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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 농부 가브리엘과 그의 정원 - 우리가 몰랐던 조지아 소설집 ㅣ 우리가 몰랐던 세계문학
이라클리 삼소나제 지음, 김석희.임정희 옮김 / 마음이음(한국문학번역원)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올 여름에 나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여행하고 왔다. 그 때 간 식당 중에 그루지야 식당이 있었다. 그 식당은 벽면 가득 그루지야 농민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벽화가 마치 그림책 속 삽화처럼 정겹고도 재미있게 그려져 있었고 가구나 인테리어 소품도 토속적인 느낌이어서 굉장히 인상에 남았었다(이 책의 목차 옆 쪽 그림에 나오는 것과 비슷한 그림들이지만 황토색 바탕에 재미있게 그려져 굉장히 따뜻해 보였다). 물론 음식도 맛있어 그루지야에 대해 좋은 느낌을 갖게 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운명인지 우연찮게 <우리가 몰랐던 조지아 소설집>을 보게 되었다.
‘조지아’라는 나라를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행히 나는 세계지리를 좋아했던 아이 덕에 ‘그루지야, 수도는 트빌리시, 스탈린이 이 나라 출신’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루지야는 러시아명이고 이제는 영어식으로 조지아라 부른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 나라가 내전 중이라는 것도 몰랐다. 이 책 30쪽에도 나오지만, 조지아가 1991년 4월 소련연방이 붕괴될 때 독립선언을 하자 1992년 7월 압하지하가 조지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유혈충돌을 빚었는데 이 분쟁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단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작가 열 명의 작품 한 개씩을 모아 놓은 단편 모음집인데 그 중 전쟁에 대해 언급한 작품이 여러 편이다. <아프리카 여행>은 내전 때문에 압하지아인 거주 지역에서 트빌리시로 피난 와서 노숙자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는 소년이 행방을 알 수 없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아 고향에 다녀오는 이야기를 담았다. <양계 농부 가브리엘과 그의 정원>은 관공서 구내식당의 수석요리사였던 가브리엘이 내전으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양계 농부가 되는 내용이다. 그는 예상치도 못한 일을 하면서 나름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애쓴다. <능직 무명으로 짠 낙원> 역시 전쟁으로 아들을 잃어 정신적인 충격은 받은 노파가 돈벌이 때문에 해외로 떠난 며느리의 도움으로 어렵게 살다가 요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이야기다.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제제 묵바니아니의 노벨상 수상 연설>은 전쟁이 주요 소재는 아니지만 전쟁으로 인한 죽음뿐 아니라 여러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작품 덕에 러시아정교회에서는 기도를 할 때 기도 대상자 명단을 산 자와 죽은 자로 나누어 적은 쪽지를 보고 그들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도 알게 됐다. <루키, 플루키, 유키>는 임종 직전의 사람들을 성으로 위로하는 유키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에 의해 죽게 되는 플루키에 관한 이야기다. 이처럼 이 두 작품도 전쟁 이야기를 한다.
한편, <산 속에 아침은>은 산 속에 홀로 사는 노인에 대한 이야기인데, 실제로 산악이 많은 조지아에서는 젊은이들이 고도가 낮은 곳으로 이주해 산속에 노인들만 홀로 남겨지는 문제가 있단다. <마리타>는 빼어난 미모를 가진 여인이 가난 때문에 사랑하는 남자와 헤어진 뒤 겪게 된 불행을 이야기한다. <성교육>은 누군가의 손을 잡지 않고서는 편히 자지 못하는 남자와 돈 때문에 그에게 손을 내어주는 매춘부이지만 자유를 잃어가는 것을 두려워 하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권이 신장되면서 여성은 홀로 서려고 더욱 애쓰고 있는데 남성은 여전히 여성에게 의존하려는데 모습을 이렇게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책에서 가장 유쾌하게 본 작품은 <포르자의 손아귀에서>이다. 결혼 3년 차인 아나스타샤는 남편의 불륜을 알게 된 뒤 기차를 타고 홀로 여행하다 도둑 일행을 만나고 그 중 한 명을 사랑하게 된다. 나도 러시아 여행을 갔을 때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봤기에 열차 속 상황이 떠올라 더욱 흥미로웠는데, 결말 또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그저 우스운 이야기만은 아니지만 결말이 웃음이 나게 한다.
이 작품에서 <마리타>와 함께 무척이나 마음이 아프게 본 작품은 <형제>다. 바르탄과 레오는 형제다. 그런데 아버지가 다른데, 그 둘은 그 사실을 모른다. 바르탄은 결혼 후 어머니의 실수로 생긴 아들이다. 아버지는 뒤늦게야 이 사실을 알게 되지만 체면 때문에 모르는 척하고 산다. 그 후 자신의 진짜 아들 레오를 얻는다. 바르탄은 아버지가 동생만 편애하는 이유를 모른다. 게다가 동생 레오는 소심한 형을 괴롭힌다. 평생을 동생에게 쩔쩔매매 살아오던 바르탄에게 반전의 기회가 온다. 너무나 불행한 반전이다. 우리나라의 막장 드라마와 같은 스토리다. 마리타의 할머니가 사람을 제대로 보았더라면, 바르탄의 엄마가 진작 용서를 빌고 사실을 말했더라면... 많은 사람이 불행에 빠지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더 가슴 아프게 느껴진 작품들이다.
간략한 내용 소개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와는 아주 먼 곳이고, 전혀 몰랐던 나라의 소설가들이 쓴 작품인데도, 그 소감은 “사람 사는 세상은 다 똑같구나”이다. 인명이나 지명이 다를 뿐 우리 사회에서 갖고 있는 문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작품을 서술하는 방식 또한 낯설지 않아 좋았다. 이 책을 처음 읽을 때에는 작가도, 작품도 생소한 것이기에 큰 기대 없이 읽었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 뒤 설명을 보니 유네스코가 2016년에 조지아 문자와 조지의 국민 시인인 쇼타 루스타벨리가 쓴 서사시인 <호피를 두른 용사>를 인류무화유산을 선정했단다. 이 책은 쇼타 루스타벨리의 후예 작가 열 명이 쓴 현대 문학들을 모은 작품집으로서 우리말로는 처음 번역된단다. 이래저래 의미있는 작품인데다 재미도 보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