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
파코 로카 지음, 김현주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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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파코 로카

 

누군가 내게 이 책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이 책은 그저 읽으려다 그만둔 책에 불과했다. 누군가 내게 이 책이 흥미롭다고 이야기를 한 순간, 이 책은 읽으려다 그만둔 책이 아니라 읽어야만 하는 책이 되었다. 읽지 않았고 접근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이 책의 무의미성은 내가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책에 접근하여 무언가 느끼면서 유의미성으로 격상되었다. 그저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이 책을 읽고 ‘나만의 꽃’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며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내게 이 책은 어떤 의미였던가? 

 

<주름>. 정지된 컷과 말풍선의 조화를 통해서 서사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만화라는 장르는, 장르의 특성상 소설과 영화의 중간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만화는 영화와 같은 영상은 아니지만 정지된 이미지로 구성되며, 소설과 같이 문자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말풍선을 통해서 소설적인 특성도 가지게 된다. 이미지와 말풍선의 혼합을 통해서 탄생한 만화는 그래서 영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만화 그 자체가 된다.  

 

<주름>은 오직 만화만이 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치매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지된 이미지들과 말풍선들의 조합으로 한 남자가 겪는 치매의 과정을 서서히 드러내는 이 작품은, 소설이 줄 수 없는 이미지의 충격으로 독자의 뇌리를 강타하며, 영화가 줄 수 없는 ‘순간의 성찰’을 정지된 이미지의 힘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독자는 치매의 이미지화를 통해서 충격받으며, 동시에 종이매체의 특성과 정지된 이미지들 자체 때문에 치매를 성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충격받으며 성찰하기. 성찰하며 충격받기. 내가 보기에 이 동시다발적 충격과 성찰은 오직 이 작품이 만화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주름>을 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만화만이 가능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끌려 들어갔다. 

 

<등대>. <주름>과 달리 이 작품은 나에게 익숙한 ‘만화’라고 볼 수 있다. 익숙하기 그지없는 만화였기에, 나는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스페인 내전의 흐름 속에서 파시스트들에게 쫓기는 공화파 소년병 프란시스코와 등대지기 노인 텔모의 우정과 꿈의 추구를 그린 이 만화는, 힘이 있는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매력으로 독자를 뒤흔든다. 재미있고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특히 마지막 부분의 감동은 나를 ‘익숙하지만 너무나 좋은’ 감성의 영역으로 이끌고 들어간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나는 꿈을 좇는 이야기에 약하다.) 

 

<주름>은 내게 색다름과 익숙함 모두를 느끼게 만든 책이었다. 그것은 이 책에 내게 다채로운 정신의 양식을 제공하며, 단일 음식의 맛이 아닌 다채로운 음식의 맛으로 정신을 배부르게 만들었다는 얘기였다. 이 정신적 충만함과 풍요로움이 이 책을 읽고 찾은 ‘나만의 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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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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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소포클레스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인들의 삶과 이어진다. 그리스인들의 삶의 정수인 그리스 비극. 거기에는 그들의 종교성과 철학과 가치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그들이 이룩한 문화를 비롯한 그리스인들의 삶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작가에 따라서 이것은 조금씩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아이스퀼로스는 조금 더 종교성에 치중해 있고, 에우리피데스는 기존의 전통과 질서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담아서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비극을 만들어냈다. 에우리피데스와 아이스퀼로스의 중간 영역에 위치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그들 두 사람과 구분되는 비극을 만들며 진정 그리스 비극다운 비극, 아테네 삶의 총화인 비극, 그리스 비극의 정점에 도달한 비극으로서 존재한다. 그의 비극은 아테네 문화와 가치를 추종하는 아이스퀼로스의 경직성보다는 유연성을 드러내며, 에우리피데스의 회의적인 시각과는 달리 안전하고 정련된 언어로 전성기 아테네의 자신감과 그들이 이룩한 문화의 힘을 보여준다. 소포클레스는 지극히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인간 자신의 오만으로 인해 파멸하면서 그 파멸을 받아들이는 인간을 넘어선 인간의 모습을 비극 속에 그리며, 인간이 신의 의지와 질서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교만하고 오만하기보다는 겸손하고 세상을 두러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비극을 통해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건 자신감의 표현이었고, 그 자신감을 경직된 믿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예술적인 언어로 표현해내는 예술적인 몸부림이었다. 비극적인 아름다움, 애달픈 슬픔, 지나치게 인간적이어서 영웅적이고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장중함이 이룩한 비극이라는 예술의 힘은 그리스 신전을 지탱하는 기둥들처럼 비극이 아테네의 전성기를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준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아테네를 떠받친 이 기둥은 소포클레스 때에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 그러나 벚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 지는 것처럼, 아테네도 화려한 전성기의 뒤안길에서 몰락의 길을 걸어간다. 강력했던 힘은 사그라지고, 화려하게 꽃피던 문화도 정치적 혼란과 몰락의 영향 속에서 그 힘을 점차 잃어가고, 사람들은 과거의 힘과 질서를 잊고 혼란 속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친다. 아테네 전성기의 산증인으로서 아테네의 힘과 가치를 굳건히 믿던 소포클레스는 죽기 전에 자신이 가진 힘을 다끌어모아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지어서 전성기 시절 아테네의 목소리로 외친다. 아테네의 힘을 믿으라고. 하지만 이 노거장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흩어지고 그의 바람과는 달리 아테네는 화려한 전성기를 뒤로하고 몰락한다.

