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안칠자 시선 지만지 고전선집 638
공융 외 지음, 문승용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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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안칠자 시선-공융 외

 

‘문을 나서니 보이는 건 없고

백골이 들판에 가득하다.

길에 굶주린 부인네가 있는데

안고 있던 아이를 풀숲에다 버린다. ...

“내 몸 죽을 곳을 모르는데

어찌 둘 다 살아갈 수 있겠어요.“(p.37~38, 왕찬의 「칠애시」 중에서)

 

한국에서 필독서라 일컬어지는 <삼국지>의 불편한 진실은, 그것이 끊임없는 전란과 폭력의 현실 속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뛰어난 지략을 구사하는 책사들과 놀라운 무예를 선보이는 장군들과 기상천외한 전략, 전술이 빚어낸 전투의 모습에 현혹되어 책을 따라가지만, 정작 그 시대를 살아간 평범한 민중들의 삶이란 현란함이나 재미있음과는 거리가 먼 참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평원에 널려 있는 백골들, 살기 위해 아이를 버리는 어머니, 굶어 죽어 가는 사람들, 죽지 않기 위해 버러지같이 살아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어 가는 사람들, 전쟁터에 널린 시체, 죽지는 않았지만 부상당해 큰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 이들의 모습 어디에서도 재미나 전투와 폭력의 미학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건 그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처절하게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 뿐.

 

<건안칠자 시선>을 읽는 건 <삼국지>의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는 것에 다름아니다. 역사적으로 한나라의 마지막 황제 헌제의 연호로 쓰인 건안은, 중국 문학사에서 바라보면 한나라 말부터 위나라를 세운 조비의 황초 연간까지를 가리킨다. 건안칠자는 문학사적인 의미의 건안 시기에 문학적으로 맹활약한 일곱 명의 문인을 가리킨다. 공융, 왕찬, 진림, 유정, 서간, 완우, 응찬의 일곱 명이 건안칠자인데, 이들은 공통적으로 어지러웠던 한 나라 말에는 시대의 혼란과 모순을 드러내고, 그것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자신의 힘겹고 불운한 삶의 울분을 강건하게 토로하지만, 조조에게 발탁되어 관직을 하면서부터는 조조와 조비 부자를 찬양하고, 자신의 공명심과 일상을 노래하는 것에 그친다.(조조에 저항하다 죽음을 맞은 공융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여섯 명은 이 틀에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여기에서 삼국지의 불편한 진실이 드러나는데, 건안칠자의 초기 시에서는 <삼국지>가 이야기하지 않는 참혹한 진실의 일면을 보여주고, 후기 시에서는 민중의 삶에 상관없이 권력에 빌붙어서 자신의 이득만을 챙기는 지식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알려준다. 특히 건안칠자들의 후기 시는 단순히 그 시대적 삶의 불편한 진실을 넘어서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진실을 알려준다. 권력의 맛에 길들여진 이들의 삶이란 그 시대와 지금이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시가 아름다움의 언어적 표현인 것은 맞다. 그러나 동시에 시는 시대적 삶의 진실을 알려주는 아우성의 역할도 한다. 버림받고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인내하며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목소리로서의 아우성. 또 시는 어두운 삶의 일면을 보여주며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역할도 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 삶인가? 나는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같은 질문으로서의 시. 다양한 삶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는 한 시대의 삶이란게 얼마나 다면적이고 다층적일 수 있는지 알리며 한 시대의 초상을 완성해나간다. 나에게 <건안칠자 시선>을 읽는다는 것은, 책을 기계적으로 읽다보면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 그 한 시대의 다면적 초상으로서 삶을 다시 만나는 소중한 경험의 시간이었다. 그건 필독서 <삼국지>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건안칠자 시선>을 읽고, <삼국지>에 <건안칠자 시선>을 덧붙여야 겠다는 뜬금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이 <삼국지>가 말하지 않는 것을 알려 주면서 <삼국지>를 단순한 ‘삼국지연의’가 아니라 ‘진짜 삼국지 시대’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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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민음사 세계시인선 25
T.S.엘리어트 지음, 황동규 옮김 / 민음사 / 197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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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무지- T. S. 엘리엇

