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일기(5)
-게으른 등산가의 최후
새벽 1시쯤 잠들었고, 옆방 분들이 노고단 해돋이 본다고 새벽에 나가는 소리에 4시쯤 잠시 깼지만 7시에 못 일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빗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오후부터 온다는 비가 새벽부터 오는구나. 어쩌지 나에게 등산 이외의 플랜B는 없는데.. 우산도 우비도 없는데.. 근데 일찍 안 깨도 되니 너무 좋네.. 하면서 다시 잠들어서 9시에 깼다. 근데 밖이 너무 환하네~ 내가 들은 빗소리의 정체는 뭐지? 날은 맑기만 하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내 고집대로 10시 30분 차를 탄 사람이 되어 성삼재로 향했다. 등산짐과 1일 숙박에 필요한 짐-안나 케레니나 포함-을 따로 담았고 혹시나 물품보관소가 없어도 어디 짱박아 둘만한 곳을 찾아서 두고 올라가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사실 성삼재는 엄청 고도가 높다. 1100m가 넘는다. 그래서 노고단 정상까지는 엄청 쉽다고 들었다. 빨리 짧게 가는 길과 편히 돌아가는 길 중 선택도 가능하다. 구비구비 돌아 버스가 성삼재에 섰다. 이마트 편의점이 눈에 거슬렸지만, 안내소로 이동. 물품보관소의 유무를 묻는다. 역시 없다. 아까 빠르게 스캔해둔 짱박아 둘 곳에 짐을 안착시킨다. 역시 사람 사는 곳엔 이런 곳이 있기 마련이다. 움하하!
이러니 저러니 해서 등산 시작 시간이 좀 늦었다. 노고단에서 12시가 넘으면 더이상 반야봉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 넉넉히 한 시간쯤 걸린다고 해서 오르기 시작. 무조건 빠르고 급한 길로 노고단 대피소 도착. 사람들이 다 간식먹으며 하하호호 하기에 나도 잠시 앉아 싸간 사과를 냠냠 먹고 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방송. 12시 넘으면 입산 못한다고. 시계를 보니 11시 49분. 악!! 근데 잠시만, 10분 이내 올라갈 수 있으니까 이란 방송을 하겠지? 순식간 짐을 싸고 전속력으로 등산. 3명 추월. 근데 왜 오르막 안 끝나는 건데? 망했다 싶었다. 노고단 고개에 막 도착했는데 아직 문이 열려 있었고 시간을 보니 11시 59분. 내 뒤로 아무도 없이 문이 닫히고.. 그러니까 나는 오늘 적어도 노고단에서 반야봉을 오르는 사람 중엔 가장 꼴찌인 셈. 아니 왜들 그렇게 새벽에 산에 가는 거야~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가니까 여유 있고 좋잖아 하며 룰루랄라 등산. 그런데! 노고단 고개에서 반야봉 1km앞까지는 진짜 내리막이 더 많음. 딱 두번의 오르막 빼곤 거의 평지. 트레킹 하는 기분으로 재밌게 갈 수 있었다. 지리산 별 거 아니네 하면서 워킹 워킹~ 역시 등산은 처음 30분이 가장 힘들다.
당연히 내 뒤엔 아무도 없고, 간간히 앞에서 오는 등산객을 만났지만 사람도 정말 없었다. 곧 비 올 거 같단 얘기를 노고단 관리하시는 분에게도 들어서 제발 비야 오지 마라 하면서 걸었다. 혼자 가는데 떡하니 만난 지리산반달가슴곰을 피하려면?이라는 안내문. 곰 만나면 대박인데 하면서 은근히 만나길 바람.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과 완전 반대.
드디어, 반야봉과 삼도봉을 택해야하는 노루목에 다달음. 반야봉이 내가 원래 목표했던 봉이지만, 왕복하면 1시간 20분쯤 걸릴 것 같아, 막버스인 17시 30분 버스를 놓칠 거 같았다. 게다가 즐기면서 가려면 여유 시간이 좀 있어야 할 거 같아서 과감히 포기함. ˝다음에 또 올게~˝ 소리내어 말하니 지리산도 나를 좋아하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도 너무 좋아. 등산이 아니라 지리산 둘레길 걷고 있는 느낌!
노고단 정상은 365일 예약제라고 한다. 블로그에서 잘못된 정보를 받고 예약 안하고 간 나는 낭패. 하지만 내려올 때는 이미 끝물이었고 사람도 적었고, 사람들 잘 지켜보고 있다가, 예약 안했는데도 들여보내주는 장면 포착! ˝사장님, 저도 예약 못해서 잠깐만 들어갔다가 올게요!˝하며 노고단 정상까지 갈 수 있았다. 분명 국립공원 직원일텐데, ‘사장님‘이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 이 때쯤엔 구름이 정상을 온통 뒤덮었다. 산행하면서는 구름과 햇빛이 번갈아 가며 나와서 좋았는데, 시간이 늦을 수록 구름이 우세해졌다. 정말 운좋게 노고단 정상까지 갔음에도 시야에 보이는 건 구름 뿐! 섬진강이 보인다는 그 포인트에도 오직 구름만! 그래도 행운으로 얻었고 비 안온건만 해도 어딘가 싶어서 넘 좋았다!
내려올 때는 무릎 보호와 새로운 길로 가보고 싶어 편안한 길로. km가 좀 더 늘어나는 덤까지 있고, 화엄사로 내려가는 길도 알게 되어 좋았다. 사실 어제 화엄사는 답사도 겸해서 간 거였는데, 다녀와서 그냥 성삼재에서 시작이 답이라는 결론을 얻었고, 결과적으로는 딱이었다.
성삼재에서 차 한잔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늦었다. 버스도 벌써 와 있었고, 어차피 보이는게 없어서 패쓰. 내 교통카드가 찍히지 않아 현금 탈탈 털어 마지막엔 기사님이 천원도 깎아주시는 등,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나서 감사했다.
8시 30분 차를 탔다면 반야봉에 오를 수 있었겠지만, 잘 자고 좋은 컨디션으로 등산해 생각보다 힘들지 않게 다녀온 거 같다. 물론 맨 마지막 반야봉 1km가 완전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돌아올 때도 에너지가 남았기에 시간만 주어지면 등반이 가능하리라 본다. 아쉬움이 있어야 또 오지! 담 지리산 코스를 생각하며~ 등산일기 끄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