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시선 - 당대편 107 중국시인총서(문이재) 107
김민나 엮음 / 문이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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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시선-이하

 

아름다움은 하나의 뜻으로만 존재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쉽게 정의되는 개념일까요? 저는 이 질문에 대해 ‘아름다움은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고 대답하렵니다. 백치미가 있으면 지성미가 있고, 퇴폐미와 관능미가 있다면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듯이, 세상에는 수 없이 많은 아름다움이 서로와 서로의 존재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으니까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아름다움이란 때로는 비슷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각자마다 다른 것처럼. 이건 아름다움이 인간 모두에게 공통적일수도 있지만, 각자 개개인마다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일 겁니다. 동시에 이건 아름다움이란 세상에서 일어나는 각각의 상황 속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아름다움에도 보편적인 공통성과 개별적인 편재성이 공존하고 있는 거죠. 그래서 아름다움은 쉽게 정의내릴 수도 없고, 쉽게 정의해서는 안됩니다. 만약에 누군가가 ‘아름다움이란 이런 것이야’라고 외치면서 아름다움의 정의를 못박아 버리고 있다면 그건 일종의 실수이자 오만일 겁니다. 하지만 인간은 실수를 반복하는 어리석은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라서 계속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들이 인간의 삶을 아름답고 풍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아름다움을 정의한다’는 불가능에 가닿으려는 지속적인 시도가 그 시도 자체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과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우리들의 삶을 아름답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전제가 하나 있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 내리기를 넘어서서 자신이 만든 아름다움의 정의만이 옳다는 생각을 누군가가 하고 있다면 그건 삶을 아름답게 하지 않습니다. 그건 아름다움의 영역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가장한 폭력의 영역이니까요. 혹시라도 다음에 이에 대해 얘기할 기회가 있다면 애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글에서 거기까지 얘기하려면 너무 복잡하니까요.^^;;)

 

그렇게 본다면 시인이란 지독히도 어리석은 존재입니다.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의 아름다움을 지속적으로 표현하며,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는 존재니까요. 시를 쓴다는 행위를 통해서 자신도 모르게 ‘아름다움을 정의한다’는 불가능한 행위를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존재니까요. 그런데 앞에서 얘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어리석음이, 이 불가능에 가닿으려는 무모한 시도가 시인을 아름답게 만듭니다. 쉽게 정의내릴 수 없기 때문에 아예 아름다움을 정의내리지 않고 아름다움을 표현하지 않는다면 세상이 얼마나 삭막하고 어두울까를 생각해본다면 이 시인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지 깨달을 수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세상을 아름답게 살찌우는 존재인 겁니다.

 

중국문학사에도 이처럼 어리석은 숙명을 안고 살아가는 시인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어리석은 숙명으로 중국 문학사를 아름답게 빛내며 중국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했습니다. 그 중에 이하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이제서야 겨우 이하 얘기를 하게 되네요.^^;;) 그는 중국문학사에서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세계를 구축했던 인물로서, 17세에 이미 동시대 대문호 한유의 인정을 받으면서 이름을 날리지만 그것 때문에 경쟁하는 이들에게 미움받고 그들의 계략에 의해 과거를 치르지도 못하고 떨어져버렸고, 그때의 좌절과 울분과 슬픔을 시를 쓰며 달래다가 27세에 요절한 천재시인입니다. 죽을 당시에는 시인으로서 큰 명성을 얻지는 못했지만 후대에 그의 독창적인 시세계가 알려져 중국문학사의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각광받게 되죠. 앞에서 간략하게 적은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알겠지만, 이하는 시를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실의 울분과 슬픔을 달래는 도구로서 시를 썼고, 그 외의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때도 시를 썼는데, 쓰고 보니 시를 쓰는 게 삶이 되고, 삶이 되다 보니 계속해서 시를 쓸 수밖에 없었던 거죠. 이 시 쓰기의 무한 연쇄 고리에 갇혀서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운명을 살았던 이가 이하라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그의 삵을 구속했던 시 쓰기의 무한 연쇄 고리는 그라는 인물을 중국문학사에 빛나는 시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건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위해서 시를 썼다는 개별적 진실이 중국문학사에 다시 없는 독창적인 시 세계를 만들고 그것이 중국문학사에 돋보이게 되었다는 보편성과 만나서 빚어진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하는 자기가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고 자신의 삶을 산 것인데 그게 동시대를 뛰어넘은 하나의 사건이 된 거죠. 그러니 이하에게 시를 쓰는 시인으로서의 삶은 필연적인 것이자 운명적인 것으로서 자신이 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필연적이자 운명적인 삶의 동력으로서의 시 쓰기. 이하의 앞에 놓인 시인으로서의 운명은 그를 아름다운 시인으로 만들고, 중국문학을 아름답게 합니다.

