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뷰

 

엄마를 잃어버리다.

 

엄마를 잃어버린지 일주일 째다.

-책의 첫 문장

 

<엄마를 부탁해>를 펼치면 나오는 첫 문장이다.

책은 처음부터 충격적인 문장을 들이대며

독자의 몰입도를 끌어올리고 있다.

도입부에서 이렇듯 충격적인 문장으로 시작한

이 책은 읽는내내 긴장을 놓치지 않게 하며

순식간에 독서를 끝내버리게 만든다.

 

몰입도랑 가독성이라는 측면에서

<엄마를 부탁해>가 가지고 있는 힘은

엄청나다.

 

하지만 이 책은 몰입도랑 가독성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가진 책이다.

 

나는 여기에서 그 무엇을 나름대로

얘기해보자 한다.

(뒤에 나오는 해설의 도움도 있었다.^^)

 

그러려면 먼저 엄마를 잃어버린 사실부터

주목해야 한다.

 

그들이 엄마를 잃어버린 건 사실이다.

그러나 과연 엄마를 놓친 순간부터

가족들이 엄마를 잃어버린 것일까?

 

아니, 사실 그 이전부터

그들은 엄마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그는 언제부턴가 대체로 엄마를 잊고 지냈다.'

 

엄마는 이미 잊혀진 존재였다.

 

정치학자 전인권이 쓴 <남자의 탄생>.



저자인 전인권은 이 책에서 흥미로운 말을 한다.

그는 엄마가 항상 엄마인줄 알았다고 고백하며

엄마가 엄마가 아닌 000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가 되는 순간 깜짝 놀랐다고 말한다.

 

그 말이 가진 의미는

한국의 가정에서 엄마는

인간 000가 아니라

엄마라는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라는 의미다.

 

우리는 000가 아니라

항상 그냥 엄마라는 역할로 그녀를 부르며

그것으로 그녀의 정체성을 확정해 버린다.

 

그렇게 되는 순간

우리에게 중요한 건 000가 아니라

엄마다.

 

엄마, 밥 줘~

엄마, 나한테 신경써 줘~

엄마, 사랑해 줘~

엄마, 이거 사줘~

엄마 엄마 엄마 엄마....

 

이 끝없는 엄마라는 말 속에는

엄청난 비극이 숨어있다.

우리는 항상 엄마에게 무언가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고 부탁하는 건

000가 아니라 엄마다.

우리는 엄마라는 개체적 존재보다는

엄마라는 역할을 사랑하는 것이다.

'너는 처음부터 엄마를 엄마로만 여겼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어서

가정을 차리는 상황이 되면

엄마의 자리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가 가정의 구성원이자 부모로서

정신이 없고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님의

존재를 잃어버리기 일쑤다.

 

<엄마를 부탁해>에 나오는 가족들도

이미 엄마를 잊고 있었다.

 

엄마는 잊혀진 존재로서 살아가다

진짜 사라져버린 것이다.

 

엄마를 잃어버리고 엄마를 찾다. 그러나...

 

소설의 가족들은

엄마를 잃어버리고 나서

엄마를 찾아나선다.

 

엄마를 찾아나서는 과정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되돌아보고

엄마라는 존재를 살려낸다.

 

자신들에게 헌신적이었던 엄마.

태산같이 버티고 서서 집을 지켜낸 엄마.

아버지의 바람과 방랑을 참아낸 엄마.

그들을 믿고 뒤에서 지켜봤던 엄마.

 

그 모든 엄마의 존재감이 모여서

만들어낸 엄마의 추억.

그 앞에서 가족들은 엄청난

죄의식을 느낀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수준을 넘어선

집을 다 태워버리고 사라진 집을 추억하는

수준의 몸짓이었다.

 

그들은 엄마를 찾아나서지만

그들이 찾는 엄마는 예전의 엄마도 아니고

쉽게 찾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끝없이 사랑을 퍼 주다가

더 이상 사랑을 주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엄마는

가족들의 무관심 속에서

사랑받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한없이 사랑했지만

돌려받은 것 없이

그렇게 우리들의 엄마는 사라져 간 것이다.

 

엄마를 부탁해

 

소설의 상황은 저렇듯 심각하다.

