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 지만지 고전선집 669
소포클레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7.안티고네-소포클레스

 

M에게

 의지의 힘

M, 너는 의지의 힘을 믿니? 의지가 얼마나 무서운지, 의지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너는 알고 있니? 아마도 너는 의지라는 단어를 알고는 있을지 몰라도, 그 말이 품

고 있는 무서운 힘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거야. M, 의지는 때로 사

람이 목숨을 걸 정도로 무서운 단어가 되기도 해. 우리가 '일찍 일어나야지'나 '열

심히 공부해야지'나 '열심히 일해야지' 라고 말하는 일상 속의 의지처럼, 한

이 목숨을 걸고 추구하거나, 외부의 강력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밀고

가는 것도 의지라는 단어를 써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이야. 이런 강력한 의지는

리같은 평범한 이들이 쉽게 따라할 수 없거나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의지를 '의지'라는 단어 속에 쉽게 포함시키지 못하는 것이지. 그래도

의지는 의지야. 이것이 흔하지 않고, 쉽게 따라갈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의지가 되

지않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야. 하지만 난 이런 의지를 볼 때마다 무섭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 <안티고네>를 읽으면서도 강력한 의지의 힘 때문에 놀랍다는 생각과

더불어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어.

 

의지의 비극, 안티고네

<안티고네>의 주인공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의 딸이야. 이 정도만 얘기하면 이 작

품이 <오이디푸스 왕>과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거야. 이 작품은 소포클

의 최대 걸작이라고 할 수 있는 <오이디푸스 왕>을 포함한 오이디푸스 3부작

하나로서, 시대순으로만 보면 가장 마지막 이야기야. 하지만 이야기의 시작이라

고 할 수 있는 <오이디푸스 왕>보다 먼저 쓰여졌고, 상연된 소포클레스의 초기작

야. 상연 순으로만 보면 이미 죽어있는 아버지가 갑자기 살아나서 젊어진 뒤에 등

하는 셈이지.^^ 이렇게 생각하면 재미있겠지만, 비극 3부작을 하나로 이어지게 만

었던 소포클레스의 선배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와 달리, 비극 3부작 하나하나를

결된 작품으로 만들었던 소포클레스답게 굳이 <오이디푸스 왕>과 연결지어 생각

필요없이 한 개의 독립된 작품으로 읽어도 상관은 없어. <안티고네>는 분명히

<오이디푸스 왕>과 이어져 있지만, 동시에 떨어져서 읽어도 별 문제 없는 작품이란 

얘기야.

 

무엇보다 <오이디푸스 왕>과 내용면에서 큰 차이가 있어. 주어진 비극적 운명을

못하고, 자신의 운명에 저항하다 파멸을 맞는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와는 달

리,<안티고네>는 분명히 비극을 맞지 않을수도 있었는데, 자신의 의지 때문에 비극

맞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어. 이것을 일반적인 해석으로는 신의 율법을

상징하는 안티고네와 인간의 율법을 상징하는 크레온의 대립으로 파악하고 있는데,

나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하지만, 오히려 이건 두 사람의 대립만으로도 충분히 바라

있다고 생각해. 사회 질서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는 크

레온의 의지와 사회적인 압력이 있음에도 보편적인 정의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

마저 굽히지 않는 안티고네의 의지의 충돌만으로도 충분히 극적이고, 감동적이라는

이야기야. 이것을 굳이 신의 율법과 인간의 율법이라는 해석으로 바라보지 않아도,

나에게는 너무나 큰 의미로 다가왔다는 말이지. 어쩌면 작품 중간에 나오는, 모든 것

을 인간 위주로 바라보는 소피스트에 대한 비판의 구절을 볼 때, 소포클레스는 이 작

품을 인간의 율법신의 율법을 대비시키며,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없으며, 인간이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오만하게 굴 때 비극적인 일이 벌어진다는 메시지를 이 비극을

보는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라. 종교적인 의미가 강했던 그리스 비극

의 특성을 감안해 볼때, 분명히 소포클레스는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여. 하

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나에게는 그 메시지를 담은 작품으로서 <안티고네>가 다가오

는 것이 아니라, '저항의 정치학'을 담은 텍스트로서 다가왔어. 이 '저항의 정치학'이

뭐냐고? 이왕 얘기에 나온 김에 한번 써보도록 할께.

