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O 모중석 스릴러 클럽 43
제프리 디버 지음, 이나경 옮김 / 비채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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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당신의 그림자가 되어주겠어. 영원히.(9)
말 그대로 나는 당신의 그림자가 된 것 같아. ... 그리고 넌 내 것이고. 황홀하군!(11)
공연장의 심장은 사람이다.(15)
당신은 무대 위로 나와서 사람들에게 노래를 불러주죠.
모두를 웃게 해줘요. 무엇이 잘못될 수 있을까요?
하지만 곧 그 일에는 희생이 따르는 걸 알게 되죠.
모두가 당신의 영혼을 한 조각씩 원하고 있으니까.(52)
스토커 같은 관음적인 범인들은 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들은 남을 훔쳐보며 편안해진다.(89)
에드윈이 현실 파악을 못 한다고 생각해야 해요. 그리고 케일리와 접촉하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그걸 고치려고 하지 않는 거죠.(152)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데 성공하는 유명인이 될 수록 사람들은 점점 그의 영혼까지 앗아갈 자격이 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237)

최근에 우연히 인터넷 방송을 자주 보게 됐습니다. 채팅을 치면서 소통하는 것도 재미있고, 인터넷 방송을 진행하는 이가 선보이는 것들도 재미있고 해서 즐기고 있게 됐죠. 그런데 가끔씩 예상못한 악플을 쓰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어떻게 그런 독하고 나쁘고 더러운 말들을 마구 내뱉을 수 있을까요? 자신에게 그렇게 남을 비난하고 욕하고 함부로 말할 권리가 있다고 진짜로 여기는 것일까요? 아니면 단지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는 익명성이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일까요? 제가 그 사람이 아니니 알 수 없지만, 안타까운 건 그들에게 상호교류라는 인간 특유의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남은 건, 자기 자신의 생각과 언어에만 집착하는 자폐성이었습니다.

어떻게 본다면 스토커도 위에서 이야기한 악플러들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스토킹 하는 대상이 자신과 아무 관계도 없으면서 관계가 있다고 착각합니다. 스토킹의 대상이 자신에게 어떤 행동도 하지 않거나 별의미 없는 행동을 했는데 오해하고 착각하면서 자신만의 망상 스토리를 써나가는 스토커는 스토킹의 대상과 상호교류를 하지 않습니다. 스토커에겐 오직 일방향의 자폐적인 관계만 있을 뿐입니다. 자신만의 망상 스토리에 빠진 스토커에게 스토킹의 대상이 어떤 존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바라보는지가 중요할 뿐. 어떻게 보면 스토커에겐 스토킹의 대상은 인간이 아닙니다. 자신의 감정과 망상을 투여하는 '물건'일 뿐입니다. 저는 스토킹의 비극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XO>도 스토킹의 비극이 담긴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컨트리 가수로 유명한 케일리 타운이 최악의 스토커 에드윈 샤프에게 시달리고, 케일리 타운과 알고 지내던 행동학전문가 캐트린 댄스가 그와 관련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미국 크라임 스릴러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제프리 디버의 소설답게, 책은 곳곳에 독자들을 홀리고 잘못된 결론으로 이끌고나가는 '미스디렉션'이 가득합니다. 마술사가 자신의 마술을 성공시키기 위해 마술을 바라보는 이들을 홀리는 기술을 가리키는 '미스디렉션'을 잘 쓰는 작가답게 제프리 디버는 독자들을 쥐고 뒤흔들다 자신만의 결론을 보여줍니다. 저도 초반에 디버에게 뒤흔들리다 어느 순간부터 정신을 차리고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결론까지 다 읽고나니 남는 건 관계에 대한 생각이더군요.

