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간 여행
얀 코스틴 바그너 지음, 유혜자 옮김 / 들녘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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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에 등장하는 라스콜리니코프를 21세기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라는 설명에 끌려 읽게 되었습니다. 고전독서회에서 <죄와 벌>을 읽고 토론하면서 저는 라스콜리니코프의 범행동기는 물론, 범행과정, 범행 후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야간 비행>의 주인공 마크 크라머가 두 건의 살인을 저지르는 동기는 물론 범행과정, 수습하는 과정 등은 죄와 벌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 같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금전적 동기에서 출발하여 노파를 살해한 것으로 보이는데, 수사과정에서 노파를 사회악으로 규정하여 그의 범행에 타당성을 성립시키려는 해석이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마크 크라머는 먼 친척이면서 자신의 책을 출판해주고 자서전 집필 건을 연결해준 후원자라할 수도 있는 야콥 뢰더를 자신이 쓴 소설의 원고가 형편없다고 평가했다는 이유로 때려죽입니다. 독일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뢰더가 소개해준 자서전 집필 의뢰자 카를 프라이킨을 권총으로 쏘아 죽인 이유는 프라이킨의 젊은 아내 사라를 소유하려는 욕망에서 출발합니다. 마크가 사라를 유혹하는 장면도 독일인답지 않아서 어색합니다. 프랑스 남자라면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뢰더가 충동적 살인이었다면 프라이킨의 경우는 치밀한 장치를 마련하여 자살을 위장하였습니다. 게다가 독일에서 남프랑스로 가는 도중에 만난 남자를 살해할 생각을 했다는  사실 등을 고려해보면, 야간 여행의 주인공 마크 크라머는 소위 신념에 의하여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석되는 라스콜리니코프와는 달리 전형적인 사이코패스라고 해야  한 것 같습니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살인에서도 범죄를 은폐하려는 시도나 범인을 추적하는 수사진의 대응이 미숙하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인데, 야간 여행의 살인자 마크 크라머는 완전범죄를 노린다면서 살인 현장의 정리가 미숙하기 짝이 없습니다. 작가가 완전범죄에 대한 자료조사를 충분히 하지 못한데서 오는 미숙함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를 들면 양동이로 내려 쳐서 뢰더를 살해했다면 당연히 현장에 많은 피가 흩뿌려졌을 것이며 범인인 마크의 옷가지나 손 역시 피범벅이 됐을 것인데 어떻게 정리를 했다는 서술이 없습니다. 또한 양동이를 들어 가격을 하는 것으로 절명하지 않은 경우 대응하는 과정에서 가해자의 신체에 손상을 입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남프랑스까지 찾아온 독일경찰은 마크의 진술만 청취하고는 혐의점을 찾지 못하고 독일로 돌아간다는 설정은 독일경찰을 우습게 보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두 번 째 살인의 경우도 마크가 권총을 들어 카를의 관자놀이를 쏜 다음에 권총을 닦아 카를의 손에 쥐어주는 것으로 자살이 성립되었다고 보기가 어렵겠습니다. 과학수사대에서 카를과 마크의 손이나 윗옷의 팔부위에서 화약흔을 검사해보면 총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쉽게 구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카를을 직접 사살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까이서 총알에 맞는 순간 튀는 핏방울이 옷에도 튀었을 것이고 뒤처리에 관한 이야기가 생략되어 있고 찾아온 경찰이 현장을 보존하고 증거를 수집하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은 것은 작가가 프랑스 경찰을 우습게 안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소설이 끝날 때까지 수사가 종료됐다는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추후에 마크의 범행을 인지하고 압박해 들어올 여지는 남았다 싶습니다만, 전체적으로 범행과 수사당국의 수사진행이 미흡해 보인다는 생각입니다.


뢰더가 마크에게 막대한 유산을 남겼다는 사실은 어떤 장치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의미가 분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은 듯합니다. 살인을 저지른 후의 심리변화 역시 라스콜리니코프의 것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간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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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코의 유쾌한 암투병 일기 - 괜찮아, 잘 될 거야!
자오따비 지음, 은송희.정선옥 옮김 / 넥서스BOOKS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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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즈 사강의 마약중독 투병기 <해독일기>에 이어 읽은 책입니다. <왕코의 유쾌한 암투병 일기>는 타이완의 젊은이가 호지킨 림프종으로 진단받고 항암치료가 끝날 때까지의 과정을 담았습니다.


