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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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6.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김영민

 

인간에게는 희망이 넘친다고, 자신의 선의는 확고하다고, 인생이 허무하지 않다고 해맑게 웃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인생은 허무하다. 허무는 인간 영혼의 피 냄새 같은 것이어서, 영혼이 있는 한 허무는 아무리 씻어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는다. 인간이 영혼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듯이, 인간은 인생의 허무와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인간의 선의 없이도, 희망 없이도, 의미 없이도, 시간을 조용히 흘려보낼 수 있는 상태를 꿈꾼다.’(p.10~11)

 

독서 모임 때문에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펼쳐 읽었습니다. 읽는데 초반부에 저 문장들을 만났습니다. 책을 읽다보면 느끼는데 문장을 읽으면서 어떤 인상들이 남습니다. 어떤 문장은 아무 인상도 없이 내 정신에서 흩어져 가고, 어떤 문장은 내 영혼에 스며들어 매력을 남기고, 또 어떤 문장은 참을 수 없는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인상을 남깁니다.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으면서 만난, 저 문장은 제게 매혹으로 다가왔습니다. 저 문장을 만난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 책이 저에게 좋은 경험으로 남으리라는 걸.

 

돈이 많으면 잘사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잘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잘사는 것은 다르다. 나는 잘생긴 것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진짜 잘생기기를 바라며, 건강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건강하기를 바라며, 지혜로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짜 지혜롭기를 바란다. 나는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살기를 바란다.’(p.292~293)

 

독서 모임에 나오신 분들도 이 책이 인상 깊었나 봅니다. 모임에 나온 분들이 서로 합의한 것도 없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에게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자발적으로 읽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모임의 흐름이 흘러 갔습니다. 자신이 인상 깊었던 구절을 읽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이끌어나가는 분들의 대화 속에서 저는 독서 모임의 빛을 본 것 같습니다. 책에게서 좋은 것을 보고 그것을 남들과 나누고자 할 때 생겨나는 대화에서 생겨나는 빛. 그렇게 모임에 참석한 우리들은 독서 모임의 시간을 찬란한 성좌의 빛처럼 빛내고 있었습니다.

 

목적 없는 삶을 바란다고 하면, 누워서 꿀 빨겠다는 말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큰 오해다. 쉬는 일도 쉽지 않은 것이 인생 아니던가. 소극적으로 쉬면 안 된다. 적극적으로 쉬어야 쉬어진다. 악착같이 쉬고 최선을 다해 설렁설렁 살아야 한다. 목적 없는 삶도 마찬가지다. 최선을 다해야 목적 없이 살 수 있다. 꼭 목적이 없어야만 한다는 건 아니다. 나는 목적도 없어도 되는 삶을 원한다. 나는 삶을 살고 싶지, 삶이란 과제를 수행하고 싶지 않으므로.’(p.291)

 

저자는 허무와 더불어 사는 삶을 주제로 산문집을 내겠다고 마음먹었고, 그에 관련된 생각의 편린을 다양한 지면에 발표하고 그 글들을 모아 이 책을 냈다고 합니다. 어쩌면 모임에 모인 우리는 허무와 더불어 사는 삶을 주제로 모인 글들을 보면서, 삶의 허무에 대항하는 어떤 몸부림을 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몸부림이 책을 읽는 독자의 삶과 겹쳐 보인 게 아닐까요. 겹쳐 보였기에 우리가 이 책과 공감했던 게 아닐까요. 공감했기에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좋았고, 좋았기에 독서 모임에 나와서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시간을 가진 게 아닐까요. 너무 좋은이라는 말을 많이 해서 거짓말 같겠지만(^^;;) 실제로 좋은 독서를 하고 좋은 경험을 하고 좋은 독서 모임 시간을 가졌기 때문에 좋은이라는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에 좋은 이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는 건 과장이라고 저는 생각하니까요. 어쨌든 좋았고, 좋아서 다음에도 좋은 독서 모임 시간 가지기를 기대해봅니다. , 어쩌면 이 모든 게 저자처럼, 허무에 대항하는 우리만의 방식이 아닐까요. 허무에 대항하는 우리만의 바식이 독서모임이라면, 우리는 삶의 허무에 대항하기 위해 독서 모임을 하고 또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허무에 대항하는 좋은 방식이니까요.

