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편>

"운명을 믿나요?"
"네, 저는 운명을 믿습니다."
"어떤 면에서요?"
"이렇게 우리가 만났다는 것 자체가 운명이 아닐까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가 만나서 여기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니까요."
-나의 미발표 창작 SF <우주의 끝> 중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게 있다면 오늘 내가 겪은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오랜기간 나가지 않던 인디고 수독 모임에 나간 것도, 탕누어의 <역사, 눈앞의 현실>이라는 책을 읽고 대화를 나누는 독서 모임에 내가 원하지 않았는데도 진행자가 되어 모임을 이끌어가게 된 것도, 이렇게 내 방에 앉아 글을 쓰는 것도 모두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의 작용일 것이다.

시작으로 돌아가보자. 오늘 이루어진 운명의 기원에는 텔레그램에서의 대화가 있다. 주제에 대한 토론. 나름의 다른 생각과 그 다른 생각에 대한 다른 이의 반응과 대화. 감정과 분노.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나는 수독 모임에 나가지 않게 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모임에 '나가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그때 나의 행동은 오늘의 만남을 위한 운명의 작용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오늘의 만남을 위해 운명은 나로 하여금 오랜기간 수독에 나가지 않게 했고, 나는 그것이 운명인 줄 모르고 수독 모임과 거리를 두고 지냈다.

인디고 수독 모임에 나가지 않는 동안, 나는 '부산고전함께읽기'라는 모임을 만들어 고전읽기에 전념하고 있었다. 고전을 읽고 싶은 마음을 가진 이들과 함께 플라톤의 대화편 7편을 읽고, 뒤이어 이 모임은  동양고전을 읽는 시간을 가졌다. 동양고전을 읽은 최근의 두달은, 내가 가진 최선을 다해 동양고전과 그에 관련된 책을 읽는 시간이었다. 그 기간동안 즐거웠고 행복했다. 읽고 또 읽다 어느정도 기계적인 독서를 했던 내가 잊어버렸던 독서의 초심을 되찾는 기간이었고, 모르는 것을 아는 즐거움을 되살리는 기간이었고, 피눈물나는 '어려운 책읽기'를 넘어 포기하지 않는 독서를 해야겠다는 다짐을 다시했고, 독서는 내 운명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독서의 운명을 실감한 내 마음은 어느새 평온을 되찾았고, 평온을 되찾자 나는 다시 '인디고 수독 모임'을 떠올렸다. 떠올림은 행동으로 이어졌고, 나는 나도 모르게 인디고 수독 모임 송년회에 운명처럼 참석한 내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운명처럼 수독 모임 송년회에 참석했지만 운명의 오묘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수독 모임 송년회에 참석하기 전에 나는 한길사에서 나온 <춘추좌전1>  빌려서 집에 놔두고 있었다. 송년회가 끝나면 읽겠다는 마음으로. 송년회에 참석해서 수독 모임 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000 샘이 내게 말을 건넸다. 12월 2주 모임 진행자로 나서는 게 어떠냐고. 나는 책이 뭐냐고 물은 뒤에 12월 2주 모임 책이 대만의 지식인 탕누어가 <춘추좌전>을 읽고 쓴 <역사,눈앞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춘추좌전>을 읽으려고 집에 놔둔 사람에게, <춘추좌전>을 읽고 쓴 책을 진행하라고?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됐다. 이건 운명이다.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으면 받아들여야 하는 수밖에. 나는 운명에 따라 <역사, 눈앞의 현실>을 읽고 12월 2주 모임에 운명처럼 모임을 진행했다. 저마다 다른 운명의 힘에 따라 <역사, 눈앞의 현실>을 읽은 이들과 함께.

