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비겁한 변명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원래 예정대로라면 제가 읽은 책에 대해서 계속해서 서평을 써야 합니다.
그런데 서평쓰기가 멈추었죠.
왜 멈추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보니 할 말이 너무 많아서였던 것 같습니다.
서평이 멈추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책이 서경식의 <다시, 일본을 생각한다>였습니다.
이 책의 서평을 쓰려고 앉아봤는데 할말이 너무 많이 떠오르더군요.
할말이 너무 많아서 어디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도저히 어떻게 할줄을 몰라
다음으로 미루게 됐습니다.
다음으로 미루다 보니 이렇게 서평을 안 쓰게 됐죠.^^;;
한 번 미루고 안쓰다보니 서평 자체가 멈추게 됐죠.ㅎㅎㅎ
비겁한 변명이지만 선택과 집중이 안 되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서평을 써야 한다는 생각만 생각은 하는데 안 쓰게 되네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써야 겠다는 생각은 있습니다.
과연 계속 쓰게 될지는 미래를 한 번 지켜봐야겠습니다.

*<민주주의의 시간>도 너무 할말이 많네요. 이 책도 과연 서평을 쓸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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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8-02-22 1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평 혹은 페이퍼를 거의 멈춘 상태입니다 ㅠ

차트랑 2018-02-22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냐면 저는 서평을 쓸 능력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르렀기때문입니다 ㅠ

짜라투스트라 2018-02-22 13:13   좋아요 0 | URL
저는 능력이 안되는데 그냥 쓰다가 잠시 멈춘 상태입니다^^

cyrus 2018-02-22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리뷰에 적지 못한 내용을 페이퍼 형식으로 따로 정리해서 씁니다. ^^

