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돌이개와 함께한 행복한 나의 인생
테드 게라소티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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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 관한 책을 또 읽게 되었습니다. 묘한 인연이다 싶습니다만 최근에 아는 분들이 개에 관한 책을 준비한다고 해서 저도 관심이 가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떠돌이 개와 함께한 행복한 나의 인생>이라는 기다란 제목의 책은 저자가 묘한 인연으로 만나 함께 지낸 떠돌이 개와 함께 지내면서 그 개가 보여주는 다양한 행동들을 이해하기 위하여 관련된 학술자료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514쪽이나 되는 긴 이야기가 되고 만 것 같습니다.

제목이 꽤 길다 싶습니다만, 원제목 <Merle's door; Lesson from a freethinking dog>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저자는 여는 글을 통해서 책에 담은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개들을 변화시키려는 마음만 앞세우지 않고 우리 자신의 태도를 바꾼다면, 개들이 얼마나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백이다. (…) 개와 함께 사는 삶이란 개에게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 정신적이고 감성적으로 세상의 문을 열어 줌으로써 개가 가진 잠재력을 꽃피워 주는 일일 것이다.(5쪽)”

책을 모두 읽고 난 느낌은 여행작가 테드 케라소티가 만난 떠돌이 개 멀은 아주 특별한 개였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원제목처럼 생각이 자유로운 개, 즉 다른 개와는 생각과 행동이 다른 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을 도회지역에서도 그리고 일반적인 개에게 적용하는 것이 옳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삶의 모든 측면에서 개의 목줄을 풀어주어 개가 자기 코가 이끄는대로 마음껏 달리며 스스로 배울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6쪽)”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주장에 온전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저자가 멀과 같이 생활한 장소가 와이오밍주의 그랜드 티턴 국립공원 지역이었다는 것입니다. 잭슨호수에 눈덮힌 산이 그림처럼 비치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이웃집에 가려면 차를 타고서도 한참을 가야하기 때문에 개 목줄을 채울 이유가 별로 없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저자가 멀을 만난 유타주 모압(Moab)에서 하루를 묵었던 생각이 납니다. 아치스 국립공원 근처에 있는 한적한 소읍입니다만, 콜로라도 강으로 이어지는 래프팅의 성지이기도 합니다. 멀은 인디언보호구역에서 나타난 떠돌이개입니다. “떠돌이개는 인간과 사회적인 유대감을 유지하며 확실한 주인이 없을 때는 주인을 찾는다. 반면에 야생의 개는 인간과 접촉하지 않고도 잘 살아가며 사회적인 유대감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아니라 다른 개들과 맺는다.(35쪽)”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멀과의 만남을 통하여 늑대가 사람의 삶에 끼어들게 된 과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개에 대한 저자의 생각은 <개에 대하여; http://blog.joinsmsn.com/yang41212325418>를 쓴 스티븐 부디안스키보다는 개에게 보다 우호적인 편이나, <개가 주는 위안: http://blog.joinsmsn.com/yang412/12329783>을 쓴 피에르 슐츠의 감성적 접근보다는 이성적 접근을 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 부디안스키는 개가 위험한 동물이라는 점을 경고한 바 있는데, 캐라소티는 미국에서 응급실로 이송된 환자 가운데 1.3퍼센트만이 개에 물려 치료를 받았을 뿐, 추락사고를 당하거나 자기 집에서 부엌칼에 베이거나, 자동차나 자전거에 치이거나, 과로로 쓰러지거나, 저녁을 짓다가 화상을 입거나, 잔디깍이 기계에 발가락이 절단되는 경우보다 낮은 확률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에 물려 응급실을 찾는 환자가 1.3퍼센트 된다는 것은 문제가 크다고 보여지는 데이터란 생각이 듭니다.  

