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곡 - 지옥편 - 단테 알리기에리의 코메디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0
단테 알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윌리엄 블레이크 그림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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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전1

고전이라고 해서 반드시 결점이 없는 것일까? 고전은 그 자체로 완벽한 작품이 되는 것일까? 나는 오히려 고전은, 결점이 없는 것이 아니라, 결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전만이 가질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점을 덮을 정도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걸작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고전을 만날 때는 그 결점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고전이 가지고 있는 고전 특유의 강력한 힘에 끌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이들이 고전의 힘에 이끌리는 것은 아니다. 고전의 힘에 끌릴 수 있는 사람이, 고전의 힘에 끌릴 수 있는 상태에서 고전을 만나야 고전의 힘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이 만남이 언제나 수동적인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고전을 만나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실낙원>, <오이디푸스 왕> 같은 이름이 너무나 유명하지만, 읽는 것이 쉽지 않은 작품들을 읽는 것처럼. 정확하게 말하면 이름과 내용은 익숙하지만, 실제로 이 작품들을 읽었느냐의 여부는 작품의 유명세와 별개다. 이 작품들을 읽기 위해서는 능동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책의 이름을 아느냐와 상관없이 책을 꺼내어 읽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그리고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런 작품들을 읽지는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런 작품들을 읽기 위해서는 작품을 읽고자 하는 의지와 더불어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읽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의지가 있다고 해도 고전을 읽기는 쉽지 않다. 먼저 고전의 특성상 과거에 만들어진 작품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특성을 품고 있어서 그 시대와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낯설고 접근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나라의 고전의 경우에는 그 나라 특유의 분위기와 상황을 담고 있어서 역시 읽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번역의 문제까지 더해진다면 더욱 더 고전 읽기는 어려워진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면, 불굴의 의지를 가지고 읽어나간다면, 우리는 고전의 속살에 가닿을 수 있다. 우리가 고전의 속살에 가닿을 수 있다면 고전은 자신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우리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만약에 그것을 느낄 수만 있다면, 고전은 진짜 너무나 유명하지만 읽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 아니라 그 자체로 매혹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

 

<신곡:지옥편>은 충분히 매혹적인 작품이다. 중세를 넘어서서 근대를 연 지식인 단테의 대표작답게 그 시대의 모든 것을 담으면서 동시에 한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사상적 궤적을 자신의 상상력에 맞춰서 재구성하여 기독교적인 틀 속에서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에는 중세의 향기와 중세를 넘어서서 근대로 넘어가려는 시대의 기운이 모두 꿈틀거리고 있다. 중세다운 중세와 중세를 넘어서려는 시대의 기운이 어른거리는 작품의 힘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21세기의 한국인을 14세기 이탈리아의 피렌체로 데려가는 능력을 발휘한다. 이 타임슬립의 힘 앞에서 나는 즐거워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동시에 이 힘은 중세적인 편협함도 충분히 품고 있다. 그 편협함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는 것도 고전을 읽으면서 경험하는 타임슬립의 힘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곡>에 대해서 나는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할까? 아직 연옥편도, 천국편도 읽지 못한 나에게 이 작품에 대한 총평이나 종합적인 감상을 표현하는 것은 성급할 일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작품인 연옥편으로 단테와 베르길리우스를 따라서 넘어가보려 한다.

 

버전2

지옥, 너무나 두려운 단어이다. 과거에 개신교에 속했던 유치원에 다녔던 나에게는 지옥이라는 말 자체는 두려움 그 자체이다. 유황불이 활활 끓고, 악마와 마귀들이 죄지은 영혼을 고문하면서 괴롭히고, 영혼들이 최후의 심판의 날까지 고통스러워해야 하는 그 장소에 대한 두려움은 어린 시절 상당히 나를 괴롭혔다. 그러나 개신교의 틀을 벗어나서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게 된 지금의 나에게 지옥이란 말은 과거와는 다르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저 지옥이란 과거의 낡은 기억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나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는 그 무언가다. 동시에 그것은 나의 추억을 자극한다. 과거의 아련함이 느껴지는 단어. 지옥이라는 말에서 과거의 아련함을 느낀다는 상황이 이상하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지옥을 생각하면 과거의 나가 떠오른다. 겁많고, 아무것도 몰랐지만 순수했던 한 시절의 상징과도 같은 단어.

