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 - 경제를 성장시키는 자, 경제를 망가뜨리는 자
라나 포루하 지음, 이유영 옮김 / 부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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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은 지금 경제 성장을 돕는 것이 아니라 방해하는 지경에 을렀다. 금융이 성장하자 기업은 물론이고 경제와 사회 전체가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가장 가늘고 긴 경제 회복을 겪고 있다. 그 해결책은 고립주의도 아니고, 세계화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것(실제로 가능하지도 않다)도 아니다. 금융과 실물 경제, 즉 거저먹는 자와 만드는 자 사이의 힘의 차이를 극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19)
토마 피케티가 주장한 것처럼, 자본이란 "언제나 한편으로는 사회적, 정치적 구조물이다. 자본은 각 사회의 재산권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며, 여러 사회 집단 간의 관계, 특히 자본을 소유한 자와 그러지 못한 자 간의 관계를 규율하는 여러 제도와 정책에 좌우된다."
오늘날 금융업계의 규모와 영향력, 그리고 금융업계가 우리 사회와 민주주의를 망가뜨리는 양태를 보건대, 우리는 위태로운 지경에 처해있다. 제럴드 데이비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미국은 '포트폴리오 사회', 다시 말해 "모든 부류의 사회적 삶이 증권화되어 일종의 자본으로 전환된 사회"가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포트폴리오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거래 가능한 상품으로 전락하여, 인간관계는 '사회적 자본'이, 인간 자체는 '인적 자본'이 된다. 그뿐 아니라 어떤 종류의 기회든 '화폐화'되기 마련이다. 나아가 데이비스는 이렇게 진단한다. "결국 금융이라는 '관행'이 모든 일을 관장합니다. 심지어 금융기관 자체보다도 우위에 있죠. 지금 문제는 '시장의 규칙'을 중심에 둔 사고입니다. 시장이 우리 사회 내의 모든 기관을 압도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444)
우선 기업과 정부의 책임이 개인에게 전가되기 시작했다. 망가져 가는 퇴직연금 제도를 보라. 공공 서비스가 민영화되는 모습이라든가, 미국의 조세 제도가 만드는 자보다는 거저먹는 자를 우대하는 꼴은 또 어떤가. 콘잘과 애버내시가 서술한 것처럼, "민영화에 따라, 정부의 역할에 대한 논의 대신에 정부가 하는 일의 배분 문제가 대두됐다." 누가 무엇을 가져야 하는가를 둘러싼 무겁고 논쟁적인 질문을 피하려던 정부가 손쉽게 사용해 온 수단이 바로 금융화였다. ... 금융권으로 하여금 신용 공급을 늘려 저성장 문제를 빚으로 땜질하도록 만듦으로써 정치인들은 유권자에게 나쁜 소식을 전하는 일을 뒤로 미룰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에 걸쳐 불평등이 심화되고 경제 성장의 기반이 약해지면서, 금융화는 사실상 저 질문들을 더욱 시급한 것으로 만들었을 뿐이다.(445) 

제목부터 요상합니다. 메이커스 앤드 테이커스라. 정확하게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서 책 앞부분을 읽어봅니다. 읽어보니 메이커스는 만드는 사람이고 테이커스는 거저먹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만드는 사람과 거저먹는 사람이라? 궁금해집니다. 책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조금 더 상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만드는 사람인 메이커스는 실제로 상품을 만드는 노동자들로서 실물 경제에 종사하는 이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테이커스는 이 메이커스에 빌붙어 돈을 버는 존재들로서, 실물 경제와 거리가 먼 자산시장을 이용해 돈을 버는 소수의 거저먹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요? 책에 따르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마법의 단어 금융화입니다.