 

유타주 모압에 래프팅을 갔다가 만난 떠돌이개로부터 받은 특별한 느낌을 저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그 개의 반짝거리는 암갈색 눈동자가 내 마음을 알겠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겐 개가 필요해요. 나 어때요?’ 지난 1년 동안 마땅한 개를 찾고 있던 나는 내 마음을 꿰뚫어본 녀석의 불가사의한 능력에 마음이 끌려 녀석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착한 개구나.’”(13쪽) 멀은 던진 공이나 막대기를 주워오는 것을 거부하거나, 새사냥에 쓰는 엽총소리에는 기급을 하지만, 소총을 쏘는 엘크사냥에는 앞장서는 등 특별한 행동을 보이는데, 아마도 떠돌면서 만난 사람으로부터 치명적인 기억이 만들어졌던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어떤 개 행동학자들은 멀이 나를 훈련시켰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의견은 개와 인간이 한집에 거주함으로써 서로 얻는 이득을 놓친 것이다.(184쪽)”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책을 읽다보면 멀에게 끌려 다닌 점도 적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여자친구의 개 브라우어가 암에 걸려 수술을 받았지만 재발하여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안락사를 하도록 권하지만, 멀이 노쇠하여 삶에 고통을 받을 때는 안락사를 고려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맞을 때까지 헌신적으로 돌본 것도 다시 생각할 부분이 있지 않나 싶습니다.

혹시 기르고 있는 개의 건강에 문제가 생겨 안락사를 고려하고 계신분이라면 수의학자 버나드 허쉬혼이 제안한 안락사 시행의 여섯 가지 기준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① 병세가 장기적이거나, 재발하거나, 악화되는가? ② 더 이상 아무런 치료도 듣지 않는 상황인가? ③ 개가 고통스러워하는가? 다시 말해, 신체적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가? ④ 그 고통을 완화하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한가? ⑤ 회복된다면, 당신의 개는 지병에 시달리게 될까? 건강한 개로서 스스로를 돌볼 수 없을 가능성이 큰가? ⑥ 회복된다면, 당신의 개는 더 이상 삶을 즐길 수 없거나 급격한 성격의 변화를 겪게 될 가능성이 큰가?(478쪽)“입니다.

저자는 “멀의 머릿속에 자리 잡은 서론 다른 종을 구분하는 분류 개념은 인강과 개가 아니라, ‘우리’(개, 사람)와 ‘그들’(야생동물)인 것이 분명했다.(280쪽)”고 적은 것처럼 멀이 저자들 대한 것도 자신의 판단기준을 적용한 것처럼 저자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고 자신의 판단기준으로 멀의 생각을 읽었던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개에 대하여>에서도 개가 사람을 속이는 행동을 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만, 캐라소티 역시 멀이 자신으로부터 동정심을 유발하려는 행동을 보였지만 상황이 변하면서 다른 행동을 보이더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황금색 골든리트리버종 개의 모습을 보고 마음이 끌리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사람보다 사는 시간이 짧은 개를 키우다가 죽음을 맞게 되는 경우에 개주인이 가지는 상실감을 가족을 사별하는 상실감에 못지않더라는 이야기를 적지 않게 들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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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무게
애니타 슈리브 지음, 조한나 옮김 / 북캐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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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타 슈리브의 미스터리소설입니다. 1873년 3월 5일 밤. 뉴햄프셔 해안에서 10마일 정도 떨어진 쇼울 아일랜드군도의 한 섬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스토리의 한 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노르웨이에서 이민온 세 명의 여자들 중 두 명이 도끼로 살해되는 참혹한 사건입니다. 바닷가는 아니었지만 사건이 일어난 메인주에는 한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아주 한적한 시골동네에 있는 대학에서 열린 심포지움이었는데, 메인주는 미국에서도 아주 시골 느낌이 강한 곳이라고 합니다. 이런 시골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다는 것이 의외라 생각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메인 주의 루이스 H.F. 와그너 재판’의 법정증언과 지방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던 사건관련 자료를 토대로 구성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설의 중심은 해당사건을 취재하기 위하여 현지를 방문한 사진작가 진과 그녀의 남편 토머스, 딸 빌리, 그리고 남편의 동생 리치와 그의 아내 애덜린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묘한 갈등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100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나는 아내와 남편, 형제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 빚어낸 끔찍한 결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스터리소설이라서 스토리를 자세하게 요약하면 책을 읽으실 분들의 재미가 없으실 것 같아 생략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살인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는 사진작가와 100년 전 사건의 주인공인 마렌이 결정적인 순간에 보여주는 자신에 대한 통제력의 상실이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그런 선택을 하게 되기까지 주인공들-여기서 주인공들이라고 한 것은 100년 전 사건의 주인공 마렌과, 그녀의 사건을 뒤쫓는 사진작가 진을 지칭하는 것입니다-의 불안한 심리에 대한 묘사를 조금 더 자세하게 했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리고 19세기 말이라고 하더라도 사법경찰의 수사실력이 형편없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이는데 현장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습니다. 진이 취재해서 밝혀낸 자료만으로도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이 범행을 저질렀을 것이라는 판단을 쉽게 내리기 어렵다 싶습니다. 사건당시의 정황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고 결국은 살아남은 자의 증언을 중심으로 수사가 진행되고 재판이 이루어져 무고한 생명이 사형을 당하는 2차 범행의 피해자가 된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진의 취재과정에서 확인된 마렌의 고백록이 사건 후 60여년이 지나 대학도서관에서 노르웨이로 보내져 번역까지 되어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해당사건에 대한 재심을 통하여 무고한 누명을 쓰고 죽은 사람에 대한 신원(伸寃)이 이루어졌다는 기록이 없는 것이 유감입니다. 작가가 글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는 살아남은 사람들의 뒷이야기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말았습니다만, 정말 궁금한 것은 죽은 사람들의 남은 가족들이 사건의 진실을 전혀 몰랐을까 하는 점입니다.

