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불꽃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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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M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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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푸른 불꽃으로 타오른다는 건, 분노가 붉은 불꽃으로 타오를 때보다 훨씬 더 강력한 분노로 불타오른다는 얘기야. 만약에 <푸른 불꽃>이 왜 분노가 푸른 불꽃으로 타올라야 하는지 제대로 설명 못했다면 이 소설은 그저 그런 소설이 됐겠지. 하지만 말이야, M. 이 책은 적어도 내게는 제대로 그 분노가 왜 푸른 불꽃이어야 하는지 설명했어. 그래서 나는 망설일 없이 이 책에 별 다섯 개를 주었지. 언제나 책의 감동은 지극히 주관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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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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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나쓰메 소세키
학문은 ... 이를 통해 진정한 인간이 되는 게 목적이다. ... 선과 악의 경계를 이해하고 어리석음, 참과 거짓, 바름과 사악함을 제대로 판별해내는 것이 바로 학문의 목적이다.(p.21)
세상의 단 한 사람의 공정한 인격을 잃을 때, 세상은 그만큼 빛을 잃는다.(p.60)
내 붓은 도를 싣는다. ... 백지가 인격이 되어, 그 바깥으로 넘쳐흐르고 뛰어오르는 문장이 있다면 바로 도야의 문장이다. 그럼에도 세상은 변함없이 귀족, 거상, 박사, 학사의 세상이다. 부속품이 본체를 밟아 뭉개는 그런 세상이다.(p.64~65)

이 소설이 진짜 소세키의 소설이 맞나? 다 읽고 다시 한번 책표지를 들여다본다. 버젓이 소설을 쓴 이가 나쓰
메 소세키라고 찍혀 있다. 진짜 소세키의 소설이 맞구나. 그렇다면 이 소설은 소세키 답지 않은 소세키 소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풍자와 희화화, 익살과 조롱의 언어로서 세상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세상의 구조와 지배계층을 비판하는 정치적 언어가 소세키의 소설에서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웠다.

학자는 돈이 없는 대신에 사물의 이치를 이해하고, 상인은 그런 이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대가로 돈을
법니다.(p.187~188)
돈으로 가치가 결정된 사람은 돈 이외의 일에는 무능할 수밖에 없다.(p.189)
돈 이상의 취미라든가 문학이라든가 인상이라든가 사회라든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부자들이 학자에게 탄복하지 않으면 안 되죠.(p.191~192)

하지만 역시 소세키는 소세키. 가난하지만 고고하게 세상과 불화하며 자신의 굽히지 않는 비판적 사고를 당당
하게 드러내는 인문학자 시라이 도야의 이야기 반대편에는 도야기 열심히 비판하는 상류층의 생활을 즐기는 인물인 나카노 슌타이의 삶이 놓여져 있다. 소세키는 도야의 과감한 언어를 가감없이 드러낸 것처럼 슌타이의 삶도 '비인정'의 방식으로 담담히 묘사한다. 거기에는 소설가로서의 소세키의 성향이 잘 반영되어 있다. 도야의 삶의 방식으로 슌타이의 삶의 방식을 가치판단하지 않고, 슌타이는 슌타이의 삶의 방식대로, 도야는 도야의 삶의 방식대로 그려져 있다. 물과 불처럼 섞이지 않은 것 같은 두 삶의 방식은 두 세계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년 다카야나기를 통해서 섞이지 않지만 '함께' 하는 구성으로 묶여서 소설이 된다.

자신의 움직임은 먹는가 먹히는가의 움직임이다. 따뜻한 봄날의 작용이 아닌 냉기 도는 가을의 운행이다.(p.77)
학생은 광명을 명심해서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광명에서 흘러나오는 취미를 현실에서 이루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현실에서 이루기 위해서는 구애받지 말아야 한다. 구애받지 않으려면 해탈을 이루어야 한다.(p.92)

이 소설과 가장 유사한 소설은 <도련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과 불화하는 천둥벌거숭이 <도
님>이 유머러스한 분위기와 '기요'의 '도련님'에 대한 지속되는 사랑이라는 요소를 가지고 가면서 '웃음'과 '따뜻함'을 이끌어낸다고 한다면, 이 소설에는 저항의 언어를 외치는 도야와 방황하는 다카야냐기의 삶에 드리워진 고독과 외로움, 가난의 그림자가 스산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에게는 끊임없이 애정과 성원을 보내는 '기요'가 없다. 그들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선택한 길이, 그들에게 닥친 삶의 흐름이 그들을 그렇게 몰아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자신의 길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인간은 길의 동물이기 때문에 길을 좇는 것이
가장 존엄하다 생각합니다.(p.140)

