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도 나만의 책을 완성시키기 위해 
<별의 계승자2:가니메데의 친절한 거인> 후기를 한글로 쓰고 있었다.
분명히 글을 쓰고 있었다
정말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1시가 지나 있었고 나는 누워 있었다.
어떻게 누웠는지 왜 누웠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누워서 자고 있었다.
불과 컴퓨터는 커져 있었지만 쓰고 있던 글은 없어졌고, 방에 이불은 깔려 있지 않았다.
내가 자게 된 과정도 까먹을 정도로 피곤했던 것일까?
아 희미하게 기억은 난다. 한글로 썼던 글은 저장없이 지운 것 같고,
글을 지운 뒤에는 그냥 맨바닥에 누워서 잤던 것 같다.
오늘도 앉아서 글을 쓰려고 한다.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오늘은 무사히 글을 마칠 수 있기를 바랄 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니체의 인생 강의 - 낙타, 사자, 어린아이로 사는 변신의 삶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은 픽션의 형식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글 속에 나오는 A씨는 저라고 보시면 됩니다.^^

A씨는 여러모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일도 바쁘고, 나름대로 계획한 개인 팟캐스트 방송(잘 올리지는 않지만^^;;)이나 개인 책을 만들기 위한 노력 등으로. 오늘도 A는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2017년이 끝나기 전에 책을 완성해야 하는데 날짜가 얼마 안남아 A는 어제에 이어 이틀 연속으로 글을 쓰려고. 역시 오늘도 글이 써지지 않는다. 어제에는 20번 이상 읽었던 <데미안>이라는 책을 가지고 니체의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이용해서 글을 썼는데, 평소의 A답지 않게 글이 술술 나와서 당황했다. 어 내가 이렇게 글을 쉽게 쓸 수 있다니 놀라며. 그런데 오늘은 평소와 같다. 마치 어제 내적인 배터리의 에너지를 다 써서 더 이상 글을 쓸 역량이 없는 것처럼.  어쩔 수 없이 A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본다.

첫번째. '김광석이라는 가수는 인생의 어느 시절마다 갑자기 찾아와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군대갈 때는 '이등병의 편지'가 다가온다. '집 떠나와 열차 타고 훈련소로 가던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밖을 나설 때/ 가슴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롭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 군대에 들어갈 날이 얼마 안남은 청년들이 이 가사를 보고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겠는가. '서른 즈음에'는 어떤가.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 뿜은 담배연기처럼/ 작기만한 내 기억속에/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비어가는 내 가슴속에/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만/ 떠나간 내 사랑은 어디에/ 내가 떠나온 것도 아닌데~' 서른을 앞둔 청춘들이 이 가사를 듣고 어떻게 마음이 뒤흔들리지 않겠는가. 아직 경험한 적은 없지만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도 60대에 들어서면 분명히 큰 감정의 흔들림이 있을 것이다. 니체는 김광석과 반대다. 니체의 사상은 어느 특정 시점에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니체의 말을 받아들일 수 있고 수용할 수 있다면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김광석과 달리 니체를 보편성의 사상가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여기까지 쓰고 A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음을 깨닫는다. 뒤에 쓸 글들이 떠오르지 않아서. 자신이 쓴 글을 들여다보니 갑자기 화가 치민다. 김광석과 니체라니 이 무슨 개풀 뜯어 먹는 소리란 말인가. A는 자세를 가다듬고 생각을 더듬어 글을 쓰기 시작한다.

두번째. '대학 시절 친하게 지내던 친구와의 관계 때문에 모 기독교 동아리 수련회를 따라갔다. 한때 기독교였지만 기독교를 떠났던 나는, 다시 기독교인이었던 과거로 돌아가는 경험을 했다. 기도, 찬송가와 가스펠, 몸짓과 춤 등등. 여러가지 다양한 경험을 했는데 그 중에서 '철학적'인 것과 연관이 있는 경험이 있다. 기독교 동아리의 대표 목사격인 인물이 연설을 하는데 갑자기 '니체'를 언급하며 그를 비판했던 것이다. 그때 이미 니체의 책들을 읽었던 나는 그의 비판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신은 죽었다'는 말을 그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판의 맥락을 이해하자 나는 나 자신이 이곳에서 이방인이라는 생각을 하며 나 자신과 이곳의 분위기를 따로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소격효과' 같은 경험을 하며 나는 이 수련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다시 뒤에 글이 떠오르지 않는다. A의 분노는 이전보다 더욱 더 강하게 차오르기 시작한다. 과거의 경험을 늘어놓다가 뜬금없이 니체를 말하다니 뭐하는 짓이지. A는 길길이 날뛰고 싶다. 참을 수 없는 분노 속에서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글을 쓰기 시작한다.