 

나는 이 책에서 아테네인들이 들었어도 되돌릴 수 없었던 내용이 담긴 목소리를 들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전했던 목소리는 이제 내용의 의의는 사라졌지만 아름다움은 여전히 간직한 채 전해졌다. 그건 이천 년의 시간을 넘어 고대의 그리스인들이 현대인에게 전하는 아름답고 찬란하고 비극적이며 애달픈 예술적 목소리에 다름 아니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으면서, 목소리가 남긴 비극적 잔향을 느끼면서 나는 힘이 있는 예술은 시간과는 상관없이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시간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언제나 인간의 보편성이라는 틀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을 넘어서 전해진 목소리와의 조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힘 있는 예술이 하나의 기적이라는 사실 또한 알려준다. 지극히 당대의 기준에 부합했던 예술이, 시간을 넘어서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감동을 준다는 건 기적이라는 말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이처럼 과거라는 시간은 소포클레스를 통해 내게 전해지고 현재를 거쳐 다시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실과 더불어 지극히 현재적인 것이 초시간적일 수도 있다는 또다른 시간을 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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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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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퀼로스-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1.

인간은 나약하다. 밀려드는 쓰나미 앞에서, 대지를 뒤흔들며 습격하는 지진 앞에서, 굉음을 울리며 폼페이를 사라지게 만든 화산 폭발 앞에서, 그 외의 다양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너무도 나약한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또 인간은 불완전하다.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무기 중의 하나인 핵무기의 공포 앞에서, 인간 스스로의 욕망과 실수로 비롯된 전쟁의 참상 앞에서, 인간의 행동이 유발한 굶주린 짐승처럼 덮쳐드는 화재의 불길 앞에서, 그리고 그 외의 인간들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냈지만 통제가 안 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다양한 상황들 앞에서 인간의 불완전성은 그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이 강하다고, 힘이 세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문명을 만들어왔다. 근대라는 시간은 인간의 자기 위안과 그 위안이 극에 달해서 발생한 오만으로 점철된,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인간으로 가득한 시대다.