 

단테의 <신곡:지옥편>은 과거로 향하는 문을 열어놓은 책이다. 분명히 과거의 문을 열어놓았지만 전혀 다른 형태로 열어놓은 책. 과거의 공포가 스며있지만, 나의 과거와는 다른 단테의 형상과 14세기 이탈리아 피렌체의 상황이 아로놓인 이 책은 단테 상상력의 문학적 형상화이면서 나의 과거를 새롭게 재구성하는 기회였다. 인간 삶의 연장선상으로서 존재하는 세계이지만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틀 속에서 구현된 단테의 지옥은 나의 과거를 헤집고 짜깁기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어떤 죄인지가 더 중요하며, 그 죄 속에서도 새로운 무언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거기에서는 공포는 중요하지 않았으며, 슬픔과 아픔, 세계관과 이 세계의 현실, 구원의 몸부림이 더욱 더 중요했다. 죄를 넘어서서 구원의 가능성을 볼 것. 아직 끝나지 않는 삶의 지평에서 구원의 가능성을 찾을 것. 단테가 속삭이는 이 말들 속에서 나는 새롭게 지옥을 본다. 아니 나의 과거를 본다. 거기서 구원을 찾을 것. 삶의 새로운 가능성 속에서 새로운 삶의 지평과 구원을 꿈꾸어 볼 것. 그러면 언젠가 나에게도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가 나타나지 않을까? 아직도 끝나지 않는 단테의 여정과 함께하며 그 가능성의 지평을 찾아볼 생각이다. 언젠가 나타날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를 꿈꾸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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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과 달빛 민음사 세계시인선 35
롱펠로 지음, 김병익 옮김 / 민음사 / 197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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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과 달빛-롱펠로

 

는 음악이 되고 싶어 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시는 음악이 되고 싶어 했다. 과거에 음악과 하나였다가 어느 순간부터 음악과 분리되어 나와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한 시는 계속적으로 음악을 향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리듬과 운율을 통해서 시는 음악이 되려는 시도를 지속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욕망이다. 왜냐하면 시가 음악이 되는 순간 시 자체의 고유한 영역이 사라지고 음악 속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시가 음악이 되면 시는 사라진다는 슬픈 진실은, 시가 품고 있는 음악이라는 시원에 대한 욕망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추구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쩌면 불가능한 것을 알기에, 영원히 필패라는 것을 알기에 시는 음악이 되고 싶었나 보다. 문학사에서 많은 시인들이 걸어간 이 불가능의 여정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실패의 기억처럼 보인다. 불가능하기에, 필패할 수밖에 없기에 도전했고, 실패했지만 그 여정 자체가 너무나 아름다운 별처럼 빛나는 기억들.

 

그러나 19세기 상징주의를 거쳐서 20세기 모더니스트들의 등장은 시가 지속적으로 품어 왔던 음악에 대한 욕구가 사그라지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모더니스트들은 시가 음악이 아니라 시 자체가 되기를 바랐고, 철저한 이성적 창조 행위를 통해서 시가 하나의 이성적이고 상징적인 구조가 되게 만들었다. 아니면 그들은 시가 음악이 아니라, 그림이 되기를 원했다. 시에 대한 인식의 변하는 시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뒤엎고 새로운 평가가 득세하게 만들었고, 그 와중에서 기존에는 최고의 평가를 받던 시인들에 대한 평이 변화하는 계기가 된다. 이 경향의 변화에서 최대 피해자는 누가 뭐라고 해도 19세기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시인 롱펠로였다.