 

이쯤 했으면 시인 이하에 대해서 어느 정도 얘기한 것 같구요, 이제는 이하의 시에 대해서 얘기해보겠습니다. (아, 아직도 글이 끝나지 않아 글을 쓰고 있는 저도 당혹스럽군요. 이것도 운명인 걸까요? ^^;;;) 이하는 중국문학사의 시인 중에 어느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귀신들에 대한 시를 써서 ‘귀재’라고 불립니다. 그는 마치 귀신이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귀신들의 모습을 그리면서도 그것을 아름답게 형상화하는 오묘한 경지를 구사하는데요, 이건 신선세계에 대한 동경과 세상을 벗어나고픈 초월적인 욕망에 대한 시들이 넘쳐나는데도 불구하고 귀신에 대한 시는 없었던 중국문학사의 센세이셔널한 일대 사건입니다. 거기에 귀신을 위시한 자신의 상상력을 생생하게 구사해내는 언어 능력과 강렬한 색채 감각, 누구도 쓰지 않는 독창적인 어휘 구사를 더하면 왜 이하가 중국문학사에서 유일한 시인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는 자기 자신과 자신의 삶을 위한 시를 쓰면서 오직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시를 쓴 겁니다. 삶의 각인이 길이길이 남을 역사와 문학의 각인이 된 셈이죠.

 

저 자신은 이하의 시를 보며 귀기스러운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귀기스러운 아름다움이라는 말이 이상한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분명히 귀신이 등장하고 분위가가 음산하고 귀기스러운데도 불구하고 아름다우니 귀기스러운 아름다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죠. 절대로 섞이지 않을 것 같은 귀기스러움과 아름다움이 섞여서 만들어내는 묘한 아름다움. 이하의 미학은 미국의 에드거 앨런 포와 비슷한 것 같지만, 그보다는 동양적인 문화에 가깝고, 더욱 더 아름다운 지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에드거 앨런 포는 이하보다 훨씬 더 끔직하고 공포스러우며 잔혹한 시와 소설을 썼습니다.) 귀신을 다룬 시 말고 다른 시들을 살펴봐도 이하의 시는 화려하며 현란합니다. 이건 화려하고 현란하기보다는 부드럽게 이미지를 통해서 정서를 드러내는 전통을 가진 중국 문학에서 이하가 얼마나 튀는 존재인지 보여줍니다.(물론 이건 중국문학에서 그렇다는 애기입니다. 서양의 시들과 비교하면 이하는 굉장히 얌전한 편입니다.) 시선이라고 불리며 중국문학사에서 예외적인 존재로 불리는 이백도 독창성에서는 이하의 시에서 밀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드디어 이 글의 끝이 다가왔습니다.(글을 쓰고 있는 제가 제일 기쁩니다.^^) 사실 저는 <이하 시선>을 읽으며 얼굴에 ‘씨익’하고 미소를 지었습니다. 이하라는 새로운 시인과 그의 색다른 시들을 만났다는 기쁨과 더불어 귀기스러운 아름다움이라는 유일무이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만난 즐거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왔습니다. 이래서 독서를 계속하나 봅니다. 우연히 새로운 것을 알게 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아름다움도 만날 수 있으니까요.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누가 말했지만 하늘 아래 모든 것들을 인간이 접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인간은 어쩌면 계속해서 새로운 것들을,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날 수도 있을 겁니다. 인간 존재의 한계, 인간 경험과 인식과 지각의 한계가 계속해서 새로움과의 조우를 초래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하의 시를 만난 것처럼 또다른 아름다움을 찾아서 계속 독서를 해야겠습니다.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만날 수 없고, 아름다움을 정의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걸 알지만 한번 그것에 빠져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거죠. 시인들이 계속해서 불가능에 도전하며 시를 쓰는 것처럼 저도 그 어리석은 운명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해도 아름다움에 빠진 자들에게는 어쩔 수밖에 없는 일이죠. 그럼 이제 다시 새로운 아름다움을 찾아서 떠나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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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응물시선 - 당대편 106 중국시인총서(문이재) 106
권호종 지음 / 문이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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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응물 시선-위응물

