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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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우리가 고아였을 때-가즈오 이시구로

늙은이가 조롱하는 건 너무 쉽지. 아마 당신 말이 맞을 거요, 젊은 친구. 아마도 우리는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가는 걸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는지도 모르겠소.(29~30)
그 애는 일어나 앉더니 한쪽 창에 늘어진 가느다란 발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우리 아이들은 저 발의 가느다란 조각을 한데 묶어 놓은 실과 같다고 말했다. 언젠가 일본의 승려가 그 애한테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지만 우리 아이들은 단지 한 가족을 결합시킬 뿐 아니라 온 세상을 한데 묶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우리가 제 몫을 다하지 못하면 발은 바닥에 떨어져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108)
나는 너 같은 소년들이 모두 온갖 것을 이것저것 경험하며 성장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해. 그러면 사람들이 서로를 훨씬 더 잘 대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야. 무엇보다 이런 전쟁도 줄어들게 될 거다.(112)
아무튼 우리가 어렸을 때는 사태가 나빠져도 바로잡을 능력이 없었지. 하지만 이제 어른이 됐으니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어. 그게 중요해. 우리를 좀 봐, 아키라. 이 모든 일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결국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을 거야.(369~370
아주 중요해. 그리워한다는 것 말이야. 그리워하면 기억하게 되거든. 우리가 어른이 되면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걸 말이야. 우리는 그 기억을 가지고 좋은 세상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거야.(370~371)
이제 세상의 실상을 알겠니? ... 네 어머니는 네가 영원히 그 마술 같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랐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결국 그런 세상은 산산조각 나게 마련이야. 네게 있어서 그 세상이 그토록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건 기적이야.(414)
우리 같은 사람들의 운명은, 사라진 부모의 그림자를 오랜 세월 뒤쫓으면서 고아로서 세상과 대면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 임무를 완수하려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러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441)
책을 덮으면서 어쩌면 고아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부모를 여의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을지도 모른다고, 낙원을 잃은 이후 인간은 모두 고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시구로가 어쩔 수 없이 '문학'적인 이유다.(449)

책을 덮고 난뒤에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파악하고 분석하고 분류하려는 저의 욕망이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어떤 범주로 분류할지 난감해지기 때문입니다. 성장소설로 봐야할까? 아니면 가즈오 이시구로식 탐정소설? 뭐가 뭔지 모르겠으니 소설로 할까? 고민 끝에 저 나름의 답을 내려봅니다. 이 소설은 가즈오 이시구로만이 쓸 수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라고. 저에게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 팟캐스트 방송에서도 말했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자기가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려갑니다. 근데 쓰다보니 SF가 되었다가(<너를 보내지마>), 판타지가 되었다가(<파묻힌 거인>), 역사물이 되었다가(<남아 있는 나날>), 탐정 소설이(<우리가 고아였을 때>) 됩니다. 쓰고 싶은 대로 흘러가다가 특정한 장르물이 되는 거지 자신이 장르물을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들은 장르물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장르물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특정 장르의 클리셰를 따르지 않으며 장르물이라기보다는 '소설' 혹은 '문학'의 범주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고 나직하게 속삭입니다. 그 속삭임을 듣다보면 그의 소설들이 장르물이지만 장르물이 아닌 오직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라는 장르에 속하게 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도 추리소설의 외양을 띠고 있습니다. 탐정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범죄와 연관된 듯한 주인공 부모의 실종사건의 진실을 찾아나서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즈오 이시구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마치 동화 같은, 우화 소설 같은 면모를 보이면서 독자를 현실인데 현실 아닌 혼란스런 전쟁터의 한가운데로 안내하더니 모든 것을 무너뜨려버리는 진실을 알려주며 독자와 소설 속 주인공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보르헤스가 말한 세상의 혼란을 일으킨 사건을 탐정이 해결하고 다시 질서 잡힌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추리소설의 보수적인 기본공식이 무너져내리는 거죠. 결국 독자와 소설 속 주인공이 감내할 것은 질서 잡힌 세상으로 되돌아간다는 삶의 리사이클이 아니라, 삶의 혼란을 혼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용기입니다. 내가 아는 세상, 내가 살아왔던 삶, 나라는 존재가, 다 무너져내리고 더 이상의 내가 아는 세상, 내가 살아왔던 삶, 나라는 존재가 아니게 될 때도,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용기. 탐정이 살인사건을 해결할 수 있지만, 전쟁 같은 세상의 큰 사건을 해결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의 과거 삶의 혼란조차 감당할 수 없다는 그 무력감을 받아들이고 살아야한다는 용기.