 

안티고네, '저항의 정치학'을 보여주다.

우선, 이 얘기를 하기전에 전제 조건을 달고 싶어. 여기서 말하는 저항의 정치학이란

정치공학과는 다르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 내가 여기서 하게 될 말은 '어떤 정당이 집

권해야 한다, 어떤 정당이 사회에 좋다, 어떤 정치사상이 어떤 정치사상보다 좋고, 그

정치사상을 지금 사회에 적용해야 한다, 어떤 정치인이 나와야 한다'라는 정치공학과

는 거리가 멀다는 거야. 나는 정치공학이 아니라 보편적인 정치적 삶과 정치적 태도

에 대해서 말할거야. 삶을 살다보니 그것이 어떤 정치적인 태도를 보여준 한 인간에

해 말함으로써, 삶이 정치가 되고, 정치가 삶과 이어지는 정치적 삶을 말하게 될 거

라는 말이야. 이건 정치공학보다는 정치철학에 가까울 거야.(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정치철학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모르기 때문에 정치철학에 가깝다는 말을 쓸 수 밖에

없었어.)

 

이제 이야기를 해볼께. 안티고네는 작품 속에서 지도자 크레온이 정한 법에 저항하는

인물로 나와. 반면에 크레온은 자신이 보기에 그 법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여겨, 법을

정하고 그것을 공동체의 구성원에게 강요하고 억압하는 인물로 나오지. 어떻게 보면

크레온의 법도 공동체에 필요한 것도 맞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법이 무조건 옳

다고 볼 수는 없는 거지. 어떤 상황에서는, 어떤 특정한 문화적 토양에서는, 보편적

인 정의의 측면에서 그 법이 반드시 옳다고 볼수는 없다는 거지. 안티고네는 바로 이

점을 지적하고, 크레온의 법에 저항하지. 많은 이들이 안티고네의 말에 동조하는 것

은, 크레온의 법이 보편적인 정의와 그들이 지금까지 지켜온 신의 율법에 어긋났기

때문이야. 그런데도 크레온은 지배자의 아집과 오만에 둘러싸여, 자신의 고압적인 태

도를 고수하지. 크레온에게 자신이 만든 법은 인간의 삶과 생활을 돕기 위해 만들

어진 도구가 아니라, 자신이 만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하는 인간 삶과

활의 억압적 틀이 되어버린 것이야. 그는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지켜야 한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야. 크레온은 자신이 만든 법과 그것을 옹호하는 태도를 

통해 그것이 더 이상 사회와 동체와 생활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 삶과 생활의

주인이 된 것이라고 천명하고 있는 것이지. 분명히 자신이 틀릴수도 있고, 자신이

만든 법이 옳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는 그것을 부정하고, 자신의 정당성을 무조건적

으로 주장하고, 자신에게 저항하는 인간을 용서하지 않아. 

 

평범한 이들이라면, 크레온의 위협에 자신의 의지를 포기하고 그에 순응해서 조용히

살아갔거야. 하지만 안티고네는 범인들과 달리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

하다 죽음을 맞게 되지. 여기서 이제 안티고네의 모습은 범인이 할 수 없는 행동으로

서의 아우라를 간직하게 돼. 그리고 그녀의 행동은 그것으로서 '저항의 정치학'과

이어지지. '어떤 특정한 법령이나 규율이 옳지 않다면 그것에 관해 생각해보고 저항을

실천하고, 동시에 그 행동 메커니즘에 대한 탐구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저항의

정치학'은 안티고네라는 인물을 통해서, 그것의 이념적 토대를 실제적로 드러내게 된

것이야. 사실 우리가 만들어진 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맞아. 사회의 질서 유지와 공동체

적인 평안을 위해서 만들어진 법을 지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임에는 틀림없어.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만들어진 법이 반드시 옳을 수는 없다는 생각도 해야해. 법을 지

키면서도, 어쩌면 그것이 반드시 정당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는 말이지. 법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정당성을 생각해보고, 의문도 제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지. 안티고네거기서 더 나아가서 의문을 저항의 행동으로 바꾸고

실천했어. 그러니 <안티고네>를 어떻게 '저항의 정치학'을 보여주는 표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있겠어!