최근의 저에게는 '재밌다', '재미없다'라는 감정보다 저 자신의 생각에 남겨진, '생각의 잉여'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XO>가 남긴 '생각의 잉여'는 관계에 가 닿고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고민을 이끌어냅니다. 쌍방향이 아닌 일방향의 관계에 집착하다 벌어진 스토킹 같은 비정상적인 관계가 되지 않기 위해서 관계의 상호성을 어떻게 이끌어내야 하는가 같은. 결국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해야할 것 같습니다.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함께 산다는 생각을 품고 살아야 자폐성에 집착하는 인간이 안 될 것 같습니다. 아, 별로 특별한 건 없네요.^^;; 특별한 건 없지만, 다른 무엇도 아닌 이 책이 제게 준 생각이라는 점에서 이 생각은 중요합니다. 스토킹이 아닌 쌍방향 관계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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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비너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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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모르는 것을 그려?"
", 잘 모르는 것을 그리고 있네. 아니, 그리라는 대로 그리는 건가?"
"누가 그리라고 하는데?"
"글쎄다, 하느님인가?"(13)
너희는 모를 거야, 그 그림의 가치를. 거기에는 진리가 드러나 있어. 그 그림을 해석하면 소수란 무엇인가라는 수학계 최대의 수수께끼가 풀리고, 세기의 난문이던 리만 가설도 결론이 내려질 수 있어.(444~445)
데시마 가즈키요 씨는 <관서의 망>을 그려낸 것을 후회했어. 인간이 발을 들이밀어서는 안 될 영역이 있다고 깨달은 거야.(474)

<위험한 비너스>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입니다. 작가의 이름을 보는 순간, 혹시라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읽어온 이들이라면 뭔가가 머릿속에 그려질 것입니다. 어려운 말 없이 속도감 있게 진행되며 술술 넘어가는 페이지. 드라마틱한 전개. 네, 이 모든 것들을 <위험한 비너스>를 다 보여줍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답게,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묘사나 문장은 없지만, 독자로 하여금 부담없이 즐길 수 있게 하는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히가시노 게이고 했다'라고 해야할까요.^^;; 여기까지 쓰고보니 별로 쓸게 없네요. '자, 끝내겠습니다'라고 하면 좋겠지만(^^;;) 너무 빨리 끝낼 수는 없어 조금 다른 방식의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림에 관한 부분이었습니다. 책의 스토리 전개상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그림 이야기의 핵심은(스포일러 느낌이 있어서 다 이야기하지는 않겠습니다.^^;; 이해해주세요.), 그 그림을 건드리거나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금기와 금지, 금단의 느낌이 나는 그림 이야기를 보고 있자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 생각들에 관해 한 번 자세히 말해볼께요.  

근대와 전근대를 구분하는 다양한 요인들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중에서 <위험한 비너스>의 그림 이야기를 보고 있자니, 금기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종교나 종교와 유사한 것들을 가지고 계급적 지배질서를 구축한 전근대는 금기나 금지가 많습니다. 신의 영역을 넘본다느니, 해서는 안 될 일을 한다면 벌을 받는다느니 하는 식의 말로 전근대는 사회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게 하기 위해 무수한 금기나 금지를 남발합니다. 그건 과학이 발달하지 않은, 종교나 문화적 관습에 기반한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겠죠. 그런데 신 중심의 사회가 아닌 인간 중심의 근대사회는, 전근대의 금기나 금지를 상당 부분 무너뜨리면서 발전해왔습니다. 유전공학의 발달 같은 게 대표적이겠죠. 전근대 같았으면 신의 영역이라고 금기시됐던 생명의 영역을 건드리면서 유전공학은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루어나갔습니다. 점점 사라져가는 금기와 금지. 그러면서 발전해나가는 게 근대 사회의 모습이죠.