 

무릇 천지간의 사물은 각기 주인이 있소. 진정 나의 소유가 아니라면 터럭 하나라도 취해서는 아니 되오. 오직 강 위의 맑은 바람과 산 사이의 밝은 달은 귀가 취하면 소리가 되고, 눈이 마주하면 풍경이 되오, 그것들은 취하여도 금함이 없고 써도 다함이 없소. 이것이야말로 조물주의 무진장(고갈되지 않는 창고)이니, 나와 그대가 함께 즐길 바이외다.(부록인 소식의 <적벽부>중에서, p.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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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YDADDY 2023-01-29 10: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인생은 무상한 것이기에 세상의 많은 것이 아름답게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허무함으로 자신 안으로 침잠하기 보다는 올해 피는 꽃은 다시는 피지 않는다는 깨달음으로 아이의 눈으로 보듯 세상을 경이롭게 보는 것이 삶의 허무를 이겨내는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23-01-29 14:08   좋아요 2 | URL
참 좋은 말이네요 여기서도 또 무언가 얻어갑니다^^

DYDADDY 2023-01-29 14:32   좋아요 2 | URL
김영민 교수님의 책 담아갑니다. 저도 김교수님이 어떻게 허무를 대하는지 공부하겠습니다. ^^

짜라투스트라 2023-01-29 20:04   좋아요 1 | URL
^^
 
근본중송
나가르주나 지음, 이태승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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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5.근본중송-나가르주나

 

<1>

이미 간 것은 가는 것이 아니며 또 아직 가지 않은 것도 가는 것이 아니다. 이미 간 것과 아직 가지 않은 것 이외에 현재 가고 있다는 것도 가는 것이 아니다.

 

<2>

현재 가고 있는 것에 가는 것이 [있다]. [가는 것은] 현재 가고 있을 때에 [있는 것이지]. 이미 지나간 때나 아직 가지 않은 때에 [있는] 아니다. 실로 가는 것은 현재 가고 있을 때 가는 것이다.

(p.18~19)

 

<1>

만약 현재와 미래가 과거에 의존한다고 한다면, 현재와 미래는 과거의 시간 속에 존재하게 될 것이다.

 

<2>

현재와 미래가 과거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그[과거]에 의존해서 존재할 것인가.

 

<3>

더욱이 과거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그 양자[현재와 미래]는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현재와 미래의 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p.124~125)

 

머리가 혼란스럽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여기는 어디인가, 어디가 앞과 뒤인가... 혼란이 끊이지 않네요. 인도 대승불교 사상의 철학적 체계를 확립한 것으로 유명한 불교 사상가 나가르주나의 대표 저술인 <근본중송>을 읽은 후유증 탓입니다. 책을 펼쳐 읽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들만 가득하네요.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필사적으로 참아가며 꾸역꾸역 읽어가다 보니 머릿속에 혼란스러워 지네요. 저라는 존재가 과연 어디에 존재하는지, 내가 왜 이 책을 읽고 있는지, 이 책은 존재하는지, 아니 나라는 존재는 존재하는지, 세상은 존재하는지, 모든 게 혼돈 속에 빠져드네요. 읽다보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니라 말들의 흐름에 빠져서 제가 살아가는 세상도 잊고 저 자신도 잊고 모든 게 사라져가는 경험을 하게 되네요.

 

, 정신을 차려봅니다. 정신을 차려야지...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고... , 제가 도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거죠. 정신을 차려야지 하는데 혼돈은 쉽게 가시지 않네요. 어쩔 수 없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앉아서 글을 써봅니다. 뇌 속에 가득한 혼돈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읽은 책에 대해서 서평을 쓰면 혼돈이 사라지고 무언가 정리되지 않을까요. 그런데, 정리하려고 보니 뭘 정리해야할까요. 뭘 알아야 정리를 하지. 책을 분명히 읽었는데 알아낸 것도, 이해한 것도 없습니다. 알아낸 것도 없고 이해한 것도 없는데 무슨 정리를 하고 글을 씁니까. 하지만 언제나 해답은 있는 법. 알아낸 것도 없고, 이해한 것도 없다면 그 무지와 혼돈의 과정을 글로 쓰면 되죠. 생각해보니 무지와 혼돈의 과정을 어떻게 글로 쓸 수 있나요. 그 방법조차 혼란스럽네요.