현암사판 <태풍>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대로 이 소설을 다카야나기의 방황과 성장을 다룬 소설
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그의 얘기에 크게 공감한다. 동시에 이 소설이 초기에 썼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도련님>과 전기 3부작으로 불리는 <산시로>,<문>,<그후>를 이어주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풀베개>가 소세키 자신의 예술론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며 자기 자신의 예술적 지향과 자신만의 미학적 관점을 표현한 소설이라면, 그 뒤에 써진 <태풍>은 자신만의 미학과 예술론을 소설로서 구현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태풍>에처음으현된 소세키의 소설 미학은 <산시로>,<문>,<그후>를 거쳐서 인간 자신과 인간의 삶과 인간의 내심리에 집중하는 모습의 성숙된 형태로 발현된다. <태풍>의 방황하며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고, 친구인 슌타이의 과 자기 삶의 격차를 실감하는 다카야나기는 그런 관점에서 <산시로>의 성장통을 겪는 주인공인 '산시로'의 원과 같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진지한 것이다. 진지하기 때문에 심오하다. 동시에 사랑은 유희다. 유희이기 때문에 들떠 있다.(p.119)
성패에 관계없이 사랑은 일직선이다. 단지 사랑이라는 척도로 모든 것을 제단한다.(p.120)

하지만 <태풍>을 단순히 '이어주는 소설'로만 볼 수는 없다. 특히 <태풍>을 독특하게 만드는 건, 가난하지만 고고
게 자신만의 길을 걸으며, 세상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자신만의 정치적 성향을 말과 생각으로 쏟아내는 인문학자 시라이 도야이다. 그는 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의 시각과 관점으로 세상을 향해 신랄한 발언을 한다. 그는 거없이 얘기하고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걸어간다. 후회하거나 비관하거나 자조하는 것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이지 않는 캐릭터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태풍'같은 생각과 언행이 <태풍>을 소세키의 다른 소설과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게 만든다. 어쩌면 도야는 아직 자신의 소설을 제대로 구체화하지 못한 소세키 마음 속의 어떤 불같은 불만의 덩어리가 형상화된 인물이 아닐까. 마음 속의 짐 같은 그 덩어리를 토해놓고 나서야 소세키는 더 성숙한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인간이 타락할 때 다시 파란이 일게 됩니다. 파란이 일지 않으면 화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화석이 되기 싫으면 스스로 파란을 일으키는 겁니다. 이것을 혁명이라고 부릅니다.(p.182)

세간의 평가로만 놓고 본다면 <태풍>은 소세키 소설 중에서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다. 위에서 말한 것에 세간의
평가를 더해 보면 이 소설은 뒤의 작품들을 위한 디딤돌 같은 소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풍>을 이번지 두번 읽으면서 내가 떠올린 건, 이 작품은 '성숙'을 위한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소설은 '성숙'이나 '완성'을 위한 소설이 아니라 미성숙과 미완성을 위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성숙'이나 '완성'이라는 말이 아니라 '미성숙'과 '미완성'과 '혼란'과 '열정'과 '흔들림'이라는 말로 완성되는 소설이다. 미성숙과 미완성을 통한 완성. 완성도가 떨어진다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이 소설은 그 떨어지는 완성도 때문에 오히려 매력적인 소설인 것이다. 도야의 계몽적인 연설의 열정을부로 흡수할 수만 있다면, 다카야나기의 방황에 공감할 수만 있다면, 이 소설은 소설 자체가 가진 거침과 성글음과 불완전함의 힘으로 독자들을 소세키만의 '태풍의 세계'로 이끈다. 그것은 소세키의 완성된 소설들이 주못하는 거칠고 강한 힘의 매력이 존재하는 세계이다. 삶이 미완성이라서 매력적인 것처럼, 문학이 삶을 완벽하게 표현하지 못한 미완성의 장르라서 오히려 매력적인 것처럼 <태풍>은 미완성이라서 오히려 성글은 매력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것을 두번째 독서에서야 깨달고 나니 <태풍>이 진짜 '태풍'처럼 다가왔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 현암사판 소세키의 다른 소설들에서는 다시는 맛보지 못할 느낌이리라.

문학은 인생 그 자체입니다. 고통이 있고, 궁핍이 있고, 고독이 있고
, 무릇 인생길에서 만나는 곧 문학이고, 이런 것들
을 맛본 사람이 문학입니다. ...
다른 학문이 가능한 한 연구를 방해하는 것을 피해서 점점 인간 세상과 멀어지는 것과 달리 문학자는 자진해서 이 장애 속에 뛰어드는 것입니다.(p.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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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추는 거야. 왜 춤추느냐는 건 생각해선 안 돼.

의미 같은 건 생각해선 안 돼. 그걸 생각하기 시작하면 발이 멎어.