그런데 이 책의 핵심에는 금지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발견해서는 안되는 비밀을 간직한 그림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금지. 저는 이 부분이 재미있었습니다. 왜냐구요? 바로 이 책을 쓴 히가시노 게이고가 근대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근대적인 이공계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금기나 금지 같은 것을 없애는 데 가장 앞장선 가장 근대적인 학문인 이공계 출신의 작가가 전근대의 특징 중 하나인 금기에 관한 책을 쓴다는 점이 아이러니하게 생각됐거든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추리소설은 처음부터 아이러니한 면이 있었습니다. 최초의 추리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쓴 작가 에드거 앨런 포는, 근대라는 시대의 특징과 사상을 싫어하고 끔찍하게 여겼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근대에서 중요시여기는 논리가 중심이 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는 소설을 썼습니다. 추리소설은 처음부터 이런 아이러니를 간직하고 탄생한 셈이죠. <위험한 비너스>에도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 같은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가장 근대적인 학문을 한 작가가 전근대적인 금기가 중심이 되는 소설을 썼으니까요.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제가 정말 쓸데없는 생각을 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런 것도 독서의 묘미 아니겠습니까.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이런 쓸데없는 생각들을 종종 할 것을 다짐하면 이만 글을 마쳐야겠네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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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 10년 - 불황이라는 거대한 사막을 건너는 당신을 위한 생활경제 안내서
우석훈 지음 / 새로운현재(메가스터디북스)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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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전개되기 시작한 불황을 앞두고 내가 한국의 30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정성을 다해 조언을 하려고 하는 것은 이들의 미래가 바로 한국의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들 개개인이 행복하고, 이들 개개인이 보편적 의미를 가진 글로벌 시민으로 당하고, 이들 개개인이 가진 개성들이 폭발하는 것, 이것이 한국이 불황 10년을 거치면서 흔히 중남미형 경제 패턴으로 가지 않고, 그래서 최소한 일본 정도로 버티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20)
일본을 보면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집을 사는 것이나 대출을 갚는 것보다도, 파는 게 더 힘든 시기를 향해 가고 있다는 점이다.(43)
거리는 시내에서 가까울수록, 유지비는 저렴할수록 아파트 가격이 덜 떨어졌다.(48)
호황에 형성된 일상성을 불황기에 적합하게 재구성하는 일, 이것이 신용카드와 함게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133)

예전부터 기회가 있어서 돈이 조금 많으신 분들을 만날 때마다 조금 신기하다 생각한 점이 있습니다. 그분들이 대체로 돈이 많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뭐 제 경험이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돈이 많아 보이지도 않는데다 오히려 아끼는 모습을 보여서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엄청난 부자를 만난 것이 아니라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저는 제가 만난 사람만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불황 10년>을 읽으며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놀랐습니다.

박근혜 정권이 활기치던 2014년에 출간된 <불황 10년>의 앞부분에서, <88만원 세대>의 저자로 유명한 우석훈 박사는 저와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이 만난 부자가 부자답지 않아 보인다고. 아, 저는 그 이야기에 동질감과 안도감을 느꼈습니다. '나만 그런 경험을 한 것이 아니구나'하고. 저자는 그러면서 뒤잉서 말합니다. 부자들은,돈을 많이 투자해서 돈을 많이 버는 공격적인 방식보다는 가진 돈을 지키는 방어적인 방식에 능한 사람들이 많다고.

저도 그 이야기에 깊이 공감합니다. 제가 만난 돈이 많으신 분들도, 가진 돈을 공격적으로 활용하는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필요할 때 그분들도 투자를 합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언제나 공격적인 방식의 경제운용을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들은 가진 돈을 어떻게든 지키는 모습에 능해 보였습니다. 아끼고 잘 쓰지 않고. 언제 닥칠지 모를 미래의 위기를 대비하면서.

이 부분이 <불황 10년>에서 중요합니다. <불황 10년>은 언제라도 경제적 고성장이 가능한 사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불황 10년>은 해마다 임금이 오르고, 부동산 값이 뛰고, 앞으로의 경제적인 성장을 쉽게 기대할 수 있는 사회를 바탕으로 하지 않습니다. <불황 10년>은 30년동안의 장기 저성장에 시달리던 일본과 비슷한 길을 갈 확률이 높은 현대 한국 사회의 이야기입니다. 저자의 현실인식은 박근혜 정권이 활개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그 시대를 겪어내며, 앞으로 과거의 고성장은 힘들고 저성장이 지속되는 불황의 시대가 올 것이며, 민주주의의 활성화라든가 불평등의 완화 같은 정치적이 발전도 힘들 것이라고 여겨, 개인의 생존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조언을 담은 <불황 10년>을 쓰게 됩니다.