지금까지 읽어본 투병일기는 대부분 의사 등 의료인이 쓴 것들이었습니다. 그렇다보니 아무래도 의학적인 내용들이 중심을 이루는 경향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프랑수아즈 사강이나 타이완의 자오따비와 같이 의료인이 아닌 사람의 투병기에서는 치료과정에서 느끼는 여러 가지 감정의 변화가 중심이 되는 경향입니다.


자오따비군은 25살 난 젊은이입니다. 대학을 마치고 가장 힘들다는 해군 의장대에서 복무를 하던 중에 목에 땅콩만한 결절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위내시경검사를 한 이유는 잘 모르겠네요. 우리나라에서는 위내시경을 할 때 진정제를 맞고 수면내시경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 타이완에서는 진정제 없이 그냥 하는 모양입니다. 자오군은 '강간당하는  기분이었다'고 적었는데 겪어보지 못했을 강간에 비유한 것은 과장이 지나친 듯합니다. 저 역시 아주 오래 전에는 진정제를 맞지 않고 내시경검사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만 견딜 만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식도내시경검사를 받았을 때도 마취주사를 맞았다면 조직검사를 하는지 마는지 알 수도 없었을 텐데 마취에서 깨어날 때 숨을 쉴 수가 없었다는 것도 과장이 지나친 듯합니다. 어쩌면 저자의 이런 호들갑이 독자들에게 먹혀 인기를 끌게 됐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럭저럭  하다가 두 달이 훌쩍 지나갔는데 목에 생기 결절이 갑자기 훌쩍 자라서 골프공 크기가 됐더랍니다. 그때서야 사태가 심각하다고 보아서 암센터를 찾게 되었답니다. 어떻든 그렇게 찾아가 병원에서 당장 입원하라 해서 16일 동안 입원하는 사이에  두 차례 수술을 포함해서 각종 검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같으면 그 반도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작가는 강제로 입원을 당했다고 합니다만, 정신질환도 아닌 일반 질환을 강제로 입원시키는 나라는 없을 듯합니다.


호지킨 림프종이라는 조직검사결과를 듣고 자오군은 '청천벽력'  무언지 알게 됐다고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틀에 한번 씩 아침에 일어나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답니다. 저 역시 건강검진의 결과가 수상하게 나왔을 때부터 일기를 썼습니다.


치료과정을 보면 2주일에 한번 꼴로 항암치료를 받고 후반에 가서는 방사선 치료도 받게 되는데 중간에 한 차례 외박을 나간 것을 제외하고는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도 우리나라와는 사정이 많이 다른 점입니다. 열두 번의 항암치료 과정 가운데 절반인 여섯 차례를 마치는 동안 109일이나 입원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항암치료를 입원이 아니라 낮 병동에서 받고 바로 퇴원 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든 자오군은 입원해서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대학에 다니는 애인과 부모님 등 가족즐의 헌신적인 돌봄을 받게 됩니다. 그런 점에 자오군의 낙천적인 성향이 어우러져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지 싶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오군은 일기를 쓴 것은 가족들이 읽고 치료과정을 알게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고백도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남습니다. “글 속에서는 일부러 더 재미있게, 별일이 아니라는 듯 잔뜩 여유를 부린다. 부디, 이 글을 읽고 가족들이 슬퍼하거나 걱정하지 않길 바라면서...(34)”라고 일기를 쓰게 된 이유를 적었습니다. 가족을 사랑하는 작가의 마음이 기특하기만 합니다.


