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가게 재습격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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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빵가게 재습격-무라카미 하루키

 우리는 지금 '~이즘'과 '~주의'가 저물어가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에게 중요한 건 그런 사상이나 철학,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는 냉혹하고도 비정하며 피할 수 없는 현실 그 자체의 모습이다.
현대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이즘'과 '~주의'보다는 생존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더욱 더 크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와중에서 조각조각 해체된 사상의 잔해들을 바라볼 뿐이다. 
하지만 이 해체는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해체된 사상을 대신해 주도권을 잡은 개인들은, 파편화되고 원자회된 개인들은 자신들의 좌표와 방향을 잡지 못해 혼란스러워하고,불안해다가 결국 생존이라는 현실 명제에 주도권을 넘겨줘버렸다.
그것이 아마 지금의 우리 모습일 것이다.

나는 항상 그 혼란스러워하는 개인의 모습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떠올린다. 첫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좌절된 학생운동의 이상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혼란스러워하는 개인의 모습을 도시적인 감성으로 그려내기 시작한 이 작가는 지속적으로 거시적인 사상과 이데올로기가 사라진 도시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혼란스럽고,불안하고,모호한 모습과 
그러한 개인의 상실감과 쓸쓸함을 자신만의 개인주의적인 스타일로 표현하고 있다.



 
그 연장선상에 단편집인 <빵가게 재습격>이 있다. 여전히 카오스적인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그럼에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하루키적인 개인들이 펼치는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의 모음집이나 다름없는
이 단편집에는 하루키 특유의 스타일을 바탕으로 해학과 익살의 맛까지 보여주며 하루키 단편의 묘미를 제대로 느끼게 한다.
참을 수 없는 허기 때문에 한밤중에 맥도날드를 습격해 돈이 아닌 햄버거를 훔치는 부부의 이야기와, 수수께끼의 코키리 실종 사건의 진실을 쫓는 남자의 이야기와,
바른 생활 사나이인 여동생의 결혼 상대에게 반감을 느끼는 바람둥이 오빠의 이야기와,
헤어진 쌍둥이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남자의 이야기와,
집에서 일기를 쓰다 로마 제국의 붕괴와 1881년의 인디언 봉기와 히틀러의 폴란드 침입을 연관시키는 사람의 이야기와,
우연히 걸려온 한 통의 전화를 시작으로 기묘한 하루를 보내는 남자의 이야기에서,
방향성을 상실하고, 혼란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하루키적인 개인들은 그 모호함과 불확실함을 무기로 자신들의 삶을 하나의 서사로 구성해내며, 그 서사를 통해 독자에게 쫀득쫀득한 고기를 씹는 것 같은 소설을 읽는 맛을 선사한다.

혼란스러운 도시적 개인의 삶을 읽을 만한 이야기로 구성해내는 하루키의 능력에 감탄하다 보니
어느새 책은 끝나있었다.
너무나 빨리 끝나버린 독서의 시간에 당황했고, 당황하다니 보니 참을 수 없는 허기를 느꼈다.
허기에 시달리다 보니 홀연히 하나의 생각이 나를 지배한다.
그것은 '빵가게를 습격'하고자 하는 의지였다.
그렇게 소설이 끝나고 나는 소설의 첫부분으로 다시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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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 손턴 와일더의
손턴 와일더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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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1)질문
1740년 7월 20일 페루에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가 무너진다.                                               

당시 식민지 페루의 가장 멋진 다리로,
식민지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던 이 다리는 혼자 무너지는 것이 아쉬웠는지,
그때 다리를 걷고 있던 다섯 사람을 죽음의 세계인 명부로 끌고간다.

신학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에 몰두하던 주니퍼 수사는 우연히 그 다리 근처에 있다              

다섯 사람이 발버둥치며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다. 그는 그것을 목격하고 생각한다.                     

이것이 기회라고.
신의 섭리가 세상을 작동하는 것임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싶었던 그에게는
완벽한 불의의 사고로 죽은 다섯 사람이야말로 신의 힘을 증명하는 사례였던 것이다.
만약 그의 조사로 그들이 죽을 만한 죄를 저지른 사실이 증명된다면,
그때의 사고는 신의 섭리를 증명하는 완벽한 사례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사는 죽은 다섯 사람의 조사에 매달린다.
6년의 시간동안 걸쳐 조사를 한 수사는 마침내 그들의 이야기를 한권의 책으로 출판한다.