 

노자는 <도덕경>에서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은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며, 모든 것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으며 항상 낮은 데로 임하는 물의 덕(德)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위응물의 시들을 읽으며 이 말이 떠오르더군요. 시가 인위적이거나 화려하거나 날카롭거나 하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러웠기 때문일 겁니다. 사물을 표현할 때도, 인간의 모습을 그리거나 삶을 형상화할 때도, 그것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낼 때도 위응물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담담한 언어로서 시를 썼습니다. 마치 원래부터 그러했다는 듯이, 자연의 이치로서 그렇게 되었다는 듯이.

 

그의 시는 흘러가는 물이 자연과 인간의 삶을 흘러가서 시인의 붓끝으로 스며들어 그것이 다시 한편의 시가 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그의 시를 읽다가 시 속에 스며있던 물이 제 마음으로 흘러드는 것을 느꼈거든요. 어쩌면 그건 저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로 위응물의 시는 자연스러웠고 부드러웠습니다. 그건 세상을 초월한 신선 같은 이백의 시들도, 민중의 고단하고 슬픈 삶을 표현한 두보의 시들도, 세상을 벗어난 은둔자의 정서를 드러낸 왕유의 시들도, 요절했지만 자신만의 독창적이고 귀기로운 세계를 창조해서 화려하게 표현했던 이하의 시들도, 미치지 못한 위응물 자신만의 독창적인 경지였습니다. 안사의 난 이후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중당 시기의 삶을 살며 현실을 벗어나고픈 욕망과 현실적인 욕망 사이에서 흔들렸던 위응물은 자신의 그런 욕망을 그저 덤덤하게 시로서 그려나갈 뿐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현실을 벗어나고픈 욕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지속적으로 관직에 나갔고, 그 때문에 현실의 욕망과 현실을 벗어나고픈 욕망 사이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인간의 욕망을 구현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평범한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욕망과 현실을 벗어나고픈 욕망 사이의 갈등을 그 자신이 자연스럽게 가질 수밖에 없었기에 그 자신의 시가 자연스러움을 획득했다는 말입니다.

 

세상을 벗어나고 싶을 때는 벗어나고 싶음을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신의 정서와 느낌을 표현하고 싶을 때에는 또 그때의 상황에 맞춰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현실을 살면서 보이는 현실의 모순과 잘못을 비판하고 싶을 때에는 또 그에 맞게 표현하는 것. 이것이 위응물 시의 자연스러움입니다. 언제 어떤 때라도 그는 능히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는 식으로, 그것이 지극히 자연스럽다는 식으로 시를 써내려 갑니다. 한쪽 발은 현실에 두고, 한쪽 발은 현실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에 두고, 양발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적인 자연스러움의 표출로서의 시. 이것이 위응물 시의 ‘자연스럽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일 겁니다. 그러니 그의 시가 물같다고 느껴질 수밖에요. 그의 시가 저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너무나 자연스럽고 능청스럽게 대리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죠.

