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해서 오늘 글을 써봅니다. '짜라의 오늘의 책'이라는 제목으로요...

뭔가 딱히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오늘 제가 읽고 있는 책에 대한 제 생각을

짧지만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황인찬 시인은 이동진의 <빨간책방>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겁니다.

저 팟캐스트에 황인찬 시인이 나오는 방송을 듣고 한 번 읽어봐야지

하고 먼저 읽은 게 <구관조 씻기기>였습니다.

예상대로 쉽게 읽히지는 않더군요. 뭐라고 말할 수 없는 감흥을

느꼈다고 해야할까(그게 뭘까요??^^;;)

쉽게 읽히지 않지만 뭔가가 내 머릿속에서 어른거리더군요.

순간순간 번뜩이는 이미지나 심상도 있고.

개인적으로 시를 읽을 때 시를 완벽하게 이해한다는 걸 포기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시집을 읽는 성향의 사람으로서 뭔가의 이미지나

심상, 어떤 좋은 구절에꽂히면 그것 자체로 좋다고 여기며 읽는데요,

<구관조 씻기기>는 총체적인 이해보다는 순간순간의 시에 대한

느낌이 좋은 책에 가까웠습니다.

<희지의 세계>도 <구관조 씻기기>와 비슷했습니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냥 읽다보면 뭔가가 좋아지는 기분이라고 할까...

확실히 <구관조 씻기기>와 달라진 느낌인데 그게 뭔지도 잘 모르겠고...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을까요??^^;;)

뭔지 모르지만 '그 뭔지 모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며

시집을 덮습니다.

무책임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이 시집도 '알 수 없음'을

'알 수 없어서 좋음'으로 여기는 독서를 했다고 여길 생각입니다.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수 없으니까요.^^;;;

*참고로, 저는 해설을 읽어도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쩔 수 없어서 해설도 시처럼 그냥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그게 좋은지 나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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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확실히 쉽게 쓸 수 있는 한 쉽게 쓰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생각이 쉽게 표현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 생각 자체가 나쁜 것이거나 반민중적인 것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어렵게 표현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생각이 이 세상을 억압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생각이 억압을 받고 있다고 해야 옳다. 어렵고 까다로운 글보다 간단명료한 구호 투의 말들이 사람들을 더 억압해왔던 예를 우리는 너무 많이 보아왔다.

...

민중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 지적 상태와 정신 상태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물론 그 말도 고정된 것이 아니다. 어려운 말은 물론 지식인이 만들어내고 학문이 만들어낸다. 학문의 어떤 부분에 어려운 말을 많이 써야 한다면 그 부분이 민중과 멀어지는 것이 사실이겠으나, 그 학문 전체를 놓고 본다면 민중과 만나는 부분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민중과 멀어진다고 해서 그 부분을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실, 사람을 억압하는 것은 자각되지 않는 말들이고 진실과 부합되지 않는 말들이고 인습적인 말들이지, 반드시 어려운 말이 아니다. 어려운 말은 쉬워질 수 있지만, 인습적인 말은 더 인습적이 될 뿐이다. 진실은 어렵게 표현될 수 있고 쉽게 표현될 수도 있다. 진실하지 않은 것도 역시 마찬가지다. 게다가 억압받는 사람들의 진실이야말로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것에 속한다. 장 주네는 "자신이 배반자라고 여겨질 때 마지막 남아 있는 수단은 글을 쓰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의미하는 바도 아마 이와 관련될 것이다.(273~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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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의 비판:

그런 나에게 ‘찬양,고무죄’라니…
xx님의 위악에 숨은 선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부흥회’라는 돌팔매질은, 책을 읽을 수 있었음에도 일부러 '한 자'도 읽지 오지 않은 이가 책을 가슴으로 읽어 온 사람들에게 할 짓은 아니었다고 본다.

돌을 던지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비판적 이성에 대한 강박에서가 아니라 진솔한 자기 성찰에서 비롯되길, 인문학이라는 동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진언한다. 그런 점에서 xx님은 끝까지 고집을 피웠어야 했다. 사회자의 호혜주의(?)에 영합하여 자리를 옮길 것이 아니라 밥만 먹고 모임은 참석하지 않겠다는 처음의 고집을 끝까지 피웠어야 했다.


나의 응답:

1.xx님, 오해가 있는 듯하네요.^^;; 비겁하지만 변명을 조금 해보겠습니다.
일단 제가 책을 한 자도 안 읽은 이유는, 전혀 모임에 나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ㅎㅎㅎ 모임에 나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한 글자가 아니라 아예 책을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모임에 왜 왔느냐 물으신다면, 원래 부산에 나갈 예정이 없었는데, 우연히 부산에 나가게 되어 한 번 나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나간 것에 불과합니다. xx님 말대로 고집을 부려서 안 나가거나 아예 모임에 참석하지 않아야 했는데, 제가 변덕을 부려서 샘들에게 피해를 끼쳤네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죄를 드립니다.


