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
로베르트 제탈러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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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벤 슈틸리히가 <존재의 박물관>에서 소개하여 읽게 된 책입니다. <들판>을 읽었더니 장소, 사람 또는 세상을 떠날 때 우리가 남기는 것은이라는 부제가 달린 <존재의 박물관>에서 <들판>을 인용한 이유가 분명해졌습니다.


<들판>의 목차를 보면 모두 30꼭지의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 그들 목소리를 제외하고 나머지 29꼭지의 글 제목은 모두 남자와 여자의 이름입니다. ‘작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일까하는 의문 속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들 목소리남자는 앞쪽 풀밭에 흩뿌린 듯 박혀 있는 비석들을 내려다보았다.”로 시작합니다. 화자가 와 있는 장소는 조그마한 마을 파울슈타트의 공동묘지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냥 들판이라고 불렀던 곳인데, 페르디난트 요나스라는 목장주의 휴경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들판이라고 불렀던 것인지, 시에서 그 휴경지를 사들여 공동묘지로 만든 뒤에 생긴 이름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특이하게도 화자는 들판이라고 불리는 공동묘지를 매일 찾아 자작나무 아래 앉아 죽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합니다. 공동묘지에 묻혀있는 많은 이들은 화자가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거나 살면서 적어도 한번은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화자는 그들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쓰며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완성한 그림이 바로 <들판>이 된 셈입니다. “남자는 죽은 이들의 말소리가 들린다고 굳게 믿었다라고 고백한 것을 보면 제정신이 아닌 화자가 만들어낸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들 목소리에 이어지는 29명의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어가다 보면 장삼이사의 삶에서 툭 튀어나오는 단편적인 이야기에 저 스스로 공감하게 됨을 느끼게 됩니다. 예를 들면 암은 악마같이 끔찍한 병입니다. 수년간 몸 안에 암을 품고 다니면서도 아무 것도 모르다가 갑자기 발병하거든요.(110)”라는 대목인데, 아마도 제가 암을 진단받아 수술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늙어서 하찮아지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자신의 하찮음을 인정하는 것(178)”이라는 대목도 제가 늙었기 때문에 공감하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할아버지를 찾아 체스를 두는 소냐 마이어스는 액자에 끼워진 할머니의 사진 뒤에 적힌 글을 읽게 됩니다. “III/3/21 / 나는 병을 얻고 / 내 비극에서 / 주인공 역할을 하다가 / 죽었다. / 비극의 제목은 이렇다. /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할머니의 삶이 짧지 않았을 터인데 그 긴 삶을 왜 비극이라고 했을까요?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낸 세월이 그저 헛되기만 했을까요? “나는 인생이 살아볼 만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게르트 잉걸란트의 생각을 적은 화자라면 소냐 마이어스의 이야기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라서 그 이유를 밝혔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주 신박한 대목도 있습니다. 시력이 나빠졌지만 안경 쓰기를 거부했다는 화자의 이야기입니다. “누가 안경 이야기를 꺼내면, 어차피 이렇게 살아온 데가 이젠 주변 사물이 갈수록 흐릿해지는 게 마음이 편하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학생 때부터 안경을 써온 저로서는 세상이 흐릿해 보이는 것이 그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어 노안이 올 때까지도 기를 쓰고 나빠지는 시력을 보정하려 안경 돗수를 올려왔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고도근시가 되고 말았기 때문에 이제는 안경을 벗어던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직 삶을 같이 할 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작은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은 대목도 있습니다. “네게 맞는 여자를 찾으려고 애쓰지 마라. 그런 여자는 없어. 너한테 맞는 여자를 찾았다고 믿는 순간, 그 여자는 너와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게 드러날 거야. 어쨌든 맞지 않더라도 그 여자와 좋은 점을 많이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거다. 실제로도 그렇고.(55)” 어찌 보면 저의 이야기인 것 같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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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 J. M. 쿳시 자전소설 3부작
J. M.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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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를 여행한 것도 벌써 5년이 되었습니다. 1994년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아파르트헤이트정책의 폐지를 선언하고서도 사반세기가 지나 고민할 것도 없이 여행을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1917년에 처음 등장한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1948년 아프리카너가 주도하던 극우 국민당 정권에 의하여 법률로 공식화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정책으로 자리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여행을 하면서 그리고 여행을 다녀와서 얻은 바에 따르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폐지된 다음에 오히려 아프리카너들이 역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범죄가 증가하면서 사회적 불안이 고조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997년에 발표된 <소년 시절><청년 시절(2002)> <서머타임(2009)>과 함께 노벨문학상을 받은 J.M. 쿳시의 자전적 소설 3부작의 첫 작품입니다. 작가가 1940년에 태어났기 때문에 그의 소년시절은 아파르트헤이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 시기의 아프리카너 소년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회를 어떻게 보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소년 시절>은 아버지가 케이프에서 우스터로 직장을 옮김에 따라 가족들이 우스터로 이사를 한 1949년부터 아버지가 케이프타운에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플럼스테드로 이사를 한 1952년 무렵까지의 시기에 겪은 일들을 담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까 작가는 9살 때부터 12살 때까지의 일을 회상하여 기록한 셈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초등학교 3학년에서 6학년까지의 시기입니다. 생각해보니 이 시기에 저에게 일어났던 일들 가운데 기록으로 옮길만한 기억이 얼마나 남아있는지 의문입니다.


