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마물의 탑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미쓰다 신조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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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3.하얀 마물의 탑-미쓰다 신조

 

<하얀 마물의 탑>은 미쓰다 신조의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모토로이 하야타는 만주국의 학교를 다니다 2차대전이라는 전쟁에 휘말리고, 거기서 전쟁의 현실에 환멸을 느낀 인물입니다. 그는 전쟁에서 살아남아 일본으로 돌아와서는, 전후 재건의 현실에 참여합니다. 모토로이 하야타 시리즈는 전후 재건에 나서는 모토로이 하야타라는 인물이 일본 각지의 어둠과 미스터리를 만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시리즈 첫 작품인 <검은 얼굴의 여우>는 탄광 노동자가 된 모토로이 하야타가 탄광에서 마주친 검은 어둠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갱부>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이 작품은, <갱부>가 탄광의 현실보다는 탄광으로 향하는 길의 비현실적인 현실 묘사를 통해 꿈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데 반해, 당대 탄광촌의 어둡고 축축한 현실을 호러 미스터리를 통해 전하며 악몽 같은 모습을 보여줍니다. 광부들의 얼굴에 낀 검댕의 색깔처럼, 광부들이 탄광에서 계속 마주치는 어둠의 색깔같은, 검은색으로 무장한 공포스런 존재와의 대면과 그 존재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모토로이 하야타의 모습은, 전후에 새로운 모습으로 삶을 복원시키려는 일본인들의 염원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동시에 그의 앞을 막아서는 검은 어둠의 존재는 그런 일본인들의 행동을 막아서는 일종의 방해물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 방해물이 일본의 현실 속에서 존재한다는 점에서 일본의 재건이 생각보다 쉽지 않으리라는 점이 유추가 됩니다.

 

호러 미스터리이지만 호러보다는 미스터리에 더 가까운 느낌의 <검은 얼굴의 여우>의 이야기가 끝나면, 주인공의 행보를 따라서 이야기는 <하얀 마물의 탑>으로 이어집니다. 탄광에서의 재건의 삶이 검은 존재와의 대면으로 실패로 돌아가면서 주인공인 모토로이 하야타는 등대지기라는 새로운 삶을 선택합니다. 등대지기로서 바다에 빛을 비추며 배들의 항해를 돕는 식으로 재건에 도움이 되려는. 등대지기로서 외롭지만 세상에 도움이 되려는 모토로이 하야타의 계획은 바다의 하얀 포말과 같은 하얀색의 마물과 같은 존재와 만나며 또다시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책은 그 과정을 미쓰다 신조 특유의 호러 미스터리의 색채로 그려냅니다.

 

전작에 비하면 확실히 이 책은 미스터리보다는 호러에 가깝습니다. 전작처럼 추리소설의 면모가 있지만, 추리보다는 공포가 소설 전체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 때의 공포는 전쟁 후의 재건에 나선 일본에 아직 남아 있는 전근대의 습속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제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기에 그걸 한 번 써보겠습니다. 사실 일본의 근대화는 일본이라는 국가를 바꾸려는 엘리트층의 강력한 의지로 이루어졌습니다. 평범한 이들의 주도가 아닌 위로부터의 개혁이 일본 근대화의 핵심이죠. 이걸 공포소설의 문법으로 바꾸어 표현하면, 일본의 엘리트 층이 근대화라는 귀신에 씌었다라는 말로도 쓸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일본 자체가 근대화라는 귀신에 씌인 겁니다. 근대화의 씌인 일본인들은 엘리트들의 주도로 근대화에 나섰고 몇 번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제국을 만들어냅니다. 진짜 귀신에 씌인 것처럼 맹목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던 일본인들은, 두 번의 핵폭탄을 맞고 일본이라는 나라가 폐허가 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그들에게 씌었던 맹목적인 근대화라는 귀신은 떨어져나간 셈이죠. 그래서 그들은 미국 주도의 새로운 재건을 시작하게 됩니다. 모토로이 하야타의 행동은 이 재건기의 삶을 상징하고 있다고 봐도 됩니다. 그런데 이 재건이 쉽지 않은 건, 근대화라는 귀신은 물러났지만, 그들의 삶 곳곳에 스며있는 또다른 귀신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광산의 힘겨운 삶에 씌어있는 귀신, 등대에서 마주친 전근대의 그림자로 무장한 귀신 같은.

