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잃은 개 1 - <논어> 읽기, 새로운 시선의 출현 리링 저작선 2
리링 지음, 김갑수 옮김 / 글항아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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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구성을 잠시 따라해서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잡담 편>
그날 나는 <집 잃은 개1>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리링이 특유의 꼼꼼함과 전문지식으로 세밀하고 꼼꼼하게 파고들어가서는 자신만의 독특하고 현대적인 관점으로 <논어>를 해석하는 이 책에 큰 흥미를 느껴서 정신없이 읽어내려가다가 목이 말라서 방을 나와 냉장고로 가서 물병을 찾았다. 냉장고 물병을 꺼내는데, 근처의 식탁에 앉아 어떤 싸가지 없는 나이어린 친척 여동생의 언행에 대해 말하고 있는 부모님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 얘기를 듣다 나는 나도 모르게 외쳐버렸다. "참으로 예의범절에 어긋나는 사람이로다." 아뿔싸!! 내 입에서 '예의범절'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살아 생전에 '유학'에 관심을 가진적도 없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내 입에서 유학적인 언어의 전형인 '예의범절'이라는 말이 나오다니!! 방에 돌아와서 반성을 하면서 왜 이렇게 됐는지 생각해봤다. 결론은 <집 잃은 개1>때문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내가 읽은 책은 내 정신에 스며들어 영향을 미친다. <집 잃은 개1>와 나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집 잃은 개1>에 깃들어 있는, 공자와 <논어>와 유학과 리링의 사상과 개념과 생각이 내 정신에 스며들어 나를 변화시켰고, 나는 거기에 따라 나도 모르게 말을 내뱉어버린 것이다. 책이 미치는 영향은 이렇듯 무섭다. 책을 읽는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독자의 몸과 정신을 변화시켜버리기 때문에.

<독서 편>
글자 수 1만5836자의 <논어>. 고고학,고문헌학,고문자학의 '삼고'의 권위자인 리링은 <논어>에 들어있는 1만5836자 한글자 한글자를 죽간과 백서, 금석문의 언어와 꼼꼼하게 비교 분석하면서 자신만의 관점과 현대적인 관점으로 해설을 한다. 그는 철저한 고증과 실증에 기반을 두고, 공자에 대한 근거없는 윤색, 신격화를 거부하며 <논어>를 읽어내려간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절대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 성인 공자나 진리의 책으로서의 <논어>가 아니다. 그는 <논어>에서 제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세상과 관계를 맺으면서, 드러나는 '인간 공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은, 때로는 시대의 한계에 갇힌 양상으로, 때로는 시대를 뛰어넘어 인간들에게 가르침을 주는 모습으로, 때로는 정치 지도자들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실패한 정치가의 모습으로,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가르침을 주고 사람에 따라 다른 방식의 가르침을 내리며 제자들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뛰어난 스승의 모습으로, 은자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세상에 나아가서 자신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이상에 따라 세상을 바꾸려는 불가능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세상의 풍파에 시달리며 힘들어하는 인간의 모습으로, 마지막까지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그 수많은 인간 공자의 모습을 보면서 공자만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철저한 고증과 실증을 통해 드러난 모습이 공자의 인간적인 매력이라는 것은, 시대를 뛰어넘어 우리의 삶에 '무언가'를 전해줄 수 있을 정도로 공자 삶의 힘이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이것은 리링이 자신의 사상과 이 시대의 현실을 토대로 <논어>를 해석하면서 중간중간 책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해석상의 독특함과 맞물리며 독자를 이상한 균열로 이끈다. 시대의 한계에 갇히면서도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는 것이 공자와 <논어>라는 모순적인 현실로.

