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건 & 호킹 : 우주의 대변인 지식인마을 8
강태길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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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건&호킹:우주의 대변인-강태길

 -우주는 심연이다.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무한한 우주의 어둠을 보고 있노라면, 심연을
들여다보는 공포감이 느껴진다. 무한하고 끝없는 어둠만이 가득했더라면 우리에게 우주는
공포 그 자체였으리라. 그러나 우주에 점점이 박힌 별들이 환상적인 빛무리를 우리에게
선사함으로써, 우주는 어둠의 심연이 아니라 우리가 꿈꾸고 상상할 수 있는 검은 캔버스가
되어버렸다. 인류는 과거부터 그 검은 캔버스에다 자신들만의 상상력으로 멋드러지고,
이상한 그림을 그리고, 자신들만이 알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서 사람들에게 전파시켰고,
그것은 신화,종교,예술,철학,과학,정치,사회 같은 인류 삶의 전방위 영역에 영향을 끼치며
지금까지도 우리 삶에 전해내려오고 있다. 

현대에 들어 이 검은 캔버스를 덧칠하는데 있어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누가
뭐라고 해도 과학일 것이다. 수학적인 공식과 계산,증명과 가설,이론으로 무장한 합리성의
화신 같은 과학이 무한한 우주를 설명하는 최일선에 서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 말은 이제
우주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과학적인 사고와 과학적인 언어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사는 것도 힘들고, 삶의 무게에 찌들린 이들에게 이 말은 어찌보면 우주에 대해서 관심끄고
살라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세이건&호킹>에 나오는 두 과학자는 '그렇지 않아.'라고 말하며 우리의 귀에 우주에
대한 신비를 소곤거리며 우주를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양자장론과 일반 상대성이론을
섞어 말하며 우주 기원의 신비를 밝혀나가는 스티븐 호킹이나 우주의 아름다움을 대중의
언어로 설명해주는 칼 세이컨은 우리가 우주에 대한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고, 그것에 관해
알고자 잠시의 노력을 한다면 누구나 우주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잠시 삶의 무게를 내려놓고 이 얇은 책에서 흘러나오는 우주의 대변인 두 명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깨닫게 된다. 저 어둠의 심연인 우주가 우리 삶의 근원이자 토양인 무한하고 신비한 
세계라는 사실을. 그 잠시간의 여유가 우리 삶을 더욱 더 신비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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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겨져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박도영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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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겨져-미야베 미유키

묘하네요, 정말 묘하네요. 기발한 이별이야기에 뒤이어 읽은 게 초자연 현상에 바탕을 둔
괴담스런 분위기를 풍기지만 단순한 괴담만은 아닌 사람의 이야기라니... 저 자신의 독서
취향을 저 자신도 종잡을 수 없네요. 그래도 그게 저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렵니다. 세상 누구도 이런 저를 이해할 수 없은 상태에서 저 자신도 저를 이해할 수
없다면 저 자신이 너무 불쌍하니, 그냥 넘어가는 게 좋겠군요.(역시 이게 무슨 말인지
저 자신도 알 수가 없군요.^^)
그래도 제 자신의 취향을 알 수 있는 건 이 작품이 미미 여사의 작품이라는 사실. 작가
이름이 미야베 미유키라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이 작품은 이미 저한테 읽기가 예약된 것이나
마찬가지랍니다. 이렇게 일군의 작가들을 거의 충성맹세하는 식으로 읽어나가고 있는데,
특히나 미미여사는 저를 실망시키지 않는 작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개인의 취향이 있기에,
저의 이런 생각과 다른 분도 계시겠지만, 그건 뭐 개인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고요,
저한테 미야베 미유키라는 이름은 재미없는 작품을 안겨주지 않는 작가랍니다. 그건 아마도
책에 있어서만큼은 날카롭거나 비판적이기 보다는 향유하고 즐기려 하며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려는 저 자신의 의지가 큰 역할을 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글솜씨가
뛰어나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저는 그냥 그녀의 글로서 만들어진 이야기의 궤적을
따라가며 그녀가 만든 이야기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뿐입니다.그것은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바탕으로 인간과 사회의 갈등이 빚어낸 양상들을 때로는 무섭게,때로는 가슴 아프게,대로는
즐겁게 그려나가며 인간의 모순적이고 총체적인 모습들을 다양하게 형상화하는 그녀의