 

‘그리고 시인의 노래가

음악처럼 내 머리를 꿰뚫었고

밤이 그 모든 은총과 신비를

내게 풀어주었네.‘

 

에드거 앨런 포가 무명과 가난의 설움 속에 서서히 죽어 가고 있었고, 절친이었던 호손이 가난 앞에서 쩔쩔매고 있었고, <모비 딕>의 작가 허먼 멜빌이 철저한 무명의 그림자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롱펠로는 하버드 대학의 교수를 거쳐 폭발적인 대중적 인기를 누린 시집의 저자로서 인세로만 떵떵거리며 살면서 엄청난 인지도와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바다 건너 영국에서도 그의 인기는 대단해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라는 두 개의 대학 모두가 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영국에 갔을 때 빅토리아 여왕이 직접 그를 반겼으며, 사후에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시인 묘역에 흉상이 세워진 미국 최초의 시인이 되는 영광을 누린다. 이 모든 건 내면의 감정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표현하면서도, 전혀 어렵지 않은 언어를 구사하고, 거기에 실생활에 적용될 만한 교훈을 포함시키면서 리듬감과 운율이 살아 있는 그의 시가 동시대 대중의 취향에 정확하게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음란하지도 않고, 포처럼 기분이 나쁘거나 어둡지도 않고, 멜빌처럼 무슨 말인지 모를 말을 하는 것도 아니고, 호손처럼 깐깐한 윤리를 강요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고, 충분히 아름다우면서도 누구나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글을 쓰고, 충분히 실생활에 쓰일 교훈을 주면서 음악성이 살아 있는 그의 시를 동시대 대중이 사랑하고 아낀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러나 그 당연함은 세기가 바뀌고 이성적인 면을 강조하는 신비평이 득세하는 모더니즘의 시대가 오면서 큰 약점으로 모습을 바꾼다. 포처럼 뭔가 특별하지도 않고, 멜빌처럼 해석의 다양성을 품고 있는 것도 아니고, 호손처럼 윤리의 문학적 형상화에 큰 공을 들인 것도 아닌 롱펠로의 시는 개성도 없고, 철학적인 통찰력도 없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인 면도 약하고, 언어적 조형성도 예술이라고 보기에는 허술한 면이 강하고, 고전 작품의 표현이나 문구를 사용할 때 그냥 그대로 쓰는 엉성한 면도 있고, 메시지를 그냥 그대로 전하는 표어 같은 면까지 있기에, 혹평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망각의 그늘로 사라진다. <검은 고양이>,<주홍 글씨>,<모비 딕>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 때, 롱펠로의 시들은 잊힌 채로 사라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나 개인적으로도 그의 시집을 읽지 않았다면 롱펠로라는 시인이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우리를 황홀케 하는 것은 미지의 신비.

우리는 여전히 변덕스럽고 욕심내는

어린아이들.‘

 

