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네 여행기 을유세계문학전집 129
하인리히 하이네 지음, 황승환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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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여행에 관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여행기를 읽고 있습니다. <하이네 여행기>를 읽은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낭만주의의 마지막 시인이자 현대 독일 시의 선구자 하인리히 하이네의 대표작이라는 설명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하이네 여행기>에는 하이네가 1825년과 26년 여름, 북해의 동프리지아 군도에 속하는 노드러나이섬에 있는 휴양지에 머물렀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연작시 북해1북해2그리고 산문 북해3그리고 르그랑의 책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념들을 담았습니다. 북해1~3부가 여행기라면 이념들은 잡다한 생각이나 상념은 물론 역사적, 정치적, 철학적 이념들을 글로 옮긴 것입니다. 참고로 르그랑은 프랑스 혁명 사상을 북소리를 통해 매개했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폭풍을 주제로 한 시와 산문이 적지 않은 것으로 보면 북해의 여름철은 날씨가 불순한 모양입니다. 또한 북해2에서 특히 고대 신화를 많이 인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유럽에서는 신화가 각계각층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스 신들이라는 제목의 시에서는 그리스의 신들을 비판하는 내색을 숨기지 않은 것이 놀랍습니다. 그 이유는 왜냐면 그대들 옛 실들은 언제나 일찍이 인간들이 투쟁할 때 / 언제나 승자의 편만 들었기 때문이지. / 하지만 인간은 그대들보다 더 관대하니 / 신들의 투쟁에서 나는 이제 / 패해한 신들 편을 드는 것이다.(74-75)”


저는 지난달에 지중해에 있는 시칠리아와 몰타를 여행했습니다. 북해와 지중해의 날씨는 분명 차이가 있을 터이나, 비오고 바람 부는 날씨는 별 차이가 없어 보였습니다.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에 머물 때 폭풍이 불었는데, 하이네의 시 폭풍에서 우르릉, 휘익, 후드득, 윙윙, / 마치 소리의 정신병원 같구나!”라는 대목이 딱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선언이라는 시에서 우악스러운 손으로 노르웨이의 숲에서 / 가장 높은 전나무를 뽑아 / 애트나 화산의 이글거리는 목구멍에 담갔다가 / 불구덩이에 적신 거대한 붓으로 / 캄캄한 하늘에 이렇게 쓴다: / ‘아그네스, 널 사랑해!’”라는 대목에 나오는 그 에트나 화산은 시칠리아 동해안에 있어 제가 머물던 숙소에서 빤히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몰타에 갔을 때는 해넘이를 보기 위하여 바닷가에 나간 적도 있습니다. ‘황혼이라는 시에서 태양은 고개를 한껏 떨구고 / 바다 위에 벌겋게 이글거리는 줄무늬를 드리우며 / 가로로 늘어선 하얀 파도가 / 거품을 물고 철썩이며 / 조류에 밀려왔네, 점점 더 가까이 -”라고 노래한 대목을 직접 눈으로 보았습니다.


북해3부의 산문은 바다가 대상인 1부나 2부와는 아주 다른 내용입니다. 시작은 섬주민 혹은 섬을 방문한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다가 섬과 무관한 것으로 상념이 비상합니다. 고금은 물론 양의 동서를 넘나들면서 비판의 날을 세웁니다.


마담이라는 특정하지 않은 여성에게 자신의 상념을 전하는 방식으로 쓴 이념들은 이해하기가 어려운 산문이었습니다. 모두 20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는 이 글들은 주제에 따라서 사랑(1~5, 16~20)-자유(6~10)-진리(11~15)로 구분하거나, 사랑(1~5)-소년시절과 프랑스 혁명(6~10), 검열과 당대 작가문제(11~16)-사랑(16~20) 등으로 주제에 따라서 나누거나, 주관적 체험을 다룬 사적 영역(1~5, 16~20)과 역사적, 정치적 문제와 문학적, 미학적 문제를 다룬 공적인 영역(6~15)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눈물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19장에 마음이 끌렸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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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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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은 인간이라면 한번쯤은 품었을 희망사항이지 싶습니다. 하지만 죽지 않는다 할지라도 삶의 질까지 담보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주제 사마라구의 <죽음의 중지>는 이런 고민을 해보는 책읽기였습니다.