 

무지와 혼돈이라도 조금은 알아야 쓸 수 있죠. 그런데 저는 아는 게 진짜 없는데요. 잠깐, 잠깐, 아는 거라도 정리를 해봅시다. 나가르주나는 연기설로 유명한 인물입니다. 나가르주나는 연기설이 부처님의 가르침이자 불교 교리의 근본이라 말합니다. 그러면 연기설이란 무엇인가. <근본중송>의 해설에 따르면 연기란 연으로 인해 생겨난다는 것으로, 무엇인가 생겨난다는 것은 어떠한 것을 연, 즉 조건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 무엇인가가 생겨나려면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어떤 원인이 있어야 하고, 그에 따라서 무엇인가가 생겨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원인과 결과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죠. 아니, 인과의 법칙이라고 하면 되지 왜 연기설이라고 하냐고 할 수 있는데, <근본중송>의 말을 따라가 보면 이 인과의 법칙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기설은 결코 단순한 게 아닙니다. 나가르주나는 연기를 여덟 가지의 부정, 즉 팔불로 서술하고 있는데, 저는 여기서부터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잘 몰라서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도 아닌. 이런 식의 논의가 이어지는데... 음 무슨 말인가요, 이게?

 

책의 해설에는 이어서 나가르주나가 연기의 개념과 대립되는 실체의 개념을 비판한다고 써 있습니다. 실체란 변하지 않고 항상 존재한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불교에서는 아트만에 해당하는 개념이라고 하네요. 실체, 자성, , 아트만, 푸드갈라, 본성 같은 단어들이 비슷한 개념에 속한다며 <근본중송>은 지속적으로 비판을 한다네요. , 비판하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뭘 어떻게 비판하는지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혼돈 속에서 <근본중송>을 통한 미지의 불교 지식 대륙 탐사는 끝났습니다. 이 탐사 쉽지 않네요. 불교 지식 대륙을 감싼 무지의 안개를 뚫기가 쉽지 않아 보이네요.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포기는 없습니다. 힘들어도, 쉽지 않아도 다른 서양철학 대륙 탐사나 동양철학 대륙 탐사 때처럼 계속해서 전진할 수밖에요. 계속 시도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게 저의 경험에서 얻은 방법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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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의 추락
스티브 포브스 외 지음, 방영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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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화폐의 추락-스티브 포브스, 네이선 루이스, 엘리자베스 에임스

 

책을 읽기 전에 저자들의 약력을 보다가 스티브 포브스라는 저자가 미국 공화당 대선후보에 나간 적이 있다는 글을 봤습니다. 그래서 혹시?’ 라는 생각을 했는데, 책을 읽어보니 역시나...’ 였습니다. 한때 미국 공화당의 정치적 흐름을 주도한 신자유주의 담론을 담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역시 그대로였습니다.

 

그런데 공화당 대선후보 출마 경험이라는 글자를 보니 갑자기 미국 공화당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원래라면 이 책의 장르대로 경제학 이야기를 해야겠지만 공화당 대선 후보라는 말에 꽂혀서 공화당의 정치적 흐름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가적으로 말하자면 어차피 아마추어이기 때문에 여기 나오는 글은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이고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밝혀드립니다.