다채로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제가 기쁨을 느낀다는 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이 책도 그런 연장선상에서 읽어 나갔습니다.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이야기의 저변에 깔고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을 그리고 있는 단편집인 <홀로 남겨져>는 그녀의 주 활동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추리 소설에 속하기 보다는 초자연 현상을 통해서 인간들의 내면을 바라보는
심리소설들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 책이 에도 시대라는 비과학의 시대를
배경으로 시대와 불화한 인간들의 모습과 그 갈등의 양상을 괴담으로서 형상화한 <괴이>라는
공포 소설과 그녀의 다른 추리 소설들과의 경계에 위치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요, 미미여사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초자연 현상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이라는 점에서 이말은 맞아들어
갑니다. 그녀가 아무리 무섭고,섬뜩하며,환상적인 이야기를 써나간다고 해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그 초자연현상들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감정입니다. 시간을 거슬러서 살아남은 인간의
복수심, 남에 대한 배려와 이해 없이 오직 자신의 생각만을 관철시키려는 이기심,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인간이 느끼는 죄책감, 돈에 대한 과도한 집착을 일으키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왜곡되어버린 인간의 탐욕, 사랑이라는 이름의 집착, 그리움을 가득 품고 있는 사랑까지.
그녀가 이야기의 형태로서 드러내기 전까지 그저 그런 무채색의 감정 덩어리에
불과했던 이 감정들은 그녀가 만든 이야기 속에서 인간과 만나며, 한 사회의 모습과 상호작용하며,
초자연적인 사건들과 엉키며, 이야기의 흐름에 흘러들어 이야기 속을 도도히 흘러가면서 자신만의 색깔로 빛을 내며 이야기 속 등장인물들을 물들입니다. 우리가 그냥 그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그 빛깔을 들여다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재미라는 선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미야베 미유키가
만든 이야기의 흐름은 충분히 그럴 힘이 있는 것이죠. 저도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흘러 가다
재미를 느낀 것이죠.
어쨌든 때로는 아릿하게, 때로는 무섭게, 때로는 슬퍼하며 읽다보니 미야베 미유키가 만든 이야기의 흐름 속을 흘러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서글퍼집니다. 역자는 이 작품을 읽다가 인간들의 모습이
무섭다고 했는데, 제가 보기에 이 작품에 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무섭다기 보다는 정말 서글픔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자신들을 지배하는 감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휩쓸려 들어가는
모습이 너무 슬퍼보이더군요. 인간은 진짜 그렇게 자기 자신의 감정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래도 미미 여사께서 마지막 이야기를 통해서는 한줄기 희망을 선사해주더군요.
저는 그 한줄기 희망에 의지해서 살아볼랍니다. 나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감, 세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그 기대감에 의지해서 말입니다.

*이 책에서 처음 이야기인 <홀로 남겨져>는 읽다보니 너무 서글퍼지더군요. 그리고 마지막 이야기인 <오직 한 사람만이>는 아릿함을 선사하더군요. 서글픔과 아릿함. 아마도 이 책의 독서는 그 두 감정 사이를 왔다갔다하지 않았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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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바이, 블랙버드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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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바이바이,블랙버드-이사카 코타로

에,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이어가는 중입니다. 갑자기 뜬금없이 이 말이
처음에 나와서 당황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저 문장은 제가 어떤 카페에 올린 제멋대로
쓴 글의 마지막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어떤 개연성도,논리성도,합리성과도
상관없이 그 문장을 처음에 적어보고 싶어서, 이렇게 적어봅니다. 그러니까 제 모든 글은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가고자 하는 저 자신의 무책임하고,제멋대로인 욕망때문에 벌어지는
하나의 사건이라는 말인데, 그 욕망이 전혀 상관없이 제가 적어나가는 글들을 이어준다고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음, 막상 적고보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이건 제가 무심코
읽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자들의 이해 못할 말들의 영향인가 봅니다. 처음부터, 죄송하다는
말을 드려야겠군요. 횡설수설 헛소리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무튼, 이번에는 <바이바이,블랙버드> 이야기입니다. 중요한 건 이게 이야기라는 점입니다.