책을 열면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11)”라는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 다음 날이란 새해가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대체로 이런 사건은 당일 확인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나라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만, 정부에 죽음을 알리면 당국에서는 매일 집계하여 통계처리를 할 것입니다. 당연히 매일 일정한 숫자만큼의 사망신고가 되기 마련인데 하루 종일 사망신고가 없었다면 하루 일과를 마치는 저녁 무렵에서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터이고, 특히 새해 첫날을 법정 공휴일로 지정한 나라의 경우는 이튿날이 지나야 뭔가 이상하다는 감이 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어찌되었거나, <죽음의 중지>에서 이상한 현상이 나타난 나라의 관료들은 일단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장의업계가 먼저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하게 되었고, 이어서 병원계에서도 중증의 환자가 죽음을 맞지 않고 병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환자에게 배정할 수 있는 병상이 모자라는 사태를 걱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죽은 뒤에 부활을 이야기해온 종교계에서도 큰 문제가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처음에는 환호하던 사람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서였습니다. 결국 죽음을 목전에 두었으면서도 죽지 못하는 사람들을 여전히 죽음이 일상적인 이웃나라로 모셔가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 소문은 금세 사람들 사이에 확산되면서 중증 환자들을 국경으로 모셔가는 일을 정부가 나서서 막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점은 영생을 얻더라도 삶의 질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죽는 것만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특수한 상황을 이용하는 사람들도 등장하고 정부는 여전히 제대로 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허둥대기만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리고 이런 상황은 언제까지 지속될까요? 죽는 사람이 사라진지 7개월이 지나면서 죽음이 목전이나 명만 유지하는 사람이 62,580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시점에 죽음이 방송사 사장에게 연락을 해왔습니다. 죽을 사람들이 다시 죽게 될 것이라고...


그리고 그동안 죽음이 태업을 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나를 그렇게 혐오하던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산다는 것, 영원히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맛을 좀 보게 해주려는 것(133-4)”이었다는 것입니다. 죽음이 할 일을 다시 시작하자 이번에도 대혼란이 일어납니다. 죽음을 미루었던 사람들이 갑자기 죽음을 맞으면서 이들의 장례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이래저래 세상은 모든 일이 원만하게 돌아가는 것이 최선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이야기의 뒷부분에서는 죽음과 첼리스트와의 관계를 집요하게 뒤쫓고 있어 이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첼리스트는 이틀 전에 죽음을 맞았어야 하는데 무슨 일일지 여전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몇 년 전에 방영된 연속극 <쓸쓸하고 찬란하-도깨비>에서도 저승에서 죽음이 예정된 자의 명부가 도착하면 저승사자들이 현장에 출동하여 죽은 자의 영혼을 인도하는 것인데, 간혹 이런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중지>에서도 죽음을 관장하는 여성이 명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죽어야 할 첼리스트가 명을 이어가게 된 셈입니다. 심지어는 그 첼리스트의 삶에 깊숙하게 간여하게 되는데, 결국 첼리스트는 죽음을 맞지 않게 됩니다. 예외 없는 원칙이 없다는 원칙이 지켜진 셈인가요?


흥미로운 것은 2009년에 번역 소개된 <죽음의 중지>에서는 사람들이 죽음을 개딸이라고 부른다고 했는데, 그것은 개자식에 빗댄 표현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최근에 우리나라에 등장한 개딸들과 차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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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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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크눌프>는 제가 활동하고 있는 고전독서회에서 이달에 읽기로 한 책입니다. 아직 토론 주제가 나오지 않은 탓에 주제가 될 만한 대목을 챙겨가면서 읽었습니다. <크눌프>에는 크눌프를 주인공으로 하는 세 편의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세 편의 이야기는 작가가 어떤 순서로 썼는지 모르겠지만, 발표되기로는 1908년에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 1913년에 초봄, 그리고 마지막으로 1914년에 종말을 각각 발표했다고 합니다. 이 책에서는 초봄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앞에 두었습니다.


