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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
울리히 알렉산더 보슈비츠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1년 3월
평점 :
발칸9개국 여행을 앞두고 구입한 책입니다. '여행에 지친 여행자는 이 미친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더는 알지 못한다'라고 뒷면에 적힌 글이 눈길을 사로 잡았습니다. 인천공항에서 부다페스트행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면서 읽기 시작해서, 탑승 직후 그리고 착륙하기 전까지 읽어냈습니다.
1915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난 저자는 1935년 나치당이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는 법을 제정하자 가족과 함께 국경을 넘어 스웨덴으로 이주했다가 노르웨이를 거쳐 프랑스로, 벨기에를 거쳐 영국으로 전전하는 가운데 소설을 써갔다고 합니다. 1938년 11월 9일밤 독일 전역에서 유대인을 박해하는 '수정의 밤' 사건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듣자 4주 만에 <여행자>를 써냈다고 합니다.
수정의 밤 사이에 독일의 유대 사회가 입은 피해는 공식적으로는 91명이 사망하고 7500개 사업체와 267개의유대인교회와 마을회관이 파괴됐다고하는데 사학자들은 13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1400개소의 유대인교회와 마을회관이 파괴됐다고 합니다.
<여행자>에서는 나치당이 본격적으로 유대인 탄압에 나서던 혼란스럽던 독일사회의 상황을 당대에 기록한 최초의 소설이란 역사성 뿐 아니라 문학성까지 인정받고 있다고 합니다.
이 소설은 1939년 영국에서, 1940년 미국에서 출간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적국인으로 분류되어 호주의 뉴사우스웨일즈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고 합니다. 이 기간동안 소설의 완성도를 높이는 작업을 이어갔는데 1942년 영국으로 귀환하던 그는 독일 잠수함이 쏜 어뢰를 맞고 침몰하면서 27살어 나이에 죽음을 맞고 개정된 원고와 함께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여행자의 독일어로 쓴 초고가 1938년 발견되었지만 출간이 미루어지다가 80년만에 빛을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소설의 주인공 오토 질버만은 독일인 아내와의 사이에 아들 에두아르트를 파리로 유학을 보낸 상황에서 본격적인 유대인 탄압을 맞게됩니다. 일찍 독일을 탈출하지 못한 것은 전쟁터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한 나치당원 베커와 동업하는 고철사업을 비롯해서 집 등, 상당한 재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치 돌격대원들의 유대인 습격이 본격화 되면서 20만 마르크 상당의 집을 헐값에 가져가려는 핀들러의 검은 속셈에 비하면 8만마르크의 거래대금을 수금한 베커가 4만1500마르크를 건네준 것은 그나마 양심적인 것이었습니다.
핀들러와 집을 넘기는 거래를 하는 와중에 돌격대의 습격을 받은 질버만은 극적으로 탈출하지만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위험한 집 말고 호텔에도 들어가보았지만 위험하기는 매한가지, 결국베를린에서 열차를 타고서 함부르크로, 다시 베를린으로, 도르트문트, 아헨, 다시 도르트문트 그리고 베를린으로 떠돌면서 나치돌격대를 피할 궁리를 합니다. 사실은 국외탈출의 기회를 엿보는 것인데, 열차에서 만난 사람으로 부터 사들인 정보에 따라 도르트문트에 산다는 중개업자를 만나러 갔지만 이미 체포된 뒤라서 허탕을 치고 말았습니다. 역시 열차에서 만난 여인의 남자친구의 도움으로 벨기에 국경을 넘었지만 벨기에 경찰에 들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들고 다니던 4만2천 마르크를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그것이 질버만의 발버둥이 끝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인을 바라보는 독일 사람들의 인식은 다양했던 것 같습니다. 핀들러만해도 "나는 유대인을 좋아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아요.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이 뭔가 부당한 일을 겪는다면 유감이긴 하지만 놀라지는 않습니다. 세상사가 다 그래요. 한쪽이 파산하면 다른 쪽은 성공하는 버비입니다.(30쪽)"이라고 말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경에 빠진 유대인을 도와주는독일인도 분명 있었습니다.
즉흥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실패하는 것을 보면 질버만은 치밀하지도 결단력도 부족한 듯합니다. 결국 그의 여행은 '평온을 벗어나려고, 평온을 찾아가는 것(260쪽)'이었던 셈입니다.
발칸 역시 나치독일의 도발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발칸에 살던 유대인들 역시 지난한 고통을 받았던 만큼 역사의 현장을 찾는 여행길에 의미 있는 책읽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