 

정치적인 오독의 즐거움, 그리고...

물론 이렇게 정치적으로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어. 그렇게 읽지 않아도 충분히 감동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거든. 그래도 내 마음대로 정치적인 오독을 하다보니 더

재미있어지는거야! 작품과 은밀히 혼자만의 대화를 하고, 그 지극히 주관적인 대화의

성과를 자기 소유로 한다는 건 독서가 줄 수 있는 최상의 즐거움중 하나거든. 특히 시

의 평가를 이겨낸 고전들이 이런 식의 다양한 오독의 가능성이 있는 열려 있는 텍스

트로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볼때, 내가 고전 읽기를 계속하는 한 오독

은 계속 거라는 생각이 들어. 반드시 이런 행동이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즐거운데

어쩌겠어!^^;;

 

정치적 오독의 즐거움과 더불어<안티고네>가 보여주는 정치적 행동은 지금의 나에게

는 너무나 큰 감정의 배설구와 았어. 여러가지 사회적 제약과 압력, 나 자신의 소심함

때문에 하지 못했던 저항을 안티고네는 끝까지 밀고 나가거든. 거기서 느끼는 카타르시

스는 이루 말할 수 없었어. 물론 비극적인 결말을 맞긴 하지만, 그 과정에서 느꼈던 울분

과 흥분은 나로 하여금 작품에 몰두하게 했지. 안타까운 건, 이 작품을 읽고 나서 내가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이야. 나는 현실에서 예전처럼 두려워하며, 숨죽이며, 조

용히 살아갈게 뻔하거든. 아! 그것이 너무 안타까워! 그것이 어찌할 수 없다고 해도. 다

만, 예전과 다른 것이 있다면 이제 내 마음 속에 안티고네가 들어왔다는 사실이야. 가끔

씩 그녀와 저항과 해방의 행을 내 마음 속에서 할 수 있다는 말이거든. 하, 그것이 얼마

나 행복할까? 이런 일상의 사소한 행복을 줄 수 있어서 진정으로 <안티고네>의 '안티고

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싶어.

 

이제 말을 끝내야겠어. M, 내 말을 또 게속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다음에 또 기회 되면

다시 내 애기를 들어줘.(너 같이 내 애기를 들어주는 친구가 있어서 나는 너무 행복해!!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목신의 오후 민음사 세계시인선 16
말라르메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5년 1월
평점 :
품절



26.목신의 오후-말라르메

 

1.

보들레르의 시도 읽었고, 랭보의 시도 읽었고, 발레리의 시도 읽었으니 말라르메의

시를 읽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당연함은 언제

나 당연하지 않음을 동반했고, 나는 삶의 흐름 앞에서 말라르메와는 상관없는 듯이

살아갔다. 내게 '악의 꽃'을 이야기하는 시인 보들레르는 시의 상징성과 이중성을 감

각적으로 이야기해주는 악마적인 시인이었고, 랭보는 상징과 현실 너머의 낯선 세계

나를 인도하는 지옥에서 온 시인이었고, '해변의 묘지'로 나를 인도하는 폴 발레리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과 같은 시인이었다. 그리고 분명히 나는 말라

르메의 시 속으로 뛰어들어 갔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시집>을 거부했고, 프랑

스 상징주의를 추억에 파 묻은 채 삶을 살아나가기 시작했다. 나의 기억의 한 구석을

차지한 프랑스 상징주의는 내 삶과는 상관없이 빛나고, 아름다운 추억의 사진같은 존

재들이 되었고, 나는 그 추억의 아름다움에 도취한 채로, 삶이라는 대지에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내딛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상징주의가 내게 다시 찾아왔다. 목신 판의 

관능적인 피리소리를 동반한 <목신의 오후>라는 제목과 함께.