그러나 과연 소설의 가족만 그런가?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정은 저들과 크게 다른가?

 

아니,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상대적인 편차는 있을지언정

누구나 마음 속에

엄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제대로 표현되거나 실행되지 않는다는

점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우리는 엄마를 기억해야 한다.

그것은 엄마라는 역할뿐만 아니라

이름을 가진 존재로서도 기억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시작이다.

기억부터 시작해서 엄마에게 관심을 가지고

엄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고

엄마를 이해하도록 노력해보자.

 

그렇게 한다면

소설 속의 가족들이

무력하게 내뱉는 엄마를 부탁해 같은

말은 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엄마를 잊어버리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그렇게 한다면

여러분과 엄마간의 관계를

새롭게 형성할 수 있다.

 

그것이 내가 나 스스로와

여러분에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위의 글들을

줄줄이 적었다.

 

그렇다면 이제 마지막 말을 해보자.

 

세상의 모든 엄마들을

바로 당신들에게 부탁합니다.

그들을 지켜주세요.

그들을 사랑해주세요.

그들을 잊지 마세요.

 

당신 스스로의 엄마를

당신들이 지켜주세요.

 

그러니까 진짜로

엄마를 부탁합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별다른 문제가 없다면

제가 한말은 다 쓸데없는 말이기에 잊어 주세요.^^;;

 

*위의 글은 저의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임을 밝혀드립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 김영사on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리뷰

 

드라마에서 산문으로

 

노희경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98년에 방영한 <거짓말>이라는 드라마에서였다.

 

배종옥,이성재,유호정같은 배우들이 열연한

이 드라마는 많은 매니아들을 만들며

아직까지도 카페가 존속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난 이 시절에 <거짓말>이라는 드라마를

거의 보지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당시의 나에겐 노희경이라는 인물은

없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노희경이라는 세 글자를 머리에 박은 것은



2004년 작품인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드라마였다.

 

거기서 고두심이 마음이 아프다고

자기 가슴에 빨간 루즈를 칠하는 장면은

두고두고 내 가슴에 각인으로 남아 있다.

 

그때 나는 느꼈다.

천편일률적인 드라마가 넘쳐나는

한국의 드라마 상황에서

노희경이라는 작가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간직한

보물과 같은 작가라는 사실을.

 

시청률에 얽매이기 보다는 사람냄새나는,

고독하고 외로운 현대인의 사랑과 교류를 살갑게 그리는

작가라는 사실을.

 

그런 그녀가 이제 산문집을 내었단다.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산문집을.

 

지극히 노희경스러운 글들

 

<꽃보다 아름다워>를 머리속에 품고 있는

나의 경우에 그녀의 산문집이 궁금했었다.

 

우연히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읽어 보았는데,

'역시'라는 감정과 함께 '조금 아쉽네'라는

기분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노희경스러운 글들의 홍수 속에서

외롭고 방황하는 현대인들에게

사랑과 삶의 따스함을 알려주는

그녀의 매력은 고스란히 살아 있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그녀의 글 속에서 그녀 드라마가 가졌던

감수성과 따스함은 여전히 살아있었지만

산문으로서의 매력은 드라마의 그늘에 가리워진

느낌이었다.

 

그녀의 산문속에서는

산문 쓰는 노희경보다는

드라마 작가 노희경이 강하게 살아 있었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읽으면서 '역시'와 '조금 아쉽네'를

연발하게 하는 이유였다.

 

인간 노희경과의 솔직한 대면

 

드라마가 가공의 인물과 사건을 통해

작가의 생각과 느낌을 전달한다면

산문은 당연하게도 저자가

글을 통해 스스로의 솔직한 내면을 드러낸다.

 

이 책도 산문이기에

읽다보면 당연하게

인간 노희경과 솔직한 대면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녀가 만든 드라마의

원형적 인물을 만나는 느낌이며,

드라마가 아닌 그녀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치유받는 경험이었다.

 

고독을 벗어날 수 없는 그녀.

과거의 사랑을 후회하는 그녀.

최선을 다해 사랑하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는 그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그녀.

반항하는 그녀.

영화를 보고 자신만의 생각을 만드는 그녀.

아버지와 감동적인 화해를 하는 그녀.