종말에서는 크눌프가 방랑길에 오르게 된 이유와 그가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을 담았습니다. 반면에 초봄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에서는 크눌프의 훌륭한 인간성을 보여주는 내용이라는 생각입니다. 주변의 다양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의범절을 깍듯하게 지키는 신사입니다. 초봄의 도입부에 크눌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지역 어느 도시든 자신을 따뜻하게 맞아줄 곳은 쉽게 찾을 수 있을 터였다. 그 점에 대해 그가 느끼는 자부심은 특별해서, 만일 누구든 그에게 도움을 주게 된다면 그것을 일종의 영예로 여겨야 할 정도였다.(7)”


그의 성품을 제대로 보여준 초봄에서 크눌프는 레히슈테텐에 살고 있는 무두장이 에밀 로트푸스의 집을 찾아갑니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잠시 쉴 곳이 필요했던 상황이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저녁에 찾아온 크눌프를 에밀을 쌍수를 들어 환영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에밀의 집에 머물면서 크눌프는 이웃집 하녀가 향수병으로 울적해하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이웃마을에 있는 술집으로 데려가 춤을 추기로 합니다. 처음에는 내켜하지 않던 베르벨레도 한바탕 춤을 추고 나서는 엉켜있던 마음이 풀어집니다. 그리고 크눌프에 대한 감정이 생기는 듯합니다. 하지만 크눌프는 거리를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자신에게 감정이 생긴 듯한 에밀의 부인이 부담스러워 다음날 떠나기로 다짐합니다.


꽤나 오래되었습니다만, 친구와 애인이 사랑하는 사이가 되면서 친구와 애인을 모두 잃게 된 것을 한탄하는 노래 <핑계>가 유행한 적이 있습니다만, 실제로도 그런 일들이 적지 않게 생기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친구가 크눌프라면 그런 걱정은 붙들어 매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크눌프도 2살짜리 아들은 마음에 걸리는 모양입니다. 재단사 슐로터베크를 만났을 때 아이들과 아내를 건사하는 일이 힘에 벅차다고 하는 말에 아들 앞에 나타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보다는 나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크눌프가 방랑길에 올랐을 때 아이를 낳던 아내가 죽고, 아이는 입양되었기 때문에 아이 앞에 나타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삶의 막바지에 고향을 찾아가는 것도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보기 위한 것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크눌프가 얼마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은 크눌프에 대한 나의 회상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크눌프와 함께 여행을 하던 화자는 친구를 불러 셋이서 멋진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고 맥주를 마시는데 크눌프는 자기 몫의 맥주를 마시고는 술이 남은 화자를 남기로는 술집을 나서고 말았습니다. 그런 크눌프를 보면서 화자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가 나와 함께 술 한 병을 더 비우려 하지 않은 것은 유감이었지만,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그래도 즐거움과 애정을 느끼면서, 그가 참 멋진 친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87)”


종말에서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 크눌프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은 크눌프가 자신을 대신하였음을 이야기합니다. “난 오직 네 모습 그대로의 널 필요로 했었다. 나를 대신하여 넌 방랑하였고, 안주하여 사는 자들에게 늘 자유에 대한 그리움을 조금씩 일깨워주어야만 했다. 나를 대신하여 너는 어리석은 일을 하였고 조롱받았다. 네 안에서 바로 내가 조롱 받았고 또 네 안에서 내가 사랑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자녀요, 형제요, 나의 일부이다. 네가 어떤 것을 누리든, 어떤 일로 고통을 받든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했었다.(134)” 크눌프 역시 그렇다고 깨닫고 있었다고 답합니다. 크눌프의 자유의지가 아니었다는 이야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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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픽처
더글라스 케네디 지음, 조동섭 옮김 / 밝은세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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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데드 하트>를 쓴 더글라스 케네디의 대표작이라고 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읽고 난 소감은 이 책을 읽고 예스24 누리사랑방에 독후감을 쓴 분이 무려 376명이나 된다는 사실이 놀랍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완전범죄란 없다고 합니다만, 미제 강력사건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우발적으로 일어난 살인 사건을 지워낸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싶은데, <빅 픽처>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저는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만.