장장 6년의 세월동안 다섯 사람의 삶의 궤적을 쫓은 수사.                                                     

수사는 거기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2)대답
수사는 거기에서 인간을 보았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의 모습을.
단지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살아있음이 삶의 절대적인 기본 조건을 이룬 상황에서
각자의 욕구와 감정과 이성이 덧붙여져 각자의 삶을 형성해나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때의 인간이란 평범하기도 하고, 평범하지 않기도 했다.
때로는 광기에 휩싸이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사악해지고,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살기 위해 비겁해지고, 때로는 남을 괴롭히고,
때로는 사랑에 목숨을 걸고, 때로는 삶이 버거워 도망치기도 하고, 때로는 탐욕스럽고,
때로는 어린애처럼 천진난만하고, 때로는 마음의 어두움을 과감하게 드러내는,
때로는 짐승과 같은 욕망에 휩싸이고,
천사와 악마,어린애와 어른을 왔다갔다하는 인간의 모습들.                                                           

단순하게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인간의 모습에서,
평범함이라는 외피를 쓴 인간의 삶이 얼마나 복잡다단하고 이상하며 특별한 것인지 드러내주는
글에서, 그가 본 것은 신의 섭리가 아니라 인간 삶의 신비였다.

3)결말
자신감있게 시작한 수사의 책은 신의 섭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삶의 오묘함을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책이 증명하는 사실에 당황한 교단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신의 논리에 책이 위배된다는 생각을 하고,
책과 수사 모두를 이단으로 결정해 화형을 명한다.
누구보다도 신의 섭리를 믿었던 수사는 그렇게 자신의 책과 함께 화형당한다.
단지, 인간 삶의 흔적을 따라가 그들 삶의 복잡함을 드러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재가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4)살아간다는 건...
살아간다는 건 그렇게 오묘한 것이다.
수사가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려 시작한 행위가 죽음이라는 예상밖의 행위로
끝나버린 것처럼.
우리는 평범하게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삶이란, 인간이 살아간다는 행위란
그렇게 간단하거나 단순하지 않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원시적인 욕망과 감정, 
문명화된 이성과 내적인 규율의 충돌을 계속하는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존재이기에,
그리고 그런 존재들 다수가 모여 만들어낸 사회와 문명과 문화와 공동체를 살아가야 하기에,
우리네 삶이란 쉽게 얘기하거나, 비하할 수 없다.
이 어렵고도 쉬운 삶의 진실을 생생히 살아있는 인간들의 모습을 더해 그려내기는
어렵고도 어려운 일이다.
그런 소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바로 이 점에서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생생한 삶을 보여주는 소설로서,
영문학의 고전으로 불리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때의 고전의 힘이란 우리네 삶의 힘과 일치한다.
삶이 소설이 되고, 소설이 삶이 되는 가상의 이야기로서의 소설.
<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는 그 문장을 생생히 증명해주는 소설로서
 내 머릿속에 깊이깊이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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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처에게 바치는 레퀴엠
아카가와 지로 지음, 오근영 옮김 / 살림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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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악처에게 바치는 레퀴엠 

결혼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연애가 이상에 조금 더 치우쳐 있다면,
같이 오랜 시간을 살아가야 하는 결혼은 필연적으로
현실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한 사람과 같이 자고,먹고,마시고,싸우고,슬퍼하고,기뻐한다는 의미이다.
이같은 현실의 힘 앞에 연애할 때의 환상과 이상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날것 그대로의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건, 때로는 인간적인 위력으로 우리를 즐겁게 하지만,
때로는 예상치 못한 모습에 당혹스러움과 놀라움을 느끼며
그 사람에 대한 나쁜 인상을 심어주기도 한다. 
이혼하지 않는 이상은 결혼한 부부는 이 나쁜 인상을 덮어두는 방향으로 해서
살아간다. 그것이 쌓이면 익숙함이라는 삶의 관성이 되고, 삶은 그렇게 흘러간다.

그러나 그렇게 흘러가는 삶의 관성이 어느 순간 폭발하는 수가 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변수와 평소의 불만이 함께 섞여서
어느 순간 '펑'하고 터지는 것이다.
이 폭발은 때로는 싱겁게, 혹은 평화롭게 마무리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이 폭발은 살인이라는 비극으로 막을 내릴 수 있다.

<악처에게 바퀴는 레퀴엠>은 삶의 관성에 이끌려 살아가던 남자들이
'펑'하고 터질지 모르는 모습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소설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그들이 '펑'하고 터지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친다.
어느날 갑자기 폭발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도중에 야금야금 폭발의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코믹한 상황극에,
유머 미스터리의 기수라는 아카가와 지로 특유의 예측하지 못하는 상황전개에 휘둘리면서
이 폭발의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삶은 정상으로 돌아와 있고,
남자들과 여자들은 언제나처럼 다시 삶의 관성에 휘말려 살아간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악처에게 바치는 레퀴엠이 남편과 아내 모두를 건드리고 지나갔다는 사실을.
세상 누구나 나쁜 아내, 나쁜 남편이 될 수 있으며,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살인까지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결혼이라는 제도를 이끌어가는 두 주체의 삶이 금이 간 얼음처럼

