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들의 세계사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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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한당들의 세계사-보르헤스

보르헤스 소설의 씨앗이 되는 보르헤스의 첫 소설집. 가상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허구적 창작력보다는 기존의 역사적인 사실을 재구성하여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단편소설같은 불한당들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역사를 구성하는 위대하고 빛나는 인물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무자비하고,폭력적이며,사악하며,때로는 실수를 저지르며 세상의 역사를
수놓은 불한당들의 이 매혹적인 이야기는 기존의 소설구성이나 역사서
전기류와는 다른 표현과 구성을 보여주며,이것은 대중문화의 영역인
영화와 탐정소설의 표현방식과 맞물리며 이들의 이야기를 생생히 살아있는
악당들의 이야기로 채색한다.
펄떡펄떡 살아숨쉬는 악한들의 이야기인 이 책은 세상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세상이 선과 악의 양면을 통해 흘러나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제 보르헤스는 폭발한 준비가 되었다. 앞으로 읽을 책들은 보르헤스의 폭발하는
이야기가 빚어내는 환상적인 꿈들일 것이다. 나도 읽을 준비를 하고서, 그 꿈들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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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에 바라다 - 제142회 나오키상 수상작
사사키 조 지음, 이기웅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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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폐허에 바라다-사사키 조

1.
회색의 뇌세포를 이용해 사건의 트릭을 파악하고,미스터리를 파헤치는 지적인 인물들보다는
일어서서 직접적으로 행동하는 활동적인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추리소설들을 써 온 사사키 조.


전후 50년이 넘는 세월동안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속에 매몰되지 않고, 끊임없이 현실과 충돌하며,
경찰로서의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경찰관 3대의 이야기 <경관의 피>.
일본의 진주만 기습의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노력하는 일본인과 그를 막으려 하는 일본 경찰의
숨막히는 추격적을 그린 <에토로후발 긴급전>.

내가 읽은 사사키 조의 소설들 속 주인공들은 시대적 모순과 현실의 부조리함 앞에서 무너지거나,
굴복하기 보다는 언제나 힘겨운 싸움을 선택하고,그 싸움 앞에서 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들이었다. 그 결과가 비록 비참한 죽음과 파멸같은 부정적인 모습일지라도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과 선택을 후회하거나 자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 부정적인 결과를 받아들인 채
쓸쓸한 최후를 맞거나,자신의 행동으로 후대 인물들을 살리거나 자신의 의지를 후대 사람들에게
넘긴다. 그런 의지적 인간들의 모습을 그리는 데 주력한 사사키 조의 소설들을 읽다보면
인간의 삶과 삶의 의지에 대한 희망이 불꽃처럼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살아보는 거다. 삶이 힘들거나 고달플지라도 살아보는 거다.'라는 문장이 그의 글을 읽고나면 폭포수처럼 마음에서 샘솟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세번째로 읽은 책인 <폐허에 바라다>는 앞에서 읽은 책과는 달랐다.
휴직 경관이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건들의 진실을 그린 연작소설집인
<폐허에 바라다>는 삶의 의지보다는 삶과 현실에 대해 본질적 질문들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난 존재인가? 나는 내가 살아가는 공간이 빚어낸 틀에
얼마나 얽매인 존재인가? 나는 나와 살아가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인간관계망에서 얼마나 벗어낸 존재인가?
사사키 조는 <폐허를 바라다>라는 책에서 의지적 인간의 모습보다는 
인간의 삶이 공간적이며 문화사회적인 틀과 환경및 인간관계망의 영향속에서 얼마나
제약받는지를 끊임없이 조망하는 것에 중점을 둔다.

