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의 왕국
현길언 지음 / 물레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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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숲의 왕국-현길언

<숲의 왕국>을 읽고 갑자기 두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 그리스 3대 비극 작가에 속하는 이 두 사람의 이름이 갑자기 왜 떠올랐을까? 이제부터 여기에 관해 잠시 써보도록 하겠다.

 

아이스킬로스는 그리스 비극을 진정한 극예술의 길로 이끈 인물이다. 그는 배우 1명과 코로스의 노래로 구성된 그리스 비극을 이인극으로 바꾸고, 비극을 극예술의 경지로 들어서게 만들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내게 그는 아테네의 전성기를 몸으로 체험하며 아테네의 미덕을 표현하고 신을 찬양하는 극작가로 기억된다. 그는 동방의 강국 페르시아를 그리스 연합군이 격파한 살라미스 해전과 마라톤 전투에 직접 참여했고, 뒤이은 아테네의 전성기를 몸소 체험하며, 아테네의 위대함과 미덕을 굳건히 믿었고, 페르시아로 대변되는 오만한 인간들이 재앙을 겪는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이 모든 것 뒤에서 신은 인간이 오만하지 않다면 올바른 길로 인도하다고 믿었다. 그에게 신은 조화와 질서의 수호자였고, 이 세상을 올바르게 이끌어나가는 존재였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이 종교적인 이유는 바로 이 신에 대한 찬양과 믿음 때문이고, 그가 인간의 이야기를 하지만 신을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 극 속에 숨겨놓았기 때문이다. 그는 죽기 전까지 자신의 믿음, 신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올바르고, 아테네가 위대하다는 그 믿음을 견지했다.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은 그의 후배 격인 소포클레스의 비극과 비교해도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인 소포클레스는 그리스 비극을 진정한 극예술로 만든 그리스 비극의 대표자이다. 그와 아이스킬로스의 비극의 차이는 두 사람의 삶의 차이를 반영한다. 소포클레스는 아테네의 전성기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의한 급격한 몰락을 모두 겪은 인물이다. 그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해 패망하기 전에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기까기 아테네의 성장과 번영, 위기와 몰락을 모두 겪었다. 아테네가 급격하게 성장해서 역시 급격하게 몰락한 것을 모두 본 소포클레스에게 세상을 움직이는 신은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극에서 신을 불가해한 존재로 그리면서 인간의 운명에 대해서 얘기한다. 신의 의도를 우리가 알 수 없으니, 우리는 그저 우리 자신의 운명과 삶에 대해서 얘기할 수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래도 그는 죽기 전까지 아테네의 미덕을 믿었다.

 

이에 비해 그리스 비극의 3대 극작가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에우리피데스는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와 다르다. 그건 그의 삶이 두 사람의 삶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에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의 잠깐 동안 아테네의 전성기를 경험한 에우리피데스는 뒤이어 아테네의 몰락을 몸소 경험한다. 그의 삶의 다수의 시간은 아테네의 몰락으로 점철된 것이다. 전쟁과 전쟁에 의한 고통, 스파르타의 압박과 아테네의 패전에 따른 온갖 부조리한 경험이 그의 삶을 채우고 있다. 전쟁을 외치면서도 막상 전쟁터에 나서면 이기지 못하는 정치가들, 그런 정치가들을 계속해서 찍어주고 그에 따라 온갖 고통을 경험하는 아테네 시민들, 어른거리는 죽음과 패망의 그림자를 어떻게든 극복하려 하면서도 어떤 해결책도 보여주지 못하는 아테네의 상황, 슬픔과 고통과 기아와 폭력으로 점철된 세상의 모습들. 여기서 에우리피데스는 이 세상이 부조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그에게 신은 알 수 없는 불가해한 존재이자 부조리한 존재였고, 아테네의 미덕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고, 인간들은 자신의 눈앞에 닥친 문제를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모순적이고 부조리한 존재였다. 그는 신과 아테네의 미덕에 회의를 표하고, 인간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리스 비극을 인간의 탐구로 만들었다. 그는 인간 내면의 심리를 탐구하고, 부조리한 신에 의해서 시련을 겪는 인간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허약한지를 그려낸다.

 

위에서도 적었지만 아이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는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세상에 대한 이상적인 믿음을 유지한 아이스킬로스와 세상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에우리피데스. 나는 이 두 사람의 모습에서 <숲의 왕국>을 쓴 현길언 씨와 나를 대입시켜본다. 완벽한 의미의 비유는 아니지만, 그래도 유사성을 찾아본다면 <숲의 왕국>을 쓴 현길언 씨는 아이스킬로스에 가깝고, 나는 에우리피데스에 가깝다고. 나이로 보나 살아온 시대상으로 보나 책의 저자인 현길언 씨는 나의 윗세대에 속한다. 군부 독재를 겪으며 민주화에 대한 열망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나의 윗세대들은 거시적인 사회적인 비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더 나은 사회에 대한 믿음으로 민주화를 이루어낸 나의 윗세대들이 지금에 이르러서는 그 믿음을 상당부분 상실한 것은 맞지만, 분명한 건 그들이 그것을 가졌었다는 사실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숲의 왕국>에는 그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인간과 세상의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믿음으로서의 그림자. 그래서 나는 현길언 씨가 아이스킬로스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그에 비해 나와 나의 선배, 후배를 포함한 세대들에게 거시적인 사회의 비전에 대한 경험은 미약한 수준이다. 우리의 대부분의 삶은 IMF 이후에 이루어졌고, 그에 따른 고용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를 항상 따라다닌다. 우리는 정규직이 아니라 비정규직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대를 살아왔고, 사회적인 비전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에 대한 걱정만으로 벅찬 삶을 살아왔다. 친구들과 만나서 하는 이야기는 거시적인 사회적 비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자신들의 생존과 삶의 불안을 메우려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우리의 존재 조건은 언제나 생존 그 자체였고, 그것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내 자신이 에우리피데스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인간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믿음보다는 인간과 세상에 대한 불신과 회의에 더 익숙한 것이 우리 세대의 모습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니체의 회의주의와 카뮈의 '시지프스의 신화'에 끌렸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믿음, 사회적인 비전에 대한 믿음을 얘기하는 담론들보다는 세상을 회의하고, 세상의 부조리함 속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를 매혹시켰다. 무턱대고 인간과 더 나은 세상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을 내 존재 조건에 비추어보건대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숲의 왕국>을 읽고 나니 갑자기 그 믿음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맹신과 복종이 아니라, 대책없이 무언가를 믿는다는 것에 끌림을 느낀 것이다. 어쩌면 그건 낭만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낭만을 가진다는 건, 팍팍한 삶을 지금보다 더 행복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 낭만성, 인간과 세상에 대한 대책없는 믿음을 가진다는 건 지금보다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현길언 씨의 믿음을 믿고 싶어졌다. 그것을 믿는다면 지금의 삶보다는 더 나아지리라는 근거없는 믿음을 마음 속에 품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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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 이야기 바벨의 도서관 28
레옹 블루아 지음, 김계영 옮김, 이승수 해제,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바다출판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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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한 이야기-레옹 블루아