책에 지속적으로 언급되고 있지만 금융화는 마법의 단어입니다. 금융화란 단어가 붙으면 무언가 멋있고 효율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선진적이고 돈을 많이 벌 것만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월가가 만든 허상에 불과합니다. 실제로 통계나 상황을 보면 금융화는 생각보다 훨씬 비효율적이고 비이성적이며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주주에게 최대의 이익을 주어야한다며 단기적 이익에만 매달리고 장기적인 투자와 생산성 향상을 내팽개쳐 기업의 효율성과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주주가치 우선주의, 생산을 위한 대출보다 부채에 기댄 투기적 행동을 우선시하는 것, 경제에서 금융 및 금융 활동의 규모와 범위가 비대해지다 못해 대마불사를 신봉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 위기를 일으킨 주범임에도 여전히 '시장이 가장 합리적이고 잘 안다'는 이데올로기를 맹신하는 것, 인간의 이기심을 긍하다 못해 비도덕적이고 위험하기까지 한 투기와 사기에 가까운 수법을 옹호하고 장려하는 금융계의 행태와 그것을 동경하고 따라하려는 인간들의 모습 같은 것, 교육, 필수적 사회 인프라, 교도소 같은 것들을 민영화하고 증권화하는 모습들까지, 금융화가 초래한 악영향과 비합리성은 심각한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금융화가 그렇게까지 위험한 줄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월가와 월가의 사상을 추종하고 받아들인 이들, 금융화로 이득을 얻는 이들이 금융화가 초래하는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게 필사적으로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금융화를 마법의 단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뭔가 합리적이고 선진적이며 이성적인 느낌으로. 현실을 가려버리고 존재하지 않는 허상의 신화를 만들어냄으로써 그들은 금융화가 계속 진행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극도로 불평등등한 현실을 마주하거나 비생산적인 금융업만 비대해지고 시장에 대한 규제가 제대로 되지 않아 공황을 맞고 나서야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이상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뭔가 이상하지만 뭐가 문제인지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 <메이커스 앤 테이커스>를 읽으면 될 것 같습니다. 라나 포루하는, 금융화가 초래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여 보여줍니다. 위에서 적은 것처럼, '투자하고 생산하고 소비하여 다수의 사람들을 먹여살리는 실물경제 대신 금융업이 초점을 맞추는 자산시장에 투자하여 더 큰 이득을 얻고 다시 그 이득으로 자산시장에 투자하는 순환고리를 통해 자신시장에 엄청나게 투자한 가진자들의 배만 불리는 현실', 'GE나 애플같은 상품을 만들던 대기업들이 배당금만 노리는 주주들의 압력에 의해 금융업에 더 집중하면서 생산을 위한 투자와 거리가 멀어지는 현실','기업을 노리고 규제해야 하는 정부 관료들이 기업의 영향력과 압도적인 로비, 시장을 건드리면 안된다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어 무력하게 무릎을 꿇는 현실', '자산시장의 확대로 인해 사람들이 자산시장에 너도나도 뛰어들면서 엄청나게 부채가 늘어나고 그로 인해 시장에 언제 위기가 찾아올지 모르는 시장의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현실', '안정적으로 연금을 지급해야 하는 퇴직연금이 금융화의 물결에 휩쓸려 손해를 보거나 낮은 이득을 얻어 노후마저 보장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생생하게 그리며 우리에게 말합니다. 금융화의 현실을 제대로 봐야 한다고.