 

 

현대라는 시간을 산다는 건, 인간중심주의에 찌든 삶을 살아온 인간들과 관계 맺으며 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이라는 영원한 좌표축을 상실한 채 인간 중심주의의 문명의 극단에 서 있는 서구에서도, 서구의 후발주자로서 맹렬히 서구의 인간 중심주의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비서구권에서도 이 삶은 반복되고 있다. 전쟁과 내전, 독재와 폭력의 수레바퀴가 돌고 있는 국가가 아니라면, 인간중심주의는 어디서든 그 힘을 발한다. 아니 어쩌면 전쟁과 내전, 독재와 폭력의 수레바퀴가 돌고 있는 국가에서도 어디선가 내가 모르게 인간중심주의가 빛을 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이 흐름을 막을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음을 알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필연처럼 겪는 이 흐름 속에서의 삶을 살아온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이 흐름에서 벗어나고 싶어 책을 펴든다. 거기에는 분명 다른 흐름이 있다고 생각하며.

 

 

2.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천병희 씨의 그리스어 원전 번역으로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 아이스퀼로스의 현존하는 비극 일곱 편을, 이천 년이 넘은 시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한국어로 만났다. 중역이 아니라 그리스어 원전 번역이라는 점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번역이 아니라 나같은 비전문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번역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너무 좋은 건 그리스 비극을 만났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서 살았던, 한 이방 문화의 작가의 작품을 전혀 다른 문화권의 언어로서 만났다는 사실 그 자체가, ‘기적’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이 만남의 순간 자체가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한국의 문화와도 너무 다르지만, 근대라는 시간을 거쳐 이룩된 현대라는 시간대와도 너무 다른 이 낯설기 그지없는 ‘그리스 비극’과의 만남은 그 낯설음과 특별함, 그 시대와 그 당시 문화의 정수를 모아놓은 비극이라는 예술 자체의 힘 때문에, 만남이 성사되는 순간 나의 마음을 뒤흔들 수밖에 없었다.

 

 

현대적이지 않은 그리스 비극은 아직 완벽하게 예술과 종교,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분명히 비극이지만, 동시에 종교적 의식의 일부로서 종교성을 가지고 있고, 정치성도 분명히 포함하고 있으며, 당대의 학문적인 흐름까지 담은 일종의 종합예술에 가까워 보인다. 특히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로 알려진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은, 후배 격인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과 비교하면 훨씬 더 종교적이고 노래에 가깝다. 그의 비극은 신이 직접적으로 등장해서 신의 의지에 의해 인간의 상황이 결정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한탄과 슬픔을 지속적으로 읊는 것을 보여주며 ‘그리스 비극’이 분명히 종교에서 출발했으며, 그것의 근원이 종교적인 노래에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인간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비극이자 인간의 자유가 빚어낸 인간적인 고통의 문학적 형상화이자 고결하거나 뛰어난 이들의 추락의 고통이 만든 카타르시스의 예술이 ‘그리스 비극’의 영역이지만,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은 그 근원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종교에서 잉태된 예술의 힘을 과시하는 그의 비극은, 그래서 신의 의지가 비극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알려준다. 필멸의 운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을 망각하고 신에 도전하거나 오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으로 범죄를 저지르며 신과 우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을 하는 인간이 신과 우주의 질서에 의해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그 사실을. (심지어 인간이 아닌 신인 프로메테우스마저 질서에 도전했다 큰 고통을 겪는다.) 이건 비극이라는 예술을 넘어서서 삶의 영역으로도 이어진다. 페르시아 전쟁에 출전해서 동방의 강대국 페르시아를 이기고 아테네가 전성기를 맞는 걸 온몸으로 체험한 아이스퀼로스에게 신의 의지와 우주의 질서는 아테네가 이룩한 문화적, 정치적 질서와 일치하고 그것을 어지럽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비극의 영역을 통해서 삶의 영역에 선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비극의 한계로도 작용한다. 아이스퀼로스는 자신의 노년에 들이닥친 아테네의 몰락을 이해할 수 없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쇠락해가는 아네테의 모습을 그의 비극은, 그의 예술적 언어는 표현할 수 없다. 어떻게 세상의 질서가, 신의 의지이자 우주의 질서가 무너지고, 쇠락할 수 있는가! 그건 불가능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그의 비극이 아테네의 몰락에는 침묵해야 함을 의미한다. 비극의 침묵이 작가의 침묵이고, 곧 작가로서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면 아테네 몰락의 초반부에 그가 죽음을 맞는 건, 어찌보면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비극을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평생의 진리가 무너져내리는 상황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평생 추구한 질서가 무너지다 못해 사라지는 걸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얘기하고 말했던 질서가 사라지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썼던 비극의 마지막처럼.