2.

그런데, 참석할 필요가 없는데 굳이 참석한 것에 대해서는 사죄하지만, 찬양이라고 비판한 것에 대한 비판은 받아들이기가 힘드네요.
책을 읽고 세상을 떠난 한 어른에 대해서 애도하는 것은 좋습니다. 충분히 그렇게 해야 하고 할 필요도 있죠. 애도 자체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임에 참석한 모든 이가 애도를 해야 하나요? 우리가 세상을 떠난 어른에 대한 애도로만 그 시간을 채워야만 하는 건가요? xxx에 대해 잘 모르거나 책을 재미없게 읽거나 세상을 떠난 어른에 대한 애도에 깊이 공감하지 못하는 이들은 뭘 어떻게 해야하나요? 그렇게 못한 사람들은 애도를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아야 하는 건가요? 아니면 그 자리의 분위기의 끼지 못해서 쥐 죽은 듯 가만히 있어야 하는 건가요? 모두가 한 방향을 바라보고 따라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건가요?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얘기를 하고, 다른 말을 하면 안되는 건가요? 아니, 다른 말로 해서 그런 식의 주장이야말로 파시즘과 뭐가 다르죠?? 왜 모든 사람이 그 시간 내내 애도를 해야 하는 건가요? 기본적으로 세상을 떠난 이에 대한 예의를 지키고, 안타까움을 표시한 다음에는 다른 말을 할 수도 있는것 아닌가요? 그런데 왜 다른 생각, 다른 주장, 다른 말을 하면 안 되죠?
조금 입장을 달리 보죠. 어떤 선입견 없이 그날의 시간을 되돌려보세요. 모두가 비슷비슷한 말을 하는 시간 속에서 그 시간의 분위기에 동조하지 못하는 이는 그 시간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런 사람에게 그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을까요? 제발 부탁이니, 감정과 더불어 이성을 가동해서 한번쯤 생각해보세요. 책을 읽은 우리의 감정은 소중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감정만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이의 감정도 소중합니다. 나만큼 다른 이의 감정도 소중합니다. 그러니 제발 부탁하는데 자신들의 감정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하지 마세요.
그리고 가슴으로 읽은 사람에게 할말이 아니라고 하는데, 왜 책을 가슴으로만 읽어야 하나요? 책은 가슴과 더불어 머리로도 읽어도 되는 것 아닌가요? 마음으로 읽지 못한 사람은 가슴으로 읽은 사람들 때문에 아무말 못하고 조용히 있어야 되나요? 가슴으로 읽지 못하는 것이 독서 모임에서 '죄'가 되는 건가요? 가슴으로 읽지 못하는 죄를 저지르면 입다물고 가만히 있다가 모임을 떠나야 하는 건가요? 그건 너무 폭력적인 발언 아닌가요? 제 말이 폭력으로 들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제 말이 폭력적이라고 해서 저한테 하는 말은 폭력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나요? 앞으로 가슴으로 읽지 못하면 입다물고 가만히 있겠습니다. 죄를 저지른 사람은 죄를 지은 대가로 벌을 받아야 하니까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게 과연 죄일까요?
하나 더. 제가 여러분들에게 '죄'를 저질렀나고 지적했나요? 저는 그런 말을 한적이 없는데요.^^ 일단 말을 하는데 있어서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정확성입니다. 어떤 사람이 한 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에 따라 말해주세요. 부정확한 말에 근거한 발언은 불필요한 오해를 초래합니다. 제발 그런 일은 하지 맙시다.


3.

비슷비슷한 발언을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에게, 비슷비슷한 발언을 하지 않는다고, 자신들의 감정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비판을 하는데, 그 비판은 어떤 비판일까요? 동일성에 대한 강압은 우리가 피해야 할 것이 아닌가요? 이건 제가 종종 듣는 비판으로서(^^;;) 그말을 돌려드릴께요. 말로는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하면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태도를 왜 보이지 못하는가?? 저에 대한 이 비판은, 항상 제 삶의 화두중 하나로서 마지막까지 제가 짊어저야 할 짐입니다. 자, 저는 저에 대한 이 비판을 그날 모임에 참석한 이들에게 들려드리고 싶네요.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진짜 다양성을 인정합니까? 아니면, 다양성을 인정한다는 말을 말로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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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29 0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문제 로군요..확실히.
앞의 상황을 정확히 모르니 답답한데..
다양성에 대한 말은 정말 숙고해볼 여지가 있어보여요.
척만 하는가 ㅡ마지못해 따라가며 갈등하는가...하는것에..