이건 성장소설을 연상시킵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 주인공이 아이나 성숙하지 못한 존재에서 어른이나 성숙한 존재로 탈바꿈한다는 성장소설의 틀을. 하지만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일반적인 성장소설의 구도가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마치 현실이 아닌 듯한, 우화나 동화 같은 비극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얻는 것이 내가 아는 나가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내가 아는 세상과 삶이 더 이상의 예전의 세상과 삶이 아니라는, 내 불확실한 기억과 불완전한 언어와 말로 표현되는 나의 정체성이란 불확실하고 부조리한 것에 불과하다는, 우리는 시대와 삶의 물결에 휩쓸려가는 무력한 존재로서 무력하고 미숙한 존재이지만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는, 지나치게 쓰디써서 가슴이 아픈 시큼한 문학적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란 누구인가'를 묻다 나가 무참히 무너져내려 나란 누구인가를 질문할 수 없는, 세상과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다 내가 아는 세상과 삶이 무너져내려 삶이란 말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고 삶을 묵묵히 느낄 수밖에 없게 된 어느 가상의 철학자 같은 경험. 그걸 '성숙'으로 볼 수도 있겠죠. 삶을 언어와 말로 표현하지 않고 몸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게 됐으니까요. 근데 그건 성숙이 아닌, 삶의 진실 중 하나의 발견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진실 중 하나? 삶이란 말해질 수 없다는, 말해질 수 없는 삶을 말하고 표현하기 위해 문학은 불완전한 언어와 불확실한 기억의 틀로 주조된 삶과 유사한 문학적 삶을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

영국식 언어가 품격을 갖추고 펼쳐지는 <우리가 고아였을 때>라는 소설이 직접 말하는 부분과 말하지 않은 부분에서 말해지는 삶의 진실들에 귀기울이니, 삶의 서글픔에,쓰디씀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삶이란 이토록 아름답고 슬픈 것이라는. 모든 것을 말로 할 수 없고, 우리의 기억조차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완전하면서도 힘겨운지를. 하지만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 삶이 슬프고 쓰디쓰더라도 우리는 살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해서 삶을 살아내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진실이자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소설을 계속해서 써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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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12-22 18: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힘들어도 포기하지말고 살아가야 하는데 인간에게 그 의지의
한계점이 어디까지일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의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12-22 19:18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7-12-22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저는 이 책을 ( 나루토 그림자분신술에서 이름을 가져와봅니다) 분신 소설이라고 말이죠 . ^^

짜라투스트라 2017-12-22 21:58   좋아요 1 | URL
분신소설^^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강상중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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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강상중

오늘날처럼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일을 그저 생계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내 삶의 방식'을 만드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일 기회가 늘어날 것입니다.(18)
현 상황을 비관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어제의 나보다는 조금 더 나의 의지에 기초해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인문학의 가장 큰 효용이라 생각합니다.(25)
인문 지식은 무엇보다도 인간이 살아가는 의미와 목적에 관한 것이며, 내면으로부터 삶의 의미와 목적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60)
원래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신을 다시 있는 그대로의 타자에게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사이의 관계를 통해 성립되는 사회는 본래 그러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상호 자유롭게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위축되었던 창조성의 문 또한 열릴 것입니다.(63)
지금은 불우하더라도 반드시 돌아올 시간을 믿고 기다릴 것, 그저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지금','여기'를 열심히 살면서 그때를 기다릴 것.(96)
선택과 집중의 배후에 실은 더욱 근원적이며 쓸모없는 것을 포함한 중층적인 부분이 넓게 퍼져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99)
일이 인생에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을지 생각해보고 그것을 개인의 긴 인생 안에 자리매김하면서 적극적으로 살아냈으면 합니다.(124)
우리 대부분은 인류 전체에 무언가를 보답하고 싶다고, 인류 전체의 흐름에 무언가를 더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이는 결국 자기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것이다.(187)
인간 사회는 단순히 영리만으로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사회성을 항상 의식하지 않으면 경제 시스템 자체가 원활하게 돌아가지 않게 됩니다.(218)
결국 타자와 사회와의 만남은 내가 몰랐던 나와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224)

1독 1서평 원칙을 가지고 글을 쓰면서 저는 기본적으로 책을 총체적으로 파악한 뒤에 제 나름의 해석과 생각을 담은 글을 쓰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는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하지만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같은 경우는 서평을 쓰려고 하는데 책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서 제 나름의 해석과 생각을 담아 글을 쓰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책의 전체가 아니라 일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책의 일부분에 '꽂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감동을 받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비판해야겠다는 의미에서. 책을 읽어나가면서도 그 비판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더군요. 저는 머릿속에서 메아리치는 비판의 목소리에 굴복하여 이렇게 앉아 글을 쓰고 있습니다.