불쾌하도 또 불쾌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책을 다 읽고 나서도. 보통 즐거움이나 기쁨,슬픔,아픔,

아련함,씁쓸함,혼란스러움,고뇌 등의 감정을 독서를 통해 느끼는데, 이 책은 불쾌함이라는 드문

감정을 독서를 통해서 느끼게 했다. 다 읽고 나서 떠오르는 생각도 '내가 왜 이런 불쾌한 책을

읽고 있는 것일까?'였다. 도대체 작가는 왜 이런 책을 쓴 것일까? 진짜 세상에 불쾌한 일이 많아

서 그것을 알리고 싶어서? 아니면 인간과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 싫어서 그 불쾌함을 표출

하고 싶어서?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알기 위해서 책의 처음에 나오는 보르헤스의 작가와 작품

소개글과 마지막의 해제를 들여다본다.

레옹 블루아. 부르주아 세계에 봉사하는 공범자로 보았던 성직자들과 공식 문학과 단절하는 태

도를 보여 세상 불화했던 작가. 인간 자체와 인간들이 살아가는 삶과 사회 자체를 조롱하고

경멸했으며, 이에 대한 신랄한 독설을 선보인 작가. 블랙 유머의 창시자로 자신만의 블랙 유머로

세상과 인간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 작가. '우리는 이미 지옥에 있고, 모든 인간은 자신

의 동료를 고문할 책임을 맡은 악마'라고 생각한 인물. '프랑스가 선택된 민족이고 다른 민족

들은 그 접시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핥아 먹어야 한다' 주장한 인물. 반유대주의자. 프로

이센 군을 무서워하는 저격병 마르슈누아르와 지금 세대들에게 레옹 블루아로 알려진 냉정한

논객의 이중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 '우주는 일종의 신성한 암호문이고, 그 안에서 모든 인간

하나의 단어, 문자 혹은 단순한 구두점'으로 우주의 심연과 별들이 단지 인간 의식의

투사일 뿐이라고 주장한 남자. 실증주의와 대립하고 인간의 진보 따위는 믿지 않고 인간과 역사

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한 인물. 영국,미국,독일,벨기에를 공평하게 혐오하고 증오한 인간. 에밀

졸라를 위시한 동시대의 작가들에게 혹독하기 그지없는 비난을 퍼붓던 작가.

레옹 블루아에게 인간이란,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이란 혐오스럽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그는 이

혐오감을 표출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글쓰기를 선택했고, 글쓰기를 통해 자기 안에 가득찬 인간과

세상에 대한 혐오감과 증오심을 여지없이 표출한다. 그가 창안한 블랙 유머라는 문체적 스타일은

그의 혐오감과 증오심의 표출을 돕는데 일조하고, 그는 그걸 통해서 자신만의 독설의 경지를 창조

해낸다. 소설도 독설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불쾌한 이야기>는 레옹 블루아식 독설의 힘을 보여

주는 불쾌한 이야기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 소설에서 내내 들떠있다. 마치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너무나 기쁘다는 듯이. 그는

기쁘고 즐겁 불쾌한 이야기들을 독자의 눈 앞에 내민다. 계속해서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그의

활력적이고 유쾌한 문체가 보여주는 이야기들의 내용은 그의 문체의 느낌과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아버지를 증오해서 죽음으로 몰아넣딸, 돈 때문에 살아 있는 아버지를 화장시켜버리는

아들, 딸과 사위가 자신과 따로 사는 것에 앙심 품고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딸과 사위를 압박해

서 죽게 만드는 어머니, 자신을 괴롭히던 예전 집주인의 머리를 길에서 우연히 주운 작가, 충실

하게 교회다니고 자선을 베풀지만 직업이 킬러인 남자, 재혼 위해 아들 죽이는 어머니, 모든

함께하는 네 남자, 자신이 사랑했던 죽은 누이의 목소리를 창녀에게서 듣는 남자 ...... 레옹

블루아는 어둡기 그지없고,음습하며,더럽고,찝찝한 비윤리적인 이야기들을 너무나 즐거운 말투

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의 말투를 따라 가다 보면 어느새 몸 전체를 엄습하는 불쾌감을 만날 수

있다.