짜라투스트라 2016-02-29 20:04   좋아요 1 | URL
네, 다양성과 그것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쉽지 않은 게 현실이죠.^^

cyrus 2016-02-29 1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대방의 말에 자신의 주관적 생각이 개입되는 순간, 부정확한 해석이 나옵니다. 그런데 자신은 사실에 근거한 그럴싸한 해석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면 진짜 오해가 발생합니다. 인터넷 공간에 이런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상대방의 의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사소한 오해가 생기고, 갈등이 발생해요. 저도 상대방의 글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해서 상대방을 난감하게 만든 상황을 연출한 적이 있어요. 상대방의 글을 자기확신에 가까울 정도로 멋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저도 사람인지라 언젠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16-02-29 20:05   좋아요 0 | URL
네, 보이지 않는 인터넷 공간이니 더욱 더 조심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특히 인간의 뇌라는 게 어찌나 불완전한지... 자신의 뇌를 맹신하지 말고 계속해서 살펴보는 게 반드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적 상황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아직까지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은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한 권만 읽고 다 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내가 진짜로 궁금한 건 그 한 권만 읽고 어떻게 그렇게 쉽게 저자의 생각에 동의하고 그 저자의 말에 적극적 지지를 보낼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진짜 그 역사적 사건이 궁금하다면 그 한 권이 아니라 다양한 책들을 읽고, 그 외의 다양한 자료들을 접해보고 판단하는 게 옳지 않을까...

단지 주류적 사고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이 생각과 어떤 부분이 맞아 떨어진다고 해서 그 저자의 말이 무조건 옳다고 볼 수는 없다.

내가 ~~님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거다. 한국에서 그 시각은 주류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 옆나라에서는 그 시각이 주류다. 그 나라에서는 한국의 시각이야말로 비주류다. 그러니까 그 저자의 시각은 한국에서 비주류일 뿐이지, 옆 나라에서는 아주 뻔하디뻔한 시각이라는 점이다. 뻔하디뻔한 시각이라는 점은, 당연하게도 어떤 정치공학적인 의도도(책을 쓴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숨어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이 글을 그 분은 보지도 않을 테지만(혹여 본다고 해도 나한테 좋은 말을 할 분은 아니겠지만) 혹여 본다면 이 부분에 대해서 아주 찐하게 얘기할 생각은 있다. 아마 안 되겠지만...

아~ 한숨이 나온다. 역시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반드시 자신의 인식이 넓어지는 것은 아니다. 진짜로 자신의 인식이 다양해지고 풍부해지고 싶다면, 자신이 읽는 책의 영역을 다변화시키거나 자신의 인식틀을 벗어날만한 책이나 그외의 것들을 접할 필요가 있다.

내가 읽는 책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다. 내가 읽는 책으로 들여다본 것이 세상의 전부도 아니고, 어떤 사건의 전부도 아니다. 내가 읽는 책은 세상의 일부이자 어떤 사건의 일부이자 어떤 상황의 일부를 담을 뿐이다. 책을 읽는 이들은 명심해야 한다. 책을 읽는 것을 통해 세상의 전부를 아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건이나 상황의 전부를 알 수 없다는 것을. 그래야만 어떤 틀에 갇히거나 쉽사리 판단 내리거나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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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2-19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 두고 얘기하는지 알면 더 좋을텐데요.^^

짜라투스트라 2016-02-19 19:31   좋아요 1 | URL
어떤 역사책의 서평을 보고 안타까워서 쓴 글입니다.^^ 나름 유명하다고 할 수 있는 분인데, 책의 논리를 그대로 맹신하며 책에 대한 찬가를 외치는 것이 너무 안타깝더군요. 다른 나라의 틀로 보면 별다를 것도 없는 책인데...

[그장소] 2016-02-19 19:43   좋아요 0 | URL
아...얼마전 비슷한 맥락의 글을 다른 곳에서 다른분 (작가 ) 이 쓴 경우를 본 적 있는데...
그런 사례인 모양 입니다.
역사에 관한 ㅡ

cyrus 2016-02-19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님 의견에 반박하는 댓글을 다는 일은 어떻습니까? 제가 짜라투스트라님과 ~~님이 서로 싸우도록 부추기는 것이 아니라 그 분이 자신의 의견이 잘못됐음을 스스로 인정할 수 있도록 대화를 나누는 것입니다.