한 번 발이 멎으면 영원히 없어지고 마는 거야.'(무라카미 하루키의 <댄스, 댄스, 댄스> 중에서)

독서를 무수한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번에 독서를 책의 리듬을 타는 것에 비유하고 싶다. 즉, 자신만의 시대를 자신만의 삶으로 살아가던 독자가 책을 펼쳐 읽다가 책 특유의 리듬을 타는 것을 독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의 독서 이력에 이것을 적용해보자. 내가 책을 처음으로 열심히 읽던 시절에 나는 백지상태였기 때문에 어떤 책의 리듬이든 무리없이 포용할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게 맞는 책의 리듬을 찾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서 내게 맞는 책의 리듬만 맞춰 읽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의 독서는 어느 순간 내 자신의 경험 때문인지 혹은 내 지성의 질적인 변화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시 다양한 책의 리듬을 맞춰 최대한 포용하는 과정으로 변화되었다.(물론 모든 책의 리듬에 다 맞추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다양한 책의 리듬을 무리 없이 받아들였던 것이 '무지의 개방성' 때문이라고 한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다양한 책의 리듬을 받아들이는 것은 책의 다양한 리듬을 타는 것 자체가 재미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이 지의 개방성이 빚어내는 책의 리듬 타기는 앞으로도 쭉 계속 될 예정이다. 하루키의 말대로 왜 그렇게 하는지 의식하지 않은 채, 리듬 타기 자체가 독서의 의미이자 가치이자 즐거움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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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실하게 말해보자. 고전은 분명 낡은 책이다. 이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고전은 결코 우리 시대의 우리 감각에 맞춰진 책은 아니다. 고전은 자신이 나온 시대상과 자신을 만든 이의 생각과 삶을 품안에 담고 있는 것이다. 다만 고전은 반드시 읽어볼만한 책이다. 그러니까 고전은 낡았지만 반드시 읽어볼만한 책이다. 낡았지만 우리 시대에도 충분히 유효한 책.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나만의 고전의 정의다.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있다. 우리가 고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 가에 대한 것이다. 먼저 고전에 대한 맹신을 거부해야 한다. 고전을 종교적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 그것이 무조건 옳고, 정당하며 그에 대해 비판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는 종교적 광신도의 태도와 다르지 않다. 고전에 대한 맹신과 더불어 고전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난과 비하 또한 삼가해야 한다. 이건 고전에 대한 반대방향의 맹신이다. 고전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고전 읽기를 무조건 거부하며, 고전의 가치를 지나치게 평가절하하는 것 또한 다른 의미의 광신인 것이다. 그러니 우리에게 남겨진 고전 읽기의 방향은, 맹신과 비하 사이의 길에 머물며 고전을 생생히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읽기이다. 그건 무조건적인 찬양과 비난 사이에서 때로는 고전의 가치를 몸으로 느끼며, 때로는 고전의 위험성을 자각하는 '고전과 나 사이의 생생한 대화과정'으로서의 고전 읽기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보여줘야할 고전 읽기의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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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우연히 고전을 읽고 얘기하는 모임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지인분을 따라서

그 모임에 나가봤다.

나가서 모임을 진행하시는 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머리가 알아서 그분의 얘기를 조목조목 반박하는 나 자신을 깨닫고

'아, 나는 이 모임에 못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이 얘기하시는 게 그 고전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이었는데,

왜 그렇게 끌리지 않던지...

그런데 나만 그런게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가라타니 고진의 <철학의 기원>에는 나와 유사한 경험을 한 가라타니 고진의

글이 나온다.


나는 10대 중반에 철학소년은 아니었지만 소크라테스, 데카르트, 칸트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자명하게 보이는 것을 근본적으로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제대로 읽지도 않을 때부터 그들은 내게 히어로였다. 하지만 이후 현대철학 책을 읽게 되자, 그들 대부분이 비판대상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내게는 그것을 반박할 만한 식견이 없었다. 다른 한편으로 그들을 옹호하는 담론이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이 표준적이었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 결과 나는 철학 자체를 회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문학으로 향했던 것이다.(p.11)

표준적인 해석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겠다는 얘기가 아니다. 나는 그저 표준해석에

매력을 느끼지 못할 뿐이다. 굳이 시간을 내어 나가서 그런 표준해석을 들을 필요를

못느낀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해석은 조금만 시간을 내어 찾아보면 내 스스로

알 수 있으니까. 아무래도 나는 책을 읽다가 조금 독특한 것, 다른 것, 특별한 것을

원하는 취향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 모임에 나가서 나의 취향을 다시한번 실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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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6-19 2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 사람은 자신의 해석이 반박당하고, 조금이라도 무시받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일 것 같습니다. 독서 모임을 참석할 때 본인 의견이 무조건 맞다고 여기고, 반박 의견을 무시하는 사람이 있으면 듣는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듭니다. 그런 사람 때문에 건전한 토론을 할 수 없어요. ^^

짜라투스트라 2015-06-19 20:03   좋아요 0 | URL
아, 맞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