현재의 책들 중에서 이 책보다 잔인한 책들은 많다. 그러나 이런 독특한 스타일로 대량의 불쾌감

을 조성해내책을 만나기란 지금 이 시대에도 쉽지 않다. 잔인한 표현이 거의 없는데고 잔인

하고, 더럽고 찝찝한 표현을 쓰지 않는데고 더럽고 찝찝하게 여겨지는 이야기들을 창조해내는

그의 능력만큼은 인정하고 싶다. 시대를 앞서 독설과 불쾌감의 선구자로서. 그 이상의 무언가

를 찾는 것은 어렵다. 사실 이 책에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바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것처

럼 느껴진다. 불쾌감을 즐겁게 독자의 몸에 묻히는 책에서 뭔 의미를 찾는단 말인가?

실증주의를 조롱하고 인간의 진보 따위 믿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증오한 레옹 블루아의 글에서

어떤 철학적인 메시를 찾으려고 노력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하지만 독서에서 항상 의미를

찾는게 중요하다고 여기는 강박증을 가진 불쌍한 독서광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의미를 찾아나섰다. 그리고는 온몸에 불쾌감만 잔뜩 묻히 퇴각해야 했다.

온몸에 불쾌감이라는 오물을 잔뜩 묻힌 채로 책을 덮으니,이런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있는가?'. 거기에 대한 해답은 의외로 쉽게 찾았다. 책이 거기에 있었으니까.

나는 <불쾌한 이야기>가 내 눈앞에 있었기에 읽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행위의 결과로 불쾌감

이라는 결실을 얻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시 이런 류의 책을 읽지 않는다고 얘기할 수는

없다. 독서라는 덫에 빠진 나는 나중에 또 이런 책들을 읽으리라. 그리고 또 불평하리라. <불쾌한

이야기>가 주는 불쾌감은 여기서 최절정에 달한다. 내가 이 불쾌한 독서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

못하리라는 예측 자체가 이 책이 내게 전해준 최악의 불쾌감으로 다가왔다. 이 최악의 불쾌감

앞에서 나는 그저 몸서리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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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식탁 위의 책들 -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종이 위의 음식들
정은지 지음 / 앨리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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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식탁 위의 책들-정은지

 

*네이버의 모 독서 클럽에서 50주 동안 1주도 빼놓지 않고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됐기에, 이제부터는 게으름 부리지 않고 블로그에 꾸준히 서평을 올릴 예정이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서평이라기 보다는 독서감상문이나 책을 읽고 나서의 소감 정도에

불과하겠지만.

 

 

나는 문자중독은 아니다. 주변에 문자 중독에 가까운 분이 있어서 아는데, 그분은 문자로 된

것들은 다 읽으려고 하신다. 나는 문자로 된 것이라도 책이 아니면 잘 읽지 않는다. 신문은

배척하고, 우연히 손에 쥐게 된 전단지도 시큰둥하게 넘긴다. 휴대폰의 문자도 잘 보내지 않고,

답장도 짧게 하며, tv에서 나오는 자막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주변의 광고판도 잘 쳐다보지

않고, 심지어 식당의 메뉴판도 몇 번 보지 않고 넘긴다. 인터넷에서도 나의 그런 성향은 여전해서

블로그,카페 글도 내가 보고 싶은 글들만 본다. 인터넷 뉴스는 거의 보지 않고, 댓글은 정신

건강을 위해 앞으로도 볼 계획이 없다. 인터넷 공간의 게시판 자체에 관심도 없고, 참여도 하지

않으며, 글도 왠만해 서는 달지 않는다. 스마트폰이 없으니 카카오톡도 안하고, SNS도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책으로 넘어오면 상황은 달라진다. 병리적 증상으로서의 책중독은 아닐지라도, 내가

책중독에 가깝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루라도 책을 안 읽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라도 책의 문자 하나라도 읽지 않으면 어디가 허전한 것은 맞다. 자기 전에 책을 읽지 않아도

잠을 못자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읽으면 잠이 잘 오는 것도 사실이다. 가방에는 언제나 책 한권

정도는 들어 있으며,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읽을 수 있는 상황이 되면 반드시 책을 읽으려고

한다. 심지어 예비군 훈련 갔을 때도 책을 들고가서 시간 날때 틈틈이 읽었다.(예비군 훈련 가서

보르헤스의 <알렙>와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읽고 머리가 아파서 힘들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 책중독이 신체에 이상을 초래하는 병리적 증상은 아니라서 몸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폐암이나 간암이나 성인병의 걱정은 없다. 다만, 근심걱정이 예전보다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나 말고 다른 이들도 근심걱정을 많이 한다는 것을 생각해 볼때 나만 특별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여러모로 살펴보니 책중독은 신체적인 질병과 고통을 동반하지 않는 조금은

색다른 중독처럼 보인다.

 

그러니저러니 해도 내가 책중독에 가까운 것은 사실이다. 신체적 질병과 아픔을 동반하지

않는다고 해서 중독이 중독이 아닌 것은 아니다. 다른 중독을 겪어보지 않은 나에게 이 중독은

유일무이한 중독이고, 그 중독이 불러일으키는 쾌감은 언제나 유일한 것이다. 책을 읽을 때의

행복,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주는 기쁨, 책을 읽을 때의 황홀경은 다른 누구도 느낄 수 없는

나만의 것이다. 때로는 친구처럼, 스승처럼, 연인처럼, 가족처럼, 원수처럼, 존경의 대상처럼,

증오의 대상 처럼 다가오는 천변만화하는 책의 매력은 나같은 책중독자에게는 언제나 새롭고도

새롭다. 또 책중독자에게는 책을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쾌락의 원천이자 쾌락의 과정이자 쾌락

그 자체가 된다. 나는 책을 읽을 때 만큼은 스콜라 철학을 거부하고, 에피쿠로스를 따라서 책의

쾌락주의자가 되며, 마르크스를 거부하고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앉는 손에 따라서 이기적인

책의 탐식을 한다.

