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들
김중혁 지음 / 창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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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좀비들-김중혁 

이번에는 살아있는 시체들인 좀비들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살인,살인 하다가 그 다음이 시체이야기라니..
이러다가 다음에는 해부이야기 하고, 그 다음에는 유령이야기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다시한번 말하는 데, 이런 순서를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계획한 것은 아닙니다.
그냥 쓰다 보니 저도 모르게 이런 식의 순서가 나왔습니다.
그러니 저를 이상하게 보지 말아주세요. 저는 살인이나 피 이야기에 질색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입니다.^^;;

변명은 여기까지 하고, <좀비들>에 관한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좀비들>은 김중혁이 처음으로 쓴 장편소설입니다. 
저는 이 작가의 단편집 두권을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펭귄뉴스>와 <악기들의 도서관>이 그 책들인데요,
톡톡 튀는 상상력과 기발한 이야기 구성 능력에 감탄했었습니다.
특히 <악기들의 도서관>의 몇몇 단편들은 정말 기발하고 젊은 상상력이라는 사실을 실감하는
독서의 경험이었습니다.


그래서 김중혁이라는 작가가 내놓은 최초의 장편소설인 <좀비들>을
'김중혁이 만든 좀비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라는 기대를 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제가 처음 가지고 있었던 질문은
'김중혁이 만든 좀비는 뭔가 다르다'라는 문장으로 변화되더군요.
 

그러면 김중혁이 만든 좀비는 어떤 점이 다른가?
가장 결정적인 차이점은 좀비들이 단순히 죽이기 위한 괴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이오 해저드><사일런트 힐> 같은 게임부터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나는 전설이다>같은
영화에 이르기까지의 좀비들은 죄다 흉측하고,사고능력이 없고,오직 인간을 잡아먹기 위해 존재하는 괴물들 입니다.
그것들은 느릿느릿 움직이며 사람들을 죽이고,공포심을 갖게 하는,
이해할 필요 없는 이물질로만 존재하며, 언제나 인간들에 의해 타도되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런데, <좀비들>의 김중혁이 이야기하는 좀비들은 오직 인간들을 죽이려하는 괴물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죽었지만, 완벽하게 죽지 못한 존재로서 살아 움직입니다.
그들은 한때는 우리의 형제.자매.부모.자식이었던 존재들로서,
우리가 사랑했던 존재로서, 우리의 삶에서 사라졌다고 믿었던 과거의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망각하고 사는 죽음을 상기시키는 존재이고,현재만 보고 매달리는
우리에게 잊혀진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들입니다.
'죽고 나면 그만이거든. ... 잊혀지고 나면 모든 게 똑같아지는 거고,
똑같아지고 나면 아무도 기억을 못해.'  

<좀비들>에서 좀비들은 미약하고,힘없고,무기력하고,불쌍하고,슬픈 존재들입니다. 
바라보고 있으면 애잔하고,처량하고,슬퍼지는 존재들이 김중혁의 <좀비들>인 것입니다.
소설에서 <좀비들>은 괴물이 아닙니다. 오히려 좀비들을 이용해서 다양한 실험을 하고,
좀비들을 마구 죽임으로서 막강한 군대를 형성하기 위해 노력하는
인간들이 더욱 괴물에 가까운 존재로 느껴집니다.

이렇게 김중혁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뒤바꾸어 좀비들에게 슬픈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서 좀비들을 죽이고,
기뻐하는 인간들과 그에 반대해 좀비들을 살리려 하는 인간들을 포함한
소설 속 모든 인간들의 삶까지 함께 쓸쓸하게 만들어버립니다.

어쩌면 김중혁이 말하는 대로 우리네 삶이란 겨우 힘없는 좀비 따위나 죽이며 만족을 얻는,
분명히 과거가 존재함에도 과거같은 것은 없다는 듯이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그런 삶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삶이 우리네 삶이라면, 우리는 이제 조금 생각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체불명의 좀비가 나타나면
먼저 죽이려 하거나,무서워하지 말고,
먼저 저게 뭔지 관찰해보고 판단해 보는 자세를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요.
만약 우리가 그 정도의 포용력과 열린 자세를 가진다면,
우리네 삶이 조금이나마 덜 쓸쓸해지지 않을까요.
 