책을 쓴 작가에게 보내는 편지

아마도 이 편지를 일본에 계신 책의 작가분은 보지 못하겠지요. 저도 작가분이 보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할말이 있어 편지를 쓰게 됐습니다. 원래라면 책을 쓴 저자와 독자는 독서라는 과정을 통해 내밀한 대화를 나누고, 독서가 끝나면 둘의 내밀한 대화는 끝나게 됩니다. 그러나 저라는 독자는 '독서의 끝'이라는 대화의 끝에 도달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의 독서의 경우에는 내밀한 대화를 끝내고 싶지 않더군요. 머릿속에 할말이 계속 메아리쳤기 때문입니다. 할말이 있다고 내 마음이 외치는데 대화를 끝낼 수가 없어, 이렇게 서평이라는 형식으로 글을 써봅니다. 내 마음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으니까요.

이제 제가 할말을 해야겠네요. 사실은 책에서 읽은 이 말 때문에, 제 마음 속에서 '비판의 목소리'가 계속 울렸습니다. '신문 읽기를 해라'는 말. 저는 책에서 나오는 책의 작가분의 말 대다수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 말만큼은 고개가 갸우뚱해지더군요. 제가 할말을 하기 위해, 책에 나온 작가의 말을 조금 더 자세하게 제가 이해한 방식으로 말해보겠습니다. 기존의 패러다임이 통하지 않는, 일자리를 위시한 대다수의 것들이 확실하지 않은 불확실한 시대에, 이 책의 작가는 사람들은 '일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일의 의미'를 성찰하고 그 의미를 자신의 삶에 아로새기면서 삶을 살아나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 보였습니다. 책의 작가는 '일의 의미'를 성찰하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아로새길 때 인문교양이 필요하다며, 인문교양을 키우기 위한 방법으로 책과 신문 읽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인문교양을 키우는데 책이 도움이 된다는 건 이해가 갑니다. 책을 읽으면 언어감각을 키우고, 저자와의 내밀한 대화를 지속하면서 자신만의 생각하는 법을 익히고, 삶의 거시적 비전이나 폭넓은 시야를 얻고, 자기 자신과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조금 더 균형잡히게 바라볼 수 있게 하니까요. 저 자신도 오래된 문자매체인 책의 힘을 경험을 통해 강력하게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문 얘기는 고개가 갸우뚱거려지네요.

물론 작가의 생각을 완전하게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신문을 통해서도 인문교양을 익힐 수 있다고 여깁니다. 신문도 문자매체이기 때문에 언어감각을 익히고, 하루하루의 뉴스를 통해 그날그날 일어나는 흐름을 파악하면서 삶이 어떤 방식으로 형성되어가는지 느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마음에 걸리는 것은 신문의 '즉물성'입니다. '즉물성이라고?'이라고 되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즉물성' 맞습니다. 신문이라는 매체는 그때그때 일어난 사건들을 다루는 '즉물적' 매체입니다. 칼럼이나 사설을 통해서 조금 더 거시적인 듯 보이는 글들을 선보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럼이나 사설들조차도 신물의 '즉물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을 쓴 작가도 '신문은 매일 매일의 피부호흡과도 같습니다. 매일 신진대사를 하는 것이 신문만의 매력이지요.(111)' 라며 신문의 '즉물성'을 표현했습니다.