 

이 시를 읽기 전에는 몰랐는데, 읽고 나서 보니 위응물의 시가 가끔 너무도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마음 속의 자기 자신을 숨기고 살아가는 게 힘들고 고단할 때, 삶에 치여 나 자신의 자연스런 욕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다가 그것이 생각날 때, 그의 시가 떠오를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의 시가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나 자신의 자연스려운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 같다는 말이자 잃어버린 자연스러운 나 자신을 되찾게 해주는 시원한 물같다는 얘기입니다. 물처럼 그의 시를 가끔 마시며 저 자신을 되찾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은 좋습니다. 독서가 가져다주는 이런 행복은 하나의 독서행위가 가져다주는 행복이겠죠. 아니 어쩌면 그 행복은 오래 전에 살다간 사람이 미래의 사람들에게 남긴 ‘오래된 미래’로서의 선물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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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별을 먹자 - 일본 세계숨은시인선 4
나나오 사카키 지음, 한성례 옮김 / 문학의숲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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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별을 먹자 - 나나오 사카키

 

 

1.

순수하고 열정적인 시들을 좋아한다. 신선 같은 품격을 풍기며 아이 같은 동심의 세계와 이 세상을 넘어선 초월의 세계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게 해주는 이백의 한시와, 순수한 열정과 세상과 인간에 대한 믿음으로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의 이상을 가열차게 노래하는 월트 휘트먼의 시와, 평범한 일상의 삶을 소재로 삼아 순수하고 아이같은 삶의 면모를 노래하는 프랑시스 잠의 시와, 극도의 불운하고 슬픈 삶을 살았지만 일상의 평범한 사물과 삶을 통해서 삶의 풍경을 슬프지만 즐겁게 만드는 힘을 간직한 고바야시 잇사의 하이쿠 같은.

 

 

이제 여기에 또 한명의 시인을 추가해야 겠다. 나나오 사카키. 우리 별을 먹자고 외쳤고, 죽을 때까지 전세계를 무소유로 돌아다니며 배낭 하나를 유품으로 남겼으며, 지구와 지구의 자연과 지구의 자연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을 너무도 사랑했기에 그 사랑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인간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들과 그 생명들이 포함된 지구와 지구를 포함하는 모든 별들이 포함된 우주가 하나라는 사실을 절절히 깨달아서 그 하나됨을 삶으로서 표현했으며, 전쟁과 살육과 폭력과 환경 파괴로 얼룩진 현대 문명을 풍자하지 않고는 버티지 못해서 그 감정을 시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표출한, 시가 삶이 되고 삶이 시가 되는, 자유인이자 방랑자이자 무소유의 철학자이자 실천가이자 전 세계를 고향으로 삼은 유목민이자 자연인인 시인.

 

 

2.

그의 시를 읽었다. 정확하게 읽었다는 표현보다는 만났다는 표현이 옳겠다. 삶과 시가 하나가 되는 시인이 ‘걷기의 신’인 발바닥 따라서 걸어다니며 움직인 삶에서 흘러나온 것들을 노래라는 흔적으로 남겼고, 나는 거기에 운좋게 발을 내디뎠기 때문이다.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아무런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운명의 힘 앞에서 나는 무기력하게 무너져 내렸다. 내게 남은 것은 그의 시를 읽고, 그의 삶을 맛보고 느끼며, 그의 삶과 시에서 흘러나오는 에너지를 받아들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했다. 그와 같이 우리 별을 먹었고, 그와 같이 걸어다녔고, 그와 같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사고하고 상상했으며, 그와 같이 자연을 집이자 벗이자 연인으로 삼았으며, 그와 같이 자연의 아픔을 공감하며 아파했으며, 그와 같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문명사회의 모순적인 면모를 풍자하고, 그와 같이 숲에 살며 자아와 자연의 부자가 되었고, 그와 같이 세상을 세상 그 자체로 느끼려 했다.

