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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아이스퀼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24년 4월
평점 :

아이스퀼로스-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1.
인간은 나약하다. 밀려드는 쓰나미 앞에서, 대지를 뒤흔들며 습격하는 지진 앞에서, 굉음을 울리며 폼페이를 사라지게 만든 화산 폭발 앞에서, 그 외의 다양한 자연의 힘 앞에서 인간은 너무도 나약한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또 인간은 불완전하다.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무기 중의 하나인 핵무기의 공포 앞에서, 인간 스스로의 욕망과 실수로 비롯된 전쟁의 참상 앞에서, 인간의 행동이 유발한 굶주린 짐승처럼 덮쳐드는 화재의 불길 앞에서, 그리고 그 외의 인간들 자신이 스스로 만들어냈지만 통제가 안 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는 다양한 상황들 앞에서 인간의 불완전성은 그 모습을 아낌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인간들은 자신들이 강하다고, 힘이 세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문명을 만들어왔다. 근대라는 시간은 인간의 자기 위안과 그 위안이 극에 달해서 발생한 오만으로 점철된,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인간으로 가득한 시대다.
현대라는 시간을 산다는 건, 인간중심주의에 찌든 삶을 살아온 인간들과 관계 맺으며 사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이라는 영원한 좌표축을 상실한 채 인간 중심주의의 문명의 극단에 서 있는 서구에서도, 서구의 후발주자로서 맹렬히 서구의 인간 중심주의를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비서구권에서도 이 삶은 반복되고 있다. 전쟁과 내전, 독재와 폭력의 수레바퀴가 돌고 있는 국가가 아니라면, 인간중심주의는 어디서든 그 힘을 발한다. 아니 어쩌면 전쟁과 내전, 독재와 폭력의 수레바퀴가 돌고 있는 국가에서도 어디선가 내가 모르게 인간중심주의가 빛을 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우리는 이 흐름을 막을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음을 알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필연처럼 겪는 이 흐름 속에서의 삶을 살아온 나 자신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주 가끔은 이 흐름에서 벗어나고 싶어 책을 펴든다. 거기에는 분명 다른 흐름이 있다고 생각하며.
2.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천병희 씨의 그리스어 원전 번역으로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 아이스퀼로스의 현존하는 비극 일곱 편을, 이천 년이 넘은 시간의 차이를 뛰어넘어 한국어로 만났다. 중역이 아니라 그리스어 원전 번역이라는 점에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번역이 아니라 나같은 비전문가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번역이라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빛을 발한다. 무엇보다 너무 좋은 건 그리스 비극을 만났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기원전 6세기와 5세기에서 살았던, 한 이방 문화의 작가의 작품을 전혀 다른 문화권의 언어로서 만났다는 사실 그 자체가, ‘기적’이라고도 불릴 수 있는 이 만남의 순간 자체가 나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한국의 문화와도 너무 다르지만, 근대라는 시간을 거쳐 이룩된 현대라는 시간대와도 너무 다른 이 낯설기 그지없는 ‘그리스 비극’과의 만남은 그 낯설음과 특별함, 그 시대와 그 당시 문화의 정수를 모아놓은 비극이라는 예술 자체의 힘 때문에, 만남이 성사되는 순간 나의 마음을 뒤흔들 수밖에 없었다.