 

우선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 공화당을 주도하고 있는 정치적인 흐름은 무엇일까요? 누가 뭐라고 해도 트럼피즘이 아닐까요? 도날드 트럼프가 주도하는 일종의 정치적 흐름을 나타내는 트럼피즘은 고립주의, 반세계화, 미국 우선주의, 백인우월주의 같은 정치적 행동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건 1990년대나 2000년대의 공화당과 차이가 느껴집니다. 1990년대 2000년대만 해도 미국 공화당을 주도한 정치적 흐름은 세계화와 자유 무역, 규제완화에 근거한 신자유주의였거든요. 이 신자유주의의 힘이 얼마나 강했던지 비슷한 시기에 집권한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 수상이나 미국 민주당의 클린턴 대통령도 당이 다르지만 비슷한 성향의 정책들을 쏟아냈습니다. 시대의 대세적 흐름을 거스를 수 없었던 거죠.

 

하지만 2007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이후로 세계를 주도하던 신자유주의의 흐름은 꺾이기 시작합니다. 토마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론>의 세계적 성공은 신자유주의의 흐름이 꺾였다는 걸 나타내는 상징적인 사건이죠. 신자유주의의 흐름이 꺾이기 시작한 이후로 어느 순간 트럼프라는 인물이 나타났고, 그는 당당하게 반세계화, 보호무역, 미국 우선주의를 입으로 외치며 공화당 지지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는 그림자로만 남아 있습니다. 트럼프는 신자유주의에서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부분만 씁니다. 신자유주의는 트럼피즘에 밀려 공화당의 주도적 흐름이 되지는 못한 상태이고요.

 

제가 왜 이야기를 했냐면 <화폐의 추락>이라는 책에서 과거의 신자유주의의 그림자를 봤기 때문입니다. 양적완화 같은 정책을 정부 규제로 말하면서 정부 규제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드러내고, 케인즈와 케인즈학파를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하이에크의 이론을 띄우고, 레이건을 영웅시하고. 과거에 이런 류의 책을 참 많이 봐서 익숙했는데 다시 이런 책을 오랜만에 보니 왠지 희미한 과거의 향수에 젖어드네요. 물론 이 책은 인플레이션을 경제의 가장 큰 문제로 보고 거기에 대한 대책으로 금본위제를 내세우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그 기저에 흐르고 있는 게 신자유주의 담론이라는 건 명확하거든요. 그래서 저에게 이 책은 신자유주의 담론을 설파하는 책의 흐름에 속한다고 여겨집니다.

 

다시 미국 공화당으로 돌아가봅시다. 다음 대선 때 트럼프는 당연히 출마할 겁니다. 트럼피즘을 외치며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들은 트럼프를 따를 것이고요. 공화당의 다른 유력한 대선 후보는 어떨가요? 2022년 중간선거 때 트럼프의 대항마로 떠오른 플로리다 주지사 론 드산티스를 한번 보죠. 사고치지 않는 트럼프로 통하는 론 드산티스는 사회주의를 혐오하는 쿠바계, 니카라과계, 베네수엘라계 같은 플로리다의 히스패닉들에게 강성한 정책들을 선보이며 큰 인기를 모았습니다. 동성애 입막음 법이나 깨어 있는 교육 금지법 같은 문화전쟁용 정책들을 통해서. 어쩌면 트럼프 못지 않은, 아니 강하면 강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스탠스를 가진 론 드산티스가 과거처럼 신자유주의를 자신의 주도적인 정치적 흐름으로 가져갈까요? 어떤 특정한 정책을 사용하거나 일종의 자세는 가질 수 있겠죠. 하지만 신자유주의를 자신의 주도적 정치적 흐름으로 사용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화폐의 몰락>의 저자들이 거품 물고 외치는 신자유주의가 지금의 미국 공화당의 정치적 흐름 속에서는 주도적이지 않을 거라는 말이죠. 마치 책의 저자들이 외치는 금본주의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처럼. 장강의 앞물결이 뒷물결에 흘러가는 것처럼 신자유주의도 흘러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흐름으로서. 그리고 책에서 들려오는 과거의 멜로디는 제 귓가에 20세기 클래식처럼 들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과거를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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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요정 2023-01-21 2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트럼프가 론 드산티스에게 여기까지만 하라고, 대선 출마 하지 말라면서 견제하던 게 생각납니다. <화폐의 추락>이 그런 내용이었군요.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남의 나라 정치는 엉망이어도 우리나라가 아니어서인지 재미있네요. 그런데 어떻게 금본위제로 돌아가죠? 제 짧은 지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데 책도 어려울 것 같아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짜라투스트라 2023-01-21 21:29   좋아요 1 | URL
이 책의 내용에 따른다면 인플레이션을 막는 가장 최고의 방법이 화폐 가치를 안정화 시키는 것인데, 그걸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금본위제라고 합니다. 지금 눈높이에 맞춰서 과거의 금본위제를 변형시켜서 쓰자고 하는데, 그게 과연 가능할지 의문이 들긴 하네요. ㅎㅎㅎ
 