특정 분야의 책을 여러 권 읽어보고, 올바른 지식만 골라내서 습득하는 방법은 좋은데, 여기에 투자해야 할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그래서 시도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실행이 어렵죠. ^^

짜라투스트라 2016-02-19 19:34   좋아요 1 | URL
제가 경험한 바로는, 주로 이런 식으로 반박을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서 공격을 퍼붓는 경우가 많더군요.ㅎㅎㅎ 더군다나 저렇게 서평에 맹신의 흔적이 느껴진다면 더욱 더 위험해지죠. 감정이 지배되어 공격할 확률이 많거든요. 그래서 저는 그냥 직접적으로 비판하는 것보다 이렇게 간접적이고 모호한 방식으로 글을 쓰는 게 마음 편합니다. 얼굴도 보지 않는 인터넷 상에서 살아가면서 제가 나름대로 익힌 방식이라고 할까요??^^;;

cyrus 2016-02-19 19:39   좋아요 2 | URL
그렇긴 하죠. 난 싸우려는 마음도 한 점 없이 대화를 걸었는데 상대방이 적대적으로 나오면 답이 없죠. 내 감정을 자극해도 거기에 대응하면 진짜 감정 싸움으로 변하죠.. ^^;;

그래서 저도 짜라투스트라님처럼 불만스러운 점을 공개글로 써서 불편한 감정을 조금이나마 풀어봅니다.
 

1. 1씨(작은 악마는 자기 마음대로 숫자로 사람들을 부른다.)는 과거에 내게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나는 그의 유머러스하고 힘있고, 쉽게 이해되는 문장과 글을 좋아했다. 하지만 최근의 글에서 1씨는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1씨는 마치 마법의 만능열쇠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자신의 이론적 틀로 세상을 마구 해석하고 그것이 모든 것인 것처럼 얘기한다. 나는 그게 황당했다. 어떻게 하나의 이론적 틀로 세상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는가? 그게 가능하기는 한가? 더구나 그 이론적 틀이란 게 별다른 과학적 근거가 없는 것인데...(악마가 더 나아가려는 걸 막느라 정신이 없다^^;;)

2. 2씨는 최근에 자신이 바뀌었다고 얘기한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그는 달라진 게 없다. 말하는 내용이 바뀐 것은 맞다. 하지만 2씨가 말하는 태도는 바뀐 게 전혀 없다. 2씨는 과거에도 그렇고, 지금에도 계속 비판하고 비판하고 비판하고 또 비판한다. 이게 바뀐 건가? 태도는 바뀐 게 하나도 없는데... 진짜 바뀌었다면 이제 비판하지 말고 조용히 입 다물고 사는 게 좋을 것 같다. 그 정도는 해야 진짜 바뀐 거 아닌가? 나는 진짜 2씨에게 말하고 싶다. 그냥 많은 자료를 모아서 종합하고 거기에 외국의 이론들을 덧붙여서 책을 만들지 말고, 자신만의 이론을 만들고 그걸 바탕으로 세상을 파악하는 자신의 창조적 역량이 집결된 책을 한 권이라도 만들라고. 내가 2씨에게 바라는 것은 딱 그거 하나다.(작은 악마를 다시 진정시키며... 나는 그래도 2씨가 과거에 했던 일의 의의는 인정한다는 말을 덧붙인다.)

3. 3씨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앞의 두 인물과는 다르다. 나는 3씨가 쓴 책 중에서 가장 유명한 책을, 두 달 넘게 꼼꼼하게 읽고 파고드는 공부 모임을 한 적이 있다. 3씨가 책에서 비판한 한 철학자의 철학을 전공으로 삼은 연구자와 다른 인문학 전공자와 같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의외로 이 책과 이 인물에게 비판할 구석이 꽤 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그 이후로 나는 3씨의 책을 읽을 때마다 삐딱하게 비판하려고 노력하고, 비판할 거리를 찾아내면 즐거워한다. 여기에 그 비판의 흔적들을 적어본다. 3씨가 모 책에서 현대사회는 부정성보다는 긍정성의 과잉이 문제라고 얘기하며, 부정성을 강조하고 그것에 포커스를 맞춘 철학자들을 사정없이 비판한다. 그런데 과연 긍정성의 과잉만이 문제인가? 부정성은 사라져버렸는가? 그렇지 않다. 사회를 둘러보면 부정성의 흔적은 언제나 보인다. 뭐뭐 하지마라~~, 뭐뭐는 잘못됐다~~로 대변되는 부정성은 긍정성 못지 않게 아직도 넘쳐난다. 지나친 선택의 자유도 문제가 되지만, 어떤 것을 하지 못하게 막는 부정성의 힘도 아직 막강하다. 한 사회의 문제란 건 3씨의 말대로 긍정성의 과잉에 따른 현상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그건 긍정성의 과잉에 따른 문제이기도 하며, 부정성에 의한 것이기도 하고, 인간과 인간 사회에 내재한 전근대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렇게 복잡하고 다양하고 다층적인 사회를 오직 긍정성의 과잉으로만 파악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식의 사고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불과하다. 