젊은이의 감각적인 글과 사진 만화 등이 듬뿍 들어있어 쉽게 읽히는 장점이 있습니다만, 대체적으로 암질환은 중년 이상의 나이든 환자가 많은 점을 고려한다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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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독 일기 안온북스 사강 컬렉션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백수린 옮김 / 안온북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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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수술을 받게 되면서 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투병에 관한 심경을 써놓았지만 경과가 안정되면서부터는 초등학생들처럼 일상적인 일들을 적었습니다. 우연히 프랑수와즈 사강의 <해독일기>을 읽으면서 일기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꿔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랑스와즈 사강은 1957년 여름에 교통사고를 당해 석 달 동안 병원에 입원했다고 합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사고의 후유증으로 생긴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875라고 하는 모르핀 대용약제 팔피움을 매일 처방받았다는 것입니다. 통증이 불쾌할 정도라고 적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했을 것입니다만, 뒤에는 견딜만했음에도 약을 요구했을 수도 있습니다. 석 달 뒤에는 약물중독 증세가 심해져서 전문의료시설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습니다. <해독일기>는 이 기간에 썼던 것인데 뒷날 발견하고 출판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통사고로 입원했던 기간에도 일기를 썼을까요?


<해독일기>는 약물중독 치료시설에 입원한 다음날부터 쓰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날짜를 적은 것이 아니라 요일만 적었는데 가끔 건너 뛴 것을 보면 매일 적은 것은 아닌 듯합니다. 입원 이틀째인 일요일부터 시작하여 한 주일이 지난 월요일에 다음 날 퇴원한다고 적은 것을 보면 11일 동안 입원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첫날 하늘은 파랗고, 포플러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지만 시골에 와 있다는 느낌은 크게 들지 않는다라고 적은 것으로 보아 요양시설이 시골에 있었던가 봅니다.


하지만 끔찍한 밤이라고 이어 적은 것을 보면 한밤에 간호사를 찾아 그것(앰플)을 받았다고 적었습니다. 약물을 달라고는 하지 않았지만 오랜 시간 통증에 시달렸다고 하소연 한 것 같고, 간호사는 약을 주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을 테니 더는 이런 식으로 학대받고 싶지 않다. 통증은 나를 작아지게 만든다. 그리고 두렵게 만든다라고 일요일 밤 사건을 정리했습니다. 통증을 호소한 것은 마약을 우회적으로 요구한 것인데 마치 의료진이 주었다는 식으로 변명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입원하던 토요일 밤에 일어난 사건이었고, 월요일에는 약물 없이 13시간을 버텼다고 적었습니다. “흔히 말하듯 심장이 쿵쿵댄다. 속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려는 마음이 시작된다. 유일한 해결책은 정말 고통스러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19)”라고 적은 것을 보면 마약중독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가 읽힙니다.


그리고 오로지 문학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만든다는 생각을 고백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글쓰기도 중독이 될 수 있음을 경계합니다. 그래도 나는 글 쓰는 게 몹시 좋다(27)”라고 이야기합니다. 화요일에도 발작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약을 달라는 몸의 욕구와 이를 제지하려는 이성이 갈등하는 모습을 그려냈습니다. 그런 자신이 끔찍했던 모양입니다.


마약에 중독된 자신을 한탄하면서 술 또한 마약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나의 주정뱅이 형제들, 파리의 밤을 함께 했던 사람 좋고 다정한 무리들이여, 이제는 더 이상 당신들을 이 바에서 저 바로, 이 자동차에서 저 자동차로 따라다니지 못하겠군요, 아니면 술을 조금도 마시지 않고 따라다니거나. 하지만 그건 안 될 듯해요. 그런 건 슬플 것 같거든요.(35)”라면서...


목요일에는 절반의 약물로 욕구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고 결국은 퇴원을 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 하찮은 일기를 쓰는 것 말고 다른 방식으로 내 문학 활동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56)”라고 적은 것을 보면 입원해있는 동안 그녀를 괴롭힌 것은 소설을 쓸 수 없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아니었을까요? 그래도 나는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았다.(65)’라고 적었습니다.