저 같은 경우는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좀비가 나타난다면 먼저 그게 어떤 존재인지 파악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러고나서 좀비가 위험하다면 미친 듯이 도망치겠습니다.
도망치고 나서 저를 구해줄 레지던트 이블의 밀라 요요비치 같은 여전사를 찾아보겠습니다.
(음, 이런 생각을 하니 웬지 덜 쓸쓸해지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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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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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설계자들-김언수 

<밀실살인게임>에 이어 또다시 살인과 관련된 책에 관해 글을 써보려 합니다.
물론 저는 살인 관련 책만 전문적으로 읽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읽었던 책들을 무작위로 골라서 적어나가다보니 어쩌다가 살인관련 책이
연이어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이점 오해하지 마시고 말아주세요.^^;;
(저는 피에 굶주린 살인귀가 아니랍니다. ㅠㅠㅠㅠ)

<밀실살인게임>과 <설계자들>은 전혀 다른 책입니다.
두 소설이 살인이라는 공통된 소재를 가지고 있다는 점만 같을 뿐,
전혀 다른 구성과 성향을 가진 소설입니다.
<밀실살인게임>이 살인 그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고,
살인의 과정과 살인의 트릭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면,
<설계자들>은 살인 자체보다는 살인을 저지르는 인간들의 슬픈 삶에 포커스가 맞춰진 소설입니다.
요약해보면, <밀실살인게임>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보다 살인이고
(저는 이게 진정 <밀실살인게임>의 끔찍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설계자들에서 중요한 것은 살인보다는 인간입니다.
인간과 인간들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게 <설계자들>인 셈이죠.

그래서 이 책을 읽다보면 끔찍하기 보다는 슬프고, 안타깝습니다.
주어진 삶 속에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설계의 덫에서 인간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래생의 삶의 이야기는 읽는 이로 하여금 슬픔의 정서를 샘솟게 합니다.
이건 정치적이거나 철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정서적인 이야기입니다.
거대한 설계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밟으면 꿈뜰대는 지렁이처럼 꿈뜰대고, 발버둥치는 래생의 삶은
지배와 피지배.계급.이데올로기.공공성.사회계약.담론.경제논리같은
개념들과 연관 있기 보다는 인간 생존의 문제,
그리고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기본적인 의지와 더욱 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래생은 단지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고 싶은데, 그게 안되는 상황인거죠.
그러니 몸부림치고, 몸부림치다 보니 그게 또다른 비극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 빠져나올 수 없는 순환구조가 평범한 이들의 마음에
정서적 울림을 던지는 것입니다. 설계자들은 그런 정서적 울림을 가진 실존적인 소설인 셈이죠.
'설계자들도 우리 같은 하수인들일 뿐이야. 그 위에는 설계자를 설계하는 놈이 있겠지.
... 그렇게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뭐가 남을까? 아무것도 없어.
맨위에 있는 것은 그냥 텅 빈 의자뿐이겠지. ...
아무나 앉을 수 있는 그 의자가 모든 걸 결정하지.'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 정서적 울림이란 게 그냥 나올리 없습니다.
작가의 역량이 없다면 울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설계자들>은 그런 점에서 아주 훌륭합니다.
솔직히 말해 제가 올해 본 한국소설 중에서 이 <설계자들>은 가장 흡입력이 있었습니다.
읽는 내내 손에 접착제를 붙히게 만든 것처럼, 책에 얼굴을 갖다 붙이게 하는 자력이 있는 것처럼,
<설계자들>은 충실하게 저를 이야기의 세계에 묶어두었습니다.
너무 전형적이라 자칫하면 고리타분하고,지루할 수 있는
살인자와 살인자를 조종해서 살인을 이뤄내는 설계자들의 이야기를 <캐비닛>이라는 독특한 상상력의 장편소설 하나만 달랑 쓴 소설가 김언수가 훌륭하게 요리해서
재미있는 이야기 결과물을 만든 것이죠.
 