 

<하얀 마물의 탑>에서 모토로이 하야타는 하얀 마물의 방해를 물리치고 자신의 삶을 지켜나나갈 수 있을까요? 재건과 더불에 세상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그의 의지는 하얀 마물이라는 공포스런 존재와의 만남에서도 이어질 수 있을까요? 미쓰다 신조의 소설을 좋아하는 저의 입장에서는 모토로이 하야타의 앞에 마주친 공포가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설사 실패하더라도 모토로이 하야타는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미쓰다 신조의 다른 시리즈의 주인공인 도조 겐야처럼, 그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따라서 지속적인 방랑의 삶을 이어갈 것이니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그의 삶의 여정을 따라서 공포를 계속 마주하는 것 정도일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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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 - 목정원 사진산문
목정원 지음 / 아침달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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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2.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목정원

 

이 책은 사진이 가득한 책입니다. 많은 사진과 적은 글로 이루어진 사진 에세이. 책 가득한 사진이, 무수한 책의 여백과 함께 책을 장식하며, 중간중간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목정원 작가의 아름다운 글이 책을 읽는 독자에게 잠시간의 사유의 순간을 선사합니다. 글의 여백이라고 할 수 있는 사진 앞에서 독자는 사진을 이미지이지만 동시에 하나의 문자 텍스트로도 읽어낼 수 있습니다. 사진으로 제시되는 이미지들을 자신만의 상상을 동원하여 읽어내면서.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을 읽으면서 느낀 감동처럼, <어느 미래에 당신이 없을 것이라고>에 적혀 있는 목정원 작가의 글들은 저에게 감동을 줍니다. 이 감동은, <모국어는 차라리 침묵>에서도 말한 영원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목정원 작가는 기다렸다는 듯이 100여장의 사진과 사진 사이사이의 아름다운 글로, 영원한 사랑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아낌없이 풀어냅니다. 미래에 이미 없을 사랑하는 당신을 생각하면서. 혹은 사랑하는 당신은 없지만, 당신의 흔적이 남아있는 사진을 통해 지나간 사랑을 기억하면서.

 

하지만 이런 질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왜 사진을 통해 사랑을 표현하는가? 사진 말고도 사랑을 표현할 수 있는 것들이 있는데.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책 속에 있습니다. 목정원 작가는 먼저 기억술에 대해 말합니다. 저자는 기억술의 시작이 죽은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서였다는 전설을 말합니다. 그리고 기억술의 시작과 사진을 연결시킵니다. 사진이 사라져간 이들을 기억하는 기억술의 도구라고 하면서.

 

여기에서 사랑과 사진은 이어집니다. 사진은 사랑했던 이들의 흔적을 남깁니다. 사진은 지나간 사랑의 기억으로서 남아 있습니다. 사진은 어느 미래에 없을 사랑하는 당신의 삶의 흔적으로서 사랑을 경험한 이의 삶에 남겨집니다. 결국 목정원 작가에게 사진은 사랑의 기억이자 사랑 그 자체입니다. 사진=사랑. 우리는 목정원 작가가 부르짖는 사랑과 사진의 앙상블을 통해서, 혹은 홀로코스트라는 역사적 상처를 기억하는 방법을 통해서, 잊지 못하는 아름다운 심리적 상처를 얻어냅니다. 영원한 사랑을 갈망하는 사진의 이름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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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예항 / 짐승들의 유희 대산세계문학총서 182
미시마 유키오 지음, 박영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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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1.오후의 예항/짐승들의 유희-미시마 유키오

 