<빅 픽처>에서는 살아가면서 부딪칠 수 있는 여러 문제들을 다루었습니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문제는 젊은 시절 하고 싶은 일이 타의에 의하여 좌절되는 경우입니다. 주인공 벤이 사진작가가 되는 꿈을 꾸었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결국 변호사가 되고, 사진은 그저 취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런가 하면 주인공 벤이 우연히 살해하게 되는 잭은 사진작가가 되지만 부족한 재능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음에도 잘난 척하는 모습이 처량하기만 합니다.


두 번째 문제는 벤과 아내가 갈등을 빚는 문제입니다. 벤의 아내 베스는 작가로 성공을 꿈꾸며 몇 편의 소설을 썼지만 세상에 내보내지 못했습니다. 벤의 배려가 가식적이라는 생각에 앞집에 사는 잭과 바람을 피우게 됩니다. 문제는 남편과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그 바람의 흔적을 완벽하게 감추지 못한 채 벤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는데 있습니다.


세 번째 문제는 아내와 잭이 불륜관계라는 의심이 들었을 때 이를 확인하기 위해 잭의 집을 찾아갔다는데 있습니다. 과시욕에 부푼 잭이 약 올리는 바람에 충동적으로 포도주병을 휘둘러 그를 가격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문제는 살인을 저지른 뒤 수습하는 과정입니다. 자수를 하고 법의 처벌을 받는 것이 옳은 일이겠지만, 살인의 흔적을 지우려 들었던 것입니다. 그 과정이 아주 치밀한 점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살인의 피해자가 아니라 스스로를 죽이는 방법을 쓴 것입니다. 벤은 잭의 시체를 친구인 빌의 요트에 태워 대서양에서 폭발시키면서 자신이 사고로 죽음을 맞은 것처럼 위장하고 자신은 잭으로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죽음이 사고사로 확정될 때까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다가 몬태나 주의 마운틴폴스에 자리를 잡습니다. 살인자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서라면 남의 시선을 끄는 일을 하지 말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벤은 젊었을 적의 꿈인 사진을 다시 시작합니다. 다섯 번째 문제입니다. 몬태나 주 토박이들이 사는 모습을 사진에 담기 시작하는데 그저 소일거리에 그쳤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술집에서 만난 지역신문 몬테난의 루디 워렌 기자를 집에 들이고, 루디가 벤의 사진을 신문사에 넘기는 바람에 벤은 몬테난의 사진기자가 됩니다.


그리고 사진부장 앤과 엮이게 됩니다. 두 사람이 산중에 있는 앤의 별장에서 주말을 보내는 동안 대규모 산불이 나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벤은 진화작업을 하는 소방대원들의 활약을 사진에 담아내고 그의 사진은 몬테난을 거쳐 중앙 신문은 물론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됩니다.


결국 벤이 도망자라는 사실을 루디와 앤이 알게 됩니다. 벤의 범죄사실이 밝혀져 법의 처벌을 받게 되었을까요? 이야기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벤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관심이 모아지게 되는데, 작가는 끝까지 자신이 창조한 작중 인물 벤을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관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사실 범죄자가 숨어사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입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철저하게 감추는 것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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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훔치는 자는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최고은 옮김 / 비채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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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기를 좋아해서 책에 관한 이야기는 빠트리지 않고 읽어보고 있습니다. <이 책을 훔치는 자는>은 제목 그대로 책을 훔쳤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증이 일게 만들었습니다. 책을 쓴 후카미도리 노와키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서점에서 근무하다가 등단한 경력이 있다고 합니다. 서점에서 일하다보면 책을 훔쳐가는 사람들이 원망스러울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그래서 이 책을 훔친 자는이렇게 됐으면 하는 바라는 마음을 담아낸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는 군포시도 책의 도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이 책을 훔치는 자는>의 무대가 되는 요무나가 마을 역시 책의 마을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요무나가는 남이섬처럼 강 속에 있는 하중도(河中島)입니다. 강이 어느 방향으로 흐르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큰 강이 남북으로 갈렸다가 다시 만나서 생긴 섬으로 모서리가 둥근 마름모꼴이라고 합니다. 그 가운데 미쿠라관이라고 하는 사설 도서관이 있습니다.