 

이 모든 삶 속에서

그녀는 우리의 또다른 모습이였으며,

그를 통해 우리의 외로움과 아픔을

껴안는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와의 솔직한 대면은

우리 자신의 아픔을 껴안는 경험이자,

우리와 그녀의 사랑이 공명하는 경험이 된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모두 유죄?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모두 유죄>라는

도발적인 책 제목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유죄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사랑을 하고 있다면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고,

주변에 있는 지인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라는

의미로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사랑에 대한 고발보다는

사랑의 진정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 진정성이 우리에 가슴속으로 들어와 박히기를

그녀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녀의 이야기는 드라마에 머물러 있다.

그녀의 첫 산문집은

그녀 나름의 향기를 잔뜩 머금고는 있지만

꽃을 피우지는 못한 것이다.

 

그녀는 분명히 나아질 것이다.

다음에 책이 나온다면 더욱 나아질 것이고,

거기에서는 드라마에서 벗어난

자기만의 글을 보여줄 것이다.

 

다음 책에서 그녀의 글은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모두 유죄라는

도발적인 제목보다는

삶의 진실을 슬그머니 드러내는 제목과

드라마를 벗어난 자신만의 산문을 보여줄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이 도발적인 제목에 ?를 붙이련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다고 유죄가 아니라는

의미에서.

 

그것보다는 지금 자신의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리뷰

 

앙테크리스타= 이 책의 등장인물 크리스타= 안티크리스트(적그리스도)

 

1.

내 생애 처음 안티 크리스트라는 존재를 만나게 된 건

바로 이 영화



오멘이었다.

 

이 영화에서 안티크리스트인 데미안은

무자비하고,잔혹하며,소름끼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악마란 이런 것'이라는 서양의 주류적 관념을

여지없이 대변한다.

 

그런데 아멜리 노통의 안티크리스트인

앙테크리스타는  

오멘의 데미안과는 많이 다르다.

 

그녀는 귀엽고 앙증맞다.^^

 

2.

사건의 등장인물

블랑슈:

분명히 같은 반에 앉아서 수업을 듣지만

다른 이들은 존재조차 느낄 수 없는 투명인간이자

강력한 왕따포스로 수많은 급우들을 멀어지게 만드는

능력의 소유자.

크리스타를 만나기 전까지는 책만이 그녀의 친구였다.

'결핍이야말로 내 몸의 모국어였다.'

 

크리스타:

아름답고,매혹적이며,지적인 언변을 구사하며,

말끝마다 자원 봉사와 기부를 외치는

여왕같은 여인.

왕따 블랑슈와 우연히 친구가 된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녀는 거짓말과 속임수를

밥 먹듯이 해대는 악마였다.

 

그외 블랑슈의 부모님, 크리스타의 남자친구,

이름이 거의 나오지 않는 학교 친구들 다수등장.

 

사건의 시작

블랑슈는 크리스타가 자신을 부르는 줄 몰랐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이

자기 옆의 누군가를 부르는 걸로 알았다.

설마 설마 나를 부르는 거야!!

오 마이 갓!!!

여자들의 우상이자

남자들의 아이돌인 크리스타가,

그 예쁘고 똑똑한 크리스타가

그녀를 부를 줄이야!

 

그날의 만남.

그것을 통해 둘은 친구가 된다.

 

친구를 사귄 기쁨에 취한 블랑슈.

그녀는 이 기쁨을

부모님에게 알리기 위해

크리스타를 집으로 데려간다.

 

 

사건의 발생

블랑슈의 집으로 간 크리스타는

블랑슈 부모님을 사로잡아

자신이 친딸인 것처럼 행세하기 시작한다.

'어쨌든 우리의 여왕은 크리스타야!'

 

블랑슈의 방을 자기방처럼 차지하고,

그녀에 대한 부모님의 애정을

자기에 대한 애정으로 바꾸어버린다.

블랑슈의 부모님은

크리스타를 친딸처럼 여기고

블랑슈를 구박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크리스타는

둘만 있을때는 블랑슈의

모든 것을 경멸하다가

남이 나타나면 천사처럼 행동하며

블랑슈를 아끼고 사랑하는 친구처럼

자신을 포장한다.

