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자비 라드츠 제국 시리즈
앤 레키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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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있는 인간들이 저를 대하는 걸 보면, 저도 인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아니지요. 이런 상황이기 때문에 인공지능이 인간과는 다른 종일뿐만 아니라 유의미하다는 점이 제 머릿속에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368)
그것이 당신이 태어나기 3천 년 전부터 일이 돌아가는 정상적이고 예측 가능한 상태였다는 점밖에 없습니다. 그 상태에 의문을 품을 이유가 전혀 없었겠지요. 아난더는 당신의 생사를 결정하는 실질적인 권력을 가졌고, 당신이 당신이 아끼는 누구와도 와무런 개인적 관계가 없습니다. 우리 전부는 모두가 놀이판의 놀이패에 지나지 않았고, 그녀는 자신에게 편리한 대로 우리를 희생시킬 수 있었고, 희생시켰지요.(378)
드라마들은 거의 예외 없이 승리 아니면 재앙으로 끝난다. 행복을 성취하든가, 아니면 희망까지 틀어막는 비극적인 패배뿐이다. 하지만 진짜 삶에는 끝난 뒤에도 언제나 뭔가가 있다. 늘 다음 날 아침이 있고, 또 다음이 있고, 늘 바뀌고, 잃고 얻는다. 늘 한 걸음 다음엔 다음 걸음이다. 아무도 벗어날 수 없는 한 번의 진짜 끝이 올 때까지. 하지만 우리를 압도할 듯 커 보이는, 어렴풋이 먼 그 끝조차도 하나의 작은 끝에 불과하다. 여전히 모두에게는 다음 날 아침이 있다. 우리를 뺀 우주의 엄청나게 많은 나머지 다수에게 그 끝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끝은 임의적일 뿐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면 모든 끝은 아무 끝도 아니다.(382)

<사소한 자비>는 <사소한 정의>,<사소한 칼>과 이어지는 스페이스 오페라 앤 레키의 '라드츠 제국 3부작'의 마지막 편입니다. <사소한 자비>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라드츠 제국 3부작의 특징에 대해 간략하게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대명사는 전부 그녀. 라드츠 제국 시리즈를 읽을 때 가장 낯선 것이 이 부분입니다. 이 시리즈에 나오는 모든 대명사는 '그녀'입니다. 계속해서 '그녀'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 처음에는 나오는 사람들이 전부 여자라고 생각했다가, 나중에는 성구분 자체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단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대명사 그녀의 활용은 '남성이 이럴 것이야', '여성은 이럴 것이야' 하는 고정관념을 깨부수며 라드츠 제국이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느낌을 강하게 불러일으킵니다.