어두운 망각의 그늘 속에 숨어있던 그의 시를 만난 것은 몇 년 전의 일. ‘이런 시인도 있었구나.’하는 생각에 무심코 펼쳐든 <햇빛과 달빛>에 쓰여 있는 시들의 순수함과 단순성, 서정적인 아름다움, 생생히 살아 있는 리듬감과 운율에 감탄해서 읽어나갔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지나치게 이성적인 언어적 구성과 독특하다 못해서 엽기적으로까지 여겨지는 표현과 실험에 지쳐갈 때 만난 그의 시들은 시원한 청량음료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래, 이런 시가 있었지! 시란 노래에 가까운 것이었지! 연어가 온갖 고난을 겪고 자신의 고향에 다다르는 것과 같은 기분. 시 그 자체가 아니라 노래가 되고 싶어 하는 시들과의 만남, 이 시의 시원을 향한 여정에서 만난 순수함과 단순함의 아름다움은 내 마음에 행복감을 스며들게 했다. 햇빛과 달빛이 마음속의 공간이 찾아들고, 눈송이가 하늘의 ‘구름 낀 가슴에 오래 감춰 둔 절망의 비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마을 대장장이의 성실하고 순박한 삶의 아름다움을 만나고, 자연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을 만나는데 어찌 행복하지 않겠는가! 비평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받아들이려는 마음으로, 피하지 않고 나의 마음의 문을 여는 순간 그의 시가 품고 있는 아름다움이, 20세기 신비평을 하던 비평가들이 놓치고 있던 그 삶에서 창조된 시의 단순한 아름다움이 내 마음으로 허겁지던 파고들어오던 순간의 기쁨이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로버트 프로스트가 느꼈던 그 기쁨을 나도 느끼면서 한 번 말해본다. 인식의 틀을 깨뜨리는 시만을 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만들고 성찰과 통찰의 기회를 제공하는 시만을 시라고 하는 것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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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의 결혼 민음사 세계시인선 46
윌리엄 블레이크 지음, 김종철 옮김 / 민음사 / 199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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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국과 지옥의 결혼-W. 블레이크

 

 

 

 

지금 분명히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 전쟁 때문에, 질병 때문에, 폭력 때문에, 우울증이 심하기 때문에, 세상의 억압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범죄 때문에, 가난과 빈곤에 의해서 굶주림을 겪고 있기 때문에. 평범한 이들은 자신들의 삶의 범주에서만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이런 죽음을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하지만 시인은 다르다. 시인은 자신의 삶의 범주를 넘어서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에, 도처에서 넘쳐나는 죽음의 그림자를 바라보고 느낀다. 윌리엄 블레이크. 그도 마찬가지였다.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고, 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는 블레이크가 도처에서 넘어나는 죽음을 모른 척 하고 지나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당대 영국이라는 시대 속에서, 산업혁명으로 인한 급속한 산업화 때문에 생겨난 변화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급격한 빈부격차와 그에 따른 빈곤과 가난과 폭력과 범죄가 넘쳐나는 도시의 그림자를 바라볼 수밖에 없던 블레이크는 그곳에서 비명을 들었다. 그에게 런던은 공포와 비명이 가득한 공포의 도시였다.

 

 

 

‘사람마다의 울음 속에

모든 어린아이의 공포에 질린 울음 속에서

모든 목소리와, 모든 금지령 속에서

나는 인간이 만들어 낸 굴레를 듣는다.‘

 

 

 

도처에서 들리는 비명과 도처에서 보이는 죽음의 그림자 때문에라도 블레이크는 시를 쓰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판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를 쓰고 판화를 만들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만든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만들고 만들어도 그에게 들리는 비명이 줄어들지 않았고, 눈앞에 보이는 죽음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결국 블레이크는 자신만의 독특한 신화체계를 구성하고 그 속에 빠져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세상의 부조리와 모순이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는 자신만의 신화적 세상을 창조하고 그것을 통한 세상의 변화를 상상해야만 했다. 그의 후기 시들에서 그의 독특한 신화적 체계가 지속적으로 강조되고, 그것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진정 간절히 세상이 변화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바람과는 달리 쉽게 변하지 않았다. 죽음의 그림자는 여전히 그의 망막 앞에서 어른거렸고, 사람들의 공포의 비명은 그의 귓가에 계속해서 들려왔다. 그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고, 죽음이 다가와서야 편하게 쉴 수 있었다. 죽음이 다가와서야 평안을 찾은 시인. 제대로 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고, 평생 무명과 가난과 빈곤 속에서 살아야 했던 블레이크가 눈을 감자, 그가 토해냈던 시의 흔적들 또한 거대한 망각의 늪에 빠져버렸다. 19세기 중엽에 라파엘전파에 속한 예술가들과 테니슨 같은 시인들이 그의 시를 발견하기 전까지. 그들이 블레이크의 시들을 발견하자, 그의 시는 세상에 거대한 용트림을 하며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나 여기 있다고. 여기 세상의 죽음을 그냥 넘기지 못한 시인의 영혼의 울림이 있다고.

