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기린
가노 도모코 지음, 권영주 옮김 / 노블마인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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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 소녀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한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이 소설을 추리소설로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더 읽으면 죽은 소녀가 친구에게 빙의된 것 같은 내용이 나순다.  

그 순간, 표지의 공포스러운 모습과 함께 '이거 공포소설 아냐?'하는  

두번째 오해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이 소설이 추리나 공포소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한 소녀의 죽음,  

그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 소녀의 죽음이 주변 인물들에게 미친 영향과
그로 인해 사람들이 변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십대 소녀들이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적 요소와  

십대 소녀의 삶을 그린 청소년 소설이기도 하며,  

단지 십대들만이 아닌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생각해보게 만드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 불확실성은 죽은 소녀의 삶 자체가 불확실하고 흔들리는 삶을 살았다는 것에서 기인하며,  

동시에 그녀의 주변인물 다수가 흔들리는 삶을 살고 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자명하다.

하지만 이렇게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소녀는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해  

다른 이들이 변화하게 만드는 계기를 만든다.
소설 속 동화에 나오는 유리기린 처럼 언제 부서질지 모른채 외로움에 몸부림치던 소녀는
죽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유리기린인 자신을 산산이 부수고, 

찬란하게 빛나는 유리기린의 파편을 다른 이들의 가슴에 심는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다른 이들을 새롭게 빛나게 만든다.
이 놀라운 행위는 한 사람의 죽음이 단지 죽는다는 의미를 넘어서서  

다른 이들을 새롭게 살게 할 수 있다는 명제를 다시한번 실감하게 만든다.

죽음과 삶은 이어져 있고, 죽음을 통해 삶은 강한 힘을 얻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명제의 표본같은 유리기린 소녀가 남긴 여운.
<유리기린>을 읽는 것은 그 여운을 들이마시며 삶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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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에 대하여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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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나나에게는 연성 소설과 강성 소설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연성소설은 오컬트의 경향이 약하고, 극단적 설정이 약하다는 말.
강성 소설은 오컬트와 극단적 상황설정이 강하다는 의미.
그렇게 본다면 <그녀에 대하여>는 강성 소설이다.
삶과 죽음의 이야기 중에서 이 소설은 죽음의 경향이 강하고,  

심지어 주인공이 이미 죽어있는 상황.
최초로 유령 주인공을 내세운 소설이지만,
바나나는 언제나 그대로다.
언제나 그대로 그 자리에 서서 우리를 따스하게 안아주고,
삶과 사랑과 행복의 의미를 일상에서 찾게 해주는 치유의 전도사로서의 바나나는 여전하다.
그러니, 그녀여 슬퍼하지 마라.
그녀는 죽었지만, 슬픈 죽음이 아닌 행복하고 여유로운 죽음의 의미를 찾아서,
죽음을 삶으로 만들었으니.
그 모습에서 우리는 바나나의 소설을 읽을 때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치유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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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죄자 오리하라 이치의 ○○자 시리즈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선영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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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예측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오리하라 이치의 재능은 살아 있다.
사회파의 거죽을 뒤집어쓴 서스펜스 소설 답게
사회의 모순을 파헤치는 모습에 속을 뻔 하다가
어느 순간 '아, 이 작품은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이었지'라는 말이 절로 튀어나오게 하는 소설.
원죄자는 억울한 누명을 쓴 게 맞지만 동시에 그것은 억울함에 그칠 뿐이지 죄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와 관련된 소설 등장인물 다수는 죄에서 헤어나올 수 없는 그렇고 그런 존재들.
우리가 과연 누군가를 심판할 권리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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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공놀이 노래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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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공놀이 노래
요코미조 세이시
451p

 


 