여기서 이제부터 제가 할말을 해보겠습니다. 신문이 즉물적 성격을 가진 매체라면, 과연 신문의 즉물설이 지금에도 과거처럼 유효한 것일까요? 먼저 속도라는 측면을 봅시다. 과거라면 신문이 뉴스 정보를 얻는데 가장 빨랐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인터넷 매체나 SNS나 심지어 1인 미디어까지 있는 상황에서 더 이상 신문이 가장 빠르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즉물성의 가장 큰 속성 중 하나인 속도에서 신문은 느린 매체가 됐죠. 그렇다고 신문이 큰 틀에서의 거시적인 사고를 우리에게 보여주나요? 과거의 칼럼이나 사설들을 시간이 지나서 바라보면 어처구니없거나 지나치게 즉물적이라 폭넓은 사고를 보여주지 못하는 글들이 너무 많습니다. 예외적으로 시간이 지나도 통하는 사설이나 칼럼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신문 자체가 거시적인 큰 틀에서는 책에 비해 취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빠르지도 않고, 책처럼 거시적인 큰 틀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못하는 것이 신문의 현실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오늘날의 신문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정쩡한 상황속에 신문이 놓여 있는데 인문교양을 쌓기 위한 매일매일의 언어적인 피부호흡을 위해 신문을 읽자는 작가의 말이 과연 유효한 것일까요? 저는 부정적입니다.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의 작가가 말하는 언어적인 매일매일의 피부호흡의 방법으로서의 신문 읽기는 낡은 피부호흡 방법이 되어버렸습니다. 느리고, 거시적인 틀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낡은 언어적인 피부호흡 방법을 계속 유지해야 하나요? 지금의 시대에 맞춰 조금 더 빠른 방법으로 바꾸면 안되나요? 조금 더 빠른 방법으로 바꾼다고 큰 잘못인가요? 신문을 읽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신문을 읽고 싶은 사람은 읽으면 됩니다. 저는 신문에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문이 낡고 느린 매체가 된 현실에서 지금 이 시대의 인문교양을 쌓는 방법으로서 신문읽기가 효율적인지는 의문이 듭니다. 긴호흡을 가지게 만드는 책과 짧은 호흡을 가지게 만드는 신문을 통해서 미시적인 시각과 거시적인 시각의 균형을 통해 인문교양을 쌓자는 저자의 주장은, 짧은 호흡의 측면만 놓고 본다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차라리 인터넷이나 SNS의 뉴스를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릅니다. 신문을 압도하는 속도감을 보여주는, 인터넷과 SNS의 다양한 뉴스들을 모아놓고 바라보며 지금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하는 게 더 좋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인터넷과 SNS상의 뉴스들을 바라보면서 제가 '뉴스의 성좌'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뉴스의 성좌' 바라보면 뉴스들이 어떤 시대상의 밑그림을 그린다고 여겨지니까요. 인터넷과 SNS상의 뉴스들을 토대로 자기 나름의 '뉴스의 성좌'를 그려나가며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는 게 더 이 시대에 맞는 인문교양을 쌓는 짧은 호흡의 방법이 아닐까요?  이게 정답은 아닐 겁니다. 다만 신문이 과거만큼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 시대에 맞는 하나의 방법인 것은 맞습니다.

작가님에게는 미안하지만 한 가지 더 비판할 것이 있습니다. 무슨 영웅전처럼 자신이 높은 평가를 하는 인물들을 서술하는 부분은 비판할 수밖에 없더군요. 저는 자신이 생각하는 긍적적인 인물들을 얘기하며 높은 평가를 하는 것은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결점 없는 영웅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문제가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스티브 잡스를 말하는 부분에서 '영웅전' 같은 느낌이 특히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아론 소킨이 시나리오를 쓰고 대니 보일이 연출한 영화 <스티브 잡스>를 보면, 잡스는 작가님이 말하는 영웅적인 인물이 아니라 지나치게 완벽주의적인 스타일로 주변인들을 힘들게 만드는 지독한 인간으로 나옵니다. 스티브 잡스를 '영웅'이 아니라 문제가 있는 인물로 볼 수도 있는 거잖아요. 인간은 다면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는데 너무 좋은 면으로만 몰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다면적인 인간으로 보는 게 더 인문학적인 것 아닌가요?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지만.