무겁게만 가면 한 없이 무거워질 수 있는 살인과 살인의 설계,
그리고 그것들을 용인하고 이용하는 구조의 문제를 단지 무겁지만은 않게, 
그렇다고 또 한없이 가볍지도 않게 균형을 잡은데다, 거기에다 마지막에 가서
따스한 인간의 이야기를 집어넣은 소설가 김언수의 노력이 빚은 게 <설계자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부담없이 그가 설계한 래생의 이야기를 즐기면 됩니다.
(물론 즐기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건 취향과 팔자소관의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저는 <설계자들>과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고,즐거웠습니다.
설계의 수렁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에 빠진 킬러 래싱의 몸부림,
그 불가능을 향한 시시포스의 몸부림에서 바라본 시도 자체의 위대함.
그 위대함이 주는 깊은 여운에 젖어 다시 일상으로 나가볼렵니다.
그 일상이 일상의 설계자들에 덫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것이라고 해도.

*사실 <설계자들>과 가장 비슷한 소설은 <컨설턴트>입니다.
굳이 두 작품을 비교해보자면 <컨설턴트>가 <설계자들>에 비해 조금 더 정치적이고,
<설계자들>은 <컨설턴트>에 비해 훨씬 더 인간의 이야기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만간 <컨설턴트>리뷰도 써볼 예정입니다.
(계속 이어서 쓰기에는 <컨설턴트> 도 살인이야기라서 무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정상이기에 살인 이야기만 계속 쓰는 게 찔려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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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살인게임 - 왕수비차잡기 밀실살인게임 1
우타노 쇼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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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밀실살인게임-우타노 쇼고

우타노 쇼고는 종잡을 수 없는 작가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읽은 그의 책들은 본격추리소설이라는 장르만 같을 뿐,
전혀 다른 스타일의 변화를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의 세단편 중 하나인 
[그리고 명탐정이 태어났다]는 정통 미스터리에 대한 풍자,  

[생존자,1명]은 무인도에서의 잔혹한 서바이벌 게임,
[관이라는 이름의 낙원에서]는 추리소설에 대한 동경이 담긴 애잔하고 쓸쓸한 미스터리였고,
<시체를 사는 남자>는 에드거 앨런 포나 에도가와 란포가 쓴 것같은  

탐미적이고 기괴한 추리소설이었고,
<벚꽃 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는 사회파적 성향을 가미한 서술트릭 작품이었고,
<여왕님과 나>는 사회의 사각지대에 위치한 아웃사이더들이 펼치는  

심리 미스터리 소설이었습니다.


고정되는 것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우타노 쇼고가 추구하는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밀실살인게임>에서의 그의 또다른 변신을 기대하며 책을 들었습니다.
제목부터 웬지, 스멀스멀 불길한 포스를 품기던 이 책을 넘기며 초반 몇페이지를 읽자마자,
저는 와우!!라는 감탄사를 날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책은 시작하자마자 상식과 윤리와 도덕을 안드로메다로 날리며 기선제압을 합니다.  

상식과 윤리와 도덕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광인들이,  

역시 상식과 윤리와 도덕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린 살인게임을 펼칩니다.
여기까지 읽고, 저는 판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윤리적 의무감에 사로잡혀 정상성에 대한 욕망을 가진 채,
책을 덮어야 하는가, 아니면 윤리적 판단중지를 하고 소설은 소설로만 읽을 것인가.
하지만 언제나처럼 책을 읽고자 하는 욕망이 정상성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더군요.  

이 욕망은 정상성에 대한 욕망을 멈춰버리는 윤리적 판단중지 상태를 만든 다음에  

저를 미치광이들의 살인게임으로 이끌었습니다.
처음에는 거부감이 상당했지만 계속 읽어나가자 어느 순간 익숙해지더군요.
네, 저도 어느새 그들의 냉혹한 살인게임에 동참하고 있었던 셈이죠.
(음, 그게 어쩌면 더 끔직한 일일지도 ㅠㅠㅠ)

책의 큰 틀은 아주 간단합니다. 오프라인으로 만난 적 없고,  

오직 온라인으로만 대화하는 사람이 게임을 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불법도박도 아니고,온라인 게임도 아니고,컴퓨터 게임도 아니고,TV에 연결해서
하는 콘솔게임도 아니고,플래시 게임도 아닌 살인게임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섯 명중 한 사람이 실제 살인을 저지르고,  

살인범이 살인과 연관된 수수께끼를 말하면
나머지 게임 참가자들이 그 수수께끼를 푸는 방식입니다.  

