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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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호메로스 

 

트로이 전쟁은 끝났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살아남은 그리스의 영웅들 대부분은 고생을

겪으며 어렵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전쟁이 아닌 일상으로서의 운명을 살아간다. 트로이

전쟁 내내 인간들의 세상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신들은, 과거만큼의 관여는 제하며 조용히

지내고 있다. 더 이상 전쟁의 법칙은 통하지 않는다. 지금 이 세계를 지배하는 건 일상의 법칙

이자 평범한 생활의 법칙이다. 여기에 치욕스럽게 살아남기 보다는 영광스럽게 죽기 원하는

영웅은 필요하지 않다. 필요한 건 죽기 보다는 살기 위해 힘쓰며 일상을 이루어나생활인들

이다. 여기서부터 <오뒷세이아>는 시작한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살아남았지만 유일하게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뒷세우스의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으로부터.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영웅 오뒷세우스에게 아직 일상의 법칙은 적용되지 않는다. 그는

초라한 행색이지만 여전히 영웅이다. 영웅의 성향을 가진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은, 자신의 영웅성을 실현시킬 절호의 기회이다. 호메로스는 이걸 놓치지 않았다. 그는

생활인이 되지 않은 영웅 오뒷세우스의 귀향 이야기를 몰락해가는 문학 장르인 서사시를

통해 들려준다. 영웅들의 이야기에는 아직도 서사시가 다른 어떤 문학 장르보다 적합하기 때문

이다. 하지만 오뒷세우스의 귀향 이야기는 <일리아스>와 다르다. 많은 영웅들이 등장

하고, 그들의 이야기가 마지막까지 이어지다가 결말에 미래의 영웅들의 활약상이 열려 있게

되는 <일리아스>와 달리, 오뒷세우스의 귀향 이야기에는 영웅도 한 명이고, 주도적으로 나서서

영웅을 돕은 신은 아네테 여신뿐이고, 영웅이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결말로서 준비되어 있다.

아무리 영웅의 귀향를 미루어도 그가 일상으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오뒷세우스가 돌아간 이후의 이야기가 현재까지 전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생각해볼때,

<오뒷세이아>의 결말은 서사시라는 문학 장르가 그리스의 문화적 전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예언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지막의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영웅성의 표출을 포기하고 

자신이 복수를 저지른 이들의 가족들과 아테네 여신의 중재로 평화롭게 화해하는 장면은 신들도

잠잠해지고, 영웅들도 일상으로 돌아온 세계에서, 영웅들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서사시라는 문학

장르가 사라지고 일상을 노래할 다른 문학 장르의 등장해야 함을 얘기한다. 그건 서사시라는

꿈이 깨졌다는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꿈이 깨진 걸 느낀 순간. 나도 일상으로 돌아가야 함을

깨달았다. 오뒷세우스라는 영웅과 함께한 백일몽의 끝에서,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나도 나 자신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여기가 호메로스의 두 편의 서사시와

함께한 모험의 끝이라고 되뇌면서.

 

*고대 그리스에서 서사시의 몰락은 교훈시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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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 리라이팅 클래식 13
강대진 지음 / 그린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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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모험과 귀향,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강대진 

 

책을 읽는 것에도 흐름이 있다고 한다면, 한번 흐름에 흘려들어간 이들은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흐름에 쓸려갈 수밖에 없다. 나도 흐름에 휩쓸려 아이스퀼로스,소포클레스,에우리피데스

의 비극과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극을 읽어 나갔고, 그것들을 다 읽자 <일리아스>까지 나아갔다.

멈추지 않는 흐름은 여기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나를 다시 <오뒷세이아>라는 영역으로 나가게

이끌고 있다. 그러나 <오뒷세이아>의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집에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러 곳

을 헤매고 다닌 것처럼, 나의 독서의 흐름은 쉽사리 내가 <오뒷세이아>라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용납하지 않고, 나로 하여금 <오뒷세이아,모험과 귀향,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라는 책의

영역을 모험하게 만들었다. 마치 바로 <오뒷세이아>를 읽는 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헤매고

다닌 영웅 오뒷 세우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듯이. 