저자의 현실인식은 30년의 불황을 어떻게든 견뎌낸 일본의 서민들의 경험을 기반으로 깔고 있기도 합니다. 일본의 서민들은 경제적인 광풍이 몰아치던 버블의 시대를 거쳐, 거품이 빠지며 시작된 1990년대의 경제적 불황을 30년 세월동안 견뎌냈습니다. 일반적으로 일본 경졔를 보고 소비를 하지 않는, 활력 없는 경제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우석훈 박사는 그 시각을 비틀어서 소개합니다. 그는 일본인들이 불황을 30년이나 견뎌내면서 저축이 많이 늘어난 통계를 보여주며 그들이 30년 불황을 이겨낸 경제적 비결이 여기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일본의 서민들이 앞으로도 언제라도 발전할 수 있다는 고성장에 기반한 공격적인 인식이 아니라, 앞으로도 언제라도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저성장에 기반한 방어적인 방식으로 불황을 견뎌냈다고 말합니다. 정부나 일반적인 경제전문가들이 이야기하는 공격적인 투자를 서민들이 따라서 했다면 서민들의 삶은 더욱 더 힘들어졌을 것이라고 하면서. 불황 30년의 일본 경제를 망하지 않게 떠받친 것이 불황에 기반한 서민들의 방어적인 경제적 삶의 방식이었다고 하면서.

저도 그 시각에 동의합니다. 고성장을 기대할 수 없고, 저성장이 예측된다면, 저성장과 불황에 맞는 경제인식을 하고, 그에 기반한 경제적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앞으로 더 나빠질 것이 뻔히 보이는데 빚을 내어 흥청망청 쓸 수는 없지 않습니까. 가진 것을 안정적으로 모으고, 씀씀이를 줄이면서 견뎌 내는 게 불황의 경제에 맞는 삶의 방식일 것입니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진정 현실적인 책입니다.  헛된 투자, 헛된 성공의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게 한다는 점에서. 현실을 냉정하게 파악하고, 그에 맞춰 현실을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점에서.

책의 전반부라고 할 수 있는 부동산과 개인 재무구조에 관한 이야기는 정말 귀담아 들을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히 재무구조에 관한 이야기는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라고 여겨집니다. 방어적인 방식을 통해 가진 것을 지키고, 안정적인 수입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올리고 싶다면 이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동산 부분은, 조금 생각이 다를 수 있는데, 그런 것도 충분히 인정하고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방식도 있을 수 있다면서. 창업 부분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습니다. 창업이라는 영역이 일반화가 쉽지 않은 부분이라서요. 그리고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교육 부분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해야할지 잘 몰라서요. 다만 하나, 선행학습이 교육에 있어서 그렇게 효율적이지 않다는 말은 해야겠네요. 행학습은 오히려 나중에 번아웃 증후군을 초래할 확률이 높습니다.  혹시라도 아무 생각없이 선행학습을 아이들에게 시키는 분들은 이 정도는 알아두시기를 바랍니다.

자기계발서의 주술은 우리를 성공에 목마르게 합니다. 성공이 마치 언제 어디서라도 가능한 것이라는 듯이. 성공이 마치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처럼. 하지만 <불황 10년>은 우리로 하여금 현실을 냉정히 바라보게 합니다. 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성공에 매달리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하면서. 개인적으로 저는 그것이 불황에서 살아나가는 성공한 삶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불황 속에서 잘 살아가고 싶다면, 현실을 잘 견뎌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을 것을 권해드립니다.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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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기아스 / 프로타고라스 - 소피스트들과 나눈 대화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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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틀린 말을 하면 기꺼이 논박당하고, 남이 틀린 말을 하면 기꺼이 논박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오. 하지만 나는 논박하는 것보다 논박당하는 것이 더 좋아요. 가장 나쁜 것에서 남을 구원하는 것보다도 자신을 구원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큰 좋음인 한, 나는 논박당하는 것이 더 큰 좋음이라고 여긴다오.(41)
정의는 사람들을 절제 있게 해주고 더 올바르게 해주는, 나쁨을 치료해주는 의술(91)
-우리가 좋은 것은 우리 안에 어떤 미덕이 있기 때문이고, 우리 말고도 좋은 것들은 모두 그 안에 어떤 미덕이 있기 때문인가요?
-나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네, 칼리클레스.(154)
도구든 몸이든 혼이든 살아 있는 무엇이든 각각의 미덕이 가장 훌륭해지는 것은 우연에 의해서가 아니라, 각각에게 고유한 짜임새와 올바름과 기술에 의해서요.(155)
우리는 정의와 절제를 갖추어 행복해지는 일에 우리 자신과 우리 공동체의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하네. 우리는 그것을 행동지침으로 삼아야 하며, 우리의 욕구들이 무절제해지게 방치하거나 우리의 욕구들을 충족시키려고 해서는 안 되네.(157)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거나 겁쟁이가 아니라면 누구도 죽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불의를 행하는 것을 두려워할 걸세.(189)
우리는 불의를 당하지 않기보다는 불의를 행하지 않도록 더 조심해야 하며, 특히 사적으로나 공적으로 훌륭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며, 누군가 어떤 점에서 나빠진다면 처벌받아야 하며, 처벌받고 응분의 대가를 치름으로써 올바르게 되는 것이 본래 올바른 것 다음으로 가장 좋은 것이며, 모든 아첨은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든 남들이든 소수이든 다수이든 피해야 하며, 수사학은 다른 활동과 마찬가지로 정의를 위해서만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 말일세.(198)