세번째. '나는 말이다. 비록 '히히힝'은 하지 않지만, 나는 말과 다름없는 존재다. 니체가 끌어안고 울부짓던 그 말. 자신의 삶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자신의 본능과 마부가 이끄는 대로 존재하는 말과 같은 존재인 나는 나 자신의 삶에 의문 따위를 제기하지 않고 살아왔다. 사는 대로 살다보니 여기까지 왔고, 여기까지 오고 나니 더 이상 삶에 어떤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 죽는 것밖에 남지 않지만 죽고 싶지는 않다. 죽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 끝에 니체를 바라다본다. 말을 끌어 안고 울부짖는 그 니체를. 미친 그를 보니 내가 미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미쳐야 세상을 새롭게 살 수 있을 것 같다. '히히힝'하고 외치자. 외치고 나를 말로서 인정하고 말이지만 더 이상 말이 되지 않는 삶을 꿈꾸자. 거기서는 '히히힝'이야말로 마법의 단어일 것이다.'

당연하게도 글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는다. A의 광기가 지속되지 않기 때문에. 정신 차린 A는 자신이 쓴 글을 보고 자신이 '진짜 미쳤었구나'라는 생각을 한다. 미치지 않고서야 이 따위 글을 쓰겠는가. 글을 못 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즈음에, A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다. 잠깐 내가 썼던 글 세 가지는 <니체의 인생 강의>에 나오는 낙타, 사자, 어린아이와 대응할수도 있다는. 첫번째 글의 김광석은 사는 대로 살다가 느끼는 삶의 무게와 연결된다. 자신의 삶의 무게를 알아차리지만 묵묵히 살아가는 낙타와 같은 삶의 형태로서 '김광석의 노래들'과 이어진다는 말이다. 두번째 글은 사자의 모습과 연결된다. 기존의 가치를 부정하며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나아가는 사자의 모습은, 수련회에서 하라는 대로 따라하다 니체에 대한 비판을 듣고 수련회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는 나의 모습에서 그 씨앗이 들여다보인다. 세번째 글은 어떤가. 광기에 사로잡힌 A는 광기의 순수한 유희로서 말인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새로운 형태의 어린아이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히히힝'을 외치며. 비록 글을 다 못써서 실패한 어린아이에 그쳤지만.

깨달음은 A를 기쁘게 한다. 무한히 반복되는 삶으로서의 무한회귀에 지쳤던 그가 그 무한회귀하는 삶을 무한한 긍정의 자세로 새롭게 창조함으로써 무한히 반복되는 새로운 삶으로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기 때문에. 기쁜 그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사유의 춤과 몸의 춤을 함께.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니체의 가르침을 되뇌며. 춤추다 A는 거울을 들여다본다. 거기에는 니체가 말인 자신을 껴안고 울부짖는 모습이 보인다. 더 자세히 들여다보니 울부짖는 니체의 얼굴 아랫부분이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다. 아! 저거다. 저것이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아모르 파티, 운명애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7-11-02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02 22: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댓글저장
 

20번 이상의 반복과 1번의 사랑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드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 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 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p.9~10)

'세계의 관점이 아닌 우리들의 관점에서 영원회귀는 하나의 선택[의지]을 요구한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로서 우리 역시 생성과 소멸의 반복하는 운동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구체적으로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건강한 변신을 이루는 것은 중요하다. 니체는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이 영원회귀를 능동적으로 택하는 것이 좋은 것(도덕적 의미의 선한 것과는 다르다)임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원회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의지]은 우리 자신 안에, 그리고 세계 안에 예전부터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단지 잠재적 형태로만 그러했던 새로운 존재들을 현실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사물들과 더불어 거대한 '우주 교향곡'을 공연하는 연주자이다.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있었지만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던 하나의 멜로디가 울려퍼질 수 있다면 그것은 멋진 일이 아닐까.(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p.280)