물론 이 책에서 말하는 건 미국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현실이 얼마나 한국과 다를까요? 다른 부분이 있겠지만 우리도 미국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다고 한다면 이 책을 읽고 우리는 현시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라보면서 라나 포루하처럼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이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거기서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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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고전읽기 7회 모임 후기
이번 모임은 조금 걱정이 됐습니다. 앞서 읽었던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돈>,<향연>은 대화편 중에서 그나마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데, <고르기아스>부터는 말을 주고받으며 논전을 벌이는 부분의 흐름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낯설거나 어려울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상과 비슷하게 참석율은 평소보다 낮았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대화가 너무 좋았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썼던 '고전독서모임'이 필요한 이유에 썼던 대로, 저는 독서모임에서 대화를 나무며 <고르기아스>가 제가 생각한 것보다 좋은 책이라는 사실을 대화를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제가 몰랐던 책의 장점과 다양성과 역동성이 대화를 통해서 깨닫게 되었다고 해야하나. 모임을 끝내고 저는 깨달았습니다. 이래서 고전독서에는 독서모임이 필요하다고. 밑의 글은 그 대화의 일부분을 기록한 것입니다.
000: 어렵지 않게 쫙 읽어나갔다.
00: 수사학 이야기가 나와서 재미없을 것 같았다.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덮었는데 조금씩 읽다보니까 플라톤의 도덕적 인간에 대한 생각이 나와 비슷해서 읽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다.
수사학에 대한 이야기.
000: 수사학에 빗대어 플라톤이 자신의 사상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인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데 말꼬리를 너무 잡고 늘어져 짜증이 나는 면은 있었다. 연설을 말장난처럼 하면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몸과 영혼에 필요한 기술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공감이 갔다. 결론적으로 봤을 때 정의로운 삶에 대한 주장을 하는 것 같았다. 작년의 촛불혁명과 이어지는 구절이 있는 것 같아 살펴봤다.
00: 말의 기교 보다는 알맹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카페에 비유해보면, 인테리어나 데코가 좋은 카페보다는 커피의 맛이 중요한 것과 같다.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는 불의를 행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나 불의를 당하면 벌을 받은 것이 옳다는 말에 동의한다.
000: 정치에 수사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치를 할 생각이라면 수사학이 필요하다. 수사학을 너무 비하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정치가가 대중의 마음을 읽는 것에는 수사학이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플라톤의 말이 옳다는 생각은 한다.
00: 수사학이 중요하지만, 플라톤식 FM 스타일이 마음에 든다.
000: 현실에 뿌리를 두고 있는 상태에서 플라톤식 이상주의가 마음에 들지만, 현실에서의 실천은 어렵다. 실천을 위해서 수사학의 도움이 필요하다. 공감을 얻는 게 중요하다.
000: 칼리클레스의 반발하는 모습이 인간적이어서 마음에 들었다. 감정에 상해 소크라테스에게 따지는 부분에 공감했다. 맞는 말이지만 그 말에 마음이 안간다는 것을 이 책의 소크라테스를 보고 이해했다. 연극 한 편을 보는 기분으로 읽으면 된다.
00: 칼리클레스가 소크라테스에게 솔직하게 철학의 무용론을 부분을 주장하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래놓고 소크라테스가 화내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말하는 걸 보고 소크라테스가 내 스타일이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가 마음에 들고 정이 간다. 사람들에게 미움받는 고지식한 스타일이라서.
000: 소크라테스의 논리는 찬성하지만, 칼리클레스의 말이 현실적으로 와닿았다. 철학작의 이상이 실천적으로 적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소크라테스의 말에 동의한다. 철학과 정치가 다른 것 같다.
00: 알맹이가 있고 수사학이 있어야 하는데 알맹이는 없고 수사학만 있는 것 같은 모습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소크라테스에게 더 끌린다.