 

위의 모든 것을 종합해 봤을 때, 나는 <내 식탁 위의 책들>을 쓴 저자 정은지와는 너무 다르다.

이 책의 저자는 혼자서 음식을 먹고서 책 읽는 것을 좋아하고, 음식 때문에 책이 좋아지며, 책에

음식이 나오면 황홀해한다. 반대로 나는 책을 읽기 때문에 그때 먹는 음식을 좋아하고, 책 때문에

음식이 좋아지며, 책에 음식이 나와서 황홀한 것이 아니라 책을 읽기 때문에 황홀하다. 책이 아닐

경우에 나에게 음식은 큰 관심의 대상은 아니다. 물론 미각의 쾌락을 무시할 수는 없다. 나도

먹을 때 만큼은 맛있게 먹으려고 노력하며,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는 관심을 보인다. 하지만 음식

때문에 책이나 음식 관련 글을 읽지 않고, 자발적으로 음식 블로거의 블로그를 찾지 않는다. 나는

단지 책에 음식이 나오면 관심을 보이며 '맛있겠네.' 하고 생각할 뿐이다. 나는 푸드 포르노 중독

과는 거리가 멀고, 미식가를 자처 하지도 않고, 맛집을 찾아 다니지도 않는다. 나에게 먹는다는

행위는 생존에 필수적인 행동으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행동에 가깝지, 쾌락의 대상으로서 중독에

빠져서 하는 행동아니다.

 

그러니 나는 이 저자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철저하게 이해하지

못한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이해할 뿐이다. 나는 그녀처럼

음식을 탐식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처럼 책을 탐독하는 것은 맞다. 이 반쪽의 조화는 책을 읽는

내내 지속적으로 불협화음과 마찰음을 일으키는데 일조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하면서도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의 주장에 동조하면서도 동조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생각과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반박했고, 반박하면서도 공감했다. 끊임없는 대화로서의 독서. 혼자서, 비록

저자가 쓴 글과 하는 대화였지만, 나는 진짜 대화하는 것처럼 읽어나갔다.

 

첫부분인 '책을 내며'부터 이 대화는 시작된다. 저자는 '책을 내며'에 이런 글을 썼다.

'단호히 말하지만 세상에 아직 못 먹는 음식보다 맛있는 음식은 없다.' 나도 이 부분을 읽고

단호히 '내게는 그렇지 않다.'라고 마음 속으로 이야기했다. 내게 못 먹는 음식은 못 먹은 음식

뿐이었다. 그건 맛있는 것도, 맛없는 것도 아닌 아직 먹지 못한, 맛을 모르는 음식에

불과했다. 거기에 어떻게 단호히 '맛있겠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내게 맛있는 음식은 아직 못

먹은 음식이 아니라 먹어 보고 맛있다고 느끼는 음식이다. 그러니 내게 이 문장은 너무 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것을 먹지 못한 음식에 대한 갈망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인정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이 부분부터 시작된 대화는 계속되어 마지막까지 이어졌다. 나는 어찌보면

반목했지만, 동시에 그녀가 보여주는 음식에 대한 글들에서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나에게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만찬장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저자와 끊임없이 대화하며 음식

박물관에 전시된 음식들을 들여다보는 경험에 다름 아니었다. 보지 않고, 모르는 음식들을

갈망하고 욕망하기보다는 그것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것들이 어떤 것들인지 알아가는 경험

으로서의 독서. 그때의 독서는 침이 고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확장되게 하면서 나

자신을 풍요롭게 만든다. 아무리 책으로 음식을 이야기해도 나는 그것이 먹고 싶다는 생각

보다는 '세상에,이런 음식들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미각적 욕망은 앎의 욕망에

압도당했고, 숨죽여 나 자신의 앎의 세계가 확대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럴 때 앎의

욕망은 어떤 감각적 욕망보다도 더욱 더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고, 어느새 앎의 욕망은 미각적

욕망과 이어지고 있었다. 먹고 싶다가 아니라, 침이 고이는 것이 아니라, 더욱 더 알고 싶다는

욕망의 이름으로 나의 앎의 욕망은 다른 육체적인 욕망과 다를 바 없는 것이 되었다.

 

아, 나는 깨닫는다. 내가 책의 저자와 다른 욕망을 갖고 있지만 그녀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먹고 싶다와 알고 싶다가 하나가 되고, 지나친 탐식과 지나친 탐독이 하나가 되는

경험이 나를 압도할 때 나는 책의 저자와 내가 다르지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실김한다.

멍하니 <내 식탁 위의 책>이라는 제목보다는 <내 책안의 음식>이라는 제목처럼 보이는 책을

쳐다본다. 나는 더 읽고 싶다. 나는 더 알고 싶다. 그리고 외친다. 단호히 말하지만 세상에

아직 못읽은 책보다 재미있는 책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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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르 지만지 희곡선집
장 라신 지음, 송민숙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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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페드르-장 라신

 

1.