적어놓고 보니 비판만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듭니다.^^ 사실 저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고, 책에 나오는 작가님의 의견 대부분은 동의하는데 부정적인 말만 늘어놓아 미안하군요. 그러나 애정이 있으니 이런 소리가 나온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자기계발서와 인문서의 중간에 있는 책으로, 책에서 말하는 비즈니스 퍼슨을 대상으로 쓴 책이라서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군요. 저는 기본적으로 비즈니스 퍼슨식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 아니라서 마음속에서 무언가 부정적인 말들이 튀어나왔던 것 같습니다. 앞으로 작가님의 어떤 책을 쓰느냐에 따라서 또 저의 생각도 변하겠죠. 꾸준히 계속해서 책을 써주시기를 바라며 이제 편지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몸건강하고 편안하게 잘 지내시기를. 다음 책에서 만나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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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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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9.미움받을 용기-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직선이나 곡선처럼, 인생이 하나의 선으로 쭉 이어진다고 여기는 사람들의 착각을 저자는 비판한다. 그래서 프로이트식 원인론에 빠져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생은 과거에서 현재를 지나 미래로 이어지는 '선'이 아니라 점 같은 찰나가 쭉 이어질 뿐이라는 주장이다. 지금, 현재의 순간에 내게 주어진 '인생의 과제'에 춤추듯 즐겁게 몰두해야 한다. 그래야 '내 인생'을 살 수 있다.(5)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자네에게 그런 '용기'가 있을까?
...
인간은 변할 수 있어. 그뿐 아니라 행복해질 수도 있지.(13~14)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받은 충격-즉 트라우마-으로 고통받는 것이 아니라, 경험 안에서 목적에 맞는 수단을 찾아낸다. 경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하는 것이다"(37)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교환이 아니라 고쳐나가는 것이야.(54)
우리는 고독을 느끼는 데도 타인을 필요로 한다네. 즉 인간은 사회라는 맥락 속에서 비로소 '개인'이 되는 걸세.(81)
"A라서 B를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A만 아니면 나는 유능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은연중에 암시하는 셈이지.(97)
건전한 열등감이란 타인과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상적인 나'아 비교해서 생기는 것이라네.(105)
우리가 걷는 것은 누군가와 경쟁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지금의 나보다 앞서 나가려는 것이야말로 가치가 있다네.(107)
인간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사랑을 실감할 수 있네.(133~134)
타인을 친구로 여기고, 거기서 '내가 있을 곳은 여기'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이 '공동체 감각'일세.(206)
인간은 자신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에만 용기를 얻는다.(235)
우리는 태어나면서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없어. 하지만 주어진 것을 이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바꿀 수가 있네. 따라서 바꿀 수 없는 것에 주목하지 말고, 바꿀 수 있는 것에 주목하란 말이지. 내가 말하는 자기수용이란 이런 거네.(261)

B의 주장
(생략)
<미움받을 용기>의 의의를 제 나름대로 세 가지 정도로 간추려 봤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고 저만의 해석이라는 점을 덧붙입니다.^^

첫번째로 저는 <미움받을 용기>가 현재성을 강조하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심리상담을 받을 때는 우리는 자신의 현재의 정신적인 문제의 원인을 과거의 자신의 삶으로부터 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건 심리적인 영역에서 과거의 가치가 강조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미움받을 용기>는 이런 식의 프로이트적인 원인론을 비판하며 아들러의 목적론을 말하며 과거보다는 현재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과거의 무슨 일이 있었는지보다 현재에 어떻게 해서 어떻게 바꾸어나가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개인적으로는 우울증에 가까웠던 제 정신적인 문제를 바꾼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저도 현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주장에 동의합니다. 인간은 충분히 바뀔 수 있는 존재이며 인간 자신의 변화를 통해 삶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을 저 자신이 경험했고 지금도 경험 중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미움받을 용기>에서 말하는 프로이트나 아들러가 기시미 이치로식 프로이트나 아들러 해석일 뿐이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네, 저도 그 반론에 공감합니다. 저도 이 책에 나오는 프로이트나 아들러가 기시미 이치로식 프로이트나 아들러라는 점에는 동의합니다. 과거의 극단적인 경험이 트라우마가 되어 현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주장을 <미움받을 용기>에서처럼 쉽게 내버릴 수 없다는 점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현재를 강조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는 계속해서 현재를 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로는 위에서 얘기한 것과는 반대되는 것으로서, <미움받을 용기>가 한국과 일본의 동양적인 체면의 문화에서 벗어나는 심리학적인 계기를 마련하는 것에 주목했습니다. 리처드 니스벳이 쓴 <생각의 지도>라는 책을 보면, 서양인과 동양인의 심리가 다른 것은, 개인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서양의 문화와 집단과 관계를 강조하는 동양의 문화가 다르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관계와 집단을 중시하는 동양의 문화가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하여금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만든다는거죠. 타인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만드는 문화를 '체면의 문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체면의 문화' 속에서 자란 사람은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을 의식하고, 집단과 조직이 강요하는 규율을 내면율처럼 받아들일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미움받을 용기>가 '체면의 문화'에서 유용하다면 아마도 이 부분일 것입니다. 기지미 이치로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인 아들러는 '자유'를 중시하면서 '미움받을 용기'를 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런 류의 발언은 자기계발서들에 흔히 쓰는 표현입니다. 너 자신을 믿어라, 내가 하고 싶은 걸 해라 등등등. 제가 <미움받을 용기>에 더 주목하는 부분은, 자기계발서에 흔히 나오는 말들이 심리학적인 논거를 가지고 이야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양적인 '체면의 문화'에서 벗어날 방법에 심리학적인 근거가 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는 흥미롭고, 책에서 주목할만한 부분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세번째로 저는 <미움받을 용기>가 공동체 감각을 강조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심리학의 가장 큰 문제는 지나치게 개인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개인의 심리 문제에 개인이 강조되는 게 뭐가 문제냐고 할 수 있겠지만, 개인의 심리 문제를 무조건 개인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미국에서 총기난사로 자식을 잃은 부모가 큰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면, 그 부모의 심리 문제는 개인의 심리문제이면서 동시에 미국이라는 사회의 총기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거든요. 이걸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만 바라보며 접근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바라보는 심리학의 영역도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심리학이라고 하면 개인의 심리문제를 개인의 영역이나 개인을 둘러싼 관계나 환경을 토대로 바라보기 때문에, 저는 심리학이 개인을 강조한다고 말한겁니다. 인간은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이 태어난 공동체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의 심리를 말할 때도 공동체와의 연관성을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여기까지는 좋은데, 저는 <미움받을 용기>에서 이야기한 공동체 감각을 읽어나가며 무언가 찝찝함을 느꼈습니다. 기시미 이치로가 말하는 공동체 감각과 아들러가 말하는 공동체 감각이 다른 것 같은데, 기시미 이치로가 자기만의 공동체감각으로 말하는 게 아니냐는. 기시미 이치로식 공동체 감각은 저에게 일본식 순응주의를 연상시켰습니다. 별다른 문제 일으키지 않고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나가는 일본 문화식 공동체 의식이 아들러식 '공동체 감각'으로 포장되 것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은 겁니다. 사회나 공동체의 잘못을 말하고 그걸 바꾸어나가면서 사회나 공동체를 조금 더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나가는 것도 공동체 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 그런 부분이 거세되고 오직 공동체에 헌신하고 타자를 위하는 것만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것 같아서요.