 

2.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언어는 변화하기 마련이다. 언어 표현, 의미, 단어 생성, 다른

언어들과의 교류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모두 포괄하는 언어의 변화를 보고 있노라

면, 임없이 변화하는 것이 언어의 속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프랑스 상징주시인들은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언어를 통해서 이 세상 너머의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에 나선다. 그들

은 이 세상의 것들을 통해서 세상의 것도 아니고, 보이지도 않는 것들을 보는 견자의

시각으로, 그 모든 것들을 표현해낼 수 있는 '악의 꽃'을 피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은 언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와 인간 인식과 사고의 불완전성 때문에

언제나 실패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필패라는 결과를 떠안고

그들은 여기에 도전하며 자신들의 시를 써내려간다. 너무 당연하게도, 말라르메도

이 필패할 수밖에 없는 불가능한 시도에 도전했다. 그는 더 나아가서 이 세상의 보이

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 모두를 포함하는 절대의 책을 쓰려는 감당할 수 없는 욕망

을 가지고 있었다. 이 절대적 꿈을 위한 여정의 일환으로 그는 계속해서 상징적인 시

들을 써나갔던 것이다. 그것이 절대의 책이 아닌, 절대의 책의 조각이나 단편에 불

과할지라도, 그는 계속해서 써내려 갔다. 여기에서 그의 시들은, 이제 절대의 책이라

는 그 자신의 꿈을 향한 여정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불가능한 꿈

을 이루기 위해서 차근차근 길을 밟아나가고 있었던 셈이다. 초기의 도피적인 성향의

시들도, 절대의 책으로 나아기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연하

게 <목신의 오후>도 절대의 책나아가는 시인의 발걸음에 포함된다. 목신 판의 관

능적인 꿈은, 시인 자신이 꿈을 향해 나아가는 꿈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3.

솔직히 말라르메의 시는 어렵다. 아무리 눈을 씻고 들여다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하기 쉽지 않다. 서정의 표현이나 묘사인 듯 보이면서도 상징을 품고 있고, 동시에 이

세상을 넘어서면서도 이 세상 모두를 표현하려는 모순적인 시인의 열정을 품고 있기

에,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인 다층성을 가진 시가 되어 읽는 독자를 괴롭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말라르메의 시를 씹꼬 또 씹으리라. 씹다가 '이해불가'라는

에 걸려 이해라는 이빨이 빠져나가고 생각이라는 잇몸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일이 있

어도 포기하지 않고 씹으리라. 씹다 보면 절대의 책에서 흘러나오든한 미약한 빛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시인도 그것을 알기에 시를 계속 썼던 것이 아닐까.

 

'그대를 찬미하노라, 처녀들의 분노여,

오 성스러운 전라의 잠이 주는 미칠 듯한 감미로움이여, 번갯불이 몸을 떨듯,

불타는 내 입술의 목마름을 피하려 그대는 미끄럽게 달아난다.

살의 저 은밀한 몸서림치이여

무정한 여자의 발끝에서부터 수줍은,

여자의 가슴에까지.

광란의 눈물에, 혹은 보다 덜 슬픈

한숨에 젖은 순진함은 벌써 옛날 얘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이디푸스 왕 지만지 고전선집 575
소포클레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25.오이디푸스 왕-소포클레스

 

M에게..

 

현실

지난 주 토요일날 약속을 위해 집에서 나와서 버스 타는 곳에 갔는데, 무언가 집에 놔두고 갔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기에,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지. 추운 날에 대비해서 두

꺼운 파카도 입고, 내복도 입은 상태여서 집에 들어가서 놔두고 온 물건을 가져나오는데 너무 덥

더군. 몸에 땀이 흐르기 시작했어. 그래도 여기까지는 그냥 더워서 약간 땀이 나는 정도였어. 진

문제는 버스 정류장에서 발생했어. 눈앞에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데 내가 타려는 버스가 나를

나쳐서 버스 정류장 앞에 서는 거야.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열심히 뛰었지. 두꺼운 파카와 내복

입은 상태로. 운좋아간신히 탈 수 있었는데, 너무 더워서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거야. 하,

이 겨울에 땀이라니! 추워버스 안에는 히터가 빵빵하게 틀어져 있고, 남들은 모두 추워서

두꺼운 옷안에 움츠러든 상황에나는 글쎄, 혼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여름의 풍경을 연출하

있었어. 이 모든 게 정말 싫더군. 그때 속으로 혼자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 '사는 게 쉽지 않

군.' 물론 시간이 지나 땀이 식으며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 같은 상황이 되었지.

 

하지만 문제는 내가 한 순간이나마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이야. M, 너라면 아마 이해하겠지.