나는 책을 사랑한다. 이 사랑은 내가 읽었던 책들과 읽고 있는 책과 앞으로 읽을 책 모두를 포함한다. 나에게 있어 책에 대한 사랑은 불평등이 없는 공평하고 공정한 사랑이다. 그러나 때로는 나의 사랑에 위기가 찾아온다. 읽어도 이해하기 어렵거나 쉽게 공감이 가지 않는 책들, 지독한 편견에 물들어 있는 책들, 자신만의 주장이 옳다는 책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책들을 읽을 때는 사랑의 감정이 시들어버린다. 그럴 때 나는 책과의 지독한 대화를 시도한다. 책들의 주장의 문제점을 파고들어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것이 옳지 않다는 사실을 얘기하며, 책에 대한 나름의 개선방안을 요구한다. 물론 언제나 내가 지적만 하는 것은 아니다. 책들이, 책의 내용들이 나의 마음을 울리고 나의 영혼을 파고든다면 나는 그 울림과 균열에 따라 나 자신을 반성하고 바꿔나가려고 노력한다. 책을 쓴 저자와의 내적이고 긴밀한 영혼의 대화. 이 소리 없는 아우성은 내 사랑의 위기를 극복하게 돕는다.

 

엘리엇의 『황무지』를 읽었을 때도 내 사랑에 위기가 찾아왔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시인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이 시는 내게 무엇을 속삭이고 있는가? 그러니까 모든 질문을 종합해보면 ‘도대체 이 시는 뭔가?’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이건 뭔가?’이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황무지, 너는 뭐냐?’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내 질문에 『황무지』는 어떤 대답도 없이 지긋이 자신의 시어를 내밀 뿐이다.

 

:갑자기 『올드보이』의 최민수 형님의 대사가 떠오르더라. ‘누구냐 넌?’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 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고

잠은 뿌리를 봄으로 깨운다.

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

잘 잊게 해주는 눈으로 대지를 덮고

마른 구근으로 약간의 목숨을 대어 주었다.(P.46)

 

이 내밀한 시어의 속설을 들여다보며 나는 ‘황무지’의 세상을 만난다. 내적인 감정의 표현으로서의 시가 아니라 이성을 이용한 정련되고 정제된 시어가 가득한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의 세상, 죽음을 통한 재생이 불가능한 불임과 진짜 죽음과 정신적 메마름이 가득한 황량한 현대의 세상, 고대의 시어들이 현대의 시어와 표현들과 병렬되어서 다양성이 꽃피는 콜라주의 세상. 이 모든 세상을 통해서 도시적 감성의 차가운 시인 엘리엇은 현대라는 시대의 황량함을 보여주며 우리가 황무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내 마음에 속삭인다.

 

살아 있던 그는 지금 죽었고

살아 있던 우리는 지금 죽어간다

약간씩, 견디어 내면서.(P.102)

 

재미있는 사실은, 세련되고 이성적인 창작 기법과 시어를 사용하며 20세기 영미 시단의 모더니즘을 주도한 대표주자로서 꼽히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엘리엇이 과거의 순박하고 단순한 전원 사회를 꿈꾼다는 점이다. 그의 언어와 창작 기법은 모던하지만 그의 지향점은 과거라는 사실은, 그의 복고주의가 내용은 복고주의지만 표현은 모더니즘이라는 사실 앞에서 역설을 드러낸다. 알다가고 모를 것 같고, 모르다가도 알 것 같은 시를 쓰지만 그의 시가 그려내는 꿈들은 우리 누구나가 꿈꾸는 것이라는 얘기다. 이 황무지의 놀라운 역설을 접하고서 나는 힘이 솟는다. 나의 황무지에 대한 사랑이 끝나지 않을 것 같기 때문에.