라신의 눈은 세밀하다. 그의 눈은 인간이 감추고 있는 내면을 섬세하게 파헤치고,

인간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감정의 흐름을 좇아서, 그것들의 변화의 양상을 글

로써 펼쳐보여준다. 특히 정념에 사로잡힌 인간들의 심리 변화를 세밀하게 그려

는데 있어서 그의 비극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더욱 더 놀라운 건, 그가 남자

도 불구하고 여성의 심리 묘사에 능하다는 사실이다. 남자라는 성적인 한계

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성 뿐만 아니라 여성의 심리 묘사에 능하다는 사실은,그

세밀하고 섬세하게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고, 파악하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려준다. 이것은 그의 라이벌인 코르네유의 비극과 비교하면 확연하게 차이가

는데, 코르네가 그려내는 남성적이고, 의지에 가득찬 인간들의 세계에서

념이 의지에 종속거나 아니면 정념이 의지의 힘에 눌려서 그 빛을 잃어버리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지 앞에 무력한 정념, 혹은 의지 앞에서 사라져버리는 정념.

코르네유에게 정념의지에 비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지나친

지에의 강조는 오히려 르네이유 비극의 현실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어버

다. 권력에의 욕구,국가에충성 혹은 강력한 이상의 추구에 헌신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내는 그의 비극세계는 그의 극 자체를 현실이나 삶의 모습이라기보다

는 이상적인 이념이나 구호에 가까운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는 인간들이 이상이

나 대의,국가정신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걸 수 있다면서 극을 통해 우리가 그렇게

되도록 선동한다.

 

하지만 라신은 그와 반대다. 라신은 인간 감정과 심리의 모순적이고,비이성적이며,

란스러움을 꿰뚫어보고 있다. 그는 인간들이 입으로는 이상과 이성을 말하면서도

작 자기 자신이 그에 따르는 게 쉽지 않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삶과 추상적인 구호와 철학의 괴리를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다. 그는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 얼마나 맹목적이고 비이성적일 수 있는지, 얼마나 이상하

게 변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라신의 세밀한 눈은 그런 모습을 파악해서 비극에 담

는다. 정념비극이라고 불리는 그의 비극에서 인간들은 애정에 눈이 멀어 파멸이라

불꽃에 다가가는 부나방이 되어버린다. 라신은 이상과 구호가, 삶의 실체와 인간

감정의 혼란스러움 앞에서 얼마나 쉽게 무너져내리는지 보여준다. 그는 인간들이

입으로는 이상이니 정의를 떠들어도, 극으로 상연되는 작품에서는 불같은 사랑과

그에 따른 파멸적인 인간의 행동을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이 정도에서

예상할 수 있겠지만, 코르네이유와 라신의 경쟁은 라신의 승리로 막을 내린다. 그리

라신은 섬세한 눈과 작가적인 재능을 바탕으로 지위도, 돈도 없이 태어났다는 핸

디캡을 극복하고 문학적 성공과 정치적 성공을 동시에 거머쥐는 전대미문의 업적을

이룩한다. 그에게 세한 눈이란 삶과 정치적, 문학적 성공을 위한 강력한 무

다름 아니었다.

 

2.

라신의 눈은 냉정하다. 그가 섬세하게 인간의 심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은 그가 유

하다는 말과는 다르다. 그의 섬세함과 세밀함은 역설적으로 그의 냉정함이 없었다

위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이념이나 이상,구호나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들의 모습을 냉정하게 그려나간다. 그가

바라본 인간들이 비이성적이고, 감정적이었기 때문에 그가 정념의 비극을 창조해내

고, 그것을 계속 써나갔던 것이다. 그는 그것을 극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과 출세,정치

에도 이용한다. 그가 유명하지 않았던 시절에 그의 극을 상연시켜주었던 희극의 대가

몰리에르를 배신하고, 그의 대본을 몰래 공연했던 일이나,그렇게 몰리에르가 자신과

절연을 선언하자 몰리에르 극단의 유명 여배우를 데리고 떠난 일, 코르네유와의 경쟁

에서 코르네유의 약점을 폭로하며 철저하게 승리한 일, 사교적인 재능으로 왕의 신

임을 얻어 왕의 치세에 대한 공식역사를 쓰는 사료편찬관을 시작으로 정치적인 출세

길로 들어선 일까지, 그는 냉정한 시각을 바탕으로 세밀하게 인간의 성향과 성격을

악하고, 그 분석을 자신의 목적에 맞게 사용함으로써 삶의 성공을 거둔다. 3세에 부

님을 모두 여의고, 9세에 포르루아얄 수도원에 들어가서 운좋게 교육을 받을 수 있

던, 이 아무것도 없었던 남자는 삶을 바라보는 냉정한 시각이 없었다면 삶에서 성공

을 거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시에 이 냉정함은 라신의 철저한 현실인식을 형성하고, 극작품의 세계관을 결정짓

는데 큰 역할을 한다. 부모를 어린 나이에 여의고, 자신에게 지식을 가르쳐준 수도원

마저 왕의 압박으로 폐쇄된 상황에서, 라신은 무엇보다 정치적 권력의 힘과 현실의

무서움을 실감한다. 그에게 세상이란, 인간의 노력을 통해 변화할 수 있거나 어떤 특

정한 이상을 추구해서 살아가는 대상이 아니라 변화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철저하게

적응할 수밖에 없는 가혹하고 냉정한 곳이었다. 라신의 이런 자각은 그 자신이 극작가

로서 철저하게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연극의 규범을 지키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

력했다는 사실, 작품 속에서 정치적 권력관계는 변하지 않고, 정념에 빠진 인간들이

파멸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며 인간의 어리석음과 무력함을 표현하면서도 체제 자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일체 아무말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라신은 반드시 5막 구조여야 하고, 군주와 귀족들의 이야기여야 하고, 등장인물들이