2.종교의 중요성. 아난더 미아나이라는 황제가 이천년 간 다스려온 라드츠 제국은,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우주제국입니다. 하지만 이 우주제국은 종교도 중요시합니다. 라드츠 제국 자체도 제국종교라고 할 수 있는 종교가 있고, 제국에 속한 행성들도 각자의 종교가 있고, 이것들이 엮여서 제국의 문화, 제국에 속한 행성 자체의 문화가 형성됩니다. 일반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들이 외계행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종교 이야기는 빼는 경우가 많은데, 이 시리즈는 종교에 중심을 두면서 라드츠 제국이라는 가상의 제국에 종교,문화의 양상을 보이며 생생한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인간의 문화와 삶의 방식에서 종교가 빠질 수 없는 요소이자 영향력이 강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부분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3.분열하는 황제. 라드츠 제국을 이천년 간 다스려온 황제 아난더 미아나이는 몇십 개의 신체를 가진 존재입니다. 몇십 개의 신체를 가지고 각자가 개체로서 활동하지만, 아난더 미아나이라는 하나의 존재로서 정의되는 것이죠. 그런데 라드츠 제국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인 <사소한 정의>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하나의 존재로서 활동해온 황제 신체들간의 반목이 극대화되면서 <사소한 정의>의 주인공인 인공지능 브렉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분열하여 제국의 내전이 발발합니다. 브렉을 옹호하는 황제의 신체들 편과 브렉의 행동에 반발하는 황제의 신체들 편으로 나뉘는 것이죠.(<사소한 자비>에 가면 제3의 세력까지 출현합니다.^^) 마치 인간 정신의 분열증적인 양상을 실재화한 것 같은 이 모습을 보면 라드츠 제국 시리즈가 얼마나 색다른 느낌의 소설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4.인공지능의 동시적 시각. 라드츠 제국 시리즈의 주인공인 인공지능 브렉은 함선의 인공지능으로서 살아왔다 나중에는 황제에 저항하며 개체로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소설은 브렉이라는 인공지능이 어떤 시각을 가지는지 보여줍니다. 함선을 관장하는 인공지능의 시각에서는 함선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동시적으로  볼 수 있기에 소설은 그것을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모두 볼 수 있는 인공지능의 시각은 인과관계 없이 각각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그저 나열하며 보여줄 뿐입니다. 일반적인 스페이스 오페라나 SF가 인간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고 보면, 라드츠 제국 시리즈는 인공지능의 시각이기 때문에 상당히 다른 느낌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정도면 라드츠 제국 3부작의 특징에 대해 대체적으로 이야기한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는 <사소한 자비>에 대해서 이야기해볼께요. <사소한 자비>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전작들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3부작의 첫번째 작품 <사소한 정의>는 인공지능인 브렉이 명령받는 수동적 존재에서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주체가 되는 과정을 그린 성장소설 느낌의 SF입니다. 황제에 명령을 따르다 여러 사건이 겹치며 황제에 저항하는 주체가 되는 것이죠. 두번째 작품인 <사소한 칼>은 자기 편 황제와 손잡은 브렉이 자신이 사랑했지만 죽여야 했던 함장의 동생을 지키기 위해 아소엑 행성계로 가서 아소엑 행성계의 실상을 맞닥뜨리는 과정을 그린 문화인류학적인 보고서 느낌의 SF입니다. 아소엑 행성 내부의 인종차별과 불평등, 기득권층의 부조리와 체제의 모순을 세밀하게 그리며 브렉이 자신의 힘으로 그 부조리, 모순들을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보여줍니다.