 

생애 처음으로 사귄 친구가

겉과 속이 다른 이중인격자에 

자기를 갖고노는 악마같은 성격의

소유자였을 줄이야!

 

대결예고~~~

이제 블랑슈와 크리스타의

한판 대결이 펼쳐질 예정.

관심 있으신 분들은 책을 읽어보시기를...

 

 

3.

매 작품마다 적을 설정하고

그 적과의 대결을

위트있고, 잔혹하게 그려내던

노통이 이번에는 자신의 스타일을

바꾼 느낌이었다.

 

항상 적과의 대결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다가

마지막에서 잔혹한 결론으로 이어졌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 잔혹함이

빠진 상태였다.

 

노통 특유의 날선 독설과 비판은

여전했지만

크리스타의 모습은

앙탈부리는 안티크리스트에 가까웠다.

 

그녀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위선과 허세로 무장한데다

오만함을 갖춘 악마이지만

사회에 나간 어른들이 보여주는

잔혹함과 비정함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친구의 삶을 파괴하고,

블랑슈를 무시하며,

그녀를 마음대로 조종하려고 했지만

사회가 보여주는 폭력성과 냉정함이

상당부분 거세되었다는 측면에서

그녀는 불안한 악마였다.

 

10대라는 불안한 시기의

불완전성이 농축된

앙탈부리는 악마 크리스타.

 

그녀는 아이였다.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자기 중심적 시각과

누구보다 뛰어나다는 우월의식,

모든 사람이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과도한 애정관을 보유한 아이.

 

그에 비해 왕따 소녀 블랑슈는

성숙된 면모를 보여준다.

그녀는 홀로서기의 의미를 깨닫고,

인간은 누구나 홀로 설 수 밖에 없음을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리고 인간과의 관계에서 우월의식이나

자기 중심적인 시각을 굳이 가질 필요없음을

깨달은 존재였다.

 

이 작품에 나오는 누구보다

블랑슈는 진짜 어른이었다.

 

그러했기에 크리스타의 본질을 깨닫고

그녀와 대결을 펼칠 수 있었으리라.

 

그녀의 성숙성은 대결이 끝나는 부분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굳이 마지막 결론을 이야기하지

않겠다. 웬지 스포일러가 되는 느낌이라서...)

 

학교 최고의 아이돌은 누구보다 아이였고,

학교 최고의 왕따는 누구보다 어른이라는

이 놀라운 역설.

 

4.

한번 생각해 본다.

우리는 겉모습을 넘어 사람을 바라보는가?

아니 우리에게는 앙테크리스타의 모습이 없는가?

사춘기 시절의 우리의 불안성은

앙테크리스타와 다른가?

 

아니,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는 앙테크리스타의 모습이 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모습은 우리 의식 속에 숨어서

우리를 조종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 안의 적이자

우리를 타인에게 있어서

적으로 만드는 요소이다.

 

우리는 타인에게 언제나 적이 될 수 있다.

그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적이 되더라도 성숙하고

유연한 태도를 보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블랑슈처럼....

(블랑슈도 앙테크리스타를

완전하게 극복하지는 못한다.)

 

이제 블랑슈처럼 책을 읽을 시간이다.

자기 안의 적을 극복하기,

타인이라는 적을 끌어안을 방법을

얻기 위해서.

 

'책 읽기를 도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진리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다.

책 읽기란 가장 정신집중이 된 상태에서

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쏘시개
아멜리 노통브 지음, 함유선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리뷰

1.

한번 생각해보자.

전쟁이 벌어졌다.

그 전쟁의 영향으로 세상은 폐허로 변하고,

밖을 돌아다니면 폭력의 희생양이 될 뿐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건물에 머문다.

폭격이 자신의 건물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며.

 

당연히 그 상황은 자원이 부족하다.

추위를 이겨내기 위한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난로를 때우기 위한 나무마저 거의 다 떨어졌다.

만약에 서재가 있다면 

책이 불쏘시개로 쓰일 상황이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책부터

불쏘시개로 쓸 것인가?

 

이 책에 담겨 있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2.

무인도에서 읽을 책을 고르는 것만큼이나

힘겨운 불쏘시개용 책 고르기는

세 사람의 신랄한 논쟁으로 이어진다.