그전까지는 감상이나 생각이라는 말을 썼는데, 이제부터는 이야기라는 말을 써보려고 합니다.
책과 나만의 내밀한 대화. 세상 누구의 것도 아닌 나만이 행한 그 대화. 그 유일무이한 대화가
세상이라는 책에 나만이 써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야기라는 말을 써보려 합니다.
아마도 세상과 우주를 하나의 책으로 여긴 보르헤스라면 제 말을 이해해 줄 것입니다.
(확신할 수는 없네요. 그는 스페인어를 쓰고, 저는 한국어를 쓰니까요.^^)
사실 이 책은 오랫만에 읽은 일본소설입니다. 오랫만이라는 이 말이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제가
최근 몇년동안 게걸스럽게 일본 소설을 폭식하다가 최근에 잠깐 일본 소설과 거리를 두고, 서양
책들만 잔뜩 읽고 있었거든요. 그게 뭐 어떤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한 것은 아니고,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는데, 막상 그렇게 하다보니 진짜 묘한 기분이 들더군요. 그 동안은
일본 소설을 계속 읽어서 아무리 서양 책을 읽어도 동양적 정서(음, 적고 보니 이 단어의 개념 
정의가 불확실하군요.)가 꾸준히 유지된 기분이었는데, 이번에는 그냥 서양 책만 읽다 보니
제가 겉으로는 검은 머리에 노란 피부를 가진 인물인데, 속으로는 백인의 정체성을 가진 듯한
기분이 들더군요. 프란츠 파농이 말한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저한테는 <노란 피부 하얀 가면>
이 된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한국 뉴스에는 약간만 관심이 가고 미국, 유럽 뉴스에
관심이 집중되더군요.(절대로, 절대로 저는 주식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점 믿어 주세요.)
그래서, 우연히 <바이바이,블랙버드>를 읽으면서 헤어진 옛 애인을 만난 기분이었습니다. 
'그래, 예전에 이런 기분이었지.'라는 말을 적용할 수 있는 이 독서의 시간은 행복했습니다.
개인주의적이며 논리적이며 때로는 묵직하기 그지없는 서양 책들만 만나다가 캐릭터들의 개성과
간결하고 짧은 문장, 기발한 구성과 내용 전개로 읽는 즐거움을 전해주는 일본 소설 특유의 
맛을 접하고 보니 잊어버린 옛맛의 향취가 되살아나 기뻤습니다. 이번에 읽은 맛이 이사카 코타로
가 만들고, 예전 느낌이 나서 기뻤습니다. 예전의 그 기발하며 쿨했던 이사카 코타로의 모습이 
보였거든요. <오듀본의 기도>에서 허수아비가 말을 하고,<사막>에서 사막에 눈을 내리게 하겠다고 대학생이 외치고, <중력 삐에로>에서 방화와 DNA가 얽히고,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에서 존 레논의 목소리를 코인로커에 가두고,<러시 라이프>에서 도둑이 도둑질하다 동창생을 만나게 만든다는 그 이사카 코타로 말입니다.
