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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앞의 생 (특별판)
에밀 아자르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리뷰
리뷰를 쓰는 한 사람의 이룰 수 없는 욕망
나는 지금 리뷰를 쓴다.
나는 리뷰를 쓰며 내가 읽은 책의
줄거리와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더듬고
미약하나마 내 생각의 흔적들을 남기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나의 욕망은
내가 느꼈던 감정이,
마음에 맞는 한 구절과 책 한권이 주는 감동에
젖어 순간의 환희를 느끼는 경험이
그 현상을 생생하게 전달할 수 없다는
현실 앞에서, 내 능력으로 불리는 언어적 사용의
한계앞에서 무참하게 짓밟힌다.
나는 안다.
결코 지금의 내가 쓰는 이러한 리뷰로는
책을 읽고 느낀 감상을 생생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더군다나 그 책이 나로 하여금
세상을 향한 진실의 문을 열어주고,
정신의 성숙을 향한 계단이 되어주고,
정서적인 엑스터시를 경험하게 해주는
좋은 책이라면
내가 느꼈던 것은 거의 표현되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나는 어떤 책들에 관해서는
리뷰를 쓰기가 두렵다.
내가 느꼈고, 생각했던 것들의
일부의 일부의 일부조차 표현하지 못하는
리뷰로 어떻게
나와 그 책이 나누던 교감을 말한단 말인가?
아니 그러한 행위는 심각한 기만 행위가 아닌가?
장님이 코끼리 더듬는 리뷰를 왜 써야만 한단 말인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도
리뷰 쓰기가 두려운 책이다.
나는 명확하게 알고 있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감동과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러나 나는 오늘 이 리뷰를 쓸 것이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내가 느꼈던 일부나마 드러내고자 하는
욕망에 내가 승복했기에,
내가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것 같은 어떤 클럽을 위해서
리뷰를 자주 쓰기로 내 자신과 약속했기에.
모모, 몽도 그리고 다시 모모
독일의 마지막 낭만주의자로 불리는
미하엘 엔데가 쓴 <모모>.
동화이자 환상소설인 이 작품의
주인공 모모는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삶의 의미와 잃어버린 가치의 소중함을 깨우치기 위해
시간 속으로 모험을 떠나는 존재다.
도시안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곳처럼 여기는 도시의 공터에서
살아가는 모모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친구이자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고 있는 순간에
우리를 위해 일어서는 존재였다.
모모를 읽고 나는 모모라는 소중한 친구를
얻은 느낌이었다.
그 친구는 그렇게 내가 구축한 생각의 도시에서
공터를 차지하고 우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르 클레지오의 단편집인 <어린 여행자 몽도>.
이 책의 처음을 장식하는
작품이 <어린 여행자 몽도>이다.
거기에서 몽도는
우리가 잃어버린 무언가를 간직하고
도시를 방황하는 존재였다.
도시인들이 잃어버린 아이적인 순수함,
인간적인 가치, 삶과 인간에 대한 사랑같은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 몽도는
바로 그 무엇을 간직하고 있기에
도시를 방황할 수 밖에 없는,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역시 몽도도 내 친구가 되어주었다.
몽도가 비록 도시를 떠나서 어딘가로 가 버렸지만
그가 언젠가는 돌아올 것을 알기에,
내가 그 무엇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도시안의 다른 누군가가 나와 함께 노력한다면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그를 친구로서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나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또 하나의 어린 친구를 만났다.
바로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인
또 다른 모모가 그 주인공이다.
슬픔을 통해 삶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소년, 모모
모모는 파리에 살고 있다.
모모의 원래 이름은 모하메드이지만
사람들은 그를 모모라고 부른다.
모모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창녀들의 아이를 맡아 키워주는
창녀 출신의 로자 아줌마와 함께 살아간다.
세상 밑바닥의 삶.
인종 차별과 가난과 무시와 고독과 무관심의
그늘에서 자신들의 모진 삶을 이어가는
빈민들과 유색인과 창녀들과 고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모모는
세상에 대한 기대따위는 하지 않는다.
모모는 단지 자신에게
사랑을 베풀어준 로자 아줌마가
조금 더 자신과 함께 살아주면서
자신이 그 사랑에 보답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힘들지만 자신에게 웃음을 보여주고
삶을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 이웃들이
조금 더 행복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냉혹함은
모모를 끊임없이 절망으로, 슬픔으로 내 몬다.
절망 속에서, 슬픔 속에서 모모는 깨닫는다.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슬프게 하는 것도 삶이라는 사실을.
자기 앞에 주어진 삶을 받아들이고 살아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삶이 고달프고 힘겨울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고 사랑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모의 삶과 경험이 가르쳐 준
그 깨달음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눈물 몇 방울을 흘리는 것 정도였다.
나는 감히 이 책을 추천한다.
사실 1년 반 정도만 해도
나는 거의 소설을 읽지 않았다.
논리적인 글이 보여주는 날카로운 지성과
치밀한 구조, 세상에 대한 시야의 확장과
지적인 충족감에 중독되어
소설은 멀리하고 지적인 쾌감을 얻기 위한
독서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알고 있다.
그런 나의 독서가 반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심하게 반발할 수도 있는 말이겠지만
소설이 주는 감동과 정서적 울림은
논리적인 글이 줄 수는 없다.
소설이 보여주는 세계를
논리적인 글이 보여줄 수는 없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정서와 감동을
논리적인 글로는 얻을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지적인 쾌감만을 위해서 독서를 하는 것은
불균형한 독서 이전에
절름발이가 걷는 것과 마찬가지다.
세상이 지적인 것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독서 또한 지성과 더불어 감성이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냉정한 것만으로, 논리적인 것만으로는 안 된다.
날카롭고 냉정한 것만으로 이룰 수 있는 세상은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가 보여주듯이
기계들이 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거기에 우리가 인간적인 것이라
칭할 수 있는 그 무엇들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것이 포함되어야 기계가 아닌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 된다.
<자기 앞의 생>은 나의 그런 생각을
다시한번 확인시켜 주는 소설이었다.
논리적인 글로는 이런 소설이 나올 수 없다.
아니 이런 감동을 줄 수 없다.
이런 식으로 삶의 의미를 절절히 깨닫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감히 이 책을 추천해본다.
소설을 읽고자 하시는 분들이라면,
지성과 더불어 감성을 충족시키기 원하시는 분들이라면,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시고 계신 분들이라면,
냉정함만이 아닌 삶의 감성을 원하시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한번 꼭 읽어 보셨으면 한다.
읽고서 모모와 로자 아줌마의 따듯한 사랑이 전해주는
울림과 삶의 의미를 한번 음미해보셨으면 한다.
삶이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다시금 깨달았으면 한다.
내가 느꼈던 것처럼
많은 이들의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었으면 한다.
자기 앞의 생이 던져주는
그 무엇을 우리 모두가 받아 먹었으면 한다.
그것이 자살한 이 소설의 작가가 우리에게 남긴
최후의 유산을 우리가 제대로 이용하는 방법일 것이다.
*에밀 아자르는 로맹 가리의 필명이다.
가리가 에밀 아자르란 필명으로 글을 써서 상을 받고
자살하기 까지의 과정이 책에 소상하게 나와 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는 로맹 가리=에밀 아자르란
이름을 내 상상 속 문학의 전당에 아로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