열하루에 걸친 심경을 적은 일기는 책으로 묶어낼 정도의 분량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을 곁들인 그림일기를 만들었는데 다양한 모습의 여성의 알몸을 굵은 선으로 그려낸 그림이 글로 향하는 시선을 빼앗지만 그런 행동이 못내 민망해서 다시 글읽기로 돌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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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
헤르타 뮐러 지음, 김인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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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저지대>의 인연이 이어진 책읽기였습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가 상당히 난해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는 읽는 호흡이 조금 수월하다는 느낌입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는 전작들처럼 차우셰스쿠 정권의 탄압에 시달리는 루마니아의 독일계 소수민족들의 애환을 그려냈습니다. 그 무렵 루마니아 사람들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에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독일계 주민들을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보고 있었던 것인데, 정부에서도 나서나 탄압의 강도를 높여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작중 화자인 빈디시가 방앗간의 야간경비원에게 이야기하는 대목입니다. “저들은 닭이고, 달걀이고 닥치는 대로 빼앗아가고 있어. 심지어는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옥수수까지 빼앗아가는 판이야. 언젠가는 자네 집과 마당까지 빼앗아갈걸.(111)”


독재정권의 횡포에 시달리던 독일계 소수민족은 서구세계로 이주를 원했고, 독일 정부도 이주민 한 명당 많게는 팔천 마르크까지 루마니아 정부에 지불하여 이들의 이주를 지원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루마니아 정부는 지원금을 받아 챙기고도 여권을 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는 독일계 소수민족들이 여권을 발급받기 위하여 무슨 짓을 하는지 서술해냈습니다. 작중 화자인 빈디시는 방앗간을 운영하면서 여권발급을 도와준다는 이장에서 밀가루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구한 밀가루보다 훨씬 많이 날라다 주고 더해서 큰돈까지 건넸지만 여권을 감감 무소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피가공사는 여권을 수월하게 받아냈다고 합니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질척거리니 더 안달이 날 수밖에 없었겠습니다.


그러던 빈디시도 드디어 여권을 손에 넣게 됩니다. 딸 아말리에가 나서서 경찰과 신부에게 몸을 허락하는 대가가 있었습니다. 정부와 연관이 있는 직책을 가진 이들은 모두 주민들을 벗겨먹으려 드는 상황이니 주민들은 하나같이 내일이 없는 삶을 버텨내고 있는 셈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인간은 이 세상의 거대한 꿩이다라는 루마니아의 속담을 제목으로 가져왔다고 합니다. 이 말은 이야기의 앞부분에서 야간경비원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빈디시의 목소리로 두 차례 언급됩니다.


우리나라의 꿩은 날렵하게 잘도 날아갑니다만, 루마니아에서는 날개가 퇴화한 꿩은 적이 나타났을 때 날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쉽게 포식자의 먹이로 전락한다고 인식해왔다고 합니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는 쫓기는 꿩이 낙엽더미에 얼굴만 파묻는다고 해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방식으로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여기저기에서 옛날 우리네 삶과 많이 닮은 구석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찌는 듯한 8월의 무더위 속에 사람들은 커다란 수박을 두레박에 담아 우물 아래로 내려뜨려 시원하게 만들어 먹었다는 것은 제가 어렸을 적에 여름이면 즐겼던 방식이기도 합니다.


모피가공사가 아들을 만나러 가는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기차를 타고 가는데 터널을 여러 개 지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루마니아가 평원인 줄 알았더니 카르파티아 산맥이 나라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어 언덕과 저지대가 번갈아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터널이 많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승객들이 책을 읽는 모양입니다. “끊임없이 낮과 밤이 바뀌더라니까. 배겨내기 힘들더라고. 모두 자리에 앉아서 창밖은 내다보지도 않아. 밝아지면 책을 읽는데, 무릎에서 책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여간 조심하는 게 아니야.(32-33)” 저도 기차나 차를 타고 여행을 할 때는 책을 읽는데 터널에 들어가면 책에서 눈을 떼고 언제쯤 터널이 끝나는지 앞을 바라보곤 합니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늙은 올빼미는 마을 사람들의 죽음을 암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고단한 삶을 버텨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허망하게 죽음을 맞곤 하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낱낱이 까밝히기가 수월치 않은 이야기인데도 감정을 섞지 않은 담담한 필체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을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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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
헤르타 뮐러 지음, 윤시향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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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발칸지역을 여행하면서 23일의 여정으로 루마니아의 몇 곳을 돌아보았습니다. 수도 부쿠레슈티, 드라큐라의 무대가 된 마을 브란, 옛 트란실바니아의 수도였던 시비우, 그리고 작은 비엔나라는 별명이 있는 티미쇼아라 등입니다. 수도 부쿠레슈티에서는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만들어낸 괴물 같은 인민궁전을 보았고,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혁명이 일어난 장소이며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도 보았습니다. 챠우세스쿠 독재를 무너뜨리는 움직임이 시작했다는 티미쇼아라에서는 승리광장, 자유광장, 그리고 통일광장 등을 둘러보았습니다.