제목인 ‘물의 무게’의 의미를 아직도 찾지 못했습니다. 물의 무게에 대한 설명은 두 번 볼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나는 물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봤다. 그것은 과학적인 영역이다. 물의 1입방피트는 62.4파운드이다. 바닷물은 민물보다 3.5퍼센트 더 무겁다. 그 말은 바닷물 1,000파운드에 35만큼의 소금이 있다는 뜻이다. 물의 무게는 깊이를 상승시키는 압력을 발생시킨다. 바다 아래의 1마일의 압력은 제곱인치당 2,300의 압력으로 내려가는 것이다.(277쪽)” 그리고 두 번째는 “나는 종종 물의 무게와 어른의 부주의함에 대해 생각한다.(335쪽)”입니다. 앞서 적은 물의 무게는 과학적 영역에 속하는 것 같습니다만, 뒤에 적은 물의 무게와 어른의 부주의함은 어떤 관계일까 생각해봅니다. 특히 ‘종종’…

두 사건을 모자이크로 엮어내는 과정에서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집중하게 만드는 작가의 솜씨가 돋보입니다. 가족이란 이름만으로는 서로를 이해하는데 있어 충분하지 못하며, 가족들 사이에서도 원활한 소통이 이뤄져야만 서로를 이해하고 아픔을 다독이게 된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주인공이 딸의 죽음과 전혀 무관하지 않으며 남편과의 관계도 석연치 않은 애덜린과 사건 이후에 다시 만나 지난 일을 이야기한다는 설정도 이해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마무리하는데 있어 시동생과 상황을 정리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싶기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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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시대의 의사 - 야스퍼스의 의철학과 심리치료 비판
카를 야스퍼스 지음, 김정현 옮김 / 책세상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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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의료계에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온 굵직한 사건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 의과대학생들이 출교를 당하게 된 사건으로부터 최신의료시술의 보험급여화 과정에서 의사의 도덕성까지 들먹이고 있는데 의사가 엄격한 도덕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를 달리 생각해보면 그들이 받고 있는 사회적 대우가 걸맞도록 충분한 것인가 싶기도 합니다.