반드시 군주와 귀족 계급에 한정되며, 그 계급에 맞는 언어를 사용해야 하고, 왕이나

여왕, 귀족들이 살았던 인위적이고 제한된 세계만을 묘사하며, 주의 깊게 구성된 12음

절 시인 '알렉상드린'을 대사로 써야하고, 행동-시간-장소의 삼일치를 이루어야 하

며, 상이나 초현실적인 사건들을 배제하며, 권선징악을 표현해야 하며, 이성을 중시

한다는 절대왕정의 문학적 형상화인 17세기 프랑스 고전주의 비극의 규범을 철저

하게 지키면서도 동시에 이 규범의 준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그 안에 인간의 정념이라는 통제할 수 없는 비이성적인 요소를 가미시켜 자신만의

극을 창조해냈다. 그의 비극은 체제를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창조적이고, 창조적이면

서 체제 유지적인 문학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현실을 냉정하게 바라보는 눈이 없었다

면 불가능했던 일로, 라신은 이 냉정한 눈으로 자신만의 문학 세계 창조와 삶의 성공

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거머쥔다.

 

3.

세밀하고도 냉정했던 라신. 창조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라신. 체제 유지적이면서도 체

제를 이용할 줄 알았던 라신. 삶에서는 철저하게 성공 지향적이면서도 문학에서는 정

념을 강조했던 라신. 성공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문학에

서는 비관적인 세계관을 보여줬던 라신. 이 모순적인 작가는 35세에 이미 아카데미 프

랑세즈 회원이자 문단의 지도자로 올라서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페드르>를

써내지만, 적대자들의 음모로 인해서 이 작품이 저평가 받자 8개월 뒤에 공식적으

작가 자리에서 물러나 사료 편찬관이 된다.(나중에 두 편의 작품을 더 써내지만, 그것

은 자신의 자발적인 의지라기보다는 귀족의 주문에 의한 것으로, 예술적인 목적이 아

니라 교육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라신의 이전 작품들과는 확연히 다른 스타일의 작품

들이다.) 그리고는 작가의 길로 다시는 돌아서지 않고, 정치적인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다 조용히 숨을 거두다.

 

4.

라신의 모든 것이 집약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 그의 작품의 정수를 모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작품이 <페드르>이다. 출세의 길로 들어서기 직전에, 자신의 작가

인생의 모든 것들을 정리해서 써낸 <페드르>는 전형적인 고전주의 희곡의 규율을 철

저하게 따르면서, 라신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가 빛을 발한다. 특히 여성들의 애정

심리를 철저하게 파고들어가면서 사랑의 무시무시함을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 드러낸

이 작품은, 언어로 표현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프랑스 고전주의

비극의 언어 중시적인 측면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언어로 인물 간의 갈등 관계, 애정,

치열한 대결의 양상을 표현한다. 그는 구절구절, 대사 하나하나마다 고전주의의 조화

미와 질서미를 철저하게 지키면서 아름다운 시구들을 쏟아내고, 그것으로 인물들의

치열하기 그지없는 정념의 투쟁을 그려낸다. 새어머니의 양아들에 대한 금지된 사랑

을 그린 그리스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의 <히폴리토스>에서 소재를 취해서 조금

더 극적이고 투쟁적으로 변화시킨 이 작품은, 사랑이라는 비합리적인 감정이 초합리

적인 힘으로까지 변화해서 새어머니 페드르를 파멸로 몰아넣는 과정을 보여주며, 라

신 비극이 지속적으로 보여주는 '인간의 비합리성'에 대한 시선 역시 놓치지 않고 제

시하고 있다. 사랑이 아무리 강력해도 견고하기 그지없는 체제에 균열조차 만들 수

없다는 냉정한 사실의 표출 또한 여전하다. 이 모든 것들을 포착한 이 작품의 독서가

끝나고 나니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작품의 언어적 수사가 삶의 냉혹한 진실

앞에서 무용하다는.

 

5.

솔직히 라신의 이 작품을 읽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지금은 쓰지 않는 표현과 문장들

즐비한데다, 구어체의 대화와 표현에 익숙했던 내가 노래하듯 주고 받는 운문 대사의

낯설음을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계속 읽다보면

노래하듯 주고받는 대사의 아름다움, 대사 자체가 하나의 시가 되는 독특함 예술성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 부분에서 라신이 보여주는 정념의 무시무시함은 그

취하고 있는 제스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정념의 비극을 통해서 그가

살아간 사회적 체제의 견고함을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당대의 지배층들은

연극을 보면서 파악했고, 그래서 그를 아끼고 종용했던 것이리라. 이 깨달음을 얻고

니, 갑지가 <페드르>에서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성공을 위해서 향해서 걸어

는 이 남자의 뒷모습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그의 앞길이 반드시 행복한 것만은 아

니고, 그가 얼마나 성공이라는 목표를 이루려고 시달렸는지 너무다 잘 알고 있기 때

문이다. 어쩌면 이 남자가 만든 작품에서 파멸하고 죽음을 맞는 페드르 보다 그가 더

고통스러울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죽음을 통해서 삶의 억압에서 벗어난

페드르에 비해서 늙어 죽을 때까지 삶의 억압에 매여서 힘들게 허덕인 이 남자가 더

가엾게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6.