잠시 보충해서 이야기를 해보자면, 소크라테스에게 논파당하는 칼리클레스 같은 인물이나 대화를 주도해가는 소크라테스도 우리의 대화를 통해 다양한 면모를 가진 살아 있는 인간으로 되살아났습니다. 책 속에서 자신만의 역할을 하던 인물들이 독서모임에서의 대화를 통해 생생히 살아 있는 인간이 된 것이죠.^^ 
정치와 수사에 관한 이야기도 중요했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책에 적혀 있는 생각을 확장해서 우리 삶의 문제로 전환시키는 걸 시도했습니다. 개인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걸 실행을 한 것인데, 해놓고 보니 정말 좋았습니다. 모임에 참여하신 분들은 열심히 자신의 생각, 자신이 마음속에 쌓아둔 걸 토해놓으며 집중했습니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모두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대화를 나눈 시간이 내실이 있는 시간이 되었다는 걸. 독서모임의 시간이 하나의 의미있는 삶의 시간이 되었다는 걸. 이런 시간을 경험한 분들은 어쩔 수 없이 다시 독서모임을 하러 나옵니다. 충만한 삶의 시간을 경험한 분들은 다시 그런 것을 경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의 모임은 <프로타고라스>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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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르기아스>라는 플라톤의 대화편을 두고 고전독서모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독서모임의 후기를 써야 하는데(^^;;) 일단 독서모임을 하면서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어 이에 대해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제목은 '고전독서모임이 필요한 이유'. 뭔가 엄청나고 멋지고 논리적인 말을 해야할 것 같지만, 제 능력상 그렇게는 안됩니다.ㅎㅎㅎ 어쩔 수 없이 제가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솔직하게 적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부족하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사실 <고르기아스>를 두고 고전독서모임을 하는데 걱정이 있었습니다. 앞에 읽은 <소크라테스의 변명>,<크리톤>,<파이돈>,<향연>에 비해 <고르기아스>는 플라톤의 중기작품답게 분량도 많고, 소크라테스 특유의 말을 주고받으며 상대방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들어 무너뜨리고 자신의 논리를 상대방이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문답법이 핵심적인 작품이기 때문에 읽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말을 주고받으며 생겨나는 플라톤 대화편의 독특한 흐름을 수용할 수 있다면 문제가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힘들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제 걱정때문인지 몰라도 오늘 모임은 참여인원이 생각보다 적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독서모임을 해보니 너무 좋았습니다. 독서모임을 하면서 '아~~ 이래서 고전 읽기에 독서모임이 필요하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간단합니다. 독서모임을 하면서 제 혼자의 상상 속에 갇혀 있던 <고르기아스>가 우리의 말을 통해 생명력을 얻어 되살아났기 때문입니다. 혼자서는 상상하지 못했던 <고르기아스>의 의미가 독서 모임에 참여한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통해 충분한 힘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더 자세하게 말해볼께요. <고르기아스>는 우리의 말을 통해 더 재미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우리의 말을 통해 더 의미있는 책이 되었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우리의 말을 통해 어렵지 않은 책이 되었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우리의 말을 통해 과거에 갇힌 책이 아니라 현재에 살아 숨쉬는 '현재의 책'이 되었습니다. <고르기아스>는 우리의 말을 통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삶과 소통하는 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독서모임이라는 공통의 말을 주고받는 시간을 통해 혼자서 할 수 없는 <고르기아스>에 대한 '공동비평'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가 읽은 <고르기아스>는 우리가 가진 독서모임 때문에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습니다. 여기가 중요합니다. 고전독서모임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고전에 대한 공동비평의 장이자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들어가는 고전의 공유를 이루어냅니다. 물론 혼자서도 고전에 대한 비평을 할 수 있습니다. 그건 어디까지나 혼자서 하는 원맨쇼에 가깝겠죠. 그것에도 가치가 있습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닌, 여러명이서 하는 비평은 혼자서 할 수 없는 다수가 모여 만들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말을 토해내고, 토해낸 말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말과 언어의 울림이, 조화를 이루며 빚어내는 고전 공동비평을 한 번 겪고나면 깨닫게 됩니다. 고전 읽기가 얼마나 자신의 삶에 의미가 있는지. 고전독서모임에 얼마나 힘이 있고 유의미한지. 더불어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함께 읽으면 어떤 책이라도 읽을 수 있다는.

이상 저만의 '고전독서모임'이 필요한 이유를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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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 - 정치의 도구가 된 세계사, 그 비틀린 기록
윤상욱 지음 / 시공사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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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승리이며, 승리한 자는 진실을 말했는지 따위를 추궁당하지 않을 것이다(158)
국민 만들기,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었다. 국민들은 결코 고정불변의 정치 집단이 아니었다. 이들의 정치 성향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요동쳤으며, 권력자들은 힘들게 쌓아 올린 통합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근대의 권력이 안게 된 또 하나의 과제는 애써 만들어낸 충성스러운 국민의 변절과 변심을 막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권력자의 가치관 또는 비전을 절대적이고 영원한 진리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명분에 신성을 부여하면서 국민들을 설득하고 협박했는데, 국민들이 패배주의에 젖어 있을수록 이 전략도 효과가 있었다.(7)
모든 인간이 똑같은 기억과 생각을 가진 사회는 권력자에게는 유토피아이나 국민들에게는 디스토피아다. 국민을 길들이려는 권력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명분을 민족의 신성한 역사와 동일시하며 국민들의 동참을 요구한다. 이로 인해 권력자들은 종종 역사 교과서를 고치고자 하는 유혹에 빠지는데, 이 역시 국민을 변하지 않는 지지층으로 만드는 데 방해되는 기억을 배제해야 하기 때문이다.(8)
권력이 역사와 기억을 바꾸려 할 때마다 사회적 반발과 분열이라는 부작용도 뒤따랐다. 과거에 대한 집단의 기억이 결코 모두 같을 수는 없다는 평범한 진리에도 불구하고, 권력은 늘 유혹에 빠진다. 보수주의자들은 기득권과 전통적 가치를 영원한 신화의 이름으로 지키고자 했으며, 진보주의자들은 개혁의 신화를 영속화하려 한다. 역사 논쟁은 필연 정치 논쟁이며, 한 사회과 과거 기억에 대한 갈등 앞에서 화해 또는 분열로 나아가는 갈림길이 된다. 과거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며, 현재이자 미래가 되는 셈이다.(9)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얘기지만(^^;;) 과거에 저는 과격한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고구려의 옛영토인 만주벌판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었던. 그러나 다양한 책들을 읽으며 과격한 민족주의는 저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책을 읽으며 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인식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고, 책을 읽으며 접한 인식과 다양한 관점,생각,사상,문화들이 저로 하여금 과격한 민족주의에 대한 열망을 사그러뜨렸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저는 그 시절의 저를 황당한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ㅎㅎㅎ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를 읽으며 과격한 민족주의에 빠져있던 과거의 나가 떠올랐습니다. 독재자들이나 독재권력이 자신들의 지배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악용하는 사례들속에서, 그 역사적 허구에 빠져 독재자와 독재권력을 지지하는 이들의 모습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과거의 나'가 보였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아무런 비판적 사고 없이, 찬란한 과거의 민족주의적 신화에 매달리며 현재 권력을 용인하는 인간들의 모습에서.