실존철학의 중요한 인물로 꼽히는 카를 야스퍼스의 <기술시대의 의사>는 옛날 의학계에 던졌던 화두를한 세기 가까이 되는 이 시점에서 끄집어내는 것이 적절하겠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만, 야스퍼스가 의학을 공부하던 시기는, 19세기로부터 20세기로 전환되는 시점에서 의학이 철학적, 혹은 관념적 사고를 바탕으로 경험적 치료법에 의존하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빠르게 발전하기 시작한 과학분야와 연계하여 과학적 사고의 틀이 도입되어 근거중심의 치료법을 적용하는 신의료의 틀이 갖추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아마도 그러한 시대적 배경 때문에 <기술시대의 의사>라는 제목으로 야스퍼스의 저술 가운데 의철학을 비롯한 정신의학관련 저술을 되돌아보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1986년에 편집된 원본은 모두 다섯 편의 글을 담고 있습니다. 의철학에 관한 전반의 세 편은 ‘의사의 이념(1953)’, ‘의사의 환자(1953)’, ‘기술시대의 의사(1958)’이며, 두 편의 정신의학관련 저술로는 ‘정신분석에 대한 비판(1950)’과 ‘심리치료의 본질과 비판(1954)’입니다. 정신분석과 심리치료의 영역은 저의 아는 바가 제한적이라 깊이 살펴보지는 못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다만 야스퍼스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정신분석과 심리치료가 한계가 있다는 점인데, 지금은 신경계통의 기질적 변화에 의하여 생기는 질환을 다루는 신경과와 신경계통의 유기적 기능의 변화에 의하여 생기는 질환을 다루는 정신과 영역이 당시만 해도 분리되지 않고 정신과영역에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과는 분명 치료적 접근이 달라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야스퍼스는 <의사의 이념>에서 “원시 시대의 사제적 유형의 의사, 편협하지 않은 시각으로 인간 전체와 인간의 상황을 합리적으로 다룬 히포크라테스적 의사, 권위주의적이고 사변적 견해에 사로잡혀 있던 중세의 의사, 이 모든 유형의 의사가 몇 세기 만에 근대의 자연과학적 의사로 교체되었다.(9쪽)”고 글을 시작하면서 시대에 따른 의사의 모습을 나누었습니다. 만일 야스퍼스가 살아있다면 21세기의 의사는 어

떤 모습으로 그려낼지 궁금해집니다.

