상 요구하는 기준에 걸맞는 그럴듯한 결혼생활의 모습을 표면적으로만 갖추기를 원했다. 가정생활에서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며 그는 언제든지 외부생활(독립된 일의 세계)로 도피해 버렸다. 톨스토이는 이러한 이반일리치의 생활사를 지극히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극도로 끔찍한 것이기도 했다고 평가한다.(한국적으로 요약하면 스카이캐슬이다!)
여하튼, 이런 이반일리치가 어느날 원인모를 병에 결려 서서히 죽어가면서, 한 단계씩 죽음이라는 목적지로 나아 가면서 삶을 반추하고 여러가지 단상을 느껴가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주요 내용이다.
작가는 표면적으로 삶의 허무와 이타적인 삶의 의미(이러면, 전 세계 문학의 의미중 80~90%는 다 들어 맞을 수 밖에 없다!)에 대해서 되집어 볼 수 있는 시간을 독자에게 마련해 주는 듯 하지만, 발견하지 못하고 감각적으로만 느낄 수 있는 디테일을 많이 심어 두고 있는 듯 하다.
여러가지 숨은 디테일한 의미중 마지막 장면이 정말 기억에 많이 남는다.
주인공 이반 일리치의 임종 장면에서 주인공을 둘러싼 가족 등은 "임종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며 주인공의 임종을 선언한다. 그런데, 작가는 이 부분에서 아래와 같이 기술하여 외부에서 바라보는 임종과 주인공의 임종에 시간적 차이를 둔다. 즉, 외부에서 평가하는 생물학적 죽음의 시간과 주인공이 실제 죽음을 받아 들이는 시간사이에 미묘한 격차이 있고, 이 짧은 순간의 격차를 비집고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그 말을 들었고 그 말을 마음속에서 되뇌었다. '죽음은 끝났어.'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그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하지만 들이마신 숨을 미처 내 밷기도 전에 온 몸을 쭉 뻗더니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p148)
즉, 외부에서 사망판정이 있고도 주인공은 그 사망판정이후에도 죽음이 온 것이 아니라 죽음이 끝났다고 선언한 후 다시 한번 자신의 선언을 머리속으로 확인까지 하고 숨을 마시고 내 뱉으며 사망에 이른다.
이 짦은 순간에 주인공이 선언했던 죽음의 종말이라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하는 것이 여러가지 의문중 하나였다.
그런데, 어제와 오늘에 걸쳐 클레식클라우드 시리즈의 <레이먼드 카버>편을 보다가 이반일리치가 죽으면서 죽음의 종말을 선언했던 의미와 관련한 하나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무덤에는 카버가 마지막으로 쓴 시인 <말엽의 단편>이 음각되어 있다고 하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어째거나, 이번 생에서 원하던 걸
얻긴 했나?
그랬지.
그게 뭐였지?
내가 사랑받은 인간이었다고 스스로를 일컫는 것, 내가
이 지상에서 사랑 받았다고 느끼는 것.
그렇다. 삶을 의미있게 만드는, 허무한(어쩌면 피동적인 의미의) 죽음을 유의미한(어쩌면 적극적인 의미의) 죽음으로 만들 수 있는 한가지 바로 "사랑"이다.
마지막 임종을 앞두고 이반일리치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불쌍한 가족이 마음에 상처받지 않도록 임종의 자리에서 나가달라고 선언으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가족을 고통으로 부터 해방시키고 자기 자신도 해방되고자 한다.
이것은, 이반일리치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깨달았고, 그 원인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알지도 못했고 실천하지는 더더욱 못했다는 점에서 기인하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인식했다는 의미이고 인식을 넘어서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일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사실을 이반일리치가 뼈저리게 인식하지 못하고 단순히 신에게 회개하며 천국으로의 인도만 간절히 기도했더라면, 그는 죽음에 순응하거나 지배당한 평범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 했을 것이고, 그 결과 그의 삶은 단순한 허무의 수준을 넘어선 적극적인 무의미의 수준으로 전락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반일리치는 죽기 직전에 사랑의 의미를 깨달았고 실천했기 때문에 자신의 죽음을 허무하게 받아 들이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죽음에 대해서 사망선고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물론 여기서의 사망을 선고할 수 있었던 죽음은 삶을 허무로 규정해 버리는 죽음이고, 자신은 사랑의 의미를 깨달아서 어쩌면 그리스도와 같은 신성한 죽음을 맞이 하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많이 나아가는지 모르겠지만, 공자도 "아침에 도를 꺠우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말도 어쩌면 삶의 본질을 깨우치고(아침에), 이를 실천(아침과 저녁사이)하면, 저녁에 죽어도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닐까?하는 허황된 생각도 해 보았다.(즉, 공자는 아침에 도를 꺠우치는 순간 바로 죽는것이 아니라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여 아침과 저녁이라는 시간차이를 두었고, 이 시간동안 도를 실천하라는 메시지를 숨겨두었을지 모른다)
결국, 작가는 이반일리치를 통해서 삶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닫고 실천하는 것은 죽음에게 마저도 사망을 선고할 수 있는 진정으로 허무한 죽음을 넘어 설 수 있다는 강한 메시지를 던져주는게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결국의 삶의 허무와 이타심 중요성으로 귀결되고 마는 것 같기도 하다.
제 5도살장에서 작가 커트 보니컷이 말했지 아마도.. "뭐 그러거지!......그런거지 뭐!"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