(적고보니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분명한 건 그 얘기들이 다 그 소설에 나온다는
점입니다.)그런 이사카 코타로가 쓴 이별 소설이 이 <바이바이 블랙버드>인데요, 기발한 작가답게 평범한 이별 이야기가 아닙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호시노 가즈히코는 많은 남자들이 꿈꾸는
양다리도 아니고 다섯 다리를 걸친 아직 문어 수준은 아닌 바람둥이입니다. 순진하게 좋으면 좋다고 얘기하며 여자들에게 달려가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며 여자를 진실되게 좋아하는 이 순진하고 어딘지 어리숙해 보이는 남자는 그 어리숙함 때문에 사채를 쓰고 못 갚아
'버스'타고 어딘가 무서운 곳으로 떠날 지경에 처하게 됩니다. 사채업자들이 파견한 초슈퍼 울트라
프리 아이언 원더우먼 마유미가 감시하는 상황에서 그는 초슈퍼~(이하 생략) 마유미에게 부탁해서 자신이 만난 다섯여자들과의 이별을 감행합니다. 물론 자신의 사정은 숨기고 마유미와 결혼한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요. 하지만 그는 단순한 말만 늘어놓고 이별은 하는 인물은 아니라서요, 이별하면서도 미안함에 그녀들을 위한 자신만의 이별의식을 벌입니다. 그것은 그녀들을 돕는 것이기도 하고, 그녀들에게 자신의 진심을 보여주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이 다섯 건의 이별의식을 보면서 갑자기 마음이 찡해지더군요. 그러니까 그때 제가 느낀건 논리적이며,합리적이며,철학적이며,분석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의식이었습니다. 무엇인가를 명확하게 파악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살며시 마음에 스며들어 마음을 울리는 미풍과도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랑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마음, 그녀를 진심으로 생각하는 마음, 인간이 인간을 진정 인간으로 생각하고 대해주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관심을 놓치지 않을 때에야 나오는 진심이 가득 담긴 마음만이 줄 수 있는 그런 행복. 예,제가 본건 그 다섯 여자를 순수하게 진심으로 좋아하고,그녀들을 아낀 남자의 모습이자 자신과 관계맺는 이들 모두를 순수하게 진심으로 대하는 한 남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좌충우돌 활약하며 점점 변해가는 미워할 수 없는 한 여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느낌, 그 따뜻함, 그 개성, 그 훈훈함, 그 기상천외함, 그 사랑스러움.
어느 것 하나 좋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서양책이라는 음식만 먹다가 별미로 한번 먹어본
일본소설이라는 음식에 푹 빠진 상황이랄까? 이런 상황이라면 다시 일본 소설을 게걸스럽게 먹을지 모를 일입니다. 다시 일본 소설 폭식이 찾아올까요? 그건 저도 장담할 수 없겠네요.
그래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바이바이,블랙버드>가 연주하는 선율을 잊지 않으리라는 점입니다.
그들의 모습이 내 마음에 깊숙이 박혔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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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 나탄 지만지 고전선집 336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지음, 윤도중 옮김 / 지만지고전천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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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자 나탄-고트홀트 레싱

진정한 지혜란 무엇일까요? 저같이 무지하고, 지혜롭지 못한 인간은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 같네요. 하지만 지혜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지혜롭지 못한 행동으로 볼 수 있는 것
몇가지를 알기에 그 행동을 안하기 위해 노력하는 중입니다. 이 방법을 쓰면 최소한 어리석어
보이지 않거나 나 자신이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거든요. 그런 지혜롭지 못한 행동 중에
대표적인 것이 싸우는 행위인데요, 어떨때는 이 행동이 반드시 필요할 때도 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싸운다면 그건 정말로 어리석은 행동이겠죠. 개인적으로 본다면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듯 보이는 잦은 싸움.그런데 불행히도 인류의 역사는 집단적 싸움인 전쟁으로 점철되어 있죠. 
이 관점에서 본다면 인류가 지혜로운 길을 걸어온 것으로는 보이지 않네요.^^
어찌되었든 진짜 지혜로운 이는 싸우기 전에 이기거나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방법을 선택하겠죠.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현자 나탄>의 나탄은 작품의 제목대로 진정한 현자처럼 보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족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기독교인들에게 원한을 품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기독교인의 자식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자식처럼 아끼며 키웁니다. 이런 진실한 사랑의 방법이
나중에 이것이 종교적,정치적으로 문제가 됐을 때 그 자신의 위기를 넘기게 해줍니다.(물론
이런 것을 바라고 키운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종교의 구분, 종교적
기득권과 종교와 얽힌 정치적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인간을 위하는 마음가짐으로 다른 이들을
대하는 나탄의 태도입니다. 그는 자신의 원수인 기독교도의 자식을, 자신을 위기에 몰아넣은
신전기사를, 자신에게서 재산을 빼앗으려 한 술탄을, 자신에게서 불리한 정보를 얻으려 한
수사와도 대화를 통해 그들에게 믿음을 줍니다. 그들은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포용하려는
그의 진심을 행동으로서, 영혼의 울림을 통해서 이해하고 그를 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식의 행동은 현자라는 말보다는 동양 철학에서 말하는 성인에 가까워보입니다.