<미움받을 용기>에 나오는 아들러는 과거가 아닌 현재를 중요시하며 현재에서 자신의 자유를 찾을 '미움받을 용기'를 내어 삶을 살고, 자신의 삶을 살게 되면 타인을 받아들이고 타인을 돕는 일을 하며, 더 나아가서는 공동체 감각을 바탕으로 공동체에 기여하라고 말합니다. 여기까지는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아들러는 더 나아가더군요. 모든 생명체와 지구에까지 기여하는 삶으로. 이런 확장이 많은 이들에게 설득력이 있는지는 의문스럽습니다. 하지만 큰 이상을 설정해놓고 노력하다보면 지금보다 개인과 공동체의 삶에 더 나은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군데군데  반박하고 비판할 부분도 많지만, 결국은 어떻게 받아들여서 내 삶에 녹여낼까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저는 이정도로 제 말을 마치려 합니다. 기지미 이치로가 자신만의 아들러 해석을 한 것처럼 시도한 저만의 <미움받을 용기> 해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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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2-19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술에 놀아나서 저도 이책이 인기라고 해서 읽긴 했는데, 말씀대로 자기계발서 느낌이어서 별 감흥이 없었어요..깊이있는 리뷰 잘읽었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12-19 14:01   좋아요 0 | URL
아 감사합니다^^

cardcheri 2017-12-28 2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굉장한 리뷰였습니다.
느낀 게 많아서 하고싶은 말이 많지만 구구절절하고 큰 의미가 없는 말들인지라 생략하고, 덕분에 구매할 마음이 생겼다는 한 문장으로 끝내겠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12-28 20:42   좋아요 0 | URL
아, 좋게 봐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새벽의 데드라인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이은선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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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8.새벽의 데드라인-윌리엄 아이리시