 

 

 

‘어리석음이란 하나의 끊임없는 미로,

얽힌 뿌리들이 길을 어지럽힌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거기에 빠졌던가!‘

 

 

 

시간의 벽을 뛰어넘어 만난 시들이 망각의 심판을 극복한 시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더군다나 그 시들이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얘기하는 영혼의 울림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나 스스로가 위안 받았던가. 여기에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그냥 넘어가지 못한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 감정들은 이내 블레이크가 느꼈던 아픔과 고통을 나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그가 느꼈던 아픔과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내가 느낄 수 있는 만큼만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느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느낌을 가져보려고 시도했다는 것만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진짜 블레이크가 아닌 작은 블레이크가 돼서 ‘천국과 지옥의 결혼’을 상상력으로 경험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한다. 이 모든 것들이 블레이크의 신화적이고 낭만적인 시들이 초래한 일이기에. 덧붙여서 블레이크의 영원의 울림이 계속해서 이 세상이라는 어두운 골짜기에 계속 울려 퍼지기를 기대해본다.

 

 

 

나는 속이 빈 갈대를 꺾어

 

그것으로 전원의 붓을 만들어

그리고 맑은 물을 물들여서

모든 아이가 듣고 기뻐하도록

내 기쁨의 노래들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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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밑 페스티벌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문학사상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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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물밑 페스티벌-츠지무라 미즈키

그 남자의 독서노트1

그는 사라졌다. 작디작은 방안 가득한 책과 노트들을 남겨두고. 언제나 부스스한 몰골로 작은 자기 방안의 작은 책상에서 영혼이 책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책을 열심히 읽어나가던 그를 우연히 만날 때마다, 나는 그가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그렇게 파멸을 예감하게 만드는 위험한 감각이 있었다. 책을 너무 많이 읽었고, 지나치게 열심히 읽었던 그는,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책을 구분하지 못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이 ‘책’이라고 주장했다. 삶이라는 제목의 책에 자신이 글을 써나간다는 그의 주장은 광기의 수준을 넘어서서 묘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의 생각을 믿는 수준이 아니라, 그것이 당연하기에 일상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식으로 나른하게 말을 하는 그의 얘기를 들으며 나는 생각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몇 달 전부터 그와 연락이 되지 않으며, 불길함을 느낀 나는 그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나는 책과 노트만 가득한 방을 보게 되었다.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였지만 오직 그만 없는 그 방을 보며 나는 그가 드디어 사라졌음을 알았다. 그의 휴대폰도, 그의 지갑도, 그가 목숨처럼 아껴서 언제나 넣어 다니던 작은 수첩과 볼펜도 언제나 놓여 있던 자리에 있었는데, 제자리에 있어야 할 그만 없었다. 그는 과연 어디로 간 것일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책들과 독서노트들을 남겨두고 어디로 간 것일까? 섣부른 추측 따위는 하고 싶지 않는 나는, 예전에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는 혹시라도 자신이 사라진다면 자신의 책들은 내 마음대로 하고 독서노트는 챙겨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의 말에 따라서 우선 노트들을 집에 가져가기 위해 챙겼다. 그 외의 방의 물건은 그대로 놔두고 그의 방을 나섰다. 언젠가 그가 다시 돌아온다면 그것을 반기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문득 그의 독서노트 중 하나를 펼쳤다. 독서노트 63권. 중간 부분을 우연히 펼치니 바로 일본에서 현재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명인 츠지무라 미즈키의 <물밑 페스티벌>에 관해서 그가 적어놓은 글들이 보였다. 여기에 그 글 중 일부와 내가 쓴 글들을 적어 보겠다.