저는 이런 민족주의의 악용 사례들에 대해서 독서모임에서 종종 이야기해 왔습니다. 저만의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여기에 한 번 적어볼께요. 제가 보기에 인간은 집단동물 같아 보입니다. 고양이 같은 개체적 삶의 방식을 가진 동물들은 할 수 없는 행동을 인간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인간은 집단에 소속되어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낍니다.(소수는 아닐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집단일 때 더 용감해지고 과격해집니다. 저는 이런 여러 모습들속에서 인간이 집단적인 행동에 익숙한 집단적 행동의 매커니즘을 가진 동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근대라는 서양에서 생겨난 독특한 시대적인 흐름은 집단보다는 개체를 강조하는 쪽으로 인간을 몰고갑니다. 필연적으로 인간은, '나'라는 존재를 강조하는 근대적 시대의 흐름과 집단동물로서의 본능의 괴리가 발생하는 삶속에 살수밖에 없습니다. 본능을 완벽하게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본능은 시간의 틈속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체제를 바꾸는 혁명이나 개혁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자신과 다른 이를 용납하지 않고 마구 죽이는 학살이나 전쟁, 폭력의 모습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나타나든 집단동물로서의 인간의 본능은 언제나 나타날 준비를 하고 있는 건 확실합니다. 전체주의,파시즘,인종주의,민족주의나 아니면 진보과 혁명,개혁이라는 이름을 내건 사상과 철학과 함께.

본능을 거세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위험할 수 있다고 해서 없애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그렇다고 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본능이 모습을 내밀 때 본능이 위험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막는 것입니다. 본능의 발현을 더 좋은 방향으로 이끌고 가야 한다는 말이죠. 그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완벽한 해답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조금 확률이 높은 방법은 있을 수 있겠죠. 교육과 사회 시스템, 문화와 관습의 힘을 이용하는 것 같은. 만약에 이런 것 없이 정치적 목적때문에 집단동물로서의 인간의 본능을 악용하게 된다면, 저는 본능이 나쁜 길로 가게 될 확률이 아주 높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 같은 책에서 나온 사례들이 본능을 어떻게 악용하는지 제대로 보여주는 것들입니다. 미국은 세계를 지배할 운명을 타고난 위대한 국가라는 미국 예외주의의 사고방식이나 중국 공산당의 과거의 과오를 묻어버리고 공산당의 뛰어남만 강조하는 중국의 애국주의적 역사교육, 스탈린 체제의 폭력성과 과오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2차대전당시 독일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기억만 강조하는 현대 러시아의 위대한 애국전쟁의 신화, 비과학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으로 자신들의 과거를 위조하고 위대한 힌두문명의 신화에 집착하여 과거의 정치시스템에 현대를 맞추려는 현재 인도 집권당인 인민당의 사고방식과 역사교육 등등. 이 사례들대로 나아가면 우리는 더 편협하고, 더 이기적이고, 더 폭력적인 사람이나 공동체가 될 확률이 높습니다. 집단동물로서의 본능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는 것이죠.