라신은 자신의 삶을 비극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몸부림쳤고, 삶의 결말만 놓고 보면

그의 삶은 비극이 아니다. 하지만 그의 몸부림이, 그의 삶의 면면이, 그가 삶이라는

길을 걸어간 길에서는 왠지 모를 비극의 냄새가 풍긴다. 그의 삶은 비극이 아니었지

만, 그의 삶에서 비어져 나오는 비극의 분위기는 그로 하여금 비극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비극을 써야 했기에 썼다. 그는 비극의 운명에 취해서

비극을 토해냈다. 아, 이것이야말로 진짜 비극이다. 삶은 비극이 아니었으되, 삶을

살아간 인간은 비극적 운명을 타고났던 것. 이것을 비극이 아니면 무엇이라고 하겠

는가! 이 삶의 비극 앞에서 라신이 쓴 <페드르>는 숨을 죽인다. 나는 <페드르>에서

이 숨죽임을 포착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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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지만지 고전선집 494
소포클레스 지음, 김종환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28.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소포클레스

 

M에게

 

삶과 죽음

M, 내 주변의 어떤 친구는 종종 내게 이렇게 말했어. 죽을 때는 반드시 자살하겠

다고. 그런데 말이야, 지금까지 자살하지 않고 멀쩡히 살아있는 걸 보면 자살하기

가 사는 것보다 쉽지 않은가봐.^^ 어쩌면 그 친구의 그런 말은 '살고 싶다'는 말의

변형은 아니었을까? 자기는 살고 싶고, 살아가야 하는데, 세상일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고, 자기 스스로도 힘드니까, 그런 식의 발언을 하면서 역설적으로 살아갔

던 것은 아닐까? 이 애기를 하니까 갑자기 에밀 시오랑이라는 철학자가 떠오르네.

에밀 시오랑도 종종 '자살하겠다'고 얘기했던 인물인데, 언제라도 자살할 수 있으

니까 오히려 자살을 미루고, 늙어서 자살하지 않고 평범하게 죽은 인물이거든. 그

에게도 '자살하겠다'는 말은 진짜 자살의 의미가 아니라 '살아가겠다'라는 말의 변

형이었던 것이야. 그러니까, 멀쩡히 살아가고 있는 사람에게 죽음을 향해 스스로

다가가는 자살이라는 행위는 쉽게 할 수 없는 것이란 얘기지. 그냥 말로서만 '죽

니, 사니' 하는 거지.

 

살아가는 이들에게 죽음이란 그렇게 먼 거야. 말로서만 떠들수 밖에 없을 정도로.

하지만 평범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살아가는 동안에는

잊어버리려고 노력하지. 죽음에 대한 회피,무시,모른체하기는 현대인들에게 너무

당연하거야. 그런데 그런 노력이 오히려 현대인들이 죽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반증은 아닐까? 우리가 죽음을 무시하고,회피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무의

식적으로 '삶과 죽음이 이어져 있다'는 문장을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아무리 눈을 돌리려 해도 죽음이 우리 곁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모른체하려 한 것은 아닐까? M,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를 보면서 삶과 죽음을 생각하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인 오이디푸스의 죽음을 보면서 삶과 죽음의 상호작용은 쉬운 듯 하면서,

쉽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깨달았거든.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모습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오이디푸스 왕>의 다음 이야기야. 오이디푸스 3부작

의 두번째 이야기로서,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 오이디푸스의 마지막 모습을 그리고

있어. 그런데, 시간 순으로 보면 두번째 이야기지만, 작품이 쓰여지고 상연된 것으

로만 따지면 마지막 작품이야. 여기서 잠깐 오이디푸스 3부작에 대해 잠시 애기해볼

께. 3부작을 작품 내부의 시간대로 놓고 보자면 <오이디푸스 왕>,<콜로노스의 오이

디푸스>,<안티고네> 순이야. 하지만 쓰여지고 상연된 순서대로 보자면 <안티고네>

가 가장 먼저이고, 그 다음이 <오이디푸스 왕>이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소

포클레스의 유작으로, 소포클레스가 죽고 나서 이름이 똑같은 손자에 의해 상연된

작품이야. 소포클레스는 자신이 죽고 나서야, 오이디푸스를 죽음의 세계로 돌려보낸

셈이지.

 

소포클레스가 왜 이 비극적 주인공의 마지막을 자신의 마지막 작품으로 했는지에 대

해서는 내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어. 그냥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을 수는 있겠지. 어

쩌면 소포클레스는 자신이 가장 마음을 쏟았던 자기 작품 속 비극의 주인공을 죽음

다가오는 시점에서 함께 동반자로 삼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물론 이 모든

지극히 주관적인 나의 망상이야. 그러니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기를.^^) 소

포클레스가 태어난 콜로노스에서 오이디푸스가 최후를 맞는다는 점도 나의 이런 망

상에 힘을 보태고 있어. 자신이 태어난 곳에서 자기가 가장 아끼는 작품 속 인물의 죽

음을 맞게 하는 건, 자신과 함께 떠날 동반자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아니면 너무나

혹독한 운명을 부여해서, 온갖 고생을 한 오이디푸스에 대한 동정심의 발로일 수도

있겠지. 오이디푸스가 죽음을 맞는 장면을 쓰면서 소포클레스는 이렇게 말했는지도

몰라.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게, 친구여. 곧 있으면 따라갈테니.' 이거 너무 어이없는

망상인가?^^;;

 

그래도 소포클레스가 자신의 마지막을 앞두고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를 글로 썼다는

봤을 때, 그가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에게 어떤 애착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아. 애착이 없었다면 어떻게 노년에 이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애착이 있었

비극으로 마무리 지어진 <오이디푸스 왕>의 뒷 이야기인 <콜로노스의 오이디

푸스>를 쓰고, 오이디푸스에게 비극적인 운명의 마침표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을 선사

했겠지. 그래, 이 작품을 보면 알겠지만 진짜 오이디푸스에게는 죽음이야말로 최고의

휴식이었어. 살아서 친아버지를 죽이고, 친어머니를 아내로 삼았으며, 자식이자 형제

매들인 이들을 자신의 손으로 낳은 근친상간의 패륜을 범하고, 그 모든 걸 깨닫고

스스로 눈을 찔러 장님이 되어 어둠속에 자기자신을 유폐시키고, 계속해서 방랑할

밖에 없는 이 불운한 비극적인 인간에게 살아간다는 건 벌 그 자체이자 고통의 연

속이었던 거야.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도 그의 불행은 계속 이어져. 자신이

방랑하는 것에 상관없이 오직 테베의 왕위를 차지하는 것에만 관심을 가졌던 두 아들

은 서로 대립하다 결국 원수지간이 되어 싸우고, 오이디푸스의 시신을 차지하는 쪽이

앞으로의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신탁때문에 테베의 시민들과 크레온, 권력다툼에 밀려

테베에서 쫓겨난 아들 폴리네이케스가 오이디푸스를 노리고 검은 마수를 뻗쳐오지.