<해석 편>
해석이라는 건 언제나 해석을 한 사람의 관점을 전제로 할 수밖에 없다. 해석자가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시대를 살았고, 어떤 생각과 사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른. 그건 아마도 해석이 언제나 해석자의 삶에 기반한 '현재화된 해석' 일 수밖에 없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리링도 마찬가지다. 그의 해석이 이전의 신격화한 해석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그의 삶의 사상과 가치관이 이전의 신격화한 해석을 하는 해석자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이 말을 다르게 해보면, <집 잃은 개>를 통해 리링이 선보이는 일종의 해석적 투쟁(??)은, 이전의 신격화된 해석을 하는 해석자들의 삶과 리링의 삶의 투쟁으로도 볼 수 있다. 신화와 신격화에 매달리는 삶과, 신화와 신격화를 거부하며 인간적인 모습을 찾으려는 인간의 투쟁. 동시에 그 투쟁은 위태로운 면이 있다. 이전의 신격화한 해석자들과의 해석적인 투쟁과 더불어 실증적인 고찰을 통해 <논어>에서 인간 공자의 모습을 찾으려는 연구대상과의 투쟁 모두를 포괄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리링이 위태로움을 넘어서려면, 책을 읽는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의 책을 읽고 그를 지지한다면, 그의 해석은 독자의 마음에 살아남아 독자의 삶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형태로 생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라면 리링의 해석은 사그라질 것이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너는 어디에 서 있는가? 리링의 해석을 지지하는가? 아니면 반대하는가? <길 잃은 개1>을 다 잃은 지금의 시점만 놓고 본다면, 나는 리링의 해석을 지지한다. 신화와 신격화보다는, 인간 공자의 모습을 찾는 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2권을 잃으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나는 리링을 따라 공자의 사상을 둘러보며 같이 걸어나갈 예정이다. 그게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기에. 이것이 <집 잃은 개1>에 대한 나만의 현재화된 해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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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링의 주역 강의>를 읽는 중인데,

너무 어려워서 머리털이 빠질 것 같네요.^^;;
엄청나게 많은 한자들이 눈앞을 가득 채우는데,
진짜 검은것이 글자요,

흰것이 배경이 되는 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ㅎㅎㅎ
첫 술에 배부를 수 없겠죠.
<주역> 자체가 어려운 내용인데, 저 자신도 <주역>을 처음 읽고, 
실증을 중시하는 학자 리링답게 꼼꼼하게 해석하다 보니
독서가 '어려움'의 단계에 머무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포기는 없습니다.

끝까지 다 읽을 거구요, 한번 읽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회되면 읽고 또 읽어야죠.
모든 걸 하늘의 뜻에 맡기고 다시 열심히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음, 이러다 진짜 '선비'처럼 되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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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쳐서 1400페이지...
두껍고 무겁기 그지없으며, 온갖 한문이 난무하는

이 책을 드디어 완독했다!!!
책을 덮고 나서 기쁨의 함성이 나왔다....
그래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앞으로도 계속 읽어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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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를 읽다 - 공자와 그의 말을 공부하는 법 유유 동양고전강의 3
양자오 지음, 김택규 옮김 / 유유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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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9년에 일어난 중국의 5.4운동은 중국 사상사에 한가지 기념비적인 일을 시작했다. 바로 한대 이후로 존경과 숭모의 대상이었던 '공자'를 거침없이 비판한 것이다. 5.4운동 당시 중국의 개혁을 바라던 이들은 낡은 중국의 대명사로 공자를 지목하고 공자와 공자로 대변되는 낡은 시스템과 체제,문화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을 하며 중국의 근대화를 이루어 내려 했다. 5.4운동에서 시작된 공자 비판은 1966년에 시작되어 1976년까지 진행된 '문화대혁명' 때 절정을 이룬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입을 열어 악의 대명사가 된 공자를 비판하고 비난하고 욕을 했다. 공자는 언제 어디서나 욕을 먹었다. 언제 공자를 존경하고 숭모했냐는 듯이.