위의 사례들을 보니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건강하지 않다'는 말이었습니다. 왜 그런 말이 떠오르는지를 이제부터 말해볼께요. 정신건강의 측면에서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는 것 중에 하나가 자기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나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이나 제대로된 자아인식도 아닌데다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말입니다.(자기자신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면 우울증이고,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면 성격장애입니다.^^) 정신건강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의 좋은면과 나쁜면을 포함해서 그 모두를 가감없이 바라봐야합니다. 이걸 공동체로 확대시켜 볼께요. 조금 더 건전하고 건강한 공동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런 공동체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인식이 건강해야 할 겁니다.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아니고, 지나치게 긍정적으로 보는 것도 자기자신을 있는대로 바라보는 인식을 통해. 공동체 인식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공동체가 과거의 역사를 오직 긍정의 방식으로만 바라본다면 그건 건강하지 않은 인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권력은 왜 역사를 지배하려 하는가?>에 나오는 사례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어떤 부정도 용납하지 않고 선하고 위해단 역사에 집착하여 현재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권력자의 모습들이 건강하지 않다라고도 말할 수 있겠죠.

해답이 있을까요? 물론 있습니다. 다양한 해답이 있겠지만 책의 시각을 따라서 역사학과 역사교육 입장에서의 해답을 생각해본다면, 우리 자신의 과거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됩니다. 완벽한 의미의 객관적인 역사는 있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 인식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좋으면 좋은대로, 나쁘면 나쁜대로. 좋은 것은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하고, 나쁘면 나쁜 점을 고칠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두려움 없이 그렇게 한다면 반드시 편협하고 이기적이며 폭력적인 역사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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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와 함께 읽는 문학 속의 철학
이현우 지음 / 책세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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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속으로 들어온 이상 철학은 문학의 텃세를 감수해야 합니다. 문학과 철학의 동거는 사이좋은 동거만은 아니기 때문에 서로를 의식해야 하고 연기해야 하며 때로는 성격도 버려야 합니다.(8)
예술 세계는 현실 세계에 관한 진실일 뿐이에요.(419)

우리가 의식하든 안하든 한 시대의 철학이나 사상은 우리 자신의 삶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돈을 최고로 여기든 안 여기든 우리는 로또 1등이 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의 의식과는 상관없이 물질주의적이고 물신적인 경향이 우리 삶에 스며들었으니까요. 유럽의 중세라면 사람들이 우리 시대처럼 로또 1등이 되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탐욕은 좋지 않은 것이라고 사람들이 믿고 있던 시절이니까요.

문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의식하든 안하든 그들의 삶에 그들이 살다간 세상의 철학이나 사상이 스며들어 있을 수밖에 없고, 작품을 쓸 때 그것이 작품에 영향을 미쳐 작품이 완성됐을 때는 문인 자신의 삶에 스며든 사상이나 철학이 작품에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문인 자신이 의식을 하고 사상이나 철학을 작품에 담으려 했다면 더 그런 경향이 강하겠죠. 그래서 저는 사상이나 철학이 없는 문학작품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사상이나 철학은 작품에 있을 수밖에 없고 그것이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작품에 스며든 사상이나 철학이 잘 드러나나 아니면 잘 드러나지 않냐 하는 차이가 있겠죠.(작품의 완성도 얘기는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그건 제가 할 얘기가 아닌 것 같아서요.)

알라딘 인문학 독서 블로거로 유명하고 문학과 인문학을 주제로 활발히 글을 쓰고 강연도 하는 '로쟈' 이현우 씨가 쓴 <문학 속의 철학>은, 저자 자신이 '문학 속의 철학'이라는 주제로 했던 강의를 책으로 엮었습니다. 제가 위에 썼던 것을 로쟈 이현우 씨가 중점적으로 파고들어 강의도 하고 책도 낸 것이죠. 저자는 자신이 과거부터 이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박이문 선생이 비슷한 주제로 썼던 다른 책인 <문학 속의 과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머리말에 쓰고 있습니다. 저도 이 주제에 상당한 관심을 두고 있어서 박이문 선생의 책을 저자가 주의 깊게 읽어나간 것과 유사하게, 저자의 책을 주의 깊게 읽어나갔습니다. 어떤 부분은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깨어져 나가는 경험을 했고요, 어떤 부분은 저와 생각이 상당히 비슷해서 공감을 했고, 어떤 부분은 모르는 걸 알아나가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 다양한 생각의 흔적들을 다 글로 쓰기는 어려울 것 같고, 일정 부분의 흔적들만 글로 남겨보도록 하겠습니다. 밑에 적은 글들이 그 흔적들입니다.