루마니아를 여행하면서 루마니아 출신 독일 작가 헤르타 뮐러가 차우셰스쿠 독재 정권 시절의 사회분위기를 소개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귀국하자마자 찾아 읽은 책이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입니다. 작가는 티미쇼아라에서 남동쪽으로 36떨어진 니츠치도르푸(Nițchidorf)에서 독일계 소수민족인 부모로부터 태어났습니다. 주로 차우셰스쿠 정권 시기의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썼다고 합니다. 주로 루마니아의 독일 소수민족의 관점에서 이야기되며, 바나트와 트란실바니아의 독일인 현대사를 다루었다고 합니다.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황폐하고 쇠락한 도시의 변두리에 살면서 희망이라고는 한 줌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여교사 아디나와 어렸을 적부터 그녀의 절친 클라라를 중심으로 이어집니다.


아디나는 학생을 토마토 수확 작업에 동원하는 것은 미성년자 노동 착취라고 말했다는 혐의로 교장에게 불려가 성추행을 당하고 비밀경찰에게도 요주의 인물로 찍힌다. 비밀경찰은 그녀의 집에 깔린 여우 모피에서 꼬리와 다리를 차례로 잘라내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존재를 알립니다.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안전 면도날 하나를 꺼낸다. 그리고 안전 면도날을 싼 포장지를 풀어 무릎 옆에 놓는다. 그는 여우의 오른쪽 뒷발을 자른다. 그는 혀끝으로 검지에 침을 묻혀서 잘린 털을 바닥에서 훔쳐낸다.(199)” 언제라도 그녀의 사생활에 침입할 수 있음을 은밀하면서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지요.


클라라의 애인이 비밀경찰의 간부 파벨이라는 사실을 아디나가 알게 되면서 두 사람은 서먹해진다. 하지만 클라라는 아디나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쪽지에 적어 알려줍니다. “사람들이 체포될 거야 리스트가 있어 넌 숨어야만 해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널 찾지 못할 거야(300)” 차우셰스쿠 정권이 권력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시도로 집단 체포를 계획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클라라의 통지를 받은 아디나는 남자친구 파울과 함께 국경마을에 사는 친구 리비우에게로 서둘러 피신했습니다. 하지만 리비우의 집에서 지내는 것도 불안한 나날의 연속입니다. 도나우 강을 건너 다른 나라로 도망을 쳐야 할까 생각하는 사이에 차우셰스쿠가 실각하는 장면을 TV에서 보게 됩니다. 그 장면을 본 리비우는 화면에 입맞춤을 하면서 널 먹어버리겠어라고 말합니다. 파울은 리비우와 함께 화주를 마시면서 금지된 노래를 부릅니다. “깨어나라 루마니아여 네 영원한 잠에서(334)”


<그때 이미 여우는 사냥꾼이었다>라는 제목은 희생자와 가해자를 구분할 수 없다라는 뜻을 담은 루마니아의 속담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합니다. 차우셰스쿠 정권이 붕괴되었더라도 독재자의 추종 세력과 그 체제에 익숙해진 탓에 정치나 사회적 분위기가 근본적으로 변화할 것이라고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을 암시한다는 것입니다.


등장인물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을 아주 세밀하게 묘사하다보니 이야기의 중심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가늠하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작가가 이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어간 것은 독재정권의 감시와 통제를 비껴가기 위한 방식일 것으로 추측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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