2.
한순간의 판단미스로 피해자의 목숨을 구하지도 못하고,범인을 잡지도 못하고,
심지어 범인의 자살까지 막지 못한 훗카이도 현경의 현사 센도 타카시.
그는 범행현장의 참혹함과 자신에 대한 자책과 죄책감으로 심각한 정신적인 타격을 입어,
휴직을 신청한다.
정신적인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한 치료의 기간을 가지는 그.
그러나 비록 수사상의 실수를 저질렀지만,수사에 필요한 동물적인 직관과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고루 갖춘 뛰어난 수사관인 그에게 범죄의 틀에 얽매인 인간들이 도움을 요청한다.
사람들의 도움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범죄와 마주서는 형사 센도.
범죄와 마주치는 과정 속에서 그가 목격한 것은 자신이 성장했고,살아가는 환경과 공간과 문화와
인간관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매는 인간들의 어리석고,슬프고,무서운 삶의 모습이었다.

오지가 좋아하는 마을. 호주인들이 모여듬으로서 급속히 성장한 마을 니세코.
그러나 호주인들이 급작스럽게 늘어나는 만큼,
그곳에 사는 일본인들은 호주인에게 반감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 '오지'에 대한 반발심은 공권력에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센도는 한 호주인이 억울한 협의를 받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니세코로 향한다.
거기에 도착한 그가 목도한 것은 독일인이 유대인에게,
미국의 백인들이 흑인들에게 품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타자에 대한 격렬한 혐오의 감정이었다.

폐허에 바라다. 온천에서 치료를 위해 쉬고 있던 센도에게 15년전의 동료가 연락을 한다.
동료인 야마기시는 15년전의 비슷한 살인사건이 벌어졌음을 알리고,센도는 직감적으로
15년전 사건의 범인인 후루카와와 지금의 사건이 엮어있음을 알아챈다.
몰락한 탄광촌에서 극빈한 삶을 겪으며 성장한 후루카와는 어린시절에 이미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나락을 경험한 인간이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으며,하루하루의 생존을 걱정해야 했으며, 

자신과 동생을 죽이려고 했으며,
마지막에 동생과 자신을 버린 어머니 때문에 자아가 파괴된 자기파멸적 인간 후루카와.
센도는 그가 태어나고,자란 탄광촌의 폐허를 둘러보며 후루카와의 삶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후루카와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만나는 것은 과거라는 시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자신의 삶을 파괴한 한 남자가 그려나가는 슬픔의 초상이었다.

오빠 마음. 과거의 그릇된 관행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어촌 마을의 살인사건 수사에 나선 센도.
그릇된 관행을 통해 기득권을 유지하는 동네 유지와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기 위해 노력한
청년의 충돌끝에 벌어진 살인사건. 그 충돌의 틈바구니에서 센도는 이익과 기득권과
과거의 틀에만 집착하는 인간 마음이 풍기는 인간 마음의 썩은냄새를 맡게된다.

사라진 딸. 경찰의 실수로 살인범이 도주하다 차에 치여 죽는 사고가 벌어진다.
중요한 것은 죽은 범인의 집에서 여자를 감금하고 죽인 흔적이 발견된 것.
그러나 범인이 죽어버렸기에,죽었다고 여겨지는 여자의 시체를 찾을 수 없게 되고,
그 상황에서 경찰의 수사는 난항에 빠진다.
절망에 빠진 피해자의 아버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센도를 찾아가고,
센도는 아버지의 진심어린 설득에 넘어가 피해자의 시신을 찾기 위해,
한 변태성욕자의 과거를 쫓기 시작한다.

바쿠로가와의 살인. 17년전 신참시절에 맡았던 살인 사건에서 센도는 누구라도 죽일 것 같은,
누구한테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악당에 가까운 용의자를 증거부족으로 놓친다.
17년이 흘러 그 용의자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는 센도. 그는 사견 현장으로 향하고,
거기서 용의자를 둘러싼 사람 다수가 살해동기가 있는 현실과 마주친다.
17년전 사건의 빚을 풀기 위해 사건의 진실에 도전하는 센도.
거기서 그는 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지를 목격한다.

복귀하는 아침. 정신적 상처가 거의 다 치료되었음을 알고,복귀하려던 센도는
예전에 알던 지인의 부탁으로 살인사건 수사에 나선다.
사건 수사를 지속해나가다 센도가 만난건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 대해서 품을 수 있는
극한의 악의였다.