 

 

자연과 세상과의 하나됨이 불가능 현대라는 시대에 이런 경험은 그 자체가 기적이고 경이다. 아니, 그것은 선물이었다. 인간으로서의 삶은 끝났지만 자연에서의 삶은 지속되고 있는 한 시인이 후대에게 보낸 선물. 평가하거나 분석하려고만 하는 사람은 느낄 수 없는 마음과 마음, 삶과 삶을 교감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마음과 삶의 선물.

 

 

3.

어느새 시인은 나에게 너가 되어 있었다. 불특정 다수의 타인이 아니라 내 곁에 서 있는, 나와 함께 하는 너. 당신이 아닌 ‘너’라는 의미 속에, 내가 시를 읽으며 느꼈던 행복과 즐거움과 사랑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서 외쳐본다. 너라는 존재가 된 시인이여, 살아줘서, 시를 남겨줘서, 그것을 내게 가닿게 해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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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 펭귄클래식 9
생 텍쥐페리 지음, 윌리엄 리스 해설, 허희정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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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대지-생텍쥐페리

 

우리는 모두 대지의 자식이다. 대지의 자식이자 흙의 자식인 우리는 흙에서 태어나 흙의 결집체인 대지로 흘러들어가 생을 마감하게 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대지에 묶여 있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대지를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그 발버둥이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다. 대지를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하늘을 꿈꾸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몸짓이, 하늘을 넘어 우주를 꿈꾸고 우주로 향하는 행동이, 단지 대지에 흘러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 때문에 무의미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행동들은, 그 몸부림들은, 그 몸짓들은, 대지로 흘러들어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숙명 때문에 더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룰 수 없는 지평으로의 발돋움은 우리 삶의 시선을 확장시키고,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지속적으로 대지를 벗어나려는, 불가능하지만 유의미한 행동을 이어나간다. 인간의 역사에는 그런 행동들이 무수히 아로새겨져 있다.

 

 

대지는 우리 자신에 대해 세상의 모든 책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이는 대지가 우리에게 저항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장애물과 겨룰 때 비로소 자신을 발견한다.(p.9)

그러나 때때로 대지에서 태어났지만, 대지에 어울리지 않는 존재들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은 분명히 대지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대지의 자식에 어울리기 보다는 대지를 벗어난 곳들에 어울리는 존재들이다. 존재의 근원이 다른 곳에 있는 듯, 그들은 끊임없이 대지를 벗어나 자신의 존재에 어울리는 곳으로 나아간다. 생텍쥐페리. 그도 대지에서 태어났지만 대지의 자식에 어울리기 보다는 다른 곳에 어울리는 존재였다. 그는 하늘을 꿈꾸며 계속해서 하늘을 날아다녔고, 지속적으로 하늘을 묘사하고, 하늘에 관련된 삶에 대해서 글을 써나가면서 자신이 하늘에 어울리는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하늘의 자식 생텍쥐페리. 하지만 역설적으로 하늘의 자식 생텍쥐페리는 하늘을 날면서 하늘뿐만 아니라 대지도 끊임없이 바라봤다. 하늘의 자식으로 하늘을 날 수밖에 없지만, 대지의 삶이라는 중력에 이끌리는 역동적이고 모순적인 그의 삶. <인간의 대지>는 생텍쥐페리의 그 모순적인 삶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기록이다.