반드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 정도의 정보를 살인범은 제공해야 하구요,  

나머지 사람들은 그것을 토대로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게임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살인은 하나의 오락입니다.  

그들은 원한이나 이익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게 아닙니다.  

그들은 재미라는 목적 하나 때문에 사람을 죽입니다. 아무 연관도,관계성도 없는 사람들을
단지 게임의 재미를 위해 죽이는 겁니다.
'죽이고 싶은 인간이 있어서 죽인 게 아니라 써보고 싶은 트릭이 있어서 죽였지.'

어떻습니까? 정말 비상식적이고,비도덕적인 이야기 아닙니까?  

자신이 도덕적이고,윤리적이며,상식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분들은 이 책을 읽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그래서 우타노 쇼고는 처음부터 자신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명확하게 제시했나 봅니다.  

처음 부분을 읽고 읽지 않을 사람은 읽지 마라는 엄포인 셈이죠.

그 때문에 졸지고 비상식적이고, 비도적이며, 이상한 인간이 되어버린 저는 그런 엄포에도
불구하고, 윤리적 판단 중지니 '소설은 소설일 뿐 현실이 아니다'를  

머릿 속으로 외치며 읽어나갔습니다.
궁금했던 거죠. 그들이 무슨 게임을 하고, 어떤 과정을 거치며,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윤리니 도덕이니 상식이니를 제외하고 읽어나간다면, 그들의 게임은 실로 흥미진진합니다.
어떠한 헐리우드 블럭버스터 영화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그들의 살인게임은 언제나 예측을 불허합니다.
고전적인 알리바이 트릭,밀실살인 부터 현실에 스플래터 호러영화에 나올 잔인한 이야기도 있고,
심리적인 허를 찌르는 트릭도 있습니다.
(게임의 흥미진진함은 작가의 역량인 셈이죠.  

윤리적인 판단을 제외한다면 우타노 쇼고의 이야기 구성 능력은

놀라운 수준입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고칠 수 없는 수준까지 병들어  

살인게임을 저지르는 광인들의 파티는 소설 내내 계속되다가, 

소설의 90%를 넘어가면 광인이 인간으로 변하는 지점이 나옵니다.
인간이라는 수도꼭지에서 드디어 인간성의 이야기가  

수돗물처럼 나오려는 시점이 등장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이 소설은 우리의 뒷통수를 강하게 때립니다. 기분 나쁠 정도의 반전이 나옵니다.
인간성의 이야기가 나오려는 시점에 소설이 끝나버리는 것이죠.  

그리고는 다음 편이 있다고 말합니다. ㅎㅎㅎ
(일본에서는 <밀실살인게임 2.0>이 이미 발표된 상황입니다.)

다른 누군가는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소설의 이야기에 끌린 저로서는
'왜 안 끝나?'보다 '다음 편을 읽고 싶다'라는 욕망이 더 강했기에 비난을 하고 싶지는 않더군요.
다만, 다음편이 빨리 나오기를 바라는 소박한 희망을 가져봅니다.

어쨌든 소설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고요.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폭발적으로 잔인하지도 않고,끔직하지도 않지만  

색다른 비도덕적 상상력의 대지를 개척한 이 소설은,  

바로 그렇기에 어떤 잔인하고 끔찍한 영화보다 끔찍합니다.
살인 자체의 끔직함과 잔인함이 아니라,  

살인 동기와 인간 심리의 끔찍함이 어떤 영화나 소설보다 끔직하고 잔인하게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더더군다나 인간적인 이야기가 끊어진 게 안타깝습니다.

이제 다음 편을 기다릴 생각입니다. 물론 다급하게 기다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유롭게 광인들의 게의 결말을 기대해 볼 생각입니다.  