<고전편>

고전을 왜 읽어야 하는 걸까요? 왜 그 오래전 책들을 읽어야 하는 걸까요? 지금 우리의 삶과 너무나 다른 면이 있는 게 분명한데도 왜 읽어야 하는 걸까요? 이런 물음에 하나의 정답은 없겠죠. 저마다 자기만의 답을 찾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다른 사람의 답은 제가 알 수 없으니까 저만의 답을 한 번 말해보겠습니다. 삶이라는 건 관성이 있습니다. 하던 대로 하죠. 하던 대로 하다보면 거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자, 그런데 고전을 한 번 봅시다. 고전은 현재 우리의 삶과 너무 달라요. 현재의 삶이 가진 관성이 고전에는 없습니다. 여기에 고전의 힘이 있습니다. 고전을 읽는다는 건, 자기 자신의 삶에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합니다. 조금 더 다른 시각으로, 조금 더 객관화해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의 삶은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게 됩니다. 고전의 '다름'이, 우리의 삶에 더 나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주는 것이죠.
다른 것도 한 번 생각해봅시다. 저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를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일반화해서 말하는 것이 위험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화해서 말하면,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하는 것이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 변하지 않는 것이란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변하지 않고, 변해서도 안 되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변하지 않는 것'은 과거로부터 쭉 이어져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물학적인 본성부터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바뀌지 않는 요소들까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고전'은 이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해줍니다. 로봇과 A.I.가 아무리 발달해도 인간의 삶에는 바뀌지 않고, 바뀌어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다고. 그 바뀌지 않는 것들을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받아들여서 삶의 흐름 속에서 살아내야한다고 말하는 고전의 속삭임을 듣고 있노라면, 저는 저 자신이 고전에 담긴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 실려간다고 생각합니다. 그 역사의 흐름 속에서 저 자신이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인류라는 하나의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그 소속감, 그 실감이야말로 고전을 읽는 하나의 힘이 아닐까요?^^

<고전의 현재화편>

탕누어는 <좌전>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읽었습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좌전>을 읽는 탕누어는 자신의 읽기의 흔적을 <역사, 눈앞의 현실>에 담아냈습니다. 이 책에서 <좌전>은 탕누어라는 인간의 삶과 사상과 생각과 사고와 관념과 언어를 통해서 현재의 삶이 됩니다. 탕누어는 <역사, 눈앞의 현실>이라는 책을 통해서 '고전의 현재화'를 이룬 것이죠. 탕누어도 했으니 우리라고 못하는 법은 없죠. 저는 12월 2주 수독 모임이 '고전의 현재화'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가하신 분들이든 참가하지 못하신 분들이든 저마다의 고전의 현재화가, 이 모임을 통해서 시작됐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하든 하지 않든 본인의 자유이지만(^^;;) 최소한 12월 2주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은 고전의 현재화를 위해 노력해봅시다. 참석하신 분들의 분발을 바라며 후기이자 새로운 시작으로서의 이 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이 글은 끝나지만, 진정한 의미의 끝은 아닙니다. 고전의 현재화라는 지난한 과제가 놓여 있기에. 그저 저라는 인간의 흔적이 사라질 뿐. 진정한 끝이자 시작으로서의 이 글의 마무리는 참여하신 분들의 댓글에 달려있습니다. 이제 댓글을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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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달이라 그런지 사정들이 있으셔서 많은 분들이 참가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많지 않은 인원들이나마 으샤으샤해서 나름 밀도 있고 열심히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마 참가하셨던 분들은 충분히 느끼셨을텐데요, 사람이 많이 없으니까 오히려 서로의 이야기에 더욱 주목하고, 귀기울여 듣고, 충분히 공감하고, 그에 따라 대화의 집중도와 밀도가 올라가고 더욱 충실한 시간을 가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걸 사람이 별로 없는 모임의 힘(??)이라고 해야할까요?^^;; 어찌되었든 사람이 많지 않으면 많지 않은 대로 그에 맞춰서 잘 이야기를 해나갔다고 봅니다.

우선 지난번 모임 때(불운하게도 지난번 모임 때 적었던 글이 다 날라가는 바람에 후기를 쓸 수 없었습니다.ㅠㅠ), 제가 보기에는 주제에서 벗어난 논쟁으로 너무나 오랜 시간을 잡아먹는 바람에 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이번 모임에서 하겠다고 했습니다. 비겁한 변명이겠지만(^^;;), 변명을 하고 나서 모임을 이어나갔습니다. 노자와 무위자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무위자연의 개인적인 해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사실 고전이란 것이 과거에 얽매여만 있다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과거의 것인 고전을 지금의 삶 속에서 실현할 수 있을 때 우리에게 고전이 큰 힘이 된다고 한다면, 모임 때 저 이야기를 하신 분들은 '고전의 현재화'를 실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다음으로 제가 동양고전에 대한 기초적인 소개를 했습니다. 사서삼경에 뭐가 있는지, 시경은 어떤 책이고, 서경은 어떤 책이고, 주역(역경)은 어떤 책인지. 논어는 어떤 책이고 공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 또 맹자는 어떤 말을 했는지. 그에 따라서 다른 분들은 나름의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을 토대로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모르는 것을 알 수도 있었고, 아는 것들을 새롭게 볼 수도 있었고, 이야기 자체에 빠져들어 즐길 수도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이야기는 어느새 현재의 모습, 미래의 삶에 대한 예측으로까지 넘어갔습니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너무 시간이 빨리가더군요. 그렇게 충만한 대화를 나누고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다음 모임을 기대하면서. 다음 모임에는 무슨 말을 나눌 수 있을까요.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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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12-12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산 고전읽기 독서모임은 송년회 안합니까? 송년회 한다고 하면 평소에 안 오던 분들도 그 날 옵니다... ^^;;