이제 3씨의 다른 책을 비판해보자. 3씨는 모책에서 지나치게 사고를 강조하며 행동을 강조하는 현대의 철학자들을 사정없이 비판한다. 그런데 나는 3씨의 그런 행동이야말로 3씨가 다른 책에서 얘기하며 비판한 병리학적인 사고의 전형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히스테리의 전형. 3씨는 행동을 강조하는 철학자들에게 과민반응하며(이 지나친 과민반응이야말로 히스테리의 전형이다.) 사고가 중요하다고 계속 강조한다. 그에게는 행동의 강조가 불결한 것인가 보다.ㅎㅎㅎ 사고가 중요한 만큼, 행동도 중요하다. 왜 사고가 행동보다 중요하다고 계속 얘기하는가? 사고만 중요한가? 행동은 어떤 가치도 없는가? 진짜 그럴까? 예를 들어보자. 눈앞에 누군가 쓰려졌다고 가정하자. 그럴 때는 사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사고 하면 늦다. 누군가 쓰러졌는데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사고하고 있으면 쓰러진 그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초래할 수 있다. 그때는 응급차를 부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응급조치를 하는 '행동'을 해야한다. 그래도 사고가 더 중요하다고? 나는 사고보다 행동이 더 중요한 상황의 무수한 리스트를 적을 자신이 있다. 물론 나는 사고보다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사고가 중요한 만큼, 행동도 중요하다고 얘기하려는 것이다. 이게 균형 잡힌 시각이 아닐까?

또 3씨에 대해 말하고 싶은 게 있다. 3씨는 계속 고대 사상가들의 사고를 긍정하며 강조한다. 나는 일부분은 수긍한다. 고전과 고전 속에 들어 있는 사상이나 철학이 충분히 현대에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 사상가들의 사상을 현대 철학자들보다 우위에 두려는 행동은 위험하다. 왜냐하면 고대 사상가들의 사상이나 철학이란 건 고대의 그 철학자들이 살아 있던 특정한 시대의 맥락 속에서 형성되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맥락이 다르고, 변화한 게 많은데 무턱대고 그 사상을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현대 사상가들의 철학이나 사상이 우리 시대에 더 잘 적용될 수 있다. 동성애를 최고의 사랑으로 여긴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들의 사랑관을 우리 시대의 사랑관에 무턱대고 적용할 수는 없는 것이고, 역시 여성을 인간으로 여기지 않은 상황에서 만들어진 고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을 우리 시대의 철학에 무턱대고 적용할 수는 없다. 물론 앞에서도 말했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적용 가능하고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부분일 뿐이고, 전체가 될 수는 없다. 시간의 간극이란 건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동시대인에게 가혹한 인간 특유의 성향이 나는 여기서도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3씨는 자신이 아주 평범한 인간들의 성향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걸 깨닫기는 한 걸까?( 할말이 더 많지만 나는 작은 악마의 말을 줄이기로 했다.)

 

4씨,5씨도 있다. 아, 진짜 이 인간들만 생각하면 혈압이 오른다. 욕밖에 할게 없어서 이 인간들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도록 하겠다. 위의 1,2,3씨는 4씨,5씨에 비한다면 양반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이제 이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   

 

이 정도 했으면 내 속의 작은 악마도 만족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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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6-02-19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글은 작은 악마가 쓴 글이군요. ^^
가끔 저도 작은 악마를 꺼내고 싶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16-02-19 19:26   좋아요 0 | URL
네, 가끔씩 작은 악마를 꺼내어 얘기를 듣는 게 정신건강에 좋은 것 같습니다.^^

별족 2016-02-19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미 저자,들인데, 이름을 적시하면 명예훼손이라도 되는 건가요?

짜라투스트라 2016-02-19 19:28   좋아요 0 | URL
음, 명예훼손은 아닐지라도 뭔가 제가 바라지 않은 일들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이미 몇 번 경험해본적도 있어서^^;;) 이름을 굳이 적지는 않았습니다. 조금 답답할 수는 있는데, 제 나름으로는 이름을 적지 않고 말하는 게 어떻게 보면 더 자유스러울 수 있다 여겨져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