3.
센도는 휴직한 형사이기 때문에,실제적인 수사와 체포를 할 수 없다.
다만 그는 현지 경찰의 수사에 도움을 주는 형태로 수사에 관여한다.
이것은 탐정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일본의 현실을 반영한 사사키 조의 현실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센도는 사사키 조가 만든 현실적 탐정인 셈이다.
그리고 센도는 사사키 조가 지속적으로 그려나가는 의지적 인간의 모습도
반영하고 있다. 그는 최악의 상황에서 겪은 정신적 상처를 다른 이들의 어려움을
돕고, 사건 해결에 도움을 주는 방법을 통해 치료해나간다.
인간들의 나약함과 어리석음과 슬픔과 어두움을 만나며 자신의 상처를 치료해가며
결국에는 자신의 상처를 완전하게 극복하는 센도.
하지만 그가 의지적 인간이라는 점과는 상관없이 그가 처한 일본의 현실은 암담하기 그지없다.
과거와는 달리 모든 이들이 희망을 품고, 모든 이들이 잘 살아갈 수 있는 경제적 성장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인간들은 절망하고,타자에게 혐오감을 품고,몰락한 환경에서
자라난 이들은 정신이 황폐화되기도 하며,경쟁 구조 속에서 낙오되어 뒤틀린 인간들은
현실에 증오심을 품고 비정상적인 행위를 일삼고,누군가는 승리와 이윤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질주하다 많은 이들에게 큰 상처를 남기고,
그렇게 상처받은 이들은 또다시 다른 이들에게 악의를 품고.
이러한 현실 앞에서 센도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입장 바꿔 말해도 내가 혹은 우리는
무엇을 말하고,할 수 있을까?
센도는 그저 자신의 상처를 묵묵히 치유해갈 뿐이다. 그리고 묵묵히 폐허에 바란다.
더 이상의 비극이 없기를.
나도 센도처럼 하늘에,폐허에 바란다. 소설과 같은 비극이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하지만 이 바람은 과연 이루어질까? 알 수 없다. 정말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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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봉우리
유메마쿠라 바쿠 지음, 이기웅 옮김 / 시작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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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신들의 봉우리-유메마쿠라 바쿠 

*이 책은 오랫만에 반말로 쓰려고 합니다.
반말로 써야 이 책을 읽은 감동을 조금 더 쉽게 전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은 2010년 읽은 일본소설 중 <하늘을 나는 타이어>와 더불어 가장 재미있었고,
인상깊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읽을때의 흡입도는 <하늘을 나는 타이어>가 더 뛰어났지만,
읽고 나서의 여운은 <신들의 봉우리>의 경우 제가 지금까지 읽은 책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조지 맬러리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오른 등반가들처럼,
나도 책이 거기에 있으니까 책을 뽑아들어 읽기 시작했다.
거기에 무슨 이유가 필요할까.
거기에는 그저 책이 나를 끌어들이는 중력과 읽고자 하는 내 의지의 호응이 있을 뿐이다.
책을 펼치자 그곳에 그들이 있었다. 신들의 봉우리,
인간이 범접하기 어려웠던 천상의 영역인 에베레스트에 도전한
인간들의 모습이 그곳에 있었다.
그들은 그저 묵묵히 신들의 봉우리를 올라가고 있었다.
얼어붙은 대지와 인간의 발자국을 거부하는 낯설고 거친 환경,
신들의 봉우리에서조차 인간들을 얽어매는 경제적.정치적 요소들,
그리고 인간에게 정복이라는 단어를 허락하지 않기 위해
인간을 몰아붙이는 천운이라는 요소까지
그들을 압박함에도, 그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그 산을 올라갔다.
책의 화자인 후카마치 마코토가 용기를 내어 그들을 따라간 것처럼,
신들의 봉우리를 올라가는 등반의 여정같은 독서의 여정을 거치며,
나도 그들을 따라올라갔다.
신의 영역에 도전하는 남자들의 비릿한 땀냄새를 들이마시며,
그들의 불타는 열정에 내 마음이 불타며, 그들의 산에 대한 집착에 동화되며,
그들의 고독을 함께 들이마시며, 나는 어느새 얼어붙은 정상에 올라와 있었다.
아, 그곳에는 오직 나밖에 없었다. 오직 나밖에.
아무도 없는 그 황홀한 백색의 대지는
나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 천상을 향해 열린 공간이었다.
그곳에 인간이 올라왔다는 의미는, 인간이 그곳을 침법했다는 의미 밖에 안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들은 끊임없이 올라왔고, 올라올 것이다.
산이 거기에 있기에, 하늘이 올라오라고 그들을 재촉하기에.
상상의 힘 때문에 그곳에 도달한 나는 그저 지그시 밑을 내려다볼 뿐이다.
그곳에 아직 올라오고 있는 그들이 보였다.