2.
1980년대까지 이어지던 공자 비판은,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을 거치며 경제성장을 이루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비판과 비난과 경멸의 대상이던 공자는, 어느 순간부터 경제 성장을 이룩한 중국의 문화를 대표하는 인물이 되어 숭모의 대상이 된다. 과거에 공자를 욕하던 이들이, 욕을 내뱉던 그 입으로 이제 공자에 대한 칭찬을 내뱉기 시작한다. 악의 대명사였던 공자는 공자를 악의 대명사로 욕하던 이들에 의해 다시 중국문화의 화신이자 성인이 된것이다. 공자와 제자들이 나눈 대화가 기록된  <논어>도 공자가 존숭의 대상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고귀한 진리의 말이 기록된 책이 된다. 고결하고 고귀한 말이 가득한 진리의 책으로 자리매김한 <논어>는, 공자와 더불어 더 이상 오를 것 없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오른다. 2000년대까지 이어진 공자와 <논어>에 대한 복고 열풍은 2007년에 발표된 책으로 암초를 만난다.

3.
2007년 중국 출판계를 뒤흔든 베스트셀러이자 사상계와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 일으킨 <집 잃은 개>는 종교화하고 이데올로기화한 성인 공자를 비판한다. 고고학,고문헌학,고언어학의 '삼고'의 권위자이자 30년 넘는 시간동안 묵묵히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학문적 연구에만 몰두하던 학자 '리링'은 철저한 실증적 자료와 언어분석을 바탕으로 맹신과 신격화의 그늘속에 박제된 '죽은 공자'가 아니라 '인간 공자'를 되살려낸다. 그는 철저하게 죽간과 백서,금석문에 토대를 두고 써내려간 <집 잃은 개>를 통해 신격화하고 이데올로기화한 공자가 아니라 생생히 살아 숨쉬는 인간 공자의 매력을 독자들에게 전하며, 고결하기 그지없는 <논어>가 아니라 인간 공자와 인간적인 공자 제자들의 삶과 사상이 살아 숨쉬는 책으로 <논어>도 되살려냈다. 엄청난 반향과 인기를 얻은 <집 잃은 개>는 이후 새로운 공자와 논어 해석의 방향성을 제시했다고도 할 수 있다. 신화적 공자가 아니라 인간적인 공자, 인간적인 매력이 살아 숨쉬는 <논어>의 해석방향으로.

4.
언론,방송,학계를 넘나들며 전방위적 활약을 펼치고 있는 대만의 지식인 양자오는 10년는 시간동안 동서양 인문고전 강의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2011년 이후로 중국 고전에 관련된 강의를 하는 와중에 <논어>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읽어내고, 그 강의의 흔적을 책으로 펴낸 <논어를 읽다>를 읽다보면, 정확한 연관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양자오의 <논어> 독법이 <집 잃은 개> 이후로 새롭게 불어닥친 공자와 논어 해석의 흐름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신성한 공자, 진리의 확성기로서의 공자, 진리를 담은 책으로서의 <논어>를 거부한다. 그에게, 공자는 우리처럼 울고 웃고 화내는 존재로서 제자들과 인간적 관계를 형성하고, 차별 없이 제자들을 대하고 가르쳤으며, 온갖 실패와 좌절에도 자신만의 복고적 이상을 죽을 때까지 추구한 매력적인 인간이다. 논어는 그 인간적인 매력을 잘 찾아낼 수 있는 텍스트일 뿐이다.

<논어>는 글자 수가 많은 책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많지 않은 내용 안에 뜻밖에도 완전히 똑같은 구절이 여러 번 나타납니다. 아마도 처음에 자료를 수집할 때 실수로 똑같은 내용을 중복해 기록하여 이런 현상이 빚어졌을 겁니다.
...
또한 <논어>는 오랜 세월에 걸친 연구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어떤 통일된 기준에 따라 장이 배열되었는지 믿을 만한 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겉모양으로 보아 <논어>는 제자들이 각자 갖고 있던 기록을 모은 것으로서, 그중 누구도 편집의 권한을 독점하지 못하여 그렇게 무질서한 형태로 배열된 듯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히려 더 안심할 수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논어>를 의도적으로 고치고 날조했다면 가장 혼란스러워 보이는 배열부터 손을 대어 더 명확하고 논리적으로 만들지 않았겠습니까.
...
<논어>는 한편으로는 안심하고 읽을 수 있는 경전입니다. 다른 상고 시대 경전을 읽을 때처럼 후대에 날조되고 삽입된 내용이 혹시 없는지 경계하며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해하며 읽을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편찬자가 명확한 순서와 체계를 표시해 두지 않았으므로 그 혼란한 문구들이 서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 스스로 가늠해야 하기 때문입니다.(p.36~38)