5.죽은 이복형에게 바치는 슬픈 추모의 노래
이 소설은 반드시 마지막의 해설까지 읽어야만 한다. 만약에 해설까지 읽지 않고, 단순히 평범한 추리소설로 여기고 책을 덮는다면 그건 반쪽짜리 독서에 불과할 것이다. 반드시 해설까지 읽어야만 이 소설이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에게 어떤 의미이고, 그의 작품 세계에서 어떤 의미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에도가와 란포의 명맥을 이어, 전후 일본의 정통추리소설에서 진가를 발휘한 요코미조 세이시는 만화 소년탐정 김전일의 할아버지로도 유명한 일본의 국민탐정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로서 명성을 얻은 작가다. 여기까지 생각한다면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단순히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한편에 불과하다고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해설까지 읽으면 이 소설이 작가의 가슴에 맺힌 감정을 노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이 감정을 중심으로, <악마의 공놀이 노래>의 감상문을 추리 소설과는 상관없는 방식으로 써보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사랑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여기 유부남인 기이치로라는 남자가 있다. 마찬가지로 유부녀인 하마라는 여인이 있다. 둘은 각자의 가정이 있었지만 운명처럼 사랑에 빠지고,역시 운명처럼 각자의 가정을 버리고 사랑의 도주를 감행한다. 고베로 도망친 두 사람은 세이시라는 아이를 낳고 살아간다. 그런데 기이치로의 본처와 그녀의 아들인 가나오는 그들과 달리 절망의 늪에 떨어져 삶이 망가져버린다. 기이치로의 본처는 기이치로가 자신을 버렸다는 배신감에 치를 떨다 자살하고, 아들인 가나오는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생긴다. 혼자 남겨진 가나오. 하지만 가나오는 다시 아버지와 배다른 동생인 세이시와 만난다. 고베에서 살던 하마가 병에 걸려 죽고, 기이치로가 재혼을 했는데, 이 기이치로의 새부인인 아사에가 가나오와 세이시를 모두 거둬서 키우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난 배다른 두 형제. 하지만 두 형제의 동거는 가나오가 젊은 나이에 '극단적 신경쇠약으로 인한 각기병'으로 사망함에 따라 불행한 결말로 끝맺는다.-

위의 글을 읽어보면, 요코미조 세이시가 가나오 모자에게 가지고 있는 복잡미묘한 감정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어린 나는 죄의식에 시달렸다. 그것이 아직까지도 지워지지 않는 강한 열등감으로 남아 오래도록 지속되었던 건 아닐까.'

요코미조 세이시는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살아간다는 이유만으로 가나오 모자에게 죄스러운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와 흡사한 이 감정은,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의 존재 자체가 가진 커다란 짐이자, 살아가면서 평생 마음에 붙어다닐 죄책감이 되어버린다. 

시간이 흘러 요코미조 세이시는 전후 일본 최고의 추리소설 작가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명성을 이어가던 그는 일본이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며 사회 자체가 변화하면서, 거기에 발맞춰 미스터리 소설계도 따라 변화화면서 고리타분한 작가가 되어 위기를 맞기 시작한다. 변화의 기로에서 요코미조 세이시는 가슴 깊숙이 감춰두었던 이야기를 작품으로 써낸다. 그 작품이 바로 <악마의 공놀이 노래>이다.

이복형과 그 어머니에 대한 추모의 감정을 담아 써내려간 소설 <악마의 공놀이 노래>.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변화의 모색이 엿보이는 이 작품의 핵심에는 탐정인 긴다이치 코스케가 아니라 가나오라는 인물이 있다. 이복형인 가나오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이 인물은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엄청난 고통을 겪다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잃는 지경에까지 처한다. 소설 속 사건이 벌어지기 전에 이미 아버지를 잃은 그는, 귀수촌에 전해 내려오는 공놀이 노래의 가사에 따라 진행된 살인사건에 의해, 사랑하는 연인과 여동생과 어머니까지 모두 잃는다. 

피해자 몰살이라는 전매특허를 가진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와 피해자를 지키는데는 최악의 재능을 발휘하는 탐정 긴다이치 코스케와 소설 속 범인이 합작해서 벌인 이 끔찍한 상황 앞에서 가나오는 현실의 가나오가 겪었을 법한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소설의 마지막에 요코미조 세이시는 현실의 가나오에게는 전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 속에 묵혀두었던 말을 작중인물인 여배우로 성공한 오조라 유카리의 입을 빌려 소설 속 가나오에게 말한다.

'오빠, 여자인 저도 참고 견뎠으니 설마 어엿한 남자인 오빠가 견디지 못할 리 없어요. 강해지세요. 언제까지나 강하게 살아주세요.'

어쩌면 요코미조 세이시는 '강하게 살아 주세요.'라는 이 말을 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는지도 모른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생전에는 하지 못한 걸로 여겨지는 이 말을, 가슴 속에 깊숙이 감춰두었던 이 말을 위해 가나오는 그렇게 힘든 고난을 겪어야 했고, 소설 속 인물들은 죽어가야 했는지 모르겠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특유의 음습하고 어두운 분위기에다 작가 자신의 슬픔까지 더해져서 더욱더 슬퍼진 <악마의 공놀이 노래>라는 이복형에게 바치는 추모의 노래가 끝나고 나서 나는 생각에 잠긴다. 추리 소설을 이렇게 슬픈 가족소설처럼 읽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렇게 읽는 것이 허용된다면 나는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너가 만약 요코미조 세이시처럼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 죄가 되는 거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과연 이 질문 앞에서 어떤 대답을 해야할까. 아니 우리 모두는 이 질문 앞에서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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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길들이기 - 전예원세계문학선 310 셰익스피어 전집 10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신정옥 옮김 / 전예원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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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괄량이 길들이기
윌리엄 셰익스피어
전예원
154p