1900년에 태어난 미쿠라 가이치가 다이쇼시대(1912~1926)부터 조금씩 수집해온 책을 딸 미쿠라 다마키가 물려받아 규모를 키운 것이라고 합니다. 아무리 옛날이라고는 하지만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닐 나이부터 책을 사모았다고 하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겠습니다. 요무나가가 책의 마을로 유명해진 것은 바로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이라는 별명을 얻었던 미쿠라 가이치가 수집한 책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아는 이가 없었다는 것도 한 몫을 한 것 같습니다.


지하 2층에서 지상 2층의 거대한 서고가 탄생하면서 미쿠라관에는 동네 사람들이 찾아와 책을 빌려가기도 했지만, 책을 수집하는 사람들도 찾아오면서 미쿠라관 주변에는 다양한 책들을 파는 책방들이 들어서면서 요무나가가 책의 마을로 유명해진 것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찾아오는 사람들이 선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쁜 사람도 있기 마련이어서 소소하게 책을 잃어버리는 일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미쿠라의 딸 다마키가 미쿠라관을 물려받았을 때 한번에 200권이나 되는 희귀본이 사라지는 일이 생겼다고 합니다. 사건이 해결되지 않자 다마키는 미쿠라관을 폐쇄하여 미쿠라 가문 사람이 아니면 출입을 금하고 경보장치를 곳곳에 설치하였습니다.


다마키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미쿠라관에 설치한 경보장치가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요무나가 마을과 연관이 있는 이나리 신(풍요와 성공을 관장하는 신으로 여우를 이르기도 한다는)에게 빌어 미쿠라관이 수장하고 있는 책에다 기묘한 마술을 걸어놓았다는 것입니다. 미쿠라관 뒤의 언덕에 있는 요무나가 신사에는 서책를 관장하는 이나리 신을 모시고 있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잦다고 합니다.


다마키가 세상을 떠난 뒤에 미쿠라관의 관리는 아들인 미쿠라 아유무와 히루네 남매에게 맡겨졌는데, 아유무는 유도관을 운영하여 얻는 수익으로 미쿠라관을 유지하는데 쓴다고 하며, 히루네는 미쿠라관을 관리하는데 주로 종일 잠을 자는 게 일이라고 합니다.


사건은 아유무가 자전거를 타고 강가의 제방을 달리다가 튀어나온 고양이를 피하려다 굴러 떨어지면서 전치 1개월의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면서 일어났습니다. 미쿠라관의 경보장치가 30분마다 울려대기를 세 시간이 넘도록 멈추지 않아 시청에 민원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미후유가 아버지의 문명을 마치고 고모 히루네가 먹을 음식을 사들고 미쿠라관을 찾았을 때 고모가 쥐고 있는 쪽지를 발견합니다. 쪽지에는 이 책을 훔친 자는 마술적 사실주의의 깃발에 쫓기리라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갑자기 불어온 바람에 실려 날아간 쪽지가 떨어진 곳에서 마시로란 이름의 여학생이 나타나고 20여권의 책이 사라진 책장으로 미후유를 안내합니다. 그리고 남아있던 <한모마을의 형제>라는 책을 읽어보기를 권합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요? 그리고 미쿠라관에서 사라진 책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책을 훔쳐간 사람을 뒤쫓는 미후유와 마시로의 활약이 이어지는 이야기 <이 책을 훔치는 자는>는 어떻게 마무리될까요? 흥미롭기고 하고 황당하기도 한 환상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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