<소년 시절>은 자서전이나 회고록이 아니라 소설과 자서전의 중간쯤에 있는 자전적 소설로 보아야 한다고 옮긴이는 말합니다. 자서전이라면 일인칭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나 저자는 화자를 일인칭이 아니라 삼인칭으로, 시제를 과거가 아니라 현재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경험을 객관화하여 과거를 현재화하면서 단순한 복원대상이 아니라 현재에서 바라보는 과거이며 현재와 연결된 과거임을 보여주려는 시도라는 것입니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기억 깊은 곳에 숨어있던 과거의 경험을 복원하는 작업이었던 것과는 다른 시도라는 생각입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주인공 마르셀이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했던 것과는 달리 <소년 시절>의 주인공 존은 과거의 자신을 포함하여 부모 등 주변인물 모두의 왜곡된 모습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자신의 과거를 아름답게 채색하려는 것이 아니라 식민주의와 인종차별로 얼룩진 남아프리카 역사와 연계하여 윤리적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남아프리카의 아프리카너 사회는 모계사회였나 보다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실 그에게는 아버지가 무슨 자격으로 거기에 있어야 하지도 분명하지 않다. () 그의 집에서, 그리고 두 이모의 집에서, 핵심은 어머니와 아이들이고 남편은 부속물에 불과하다. 돈을 내는 하숙인처럼 살림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라고나 할까.(22)”


작가의 아버지는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네덜란드계 백인, 즉 아프리카너의 후손이었고, 어머니는 지금의 폴란드에 귀속된 동독 지역에서 남아프리카로 이주한 백인의 후손이라고 합니다. 그의 가족 혹은 친지들은 비백인인 토착민들에 가혹하게 대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시중을 자연스럽게 받는 것을 보면 백인과 유색인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옮긴이는 작가는 <소년 시절>에서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애정을 유감없이 드러냈다고 했지만, 사실 어머니의 진심을 알게 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여인은 그를 사랑하고 보호하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는 목적만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ㄷ고 그는 믿고 싶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253)”


작가가 소년시절에 가졌던 생각들이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떻게 변했는지 후속작인 <청년 시절>을 읽어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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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과거를 지워드립니다
비프케 로렌츠 지음, 서유리 옮김 / 레드박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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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사람들은 누구나 살면서 저지른(?) 끔찍한 일을 두어 가지씩은 가지고 있을 듯합니다. 물론 저 역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헤아릴 수조차 없기도 합니다.


<당신의 기억을 지워드립니다>는 어렸을 적 저질렀던 철없는 짓 때문에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하는 여성이 우연한 기회에 과거를 지우고 시작한 새로운 삶이 사실은 겉보기에만 그럴 듯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지워낸 기억을 복원한다는 이야기입니다.


10학년 때 동급생들의 우상이던 남학생 모리츠 리히텐베르크와 관계를 가지는 장면이 공개되면서 우리의 사랑스러운 여주인공 샤를로타 마이바하는 친구들로부터 우스운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때의 충격은 그녀의 삶을 삐딱하게 이끌게 되었던 모양입니다. 다니던 대학도 때려치우고 대학가의 선술집 드링크스&모어에서 일용직으로 근근이 살아가면서도 순간적인 쾌락을 추구하면서 자유롭게 살아갑니다. 자문회사에서 잘나가던 팀이 어느 날 회사를 때려치우고 차린 가게인데, 팀과 샤를로타는 서로의 삶을 이해하고 선선히 도와주는 사이입니다.


샤를로타의 고교 동창회가 열린다는 기별이 온 뒤에 모리츠가 갑자기 나타난 것이 사단이었습니다. 어렸을 때의 끔찍한 사건 뒤로 접촉이 없던 모리츠가 나타나 관심을 표한 것부터 이상했던 것인데 동창회에서 보자는 말에 이끌린 샤를로타는 동창회에 갔다가 그 옛날의 사건보다 더 끔찍한 사건을 겪게 된 것입니다. 그런 샤를로타를 데리러 온 것도 팀이었습니다.