 

 

3.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을 종교성 하나로만 평가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종교성의 틀이 아니라도 그의 비극에는 인간들의 생생한 삶과 행동과 모습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사실은 그의 비극을 움직이는 원동력에 종교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종교성은 아테네의 힘과 아테네의 문화와 아테네가 구축한 질서에 대한 믿음으로도 바꿀 수도 있다. 그는 아테네를 믿었고, 아테네가 믿었던 신들을 믿었고, 그 신들이 만들었다는 우주의 질서를 믿었다. 종교성은 그의 비극의 핵심이고 중심축이다.

 

 

내가 그 종교성을 거듭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아이스퀼로스의 종교성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만으로 점철된 이 시대에서, 인간이 다른 무엇보다 우월하고 뛰어나다고 믿는 생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아이스퀼로스의 종교성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자기 자신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바라볼 때 자신이 모습이 조금 더 객관적으로 파악되는 것처럼,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은 인간을 인간 스스로의 틀에서 벗어나서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다. 인간의 오만과 자만심은 바라볼 수 없는 우리의 나약함, 불완전성, 혼란스러움을 그려내며, 그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봐야 함을, 세상과 자연과 인간이 아닌 다른 그 무엇에 비추어서 바라볼 때 인간이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며, 그걸 통해서 파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래서 나는 아이스퀼로스가 그립다. 그의 책을 읽고나니 더욱 그가 그립다. 종교적 맹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종교적 성찰의 목소리로 인간을 질타하는 그만의 목소리는 오직 그만이 낼 수 있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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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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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한한 혁명에게-김선우

저는 아직 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닌가 봅니다. 읽어도 잘 이해가 안 되거든요. 읽고 또 읽어도 이해가 안 된다는 건 원래부터 시를 읽을 수 없는 사람이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시가 저랑 안 맞아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몰라도 시를 읽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시가 몰라서 재미있고, 낯설어서 재미있고, 이해 못해서 재미있고(뭔가 말이 안 되는 소리군요.^^;;), 가끔 이해되면 더욱 재미있고, 나의 마음을 울리는 표현이나 단어가 나오면 너무 좋고, 그 외의 이런저런 이유들로 시를 읽는 걸 좋아합니다. 주저리주저리 여러 이유를 말했지만 무엇보다 시를 읽다 보니 읽는 걸 좋아하게 됐다는 게 가장 정확한 이유인 것 같습니다. 잘 안 읽혀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다보니 시를 읽게 됐고, 이후로는 운명이려니 생각하며 시를 지금까지도 읽고 있는 것이죠. 수능시험 치고 나서 ‘이제는 시와는 절교다’고 외친 나같은 인간이 어느 순간 시를 읽고 있다는 사실이 운명이 아니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운명으로서 시 읽기라는 내 삶의 운명의 여정에 또 하나의 시집을 더해 봅니다. 운명처럼 다가온 김선우 시인의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책 제목을 보는 순간 너무 좋았습니다.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라니, 캬~ 너무 멋지지 않나요? 시인은 시인 체게바라가 되고 싶었던 걸까요? 이런 쓰잘데기없는 낭만적이고, 호르몬 과다 분비 남학생 같은 생각을 하며 시집을 펴들었는데... 펴들었는데... 분명히 글을 보고, 단어를 보고, 문장을 보고, 시집을 본 건 맞는데... 근데 왜 읽어도 읽어도 이해가 안 되는 걸까요? 분명히 한국말이고, 한글이고, 내가 지금까지 평생토록 써온 말이고, 평생 읽어온 글인데, 읽어도 왜 모르는 걸까요? 더 재미있는 사실은 모르겠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굉장히 낯설었는데 다 읽고 나서는 내 뇌가 ‘좋았다’고 저 자신에게 속삭이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엥? 이해도 못하고, 무슨 말인지도 몰랐는데 좋았다고? 이거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일인데...(왜 이 시집과 관련된 일들은 온통 이해 못할 일 투성이일까요?^^;;) 아무리 이해가 안 되는 일이라도, 분명한 건 내 뇌가 좋다고 얘기했다는 점입니다. 결론적으로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는 저에게 좋은 시집이었습니다.