짜라투스트라 2018-02-26 13:31   좋아요 0 | URL
네 저도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아직 책을 다 읽은 것은 아닌데, 책을 읽다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짧게나마 몇 자 적어본다.
책을 다 읽지도 않고 말하는 것이 문제가 있을수도 있겠지만,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에까지 차올라서 글을 쓸 수밖에 없었음을 먼저 밝히겠다...
나는 일반화를 선호하는 편이 아니다. 무언가를 일반화한다는 것이 어쩔 수 없이 일반화된 대상의 부분적 특성을 가지고 그 대상의 전체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 같아서. 일반화가 가진 '성급함'을 너무나 잘 알기에. 하지만 논리를 전개하고 내가 생각하는 주장이나 개념을 말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일반화를 자주 이용한다. 마음 속으로나마 일반화의 위험성을 되뇌면서.
내가 일반화의 위험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일반화'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시간>은 소위 '최장집 학파'라고 불리는 출판사 후마니타스의 대표 박상훈 씨의 저작이다. 내가 '최장집 학파'라고 말할 때는 어떤 부정적인 어감을 가지고 말한 것은 아니다. 최장집 학파라고 불린다는 게 박상훈 씨의 주장을 다 포괄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충분히 '최장집 학파'라는 말이 일반화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일반화의 위험성이 선입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주의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아무리 주의를 해도 일반화가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책에 정당이라는 말이 너무 많이 나온다. 책 곳곳에 정당이라는 단어가 박혀 있고, 저자는 정당이 정치적 현실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계속해서 강조하고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지나친 강조는 민주주의적 정당 정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최장집 학파 비판에 대한 반박처럼 느껴진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나는 지나친 강조에서 저장의 주장이 옳다는 느낌을 받는 게 아니라 저자의 불안을 본다. 정당정치가 옳아서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정치가 옳아야 하기 때문에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자의 불안을 본다는 것은 독서의 피로감을 불러온다. 계속해서 정당정치가 강조되고 이 단어가 계속해서 사용되기 때문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저자의 주장을 반박하게 된다. 정당은 정치에서 중요한 요소이지만 정당 그 자체가 정치의 모든 것을 해결한다거나 설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정당정치의 강조는 정치의 제도적 틀로서 아주 중요한다. 하지만 정치는 '제도적 틀'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를 넓게 본다면 정치는 제도적 틀로서 포섭되지 않는 비제도적이고 비절차적인 '그 무엇'까지 포함할 수 있다. 당연하게도, 정치학은 그 무엇까지 포함해서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하면 저자는, 내가 일반적인 최장집 학파 비판자들처럼 정치에서 운동이나 직접 민주주의의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부류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운동이나 직접 민주주의를 강조할 생각이 없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정치에서 정당 못지않게 '정치적인 운동'이나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도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전정부를 몰아낸 촛불 집회를 보라. 정당 정치론으로 이 현상을 설명하려면, 한국의 정치가 제대로 된 정당정치를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는 말밖에 할 게 없다. 하지만 정치적 운동이나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가지고 말한다면 이 현상은 '정당정치론' 보다 더  설득력이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정당정치론과 정치적 운동, 직접 민주주의적 요소를 모두 포괄해서 큰 틀에서 이야기한다면 앞의 두 주장보다 훨씬 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더 쓰기가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쓰다 보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어쩌면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은 박상훈 씨가 '정당 정치'를 너무 강조한 것의 반작용이 아닐까 싶다. 정치에서 제도와 절차만 너무 강조하는 것의 반작용이라고 할까. 제도적인 것만이 정치의 전부가 아님을, 인간의 욕망과 그 욕망이 표출되는 공론장으로서의 정치의 역할이 반드시 지금의 현실 정치 제도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제로 체험한 인간으로서, 박상훈 씨의 주장을 어떤 특정 영역만 강조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책의 주장에 대한 반론을 멈출 수가 없다. 생각해보니, 설날 연휴 때 읽을 책을 쌓아놓고 읽다 이 책에 대한 반론 때문에 며칠 째 멈춘 현실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만든 것 같다. 읽고 반론하고 읽고 반론하고를 반복하면서 끝날 줄 모르는 기약 없는 책읽기 앞에서 나의 생각은 강력한 반작용의 힘으로 책을 떠나 글로 이어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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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0일.
부산고전함께읽기모임은 두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모임을 이끌어가는지에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기에 사실상의 첫모임(^^;;)으로 봐도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때 이야기한 것들을 정리해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1.이 모임은 혼자 읽기는 쉽지 않은 고전을 함께 읽자는 취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2.앞으로의 7회 모임은 그리스 고전을 읽겠습니다.
3.31주책 소크라테스의 변론(33일)
4.선정도서는 천병희 번역의 숲 출판사 판본입니다.
(희랍어 원본의 번역이기로 이 책으로 선정했습니다.)
5.천병희 번역의 숲 출반사 판본에 들어 있는 대화편 네 편을 차례대로 읽어나가겠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파이톤-향연
7.네 편을 다 읽고 거기에 더해 에우티프론-프로타고라스-파이드로스를 읽겠습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그때 가서 이야기나누겠습니다.
6.방식은 자유토론입니다.
7.장소는 서면 쪽으로 하겠습니다.
8.소크테스의 변론의 역사적 맥락에 대한 이야기
:'소크라테스는 왜 죽었는가?'에 대한 역사적 맥락 살피기
-페르시아 전쟁 이후의 아테네의 전성기 
-라이벌 스파르타와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아테네의 패전
-아테네에 들어선 친스파르타 정권과 그 정권에서 활약했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아테네 민주주의 지지자들로의 정권교체와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선정된 소크라테스
-철학사에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정치적인 맥락을 알면 소크라테스가 왜 죽었는지 더 쉽게 이해된다.  
 9.파이드로스 이후에 잠시 쉬고 동양고전을 읽기 위한 준비편으로 
십팔사략(현대지성판)을  읽고 그 다음에 동양고전을 읽을 겁니다.
역시 더 자세한 사항은 그때 가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 부산고전함께읽기모임의 나날들을 기대하며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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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서 처음으로 '관종'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왜 그런 소리를 들었는지 궁금해졌다.
생각을 해봤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 사건의 맥락을 다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것만 이야기하면 컴퓨터로 무언가 행동을 해야 하는데 
내 실수로 제대로 하지 못했고,
그걸 그대로 얘기했더니 상대방이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여겨 
내가 '관종'이라고 말을 했다.
('도대체 무슨 소리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자세한 건 다 이야기할 수 없어 이쯤에서 마치겠다.^^;;)
물론 상대방이 악의 없이 농담으로 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관종이라는 말을 듣고 뜨악했다.
왜냐하면 관종이라는 말만큼이나 나와 거리가 있는 말은 없기 때문이다.
관종이라면 '관심종자'의 줄임말로 타인의 관심을 얻기 위해
온갖 행동을 다 하는 사람 아닌가?
내가 남들의 관심을 얻고 싶어 온갖 행동을 다한다고?
ㅎㅎㅎㅎㅎ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내가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은 맞다.
누가 읽는지 알 수는 없지만(^^;;)
서평이나 리뷰를 쓸 때도 욕 듣기 싫어 나쁜 말은 잘 안 할 정도로.
사람이 너무 많은 행사나 장소에 가는 걸 꺼려할 정도로.
오히려 나는 관심을 안 받는 걸 좋아하는 인간에 가까운데...
솔직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많았다.
또 내 주장이 강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솔직하다거나 주장이 강하다는 게 '관종'과는 상관이 없는 것 아닌가?
나는 남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솔직하거나 주장을 강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을 좋게 표현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주장하는 것이 좋다고 여겨
솔직한 것일 뿐이다.
나는 남들의 주장에 그냥 그대로 따르는 것보다는 분쟁이 있더라도
내 이야기를 하는 게 좋다고 여겨 내 주장을 하는 것뿐이다.
여기 어디에 관종과 연관이 있지?
관종과 전혀 관련이 없는데 관종 소리를 들으니 황당해서
이렇게 글을 한 번 적어봤다.
적고 보니 나는 역시 관종과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싸가지 없는 인간이라면 맞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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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02-09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다보니 별 말을 다 들으셨군요. 헐.