안티고네
소포클레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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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안티고네-소포클레스

 

<안티고네>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미처 쓰지 못한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에 대한 서평을 떠올립니다. 저는 그 글에서 용감함에 대해서 쓰려고 했습니다. 제가 그 책을 읽으며 인상적이었던 게 책의 저자인 정희진의 용감함이었거든요. 정희진은 <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에서 용감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편입니다. 자신의 편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자신을 비판하거나 비난할 것임이 눈앞에 보임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밝혔죠. 생활인으로서 비판받거나 좋은 소리 듣지 못한 말은 하지 않는 게 몸에 배어 있는 저의 입장에서는 정희진의 용감함이 충격적이었고 인상 깊었습니다. 그래서 용감함을 주제로 서평을 쓰려고 했었죠.

 

<안티고네>에서도 저는 용감함을 봅니다. 원래 이 책은 헤겔이 말한 인간의 율법과 신의 율법 간의 갈등이라는 해석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가장 유명한 해석보다는 저만의 생각으로 용감함에 대해서 말해보려 합니다. <안티고네> 속 주인공 안티고네는 용감합니다. 테베의 왕 클레온이 왕의 권위를 이용해서 테베를 침공한 안티고네의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 말라고 명령했음에도 안티고네는 자신의 의지에 따라 오빠의 시신을 매장합니다. 분노한 클레온은 권위를 이용하여 그녀를 감금하죠. <안티고네>를 읽으신 분들은 알지만, 여기서 안티고네는 당당하게 클레온을 비판하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죠.

 

안티고네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며 근거로 삼는 건 이어져 내려온 관습,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도리 같은 것입니다. 헤겔의 신의 율법이라 말한 것들이죠. 그에 비해 클레온은 자신의 권위와 공동체의 율법을 내세우며 안티고네와 대립합니다. 오빠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를 해야한다는 안티고네와 왕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내세운 클레온의 대립. 이 중에 누구의 손을 들어주어야 할지는 사람마다 생각하는 것이 다를 겁니다. 다만 제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안티고네의 용기입니다. 두눈 시퍼렇게 뜬 왕의 권위가 있음에도, 왕이 지키지 않을 시에 폭력을 행사하겠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안티고네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주장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며, 행위의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해도.

 

그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저같이 평범하게 살아가는 이들은 하지 못하죠. 하지만 우리는 역사에서 그런 일들을 흔하지 않지만 종종 봅니다. 관동 대지진 이후에 유언비어 때문에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자 그것을 막아섰다 조선인들과 같이 맞아 죽은 소수의 일본인들, 히틀러를 암살하려다 실패한 본회퍼 목사, 나치에 저항하는 팸플릿을 썼다 목숨을 잃은 백장미단... 안티고네의 행동을 보며 그런 이들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세상의 다수가 폭력 앞에, 주류 권력의 힘과 권위 앞에 침묵 할 때 자신이 주장하는 바를 행하고 그에 따라 용감하게 행위의 결과를 맞이한 사람들. 저에게 안티고네는 문학 속 인물이지만 그들과 같은 인물로서 기억될 겁니다. 문학적인 사람들이지만 역사 속에 존재하는 이들과 같은 용감한 사람들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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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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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오이디푸스 왕-소포클레스

 

1.