20번 이상의 데미안 독서. 하나의 책을 20번 이상이나 읽는다는 건, 니체의 영원회귀와 같은 무한한 반복을 경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지겨움과의 사투와도 같은 20번 이상의 독서를 한다는 건, 어떤 각오를 포함하고 있다. 지겹지만 지겹지 않게 읽겠다는 각오. 그건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를 대하는 태도와 이어진다. 무한한 반복을 지겨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매순간마다 무한한 긍정의 계기로 받아들이겠다는. 내가 의식적으로 니체와 같은 철학적 자세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읽고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매순간의 독서를 다르게 받아들이게 됐다. 반복 끝에 도달한 반복 아닌 무한한 새로움의 창조. 똑같은 글들을 매순간 새롭게 받아들인다는 건, 반복을 넘어섰다는 것과 같다. 아니, 반복을 반복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자 반복을 반복같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말일 것이다. <데미안>은 내게 ‘반복 아닌 반복’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반복 아닌 반복’이기에 나는 겁내지 않고 틈만나면 <데미안>을 펼쳐 읽는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살아보려고 했던 이야기,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선 이야기, 자기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아나가는 이야기, 완전한 자기 자신을 바라보려고 노력한 이야기... 똑같지만 다른 무수한 이야기들 속을 헤매다보면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따라 나를 들여다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내 안에 무수히 많은 ‘나’들이 있어서. 무수히 많은 나들을 만나다 다시 책을 보면 알을 깨고 날아가는 새의 형상이 보인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나 자신이라는 알을 깨는 경험을 한 기분이다. 깨고 깨고 또 깨고. 무수히 많은 나 자신을 감싼 알껍질들을 깨고 보니 예전의 나는 사라진 것 같다. 시간이 지난 만큼 나도 변화해 왔고, 그 시간과 함께 계속해서 <데미안>을 읽다보니 생겨난 변화의 흐름을 반영했다고 할까. 어느새 나와 싱클레어는 하나가 되었다. 하나가 된 ‘우리’를 연결시키는 건 ‘사랑’의 감정이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나를 허물어뜨린 사랑의 감정. 그때 나는 싱클레어를, 데미안을, 베아트리체를, 에바부인을, 아프락사스를, 소설 <데미안>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어 이 사랑이 계속되리라는 운명을 느겼다. 무수히 반복되는 독서 속에서도 나를 지탱하는 건 그 사랑의 감정이다. 20번이 넘는 반복은 1번의 사랑이 무한히 지속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은 나를 데미안 속에서 살게 하고, 싱클레어와 하나 되게 만든다. 벗어날 수 없는 무한의 열병 같은 사랑 앞에서 나는 무력하게 패배를 선언하고 다시 <데미안>속 ‘데미안’을 들여다본다. 나와 완전히 닮아 있는,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데미안을.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sprenown 2017-11-01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번 이상의 데미안 독서. 하나의 책을 20번 이상이나 읽는다.. 대단합니다! 좋은 책은 이렇게 읽어야 하는데..

짜라투스트라 2017-11-01 11:32   좋아요 1 | URL
아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되네요^^

cyrus 2017-11-01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번의 독서도 대단하지만 그 반복적인 독서 후에 느낀 생각을 글로 정리하느라 수 차례의 퇴고를 거쳤을 짜라투스트라님의 글쓰기가 더 대단합니다. ^^

짜라투스트라 2017-11-01 22:02   좋아요 1 | URL
아 감사합니다.^^ 그냥 제 생각을 글로 쓴 건데 너무 좋게 봐주셨습니다.ㅎㅎ
댓글저장
 

북플과 내 컴퓨터의 차이가 크다.