 

 

생텍쥐페리는 하늘을 날아야 한다는 자신의 숙명을 따라서 비행사가 되어 하늘을 난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끊임없이 대지를 바라본다. 그의 눈 아래에 펼쳐진 대지. 아름답고, 순수하고, 장엄하고, 놀랍고, 위험하고, 신비하고, 이상하고, 숭고한 대지. 벗어나고 싶지만 결코 벗어날 수 없고, 인간을 묶어두면서도 벗어나려는 몸부림을 용인하는 넓고 넓은 대지. 그에게 그 대지는 그저 그런 대지였지만 또한 인간의 대지였다. 그 자신이 살아가는 대지이자 그 자신이 바라보는 대지이자 그 자신을 얽어매는 대지이자 벗어나고 싶은 대지이자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대지. 인간의 대지는 그에게 감옥이자 낙원이었고, 유배지이자 은신처였다. 저주이자 축복인 대지에서의 삶을 극복하고자 선택한 하늘에서의 삶도, 대지에서의 삶의 모순적인 역동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생텍쥐페리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 날고, 날고, 날고, 또 날았다. 그리고 그 삶을 쓰고, 쓰고, 쓰고, 또 썼다.

 

 

대지에 저항하면서 끊임없이 대지를 바라보는 비행사의 삶을 살면서 보고 듣고 겪고 느낀 것들에 대한 기록이자 그런 삶의 총체적 발자취로서의 글인 <인간의 대지>는 서정적인 철학의 대지이자 성찰적인 아름다움의 하늘이 펼쳐진 책이었다. 비행을 하면서 직접적으로 생과 사를 경계를 넘나들고,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동료들과 살면서 그들의 감정을 공유하고, 생과 사를 넘나드는 것이 삶이 된 남자의 삶은 당연하게도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삶의 철학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서정적인 글이 되어 표현된다. 그것은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삶의 모습이자 현재라는 고정된 시간을 벗어나서 바라보는 삶의 모습이었다. 그건 아름답지만 깨달음을 주는 서정적인 아름다움의 충격이었다.

 

가장 위대한 것에 의해서도 제약받지 않으며 가장 작은 것에 의해서도 포용되는 것, 그것이 신적인 것이다.(p.7)

나도 대지를 벗어나고 싶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대지로 상징되는 삶의 중력에서 벗어나고 싶다. 그러나 삶은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는다. 삶의 관성에 찌들어갈수록 삶에 익숙해지고 익숙해질수록 벗어나지 못하는 삶의 닫힌 순환. 여기서 맴돌다 참을 수 없을 때 <인간의 대지>를 펼쳐든다. 책 구절구절, 구석구석 마다 삶의 닫힌 순환을 깨부수는 힘이 스며 있어 그것이 마음으로 파고들어 삶의 활력이 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대지>가 삶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는 점이다. 벗어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벗어남과 더불어 되돌아감도 감내해야 한다는 것. 이 삶의 지혜를 절절히 전해주는 <인간의 대지>를 읽다보면 삶의 중력이란 삶에서 벗어나는 것과 돌아오는 것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책을 덮으면 내가 다시 나의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그 무섭지만 친근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느새 책은 마지막 페이지를 향하고 있다. 책을 덮으며 나는 ‘인간의 대지’를 떠나 ‘나의 대지’로 돌아간다. 그런데 문득 또다른 깨달음이 떠오른다. <인간의 대지>를 읽는 것이 나만의 비행이라는 깨달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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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 -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는 마음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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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닉-배명훈

 

2013년의 새해가 밝았다. 극심한 정신적인 충격에도 불구하고 힘을 내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인지 새해가 전혀 새해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가고 있음을, 전과 다름없음을, 증명하는 건 내가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전과 다름없이 계속해서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나는 내가 살아 있음을, 새해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책들은 스티븐 킹의 <11/22/63 1>과 헤르만 헤세의 <황야의 이리>, 배명훈의 <은닉>,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 횔덜린의 <휘페리온>이다. 이 중에서 <황야의 이리>, <인간의 대지>, <휘페리온>, <11/22/63 1>은 나중에서 다시 글을 쓰기로 하고 먼저 <은닉>에 대해 말해보겠다.