저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좋아합니다. 플라톤 대화편 특유의 말을 주고받는 리듬도 그 독특함 때문에 좋고, 플라톤의 분신인 소크라테스가 상대방을 논파하는 특유의 논쟁도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플라톤의 대화편에 익숙하지 않거나 계속 상대방의 말을 파고드는 것에 흥미를 느낄 수 없는 사람이라면 플라톤의 대화편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네, 저도 충분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르기아스>를 가지고 고전독서모임을 할 때 걱정이 되었습니다. <고르기아스>는 플라톤 대화편의 특징이 너무 잘 드러난 작품이어서요.

그런데, 제 생각과는 달리 이번에 한 고전독서모임은 너무 좋았습니다. 독서모임이 책의 장점을 극대화시키고, 책의 다양성을 드러내어 책을 생생히 살아있게 했거든요. 독서모임에서 나눈 대화를 통해 <고르기아스>는 제가 읽은 것보다 더 괜찮고 좋은 책이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때 나눈 대화를 통해서 제가 어떻게 <고르기아스>를 새롭게 읽게 되었는지 그 일부를 적어보겠습니다.

1.책 속의 인물들은 생생히 살아있습니다. 대화편에 나오는 인물들은 소크라테스와 소크라테스에게 논파당하는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대화편 책 속에 나오는 인물들은 저자인 플라톤이 자신이 원하는 사상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서 평면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독서모임을 통해서 말을 주고받으며, 이들이 단순히 평면적인 인물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불변의 확고부동한 진리를 추구하며, 정치나 철학이 그런 진리로 사람들이 나아가게 해야한다는 사실을 주장하는 소크라테스도 그렇지만, 그에게 논파당하는 역할로 나오지만 현실적인 주장을 하는 등장인물들인 고르기아스,폴로스,칼리클레스도 자기들의 입장에서는 옳은 말을 하는 인물들로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인물들입니다. 현실에서의 삶이 그들에게 그런 현실적인 주장을 하게 만든 것이죠. 책을 읽은 우리들은 그들이 무조건 나쁘다거나 틀렸다고는 할 수 없었습니다. 다만 저마다 자신의 생각과 느낌으로 어떤 면은 옹호하고, 어떤 면은 비판하고, 또 어떤 인물에게는 호감을 느끼고, 다른 인물에게는 호감을 느낀 것입니다. 대화편을 쓴 플라톤에게는 미안하지만(^^;;), 우리는 책 속 소크라테스를 무조건 옹호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가, 삶이, 절대적 진리를 추구하는 삶만을 무조건 옳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요. 어쩌면 우리는 현실적인 사고방식을 강요당해서 더 이상 이상과 진리를 추구하는 삶을 동경만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시대가 달라지면 책을 바라보는 시선과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지니까요. 우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책 속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다른 인물들이 생생히 살아 있는 겁니다. 플라톤은 그런 관점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말을 가감없이 표현한 좋은 문학작품을 쓴 작가가 되고요.