‘이 마을은 괴물이다.’라고 그는 적었다. 그 밑에는

‘괴물인 마을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괴물이 되어야 한다. 괴물이 되어야만 마을 자체가 괴물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괴물이기에 그들은 마을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마음껏 괴물스러운 행동을 벌일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다시 조금 더 내려다보니 이런 글이 적혀 있다.

‘괴물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절대로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오만과 자만이야말로 괴물들이 괴물들로서 살아나가는데 있어서 핵심적인 것이다. 자신들이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마음껏 괴물성을 향유하며, 마을이라는 괴물을 지켜나가게 된다.’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도대체 이 책은 무슨 책이기에 괴물이라는 말만 잔뜩 있는 것일까?

 

는 호기심에 <물밑 페스티벌>을 읽었고, 읽고나서야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알게 됐다.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이자 일종의 성장소설이기도 한 이 소설은 읽다보면 책 자체가 괴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든다. 소년의 비극적 사랑을 만든 원인부터, 사랑의 과정에서부터 비극적인 결말까지, 악습과 억압이라는 물밑에 가득 잠긴 마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괴물인 마을에서 살아가는 얼마나 괴물스러운지 보여준다. 가장 무서운 건, 괴물들의 자기 정당화나 그것들을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는 생각이 아니라,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아무 탈 없이 일상을 유지해나가려는 그들의 욕망이다. 분명히 부당하고, 폭력적이며,부도덕하기 그지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음에도, 그것들을 자신들의 일상이라고 여기면서 그것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그들의 욕망이야말로 '괴물의 진정한 핵심'이다. 그도 그걸 알고 글로 썼다.

 

'마을은 계속 괴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괴물이 괴물로서의 일상을 유지해갈 수 있다. 자신들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괴물들은 계속 괴물들을 양산해내며, 괴물로서의 변화를 거부한 자가 생기면 어떤 식으로든 그들을 포섭하려 한다. 포섭에서도 그 사람이 괴물로서의 변화를 거부하면, 그들은 한순간의 양심의 가책이나 망설임 없이 그들을 제거한다. 도덕성과 윤리 의식, 이상주의에 사로잡혀서 괴물로서의 변화를 거부하는 이들을 그들을 순식간에 으스러뜨린다. 사랑의 광기와 낭만성에 사로잡혀 괴물이 되는 것을 거부한 소년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괴물성 앞에서 소년의 순수함과 사랑은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이 책에서 진정 중요한 것은 '괴물되기냐 괴물되지 않기냐' 하는 실존적인 물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맞는 말이다. 지금 이 삶에서 중요한 것은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괴물되기냐 괴물되지 않기냐'이다.

 

‘제발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해주세요. 다음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유키미를 지킬 것이다. 아무리 우스꽝스러워도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손을 다시는 놓지 않을 것이다.'

‘평온한 일상을 ’되찾은‘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 마을에서는 언제 어느 때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저 먼 옛날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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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개 민음사 세계시인선 21
W.워즈워드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197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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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무지개-워즈워스

 

 

 

1.

워즈워스의 눈은 자연을 훑는다. 지배와 이용의 대상으로서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니라,자연 그 자체로 아름답고, 신비하고, 숭고하고, 선하다는 듯이. 시인이 자연을 아름다움과 신비와 낭만과 선함과 숭고함과 치유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순간, 자연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인이 바라보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인의 시각과 자연이 품고 있는 것들이 만나서 상호작용을 할 때 시인의 마음에는 하나의 거대한 심상과 정서들이 생겨난다. 그것들이 생겨나면 시인에게 시를 쓰라고 강요하고, 시인은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언어로서 표현하게 된다. 워즈워스의 시들은 그렇게 쓰였다. 그는 시를 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쓴 것이다. 자연의 강요가, 자연과 시인의 마음이 만나서 만들어진 심상과 정서의 강요가 없었다면 워즈워스의 자연을 노래하는 시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2.