현대적이지 않은 그리스 비극은 아직 완벽하게 예술과 종교, 정치가 분리되지 않은 상태를 보여준다. 그것은 분명히 비극이지만, 동시에 종교적 의식의 일부로서 종교성을 가지고 있고, 정치성도 분명히 포함하고 있으며, 당대의 학문적인 흐름까지 담은 일종의 종합예술에 가까워 보인다. 특히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로 알려진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은, 후배 격인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과 비교하면 훨씬 더 종교적이고 노래에 가깝다. 그의 비극은 신이 직접적으로 등장해서 신의 의지에 의해 인간의 상황이 결정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한탄과 슬픔을 지속적으로 읊는 것을 보여주며 ‘그리스 비극’이 분명히 종교에서 출발했으며, 그것의 근원이 종교적인 노래에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만든다. 인간의 행동에서 비롯되는 비극이자 인간의 자유가 빚어낸 인간적인 고통의 문학적 형상화이자 고결하거나 뛰어난 이들의 추락의 고통이 만든 카타르시스의 예술이 ‘그리스 비극’의 영역이지만, 그리스 비극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은 그 근원으로 눈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종교에서 잉태된 예술의 힘을 과시하는 그의 비극은, 그래서 신의 의지가 비극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알려준다. 필멸의 운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운명을 망각하고 신에 도전하거나 오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으로 범죄를 저지르며 신과 우주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동을 하는 인간이 신과 우주의 질서에 의해 파멸할 수밖에 없다는 그 사실을. (심지어 인간이 아닌 신인 프로메테우스마저 질서에 도전했다 큰 고통을 겪는다.) 이건 비극이라는 예술을 넘어서서 삶의 영역으로도 이어진다. 페르시아 전쟁에 출전해서 동방의 강대국 페르시아를 이기고 아테네가 전성기를 맞는 걸 온몸으로 체험한 아이스퀼로스에게 신의 의지와 우주의 질서는 아테네가 이룩한 문화적, 정치적 질서와 일치하고 그것을 어지럽히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비극의 영역을 통해서 삶의 영역에 선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비극의 한계로도 작용한다. 아이스퀼로스는 자신의 노년에 들이닥친 아테네의 몰락을 이해할 수 없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해 쇠락해가는 아네테의 모습을 그의 비극은, 그의 예술적 언어는 표현할 수 없다. 어떻게 세상의 질서가, 신의 의지이자 우주의 질서가 무너지고, 쇠락할 수 있는가! 그건 불가능하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건 그의 비극이 아테네의 몰락에는 침묵해야 함을 의미한다. 비극의 침묵이 작가의 침묵이고, 곧 작가로서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하면 아테네 몰락의 초반부에 그가 죽음을 맞는 건, 어찌보면 운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비극을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 자신의 평생의 진리가 무너져내리는 상황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평생 추구한 질서가 무너지다 못해 사라지는 걸 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신이 얘기하고 말했던 질서가 사라지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자신이 썼던 비극의 마지막처럼.
3.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을 종교성 하나로만 평가하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종교성의 틀이 아니라도 그의 비극에는 인간들의 생생한 삶과 행동과 모습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사실은 그의 비극을 움직이는 원동력에 종교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 종교성은 아테네의 힘과 아테네의 문화와 아테네가 구축한 질서에 대한 믿음으로도 바꿀 수도 있다. 그는 아테네를 믿었고, 아테네가 믿었던 신들을 믿었고, 그 신들이 만들었다는 우주의 질서를 믿었다. 종교성은 그의 비극의 핵심이고 중심축이다.
내가 그 종교성을 거듭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아이스퀼로스의 종교성이 우리 시대에 필요한 덕목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오만으로 점철된 이 시대에서, 인간이 다른 무엇보다 우월하고 뛰어나다고 믿는 생각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아이스퀼로스의 종교성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준다. 자기 자신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서 바라볼 때 자신이 모습이 조금 더 객관적으로 파악되는 것처럼, 아이스퀼로스의 비극은 인간을 인간 스스로의 틀에서 벗어나서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다. 인간의 오만과 자만심은 바라볼 수 없는 우리의 나약함, 불완전성, 혼란스러움을 그려내며, 그는 인간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봐야 함을, 세상과 자연과 인간이 아닌 다른 그 무엇에 비추어서 바라볼 때 인간이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으며, 그걸 통해서 파멸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래서 나는 아이스퀼로스가 그립다. 그의 책을 읽고나니 더욱 그가 그립다. 종교적 맹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종교적 성찰의 목소리로 인간을 질타하는 그만의 목소리는 오직 그만이 낼 수 있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