*이 서평은 조금 다른 느낌으로 써보려고 합니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호오의 감정이 있다. 누구나 무언가를 좋아할 수 있고, 반대로 무언가를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내가 미시마 유키오라는 작가에게 느끼는 감정은 불행하게도 가 아니라 에 가깝다. 그가 광적일 정도로 집착하는 탐미주의, 예술지상주의는 그냥 그럴 수 있다고 하자. 이미 철지난 데카당스, 예술지상주의에 목매다는 것도 나는 넘어갈 수 있다. 그의 탐미주의를 포장하는 아름다운 미문은 미시마 유키오의 책을 읽는 묘미를 더한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오후의 예항/짐승들의 유희>를 읽으며 아름다운 문장과 표현에 감탄한 적이 꽤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미문이 내 눈을 끌어도, 그의 책은 나에게 참을 수 없는 불쾌함으로 다가온다. 사람이 누구나 자기정당화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미시마 유키오도 자신의 생각이나 이념을 문학을 통해서 자기정당화 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하지만 그 자기정당화의 내용은 나에게 당혹을 넘어서, 불쾌함만 불러온다, 예를 들어보자. ‘오후의 예항속 주인공인 소년 노보루는 똑똑하고 부유하지만 어딘가 허약한 친구들과 함께 일종의 패거리를 만든다. 그들은 세상의 다른 이들과 거리를 두고 자신들은 우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 일종의 의식을 치르는데, 그 의식이라는 게 길거리에 있는 약하디약한 새끼고양이를 데려와서 산채로 참혹하게 죽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니체 철학의 아류 같은 철학을 주장하며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자신들을 다른 이들과 다른 천재로 포장하며, 강자를 존중하고, 약자들을 멸시하는 강자의 철학을 말하며. 강자의 철학을 주장하기에 당연히 그들에게 길거리의 새끼 고양이를 죽이는 것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고? 자신들은 길거리의 새끼 고양이를 죽일 수 있는 특권을 가진, 다른 존재이니까.

 

여기에서 그친다면 미시마 유키오가 아닐 것이다. 노보루는 더 나아가서 아버지가 죽고 홀로된 어머니가 새롭게 맞아들여 자신의 새아빠가 된 류지를 싫어한다. 원래 자신이 동경하는 뱃사람이라서 좋아했지만, 그가 바다가 아니라 육지에 남아서 어머니와 함께하며 새아빠가 되었다는 사실에, 자신의 패거리들이 증오하는 그렇고 그런 평범한 아버지의 한 부류가 되었다는 사실에, 강자의 행동이 아닌 약자의 행동 같은 친절함과 이해심을 보였다는 것 때문에, 노보루는 류지를 증오한다. 아이의 증오는 패거리의 응원을 이끌어내고, 아이들은 함께 14세가 되지 않으면 처벌 받지 않는다는 형법상의 특권을 이용해 류지를 죽이는 행동에 나선다.

 

읽다 보며 느낀 것이지만, 정말로 공감이 1도 안 되고, 불쾌함만 가중된다. 자신들에게 특권이 있다는 생각을 이해가 되지 않는 주장들로 정당화하는데, 그 문장들은 아름답다. 이 괴리가 나를 미치게 만들고, 괴롭게 만든다. 아름다운 문장들로 적어내려가는 게 새끼 고양이를 죽이는 권리이자 친절한 새 아빠 살해의 정당화이니까. 아름다운 포장지 안에 든 내용물에 썩은내가 물씬 풍긴다고 해야하나. 결국은 나는 작가에게 가닿을 수밖에 없었다. 미시마 유키오가 아름다운 문장들로 적어내려간 게, 파시즘과 군국주의와 유사한 약자를 멸시하고 강자를 숭배하는 강자의 철학이라는 걸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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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5-30 2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탐미주의 소설을 안 읽어봐서 잘 모르지만 이 작가의 탐미주의는 참으로 극단적인 거 같아요. 참 내용이 기분 나쁘네요. 그래도 금각사는 한 번 읽어볼까도 싶어요.
모두들 아름다운 문장 이야기를 하니까요.

짜라투스트라 2023-05-31 06:04   좋아요 0 | URL
네 충분히 읽어볼만하죠^^
 
우리의 이름은 별보다 많다 - 김창규 소설집
김창규 지음 / 아작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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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40.우리의 이름은 별보다 많다-김창규

 

1.

제가 처음 SF를 읽기 시작했을 때, SF에서 우주비행을 할 때 인류가 주로 사용한 기술은 동면이었습니다. 동면을 이용해서 장시간의 시간을 견뎌내는 우주 이야기가 많이 보였다는 말이죠. 그런데 최근의 경향은 조금 다릅니다. 이제는 동면보다는, 인간의 뇌를 스캔해서 만들어진 인간의 정신 데이터를 다른 몸이나 의체같은 유기체 아닌 물질에 이식하는 방식이 많이 쓰이는 것 같습니다. 연약한 인간의 몸으로는 기나긴 우주 비행의 시간을 견뎌낼 수 없다는 현실적인 인식 때문인지 동면의 사용 빈도수는 줄어드는 것 같아요.