장님에다 아픈 몸을 이끌고, 딸 안티고네의 손에 이끌려 간신히 걸음을 옮기는 이 불쌍

한 노인에게 운명은 마지막까지 잔인했던 거야. 신탁에 따라서 자신이 최후를 맞는다

고 정해진 콜로노스에 왔는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죽기 전까지는 잠시간의 평온을

허락하지 않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래도 죽음은 죽음이더군. 태어났으면 죽는게 너

무나 당연한 인간의 삶에서, 이 당연함이 불운한 오이디푸스의 삶에서 어찌나 행복으

로 여겨지던지. 누구나 맞는 마지막이 그에게는, 그 누구와도 다른 삶의 선물이었던

셈이야.

 

오이디푸스와 소포클레스를 기억하라!

오이디푸스의 죽음이 완벽하게 평온한 것은 아니었어. 죽기 전까지 많은 시련을 겪거

든. 또 비극을 불러온 자신의 격한 성정을 역시 제어하지 못해서 고생하거도 해. 그래

그의 죽음은 선물이 확실해. 자신을 가장 사랑했고, 자신이 가장 아꼈던 딸 안티고

네가 처남인 크레온 때문에 안타깝게 죽는 상황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자신의

혈육인 아들들이 권력 때문에 싸우다 서로 죽이는 걸 보지 못한다는 축복을 받았거든.

죽었기에 보지 못했고, 보지 못했기에 조용히 눈을 감을 수 있었지. 만약 더 오래 살

서 그 모든 장면을 봤다면 그는 죽음을 맞아서도 제대로 눈을 감을 수 없었을 거야. 하

지만 보지 못했기에, 그는 별다른 걱정없이 평온하게 죽음을 맞았던 거지. 뿐만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와 함께 마지막에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고, 그리스 신화의 영웅 테세우스가 그를 인정하고 존중하고 그의 마지막

을 지켰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니 그의 죽음은 선물이 맞을 거야.(이게 선물이 아니라고

여겨진다면 한 번 <오이디푸스 왕>의 마지막을 떠올려봐.^^)

 

신들은 그의 삶을 가혹한 비극의 장으로 만들었지.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그에게 평온

을 안긴 것 또한 신들의 계획이었어. 이 불가해한 운명의 신비, 삶과 죽음의 희비극적

인 교차, 아름다운 비극이자 비극적 운명극이기도 한 오이디푸스의 마지막을 보면서

내가 느낀 감정은 한 가지 말로는 쉽게 표현이 안 될 것 같아. 그의 성공과 몰락, 그의

자식들의 미래, 그 자신의 마지막을 담은 오이디푸스 3부작을 모두 봤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 M, 나는 이 3부작에서 삶의 무서움과 괴로움, 삶의 신비를 봤어. 그리고 인간

의지의 아름다움과 자연과 운명 앞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나약함도 봤지. 이

모든 모순적 사실들이 나를 하나의 감정으로 이끌지는 않더군. 복합적이기도 모순적인

감정이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읽고 나서 샘솟았던 것이야. 그걸 뭐라고 한 가지

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나마 한 가지 문장은 머리를 스치더군. 그건 '평온한 죽음을

맞고 싶다'는 염원이었어. 우스운 얘기지만 평균 수명이 80세를 바라보는 이 시대에 30

대 초반인 내가 평온한 죽음에 대한 생각을 갑작스럽게 하게 된거야. 이걸 나이 드신

들이 본다면 얼마나 우스워할까?^^ 그래도 나는 그 생각을 굽힐 생각은 없어. 나는

진짜 평온하게 죽음을 맞고 싶거든. 그렇게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역시 이상한가?

^^ M, 그래도 반드시 평온한 죽음을 맞고 싶다는 내 생각에 변함은 없어.

 

이제,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 대한 글을 마칠 시간이야. 더불어 오이디푸스 3부작

에 대한 글도 모두 끝이야. 이렇게 적고보니 뭔가 한 것 같지만, 글쎄 그건 삶이라는

과정의 일부분에 불과한 일이었겠지. M,나는 이렇게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하게 된 것이야. 이거 너무 소포클레스의 운명론 같은 발언인가?^^ 분명한 건 내가 이

3부작을 읽는 동안 행복했고, 삶에 대해서 예전보다 조금 더 무언가를 알게 되었다는 사

실이겠지. 그게 나의 운명이었어. 운명, 이젠 이 두 글자의 무게감을 마음 속에 더 깊이

새길 수 있겠지. 피할 수 없는 게 운명이라면 더 이상 피하지 않겠어. 이 3부작을 읽었

던 것처럼, 오이디푸스처럼, 운명이라면 받아들이겠어. 이게 오이디푸스 3부작을 읽은

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말이겠지.^^ 마지막으로 오이디푸스와 소포클레스 모두 저 세상

에서 행복하게 지내기를 염원할께. 그럼, M 다음에 만날 때까지 이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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