마지막 작품인 <사소한 자비>는 아소엑 행성계의 주도권을 쥔 브렉과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의 최후의 대결을 그린 작품입니다. 첫작품이 성장소설의 느낌, 두번째 작품이 문화인류학적 리포터 느낌을 줬다면, 세번째 작품에서는 정치적인 대결이 주를 이루는 정치소설 같은 느낌을 줍니다. <사소한 칼>을 거치며 아소엑 행성계에 자신과 연관있는 많은 사람들이 생겨나고, 아소엑 행성계 사람들에게 애정을 가지게 된 인공지능 브렉은 반대편 아난더 미아니아와 모든 것을 건 전면전을 벌이는 걸 꺼리게 됩니다. 전면전이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브렉은 그래서 어떻게든 혼자서 해결을 하려하고, 그것이 여의치 않자 자신의 함선을 타고 있는 군인들을 활용해서 아난더 미아나이를 죽이는 암살 작전을 짭니다. 하지만 그것이 실패하자 브렉은 최후의 수단으로 정치적인 작전을 이용합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정치이지만 제대로 활용하면 최악의 피해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게 정치인 것이죠. 브렉이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건 라드츠 제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한 수수께끼의 외계인 프레즈거의 통역관과 2000년 전에 아난더에게 패배하고 밀려나서 아난더에게 복수심을 품고 있는 노타이 문명의 함선에 있는 인공지능입니다. 라드츠 제국을 능가하는 과학기술을 가지고 제국에게 패배를 안긴데다 쉽사리 파악이 안되는 행동을 하는 외계인 프레즈거는 아난더에게 무엇보다 위협적인 존재이고 협정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여러모로 활용이 가능합니다. 거기에다 아난더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브렉과 아난더과 싸운다면 브렉을 지지할 것이 확실한 노타이의 인공지능도 정치적으로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과 더불어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가 독재자의 폭압적인 행동으로 아소엑 행성계 주민들과 관료들의 신임을 잃은 것도 브렉에게 이득입니다. 브렉이 같은 인공지능의 입장에서 신뢰를 보여줘서 브렉을 믿고 있는 아소엑 정거장의 인공지능이나 아소엑에 머물고 있는 함선들의 인공지능들도 반대편 아난더의 폭압적인 행동,불신,자신들에 대한 무시로 반대편 아난더보다는 브렉에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브렉은 이 모든 요소의 힘을 빌어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와 정치적인 대결을 이끌고 나갑니다. 어떻게 될지는 책을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직 상상으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는, 낯설고 독특한 가상의 우주제국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읽는다는 게 좋았거든요. 라드츠 제국 시리즈 특유의 독특한 문체도 좋았구요. 중간중간 나오는 지적인 대화들도 읽는 맛을 더합니다. 인공지능을 존중하고 인간과 같은 존재로서 대하는 브렉과 브렉의 영향을 받아 변화해가는 인간들의 모습과 반대로 인공지능을 인간과 존재로서 대하는 걸 거부하고 무시하는 반대편 아난더 미아나이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인공지능을 어떻게 대해야하는가 하는 문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브렉이 아소엑 행성계 주민들과 인공지능을 대하는 모습에서 책 제목인 '사소한 자비'와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더 나아가지는 않겠습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할께요. 앞으로도 라드츠 제국 시리즈의 맛을 살린 앤 레키의 다른 SF들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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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 니체 - 고병권과 함께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읽다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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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찾아가며, 나는 나를 기다린다. 그 길 위에서 나는 나가 되어가고 있다.(28)
사랑하는 대상 안에 숨은 위대함을 알아보고, 그것을 꺼내기 위해 망치까지 쳐들 수 있다면 당신은 위대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 앎이라고 다를까.(174)
지혜란 율법에 대한 의구심에서 시작하고, 성숙은 떠남으로써만 가능하다(177)
철학자라고 하는 것은 삶의 문제, 생활 방식의 문제, 실존 방식의 문제이다.(223)

<다이너마이트 니체>는 니체 전체의 사상을 살펴보는 책이 아닙니다. 이 책은 니체 스스로가 자신의 철학에 입문하려는 초심자에게 가장 먼저 읽으라고 권한 <선악의 저편>을 저자인 고병권이 읽고 강독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한 권의 책을 바탕으로 살펴보는 니체의 어떤 특정한 시점의 사상을 파악하는 책인 것이죠. 어떤 특정한 시점이라고 해서 지엽적인 것이라고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선악의 저편>에 나오는 니체 사상의 모습들은 이미 앞으로 태어날 니체 사상들을 품고 있습니다. 이미 태어날 사상들을 기다리는, 기다리면서 그 사상들이 되어가는 과정을 책은 담고 있습니다.

저자의 니체 강독 전편이라고 할 수 있는 <언더그라운드 니체>가 '언더그라운드'에 서서 자신만의 서광(=아침놀)을 맞이하기 전 홀로 지나와야 했던 깊은 밤들에 관한 철학적 성찰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면, <다이너마이트 니체>는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부푼 마음으로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 강력한 사유의 폭발을 위한 깊은 응축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부푼 마음으로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 강력한 사유의 폭발을 위한 깊은 응축의 이야기가 도대체 무슨 소리야?'라고 말하실 수 있을 겁니다. 별로 어려운 얘기는 아니기 때문에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보겠습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을 통해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기다림이 믿음을 동반하는 것은 맞지만, 종교적 메시아를 기다리는 무력하고 수동적인 기다림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 기다림은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이가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가가 되어가는 기다림입니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자신을 구원하기를 바라는 기다림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미래에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어가는 것을 기다리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기다림이 니체가 말하는 '기다림'입니다. 나 자신의 내면에서 변화의 강력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변화하여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어가는 기다림. 여기에서 미래는 현재와 교차합니다.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이는, 미래를 기다리지만, 그 미래를 이루어가기 위해 현재를 미래의 가능성으로 가득 채웁니다.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리는 이의 삶 속에서 현재는 끊임없이 미래와 교차하면서 미래가 되어가는 것이죠. 기다림에 대한 이야기는 했으니 뒷부분 이야기를 해볼께요. 강력한 사유의 폭발을 위한 깊은 응축이란,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한 방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삶을 변화시키는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유의 폭발이 필요한데, 사유의 폭발이 강력한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깊은 응축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깊고 깊은 응축을 통해서 폭발이 일어날 때 진정 강력한 변화, 진정한 자기극복이나 자기초월이 가능하다는 것이죠. 이때 등장하는 것이 다이너마이트입니다. 더욱 더 강력한 변화를 위한 깊은 응축을 가리키는 말로서. 강력한 사유의 폭발을 일으키는 다이너마이트 같은 철학자로서의 니체가 '다이너마이트 니체'인 것이죠.