 

노통 특유의 독설과 언쟁으로 이루어진

논쟁은 어떤 해답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한 사람의 눈물과 분노,

다른 한 사람의 독선적 행동등을 유발한다.

 

결국 불쏘시개용 책 고르기는 해답이 없는 것이다.

각자가 서로의 논리가 있는 데다가

자신이 책에 대해 느끼는 감동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마다의 논리로 무장한 그들의 말다툼은

책 각자가 저마다의 생명력을 가지고

자신들만의 삶을 지니고 있음을 역설한다.

 

자기만의 운명과 삶을 지니는 책들.

그 책들 중에서 과연 어떤 책을

불쏘시개로 쓴 단 말인가?

 

3.

책이 타는 순간 자신이 느꼈던 감동과

환희의 세계가 사라지고,

우리의 흔적이 사라진다.

 

몇분,몇 시간의 따듯함을 위해

영원한 인류의 유산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영화 투모로우에서는

비슷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책을

불쏘시개로 쓰며 눈물을 흘린다.

 

노통은 눈물을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경고한다.

 

책이 사라지면 우리도 사라지는 것이라고.

인류라는, 사람이라고 불리는 우리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책이 사라지는 상황이 온다면

그것은 우리가 과거의 짐승같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의미이리라.

아니, 그것은 우리의 존재의미가 사라진다는

의미이리라.

 

책이 없는 세상.

그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4.

자,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이제 질문을 하나 던져보겠다.

 

여러분이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어떤 책을 가장 먼저 불쏘시개로 쓸 것인가?

 

*이 책은 그렇게 재미있게 읽히지는 않았다.

노통이 너무 사변적으로 떠들어댄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

대신 소재의 참신함과 상황적 특수성은

흥미로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리뷰

 

리뷰를 쓰는 한 사람의 이룰 수 없는 욕망

 

나는 지금 리뷰를 쓴다.

나는 리뷰를 쓰며 내가 읽은 책의

줄거리와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더듬고

미약하나마 내 생각의 흔적들을 남기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욕망은

내가 느꼈던 감정이,

마음에 맞는 한 구절과 책 한권이 주는 감동에

젖어 순간의 환희를 느끼는 경험이

그 현상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내 능력으로 불리는 언어적 사용의

한계앞에서 무참하게 짓밟힌다.

 

나는 안다.

결코 지금의 내가 쓰는 이러한 리뷰로는

책을 읽고 느낀 감상을 생생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군다나 그 책이 나로 하여금

세상을 향한 진실의 문을 열어주고,

정신의 성숙을 향한 계단이 되어주고,

정서적인 엑스터시를 경험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라면

내가 느꼈던 것은 거의 표현되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나는 어떤 책들에 관해서는

리뷰를 쓰기가 두렵다.

 

내가 느꼈고, 생각했던 것들의

일부의 일부의 일부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리뷰로 어떻게

나와 그 책이 나누던 교감을 말한단 말인가?

아니 그러한 행위는 심각한 기만 행위가 아닌가?

장님이 코끼리 더듬는 리뷰를 왜 써야만 한단 말인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도

리뷰 쓰기가 두려운 책이다.

나는 명확하게 알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동과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나는 오늘 이 리뷰를 쓸 것이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내가 느꼈던 일부나마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에 내가 승복했기에,

내가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것 같은 어떤 클럽을 위해서

리뷰를 자주 쓰기로 내 자신과 약속했기에.

 

모모, 몽도 그리고 다시 모모



독일의 마지막 낭만주의자로 불리는

미하엘 엔데가 쓴 <모모>.

 

동화이자 환상소설인 이 작품의

주인공 모모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삶의 의미와 잃어버린 가치의 소중함을 깨우치기 위해

시간 속으로 모험을 떠나는 존재다.

 

도시안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곳처럼 여기는 도시의 공터에서

살아가는 모모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친구이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순간에

우리를 위해 일어서는 존재였다.

 

모모를 읽고 나는 모모라는 소중한 친구를

얻은 느낌이었다.

그 친구는 그렇게 내가 구축한 생각의 도시에서

공터를 차지하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르 클레지오의 단편집인 <어린 여행자 몽도>.