 

2.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유물론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동면이 아닌 뇌 스캔 방식의 우주비행은 유물론의 어떤 극한을 보여준다는. 과거의 동면 기술은 그래도 인간의 몸을 믿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우리 몸을 가지고 충분히 우주비행이 가능하고, 인간의 자아는 그 기나긴 시간에도 불구하고 일관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뇌 스캔 기술을 쓰면 인간의 몸은 단순한 재료에 불과하게 됩니다. 몸조차 단순하게 쓰고 버리는 도구가 되는 것이죠. 뇌를 스캔해서 구성된 정신이 이식되는 도구로서의 몸은, 유기체가 아니라도 상관없습니다. 기계에도 이식 가능해지고, 온라인 공간 상의 프로그램에 머물러도 됩니다. 이 기술에서는 인간의 정신도 복제 가능하고, 어떤 물질에든 이식이 가능한 물질적인 것이고, 몸도 소모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3.

<우리의 이름은 별보다 많다>는 여기서 더 나아갑니다. ‘아무리 뇌 스캔을 통해서 동일한 정신을 몸에 이식한다고 해도 그때의 나를 그 이전의 나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정체성의 문제에서 본다면 이건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책에서는 여기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무슨 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책에 담긴 내용을 봤을 때 저자인 김창규는 동일한 자아가 아니라는 입장을 견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뇌 스캔을 통해서 가상현실에 자아를 재구성하면 감정이 사라진다든지 무언가 달라진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보아서.

 

4.

1993년부터 SF를 쓰기 시작하며 30년의 기간동안 꾸준히 척박한 한국 SF 환경에서 글을 써온 김창규 작가의 SF 단편 모음집인 <우리의 이름은 별보다 많다>, 위에서 말한 문학적인 흐름에서 인간에 대한 인식의 변화상에 의한 기술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작품들 각자는 SF의 특성을 잘 보여주면서도 장르문학의 재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기술과 과학과 사상과 스토리텔링이 맞물려 돌아가는 SF 단편 모음집에서 한국에서 꾸준히 SF를 써온 작가의 힘 같은 걸 느꼈습니다. 아마도 이런 힘 같은 것이 밑바탕이 되어 지금의 한국 SF의 융성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런 면에서 저 같이 SF를 좋아하는 사람은 나오는 작품들을 꾸준히 읽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을 것 같네요. 그것만이 제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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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의 방주
임성순 지음 / 은행나무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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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39.환영의 방주-임성순

 

<환영의 방주>의 첫 작품인 타이탄의 날들을 읽으면서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책은 SF 단편집이구나. 그런데 다음 작품부터 무언가 다른 겁니다. , 이거 SF가 아니잖아. 그렇게 책은 SF나 밀리터리 느낌의 장르문학부터 우리가 소위 순수문학이라고 부르는(저는 순수문학이라는 말이 과연 정확한 말인지 의문이 들긴 합니다.) 작품들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환영의 방주>는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을 자유롭게 넘나들 수 있는 임성순 작가의 장기가 유감없이 발휘된 단편집이라는 말입니다.

 

장르문학이든, 순수문학이든, 형식과 상관없이 <환영의 방주>는 제가 느끼기에 인간 현실의 폐부를 꿰뚫고 있습니다.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든, 고도로 발견된 기술을 배경으로 하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배경으로 하는 현실적인 이야기이든, 작품들은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는 말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믿을 만한 존재인가, 인간은 왜 말도 안 되는 것들을 믿는가, 인간의 애착은 어떤 형식으로 발현되는가 하는 같은.

 

동시에 이 책은 동시대의 문제들도 그려내고 있습니다. ‘번 아웃같은 작품은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끝없이 착취당하다 번 아웃상태에 빠져버리는 힘 없고 무기력한 노동자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히카리같은 작품은 리얼돌 같은 물건에게 자신의 애정을 투사하는 모습이나 비트코인 같은 현시대의 문제들을 담고 있습니다. ‘들림 받은 자들은 끊임없이 자연과 인간을 착취하고 생물종의 대학살을 초래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문제를 반영합니다.

 

하지만 이런 모든 이야기에도 불구하도 이 책의 장점은 소설들이 재미있다는 점입니다. 임성순 작가는 무게감 있는 문제들을 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독자가 흥미롭게 읽어나가는 이야기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잘 그려냅니다. 독자가 할 일은 형식에 상관없이 읽어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읽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 시대의 문제들이, 시대와 상관없는 보편적인 문제들이 우리 몸에 새겨집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문학이 재미있으면 의미 있는 예술장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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