그래서 제가 보기에 제목도 <현자 나탄>보다는 <성인 나탄>이 더 어울려 보입니다.
물론 지극히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자신의 행동으로 자신의 지혜로움을 증명한 현자 나탄. 이 희곡은 그런 그의 행동이 극의 갈등을
해소하고, 나탄 자신의 위기를 넘기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 상태에서 모두가 화합하는 상태로 만들어 극을 마무리짓게 합니다. 한 사람의 지혜로움이 많은 이들에게 행복을 주는 형태의 이상주의의 힘을 보여주는 결말. 저는 이런 결말이 어찌나 좋은지, 그 모습을 상상해도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독일 근대 희곡의 아버지 레싱은 이렇게 계몽주의와 근대의 합리적 인간관의 이상적인 모습이 실현되는 모습을 하나의 극으로서 실현시켜 보여주며 자신의 꿈을 표현한 것이겠죠. 문인들이
열어주는 이야기로서의 이상. 현실의 힘이 우리를 집어삼키며 압력을 가하는 이 시대에 이런 이상이 실현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서 힘이 되는 것 같습니다. 힘들지도 모르지만 이상을 꿈꾸고, 그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면 이상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가상의 이야기로서 보여줌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꿈꿀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이겠죠. 네, 그래서 저도 <현자 나탄>을 읽고 다시한번 힘을 내어보렵니다. 다시한번 꿈을 꾸어 보렵니다. 내 자신이 지금보다 더 나이지고, 내 주변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행복해지고, 이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는 꿈과 이상을.
*물론 그렇기 되기 위해서는 실천이 중요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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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통신 - 유쾌한 지식여행자가 본 러시아의 겉과 속 지식여행자 13
요네하라 마리 지음, 박연정 옮김 / 마음산책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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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통신-요네하라 마리

지형적으로 본다면 미국보다 훨씬 가까운 나라 러시아. 하지만 우리는 지형상의 거리와
상관없이 러시아 보다 미국을 훨씬 더 가깝게 생각하고,대신 러시아를 굉장히 낯설어합니다.
미국보다 실제로 훨씬 더 가깝지만 인식적으로 훨씬 더 먼 나라인 러시아. 그러나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네요. 바로 러시아어 동시통역자이자 유쾌한 지식여행자 요네하라
마리 여사의 <러시아 통신>이 있으니까요.
이 책에서 마리 여사는 제2의 고국이나 다름없는 러시아의 문화와 풍습,가치관,정세,러시아인의
삶의 모습 등을 여과없이 드러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마리 여사가 제2의 모국어라고 할 수 있는
러시아어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얻은 것이자 러시아어 동시통역사로서 여러 차례 러시아를
방문하고, 다수의 러시아인들을 만난 과정에서 얻은 것으로 박제된 죽어 있는 지식이 아니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지식으로서 러시아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년간의 경험에서
얻은 이 펄떡펄떡 살아 움직이는 러시아의 생생한 모습은 마리 여사 특유의 유쾌한 입담과
독특한 상상력과 어우러져 독자들에게 다가갑니다. 독자들은 그저 마음의 문을 열고 마리 여사가
입맛 좋게 요리한 러시아라는 생생하고 맛좋은 요리를 먹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러시아는 자신의 속살을 펼쳐 보여줄 것입니다. 대처의 말대로 '러시아는 수수께끼 속 수수께끼.
그리고 또 수수께끼'이지만 우리는 그 수수께끼가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리 여사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수수께끼를 조망할 수 있는 지형도를 그려주기 때문입니다.그녀 덕분에 
이제 러시아라는 수수께끼는 힘겹고 어두운 미지의 영역이 아니라 가능성이 가득한 하나의
흥미진진한 이야기 보따리 같은 수수께끼로 다가옵니다. 어떤 것에서도 흥미진진한 요소를 발견해서 그것을 독자들에게 전해줘서 그것들에 흥미를 가지게 만드는 마리 여사 특유의 능력 때문에
발견한 러시아라는 미지의 이야기 보따리. 앞으로 조금 더 흥미를 가지고 그 이야기 보따리를
바라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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