 

이들 이미지들 주위로 웅크리고, 그리고

달라붙는 심상들에 내 마음 끌린다:

어떤 한없이 순하고

한없이 아파하는 것에 대한 생각.(P.38)

 

베르테르의 사랑이 자살로 결론 나고, 페트라르카의 사랑이 언제나 시로서 표현되고, 단테의 사랑이 『신곡』을 만들어낸 것과는 달리 내 『황무지』에 대한 사랑은 『황무지』를 계속 읽는 것으로 드러난다. 이 사랑이 쉽지 않지만 나는 계속해서 읽고 또 읽으리라. 그러면서 황무지의 세계를 접하다보면 이전보다 더욱 더 황무지를 사랑한다고 생각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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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 - 유하 산문집, 개정증보판
유하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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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유하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라는 제목이 새롭다. 시간의 법칙을 거스르려는 몸부림을 기록한 이 제목은 책의 첫 출간연도(1995년)와 책 속의 내용과 더불어 이 책을 진짜 새로워 보이게 만든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부터 계속해서 영화감독으로 알고 있던 유하가 시인이었다는 사실,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압구정동과 오렌지족, 이소룡을 위시한 홍콩 영화의 위세, 이름도 생소한 과거의 한국 영화배우 문희를 비롯한 과거 한국영화의 족적, 60년대 한국인들의 삶, 과거 극장의 흔적, 그 시절 유행한 팝송, 과거 재즈 뮤지션들의 활약상, 90년대 시인들의 시와 그들의 삶에 이르기까지 이 책은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과거를 지나와서 미래에서 되돌아보면 ‘추억이 미래보다 새롭다’라는 것을 하나의 고정된 진실로서 깨닫는 순간으로서의 독서의 순간, 내 머릿속에 또 다른 하나의 생각이 짓쳐든다. 지금 내가 이 책을 읽고 있는 순간조차 언젠가는 새로워질 것이라는.

 

 

 

 

아마도 유하는 이것을 알고서 이 책을 썼을 것이다. 그는 추억이라는, 지나간 시간의 몸부림과 그것이 새로워질 것이라는 미래의 예측 사이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며 자신의 글을 써나갔을 것이다. 그 고뇌와 고독과 외로움이 빚어낸 사고의 흔적인 이 글을 읽는다는 건 그래서 걸어갔던 그 길을 다시 걷는 길에 다름 아니다. 나는 그저 그가 걸어가며 흘린 열매들을 주워 먹으면 된다. 그 맛이 과거의 맛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맛이라는 사실을 알면 된다. 그런데 나는 그 길을 걸으며 그가 흘린 열매들을 주워 먹으면서 서글퍼졌다. 그것은 내가 독서를 하는 한 계속 이렇게 할 수밖에 없다는, 나의 독서가 글을 쓴 사람들의 길을 따라 걸으며 그들이 흘린 열매를 주워 먹는 행위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니체의 ‘영원회귀’와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의 수동적인 구현. 실존적인 것이 아니라 비실존적이고 비본래적인 것으로서의 독서 행위의 필연적인 예감. 거기서 반복은 지옥이 된다. 아니, 반복은 지옥이 될 것이라고 나는 예측했다. 이 ‘지옥의 예감’을 벗어나기 위해서 나는 ‘반복은 지옥이 된다’라는 말을 가능성의 문장으로 바꾸었다. 그 순간 나의 서글픔은 다시 새로운 의지의 구현으로 이어진다. 이것을 벗어나야 겠다는. 나는 이 서글픔에서, 이 ‘반복의 지옥’에서 벗어나야 하겠다. 아니, 벗어나겠다. 내가 벗어남을 외치는 순간, 사건이 생겨났다. 이건 내 독서 인생에서 있어 왔던 평범한 사건이 아니라 들뢰즈가 말한 사건이다. 이제 나의 사건은, 나의 독서는 차이 없는 반복이 아니라 차이의 반복을 향한 여정이 된다. 끝없이 반복되지만, 언제나 다른, 차이가 있는 반복으로서의 독서를 향한 여정. 서글픔을 느낄 때는 진짜 서글픔에 힘들었지만, 서글픔이 사건을 향한 꿈꾸기를 불러오자 나는 다시 힘을 얻었다. 나는 서글프지만 서글프지만은 않다. 나에게 새로운 꿈과 의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온다. 유하가 걸어간 길을 뒤따라 걷는 나의 발걸음은 이제 힘차다. 그건 내가 새로운 꿈과 의지로 걷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뒤따라 걷는 것은 맞지만, 그를 맹목적으로 따라 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의 뒤에서 걷는 단독자다. 그는 그냥 앞에서 걷는 사람일 뿐이다. 우리의 걸음의 순서는 차이가 있지만, 같은 단독자라는 점에서 그와 나는 같다. 단독자로서의 나의 행보는 그와 같으면서도 다르다. 그가 흘린 열매를 먹지만, 그건 그의 열매이자 나의 열매가 된다. 아니 내가 먹는 순간만큼은 나의 열매다. 그의 추억도 나의 추억이 된다. 그의 이소룡은 나의 이소룡이 되고, 그의 문희는 나의 문희가 되고, 그의 찰리 파커는 나의 찰리 파커가 된다. 하지만 그건 동일한 반복이 아니라 차이가 있는 반복이다. 아니, 그것들을 겪어 보지 않은 나에게 그것은 아직 오지 않는 기대와 미지의 사건으로서의 반복이다. 겪지 않았지만 겪었고, 겪을 것으로서 예상되지만 겪은 반복. 그래서 그건 언제나 새로울 것이다.