4.책담화: 진짜 웃음과 헛 웃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고 웃은 건 처음있는 일이다.  영국의 대문호의 작품을 읽고
웃음이 나올 줄이야.
예상치 못한 웃음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동시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웃어야만 했는가'라는 질문이 머리 속에서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이 참을 수 없는 욕구에 굴복한 어리석은 동물인 나는 결국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미흡하지만 작은 분량이나마 이렇게 글을 남긴다.
주체할 수 없는 어리석음의 욕구가 빚은 이 작은 결과물이 내 머리 속을 조급이나마 가볍게 하리라는 기대를 품은 채.

먼저 독자적으로 내가 어떻게 웃었는지 분석을 해 보았다.
그러니 내가 크게 두 가지의 웃음을 보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두 가지 웃음을 여기에 따로따로 적어보겠다.

첫번째 웃음-진짜 웃음

첫번째 웃음은 말 그대로 진짜 웃겨서 나오는 웃음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지금까지 내가 읽은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머러스하고,가장 황당한 사건들이 많이 나오는 희곡이다.
작품 속 인물들은 어딘가 과장된 모습으로 희화화되어 있고,
그걸 바탕으로 엉뚱하고 과장된 행동을 저지르며, 읽는 독자에게 기쁨을 선사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압권인 부분은 캐더리더와 페트루치오가 처음으로 만나 대화하는 장면.
말괄량이라기 보다는 왈패에 가까운 캐더리더는 페트루치오를 보자마자 줄기줄기 욕설과 저주를 퍼붓는다.
보통 남자같았으면 기가 죽어 같이 욕하거나 버럭 화를 낼 만한 상황에서
페트루치오는 역시 만만치 않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는 그녀가 욕설을 할때마다 칭찬을 한다.
그녀가 욕설을 내뱉으면 칭찬을 하고, 또 저주를 퍼부으면 마찬가지로 칭찬을 하는 것이다.
욕과 칭찬의 등가교환.  이 능글맞음을 통해 캐더리더의 아버지에게 결혼 승낙을 받아낸  페트루치오는 그렇게 오직 돈 많은 여자와 결혼하겠다는 자신의 목적을 훌륭히 이뤄낸다.

그 외에도 이 희곡은 중간중간 유머러스한 상황을 계속 만들어낸다.
아름답고 조신한 동생 비앵커가 마음에 안 들어 캐더리더가 그녀를 의자에 묶어놓고 때리는 장면이나, 비앵커와 결혼하기 위해 루첸티오가 자신의 가짜 아버지를 만들었는데,
갑자기 진짜 아버지가 등장해 당황한 가짜 아버지와 루첸티오의 하인들이
진짜 아버지를 비난하고,고발하는 장면등은 그 자체로서 재미있고,
우스운 장면으로서 셰익스피어의 유머스런 이야기 구성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 없다고 여겼다.
오히려 여기까지는 셰익스피어의 색다른 면에 이끌려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문제는 이 작품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진짜 우스워서 웃는 장면에서 더 멀리 나가 황당해서 헛웃음이 나오는 지점까지 내용을 끌고 가 버린다.

여기서 두번째 웃음인 헛웃음이 나온다.

두번째 웃음-헛 웃음

두번째 웃음은 상황과 인물들의 행동이 너무 황당해서 나오는 헛웃음이다.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희화화의 과정을 거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당대의 가치관과 고정관념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서 핵심적인 사항은 여성을 비하하고,
순종을 강요하는 정도가 아니라 여성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페트루치오에게 캐더리더는 인간으로서 중요한 게 아니라 돈을 가진 여성으로서 중요한 존재였다. 그에게 캐더리더는 얻어야만 하는 하나의 재산이었고,
그러기에 온갖 모욕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능글맞음을 발휘해 그녀를 획득한다.   

그녀를 얻는 순간 페트루치오는 그녀가 자신의 물건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신부는 내 소유물이니, 나의 동산이요 나의 집이요 나의 가구요 나의 밭이고 나의 외양간이요. 또 나의 말 나의 소 나의 당나귀요. 나의 이것도 저것도 다 되는 거요.'