 

흐름에 이끌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오뒷세이아,모험과 귀향,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라는

책의 영역을 모험하기 시작한 나는, 세이렌처럼 사람을 홀리는 매력은 아니지만 학교의 딱딱한

수업 보다는 더 나를 매혹하는 책의 저자 강대진 씨의 말에 끌려다니며 이 세계를 누볐다. 이미

<일리아스,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를 읽으며 그의 말투를 경험했기에, 부담감

느끼거나 홀리는 것 없이 저자가 쓴 해설과 <오뒷세이아>의 세계가 겹쳐진 <오뒷세이아,모험과

귀향,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의 영역을 순조롭게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는 <오뒷세

이아>가 치욕스럽게 살아있기 보다는 용감하게 싸우다 죽는 것을 원하는 영웅들의 세계이자 신들이 직접 인간의 전쟁에 관여하고 모순적인 행동을 저지르는 혼돈스러운 전쟁의  세계인 <일리아

스>의 세계와 다른, 죽기보다는 살기를 원하며 영웅보다는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원하는 이들

의 세계이자 신들이 세상에 거의 관여하지 않고 윤리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 일상성과 생존

이 화두가 되는 세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에 더 이상 영웅들의 이야기인 서사시는

설자리가 없었다. 여기에서 더 변화한다면 그건 서사시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필연적

으로 <오뒷세이아>는 서사시라는 문학 장르가 사라져가며 내지르는 최후의 비명이 될 수밖에 없

었다. <오뒷세이아> 세이렌의 비명보다 더욱 처절하고 매혹적인 사멸해가는 한 문학 장르의

마지막 불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오뒷세이아>읽기를 미루어 둘 수는 없는 법. 나는 이제 해설서가 아닌 진짜 <오뒷세이아>의 세계로 나아간다. 오뒷세우스가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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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러 민음사 모던 클래식 64
코맥 매카시 지음, 김시현 옮김 / 민음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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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슬러-코맥 매카시 

 

1. 

아마도 너는, 네가 <카운슬러>를 읽을 줄은 몰랐을 것이다. 너에게 코맥 매카시는 우울함과

어두움과 절망과 폭력과 죽음과 피와 미국적인 장광설이 난무하는 악몽 같은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그의 소설을 몇 권 읽고 '기분 더러워지는 경험'을 하고 다시는 그의 작품을 읽지

않으리라는 다짐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는 그 다짐을 깨고 <카운슬러>를 읽었다.

여기에는 진짜 '운명'이라는 말만큼 적합한 단어가 없을 것이다. 이 운명은 너에게, 운명이

너의 마음 속에 남긴 잔상들을 기록하라는 압력을 가했다. 너는 거기에 굴복해서 이 글을

쓰게 됐다. 그런데 이 글은 운명의 강요로만 쓰여진 것은 아니다. 너는 이 글을 쓰면서 너에게

남겨진 '악몽'의 느낌을 덜어내려는 의도도 가지고 있다. 운명이 강요했든, 자기 자신의 의도

때문이든, 일단 글을 쓰게 됐으니 너는 더 이상 멈출 수 없다. 너는 글이라는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 지금 당장 시작하라. 

 

2. 

책을 읽은 것에 대해서. <카운슬러>는 <배철수의 음악 캠프>가 아니었다면 읽었을 리가 없는

책이다. <배철수의 음악 캠프>에서  흘러나온 이 책에 대한 배철수의 얘기는 나로 하여금 이

책에 대한 호기심을 품게 했다. 호기심을 품으니 어떤 식으로든 끝장을 보 싶었고, 그것이

<카운슬러>의 독서로 이어졌다. 읽고 나서, 떠올린 건 호기심이 항상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호기심이 창조의 원천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재앙의 원천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생각해볼때, 나에게 이 책은 대한 호기심은 창조의 원천 보다는 재앙의 원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제목에 대해서. 왜 제목이 <카운슬러>여야만 했을까? 내용은 카운슬링과 아무 상관이 없는데.