사진을 찍어 그 차이를 이렇게 남겨본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yrus 2017-10-23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고 싶으면 컴퓨터로 접속해요. 글의 처음과 끝 부분을 한눈에 다 보여서 좋아요. 북플은 글의 처음만 보여요. 터치해서 스크롤을 내려서 보면 좋겠지만, 스마마트폰은 긴 글을 정독하기가 불편한 환경이에요. ^^

짜라투스트라 2017-10-23 15:5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댓글저장
 

토요일 아침. 눈을 뜬다. 꿈에서 낯선 존재와 슬프고 아름답고 기쁜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머리속에 부연 안개가 낀 것처럼 명확하지 않다. 금요일 밤에 <1984>를 가지고 독서토론을 해서 '빅브라더'가 나오고 감시사회에 시달리는 악몽을 꿀 것도 같았는데 다행이다. '줄리아한테 하세요! 줄리아한테! 제게 하지 말고 줄리아한테 하세요! 그 여자한테 무슨 짓을 하든 상관없어요.'라거나 '두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싸움은 끝났다. 그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그는 빅 브라더를 사랑했다.'라거나 '전쟁은 평화/자유는 예속/무지는 힘'이라거나 '그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먼지가 쌓인 탁자 위에 손가락으로 다음과 같이 썼다./2+2=5' 같은 일들이 꿈속에서라도 일어나지 않아서.

 

 

문뜩 <1984>모임을 하다가 내가 얘기를 꺼낸 안토니오 그람시가 떠오른다. 내가 잘못 발음해서 다른 분이 여러 말들을 적는 스케치북에 그람씨라고 잘못 적기도 했던 그람시. 국가의 지배계층이 국민과 대중들의 자발적 복종을 얻기 위해 언어와 문화를 이용한다는 문화적 헤게모니 전략을 이야기했던 이 이탈리아 사상가의 이름을 나는 왜 말했던가. 명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권력과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말했던 것 같다. 생각을 하다보니 그람시라는 이름의 흔적이 서서히 내 머릿속에서 지워져간다.

 

 

앉아서 독서 노트를 꺼내든다. 독서 노트에 미처 다 적지 못한 <몬스트러몰로지스트3:피의 섬>과 관련된 글들을 적기 시작한다. '소년이 성장한다'라는 말로는 이 책을 다 설명하지 못한다. 소년은 성장한다. 물론 일반적인 의미의 성장과는 다르게. 소년은 괴물학자를 따라다니며 무수한 괴물들을 봤고, 괴물과 사투를 벌이는 괴물학자와 괴물보다 더 괴물같은 인간들을 만나며 내면의 어둠을 들여다보며 성장한다. 소년이 바라본 내면의 어둠. 그곳에는 괴물이 산다. 근데 괴물의 얼굴을 바라보니 소년의 얼굴이 아닌가. 베어 미트 웅게오르에른 켐프트, 마크 추젠, 다스 에어 니히트 아바이 춤 웅게오이어 비르트. 괴물과 싸우다 괴물이 되지 말라는 니체의 '선악의 저편'에 나오는 말들이 소년의 귓속을 맴돌며 소년은 자신이 어느새 괴물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괴물로의 성장. 어른들이라는 괴물이 만든 이 괴물의 형상을 탐구하는 게 괴물학자라는 의미의 '몬스트러몰로지스트'라는 책이 말하는 게 아닐까.' 공책에 글을 다 쓰고 나니 근처에 거울이 보인다. 거울 속에 '나'라는 인간이 있다. 자세히 보니 괴물이 보인다. '괴물 같은 건 없어. 오직 인간만 있을 뿐이지.'말처럼.

 

 