우리가 삶에서 마주치는 이런 문제들이 우리 삶을 힘겹고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 말이야. 이번 일

같은 경우는 시간이 흐르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라서 별탈이 없었지만, 쉽사리 넘어갈 수 없

는 일을 만난다면 어떻게 될까. 사소한 불운들이야 시간이 지나거나 마음 가짐을 바꿔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문제들, 계속해서 반복되는 문제들은 우리를 너무나 힘들게

하겠지. 사실 산다는 건, 사소한 불운과 힘겨운 일들 뿐만 아니라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일들,계속해

서 반복되는 일들도 견뎌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은 엄청난 스트레스

를 받고 사표를 쓸 생각을 계속 하면서도 견뎌내겠지. 수험생들도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도

살아나가는 것이지. 취업 준비생들도 취업이 안 되어 그것 자체가 삶의 고통이 되어도 살아나갈 수

밖에 없는 것이야. 아이에게도,어른에게도,노인에게도,청년에게도,중년에게도,부부에게도,연인에

게도, 자식에게도,부모에게도,학생에게도,회사원에게도,그 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도

저마다 자신들의 문제가 있겠지.

 

그 문제의 순간마다 우리는 '사는 게 쉽지 않다'고 되뇌는 것 같아. 누구나 자신이 마주치는

문제가, 문제의 무게감을 떠나서 언제나 쉽지 않은 문제로 다가오는 것이겠지. 누구나 자신의

문제를 가장 어렵게 여긴다는 말이지. 나는 가끔 그런 인식이 사치라는 생각이 들어. 어차피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렇게 말을 내뱉고 생각하며 견뎌나가

는 것이라는 얘기야. 진짜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상황을 마주하거나, 감당 못할 운명 앞에 선

사람에게는 이런 말이 나올까? 그 사람에게는 그 상황 자체가 너무 버거우니까, 이런 말이

오지 않을 거야. 사는 게 쉬운가 쉽지 않은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단지 한 순간 한 순간 숨

쉬는게 너무 힘들고 어려우니까, 그런 말 자체를 할 수 없는 거야.

 

M, 나는 그러니까 자책을 하고 있는 거야.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지 못하는 나 자신의 순간적인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는거야. 이런 식의 비판을 시도하다

보니 갑자기 한 사람이 떠올라.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운명의 비극을 경험한 한 남자. 너무나도

유명한 이 남자는 신화와 비극과 정신분석학의 이론으로 오랜 시간 우리 곁에 머물면서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와 오랜 시간에 흩뿌리고 다니며 불멸의 명성을 얻었지. 그래, 너도 짐작했겠지

만 그 남자의 이름이 바로 오이디푸스야.

 

오이디푸스왕의 비극

그는 왕이었어. 도시를 괴롭히던 괴물을 물리친 영웅이기도 했어. 아, 그리고 그는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둔 행복한 남편이기도 했지. 자식들도 훌륭했어. 도시의 시민들은 그를 존경하고

인정했으며, 아내의 동생인 크레온과 도시의 장로들도 그를 존중하고 사랑했어. 저주니 비극이

니 운명의 화살이니 하는 말과는 거리가 먼 너무나 행복한 삶을 살아가던 사람이었어. 가끔씩

그도 '사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했겠지. 하지만 그런 말을 내뱉을 때도, 그건 행복의 표시일

뿐이었을 거야. 그는 커다른 문제도, 슬픔도, 고통도 없는 삶을 영위하고 있었거든. 그런데 삶의

급전직하는 순식간이었어. 도시에 닥친 역병과 그것을 막기 위한 그의 부단한 노력이 그 자신의

삶을 파멸로 몰고간거야. 신탁에 의해서 도시에 들이닥친 역병을 막기 위해, 그는 전왕의 살인범

을 잡으려고 노력하지. 그 자신이 탐정의 마음으로 범인을 잡기 위해 노력한거야. 그런데, 재미

있게도 그 자신이 범인이었어. 진실을 얻기 위한 그 자신의 노력은, 자기 자신을 파멸로 몰고가

는 노력이기도 한 거지. 이건 의도하지 않은, 자멸의 한 방식인거야. 그는 그 자신을 잡기 위해,

자신을 최악의 비극적인 인생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게 된 셈이야.