위의 문장을 읽다보면 궁금증이 또 생길 겁니다. 도래하는 철학자가 뭐지? 이 질문에도 대답을 해보겠습니다. 니체에게 철학자란, 단순한 학자가 아닙니다. 단순히 자신이 아는 것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자신의 지식을 전해는 인물은 니체에게 학자이지 철학자가 아닙니다. 니체에게 철학자란, 하나의 삶의 방식이자 실천을 행하는 자입니다. 삶과 분리된 철학, 삶과 괴리되어 자신만의 세계관에 침잠하는 인물을 니체는 철학자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죠. 삶을 변화시키고 자신의 철학을 삶으로서 살아나가며 삶과 철학이 하나가 되게 만드는 인물을 니체는 철학자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 '도래하는'을 붙이면 도래하는 철학자가 됩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 나타날 철학자. 그런데 왜 니체는 지금이 아니라 미래에 나타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다린다고 했을까요?

이 이야기를 하려면 니체가 자기가 살아가던 현대를 어떻게 바라봤는지 이야기해야합니다. 니체가 <선악의 저편>을 '현대성에 대한 비평'이라고도 했던 것처럼, 니체에게 자신이 살아가는 현대는 긍정적인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니체에게 자신이 살아가던 동시대의 유럽, 동시대의 독일은 현실을 부정,억압하며 죽음 이후의 내세나 초월적 가치를 현실보다 우선시하는 기독교 문화의 영향력이 너무 강한 세상이었습니다. 유럽의 근대가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했다고 해도 그것의 잔재는 곳곳에 남아 현실을 억압하고 있는 것이죠. 그리고 근대 유럽이 내세우는 가치들이 다양한 것들을 평범하게 만들고, 특이성이나 차별성을 인정하기보다는 일원화하는 것에서 니체는 다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개개의 인간이 아니라 보편적이고 일반화한 인간이 득세하는 세상. 무언가 다르고 뛰어난 존재가 되기보다는 그저 그런 평범한 인간이나 체제에 순응하는 선한 인간이 되기를 강요하는 게 니체가 바라본 동시대 유럽과 독일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니체에게 도래하는 철학자, 미래에 나타날 철학자는, 동시대 유럽과 독일의 모습을 극복하는 인간형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도래하는 철학자는, 니체 자신이 살아가는 동시대가 강요하는 가치의 억압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동시대의 가치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새로운 가치의 전도를 이루고 그 전도된 가치에 따라 좋은 평가를 얻은 고귀한 덕을 따르며 나쁜 평가를 얻은 부정적인 덕과는 거리를 두는 게 니체가 말하는 도래하는 철학자입니다. 윗부분에서도 말했지만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깊은 응축과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 우리 내면의 야수성을 바라보는 것들이 필요하고요.