세련되고 정련된 언어도 아니고, 고상하고 지적인 언어도 아니고, 평범한 민중들이 쓰는 언어를 바탕으로, 평범한 삶을 아름답게 표현하는 것을 자신의 시의 기본으로 삼은 워즈워스에게 자연은 최적의 소재였다. 누구나 쉽게 접하지만, 충분히 시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품고 있고, 워즈워스 자신이 추구하는 내적인 정서의 흘러넘침으로서의 시작을 가능하게 만드는 요소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영국 시들이 고정관념을 깨부수고 더 나아가서 당시의 일반적인 영국 사람들의 시각 자체와는 판이하게 달랐던 이런 시들은 그 자체로 혁명적이었고, 그의 시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인정을 받기 시작하면서 영국 시세계의 혁명은 시작된다. 콜리지와 함께 쓴 <서정담시집>에서 촉발된 이 시적 혁명은 영국 낭만주의라는 이름으로 후배들에게 전해지고, 이후 영국 문학은 낭만주의의 거센 물결에 휘말리게 된다.

 

 

안타까운 건, 워즈워스가 명성을 얻고 현실에 안주하던 40대 이후로는 창작력의 고갈을 겪으며 예전과 같은 시들을 써내지 못했다는 사실. 유동하면서 넘쳐나는 에너지로 시를 써내던 시인이었기에, 안주하자 창작력이 고갈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해도 영국 낭만주의를 이끈 시인이 전혀 낭만적이지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서글펐다. 이 서글픔은 책을 덮고 나서도 나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워즈워스 보다 먼저 태어났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낭만주의 시들이 당대에 전혀 주목받지 못하고 망각의 어둠 속에 파묻혀 19세기 이후에야 주목받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워즈워스야말로 영국 낭만주의 문학의 시초이자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볼 때마다

내 가슴 설레느니.

나 어린 시절에 그러했고

다 자란 오늘에도 매한가지.

쉰 예순에도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죽음이 나으리라.‘(18)

 

 

 

3.

주변에서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쉽게 찾기 어려운 시대다. 신문이나 TV에는 자극적인 뉴스가 넘쳐나고, 드라마나 영화에는 성형과 몸매관리, 피부관리로 빚어낸 인공적인 아름다움과 인위적인 즐거움이 가득하다. 돈과 성공이라는 목표에 얽매여 살아가는 이들은 아름다움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살아가고, 그런 것들을 꿈만 꾸는 평범한 이들도 일상의 관성에 얽매여 아름다움과는 상관없이 살아간다. 여유를 가지고 하늘을 보는 것도, 주변을 잠시 둘러보는 것도 하지 못하고 속도에 떠밀려 그냥 살아가는 이들이 다수인 이 시대에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찾는 것은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찾고 싶다. 워즈워스의 시가 좋았던 것은 그것을 내 눈앞에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찾기 힘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편안하게 포근하게 언어로서 보여줌으로써 휴식과 치유의 시간을 제공하는 그의 시들을 만난다는 건, 진짜 시대착오였지만 너무나 편안하고 기분 좋은 시대착오였다. 아니 그건 시대착오라는 말 이전에 우리가 잊어버리고 살아가는 인간 삶의 편안함을 만나고, 모든 걸 품어주는 자연의 품에 안기는 아름다운 행동이었다. 그 기분을 잊지 않으리라. 워즈워스가 비록 40대 이후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그가 보여준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 낭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에. 그가 나이 들어 무지개를 보고 더 이상 가슴 설레지 못하고 죽은 채로 살아간다고 해도 그가 과거에 썼던 글들이 죽는 것은 아니기에. 시를 읽고 그의 무지개가 나의 무지개가 되어 나만의 아름다움으로 마음 속에 간직됐기에.

 

 

 

'수탉이 울고,

냇물은 흐르고,

작은 새들은 지저귀고,

호수는 반짝거린다...

산에는 기쁨이 있다.

샘에는 생명이 있다.

작은 구름들은 하늘을 날고,

파란 하늘은 드넓게 펼쳐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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