언제 파괴될지 모르는 것처럼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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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 디 아더스 The Others 1
크리스토퍼 무어 지음, 공보경 옮김 / 푸른숲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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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 

 

책을 읽고 나니 기이한 상상력의 롤러코스터를 탄 기분이었다.
섹시하고,이상하며,기괴하며,때로는 우울하고,슬프며,즐겁고,유쾌하며,
종잡을 수 없으며,때로는 무섭기까지 한 이 요상한
상상력의 롤러코스터를 다 타고 나서 현실로 돌아오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음,꽤 괜찮은 결말이구만.'

대마초 중독자로 8년동안 제대로 된 사건을 맡아보지 못한 소심한 경찰 시오필러스 크로,
왕년의 B급 영화의 스타로 이제는 미쳐서 머리 속의 화자와 대화하는 섹시 여전사 몰리,
쥐에 집착하는 순수한 생물학 연구자 게이브와 그의 시니컬한 개 스키너 콤비,
인간들의 우울함을 먹고 사는 터프한 술집주인이자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개조하는 여자 메이비스,
돌고래 성애자 약사 윈스턴,
그리고 소설의 가장 개성적인 등장생물로, 인간과 돌고래와 동시에 사랑을 나눌 수 있으며,
인간보다 때로는 똑똑하고, 때로는 어리석어 보이며, 최강 낭만주의자이자 사랑의 화신인
도마뱀인지 용인지 괴물인지 물고기인지 포유류인지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정체불명의 존재 스티브와 그외의 요상한 등장인물들이 엮어나가는
기상천외한 러브 판타지 SF 액션 호러 서스펜스 드라마인 이 소설은 
시종일관 예측을 벗어나는 전개를 보이다 너무 평이한 해피 엔딩을 선택하며(??)
마지막까지 내 뒷통수를 때리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이 소설을 읽고 환각제를 마신 기분이었다. 종잡을 수 없는 이 몽롱한 기분이
나에게 환상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었을까.
어쩌면 내 꿈에 섹시 여전사 몰리와 정체불명의 스티브를 위시한
우울한 코브 마을 사람들이 찾아올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렇다면,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책을 읽은 결말치고는 정말 괜찮은 결말이 될 것같다.
그리고 그것이 소설 속 사람들만이 아닌 읽는 사람까지 포함한 진짜 모두에게 괜찮은 결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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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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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라의 독서파일 01-나는 왜 이 책을 읽다 잠이 왔는가?

몇주간 글을 쓰지 않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글을 쓰고 싶지 않다는   

나의 심각한 게으름때문이었다.
게으름이 뇌를 좀 먹고, 신경 전달을 방해하고,   

근육의 움직임을 막아버렸기에 나는 글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만은 글을 써보려고 한다. 게으름이 지금도 내 뇌와 근육을 방해하고 있지만
오늘만은 글을 써야한다는 의지가 게으름에게 승리를 거두었기에  

드디어 글을 쓸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한마디로 위의 글은 글을 안 쓴 것에 대한 비겁한 변명이다.^^;;)
 

게으름의 방해를 뚫고 썼기에, 나는 거창하게 짜라의 독서파일이라는 이름을 붙어보았다.
이것은 앞으로 계속 이런 식으로 글을 써나가겠다는 의지표명이다.  

그러나 과연 내 의지대로 계속 써나갈지는
게으름이라는 고질병을 앓고 있는데다가, 감정의 기복도 심한 나이기에 심히 의심스럽다.
그러나 시작이 반이라는 말을 믿기에,  '작심삼일만은 안 돼!'라는 의지를 가지고 있기에  

최소한 세번 이상은 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물론 더 이상도 쓸 수 있다.  

게으름의 습격만 없다면...

각설하고, 나는 오늘 독서파일 첫 번째 글로 최근에 화제를 모으고 있는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해 쓰고자 한다.
뜨겁다 못해 폭발 직전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이 책을 독서파일 첫번째로 정한 이유는
뭔가 심각하거나 심오하거나 철학적이거나 관념적이거나 의미심장한 이유때문은 아니다.
내가 이 책에 관한 글을 독서파일 첫번째로 정한 이유는  

내가 이 책을 읽다가 잠이 왔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 잠이 왔다는 그 사소한 이유 때문에, 나는 이 책에 관한 글을 쓰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도 '나는 왜 이 책을 읽다 잠이 왔는가?'로 정했다.
책을 읽다 잠이 온 이유에 관한 내적인 고찰이 주제이기에,  

이 글은 서평이나 리뷰와는 전혀 거리가 멀다.
정의에 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나 정의로운 신념을 설파하거나 고취시키는  