'신은 죽었다'라는 말을 한 니체. 이 말로 무수한 오해를 불러일으켰지만(^^;;) 니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신 중심의 사회가 무너지고 인간 중심의 사회가 되었다는 현실인식이겠죠. 거기서 더 나아가 니체는 사람들이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믿고 자기자신을 극복하는 존재가 되기를 바란 듯 합니다. 자기 내면의 가능성을 믿고 도래하는 철학자를 기디라면서 도래하는 철학자가 되어가는 인간들을. 니체는 자신의 바람을 위해 자신의 책을 읽는 이에게 오늘도 다이너마이트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 다이너마이트에 당해 새로운 사유의 변화를 겪은 책의 저자 고병권이 자신이 겪은 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 위해 새로운 다이너마이트를 던진 게 <다이너마이트 니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제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 글을 쓰면서 니체식 다이너마이트 던지기에 일조하게 됐고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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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의 결혼 민음사 세계시인선 46
윌리엄 블레이크 지음, 김종철 옮김 / 민음사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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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노래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82)

영국 낭만주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들을 들여다봅니다. 도대체 몇 번이나 이 시집을 읽었는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습니다. 문득 궁금해집니다. 나는 왜 블레이크의 시들을 계속 읽을까? 왜일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무언가 떠오릅니다. 이 글은 그때 떠오른 흔적들을 짧게나마 적어본 글입니다.

첫번째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는 어렵지 않습니다. 어렵지 않다라는 건 저에게 중요한 부분입니다. 모더니즘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현대시들은 분명 읽기는 하는데, 무슨 의미인지 잘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언어의 정련이나 조탁을 통해서 자신만의 언어 세계를 창조해내는 건 이해하겠는데, 안타깝게도 그 시 세계가 이해되지 않기 때문에 저는 굳이 이런 시들을 선호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블레이크의 시들은 읽으면 읽는대로 이해가 잘 되는 편입니다.(물론 이해 안 되는 시들도 있기는 합니다.^^;;)

두번째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는 지금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순수한 열정이 스며 있습니다. 18세기 후반의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시작을 알린 인물로서 그는 자신의 시에 순수한 열정을 담아 자신의 감정을 표현합니다. 동시대 프랑스 혁명에서 사람들이 뿜어낸 열정의 영향 때문일수도 있고,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반동적인 경향을 보이며 자유주의 사상과 개혁적인 성향을 억압한 동시대 영국 정부에 대한 저항의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블레이크는 세상은 바꿀 수 있다는, 이상을 향해 사람들이 나아가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순수한 열정을 시에서 보여줍니다. 제가 그 열정에 끌리는 건, 제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이 아닌가 합니다.

세번째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충분히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저는 기본적으로 세상의 많은 시들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그 사랑을 쉽게 알 수 있게 해주는 시와 그 사랑을 쉽게 파악하지 못하는 시로 구분이 될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시를 읽는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해주는 시입니다. 블레이크는 특히 약자에 대한 사랑을 놓치지 않습니다. 동시대에 굴뚝 청소부로 혹사당하는 아이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 런던에서 빈곤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들에 대한 애정 '사람마다의 울음 속에서/ 모든 어린아이의 공포에 질린 울음 속에서/ 모든 목소리와, 모든 금지령 속에서/ 나는 인간이 만들어 낸 굴레를 듣는다.'(p.38),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 대한 애정 같은 것들이 그의 시 곳곳에서 보입니다. 뿐만 아니라 블레이크는 인간에 대한 애정 때문인지 인간을 억압하는 것들에 대한 분노를 곳곳에서 표출합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돈과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움직이는 동시대 교회에 대한 분노, 현실의 인간들을 억압하는 요소들을 상징적으로 표현해서 비판하는 것 등등. 인간에 대한 애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저는 읽을 때마다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네번째로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들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상상력의 힘을 믿은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자신만의 독특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상징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시세계를 만들어 그걸 바탕으로 시를 쓰고, 자신만의 독특한 느낌의 판화와 함께 출판했습니다. 그의 시를 읽는다는 건 그만의 독특한, 과학이 발달한 현대의 사람들이 생각할 수 없는 시세계로 걸어들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종교적이며 신비로우며 낭만적인 그의 시세계는, 읽는 독자에게 낯설지만 익숙하고 따뜻한 이상한 감흥을 선사합니다. 오직 블레이크만이 줄 수 있는 감흥을.