조지 맬러리.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의 영광을 위해,
대영제국이 못 밟는 땅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제국의 욕망에 이끌려
신들의 봉우리를 오른 남자. 계속되는 실패에도 불구하고,
힘겹게 한걸음씩 정상을 향해 올라가던 그는 몇번의 도전끝에 정상을 눈 앞에 두고
사라진다. 그가 과연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밟았을까?
그는 세계 처음으로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밟는 사람이 되었을까?
돌아오지 않은 이에 대한 이런 질문의 메아리는 부질없다.
하지만 이 질문은 <신들의 봉우리>로 이어진다.

하부 조지. 불운한 어린 시절을 거쳐 타고난 재능을 선보이며
산에 미쳐서 끊임없이 산을 오르는 남자.
누구보다도 뛰어난 클라이머의 재능을 가지고 있지만, 누구보다도 불운했고,
어느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한 어둠의 산악인이 하부 조지다.
인간이 버리고, 이 사회가 버리고, 그렇게 미친듯이 매달리던 산마저
자신을 버린 이 불운한 남자는 그러나 타고난 근성과 열정으로 산을 올라간다.
산이,자연이,인간이 자신을 버렸지만 그 버림받음을 자신의 열정과 근성,동
물적인 재능으로 기적으로 만드는 이 남자는
이번에는 누구도 도전하지 못한 불가능한 도전에 나선다.
그것은 오직 그만이, 사회에서 버림받고,
또한 스스로 사회를 버린 이 남자이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하세 츠네오. 산이,자연이,인간이,사회가 사랑한 빛의 산악인.
누구보다도 빛났고, 누구보다도 살아생전에
화려한 업적을 쌓았던 기적의 등반가가 하세 츠네오다.
숙명의 라이벌인 하부 조지가 언제나 그의 그늘에서 헤맸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는 확실히 행운아가 맞다.
남부러울 것 없는 것처럼 보인 하세. 그러나 그도 언제나 하부의 어둠이 자신을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고, 바로 그것 때문에 하부의 불가능한 계획을 알고 새로운 등반에 나서다
산의 부름을 받고 숨을 거둔다. 빛나는 등반가의 어이없는 죽음.
하지만 아무리 그가 빛나더라도 산을 오르는 자의 숙명을 피할 수 없는 법.
그렇게 그는 천상으로 열린 산의 눈을 자신의 무덤으로
삼아 세상을 떠나갔다.

후카마치 마코토. 믿었던 애인과 친구의 배신에 충격받아
신들의 봉우리로 떠나간 산악 전문 기자.
그는 실패한 등반의 아픔을 안고,
네팔 카트만두의 거리를 헤매다 사라진 맬러리의 카메라를 발견한다.
어쩌면 맬러리가 세계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은 장면을 기록한 것일 수도 있는
그 카메라에 홀린 그.
그러나 그 카메라는 그의 손을 떠나가고,
그는 그것을 쫓아 다시 카트만두를 헤매다 하부 조지를 만난다.
그때부터 그는 하부 조지의 불가능한 도전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그는 발견한다. 자신안에 불타고 있는 산에 대한 열정을.