추가적으로 우타노 쇼고의 또다른 변신도 기대해 보렵니다.
그가 어디까지 변신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요. 설마 벌레로 변신한 남자가 사람들을
죽이는 내용까지 가지는 않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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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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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브리다-파울로 코엘료 

코엘료가 <연금술사> 이후에 출판한 소설로, 90년도에 처음 나온 소설이 <브리다>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연금술사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느낌을 받았으며,
연금술사의 여성판 버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치기 산티아고가 이룩한 자아의 신화가,
마녀로서 신비주의적인 자아의 각성을 이루는 브리다의 자아 발견의 여정으로
바뀌어 있었으며, 그녀를 돕는 인물들을 보면서 산티아고의 여정을 돕는 인물들이 떠오르더군요.
(물론 그 인물들이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다만, 저는 조력자로서 산티아고를 돕던 인물들을 떠올려 본 것입니다.)
심지어, 책 중간에 양치기가 나오는데 그의 이름이 산티아고 입니다.^^
*p.195
오후 내내, 그들은 눈 덮인 숲을 거닐었다. ...(중략) 그러다가 양떼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가는 목동을 만났다.
"안녕, 산티아고!" 마법사가 목동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신께서는 목동을 각별히 총애하시지. 자연과 침묵, 인내에 익숙한 이들이거든.
그들은 우주에 소통하는 데 필요한 모든 덕목을 갖추고 있어." 

이 시기까지 코엘료의 문학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아무리 봐도 신비주의적 각성의 흐름인 것 같습니다.
그 흐름 속에서 <연금술사>,<브리다>가 위치하는 것이겠죠.
그런데, <브리다>와 <연금술사>와의 결정적인 차이는 사랑에 관한 중요도의 차이입니다.
<브리다>에서는 사랑이 핵심적인 가치로 부각되는데,
그것은 그 무엇보다 소울메이트와의 만남 및 그 사랑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소설의 포커스가 맞추어져 있는 것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뒤에 나올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를 예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이 피조물인 인간에게 베푸는 사랑과 인간들간의 운명적인 사랑의 의무,
그리고 여성들이 품고 있는 신성은 <피에트라~>의 핵심적인 주제로서 사용됩니다.
(<피에트라~>에서는 여성들이 품고 있는 신성이 신의 여성성이라는
더욱 더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또 섹스를 통한 신비적인 합일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11분>의 예고편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이렇게 여러모로 둘러보니 <브리다>는 파울료 뒷작품들이 잉태된 씨앗같은 느낌입니다.

에, 어쨌듯 지나치게 코엘료스러운 신비주의 소설이라서
오히려 저에게는 신비적인 느낌이 떨어지는 소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영적 각성 과정은 흥미로웠고,
사랑의 신비함을 새삼 실감하는 소설이었다 정도로 <브리다>를 정리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하고 보니 문뜩 허탈해집니다.
<브리다>는 소울 메이트도 만나서 필생의 사랑을 이루고,
영적 각성까지 해서 미래에 마스터가 될 인물이 되고,
스승인 마법사와의 인연으로 진실한 사랑의 의미도 깨닫는 판에
저에게는 왜 아무것도 없는 것일까요.
이거 이런식이라면 저도 마법사를 찾아나서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하니 지금 당장 쓸만한 마법사 찾아서 숲으로 가야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아마도 내 소울메이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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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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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빌린 책,산 책,버린 책-장정일  

오랫만에 읽은 장정일의 독서일기. 독서일기라는 형식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답게, 그의 서평은 일기의 형식을 빌고 있지만 그 자체로 읽을 만한 하나의 글이다. 서평이 단지 책을 평가하는 글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읽을만한 하나의 형식임을 보여주는 책.
어떤 블로거는 그의 글이 힘이 약해졌다고 혹평하지만, 내가 봤을 때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아니 나는 오히려 그의 자유롭고, 때로는 날카로우며,삐딱하며,비판적인 글들에 통쾌함과 매혹을 여전히 느끼고 있다. 책 제목과 달리 그가 소개한 책들은 나의 미래의 독서목록에 읽어야 책으로 등재될 예정이다. 이것만으로도 이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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