전통적으로 <논어>를 숭배해온 탓에 이 책의 내용을 공자가 심사숙고하여 표현한 보편 진리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텍스트를 꼼꼼히 따져 보면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책은 긴 시간에 걸쳐 공자의 주변 사람들이 한 자 한 줄 빠르게 기록한 게 분명합니다. 공자가 그들에게 기록하도록 한 다음 말하거나 행동하고 제자들이 그때그때 기록한 것도 아닙니다. '후대의 법도'나 '천하의 법도'로 삼기 위해서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 말들을 완벽하게 정리된 진리로 받아들여 줄줄이 외우고 실행하기보다는 그 말들의 진면모를 복원함으로서 단편적이지만 진실하고, 또 단편적이어서 오히려 진실한 이 기록에서 2천 년 전에 살았던 한 훌륭한 인물을 관찰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고 어떤 삶이 훌륭한 삶인가에 대한 그의 의견은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 힘든 것이어서 여전히 우리의 사상과 감성에 자극을 줍니다.
이런 방식으로 <논어>를 읽는 것은 전통적인 독법보다 힘들지만 재미있습니다. 힘든 이유는 독서 과정에서 공자를 한 인간으로서 복원하고 이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수동적으로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관련 자료를 모아 공자의 말과 행동을 최대한 역사의 맥락 속에 돌려놓는 한편, 심리적, 감성적, 논리적 지식을 다 동원해 공자를 해석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서 우리는 이런저런 가르침을 주는 추상적 이론 따위가 아니라 마음속 깊은 고셍서 고뇌와 인격과 시련을 통해 만들어진 다층적이고 변화무쌍한 이야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p.100~101)

공자 또한 진실하고 다면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진실한 인간은 다면적일 수밖에 없으며 오직 다면적 자료만이 우리 앞에 진실한 인간을 복원시켜 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논어>의 형식과 그 안에 기록된 내용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p.102)

5.
롤랑 바르트의 '수용자 이론', 데리다의 '해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이후로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원전의 권위에 기대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다. 원전의 아우라가 사라진 시대의 독서법이란 주관에 크게 기댈 수밖에 없다. 보들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처럼, 더 이상 원전은 과거의 원전이 아니고, 복제품도 과거의 복제품이 아니다. 원전 같은 복제품들의 시대에 사는 우리는, 하나의 진리로서 존재하는 책, 하나의 완벽한 독서법을 기대하면 안된다. 우리는 자신의 주관속에 재해석된, 재창조된 고전 읽기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벽하게 주관적인 고전독서가 가능한 것일까? 객관적인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완벽한 주관적인 독서란 있을 수 없는 허구의 개념일 뿐이다.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주관성을 견지하면서도 '나'의 주관성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고전'의 객관성을 받아들여 나아가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서 헤매이는 독서'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길이고, 가야할 길일 수밖에 없다. <논어를 읽다>가 보여주는 양자오식 '논어 독법'도 거기에 위치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할 이 시대의 고전독서의 한 모습으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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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썼던 글과 이어지는 내용입니다만,
특정 영역의 책들을 몰아서 읽으니 
이상하게 책 읽는 욕망이 다시 불이 붙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책 읽는 욕망에 불타서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책이 삶이니까, 할 수 밖에 없는 습관이니까,

관성적으로 읽는 느낌이었는데,
동양고전쪽만 몰아서 읽다보니까, 이 쪽 책을 더 읽고 싶고,
거기에 더해 다른쪽 영역의 책들도 마구 읽고 싶어지네요.
독서욕구가 다시 회춘했다고 해야할까(^^;;),
어찌되었든 제 독서인생에서 최근 시기는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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