 

그의 노력이 그에게 준 것이라고는,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를 아내로 두었다는 사실,

자신친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 자신이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서 자신의 자식이자

동시에 자신의 형제자매들인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 자신이야말로 자신이 통치하는

도시의 시민들을 죽만든 원인이었다는 사실이었어. 너무 비극적인 것 같지? 최선을

다한 노력으로 얻은 게 이런 말로 표현 못할 충격적인 사실이라는 사실이. 평범한 이들은

죽음을 선택할 것 같은 최악의 운명 앞에서도 이 저주받은 왕이자 저주받은 사내인 오이디푸스

는 죽음을 선택하지 않아. 그는 이것이 자신에게 닥친 운명이라면, 이 운명을 받아들이고 살아가

는 것을 선택해. 그것은 그가 자신이 죽는 날까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대가를 받아들인다는

말이었어. 자신이 죽는 날까지 자신의 죄에 대한 형벌을 계속해서 받겠다는 의미인거야. 나는

이 마지막 부분을 보고 감탄했어. 자신이 상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저지른 죄이기에, 변명이나

자기 정당화를 할 수도 있었건만, 그는 한 마디의 변명도 없이 자신이 저지른 를 시인하고,

죄의 대가를 달게 받기로 하고 결정하지. 오이디푸스는 누구나 할 수 없는 숭고한 의지의 힘을

보여준거야. 나는 여기서 인간의 위대한 일면을 봤어. 그리스 최고의 비극작가 중 한명이었

소포클레스도,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운명의 불가해성과 더불어 이런 인간의 위대한 일면을 말하

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주제가 극의 역동적인 구성과 함께 전해지기에,

<오이디푸스 왕>이 2000년의 시간을 어넘어 나 같은 사람에게도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닐까.

시간과 상관없는 감동을 전해줄 수 있는 인간의 이야기를 하기에, 이 비극은 과거의 작품이지만

충분히 현재적일 수 있고, 현재의 작품이 될 수 있는 거야.

 

비극, 그리고 현재

M, 내가 '사는 게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지 않거나 말을 하지 않게 되는 일은 없을 거야.

나의 앞에 마주친 사소한 불운과 힘겨움 앞에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이나 생각을 하게 될 거야.

그게 그것을 이겨내는 가장 사소한 방법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지. 다만, 나는 <오이디푸스 왕>

을 읽었기에 가끔씩 나보다 불행했던 오이디푸스라는 남자를 떠올리게 될 수도 있어. 그럴 때,

나는 내가 한 행동이나 말이 평온과 행복의 표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몰라. 내가 살아가

는 일상이 얼마나 문제 없는 것인지 깨달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이것이 사치에 가까운 표현이라

는 사실도 동시에 깨닫게 되겠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나에게

<오이디푸스 왕>은 충분히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어. 그러니 기회가 되면 너도 한번

읽어봐. 어쩌면 너에게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이제 이 글을 마칠 시간이야. M, 니가 나의

이야기를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니가 어떤 생각을 하든 우리는 다음에 다시 만나는

거야. 알겠지? 그럼 이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흑사관 살인사건 스토리콜렉터 7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1년 12월
평점 :
품절



24.흑사관 살인사건-오구리 무시타로

 

살다보면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왜 살고 있는 걸까?'하는 의문의 들 때가 있다. 사실 산다는 건

어느 정도의 자동적인 메커니즘에 가깝기 때문에, 특정한 사이클에 갇히기 쉽고, 그것 자체를

의문시하거나 회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진화라는 노도와 같은 파도를 거쳐온 인간의

뇌는, 가끔식 그 쉽지 않은 일들을 이끌어내는데, 삶에 대한 의문 제기도 뇌가 가끔씩 이끌어내는

것 중에 하나일 것이다. 어찌보면 쓸데없는 행동 같지만, 뇌가 가끔씩 이런 일들을 벌인다는 것은

, 이것 자체가 분명히 하나의 기회를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삶의 질을 높이고,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기회를 뇌가 제공한다는 말이다.