책에는 주인공으로 나오는 '변호사'의 의미를 담아서 책의 제목이 이렇게 정해졌다고 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조금 더 '변호사'에 가까운 제목을 쓰면 됐을 텐데. 그랬더라면 내가 읽지

않았을 텐데. 괜히 '카운슬러'라고 해가지고 호기심만 더 키웠다.  

 

책에 대해서. 코맥 매카시의 책을 읽을 때는 나는 일단 '기분 더러워질' 각오를 한다. 그 각오

없이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의 책이 읽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코맥 매카시의 

책을 읽을 때 기본적으로 거의 재미에 대한 기대를 하지 않는다. 약간의 기대가 있다면

'스타일이 달라졌을까?' 정도. 제목 때문에 더욱 스타일의 변화가 있지 않을까 했던 <카운슬러>

는 결국 '역시나'로 끝나버렸다. 책 가득 펼쳐진 죽음,살인,피,폭력,선과 악의 명확한 구분,

낭만과 온기라고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는 냉혹하고 가혹한 인간들과 세상,작가 특유의

장광설,지나치게 미국적인 스타일과 세계관까지, 어느 것 하나 나랑 맞는 것은 없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나랑 맞지 않는 사람도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극단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그 스타일을 유지하고 책을 써나는 것도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다만 그가 구축한

문학적 세계가 나랑 전혀 맞지 않는다는 점이 비극일 뿐.  

 

책을 읽고 나서. 코맥 매카시의 책에 대해서는, 나의 기준에서는 '기대치'라는 말을 없애버려야

할 것 같다. 대신에 나는 그의 책에 대해서는 '실망치'라는 말을 쓰기로 결심했다. 코맥 매카시는

나를 언제나 실망시켜왔고, 최소한 그 점에 있어서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언제나 나를 실망시키는, '실망치' 가득한 그의 책을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번에

는 배철수가 아무리 떠들어도, 전혀 읽을 생각이 없다. 그러나 세상의 운명이란 어떻게 될 것인지 알 수 없는 법이기에, 나는 코맥 매카시의 책을 절대로 읽을 리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벌써부터 재수없게 또다른 운명에 이끌려 코맥 매카시의 책을 읽을 생각을 하니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이 끼친다. 하나의 책이 한 인간에게 이 정도까지의 영향을 끼칠 수 있다니...

이것도 놀라운 능력이라면 놀라운 능력이다. 어떻게 보면 나는 이 책을 통해 코맥 매카시에게

제대로 된 카운슬링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책을 읽을 때마다 오물 뒤집어 쓴 기분을

느꼈던 나를 배려해서, 그는 <카운슬러>라는 시나리오 책을 통해, 나를 카운슬링 해주며

'내 책 읽지마!'라는 진단을 내렸고, 나는 거기에 대해 '네' 라는 대답을 한 것이다.  

 

끝으로. 나의 판단 착오로 오물 한번 제대로 뒤집어 썼으니 그 오물을 씻어 내리기 위해 다른

책을 찾아 읽을 생각이다. 정말, 진심으로, 오물 뒤집어쓴 나에게는 코맥 매카시의 책이 아닌

다른 책이 필요하다.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것 하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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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비극 노리즈키 린타로 탐정 시리즈
노리즈키 린타로 지음, 이기웅 옮김 / 포레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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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의 비극-노리즈키 린타로 

 

과거에 추리 소설을 몇 권 읽지 않았던 때가 생각난다. 그때의 나는 추리 소설이라는 신대륙을 탐

사하는 데 푹 빠져있었다. 추리 소설들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요소들을, 아이처럼 신비하고 즐겁