안티고네. 누군가의 말대로 해석을 하나의 권력이라고 본다면, <안티고네>에 대한 해석은 헤겔의 해석이 가장 큰 권력으로서 작용해왔다. <문학 속의 철학>에서 저자인 이현우는 헤겔의 해석을 벗어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이 해석에 동의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해석의 권력에서 벗어하는 하나의 방법을 배우는 셈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간다면, 우리는 이현우의 해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해석을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더 나은 해석의 권력을 무너뜨리는 자신만의 자세가 되기 때문에.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신을 변호하는 의도로 선과 악의 문제를 논하다 결론적으로 여기가 그래도 있을 수 있는 세상 중에서는 가장 좋은 세상이라고 말한 라이프니츠의 변신론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라이프니의 이 주장을 통렬하게 비판한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를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런데 추가적으로 내가 의문을 품는 것은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한 부분이다. 선과 악이라는 게 절대적인 기준이었던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게 선과 악의 개념이 아닌가? 선과 악의 개념이 절대적인 것이 아닌, 인간들이 시대와 상황에 따라 만들어나가는 개념이라고 한다면 이 개념이 신의 선과 악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 어쩌면 불완전한 인간은 신에게 속하는 선과 악의 개념을 알 수 없는 게 아닐까? 신에게 속하는 선과 악의 개념을 알 수 없다면, 그에 대해 따지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게 더 좋은 게 아닐까.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에 대한 이현우의 해석을 따라가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자들에 의하면, 주류경제학이 기본적으로 정의하는 합리적 인간이란 옳은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비합리적인 행동을 할 확률이 높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인간은 충분히 자기 이익에 반하여 행동할 수 있다. 인간은 이득으로 이어지는 인과관계에만 연결되는 존재가 아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담긴 건, 합리적 인간 개념에 대한 도스토예프스키식 반론일 것이다.

이반 일리치의 죽음. 죽음은 유일무이한 것이다. 죽음은 한 번 경험하면 다시 경험할 수 없는 것이다. 죽음의 과정을 차분하게 훑어내는 <이반 일리치의 죽음>은 독자를 죽음의 길로 서서히 안내하며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을 체험하게 한다. 이 경험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는 죽음을 간접체험하며 삶의 힘, 삶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다. 간접체험으로 한 번 죽으며 우리는 다시 살아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전의 삶과는 다른 방식으로.

젊은 예술가의 초상. 예술이 진리를 인식하게 만들 수 있을까? 조이스의 생각과는 달리 나는 이 주장에 회의적이다. 진리가 무엇인지 알 수 없는데다, 진리가 있다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진리가 있는지도알 수 없는데 예술이 진리를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에 진리가 있다고 쳐도 예술이 그 진리를 인식하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거기에도 나는 회의적이다. '나는 예술을 통해 진리를 인식할 수 있어요'라거나 '나는 예술을 진리를 인식하게 만드는 도구로 만들 수 있어요'가 가능한 일일까? 우리 마음대로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들이 '종교적 믿음'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진리를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에 기반한 종교.

싯다르타. 삶의 진실을 꿰뚫는 지혜를 말로서 전달할 수 있을까? 지혜를 말로서 전달하는 것에 나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우리는 말을 쓸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말로서 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존재의 어쩔 수 없는 지혜의 전달방식 중 하나라면, 문학도 거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나는 <싯다르타>가 지혜를 전달할 수 있냐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다만 나는 지혜를 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문학의 몸부림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처절한 몸부림이 빚어내는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정서적인 교감의 힘을 보니 지혜를 전달할 수 있냐 없냐를 떠나서 시도 자체가 아름답다고 여겨진다. 어쩌면 이 문학적인 몸부림이 만들어내는 문학적인 아름다움과 정서적인 교감의 힘을 포함한 총체적인 그 무엇인가를 '지혜'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움의 일부로서의 지혜.

사랑에 빠진 여인들. 분명히 나는 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이현우의 이 소설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읽다보니 내가 이 소설을 제대로 읽은 것인지 의문이 든다.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야겠다. 조금 더 자세히, 조금 더 꼼꼼하게, 알 수 없는 것들을 알기 위해서. D. H. 로렌스의 다른 소설들도 읽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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