근세에 이르기까지 의사는 자신의 의료행위를 “자연과학적 인식과 기술력, 다른 한편으로는 휴머니티의 에토스라는 두 개의 기둥 위에 세우게 되는데, 스스로 결정하는 환자의 존엄성과 모든 개별적 인간의 대체할 수 없는 가치를 망각하지 않는다.(10쪽)”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모든 이가 광범위하게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건강보험을 비롯하여 의료부조와 같은 다양한 사회적 장치들로 인하여 의료서비스의 문턱이 낮아지면서 누구나 같은 수준의 서비스를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야스퍼스의 시대와 현재의 의료환경은 기본적으로 격변기라는 점에서는 같습니다만, 사회적 환경은 분명 커다란 차이가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스퍼스가 인식하는 환자는 자신의 질병을 치료받기 위하여 의사를 만나게 되고 치유되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에 대하여 알려하기보다는 의사의 권위에 의존하고 복종하는 경향을 나타낸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환자들은 자신의 상태를 속속들이 알려주지 않으면 의사를 신뢰하지 않으며, 의사를 만나러 가기 전에 사전 조사를 통하여 자신의 상태에 대한 진단을 이미 마친 상태이며 치료방향까지도 들고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환자일수록 환자가 생각한 치료방법이 아닌 다른 방법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설명하는데 더 많은 힘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는 의사의 사명은 ‘고통받고 죽어가는 인간을 돕기 위해 자신의 직업에서 이성적으로 하는 행동이 의미있다는 점(21쪽)’입니다. 수요가 늘어나는 만큼 한해 배출되는 의사의 숫자도 늘고 있습니다. 또한 엄청나게 늘어난 의학지식을 전달하는 의학교육 역시 보다 효율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전통적 방식은 이미 사라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철학자가 되는 의사는 신에 가깝다"라는 의성 히포크라테스의 명제에 대하여 야스퍼스는 “단순히 배우는 의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의사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의사는 삶의 흐름 속에서도 영원한 규범 아래서 자신의 의술을 생각하는 철학자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하지만 이런 의사가 되는 것은 역시 어렵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사실 생활을 걱정해야 하는 의사가 자신의 삶에 대하여 깊이 천착하여 철학적 의미를 부여할 여유를 내기가 어려운 시절입니다. 뿐만 아니라 질병의 고통으로 힘들어하는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을 끊임없이 감시당하는 의료환경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는 웬만한 의사라면 신경이 마를 지경이라고 하소연하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의사와 환자>에서는 질병이 악령의 개입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상태가 깨져 생기는 자연과정이며, 경험적 치료방식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입증된 치료방식을 적용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20세기로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인식입니다만, 요즈음에는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과학 이외의 영역까지도 끌어들인 통합의학으로 나가는 추세입니다. 이러한 접근방식에 대한 철학적 분석은 아직 나오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야스퍼스 의철학의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는 <기술시대의 의사>에서 논한 것들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철학을 버리는 의사들이 있는데, 철학이 없다면 사람들은 자연과학적 의학의 한계에서 잘못된 것을 지배할 수가 없다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자연과학적 기술의 진보를 토대로 엄청난 일을 할 수 있는 의사는 이러한 실천을 자신의 철학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온전한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야스퍼스의 명제는 세기가 바뀌어도 여전히 틀림없는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의료 기술자를 양성하는 의학교육보다는 의사로서 갖추어야 할 철학을 같이 배우는 의학교육이 되어야 하겠고, 삶의 압박으로부터 여유로워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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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즐거움 - 은퇴 후 30년… 그 가슴 뛰는 삶의 시작!
김열규 지음 / 비아북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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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http://blog.joinsmsn.com/yang412/4271393>에 깊은 공감을 가졌던 김열규교수님의 <노년을 즐거움>을 읽었습니다. ‘한국의 키케로’란 별명을 드린 것은 키케로의 <노년에 관하여; http://blog.joinsmsn.com/yang412/3977182>를 염두에 두었던 것 같습니다. 꼭 이순(耳順)을 얼마 남기지 않은 까닭은 아닙니다만,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던 화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 한권으로 기로들이 ‘노당익장(老當益壯)’을 누리는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노년에 들어서 당연히 더한층 건장함’을 환갑 진갑 두루 거친 분들에게 선사할 수 있기를 바라고 싶다. 뿐만 아니라 초로라고 하는 나이, 이를테면 쉰 살에 미칠까 말까 하는 나이, 그리고 그에 미처 다다르지 못한 연령층에게도 장차를 위한 길잡이가 되었으면 한다.(7쪽)”고 하신 김교수님의 바람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데이빗 소로우교수를 스승으로 삼고 계시다는 교수님께서 유학시절 월든호수를 자주 걷곤 했다는 말씀을 읽고서는 월든호수를 읽으면서 얻었던 감동을 리뷰에 제대로 녹여내지 못했던 아쉬움이 다시 되새겨집니다(http://blog.joinsmsn.com/yang412/12281440). 그런 탓인지 김교수님이 고향바다에서 얻는 느낌들은 소로우교수가 그려내고 있는 월든호수의 정경을 닮았습니다. “나는 온 데 간 데 없어진다. 뿐만 아니라 나이도 무의미해진다. 다만 산의 기(氣)가 풍기, 즉 바람 기운과 함께 햇살 바른, 엄동의 양지에 다리를 뻗고 평하게 앉아 있을 뿐이다. 내려다보이는 먼 바다, 바람잡이의 눈에 겨울 아지랑이가 눈부시다.(209쪽)” “하루 두 번의 썰물과 밀물에 따라서 바다의 시간은 들고 난다. 펑퍼짐하던 해면에 문득 열린 물길을 따라서 흐르는 조류. 그 시퍼런 기세에 물고기들에게 가고 오는 시간, 모이고 흩어지는 시간을 온몸으로 느끼게 할 것이다.(232쪽).”