그녀에게 그는 분홍색 댄스 티켓이었다. 그것도 써버려서 반동강이 난 티켓에 불과했다. 십 센트당 이 센트씩 떨어지는 수고비였다. 그녀에게 딱 붙어 밤새도록 온 사방을, 온 플로어를 누비는 한 쌍의 발이었다.(9)
추억의 강물이 둘 사이에 줄기를 이루어 흐르기까지, 서로 박자를 맞춰가며 점점이 흩뿌려진 기억들을 번갈아 길어 모았다.(58)
이 도시는 악질이에요. 사람을 잡아먹어요. 지금 이 도시가 내 목을 조르고 있어요. 그래서 도망치지 못하고 붙잡혀 있는 거예요.(63)
가방이 무겁지는 않았다. 들어 있는 물건이라고 해봐야 산산이 부서진 희망뿐이었다.(92)
도시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거든요. 도시는 눈이 천 개에요. 길거리를 지날 때마다 우리한테 안 보이는 위치에 깊숙이 숨겨진 눈이 끔뻑끔뻑 우리를 예의 주시하고 있어요.(98)
이 도시, 여기가 문제야. 본때를 보여주자고요. 아직은 한 방 먹은 거 아니에요. 데드라인까지 시간이 남았잖아요. 날이 밝을 때까지 시간 있어요.(110)
앞이 막힌 구멍들이 줄줄이 늘어선 거대한 벌집과 다를 바 없는 게 도시였다. 인간은 이런 문을 드나들면 안 된다. 이런 데서 살면 안 된다. 이런 방에는 달빛도, 별빛도, 아무것도 싀지 않았다. 차라리 무덤이 나았다.(303~304)
가면 갈수록 스카이라인에 잠식당해 하늘은 점점 더 면적이 줄었고, 가끔 뚜껑 열린 맨홀들이 들쭉날쭉하게 하늘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저 파란 하늘. 그리고 어두침침한, 탈출구 없이 영원히 어두침침한 콘크리트 미로.(356)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는, 도시에 대한 어떤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서서 저의 삶의 보금자리로서 존재하는 곳이 도시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도시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다보니 빌딩숲이 우거진 곳이나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간다고 해도 크게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도시가 아닌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이 도시에 와서 느끼는 감정을 저는 느끼지는 못하겠죠.

<새벽의 데드라인>은 제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느끼는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댄서로서 성공하리라는 부푼 꿈을 안고 뉴욕에 왔다 성공하지 못하고 싸구려 댄스홀의 댄서로 혹사당하며 죽은 삶을 살고 있지만 고향의 부모님에게 계속해서 말한 거짓말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여인 브리키. 역시 고향을 떠나 뉴욕에 와서 일을 얻었지만 1930년대 대공황의 여파로 일자리를 잃고 몰락한 청년 퀸. 우연히 댄스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고향이 같다는 사실을 알고 대화를 나누다 도시의 삶에 지쳐서 고향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하지만 도시는, 도시에서 그들이 겪은 삶은, 그들을 순순히 놓아주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탐욕이 버무려진 냉정한 도시의 삶은 그들을 얽어매어 '범죄'의 혼란 속으로 그들을 밀어넣습니다. 다음 날 새벽까지 고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서 그들은 자신들이 연관된 범죄를 새벽까지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될지는 소설을 읽으면 알 게 될 것입니다.^^

이 소설을 읽는데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작가입니다. 윌리엄 아이리시. 미국 추리소설의 역사에 누아르와 서스펜스 장르의 대가로 꼽히는 코넬 울리치의 다른 필명인 '윌리엄 아이리시'라는 이름은 이 소설을 읽는데 신뢰감을 더합니다. 시리즈물이나 연속해서 등장하는 인물이나 탐정, 경찰을 거부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거나 평범하지 않은 상황에 처했을 때 어떻게 그것을 극복해나가는지를 생동감 있고 긴박감넘치게 특유의 흡입력 있는 문제로 그려나가는 작가인 것을 알기에 저는 <새벽의 데드라인>을 읽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비록 이야기 구성이 과거의 느낌이 나고 지나치게 영화적 구성 같은 부분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읽을만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관심있게 본 것은 도시인이 아닌 인물이 도시에 와서 살면서 가지게 된 도시를 바라보는 시선이었습니다. 자신만의 큰 꿈을 품고 '뉴욕'이라는 세계 제일의 도시이자 세계의 중심에 와서 성공을 위해 노력하다 실패한 여인 브리키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에 빗대어서 도시를 바라봅니다. 도시가 자신을 잡고 있다고, 도시가 자신을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고, 도시가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다고. 이건 자신의 원망을 도시에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원망을 반영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도시 특유의 삶이 가진 어떤 특정한 패턴을 반영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업 중심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그물망처럼 지역 곳곳을 얽매고 있는 고장에서, 농업이 중심이 아닌, 끈끈한 인간관계가 아닌, 스쳐지나가는 관계 중심의 대도시가 가지고 있는 서늘함과 차가움이 도시가 아닌 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무섭게' 여겨질수도 있습니다. 도시의 그 서늘함과 차가움을 자신의 몸에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무서울 수도 있는거죠. 저라는 인간는 도시의 삶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 서늘함과 차가움을 무섭게 여기지 않는겁니다. 생각해보니 저같은 도시인은 그 서늘함과 차가움을 받아들인 무서운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도시가 아닌 곳의 사람이 본다면. 어쩌면 <새벽의 데드라인>은 도시의 차가움과 서늘함이 만든 무서움을 벗어나려는 도시가 아닌 사람들의 몸부림이 그려진 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시인 코넬 울리치가 도시인이 아닌 사람들의 삶을 통해 도시의 무서움을 그려내는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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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곁에서 - 주말엔 숲으로, 두번째 이야기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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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너의 곁에서-마스다 미리