 

 

음, 이걸 어떻게 얘기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읽고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좋았다’라는 저 자신의 상황을 표현할 말을 쉽게 찾을 수 없네요. 그래도 이왕 이렇게 글을 썼으니 이 이해 못할 상황을 한번 저 자신의 생각을 담아 표현해볼게요. 전체적으로 봤을 때 저는 이 시집을 이해하지 못한 게 확실합니다. 시인이 자신만의 감수성과 감정과 시각과 생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떠올린 것들을 자신만의 언어적 정련 작업을 거쳐 만들어낸 시들을 저는 전체적인 틀 속에서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그런데 시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정신의 산물을 전체적인 틀로서 파악하는 게 가능할 일일까요?) 하지만 저와 마주친 시의 일부분이, 반짝반짝 빛나는 시의 언어들이, 표현들이 저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더군요. 아니, 정확하게 말해서 그 시의 일부분들이 내 머리와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와서 자리를 차지하고는 저를 뒤흔들었습니다. 그건 마치 사랑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사랑을 할 때, 우리는 왜 사랑을 하는지 정확하게 얘기하지 못합니다. 사랑에 ‘왜?’는 부질없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저 사람이 왜 좋은지?’ 정확하게 얘기하지 못합니다. 그저 저 사람이 있기에 사랑한 것이고, 사랑하기에 저 사람이 좋은 겁니다. 이 시를 읽고 나서의 저의 기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왜 좋은지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겠지만 그 시가 저기 있어서, 그 시가 나의 눈앞에 있어서, 읽다보니 그 시가, 그 표현들이, 그 언어들이 좋아서 좋아하게 됐습니다. 말장난 같겠지만, 좋으니까 좋은 겁니다. 어쩌면 사랑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겠네요.

 

 

아, 맞습니다. 저는 시인이 쓴 시와 사랑에 빠졌습니다.(시인과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이걸 유의해주세요.^^)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소외되고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과 소중함을 보이게 하고, 들리게 하고, 느끼게 하는 시인의 시를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니까 그것들이 나의 일처럼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더군요. 그리고 그건 시인의 말을 따르자면 혁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피와 폭력의 냄새를 풍기는 폭력이 아니라, 사랑하면서 이루어지는 혁명. 보고 듣고 알고 느끼면서 이루어지는 연대와 공감과 애정과 관심의 집합체로서의 혁명. 폭력과 포연과 피가 없는 지극히 사적이지만 충분히 위력적인 혁명. 이 혁명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혁명입니다. 사랑이면서 혁명이고, 혁명이면서 사랑입니다. 사랑-혁명. 혁명-사랑. 바꾸고 또 바꾸어도 같아지는 두 개의 단어가 보여주는 사랑과 혁명의 무한한 순환. 시가 보여주는 세계에 저는 매료되었고, 매료된 순간 저는 시가 좋고 사랑스러웠습니다. 물론 그 모든 건 혁명이고요.

 

 