갈까말까 하다가 동창회에 참석하기로 한 샤를로타를 데려다 주는 길에 팀이 한 말을 새겨둘만 합니다. “내 생각에 행복은 늘 오늘에 달린 거 같아. 어제나 내일이 아니라 오직 오늘이 가장 중요해.(66)” 이 말은 샤를로타의 바뀐 인생에 모르는 사람으로 등장하는 팀에게 뭔가 꺼림칙한 느낌을 남겨 샤를로타와의 만남으로 이어지는 꼬투리가 됩니다.


동창회에서의 끔찍한 사건이 있은 뒤에 우연히 주머니에서 뉴라이프 퍼스널 매니지먼트 사의 명함을 발견한 샤를로타가 인생을 바꿔볼 요량으로 찾아갔다가 시원한 답을 듣지 못하고 나오다가 엘리자라고 하는 여성으로부터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지워버림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사실 이 부분은 많이 허황한 점이 많습니다. 샤를로타의 기억을 지우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관련된 사람들 모두가 샤를로타의 과거를 잊어버린다는 것인데 과연 가능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엄청난 일이 이루어지는데 샤를로타의 부담은 전혀 없다는 것도 이상합니다. 읽어가면서 예상하기로는 이 부분은 꿈이었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뒤에 기억을 복원하는 작업을 엘리자 없이 샤를로타와 몇몇 친구들이 기계를 작동하게 된다는 설정도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샤를로타가 끔찍한 기억을 지우고 마주한 새로운 인생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바로 모리츠와이 결혼식을 불과 몇 시간 앞둔 시점이었던 것입니다. 샤를로타 본인은 지운 기억을 모두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기억을 지운 뒤에 일어난 일을 전혀 모른다는 설정도 황당한 이야기를 이끌어가기 위한 장치라고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는 모리츠가 멋있어 보였지만, 막상 결혼을 해보니 맞지 않는 점이 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고용주와 피고용주의 입장에서 티격태격했던 팀이 바뀐 삶에서는 모리츠의 상사가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일이 그리되고 보니 무심한 듯했던 팀이 얼마나 자상했었는지 새삼 깨닫게 되고 바뀐 인생을 되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지워버리고 싶은 끔찍한 사건으로 인하여 인생이 달라진 바가 있다면, 그 또한 소중한 삶의 한 부분으로 기억해야 하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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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네 여행기 을유세계문학전집 129
하인리히 하이네 지음, 황승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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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여행에 관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여행기를 읽고 있습니다. <하이네 여행기>를 읽은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낭만주의의 마지막 시인이자 현대 독일 시의 선구자 하인리히 하이네의 대표작이라는 설명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이네 여행기>에는 하이네가 1825년과 26년 여름, 북해의 동프리지아 군도에 속하는 노드러나이섬에 있는 휴양지에 머물렀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연작시 북해1북해2그리고 산문 북해3그리고 르그랑의 책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념들을 담았습니다. 북해1~3부가 여행기라면 이념들은 잡다한 생각이나 상념은 물론 역사적, 정치적, 철학적 이념들을 글로 옮긴 것입니다. 참고로 르그랑은 프랑스 혁명 사상을 북소리를 통해 매개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폭풍을 주제로 한 시와 산문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면 북해의 여름철은 날씨가 불순한 모양입니다. 또한 북해2에서 특히 고대 신화를 많이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유럽에서는 신화가 각계각층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 신들이라는 제목의 시에서는 그리스의 신들을 비판하는 내색을 숨기지 않은 것이 놀랍습니다. 그 이유는 왜냐면 그대들 옛 실들은 언제나 일찍이 인간들이 투쟁할 때 / 언제나 승자의 편만 들었기 때문이지. / 하지만 인간은 그대들보다 더 관대하니 / 신들의 투쟁에서 나는 이제 / 패해한 신들 편을 드는 것이다.(74-75)”