짜라투스트라 2018-02-09 15:50   좋아요 0 | URL
ㅋㅋㅋ 그러게요
 

 

위대한 문학 작품을 읽을 때 저는 수많은 다른 사람이 되면서도 여전히 자신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느 그리스 시에 나오는 밤하늘처럼, 저는 수많은 눈으로 보지만 보는 사람은 여전히 저입니다. 예배할 때, 사랑할 때, 도덕적 행위를 할 때, 무엇을 할 때 저 자신을 초월하게 되듯,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도 저는 자신을 초월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저는 그 어느 때보다 저 자신에게 충실한 존재가 됩니다.(176)            

이 구절에 대한 인상비평
나에게 독서는 하나의 만남이다. 책을 쓴 저자와의 만남. 책을 쓴 작가가 노력을 해서 만들어낸 책이라는 하나의 구성물을 만나는 경험. 책과 따로 떨어져 존재하던 '나'가 책을 만날 때, 작가의 삶이 담긴 하나의 구성물으로서 존재하는 책을 만날 때, '나'는 더 이상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지 않게 된다. 흡사 물질이 화학반응을 통해서 다른 물질이 되는 것처럼, 나는 책과의 만남을 통해서 '나'이지만 '나'를 넘어선 그 무엇이 된다. 내 안에 책을 쓴 작가의 삶,생각,경험,사상이 수용되고, 거기에 나의 삶,생각,경험,사상이 융합될 때 이루어지는 이 독서의 화학반응은 나로 하여금 자기초월을 하게 만든다. 나라는 알을 깨고 '나'를 넘어선 다른 존재가 되게 만드는 자기초월. 하지만 자기초월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나는 깨닫게 된다. 변화된 '나'가 현재의 '나'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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