하지만 이 혁명은 완벽히 이상적인 혁명의 구현은 아닙니다. 이 혁명은 아직 오지 않은, 어쩌면 제 살아생전에는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우리가 끊임없이 기다려야 할 혁명은 아닙니다. 이 혁명은 그 혁명을 기다리며 현재라는 순간순간에 우리가 지속적으로 만들어나가는 혁명입니다. 그러니 이 혁명은 무한히 계속되어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우리에 속하는 나라는 각각의 개인이 현재 속에서 무한히 구현하는 것이 이 혁명입니다. 혁명을 사랑으로 바꾸면 현재 속에서 이루어지는 무한한 사랑의 몸부림이자 구현이 이 혁명의 실체입니다. 이런 충격적이고 아름다운 얘기를 저에게 이성이 아닌, 느낌을 통해서 깨닫게 만든 것이 이 시집의 힘이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이 시집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까지 제가 느낌과 감정으로서 알게 된 것을 나름대로 길게 풀어서 써봤습니다.(이게 정확한지는 저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저 말할 수 있는 것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확실한 건 이 시집이 저에게 사랑으로서의 혁명, 혁명으로서의 사랑을 얘기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일단 얘기 들었으니 멈출 수는 없습니다. 저는 지금 당장 이 혁명을, 사랑을 시작해야겠습니다. 무한한 혁명의 시작을 외치며 이제 이 글을 마무리 짓겠습니다. 지금부터 나와 좋은 관계를 맺을 사람들이여, 내 앞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줄 것들이여,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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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나무 정류장 창비시선 338
박성우 지음 / 창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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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나무 정류장-박성우

 

어란 말로 표현되어 말을 듣는 상대방에게 가닿는 순간 다른 무엇이 되는 것 같습니다. 화자의 의도가 어떻든간에, 말은 청자에게 가서 원래의 말과는 다른 것이 되는 것이죠. 이건 말을 한 인물과 말을 듣는 인물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사실 인간은 완벽한 의미의 의사소통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저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고 서로 간에 믿으며 말을 할뿐이죠. 서로 간에 소통이 되는 언어의 사용과 의사표현의 유사성,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성이라는 틀이 우리로 하여금 완벽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착각을 만드는 겁니다. 이 착각이 있기 때문에 화자의 말이, 청자에게 다른 형태로 가닿음에도 불구하도 인간들은 서로가 완벽하게 소통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죠. 착각 없이는 인간의 의사소통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의사소통을 가장한, 착각에 의거한 의사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의사소통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뜻이 서로 통함.

글에서도 이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글을 쓰는 작가가 언어를 글이라는 형태로 표현하여 독자 앞에 내놓은 순간, 작가의 글은 독자에게 가닿아 원래와는 다른 무엇이 됩니다. 서로 간에 직접적으로 주고받는 직접적 관계성에 근거한 말의 소통과 달리, 글은 표현양식의 특성상 서로 간에 직접적으로 주고받는 직접적 관계성이 아니라 간접적 관계성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말보다도 더욱 오해와 착각은 커지게 됩니다. 작가가 쓴 글을 작가가 직접적으로 독자에게 전할 수는 없고, 어떤 특정한 매체를 통할 수밖에 없어서 발생하는 이 오해와 착각은, 글을 읽는 독자 자신의 존재 조건에 의해서 발생합니다. 독자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고, 독자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독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에 따라서 독자가 글을 읽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달라진다는 거죠.

 

문학

사상이나 감정을 상상의 힘을 빌려 언어로 표현한 예술. 또는 그 작품. 시, 소설, 희곡, 수필, 평론 등을 이룬다.

글 중에서도 문학이라는 글쓰기 양식, 그 문학 중에서도 ‘시’라는 장르는 특히나 더욱 이 오해와 착각이 큰 편입니다. 글을 쓰는 작가 자신이 바라본 세상과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문학 장르의 특유의 정의를 공유하면서도, 언어에 더욱 더 천착한다는 특성을 가진 ‘시’는 언어를 가다듬고 정련하여 자신만의 언어로서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인은 공통된 의사소통의 구조를 가진 인간들 사이에서, 자신만의 언어적 틀을 만들어서 그걸로 다시 인간들과 의사소통을 해야 하는 존재인 겁니다. 시인은 특정한 공동체의 보편적인 언어적 틀 속에서 자기 자신만의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언어적 틀로서의 시를 써내고(물론 이것도 완벽하게 특정 공동체의 언어적 틀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걸 다시 특정한 공동체의 보편적인 언어적 틀 속에 돌려보내 시를 읽는 독자와 소통하게 만듭니다. 시인은 필연적으로 이중의 작업을 거칠 수밖에 없죠. 그런데 고독하고 외롭기 그지없는 첫 번째 작업과 달리 두 번째 작업은 시인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두 번째 작업은 첫 번째 작업의 결과로 탄생한 시를 우연히 만나서 읽게 된 독자에 의해서 이루어집니다. 시인에 의해서 탄생한 시는 독자라는 새로운 존재를 만나서 제2의 탄생을 맞게 되는 거죠.