 

독서도, 많이 하는 이에게는 자동적인 부분이 있다. 읽다 보니 읽는 거고, 받아들이다 보니 받아들

이는 거라는 식의 독서. 많이 읽다 보니 비판적이거나 꼼꼼한 독서보다는 그냥 기계적으로 문자들

읽어나가는 행동을 반복하는 있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그런 독서를 하고 있는데, 이 기계적인

독서 속에서도, 주관을 가지고 무조건적인 수용을 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나의 독서가 어느

정도의 자정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아직 그 정도 자정작용 밖에 하고

있지 않다사실의미한다. 아직 나는 이 정도 수준인 바, 무언가를 더 채우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려 나는 계속해서 읽어나가고 또 읽어나가는 먹깨비 독서를 계속하고 있다. 채워도 채워지

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계속해서 읽어나가는 것이다. 이쯤되면 마르크스의 물신을

능가하는 '책신'이 내머리강림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더,더 많은 책을 원하고, 읽기

원하는 책신이 내 머리를 지배하고 있다얘기이다. 책신이 도사리고 있는 한은 쉽사리 기계적

인 독서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내 독서의 딜레마이다.

 

하지만 가끔씩 이 기계적 독서를 깨뜨려버리는 책들이 등장한다. 어떤 책은 읽다가 바로 뇌에서

거부반응을 일으켜, 책을 덮어버리게 만들고, 어떤 책은 큰 감동과 재미를 선사해서 마음을

쥐고 흔들고, 어떤 책은 이게 도대체 뭔지 궁금하게 만들어 기계적인 독서를 거부하게 만든다.

<흑사관 살인사건>은 도대체 이게 뭔지 궁금하게 만들어 나의 기계적인 독서를 깨부수는

책이었다. 사실 이 정도 책이면 뇌에 거의 핵폭탄을 맞은 것과 다름없다. 어떻게, 책을 읽는데

30%도 이해를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일까?  읽어도 읽어도 도대체 이해를 못한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내가 그렇게 머리가 나쁜 건가? 아면 나에게 언어적인 장애가 있는 걸까? 분명히

한국어로 쓰인 것은 맞는데, 이해를 못하겠다는 건 내한국사람이면서도 한국어를 잘 모른다

는 의미일까? 더 기분 나쁜 건 이 책이 추리소설이라는 사실이다. 독자의 재미를 추구하는

추리소설을 읽는데, 이해를 못한다는 건 지금까지의 내 독서가 헛되고 헛되다는 의미일까?

내가 읽은게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나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나 들뢰즈나 데리다의

책이 아니라 분명히 사람이 죽고, 죽인 범인을 찾는 추리소설이 맞는데, 나는 도대체 왜 이해를

못하고 있는 걸까?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탐정이 말하는 장광설과 추리들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 진짜 뭐가 문제인 걸까?

 

생각해보면, 내가 이 책을 펼쳐서 읽었다는 사실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일본 추리 소설의 3대 기서

라는 말에 그냥 덮어버렸어야 하는 건데, 나는 그 문구에 끌려서 책을 펼치고 읽어나가기 시작

했다. 그리고 내가 출구없는 미궁에 갇혀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죽어

가고, 탐정은 헛소리를 지껄이며 자신만의 추리로 범인을 잡아가지만, 그 모든 것들이 어둠에

가려져 있어서 찾을 수 없는 그런 상황. 아무리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하려고 해도 어둠이

상황파악을 허용하지 않는 그런 상황. 방대한 지식량과 현학적인 장광설로 이해를 용납하지 않는 이 책은 진짜 추리소설의 대신전이라는 별칭이 딱 들어맞는다. 독서의 한 걸음이, 한 걸음이, 

어쩜 이렇게 이해를 용납하지 않는 독서가 있을 수 있을까? 작가는 의도적으로 헛소리와 황당하

기 그지없는 논리와 방대한 지식량과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어둠의 지식들을 들먹이며 읽는 독자

들을 늪으로 유도한다. 나는 그저 그 늪에 잠겨가다 '?'만 머리 위에 떠올리고 늪에 가라앉아

버린 셈이다. 다 읽고 나서도 도대체 뭐를 읽었는지 이해 못하는 독서의 죽음. '나의 독서'를

죽여버린 이 책에 복수할 수 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 복수하는 거다. 그렇게 복수를 외치며 나는 다시 이 책을 펼쳐든다. 아뿔사, 이미 나는 이 책이 펼치는 독서의 흑마술에 빠져버린 것이다. 악마의 유혹에 이끌린 자에게는 죽음이라는 결말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그것에 빠져버린 사람에게는 그 유혹을 벗어날 방법은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의 끝, 혹은 시작
우타노 쇼고 지음, 양억관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23.세상의 끝,혹은 시작-우타노 쇼고

 

'아내와 자식을 가진다는 것은 운명에게 볼모를 바치는 일이다.'