토요일날도 독서모임이 있어 모임책인 <노 임팩트 맨>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뉴욕 한복판에서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1년 동안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 저자의 악전고투가 기록된 책을 읽고 있자니 재미라는 감정이 찾아온다. 선생님처럼 나서서 '환경을 지켜야 한다'라고 당위성을 주장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직적 살아온 삶을 통해서 독자를 설득하는 책의 힘은 막강하다. 삶으로서 설득하는 데 어찌 당하지 않으랴. 지나온 내 삶을 들여다보니 얼마나 환경에 악영향을 줬는지 후회가 된다. <노 임팩트 맨> 모임에 나가는 김에 오늘부터 며칠간이라도 환경에 적은 영향을 미치는 '리럴 임팩트 맨'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한다. 물병과 손수건을 챙겼다. 일회용품 안쓰고, 엘리베이터 안 쓰고, 대중교통 이용하기로 결심한다. 처음에는 잘 지켜지나 싶었다. 그런데 살펴보니 물병이 페트병이다. 아뿔싸! 잔돈이 필요해서 편의점에 필요해서 물건을 사서 잔돈을 얻으려고 한다. 살게 있을까 싶어 편의점에 있는 물건들을 보니 거의 전부가 일회용품이다. 헉! <노 임팩트 맨>을 읽기 전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보이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이 프로젝트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노 임팩트 맨>을 가지고 떠들다보니 뒤에 약속했던 또다른 모임 시간을 훌쩍 넘겼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당황하며 길을 나선다. 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하니 이미 모임이 끝났다. 미안한 마음에 그분들을 따라나서서 같이 밥을 먹는 곳을 찾아갔다. '문명이 붕괴'한 것도 있지만 그전에 내 멘탈이 붕괴된 상황.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사람들이 환경에 무모하게 가하는 피해, 기후변화, 적대적인 이웃, 우호적인 이웃의 지원중단 및 지원감소, 한 사회에 닥친 문제에 대한 주민들의 반응 같은 요소들이 문명의 붕괴를 이끌어낸다고 주장하며 다양한 문명들의 붕괴의 양상과 붕괴되지 않은 문명들에 대한 얘기를 한 뒤에,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며 책을 끝낸다. 800페이지에 육박하는 책의 끝이 희망으로 끝나니 그리스 신화 속 판도라가 된 기분이다. 분명 희망은 있는데 그 희망은 상자 속에 있는 느낌이랄까. 친구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밥도 못 먹고 벽돌책 <문명의 붕괴>를 가방에 넣고 친구가 기다리는 곳으로 향한다.

 

 

시외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기로 한다. 심야 버스가 되기 전의 막차라서 사람들이 버스에 가득하다. 자신이 버스에 타지 못한다고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화를 내며 신고하니 어쩌니 하며 떠들어대는 한 나이든 남자의 모습이 버스 문옆에서 어른거린다. 눈을 감고 생각해본다. 자연 앞에서 한낱 미물에 불과하며, 우주라는 거대한 시공간 앞에서 아주 미약한 시간밖에 살지 못하는 우리는 언제나 자기가 옳다고 믿고 있을 확률이 높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포함해서. '어리석음'이라는 표현이 여기에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나의 어리석음, 보편적인 인간들의 어리석음, 버스 옆에서 떠들다가 다른 승객들에게 욕먹는 저 인간의 어리석음. 그 어리석음들이 모여서 인간의 삶을 형성한다면, 우리의 삶은 '어리석음'에서 '어리석음'에서 건너다니는 것들이지 않을까. 아직 다 읽지 못한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아연 소년들>이 머리 속으로 흘러들어온다. 이념의 색채로 무장하며 시작된 구소련의 '어리석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무수한 사람들의 삶을 파괴한다. 이념을 믿어서, 군인을 동경하여, 돈없고 빽없어서 같은 저마다의 사연을 간직한 수많은 이들의 삶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손을 통해 다양한 목소리로서 떠다니며 파괴된 삶을 증언하는 책은 가슴 아프고도 처연하다. 전쟁이라는 무시무시한 거대한 '어리석음'의 늪에 빠진 이들이 주는 슬픔에 가슴이 저릿하다. 슬픔에 빠져있다 정신 차리고 주변을 보니, 욕먹고 버스도 못탄 채 신고하러 떠나는 나이든 남자와 겁먹은 버스 기사 아저씨와 버스 기사 아저씨를 응원하는 동료 버스 기사 아저씨들의 모습이 보인다. 스베틀라나가 알렉시예비치가 말하는 아연관의 형상이 갑자기 떠오른다. '헬리콥터에 올랐다... 하늘에서, 미리 준비해놓은 수백 개의 아연관들을 보았다. 아연관들은 햇빛을 받아 아름답고도 무섭게 빛났다.' 우리네 삶이란 저마다의 아연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아연관이 아니라는 어리석음을 간직한 채. 버스는 출발하고 나는 집으로 향한다. 하루동안의 피로가 몰려들어 잠이 온다. 잠시 눈을 감아본다. 2017년 10월 21일이하는 낯선 하루는 그렇게 막을 내린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짜라투스트라 2017-10-22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이미지 빼고 다시 올리니 다 올라가네요^^;;
댓글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