여기까지 적고보니 제가 사는 게 힘든가 봅니다. ㅎㅎㅎ 사는 게 복잡하고 힘드니 어렵지 않고 쉽게 이해가 되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끌리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 시의 낯설지만 익숙하고 따뜻한 느낌이 좋은 거죠. 이 느낌을 읽을 때마다 받기 때문에 제가 그의 시들을 계속 읽는 것 같습니다. 몇백년의 시간을 건너뛰어 윌리엄 블레이크의 생생한 상상력이 빚어낸 시들을 몇번이고 계속해서 만나는 경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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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씨, 긍정은 어떤 힘이 있나요? 처음 읽는 청소년 인문학 시리즈 2
이남석 지음 / 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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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하지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고 싶다면, 질문해라.(19)
천국이란 마음의 한 상태이다. 그것은 이승을 넘어서 있는, 혹은 죽음 뒤에 오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마음속에서 하는 하나의 경험이다. 그것은 곳곳에 있으면서 또한 아무 곳에도 없다.(179)
니체는 복음을 지키고자 하는 실천만이 신에게 이르는 길이며, 실천 자체가 신이라고 했다. 중요한 것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었다. 세계가 때때로 지옥 같은, 상태일 때조차 자신이 있는 지금 여기가 천국이라고 느끼는 것, 현재가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복의 상태가 바로 기적의 핵심이었다.(184)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자신을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221)

저는 입문서나 해설서 같은 책들을 좋아합니다. 입문서나 해설서가 해석의 대상으로 삼는 원전을 바로 읽는 것보다는. 원전이라는 책들이 읽기 어렵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를 많이 경험했거든요. 원전을 바로 읽다보면 원전에 대한 마음이 사그라드는 경우가 많았고요. 아마도 제가 책을 처음 읽었을 때, 원전 읽기로 시작했다면, 지금과 같은 독서를 할 확률은 낮았을 겁니다. 원전에 겁먹고 독서를 멀리 했을지도 모르죠. 제가 운이 좋았던 것은 원전을 쉽고 접근하기 좋게 말해주는 입문서나 해설서를 먼저 읽었다는 점입니다. 그런 책들을 읽다보니 원전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어느 정도는 파악이 가능하고(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하고 대략적인 윤곽만 잡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원전 읽기의 부담도 줄고, 원전을 읽고 싶다는 욕망도 불타오르더군요. 쓸데없는 소리 같겠지만(^^;;) 이 자리를 빌어 제 독서 초창기에 원전 읽기의 욕망을 불러일으킨 입문서와 해설서 저자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합니다.

<니체씨, 긍정은 어떤 힘이 있나요?>도 입문서입니다. 그것도 청소년에게 니체의 사상을 알려주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입문서죠. 저는 이 책이 청소년용 입문서라는 사실을 알고 기뻤습니다. 청소년 대상이기 때문에 최대한 쉽게 쓰여졌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책을 읽으며 예상대로 쉬워서 좋았습니다. 사실 니체의 원전을 보면 평범한 청소년이 읽기에는 어려운 느낌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쉽게 니체의 사상을 이야기해주면 청소년이라도 읽을 수 있고, 읽다보면 니체의 원전을 읽겠다는 자신감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예전의 저처럼요.

책은 처음에 니체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일단 니체라는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려주며 기본 지식을 독자가 품속에 쌓게 만들죠. 그 뒤에 책은 주요한 저서들을 나온 순서대로 챕터별로 구분하고 그 챕터별로 각각의 책의 내용을 알려주면서 전개됩니다. 이 방식의 특징은, 각각의 책들에 적혀 있는 니체 사상의 얼개들을 알기 쉽게 알려주는 것과 동시에 니체 사상이 전체적으로 어떻게 변화해갔는지를 알려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처음에는 니체의 전체적인 삶을 알면서 전체적인 사상의 틀을 잡고, 각각의 챕터들을 읽으며 사상이 세밀하게 어떻게 전개되어나갔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이죠. 전체와 부분의 조화로서 구성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죠. 따라서 청소년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읽으면서 니체의 사상을 아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은 저처럼요.^^;;