짜라투스트라 2018-12-12 17:52   좋아요 0 | URL
아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네요^^;;
 
시경 을유세계사상고전
지은이 미상, 정상홍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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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감상문이나 리뷰가 아니다. 이건 그저 <시경>이라는 책을 읽은 나의 마음의 흔적을 기록한 글일 뿐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그 정도.

악전고투. 을유문화사판 <시경>을 다 읽은 내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단어이다. 총페이지 1225페이지, 305편의 시, 무수히 나오는 한자들(참고로 말하면 나는 한자를 잘 모른다.^^;;), 엄청난 양의 주석과 다양한 해석, 너무 무거운 책 무게와 읽는 독자를 압도하는 책 두께, 책을 다 읽어야 한다는 초조함까지. <시경>이라는 거대한 산을 등반한 지금 내 앞을 가로막은 이 무수한 장애물들을 어떻게 넘었는지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나는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이 산을 넘었던가. 힘들어도 읽고, 읽기 싫어도 읽고, 그냥 읽고 또 읽고. 오직 읽고 읽음으로서 <시경>의 읽음을 완성했을 때,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다 읽었다는 감개무량함과 함께. 사실 <주역>과 비교했을 때 <시경>이 어려운 책은 아니다. <시경>은 내용의 어려움으로 나를 힘들게 했던 <주역>과는 달리, 분량의 압박으로 나를 힘들게 했다. 그 분량의 어려움을 넘어서서 책을 완독했을 때 나는 다시한번 나약한 나 자신을 이겨낸 채 힘겨웠던 한 권의 책을 다 읽어냈다는 사실에 기뻤고, 포기하지 않아 안도했다. 동시에 나는 이제 '동양고전' 읽기가 힘에 부친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머리도 아프고 부담도 되고.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것인가? 포기하고 예전처럼 편안한 책읽기로 돌아갈 것인가? 대답은 'no'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무식한 부지런함으로 읽고 또 읽고 또 읽을 것이다. 그것이 내가할 수 있는 최선이기에. 힘겨워도 원시적인 사고의 자유스러움과 생명이 살아숨쉬는 고대 중국의 시가 모음집 <시경>이 가진, 어떤 생생한 힘이 주는 유일무이한 경험을 했기에. 앞으로도 나에게 포기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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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2018-12-02 1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경을 읽다니 부럽네요
저는 도전할 엄두도 못내고 있어요

짜라투스트라 2018-12-20 18:49   좋아요 1 | URL
아 힘들긴 했는데 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나루님도 언젠가 한 번 도전해보세요. 분명히 하고 나면 엄청난 성취감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중용>은 유학의 '사서'(논어,맹자,대학,중용)중에서
가장 '어려운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역>이라는 역대급 난이도의 책을 읽은 저에게는
(다시한번 얘기하지만, <주역>에서 검은색은 글자였고,