미루고 미루다 또다시 앉아서 씁니다. 글을 쓰기 싫었지만 글을 쓸 수밖에 없어서 씁니다. 이쯤되면 운명이라고 생각해야 하겠죠. 운명이라고 생각한다면 쉽게 받아들이고, 글을 쓸 수 있겠죠. 그래, 운명이라고 생각하렵니다. 글을 쓰는 건, 책을 읽은 자의 운명이라고.

 

2.

운명이라는 말을 쓰다보니 <오이디푸스 왕>이 떠오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오이디푸스 왕>은 그리스 비극 중에서 운명의 힘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 같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 그리스 비극을 읽고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니 어떻게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어머니와 결혼하고, 자기 딸이 자기 동생이 되는 운명이 있을 수 있지? 문학 작품의 결말 중에서 이렇게 충격적인 작품이 존재했던가? 그 충격을 몸에 받아들인 저는 나중에 독서 모임 나가서 이 작품을 가지고 독서 토론을 할 때, 제가 받은 충격을 말로서 토해냅니다. 인류 최초의 막장 스토리, 막장 오브 막장, 막장계의 마스터, 한국의 막장 드라마는 따라오지 못하는 범접할 수 없는 막장계의 전설이라고. 오이디푸스 왕의 비극 앞에서 <스타워즈5:제국의 역습>에서 다스베이더가 루크 스카이워커에내 내뱉는 명대사 ‘I am your father.'는 힘을 잃고 스러져갑니다.

 

3.

그러나 시간은 언제나 힘이 강합니다. 처음에 가졌던 엔딩의 충격효과는 시간이 지나면서 사그라들고 이 작품을 저는 다른 시점으로 보게 됩니다. 어쩌면 이 작품은 추리극일 수 있다며. 추리극이라고? , 맞습니다. 탐정이 나오고 범인이 나오는 추리극. 이 작품을 어떻게 추리극으로 볼 수 있냐고요? 작품을 바라보면 추리극으로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오이디푸스 왕>은 테베에 들이닥친 역병의 원인을 테베의 왕인 오이디푸스가 찾으려 하면서 시작합니다. 원인을 찾는 오이디푸스에게 신탁은 전대 왕을 죽인 이가 도시에 있기 때문에 역병이 돈다고 알려줍니다. 오이디푸스는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 전대 왕을 죽인 인물을 찾으려 하죠. 여기서 추리극이 보이지 않나요. 전대 왕이라는 피해자가 있고, 피해자를 죽인 범인이 있고, 범인을 찾으려는 탐정역할의 오이디푸스가 있죠. 오이디푸스는 정말 최선을 다해 범인을 찾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범인이 자기 자신이라는 게 드러나죠.^^ 추리극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이 작품은 결론부에 범인과 탐정을 일치시켜 버리며 추리극의 공식을 파괴해버립니다.

 

4.

추리극적인 요소도 그렇지만 저를 놀라게 한 건 오이디푸스의 성실함입니다. 그는 진실을 추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 진실의 끝에 자신의 파멸이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자신의 파멸을 앞당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말입니다. 이 비극적인 아이러니와 역설이 <오이디푸스 왕>의 묘미인 것 같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인들은 이 비극성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도 운명의 무시무시한 힘을 실감하며 종교적이고 제의적인 느낌을 실감하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현대인들에게 <오이디푸스 왕>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인들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겁니다. 저에게는 운명의 힘 보다는 운명이 닥침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점과 파멸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이 비극은 인간의 품격을 보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고대와 현대를 넘어선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의 품격과 엄정함을 보여주는 작품. 제게 <오이디푸스>는 계속해서 그런 작품으로 남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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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3-01-15 19: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생각해보면 햄릿도 아버지를 암살한 숙부를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혼자 고민하고, 최선을 다해 복수를 위한 빌드업을 짜죠. 복수가 달성하는 순간 자신도 파국을 맞이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요. ^^

짜라투스트라 2023-01-15 21:26   좋아요 0 | URL
아, 햄릿을 너무 오래 전에 읽어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 햄릿이 그렇군요. ㅎㅎㅎ

기억의집 2023-01-15 22: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해석 흥미롭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23-01-15 22:5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2023-01-21 2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1-21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