 

배명훈의 장편 SF 소설 <은닉>은 거짓이 가득한 세상을 작가 자신이 과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SF적으로 형상화한 소설이다. 거짓이 가득해서 진실을 뒤덮고, 거짓이 또다른 거짓에게 자리를 물려주며, 거짓이 진실의 자리를 꿰차는, 이 정보 과포화 사회의 모습을, 자신의 모습을 은닉하며 거짓을 통해서 상대방을 이용하는 이들의 얘기인 것처럼 우리에게 전달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의 인생의 의미인 한 여자를 지키려는 킬러와 자신의 모든 것을 은닉하고 숨어 살면서 의중의 계획을 숨기고 있는 여자와 킬러를 사랑해서 모든 것을 걸고 킬러를 돕지만 역시 진실을 은닉하고 있는 킬러의 동성친구, 그리고 역시 자신의 진짜 계획을 은닉한 채 이들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다툼을 벌이는 세력들의 이야기인 이 소설은 기술은 발달했지만 인간적인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현대 사회의 앙상한 몰골을 드러낸다. 발달된 과학기술을 과거와 달라지지 않은 인간 본연의 권력욕과 지배욕을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현대 사회의 모순적인 모습이 세 사람의 슬픈 이야기 속에 드러나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는가’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과거와 인간적이 본질이 거의 차이가 없는 현재가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라면 , 우리가 가야하는 미래는 어떤 것일까 하는 질문. 우리는 과연 달라질 수 없는가 하는 질문. 이 질문은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뇌리를 맴돌고 있었다.

 

또 하나 생각해야 할 점은 작가가 이 소설에서 과학적 상상력을 발휘해서 악마를 형상화했다는 점이다. 이미 <신의 궤도>에서 특유의 기발한 상상력으로 신을 SF적으로 형상화했던 작가는 이 작품에서 악마의 SF적 형상화에 도전한다. 그 도전의 끝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건, 현대의 발달된 기술과 정보의 집약체인 창조물과 인간의 유전자에 내재한 본성과 만나서 빚어진 악마의 모습이었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과 그것을 이용해서 얻은 정보가 집약되어 만들어진 창조물과 인간의 유전자에 숨겨져 있던 본능이 만나서 빚어진 악마의 모습은,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권력의지 그 자체였다. <은닉>에서 말하는 악마란 순수한 지배욕과 권력욕 덩어리인 것이다. 작가는 니체가 언급했던 권력의지의 순수한 구현에서 악마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여기에서 덧붙여 생각해야 할 사실은 그 악마의 모습이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모두 악마가 될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소설에서 이 모든 애기들은 문학이라는 샘으로 모여든다. 거짓과 진실, 은닉, 현대 사회의 앙상한 몰골, 악마, 권력의지 같은 것들은 문학이라는 샘으로 모여들어 용해되어서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삶으로 형상화된다. 거기에서 진짜 중요한 것은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인간들의 삶이고 그 삶에서 생생히 빛을 발하고 있는 만남과 이별, 진실한 사랑과 희생 같은, 너무도 낡고 낡았지만 여전히 인간과 인간의 삶에서 보물같은 소중한 인간적인 가치였다. 결국 거짓과 진실이 어떻고, 은닉이 어떻고, 현대 사회의 앙상한 몰골이 어떻고, 악마와 권력의지가 어떻고를 떠나서 작가는 아직도 빛이 바래지 않은 인간적인 가치들을 말하고 있다. 과거와 인간적인 본질이 거의 차이가 없는 현재가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라고 해도 우리 곁에는 우리를 빛나게 할 수 있는 인간적인 가치들이 있기에 그것에 희망을 걸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서 나는 희망을 본다. 절망을 은닉하고, 희망을 바라보고 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얻는 것이다. 살면서 절망을 맞본다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 이 절망과 희망의 변주곡을 삶으로서 받아들이고 죽을 때까지 희망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 사실 그건 멍청하고 바보스러운 삶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삶을 살아가겠다. 그게 내가 선택한 삶이고 인생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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