 

 

 

 

다시 하나의 문장을 적어본다. ‘추억은 미래보다 새롭다’라고 적은 이의 추억을 경험한 나에게, 그의 추억은 추억 그 자체로서 새롭고, 지나갈 추억으로서 새롭고, 다가올 추억으로서 새롭고, 지나가서 되돌아볼 추억으로서 새롭다고. 그건 유하의 문장이 진짜 나의 문장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나는 그 문장 옆에 덧붙일 것이다. 독서는 추억보다 새롭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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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
미우라 시온 지음, 오세웅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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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사랑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려 한다. 내가 하는 이 사랑은 낭만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이 사랑은 맹목적인 믿음이나 맹신과는 거리가 멀다. 이 사랑은 오히려 분별있음을 지향한다. 이 사랑이 사랑하는 대상의 모든 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사랑하는 대상을 느끼고, 음미하며, 공감하며, 이해하려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목소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품에 안으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턱대고 사랑하는 대상의 모든 것을 품에 안지는 않는다. 나의 이 사랑은 호르몬의 폭발이 아니라 머리와 머리의, 가슴과 가슴의 교감이다. 나의 이 사랑은 불꽃처럼 확 타오르다가 꺼지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지속되는, 영원을 향한 몸부림이다. 나의 이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서 꾸준히 말을 건네고, 대화하면서 티격태격하고 자신들의 무언가를 나누는 몸짓이다. 이 사랑은 내 마음속의 얘기들을 꺼내는 장이자 은밀한 비밀을 주고받는 장이다. 이 사랑에 스킨십은 없지만 영혼의 교감은 풍부하다. 아마 이쯤 얘기했으면, 이 사랑이 어떤 것에 대한 사랑인지 알아차렸으리라 믿지만, 그래도 굳이 확인해보자면 내게 이 사랑은 책에 대한 사랑이다.

 

 

 