하나의 물건으로서 페트루치오의 소유가 된 캐더리더.
하지만 페트루치오는 그녀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하나의 물건인 캐더리더가 순종하는 여자가 되길 원했다.
그는 캐더리더가 자신의 의지를 가지고, 반항하고,자유롭게 행동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는 그녀가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 듣는, 어떤 터무니 없는 일이라도 시키면 듣는 존재가 되길 원했다.
그는 물건으로서 그녀를 얻고 나서 그녀가 노예를 되기를 원했다.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페트루치오는 그녀를 순종적으로 만들기 위해 말괄량이 길들이기에 나선다.
헌데, 그 과정이 지금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어이없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페트루치오는 그녀를 순종적인 여자로 만들기 위해,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잠도 거의 재우지 않으며,하는 일마다 못 하게 하고. 그녀 앞에서 하인들을 의도적으로 엄청나게 핍박하는 행위 등으로 그녀를 압박하고,그녀의 기세를 짓누른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야만적이었던 여성을 변화시키기 위해
지극히 비인간적인 행위를 서슴지 않았던 페트루치오.
그의 다방면에 걸친 마초적 압박에 결국, 캐더리더는 두 손을 들고 그의 말이라면 무조건 듣고 보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당신이 태양이 아니라고 하면 태양이 아니랍니다. ...
당신이 이름이 붙이면 뭐든 그대로 돼요. 캐더린에게는 늘 그렇게 됩니다.'

그녀를 순종적인 여인으로 만든 건 두려움이었고,
그 두려움에 사로잡힌 그녀는 극의 마지막에 가서 모든 여성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남편들은 우리들의 주인이요 생명이며 보호자며 머리요 군주이십니다. ...
그러니 오만함을 버리세요. ... 그리고 남편의 발밑에 손을 놓고 엎드려요.'

이렇게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막을 내린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니 내 얼굴에서는 참을 수 없이 허한 헛웃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이토록 황당할 수가 있나?
어떻게 여성을 이렇게 비인간적이고,야만적인 존재로 비하하고,그것을 웃음의 소재로 삼을 수 있나?
어떻게 이토록 가부장적이고,권위적이며,오만할 수 있을까?
역시 그 당시에 여성은 2등인간에 불과했던 것이었나?

대문호인 셰익스피어도 당대 가치관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나는 황당함에 사로잡혀, 계속 실소를 터뜨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희곡은 평론가들의 가혹한 혹평에 난도질당한 작품이다.
셰익스피어의 초기 작품으로 군데군데 불완전하고 거친 면이 보인다는 점,
시작할 때 보인 서극이 중간에 사라져 버린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을 야만적.비인간적인 취급을 한 점에서
평론가들과 전문가들은 가혹한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서극:취객 슬라이는 술집 여주인과 술값 때문에 싸우다 지쳐 길거리에서 잠든다.
그걸 무심코 보던 지방 영주는 슬라이를 골탕먹일 계획을 세운다.
그를 자기 성에 데려가, 그가 눈을 뜨면 그를 영주로 떠받들고, 그의 자신의 기억을 말하면
그건 그가 미쳐서 환상을 본 것으로 우기기로 한 것이다.
계획은 성공적으로 이뤄지고, 자신을 영주라 착각하기 시작한 슬라이는 한 연극을 본다.
그가 보는 연극이 바로 <말괄량이 길들이기>이다.
한마디로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극중극인 셈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유머러스함과 황당한 상황 설정이 어우러진 스피디한 극의 구성상의 특성으로,
공연적으로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이 극의 성공은 1980년대까지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해서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읽기는 불편하지만,극으로 보는 것은 즐거운 작품이라 평한다.

사실 나도 이 희곡을 읽으며 재미를 느꼈지만 동시에 참을 수 없는 불편함을 느꼈다.
재미 때문에 생긴 웃음과 황당함과 불편함 때문에 생긴 헛웃음지 공존한 독특한 읽기의 체험.
내게 있어 <말괄량이 길들이기>는 두 가지 웃음이 공존한 기억으로 뇌리에 남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한 최후의 의문을 말하고자 한다.
진짜 셰익스피어는 단지 재미라는 요소를 위해 당대의 가치관을 답습한 것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당대의 가치관을 답습하면서도 동시에 당대의 가치관을 비웃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든 것일까?
어쩌면 셰익스피어는 동시대의 사람들과 함께 웃으며, 공감하면서도,
웃는 사람들과 웃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마저 비웃기 위해 이 작품을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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