뿐만 아니라 교수님은 최근 기사에서부터 동서양 고전에 이르기까지 적절한 자료를 이끌어 읽는 이로 하여금 쉽게 글에 빠져들게 만들고 있을 뿐 아니라 잊고 있던 우리말까지도 적절하게 살려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공교롭게 ‘쏴! 쏴!’하고 고추바람이 닥칠 때면 옷을 벗으려는 손길이 머뭇거린다.(208쪽)” 

<노년의 즐거움>은 어르신의 예찬일 뿐 아니라 나이든 삶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루 낮이 사람의 삶이라고 한다면 일출에 태어나 일몰에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간다고 하겠습니다. 일출이 장엄하고 아름답다고는 하지만 일몰의 화려함을 당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혹시 영화 <노트북>을 보셨다면 황홀할 정도로 붉게 타오르는 석양을 향하여 작은 배가 미끄러져가는 도입부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김교수님은 '노(老)의 몰골과 맵시‘라는 부제를 단 <1장 노년의 얼굴들>에서 노년송(老年頌)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위인들의 초상이 노년의 얼굴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오히려 표지에 소개되어 있는 7분의 평범해 보이는 어르신의 편한 얼굴들이 더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도 “누군가에게 이렇듯이 편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조금 이른 듯싶기도 합니다만, 2장에서는 행복한 노년을 위하여 금(禁)할 점과 권(勸)할 점을 각각 다섯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금할 것으로는 ① 잔소리와 군소리를 삼가라, ② 노하지 마라, ③ 기죽는 소리는 하지 마라, ④ 노탐을 부리지 마라, ⑤ 어제를 돌아보지 마라 등이며, 권하는 것으로는 ① 유유자적, 큰 강물이 흐르듯 차분하라 ② 달관, 두루두루 관대하라, ③ 소식, 소탈한 식사가 천하의 맛이다, ④ 사색, 머리와 가슴으로 세상의 이치를 헤아려라, ⑤ 운동, 자주 많이 움직여라 등입니다. ‘문화와 예술, 그리고 현장에서 만난 노년의 진면목’을 부제로 한 <3장 노년의 즐거움>에서는 역사, 예술, 문학, 현실에서 만나는 노익장들의 기개를 소개하고 있고, <4장 내가 걷는 그 푸른 노년의 인생길>에서는 고향에서 보내고 있는 김교수님의 생활에서 얻은 생생한 느낌을 진솔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무연화하는 경향의 일본사회의 문제점을 다룬 시다마 히로미의 <사람은 홀로 죽는다; http://blog.joinsmsn.com/yang412/12372743>를 읽었습니다만, 김교수님 역시 노년을 외롭게 보내는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좀 더 개인적ㅇ니 시간과 공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62쪽)”라는 김원우작가의 말처럼, 그리고 고독함 역시 혼자 자신을 닦고 다지고 굳혀가는 좋은 기회로 삼은 릴케처럼 “돌부처처럼 묵묵하고 진중하게 혼자만의 세계를 누려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유연(有緣)이냐 무연(無緣)의 환경을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의 판단으로 결정할 일이 될 것 같습니다.