무거운 채로는 많이 날 수 없어.                        
각자 운명의 만남 '공존'이라는 거지.                        
숲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기도 하지만 힘도 주는 느낌이랄까.                        
다양하게 있다는 건 좋은거야.                        
기대는 기대일 뿐. 씨앗 본인과는 상관이 없죠. 떨어져 나가는 것 외에는 자신의 세상이 넓어질 방법이 없으니까요.

사람들 많고 바쁘기 그지없는 도시에서 삶을 살다보면 피곤하고 힘빠지고 해서 종종 숲이나 산이나 바다 같은 도시가 아닌 곳으로 가고 싶어집니다. 저만 해도 그런 생각이 많이 듭니다. 사실 예전만 해도 저는 제가 사는 곳 근처의 산을 시간나면 자주 갔었지요. 공기도 너무 좋은 것 같고, 자연 속에서 편안함이 느껴지는 것 같고. 무엇보다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어서 좋았죠. 그런데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는 상황이 되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책을 봅니다. 마스다 미리의 <주말엔 숲으로> 같은 책을.

<주말엔 숲으로>를 읽었을 때 정말 좋았습니다. 도시의 생활에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숲 근처에 사는 친구의 집으로 가서 같이 숲을 즐기며 휴식을 취하고 살아갈 힘을 얻는 내용을 보고, 저는 숲을 가지 않았는데 마치 숲에 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저만의 착각이겠지만 책에서 숲의 냄새가 나고(생각해보니 책의 종이는 나무로 만든 것이군요.ㅎㅎ), 새소리가 들리고, 숲의 생명체들이 살아 있는 것 같았거든요.

<너의 곁으로>는 <주말엔 숲으로>의 후속편 격인 만화입니다. 전작에서 숲 근처에 살면서 친구들이 오면 자연이라는 넉넉한 공간으로 안내하여 친구들을 마음 편하게 쉬게 만들고, 숲의 식물들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삶의 작은 깨달음을 전해주었던 '하야카와'는 <너의 곁으로>에서 자신처럼 선한 남자를 만나서 결혼하여 자신과 비슷한 아이를 낳고 가족을 꾸려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하야카와는 여전히 하야카와라는 점. 여전히 여유롭고 엉뚱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며 주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습니다. 아내를 존중하며 아내처럼 여유로운 남편,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연에게서 배우며 마음 넓게 성장하고 있는 아들 타로, 일상에 지치면 종종 찾아와 여유를 즐기고 삶의 힘을 얻어가는 하야카와의 두 친구인 마유미와 세스코, 어머니의 집착에 시달려 힘들어하다 하야카와의 이야기를 듣고 자립의 힘을 얻는 타로의 담임선생님과 역시 하야카와의 이야기를 듣고 자식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담임선생님의 어머니까지, 자연을 닮은 하야카와의 영향 속에서 자신만의 삶을 찾아가게 됩니다. 어쩌면 자연이 하야카와의 몸을 빌려서 그들의 삶에 힘을 준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해 자연이 마스다 미리라는 작가의 몸을 통해서 책 속 등장인물들과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삶의 힘을 주려는 의도인지도 모르겠군요.

이 책의 이야기가 가진 '휴식 같은 따뜻한 온기' 앞에서 이 책의 낭만성을 비판하는 말은 큰 의미가 없겠지요. 마루야마 겐지 식의 '시골은 그런 것이 아니다'라거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같은 사고방식이나 생존을 위한 생물들의 치열한 경쟁을 생생하게 증명하는 생물학적인 사고로 이 책을 바라보지는 않겠습니다. 저도 쉬고 싶고, 쉬기 위해 이 책을 읽었으니까요. 그러니 그냥 쉬는 기분으로, 휴식의 힘을 느끼며 이 글을 마치겠습니다. 글을 쓴다는 제 나름의 노동에서 벗어나 나만의 숲을 찾아 떠나겠다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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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2-15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생각하는 ‘나만의 숲‘은 헌책방입니다. 헌책방은 죽은 고목 같은 책들이 많은 곳이에요. 애서가들의 발길이 드물어서 쓸쓸한 곳이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누리고 싶은 저 같은 사람에게는 최적의 장소입니다. ^^

짜라투스트라 2017-12-16 05:15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