고상한 목적과도 거리가 멀다.
나는 그저 내가 왜 이책을 읽다가 잠이 왔는지 알려주고 싶을 뿐이다.
오직 그것이 목적일 뿐이기에, 무엇을 생각하든 기대이하가 될 것이 뻔하기에,  

이 글을 읽으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다만 '이 이상한 인간은 이 책을 이렇게 읽었구나'라는  

정도만 생각해 주었으면 한다.
책을 비평하거나 비판할 지식도,능력도,글빨도,철학도,역사의식과 창조적 생각도  

없는 인간이기에 이런 식의 글을 쓸 수 밖에 없음을 알려드린다.
그럼 이제부터 한번 글을 써 보려고 한다.

잠이 온 이유

1.육체적 원인- 그렇다. 잠은 지극히 육체적인 행동이다.  

육체적인 행동이기에 잠이 왔다는 건, 거기에 합당한
육체적인  원인이 분명히 존재함을 의미한다.  

그걸 의식하고 이 책을 읽었을 때의 내 육체적 상황을 생각해봤다.
그러니 잠을 잘 수 밖에 없는 육체적 원인이 떠오른다.
당시 나는 밤마다 미드와 헐리우드 블럭버스터와 일본 애니와 한국의 예능 프로와  

한국 드라마에 빠져 있었다.
보통은 적당한 수준에서 보다 말지만 이 책을 읽기 전날만은 무리를 했다.
대중적 상상력의 바다에서 헤엄치다 벌어진 이 무리한 행동은  

내 뇌가 그때 정상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며,
그 다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면이라는 늪속으로 내가 빠질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날 점심에 먹은 라면도 한 몫을 했다.  

최근 급격히 나빠진 위장이라는 장기가 점심때 먹은 라면의 소화를 거부한 것이다.
예상치 못한 위장의 저항으로, 내 내장기관에 쓰이던 에너지 대다수는 위장에 쓰였다.
식곤증보다 더 무시무시한 위장으로의 에너지 집중은 나의 체력 소모를 과하게 했고,
거기에 뇌가 퍼 뜨린 수마의 유혹까지 더해져 나의 육체는 '정의란 무엇인가' 뿐만 아니라
'여자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읽는다고 해도 잠이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과연 육체적 원인만 잠이 오게 했을까? 아니, 그렇지만은 않다. 

2.내용적 원인

1)칸트
나는 칸트 평전을 돈 주고 사서, 줄을 그어가며, 메모를 해가며 읽었다.  

구토끼를 참으며 순수이성비판을 읽다가 gg쳤으며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에 나오는 주인공이 부러웠다.), 그린비의 리라이팅 클래식에서  

간신히 순수이성비판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가라타니 고진의 트랜스크리틱에서는 칸트의 새로운 가능성을 봤으며,  

그 외의 각종 철학 입문서와 다른 학자들의 강의를 통해서 칸트를 만나고 또 만났다.

 



그래서 칸트는 내게 너무나 익숙하고, 진부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단계로 보면 이렇다.

칸트를 만나다.-아, 칸트 형님은 위대한 철학자이십니다.
칸트를 만나다.-칸트는 독일 관념론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아직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칸트를 만나다.-칸트는 뛰어난 철학자다.
칸트를 만나다.-칸트의 철학은 뛰어나지만 분명히 문제점이 있다.
칸트를 만나다.-칸트의 말대로 살기는 너무나 어렵다.
칸트를 만나다.-아,이제 칸트 지겹다.
칸트를 만나다.-칸트에 대한 언급하고 싶지 않다.
칸트를- 칸트 그만 말해!!
칸-그만 말하라고
ㅋ-고마해라!!! 

이런 상황에서 나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다시 칸트를 만났다.  

몸은 잠을 원하고, 마이클 샌델은 역시 칸트의 이성과 도덕에 관해 말하고,  

나는 읽다가 정말 힘겹고도 힘겨웠다. 이러니 잠이 안 올수가 있겠는가!!

2)존 롤스
서양 철학에서 정의하면 존 롤스다. 존 롤스하면 정의다.  

정의하면 존 롤스고, 존 롤스하면 정의다.
이말은 거짓이 아니다. 진짜 서양 철학에서 정의하면 존 롤스고, 존 롤스는 정의다.



그러니까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존 롤스가 나올 것을 예감했다.
그런데 진짜 나오니 머리가 노래지기 시작했다.
다시한번 말하겠다. 서양 철학에서 존 롤스는 정의고, 정의하면 존 롤스다.  

그러니 존 롤스는 정의고, 정의하면 존 롤스다. 그러니까 존 롤스는 정의고...

 
*이 감상문은 미완성인데, 언제 다시 끝까지 쓸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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