“노년의 기가 죽어서는 안된다. 시퍼렇고 등등하게 살아나야 한다. 솟구치고 떨쳐야 한다. 한 집안의 가장 큰 어른답게, 또 사회의 위대한 장로답게 자신들의 의지며 처지를 높여나가야 할 것이다.”라고 적은 저자의 맺음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브라보 실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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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홀로 죽는다 - 무연사회를 살아가기 위하여
시마다 히로미 지음, 이소담 옮김 / 미래의창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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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김열규교수님의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http://blog.joinsmsn.com/yang412/4271393>의 리뷰에서 인용한 글을 다시 끄집어내봅니다. “예로부터 높게 쳐준 우리네의 ‘갖추어진 삶’의 조건으로, 나이로는 환갑․진갑을 넘겨 살아야 하고, 자식은 적어도 3남2녀는 두어야 하고, 가장이 부와 귀를 누려야하며, 그 많은 아들․딸들이 빠짐없이 성혼을 하여 손자를 주렁주렁 두어야 하고, 드디어 세상을 하직할 때 고통이 없이 잠시 앓는 듯 마는 듯하다가 안채 안방 혹은 안사랑에서 이른바 ‘와석종신’해야 한다고 합니다. 임종자리에는 자식이 빠짐없이 지키고 앉아 있어야 하며, 초상은 장중하게 치루어져야 하고 은성해야 하며, 무덤자리가 명당이라야 하고 삼대에 걸쳐 봉제사할 후손이 끊기지 말아야 하는 것이 ‘갖추어진 삶’의 맺음이라고 합니다.”

요즘 사회에서 이렇듯 호사스러운 죽음을 맞는 분들이 적지는 않을 것 같기도 합니다만, 간혹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모르는 죽음에 관한 기사를 신문귀퉁이에서 만나게 되면 안타깝기 이를 데 없습니다. 시마다 히로미의 <사람은 홀로 죽는다>는 뉴스에 나오는 이런 죽음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2010년 1월 말경에 NHK에서 방영되었다는 <무연사회 : ‘무연사’ 3만2천명의 충격>이 집필동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사람들의 대단한 독서열에 관한 이야기는 흔히 듣습니다만, 이런 독서열에 편승하는 수요 때문인지 가벼운 내용의 책들을 자주 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은 홀로 죽는다>도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연고없이 사망하는 사람이 늘고 있고 이에 대한 사회적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담아내기 위하여 일본사회에서 도시화가 시작된 이후 농촌에서 도회지로 옮겨간 세대가 사라지면서 연고중심사회에서 개인중심사회로 넘어가면서 누군가와의 소통을 끊고 홀로 살다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 늘게 된 시대적 변천과정을 추적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연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제목에 끌려 읽기 시작했습니다만, 책이 주는 무게는 다소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본사회가 연고를 중시하던 풍조가 무연고 성향으로 변하게 된 원인분석도 다소 치밀하지 못한 것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남습니다.

하지만 농업중심 사회에서는 땅을 매개로 한 협업과 재산이나 농업기술의 승계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반하여 기업사회에서는 회사원으로 지내면서 쌓은 노하우가 자식에게 넘어가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사회구조가 무연사회를 먼 원인이 될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어떻게 보면 유연사회 속에서의 촘촘하게 엮이는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한 사람들이 주변과의 관계를 끊고 혼자만의 삶을 즐기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소위 무연사, 혹은 고독사라고 한다면 이 역시 죽은이의 선택이었음을 인정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싶습니다. 즉 그런 죽음에 대한 사회가 책임져야 하는 한계가 어디까지 인지를 고민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저자의 주장대로 사람은 혼자 태어나지는 않지만 누군가와 같이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세상을 떠나는 일은 혼자의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세상을 떠나는 이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작별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아직까지는 대세겠지만, 혼자서 세상을 떠나는 상황의 경우에 대한 정확한 표현이 되겠습니다.

효성이 지극한 후손이 선조를 기리는 일을 잘 이어간다면 모를까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세월이 흐르면 대부분 잊혀지기 마련입니다. 저자는 독신자가 죽은 다음에 그를 떠올리며 공양해줄 사람이 없어 고독한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만, 이 역시 오지랖이 보통 넓은 게 아니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홀로 살아왔다는 것이 속박없이 자유롭게 살아온 삶에 대한 반대급부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홀로 맞이 하는 죽음이 두렵고 쓸쓸할 것이라는 저자의 단정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죽은 사람에게 물어볼 수 없는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무연사회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저자의 결론은 미리 정해진 것이라고 보이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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