그들이 보인다. 그들은 지금도 올라오고 있다.
어쩌면 그들은 영원히 올라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들의 여정 자체가 위대하기에, 도달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위대하고 빛난다는 사실을.
신들의 여정에 가닿기 위한 인간의 몸부림이 품고 있는 그 위대한 신성이
이 세상의 어떤 별들보다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20년간에 걸쳐서 그들의 등반을 세밀하게 그려낸
유메마쿠라 바쿠의 세밀한 숨소리가 내곁에 들려온다.
이제 떠나야 할 순간이다. 올라오고 있는 그들을 놔두고 떠나는 내 발걸음.
그 발걸음을 내딛자, 나는 깨닫는다.
이것이 독서의 진정한 쾌감이라는 사실을.
신들의 봉우리를 그들과 함께 오른 강렬한 느낌이야말로 문학을 읽는
독서의 진정한 힘이라는 사실을.

'암벽에서 올려다보면 산 정상 같은 건 보이지 않는다. 그저 파란 하늘 뿐이다.
그 파란 하늘을 꿈꿨던가. 정상보다 더 높은 그곳.
아마 우리는 그때, 이 지상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꿈꾸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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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
고데마리 루이 지음, 김대환 옮김 / 잇북(Itbook)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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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고데마리 루이

불륜과 살인과 폭력과 질투와 찌질남과 비정상적인 행동이 넘쳐나는  

올해 나의 일본소설 독서편력에
드디어, 드디어 단비가 내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비는 순수의 비입니다. 네, 순수의 시대가 아니라 순수의 비가 맞습니다.
불륜과 살인과 폭력과 질투와 찌질남과 비정상적인 행동을 양분삼아 자라난 올해 나의 일본소설
독서편력이라는 나무에 너무나 드물게 순수한 사랑이라는 양분이 덧대어진 거죠.
아하, 순수의 비를 맞고 순수한 사랑을 떠올리는 독서를 하다보니 기분이 좋아지네요.
물론 제가 솔로로서 크리스마스를 맞아 미쳐서 이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 지극히 정상입니다.
지극히 정상으로서 순수한 사랑 이야기에 기뻐하는 것이죠. 일본소설을 읽다가 너무 오랫만에
이런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만나서 너무 기분이 좋네요.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순수해서가
아니라 고데마리 루이라는 장인의 글 솜씨에 의한 것이라서 더욱 기분이 좋네요.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별미도 일반적인 음식을 먹다 먹어야 별미지, 별미만 먹다 보면
그건 더 이상 별미가 아니겠죠. 저의 일본소설 독서가, 특히 사랑관련 소설들의 독서가 정상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별미 위주였기 때문에, 저에게는 이제 더 이상 별미가 별미가 아니었습니다.
불륜하면 '아!! 불륜이야!'가 아니라 '아, 불륜이구나' 정도로 그칠 정도였죠.  

제가 일본의 연애소설을
읽는다는 건 언제나 '사랑과 전쟁'의 식의 이야기만 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죠.
간간이 순수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건 정말 미약한 수준이었죠.
하지만 이 미약한 수준의 이야기가 제게 주는 힘이란 어찌나 크던지!!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진 것 같지만, 그 정도로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좋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냈구요.
이 책의 작가인 고데마리 루이는 한국에서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에서 연애소설의 달인으로 통하는 작가입니다.
저도 처음 읽어봤는데, 이 작가의 이야기 구성 능력과 필력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실로 오랫만에 연애소설을 읽으면서 가슴에 북받치는 감성의 울림이 전해지더군요.
(어쩐지 이제부터 이 작가의 작품을 찾으며 읽어보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책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헤어진 두 연인이 만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현실의 이야기와
헤어진 남자가 헤어진 여자를 위해 만든 동화의 내용이 교차되어 펼쳐집니다.
현실의 이야기는 덴고와 아오마메가 만나는 <1Q84>가 연상되더군요. 