 

이 책의 처음을 장식하는

작품이 <어린 여행자 몽도>이다.

 

거기에서 몽도는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간직하고

도시를 방황하는 존재였다.

 

도시인들이 잃어버린 아이적인 순수함,

인간적인 가치, 삶과 인간에 대한 사랑같은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 몽도는

바로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기에

도시를 방황할 수 밖에 없는,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역시 몽도도 내 친구가 되어주었다.

몽도가 비록 도시를 떠나서 어딘가로 가 버렸지만

그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알기에,

내가 그 무엇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도시안의 다른 누군가가 나와 함께 노력한다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그를 친구로서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어린 친구를 만났다.

 

바로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인

또 다른 모모가 그 주인공이다.

 

슬픔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소년, 모모

 

모모는 파리에 살고 있다.

모모의 원래 이름은 모하메드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모모라고 부른다.

모모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창녀들의 아이를 맡아 키워주는

창녀 출신의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살아간다.

 

세상 밑바닥의 삶.

인종 차별과 가난과 무시와 고독과 무관심의

그늘에서 자신들의 모진 삶을 이어가는

빈민들과 유색인과 창녀들과 고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모는

세상에 대한 기대따위는 하지 않는다.

 

모모는 단지 자신에게

사랑을 베풀어준 로자 아줌마가

조금 더 자신과 함께 살아주면서

자신이 그 사랑에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힘들지만 자신에게 웃음을 보여주고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 이웃들이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냉혹함은

모모를 끊임없이 절망으로, 슬픔으로 내 몬다.

 

절망 속에서, 슬픔 속에서 모모는 깨닫는다.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슬프게 하는 것도 삶이라는 사실을.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삶이 고달프고 힘겨울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고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모의 삶과 경험이 가르쳐 준

그 깨달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물 몇 방울을 흘리는 것 정도였다.

 

나는 감히 이 책을 추천한다.

 

사실 1년 반 정도만 해도

나는 거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논리적인 글이 보여주는 날카로운 지성과

치밀한 구조, 세상에 대한 시야의 확장과

지적인 충족감에 중독되어

소설은 멀리하고 지적인 쾌감을 얻기 위한

독서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 있다.

그런 나의 독서가 반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심하게 반발할 수도 있는 말이겠지만

소설이 주는 감동과 정서적 울림은

논리적인 글이 줄 수는 없다.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를

논리적인 글이 보여줄 수는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정서와 감동을

논리적인 글로는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적인 쾌감만을 위해서 독서를 하는 것은

불균형한 독서 이전에

절름발이가 걷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이 지적인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서 또한 지성과 더불어 감성이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냉정한 것만으로, 논리적인 것만으로는 안 된다.

날카롭고 냉정한 것만으로 이룰 수 있는 세상은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가 보여주듯이

기계들이 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거기에 우리가 인간적인 것이라

칭할 수 있는 그 무엇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것이 포함되어야 기계가 아닌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된다.

 

<자기 앞의 생>은 나의 그런 생각을

다시한번 확인시켜 주는 소설이었다.

 

논리적인 글로는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없다.

아니 이런 감동을 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삶의 의미를 절절히 깨닫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감히 이 책을 추천해본다.

소설을 읽고자 하시는 분들이라면,

지성과 더불어 감성을 충족시키기 원하시는 분들이라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시고 계신 분들이라면,

냉정함만이 아닌 삶의 감성을 원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한번 꼭 읽어 보셨으면 한다.

 

읽고서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따듯한 사랑이 전해주는

울림과 삶의 의미를 한번 음미해보셨으면 한다.

 

삶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깨달았으면 한다.

 

내가 느꼈던 것처럼

많은 이들의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었으면 한다.

 

자기 앞의 생이 던져주는

그 무엇을 우리 모두가 받아 먹었으면 한다.

 

그것이 자살한 이 소설의 작가가 우리에게 남긴

최후의 유산을 우리가 제대로 이용하는 방법일 것이다.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의 필명이다.

가리가 에밀 아자르란 필명으로 글을 써서 상을 받고

자살하기 까지의 과정이 책에 소상하게 나와 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는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란

이름을 내 상상 속 문학의 전당에 아로 새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