게 느끼면서, 추리 소설 자체의 재미를 적극적이고 열정적으로 향유했던 것이다. 그건 마치 범죄

사건을 몇 건 경험하지 않은 젊고 패기 넘치는 형사가 범죄 수사에 나서는 것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추리 소설을 읽을 수 없다. 초창기의 재미와 느낌 때문에

추리 소설에 반해서 몇 백 권을 읽어버린 지금의 나에게 추리 소설은 과거의 신대륙이 아닌,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구대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추리소설 몇 백 권의 세계에 빠져든

경험은, 추리 소설을 읽을 때 더 이상 알 수 없는 것을 알아가는 '미스터리의 재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긴장감 넘치게 확인하는 '서스펜스의 재미'를 느끼 

게 한다. 과거의 젊은 수사관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범죄 사건들에 익숙해져서 노회한 수사관이

되는 것처럼. 

 

이 말을 왜 했냐면, 내가 <1의 비극>을 읽으면서 노회한 수사관의 느낌을 실감했기 때문이다.

나는 소설을 읽다가 중반도 되기 전에 범인이 누구인지, 범인이 왜 범죄를 저질렀는지를 알아

버렸다. 나머지 부분은 나의 추리가 맞는지를 확인하는 것에 불과했다. 이때의 독서란, 과거의

추리 소설 독서가 전해주던 쾌감이 사라진 독서이자 다른 방식의 안정된 재미를 가져다주는

독서였다. 물론 과거의 느낌이 그립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잘 알고 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지금과 같은 모순적인 감정을 느끼면서.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나만의 '1의 비극'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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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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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호메로스 

 

1. 

책을 다 읽고 나서 떠오른 건 카이사르의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라는 너무나 유명한

말이었다. 이 말을, 책을 읽고 나서의 내 감정에 따라 바꿔봤다. '펼쳤노라, 읽었노라, 덮었

노라'로. 진짜 이런 말을 만들 정도로 <일리아스>를 읽고 나서 내 마음은 뿌듯함으로 가득

했다. 언제나 생각만 해왔던, 현대 유럽 문학의 시원이자 고대 그리스 문학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중 한편을 읽었다는 사실 때문에. 무수히 많은 등장인물들

과 고대 그리스의 신들이 얽히고섥혀 만들어내는 무수한 이야기들의 집합체이자, 9년동안의

일들을 며칠 동안의 일을 통해 그려내는 시간의 압축체이자,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문명

예술과 종교가 뭉쳐 만든 응집체이자, 600페이지를 넘어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운문의 영웅

서사시인 이 책을 읽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해보면, 나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2. 

나는 누군가 강요해서, 내 삶에 실용적인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이 책을 읽은 게 아니다.

단지 읽고 싶고, 읽는 것이 좋다고 나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에 읽게 됐다. 읽었다고 누가

나에게 칭찬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왜 그런 책을 읽냐고 구박이라도 받지 않으면 다행

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의 가치를, 읽지 않은 사람이 알 수 없는 읽은 사람만이 혼자서

느끼고 자신 안에 담아내는 것에 있다고 한다면, 이 책은 충분히 그만큼의 가치가 있다. 수량

으로 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위한 가치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만 놀라운

힘을 가지는 주관적인 가치를. 나는 그 주관적 가치를 결코 잊지 않고 간직할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를 다음의 <오뒷세이아> 읽기에 가져가서, 지금과는 다른 그 순간의 가치를 만들 것

이다. 

 

*이 책을 읽는 데 강대진이 쓴 <일리아스, 영웅들의 전장에서 싹튼 운명의 서사시>라는 책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그 책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리아스>를 읽는 데 엄청 힘들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다 못읽고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 책을 먼저 읽고 이 책이 어떤 구성으로 되어

있고,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힘들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앞으로 읽을 생각인 <오뒷세이아>도 마찬가지로 강대진의 <오뒷세이아, 모험과 귀향, 일상의

복원에 관한 서사시>를 읽고나서 읽을 생각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 고전들의 원전을 꾸준히 번역하고 있는 천병희 씨의 행보에 경이로움을

표하며, 고맙다고 애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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