 

 

정서나 사상 따위를 운율을 지닌 함축적 언어로 표현한 문학의 한 갈래.

어떤 시라도 제2의 탄생이라는 운명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시인의 주관적 언어 속에서 탄생한 시가 독자를 만나는 순간 독자에 의해 변형되어 받아들여지고 삶 속에 스며들기에 발생하는 제2의 탄생은 시가 맞이하는 행복한 운명입니다. 그런데 현대 시사는 이 제2의 탄생을 조금 기묘한 형태로 만듭니다. 과거의 시들이 보편성에서 충분히 받아들여지는 맥락 속에서 존재했기에, 제2의 탄생은 보편성에 근거한 부드러운 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현대로 오면 올수록 시들이 보편성에서 점점 더 일탈해서 개별성에 천착한 나머지 제2의 탄생을 힘겹고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현대 시를 읽는 독자에게 제2의 탄생은 지극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현대시라는 정신적 실체를, 자신의 지성과 사고로 받아들이는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이 된 것입니다. 현대 시를 읽는 독자에게 제2의 탄생은 지적인 고통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겁니다.

어쩌면 진짜 탄생에 가까워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죠. 생명의 탄생은 고통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자두나무 정류장>은 현대 시의 흐름과는 조금 동떨어진 느낌입니다. 제가 이 시를 받아들인 과정에서 벌어진 ‘제2의 탄생’은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거든요. 아니, 오히려 그건 따스했습니다. 시인의 시는 따스하게 저를 감싸안아주며 삶에 스며들어 제 가슴과 온 몸에 온기를 전해주더군요. 한국 서정시의 맥을 잇는 시인이라는 평가답게 그의 서정시는 진짜 한국스러운 온기로 가득했습니다. 따스한 사랑이 스며든 어머니의 밥 같은, 언제라도 부르면 옆에서 달려 나와 같이 놀아주던 이웃의 친구 같은, 함께 라는 말의 의미를 보여주던 이웃사촌의 모습 같은, 나 자신의 작은 우주로서 나를 품어주던 나 자신의 기억과 삶의 근원이 되는 과거의 동네 같은. 이 시들은 지성과 사고 이전의 근원적인 저 자신의 감정으로 파고들더군요. 재미있는 사실은 이런 감정의 파고들어옴이 이룩한 정서적 교류가 보여주는 정서적 역동성의 힘이 지적인 교류를 했을 때보다 더욱 더 강력하게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들이 주지못한 정서적 폭발력을 이 시들이 저에게 주었다는 말입니다. 이걸 실험적이고 지적인 시들이 전해주는 차가운 정서적 폭발과는 다른 의미로 뜨거운 정서적 폭발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저도 한국인이라서 그런지 한국인의 내밀한 정서를 뒤흔드는 이런 정서적 역동성의 힘이 너무 좋더군요.^^ 그런데 이건 과거 회귀가 아닌 것 같아요. 차갑고 어지러우며 쉽게 손에 잡히지 않는 시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이건 과거 회귀가 아니라 또다른 미래의 모습처럼 여겨지더군요. 시인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로 향하는 그 길을 묵묵히 걷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그 길을 따라가며 걷고 싶습니다. 사는 게 힘들고 여기저기서 외치는 ‘힐링’보다는 이런 따스한 온기가 진짜 치유가 되거든요. 그 이유 때문에 저는 시인을 따라 걷다가 자두나무 정류장에 가서 언제 다가올지 모를 ‘따스함’이라는 버스를 함께 기다려보렵니다. 과거가 아닌 미래로 향하는 그 버스를.

 

그래, 우리 몸엔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바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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