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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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 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 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9~10)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은 차례와 순서로.(<즐거운 지식>,니체,341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 펼치서 읽는 이라면, 처음 시작되는 문장부터 당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니체의 철학적 개념 중에서 가장 난해한 개념으로, 많은 철학자들을 곤경에 빠뜨린 '영원회귀'가 처음부터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곤경에 빠진 철학자들의 심정을 똑같이 체험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는 독자는 '이건 뭐지?'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응, 이건 뭐지? 영원회귀가 왜 소설의 처음에 나오는 거지? 영원회귀와 이 소설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무수한 질문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질문의 늪에서 헤매다 보면 깨닫습니다. 내가 밀란 쿤데라가 쳐놓은 사유의 그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걸. 소설의 시작이 사유의 시작이자 질문의 시작이라는 것은 이전까지 제가 읽었던 소설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건 이 소설이 제가 기존에 읽었던 소설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서사의 예술 작품으로서의소설이 아니라, 사유과 서사가 결합된 '사유의 그물'로서의 소설을 읽는다는 경험을 제가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기대했습니다. 어떤 신세계가 펼쳐져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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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생략)
아마도 이 소설은 읽는 이마다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저 자신도 언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을 할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너무나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소설이기에. 그 많고 많은 해석 중에서, 지금 저는 영원회귀의 관점에서 한 번 소설을 보려고 합니다. 한 번 시작해보죠.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얼마니 지겹고 권태로울까요. 니체의 이해하기 어려운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지겨움과 권태로움은 어느정도 짐작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한 번의 삶밖에 살 수 있는 현실의 인간들은, 그 지겨움과 권태로움을 완벽하게 알 수 없겠죠. 니체는 영원회귀를 넘어서서 초인의 개념으로 가지만, 현실의 중력에 얽매인 평범한 인간인 저는 초인으로까지 넘어가지는 못합니다. 단지 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며 한 번 뿐인 인간의 삶을 지겹고 권태롭지 않게 살 방법을 궁리할 뿐입니다. 영원하지 않더라도, 단 한 번 뿐이더라도 지겹지 않게 사는. 제 머릿속을 맴도는 건 니체가 말한 아이라는 단어입니다. 아이는 영원히 무언가가 반복되는 경험을 해도 지겨워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언제나 반복되는 경험들을 언제나 새롭게 즐겁게 바라봅니다. 문득, 과거에 제가 조카와 같이 살 때 한 경험이 떠오릅니다. 비디오로(비디오라니 얼마나 오래전 일인지요?^^;;) <슈렉>을 보고, 마지막에 보너스로 슈렉과 피오나 공주와 모든 등장인물들이 나와서 노래하고 춤추는 부분을 조카에게 100번 넘게 틀어준 적이 있습니다. 나이가 아주 어렸던 조카는 그 장면이 나올 때마다 즐거워하며 같이 노래부르고 춤을 췄습니다. 조카에 비해 나이가 많았던 저는 지겨워 죽을 뻔 했습니다. 그때는 조카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니체의 영원회귀와 아이 개념을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합니다. 아이에겐 그 부분이 100번 반복된 게 아닙니다. 아이는 매 순간 다른 경험을 100번 한 것입니다. 저는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와 아이의 개념을 그 순간 경험한 것입니다. 비록 그 순간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저는 조카가 했던 경험을 다시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봅니다.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언제나 새롭게 경험하는 것을. 밀란 쿤데라가 사유와 서사의 그물을 통해서 다른 소설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소설을 창조해내며, 자신의 세계 속에 삶을 살아가는 권태와 지겨움을 이겨낼 가능성의 씨앗을 소설 속에 숨겨두었기에. 키치를 극복하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있는 존재의 무게감'으로 전환시키려는 어떤 삶의 가능성을 소설 속에서 보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