하지만 헤어졌지만 다시 만나기까지의 여정을
그리고 있으며 두 연인이 서로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는 점에서만 비슷하고,
나머지 부분에서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은 <1Q84>와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1Q84>와 달리 여자가 가끔씩 모르는 남자랑 만나 섹스를 하지도 않고,
남자가 미성년자인 소녀와 종교적 의식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로는 원조교제에 가까운 행위도 하지 않고,
선구라는 종교 집단의 리더가 보여주는 것 같은 파렴치한 성범죄 행위도 없고,
리틀피플이 '호우호우'라고 외치지도 않고, 

공기 번데기에서 갑자기 사랑하는 연인이 출현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책을 다 읽고 나서 '이건 뭐지?'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게 됩니다.
(<1Q84>에서는 이 '이건 뭐지?'라는 식의 모호함이 최대의 매력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늘과 바다가 만나는 곳>은 모호함과 불확실함보다는  

정직한 스트레이트 펀치를 독자에게 날립니다.
두 사람이 사랑하고,헤어졌지만,다시 만나게 된다라는 펀치 말이죠.
하지만 단순히 두 사람의 사랑이야기라는 현실성만을 이 책이 강조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책에는 사랑의 환상성을 강조하고, 두 사람의 사랑에 감성을 더욱 더 빛내주는 동화가 있습니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이 동화는 오직 남자가 여자를 위해서 쓴 동화로서, 외롭고 사랑에 상처받은
유목민과 도둑 고양이(이건 번역어인데, 길냥이로 해주면 더 좋을 것 같군요.^^)의  

슬프고,아름답고,감동적인 유대를 그리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동화가 있었기에 두 사람의 사랑과 이 소설
자체의 감동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동화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바,
저는 이 동화보고 울컥 감정의 물결이 샘솟더군요.
그러나 이 유목민과 도둑 고양이의 동화는 두 사람의 사랑이라는 틀속에서 바라보면  

더욱 우리의 감정을 진하게 만듭니다.  

결국 이 동화라는 게 두 사람의 사랑의 파생물이거든요.
어쨋든 사랑에 이끌려 다시 만날 수 밖에 없는 연인의 이야기를 읽으며,  

실로 오랫만에 연애소설에서 감동을 받은 것 같습니다.  

이 감정을 소중히 간직해 보렵니다. 아마도 그러다 보면 미래의 저도
누군가에게 감동적인 동화 한편 써줄 수 있지 않을까 하네요. 음, 욕심이 너무 큰가?

'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텅 빈 그릇이 되어줘.
그러면 넌 그 사람 평생 죽을 때까지 사랑하며 살 수 있을 거야.
처음부터 내용물이 꽉 들어 찬 그릇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담을 수 없겠지. ...
그릇은 속이 비어 있으니까 쓸 수 있어. 알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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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 작은 거짓말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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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21.달콤한 작은 거짓말-에쿠니 가오리 

<밀실살인게임>-살인,<설계자들>-살인에 이어 <좀비들>-좀비 얘기까지 갔다가
갈곳은 사후 세계나 순교,해부학의 영역일 것 같지만,
저는 과감하게 삶의 욕구 중에서 가장 생의 의지에 가까운 사랑 이야기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이야기가 순수한 사랑이나 낭만적인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불륜이라는 점이
조금 마음에 걸리기는 합니다. 역시 저라는 인간은 정상적인 이야기에 끌리지 않는 걸까요?

아니,아니 그럴리가 없습니다. 저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으로서 밝고, 화사한 세상을 꿈꾸는 인간입니다.
(윽,거짓말 하려니 갑자기 속에서 올라오네요.)
어쩌면 너무 평범하게 살아가기에 간접경험인 책에서만은 조금은 드라마틱한 이야기들을 보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이라면 가오리의 책과는 조금 거리가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저는 의외로 가오리의 책도 종종 읽습니다.
 