 

책 첫장에 나오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이 문장을 보면서 떠오르는 건, 이 문장에서

흘러넘치는 남성적인 자신감과 남성 우월주의가 당대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이컨과 동시대를 살았던 셰익스피어가 쓴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보

알 수 있듯이, 그 시대에는 사회적으로나 상식적으로나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무력한 존재였고, 가정의 지배권은 남성이 잡고 있었다. 가정이라는 배의 선장으로

거침없이 항해를 이끌어나가는 강력한 힘의 소유자인 남성. 바로 그런 당대의 사

회상이 있었기에, 베이컨은 자신감 있게 이 문장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우리 사회나 옆 나라인 일본 사회에서도 베이컨의 시대와 같은 강력한 남성상이 

정에 서도 지배적인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세상이 변화면서 가정에

남성들의 위치는 과거와 같이 강하지는 않다. 지금 우리 시대의 남성들은 가정을

지키기 위해서 고군분투할지는 몰라도, 가정의 강력한 지배자로 군림하기는 어려운

것이다.(물론 모든 가정이 동일한지는 나 스스로도 장담할 수는 없다.^^;;)

 

<세상의 끝,혹은 시작>은 그렇게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한 남자의 이야

기이다. 아니, 이 남자에게 고군분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 남자는 절망의

구덩이에 빠져버렸고, 그 절망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부림친다. 그건 고

군분투라기 보다는 살기 위한 발악에 가까워 보인다. 이 남자의 발악은 숨겨져 있던

자식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식의 비밀을 알기 전까지는 자신이 행복하

다고 여겼고, 남의 일에는 무관심하기 그지없던 평범한 이기주의자였다.

 

그러나 자식의 비밀을 알고 나서는 그는 더 이상 자기삶이 평온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삶이 지옥의 구렁텅이에 다가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에, 자신이 행복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진실이 아닌, 기만과 허위로 가

득했기에 행복했던 그의 삶. 하지만 이 남자의 삶은 진실이 모습을 드러내자 순식

절망으로 치닫게 된다. 진실이라는 태풍은 기만과 허위가 만든 행복을 용납하

않고 날려리고 앙상한 실제 삶을 드러내 보여준다. 삶의 앙상한 모습이 실제의

습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남자는 이제 앙상한 삶이나마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며

하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아마 궁금할 것이다. 남자에게 삶의 진실을 깨닫

해준 자식의 진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남자의 자식이 초등학생 연쇄유괴살

건의 범인이였다는 사실이다.

 

너무나 끔직한 진실 앞에서 남자는 절망했고, 기만과 허위에 가득찬 자신의 이기적

을 되돌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행동은 이미 때늦은 행동이고, 과거를

식으로든 되돌릴 수는 없었다. 남자는 어떻게 이 사태에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

그에게 어떤 결말이 기다릴 것인가? 그는 자식이 연쇄살인범이라는 세상의 끝에서

어떤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아직 아버지이자 남편으로서 한 가정을 꾸려 나가지 못한

나는 감히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나는 그저, 이런 끔찍한 일이 내 미래에 일어나

않기만을 기대할 뿐이다. 다만, 나는 이 책의 처음에 나온 베이컨의 말을 소설 속

현실과 지금의 상황에 맞춰서 바꿀 수는 있을 것 같다. 그게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가상의 이야기가 던진 질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기기에. 마지막

으로 이렇게 내가 바꾼 문장을 남기며 이제 이 부족한 글을 끝맺고자 한다.

 

'아내와 자식을 가진다는 것은 새로운 운명적 삶을 시작하는 일이다. 이 삶을

시작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당신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각오를 해야 한다.

만약에 그런 각오가 없다면, 당신은 아내와 자식을 가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아내와 자식을 가진다는 것은 당신 자신의 모든 것을 걸 각오를

해야할 정도로 만만치 않은 일인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