여기까지 적다보니 책에 대한 얘기만 잔뜩한 것 같습니다. 니체에 대한 얘기는 없이. 니체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하니 저같이 지식도 얕고 아는 것도 없는 인물이 뭐라고 떠드는 게 옳은 일인가 하는 의문이 드네요. 그래도 이왕 서평을 썼으니 어쩔 수 없이 니체에 대한 이야기를 써보겠습니다. 이 책을 따라가면 결국 니체는 '너 자신이 되어라'(219)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너 자신이 되어라'라고? '아니, 이건 누구나 할 수 있는 말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네요. 네, 맞습니다. 맞긴 한데 니체의 말에 따르자면 '너 자신이 되는 게', 한 개인이 자기자신의 삶을 사는 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우선 우리가 태어나면서 익혀온 무수한 문화적 관습,가치관, 사회와 공동체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풍습, 주류적인 사고, 고정관념등이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좋은 학교에 가라, 좋은 직장을 가져라, 돈이 제일 중요하다, 외모가 중요하다 같이 사회가 개인에게 강요하는 것들은 한 개인이 자기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니체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좋다고 여기는 인문학적 지식이나 철학, 사상 중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으로 사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니체가 특히 집중하는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독실한 기독교 목사 집안에서 자라나 목사가 되리라는 가족의 기대 속에 신학 공부를 하다 목사의 길에서 벗어난 니체에게 기독교적인 사고나 가치관은 억압의 대명사입니다. 니체뿐만 아닐 겁니다. 니체와 같이 나고 자란 동시대 독일인들에게, 더 나아가 서양인들에게 기독교적인 사고나 풍습은 자기 자신이 되는 걸 가로막는 억압의 기제일 확률이 높습니다. 특히 니체는 기독교적인 사고가 현실보다는 내세, 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는 것을 비판합니다. 니체는 삶이 뿌리박고 서 있는 현실이 아니라, 죽은 뒤에서야 갈 수 있는 내세나 절대적이고 확고부동한 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는 기독교적인 사고는 현실을 긍정하기보다는 부정하기 쉽게 만들고, 우리가 살아가는 육체보다는 영혼을 더 중요시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플라톤의 영향을 받아 형이상학적이고 절대적인 진리에 집착하는 철학자들도 니체는 기독교적인 사교와 마찬가지로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현실을 부정하기 쉽게 만든다고 하죠. 비판하고 있는 부분을 보면,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내세나 초월적이고 절대직인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나 삶입니다. 니체는 삶을 부정하거나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이나 사상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위한, 현실을 긍정하고 살아가게 만드는 철학이나 사상을 추구합니다. 책 제목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니체는 삶을 긍정하는 긍정의 철학자인 것이죠. 그런데 삶을 긍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제가 대답하는 것보다는 이 책을 읽는 게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이 책에서 니체가 주장한 삶을 긍정하는 방법이 잘 제시되고 있으니까요.(휴, 어찌어찌 잘 넘어갔네요. ㅎㅎㅎ)

니체가 어떻게 삶을 긍정했는지 따라가다 보면 독서의 시간이 끝날 겁니다. 저 자신의 경우는, 책을 덮고나니 니체가 느낀 쓸쓸함이 밀려드는 것 같습니다. 글을 쓰면서 논증을 통한 서술이 아니라 문학적인 아포리즘으로 다의적이고 다층적인 해석이 가능하게 만들었고, 당대의 주류적 가치관을 지독하리만큼 과격하게 비판한 니체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웠을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그는 누구에게도 쉽게 인정받지 못하고 크나큰 외로움 속에서 살아갔을 것이 분명하니까요. 말을 끌어안고 광기의 발작을 일으킨 것도, 어쩌면 켜켜이 쌓인 외로움과 불만족이 갑자기 폭발한 것이 아닌가 쉽기도 하네요. 하지만 이제 그는 외롭지 않을 겁니다. 그의 사후에 그의 책을 읽고 그에게 영향을 받은 무수한 이들이 있으니까요. 니체 사상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사상을 전개하고 예술을 만들고 삶을 살아간, 무수한 후대의 '니체'들이 니체의 사상을 새롭게 전개시켜나가고 있으니가요. 그러니 니체식 삶의 긍정은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니체의 사상이 전해지는 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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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4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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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생의 드라마는 항상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사람들은 우리 어깨에 짐이 얹혔다고 말한다. 이 짐을 지고 견디거나, 또는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 싸우다가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한다.(201)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337)
한 번은 중요하지 않다. 한 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유럽 역사와 마찬가지로 보헤미아 역사도 두 번 다시 반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헤미아 역사와 유럽 역사는 인류의 치명적 체험 부재가 그려 낸 두 밑그림이다. 역사란 개인의 삶만큼이나 가벼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깃털처럼 가벼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가벼운, 내일이면 사라질 그 무엇처럼 가벼운 것이다.(358)