저는 지난달에 지중해에 있는 시칠리아와 몰타를 여행했습니다. 북해와 지중해의 날씨는 분명 차이가 있을 터이나, 비오고 바람 부는 날씨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에 머물 때 폭풍이 불었는데, 하이네의 시 폭풍에서 우르릉, 휘익, 후드득, 윙윙, / 마치 소리의 정신병원 같구나!”라는 대목이 딱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선언이라는 시에서 우악스러운 손으로 노르웨이의 숲에서 / 가장 높은 전나무를 뽑아 / 애트나 화산의 이글거리는 목구멍에 담갔다가 / 불구덩이에 적신 거대한 붓으로 / 캄캄한 하늘에 이렇게 쓴다: / ‘아그네스, 널 사랑해!’”라는 대목에 나오는 그 에트나 화산은 시칠리아 동해안에 있어 제가 머물던 숙소에서 빤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몰타에 갔을 때는 해넘이를 보기 위하여 바닷가에 나간 적도 있습니다. ‘황혼이라는 시에서 태양은 고개를 한껏 떨구고 / 바다 위에 벌겋게 이글거리는 줄무늬를 드리우며 / 가로로 늘어선 하얀 파도가 / 거품을 물고 철썩이며 / 조류에 밀려왔네, 점점 더 가까이 -”라고 노래한 대목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북해3부의 산문은 바다가 대상인 1부나 2부와는 아주 다른 내용입니다. 시작은 섬주민 혹은 섬을 방문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다가 섬과 무관한 것으로 상념이 비상합니다. 고금은 물론 양의 동서를 넘나들면서 비판의 날을 세웁니다.


마담이라는 특정하지 않은 여성에게 자신의 상념을 전하는 방식으로 쓴 이념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산문이었습니다. 모두 20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는 이 글들은 주제에 따라서 사랑(1~5, 16~20)-자유(6~10)-진리(11~15)로 구분하거나, 사랑(1~5)-소년시절과 프랑스 혁명(6~10), 검열과 당대 작가문제(11~16)-사랑(16~20) 등으로 주제에 따라서 나누거나, 주관적 체험을 다룬 사적 영역(1~5, 16~20)과 역사적, 정치적 문제와 문학적, 미학적 문제를 다룬 공적인 영역(6~15)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눈물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19장에 마음이 끌렸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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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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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은 인간이라면 한번쯤은 품었을 희망사항이지 싶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 할지라도 삶의 질까지 담보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주제 사마라구의 <죽음의 중지>는 이런 고민을 해보는 책읽기였습니다.


책을 열면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11)”라는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다음 날이란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대체로 이런 사건은 당일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나라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만, 정부에 죽음을 알리면 당국에서는 매일 집계하여 통계처리를 할 것입니다. 당연히 매일 일정한 숫자만큼의 사망신고가 되기 마련인데 하루 종일 사망신고가 없었다면 하루 일과를 마치는 저녁 무렵에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터이고, 특히 새해 첫날을 법정 공휴일로 지정한 나라의 경우는 이튿날이 지나야 뭔가 이상하다는 감이 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찌되었거나, <죽음의 중지>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나라의 관료들은 일단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장의업계가 먼저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하게 되었고, 이어서 병원계에서도 중증의 환자가 죽음을 맞지 않고 병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환자에게 배정할 수 있는 병상이 모자라는 사태를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죽은 뒤에 부활을 이야기해온 종교계에서도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처음에는 환호하던 사람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였습니다. 결국 죽음을 목전에 두었으면서도 죽지 못하는 사람들을 여전히 죽음이 일상적인 이웃나라로 모셔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 소문은 금세 사람들 사이에 확산되면서 중증 환자들을 국경으로 모셔가는 일을 정부가 나서서 막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점은 영생을 얻더라도 삶의 질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죽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특수한 상황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등장하고 정부는 여전히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허둥대기만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리고 이런 상황은 언제까지 지속될까요? 죽는 사람이 사라진지 7개월이 지나면서 죽음이 목전이나 명만 유지하는 사람이 62,580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시점에 죽음이 방송사 사장에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죽을 사람들이 다시 죽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동안 죽음이 태업을 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를 그렇게 혐오하던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산다는 것, 영원히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맛을 좀 보게 해주려는 것(133-4)”이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할 일을 다시 시작하자 이번에도 대혼란이 일어납니다. 죽음을 미루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죽음을 맞으면서 이들의 장례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래저래 세상은 모든 일이 원만하게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이야기의 뒷부분에서는 죽음과 첼리스트와의 관계를 집요하게 뒤쫓고 있어 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첼리스트는 이틀 전에 죽음을 맞았어야 하는데 무슨 일일지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방영된 연속극 <쓸쓸하고 찬란하-도깨비>에서도 저승에서 죽음이 예정된 자의 명부가 도착하면 저승사자들이 현장에 출동하여 죽은 자의 영혼을 인도하는 것인데, 간혹 이런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중지>에서도 죽음을 관장하는 여성이 명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죽어야 할 첼리스트가 명을 이어가게 된 셈입니다. 심지어는 그 첼리스트의 삶에 깊숙하게 간여하게 되는데, 결국 첼리스트는 죽음을 맞지 않게 됩니다. 예외 없는 원칙이 없다는 원칙이 지켜진 셈인가요?


흥미로운 것은 2009년에 번역 소개된 <죽음의 중지>에서는 사람들이 죽음을 개딸이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그것은 개자식에 빗댄 표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등장한 개딸들과 차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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