사랑을 위한 몸부림으로서의 독서. 책을 쓴 이들이 글과 종이에 남긴 영혼의 흔적을 찾아가는 과정으로서의 독서. 그 영혼의 흔적과 교감을 나누고 영혼의 대화를 나누는 행동으로서의 독서. 내게 독서는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사랑의 행위에 다름 아니다. 내가 독서라는 사랑의 행위를 하는 순간 책은 단순히 종이에 글이 쓰인 종이 덩어리가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대상이 된다. 이때 책은 무생물이 아니라 책을 쓴 저자가 보여주는 삶의 가능성, 저자 스스로의 삶에서 길어 올린 새로운 삶의 모습이 된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의 말을 잠시 빌리자면, 책에 대한 사랑은 바로 그런 삶의 모습과 가능성들에 대한 사랑이기에 책을 사랑한다는 건 삶을 사랑하는 것이 된다. 나의 독서는 이런 삶의 모습과 가능성들에 대한 사랑을 꿈꾸기 때문에 치열한 대화를 지향하고, 치열해야한 한다. 삶의 모습과 가능성들에 대한 사랑이 무심하거나 맹목적이라면 그 삶의 모습과 가능성들에게 얼마나 미안한가? 그래서 나의 독서는 어떻게든 책에 대해서 꼬치꼬치 질문하고 치열하게 대화하는 행위가 된다. 이것은 나의 책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더 사랑하기 위해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에 대한 독서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우선 나는 이 책을 즐겼다. 현대의 빠른 삶이 아니라, 산에서 백년을 내다보고 살아가는 임업 종사자들의 느린 삶을 만나면서, 현대의 강박적인 빠른 삶에서 벗어나 한번 숨을 쉬어보고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동시에 환경 친화적이고, 인간 중심적인 느린 산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건 너무나 느리고 따스하지만 치열한 면도 있는 자연과 함께하는 삶이었다. 도시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생각함으로써 우리의 삶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친근하면서도 편안한 미우라 시온의 문체와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니 그것이 저절로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것을 만끽하면서 나는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렇게 무균질의 이상화된 낯선 공간으로서의 산이 과연 현실 속에서 존재할 수 있는가? 이런 공간에도 과연 이 소설처럼 단점과 모순이 없는 것일까? 자연과 함께하는 삶도 삶의 하나라면 언제나 좋을 수 없는 것처럼, 어떤 공간이든지 그것만의 문제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생각하니 이 소설의 모습이 다르게 다가왔다. 이 소설은 그저 이상화된 자연 공간에, 도시의 삶에 지친 도시인들을 인도해서 쉬게 해주는 소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도시의 삶과 반대로서의 삶에 대한 갈망이 담간 소설. 하지만 현실은 아마도 다를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나아가자 갑자기 또 다른 생각이 급브레이크를 건다. ‘그것까지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하고. ‘자연 친화적이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낭만적 꿈을 형상화한 휴식 같은 소설에 더 이상의 딴지가 필요할까’ 하고. 어쩌면 나는 너무 나간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으려 한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이런 행위가 나의 독서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사랑의 행위의 일부라는 사실. 질문은 나의 독서를 살찌우고, 풍요롭게 하며, 나의 사랑을 더욱 불타오르게 만든다. 그 사실만은 잊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며 이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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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콜라티에
우에다 사유리 지음, 박화 옮김 / 살림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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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콜라티에-우에다 사유리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으면서, 그 책의 글을 쓰는 방식이 마음에 와 닿았다.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라는 부제처럼, 하루하루 대화를 건네는 스타일의 책인데, 나도 이렇게 북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닷새 대신 천일동안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일명 천일책야화. 누군가에게 말을 건네는 스타일의 글인데(물론 이 모든 건 허구이다.)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자의 숙명처럼 계속해서 이야기를 해나가는 방식의 글이다. 사사키 아타루의 말을 조금 변용시켜보면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미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고,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작해보려 한다.

 

천일책야화-1.책을 읽고 침이 고이다.

 

M에게

 

M, 오늘은 너무 더워서 힘겨웠어.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나는 무더위 속에서 진짜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더군. 너는 괜찮았어? 나는 그저 에어컨만을 찾아다녔어. 에어컨이 있으면 행복하고, 에어컨이 없으면 불행한 단순한 생활의 반복을 했다고 해야할까. 그래도 밤이 되니까 그나마 낫네. 아무리 열대야라도 해도 밤은 밤이니까.

 

 

 

나만큼 책을 좋아하는 너에게 오늘부터 책 이야기를 계속해서 해볼 생각이야. 기본적으로 천일동안 이야기를 할 생각인데, 어쩌면 천일을 넘을 수도 있어. 아니면 천일을 못 채우고 끝이 날수도 있겠지. 세상일이란 어찌될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까.^^ 너무 말이 많다고 비난하거나 탓하지는 말아줘. 나만큼 너도 말이 많은 네가 내 얘기를 듣는 것이 억울하다면, 너도 나에게 이야기를 해봐. 그럼 나도 들어줄게. 아무튼 네가 내 이야기를 계속 들어준다는 전제아래 이야기를 이제 시작해보도록 할께.