2.정치와 수사는 서로를 필요로 합니다. <고르기아스>에서는 소크라테스는, 수사학으로 무엇이든 가능하기 때문에 수사학이 가장 중요한 학문이라고 외치는 소피트스 고르기아스를 논파합니다. 그는 논파하면서, 수사학이 사람들을 진리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닌데다 사람들의 이익이나 욕심이라는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평가절하합니다. 그러나 저는 독서모임에서의 대화를 통해 소크라테스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 아님을 다시금 확인했습니다. 정치가 정치에 참여하는 이들로 하여금 진리로 나아가게 한다면 좋은 일입니다. 그걸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정치가 진리로 반드시 나아가는 길이어야 한다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당위의 논리도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로지 정치가 진리로 나아가는 길이어야만 한다는 당위의 논리로만 채워진다면, 그건 절대적으로 옳은 일은 아닐 것입니다. 당위로만 채워진 정치가 얼마나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오히려 이 부분에서 수사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가 가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사학은 굉장히 유용한 도구입니다. 당위의 목적과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수사학의 결합이야말로 정치행위를 제대로 만들 것입니다. 저는 <고르기아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얽매이지 말고, 정치를 위해서나, 수사를 위해서나 둘 다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3.정치에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는 상황에 따라서 적용해야 합니다. <고르기아스>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와 그에게 논파당하는 사람들의 말은 정치학에서 말하는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에 상응합니다. 정치에서 진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소크라테스는 현실보다 이상을 내세우는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고, 진리 같은 이상보다는 현실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고르기아스,폴로스,칼리클레스는 현실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따질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현실주의가 대세가 된 현대의 흐름 속에서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이상주의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나는 현실주의자이니까 이상주의가 틀렸어'라거나 '나는 이상주의자니까 현실주의가 틀렸어'라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상황과 맥락에 맞춰서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때에 맞춰 적용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열변을 토하는 소크라테스나 책을 쓴 플라톤에게는 죄송하지만(^^;;).