흰색은 종이였습니다.^^;;)
<중용>은 읽다가 잠시 책이 안 넘어가는 수준의 난이도(??)를
가진 책이었습니다. ㅎㅎㅎ
다 읽지 않았지만,<중용>은 별무리없이 완독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요새 저는 '고전'전문 독서가가 되는 느낌이네요.
어쩌다가 이렇게 된것인지....
잠시 한숨이 나오지만, 모두 다 '천명'이라고 여기고
포기하지 않고 읽어나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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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잃은 개 2 - <논어> 읽기, 새로운 시선의 출현
리링 지음, 김갑수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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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리링에게는 논리적 칼이 있다. 그는 학문을 하는 동안 갈고닦은 그 칼을 <집 잃은 개>에서 마음껏 휘드른다. 철저한 고증과 실증을 기반으로, 자신의 생각과 이 시대의 관점을 섞어서. 먼저 그의 논리적 칼에 휘둘리는 것은, <논어>라는 책과, 그 속에서 살아 숨쉬는 '공자'와 '그의 제자들'과 '공자와 제자들이 만난 사람들'이다. 리링은 공자의 말을 '공자의 말답게' 해석해낸다. 그는 그의 오류와 실수를 정당화하지 않는다. 그는 공자가 시대적 한계에 갇혀 있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대신에 그는 공자가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채로, 이 시대에도 충분히 필요한 가르침을 전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제자들의 경우에는, 제자들이 어떻게 공자의 의도와는 달리 공자를 성인으로 만들었는지를 가감없이 말해준다. 그가 휘두르는 첫번째 논리적 칼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한계가 있지만 충분히 매력적이고 힘이 있는 <논어>와 인간 공자의 모습을 원없이 만날 수 있다. 두번째로 그는 논리적 칼을, 이 시대에 공자를 신성시하고 신격화하여 '공자팔이'를 하는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공자를 이데올로기화하고 신격화하여 흠없는 성인으로 만들어 '공자팔이'를 하는 인물들을 비판하면서, 그는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한다는 명분으로 중국 문화의 정수로 소개된 유학에 의존하는 세태에 대한 비판도 동시에 시도한다. 이 논리적 칼은 너무 서늘하고 매서워 그의 논리적인 칼을 따라가다보면 내 자신의 마음도 그의 논리적 칼에 베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늘].  공자는 천명을 가장 두려워했다. 천명이란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기에. 그에게 어찌할 수 없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집 잃은 개>를 보면 그에게 어찌할 수 없는 것은 그 자신이 생각한 '정치적 이상의 실현'처럼 보인다. 공자는 주나라의 예법이 쇠락해가는 혼란스러운 춘추시대를 살면서, 봉건제에 기반한 주나라의 예법을 다시 되살리려고 했다. '주례'만이 이 시대의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면서. 하지만 그는 봉건제에 기반한 '주례'에 어울리지 않은 낮은 신분의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그들이 이 시대에 필요한 인재가 되게 만들었다. 그 자신의 이상인 계급제도에 기반한 주례에 어긋나게. 이걸 도덕정치론의 관점으로 치환해도 마찬가지다. 그는 도적적인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며 그것을 현실화시키려 했다. 하지만 현실의 정치 지도자들은 그의 이야기를 무시했다. 그가 힘을 실어 외친 그의 정치적 이상은, 현실의 정치 지도자들의 귀를 스쳐지나갈 뿐이었다. 다양한 나라를 돌아다니며 그는 자신의 정치적 이상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공자에 입장에서 보면 정치적 이상을 위한 그의 노력이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집 잃은 개>에 나오는 것처럼, 불가능할 줄 알면서 실행했던 일. 불가능할 줄 알면서 시도하는,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일. 이것이 그의 입장에서는 '천명'일 것이다. 그러니 그는 '천명'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의존] <집 잃은 개>를 보면 공자는 시대적 한계에 갇힌 인물이면서, 시대적 한계를 넘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불가능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나섰고, 실패한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제자들과 너무나 인간적인 사제관계를 만든 인물이다. <집 잃은 개> 어디에서도 그가 신화적 인물이라거나 성인이라고 말하는 부분은 없다. 그를 신화적 인물로, 성인으로 만든 건 그의 후대의 사람들이다.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정치적 의도가 있어서, 경제적 목적을 위해. 그들은 생생한 매력을 가진 한 인물을 미라처럼 박제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사용했다. 박제가 된 공자의 모습은, 범접할 수 없는 영웅의 모습처럼 보인다. 우리가 다가갈 수 없는. 어쩌면 그들은 공자에게 의존하는 것일지도 몰겠다. 자신이 부족하니까, 자신이 될 수 없으니까, 자신들의 이상과 관념을 공자에게 투영하여 박제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리링은 그 의존에서 벗어나라고 외친다. 의존에서 벗어나야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고. 그게 공자가 말하는 '군자'라고. 독자가 여기까지 왔다면, 벗어나야 하는 할 단계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리링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는 것. 나는 그 단계까지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앉아서 글을 쓰다보니 무언가를 깨닫게 된다. 리링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는 것이 지금부터 시작됐다는 그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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