(생략)
한 인간의 삶을 한 문장으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태어나고 살았고 죽었다. 하지만 이 한 문장이 삶을 제대로 표현한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삶에는 무수하게 많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지요. 삶을 표현하려면 이 문장에 많은 것들을 덧붙여야 할 것입니다. 성장과정, 살아가면서 한 경험, 살아가면서 한 생각, 살아가면서 느낀 감정들, 살아가면서 만난 사람들... 덧붙이고 덧붙이다 보면 깨닫게 될 것입니다. 언어로 삶을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언어는 삶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삶의 무수한 요소들을 다 알 수도 없거니와 삶의 모든 것들을 표현하는 언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죠. 따라서 삶을 그리는 언어, 삶을 표현하는 언어들은 기본적으로 이미 실패를 품에 안고 있습니다. 언어로 삶을 표현한다는 것은 예정된 실패를 향한 발걸음입니다. 다만, 이 실패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불가능하지만, 실패가 예정되어 있지만, 삶을 표현하기 위해 몸부림치기에 이 실패는 의미가 있습니다.

삶을 표현하는 언어의 대표적인 예가 문학일 것입니다. 문학은 실패가 예정된 장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왜냐고요? 삶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학의 실패는 의미가 있습니다. 제한적이지만 삶을 표현하려고 몸부림치며 '삶의 의미'를 언어로서 구현해내기 때문이죠. 동시에 문학의 실패는 아름답습니다. 왜 아름다울까요? 예정된 실패를 향해 발길을 내딛으며 만들어지는 문학이 우리에게 정서적 울림을 주고, 놀라운 공감의 경험을 하게 만들고, 문학을 읽은 인간을 내적으로 풍요롭게 만들고, 예술작품으로서의 미적인 충족을 우리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문학을 아름다운 실패라고 부릅니다.

아름다운 실패로서의 문학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표현하려고 노력합니다. 모순덩어리 삶을, 다양하기 그지없는 삶을, 하나의 문장이자 당위의 명제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모순덩어리 그 자체로, 다양성 그 자체로서 나타내려 한다는 말이죠. 삶을 단순한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인 것처럼, 문학은 삶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좋은 문학 작품은 삶이 말해질 수 없고,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고 독자에게 속삭입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하나로 정리되지 않는 작품입니다.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왔다갔다하며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인간군상을 펼쳐 보이는 이 작품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는 무엇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삶이란 모순투성이고 다양하기 그지없다는 것을 밀란 쿤데라는 특유의 에세이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드는 스타일과 잘 짜여진 구성으로 넌지시 보여줄 뿐입니다. 스타일만큼이나 소설은 삶의 가벼움과 무거움을 왔다갔다하며 책을 읽는 이에게 다층적 삶의 진실을 알려줍니다. 다 읽고나면 깨닫게 되겠죠. 우리 모두가 삶의 무거움과 가벼움을 왔다갔다한다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가벼움과 무거움 모두를 포함하는 게 우리네 삶이라는 진실을. 삶의 이 진실을 알려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만으로도 저는 이 책이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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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23 15: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예나 경제적 성공에 눈이 먼 작가는 ‘문학의 실패’를 인정하지 않아요. 그래서 보기 좋은 문장을 만드는 데 지나치게 집착해서 표절을 하죠.

짜라투스트라 2018-05-24 14:36   좋아요 0 | URL
네,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면 종종 그런 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