 

 

 

첫 번째로 이야기할 책은 <쇼콜라티에>야. 초콜릿과 서양과자를 만드는 셰프 나가미네와 우연히 그를 알게 된 화과자(일본식 과자)가게 점원 아야베 아카리의 만남과 그 만남 속에서 빚어지는 인간과 과자 이야기를 그린 일본 소설인데, 일본 소설들이 자주 보여주는 무겁지 않음과 섬세하고 세밀하며 감각적인 묘사와 표현, 이상적이고 드라마틱한 이야기 구성을 그대로 갖춘 책이야.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초콜릿과 과자의 향연이었어.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책을 사랑하고 책에 마음 설레어 했지, 책에 나오는 것들에 관해서는 무관심했어. 특히 책에 나오는 음식들에 관해서는, 그게 책에 나오는 음식으로만 보였지, 미각의 대상으로 생각하지는 않았어. 나에게 그것들은 책에 나오는 미각과 관련 없는 음식들에 불과했거든. 하지만 <내 식탁 위의 책들>이라는 책을 보고 나서 갑자기 책에 나오는 음식들에도 관심이 가기 시작했어.

 

 

 

‘아는 만큼 보인다’고, 진짜 관심가지니 보이더군. 이 책이 그 관심이 위력을 발휘한 첫 책인데, 진짜 책 곳곳에 적혀 있는 수많은 초콜릿과 과자의 모습에 마음이 동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느새 침이 고이는 거야. ‘먹고 싶다’는 생각이 막 들더군.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대다수의 초콜릿과 과자를 내가 모른다는 사실이었어. 나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그냥 미각적 표현과 묘사의 향연에 끌려서 욕망하게 된 것이야. 잘 모르지만 사랑한다고 해야 할까. 아니, 그건 ‘욕망하기를 욕망한다’에 다름 아니었어. 나는 책이 전해주는 미각적 욕망의 지도를 받고, 그 지도에 따라서 욕망하게 된 것이지.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막상 실제로 하니 너무나 좋았어. 알지도 못하면서 욕망하고, 욕망하니 좋아지는 이 욕망과 무지의 순환이 불러오는 쾌락 앞에서 즐거워했지. 이것을 경험했다는 것만으로 이 책은 내게 좋은 책이었어.

 

 

 

이렇게 좋은 점만 얘기하고 얘기를 끝내려 했는데, 아쉬워서 잠깐의 평가를 덧붙여볼게. (너도 알다시피 내가 책에 대한 평가를 좋아하지 않잖아. 그래서 평가는 최대한 짧게 할 생각이야.) 이 소설이 하나의 이상적인 가상의 공간으로서 우리를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면 조금 더 그 목표에 충실했으면 하는 바람이 읽으면서 들더군. 왜냐하면 갑자기 이상적인 가상의 공간에 현실이 틈입하면서 현실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너무 당혹스러운 거야. 물론 어떤 소설이든 현실과 가상의 조화와 뒤섞임 속에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감안할 때 현실이 갑자기 튀어나올 수 있는 것은 맞아. 문제는 그게 어느 정도냐의 것인데, 이상적인 가상의 공간을 표현한 소설에서 가상의 행복감을 맛보고 있는데 갑자기 현실이 튀어나와서 현실의 무거움을 드러내고는, 그것을 그냥 이상적인 마무리로 봉합해버리는데, 너무 황당한 거야. 이상적이려면 계속 이상적이던가 아니면 아예 현실적인 마무리를 하던가 해야지, 이건 그냥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잡탕이 되어버리니 뭔가가 어색한 거지. 책의 주인공인 나가미네의 입장에서도 이런 식의 잡탕 같은 과자나 초콜릿은 재앙이 아닐까?(모든 에피소드가 그런 것은 아니고 몇몇 에피소드가 그랬어.) 그러니 이상적인 가상의 공간은 계속해서 그 모습 그대로였으면 좋겠어. 현실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꿈을 꾸게 해주는 것이 이런 소설의 미덕 아닐까.

 

 

 

여기까지 얘기하니 갑자기 졸음이 밀려오네. M, 미안한데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어. 나중에 다른 책으로 다시 다른 이야기를 할게. 그러니 오늘은 이만 안녕~~~

 

 

 

*참, 혹시라도 이 책을 읽고 여기에 나오는 과자나 초콜릿을 사게 된다면 잊지 말고 나에게 보여주지 않겠어? 나 사실 그것들이 너무 궁금했거든. 친구 좋다는 게 뭐겠어. 이럴 때 도와주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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