다 써놓고 보니, 저는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가 주장하는 것과는 계속해서 멀어지는 느낌입니다. 책 속 소크라테스나, 책을 쓴 플라톤은 정치뿐만 아니라 철학도 인간을 진리로 나아가게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저는 그것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저는 철학이 인간을 진리로 나아가게 하면 좋지만, 진리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자기 자신의 삶이나 사상이나 생각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조금 더 열린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든다면 그것 자체로 좋은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고르기아스>를 읽고 독서토론을 통해서 <고르기아스>를 곱씹은 것이 철학적인 행위를 했다고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저 자신을 이전의 저보다는 더 괜찮은 인간으로 만들 확률이 높아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이란, 철학함이란, 철학적인 행위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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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 나폴리 4부작 3
엘레나 페란테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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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은 길이가 길어질수록 고리가 커지는 사슬과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향 동네는 나폴리와, 나폴리는 이탈리아와, 이탈리아는 유럽과, 유럽은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22)
모든 기원에는 기원이 있는 법이야. 살면서 일어난 많은 일은 한쪽 구석에 쌓여만 있는 듯싶다가도 때가 오면 의미를 가지게 되는 법이야.(57)
임신이란 말이야. 타인의 생명이 네 배에 달라붙는 거야. 고통 끝에 겨우 뱃속에서 떼어냈다 싶을 테지만 그것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너를 더 구속할 거야. 태어나자마자 널 밧줄처럼 옭아맬 거야. 아이를 낳으면 너는 더 이상 네 인생의 주인이 아닌 거야.(323)
나는 릴라와 분리된 내 모습을 받아들여야 했다. 해답은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내가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398)
우리는 결국 모두 똑같이 사랑과 증오와 욕망과 폭력이라는 짐을 지고 무대에 오르는 그림자 인형일 뿐이었다.(411)
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했지.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등장인물로 삼고 실제 피를 잉크삼아 현실을 소설로 만들어냈어.(445)
이제 나는 다시 무엇인가가 되어야 한다. 이번에는 오직 나를 위해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 릴라에게서 벗어나 성숙한 인격체로서 말이다.(495)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은 정말 페이지가 술술 넘어갑니다. 생각보다 두꺼운 책 두께에 겁먹다가도 일단 읽기 시작하면 책두께는 내 머리속에서 사라지고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페이지 터너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고 해야할요까. 그리고 1권을 읽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2권을 찾아서 읽게 됩니다. 2권 읽으면 당연하게도 3권으로 이어지고요. 마치 주술에 홀린 사람처럼 다음 책을 찾아서 읽게 되는 현상을 경험한 저로서는 확실히 나폴리 4부작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독자로 하여금 계속해서 읽게 만드는 그 힘을.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나폴리 4부작의 3편입니다. 첫편에서 유년기를 지나 성장하는 두 여인 레누와 릴라의 이야기가 그려졌고, 2편에서는 어른이 된 두 여인의 전혀 다른 두 갈래의 삶이 펼쳐졌다면, 3편에서는 중년이 된 두 여인의 삶이 그려집니다. 특히 강한 카리스마와 매력을 지닌 릴라에게 강하게 엮여 있던 고향을 '떠나간 자' 레누가, 릴라와의 끈을 상당부분 끊어내고 타지에서 자신만의 삶을 사는 모습이 그려지는 것이 중심입니다. 하지만 레누의 삶도 그렇게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릴라라는 자신과 떼어낼 수 없는 존재이자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간직한 친구와 멀리 떨어진 채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지만 나폴리의 가난한 계급에서 북부 이탈리아의 부유하고 지적인 가문 출신의 남편을 둔 삶이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 68혁명이라는 거대한 혁명의 물길과 그 뒤를 이어 벌어진 반동적인 파시스트들의 테러가 벌어지는 1960,1970년대 이탈리아의 불안한 현실까지 더해져 불안한 중년의 나날들을 보냅니다. 지적이고 선하지만 자신을 이해하거나 인정하지 못하는 남편과 두 딸을 돌봐야 하는 삶들, 자기자신으로 살지못하는 여성의 서글픔도 더해지고요. 작가는 그 모든 것들을 매혹적인 이야기의 방식으로 우리 앞에 펼쳐내며 경험하지 못했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경험의 장을 열어두고, 비슷한 걸 이미 경험한 이들에게는 공감의 장을 열어내죠. 저의 경우에는, 제가 겪은 일이 아님에도 마치 내가 레누나 릴라가 된 것처럼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잘 읽히고 인간의 마음을 잘 파고드는 소설의 힘을 느끼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여성의 삶을 삶 그 자체로서 경험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소위 여성의 삶을 이론화했을 때 통계나 이론으로만 축소되어 삶의 진실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은데, <떠나간 자와 머무른 자>는 통계나 이론없이 여성의 삶을 가감없이 보여주며 삶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울고 있는 아이, 퉁퉁 부어오른 젖무덤, 남편의 무관심 같은. 이론이나 통계가 보여주지 못하는 삶의 디테일이 묘사될 때 우리는 여성의 삶을 체화하며 공감하게 됩니다. 저는 이게 소설의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이론이나 숫자로만 표시되는 통계와는 달리, 소설은 삶을 그 자체로서 독자에게 공감할 수 있게 그리며 삶 그 자체로서 받아들이게 하기 때문이죠.

나폴리의 가난하고 폭력적인 삶과는 멀리 떨어진 채 불안하게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레누와 나폴리의 힘겨운 삶의 조건속에서도 살아남기위해 최선을 다하는 릴라의 삶을 허겁지겁 들여다보니 소설이 끝나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는 다음편을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에 대한 갈망은 오직 책으로만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죠. 저는 이제 다음편인 <잃어버린 아이 이야기>로 넘어가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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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6-06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가가 내세우는 출산 장려 정책은 여성의 삶을 구속하고 통제하는 근시안적 발상입니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에게 자녀를 낳으라고 강요합니다. 요즘은 기혼 남성도 양육 및 가사노동을 하고 하지만, 여전히 집안일을 전담하고 건 여성입니다.

짜라투스트라 2018-06-06 22:59   좋아요 0 | URL
네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