여기서 의외라는 면이 중요합니다. 대체적으로 가오리의 책은 여성 동지들이 좋아하고, 많이 읽습니다. 그에 반해 남성 동지들은 가오리의 책을 그렇게 좋아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가오리의 여린 감성과 드라마틱한 면이 없이 물 흘러가듯 흘러가는 잔잔한 일상의 묘사가 자신의 몸 속에
사바나의 전사의 피가 아직도 흐르고 있는 남성 동지들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하나 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저는 가오리의 소설을 꾸준히 읽어오고 있습니다. 읽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있으면 읽게 되는 것인데요, 이게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요상합니다. 크게 끌리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이상한 약을 먹은 것처럼 계속 읽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읽다보면 이게 이상하도 묘한 매력이 있는 겁니다. 미약에 취한 것처럼, 물 흐르듯이 읽다보면 어느새 다 읽어버리는 소설이 저한테는 가오리의 소설인 셈이죠.

저는 이번에도 그렇게 책을 읽었습니다. 그 책이 <달콤한 작은 거짓말>입니다.
이 책은 <빨간 장화>의 뒤를 이은 결혼에 관한 연작 장편 소설인데요, 그 내용이 가오리 특유의
미묘한 감성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실 <빨간 장화>는 큰 변화없이 담담하게 흐르는 권태기 부부의 일상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서 드라마틱과는 거리가 있는, 한국의 주말 드라마와 아침 드라마에 도저히 쓸 수 없는 너무나도 소소한 작품입니다.


그에 비해 <달콤한 작은 거짓말>은 잔잔하게 흐르다가 갑자기 반전의 신호가 울려 펴지는 작품입니다. 앞 부분에 남편에 대한 강한 집착에서 이미 어느 정도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는데, 중반부를
넘어가면 그 이상한 기운이 현실이 되어, 부부는 거짓말이 일상이 된 거짓투성이 결혼 생활을 이어갑니다.

자신들만의 고독하고 쓸쓸한 결혼 생활을 이어가던 부부의 메마른 생활에 불륜이라는 비가 내린 것이죠. 부부에게 그 불륜은 달콤합니다. 불륜은 권태로운 부부의 결혼 생활에 힘을 불어넣습니다.
물론 부부는 서로의 불륜을 감춥니다.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죠. 이렇게 부부는 자신에게
달콤한 작은 거짓말로 결혼 생활의 균형을 맞추어 갑니다. 이 부부에게 지금의 결혼이란 거짓의 토대 위에 축한 환상의 성인 셈이죠.
'사람은 지키고 싶은 사람에게는 거짓말을 해. 혹은 지키려는 사람에게.'

통념상으로 생각해본다면,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결혼 생활. 그러나 이것 또한 결혼의 서글픈 진실일 수 있다는 사실에 갑자기 서늘해집니다. 세상의 모든 부부가 반드시 이렇게 살고 있지 않으리란 말을 자신있게 내뱉을 수 있을까요? 세상 모든 부부가 낭만적 열정에 사로잡혀 살아가고 있을까요?

아마도 이 질문에 우리는 쉽게 '네'라고 대답하지 못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이 소설을
읽고 나서 결혼에 대해 씁쓸한 감정이 드는군요.
하지만 씁쓸하더라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랑 곁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 혹은 그녀의 곁에 서서
그들과 함께가야 할 것입니다. 나중에 거짓말을 할때 하더라도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곁으로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그게 사랑이고, 결혼의 의미 아닐까요?

씁쓸하게 결혼의 뒷맛을 씹다 보니, 저는 거짓말 투성이 책을 덮고 있더군요. 아아, 저는 이제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로 돌아오고 보니 제 옆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사무치더군요.
거짓말로 넘쳐나도 좋으니 누군가 옆에 있으면 좋겠다는 잘못된 생각이 갑자기 들었습니다.
그 생각에 제가 젖은 것은 가오리의 소설이라는 미약에 제가 이번에도 넘어갔기 때문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다음 번에는 내 핏속의 사바나 전사를 소환해서 그때만은 넘어가지 않게 해보렵니다. 물론 저는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나만의 달콤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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