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
아니 에르노 지음, 정혜용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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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아니 에르노

<집착>의 주인공 '나'는 한 남자를 떠나 보낸다.

이별의 선고는 누구나 겪는 뻔한 이야기이다.

사랑했다 이별하는 건 사랑을 해본 이는 누구라면 겪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 뻔한 이야기가 뻔하지 않게 되는 부분이 책의 첫 부분에 등장한다.

남자가 헤어지면서 소설 속의 '나'에게 다른 여자랑 살게 되었다고

말하는 부분.

여기부터 뻔한 이별 이야기는 무시무시한 정념의 드라마가 된다.

나는 질투에 사로잡혀 폭주하기 시작한다. 식어버린 사랑이 질투라는

불꽃에 의해 대체되는 식으로.

나는 헤어진 남자가 같이 살게 된 애인의 정체를 알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다.

어떻게든 반드시 그녀를 알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힌 채.

평범한 일상은 질투가 불러일으킨 집착에 잡아먹힌다.

나의 삶은 그녀가 누구인지, 그녀의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상상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나는 삶은 오직 그녀로만 가득하다. 마치 그녀라는 귀신에 사로잡힌 듯.

나의 삶에서 질투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생생히 살아 있다. 아니, 그것은 삶 그 자체다.

질투=삶. 삶=질투.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시간이 지나고 질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다.

나는 질투가 불러일으킨 집착에 사로잡힌 과거의 시간들을 기록한

글을 살피며

과거의 자신을 돌아본다.

이 책은 그렇게 탄생했다.

아니 에르노 특유의 '자전적 허구' 방식 때문인지

이 소설의 '나'와 저자인 아니 에르노를 구분하는 건 쉽지 않다.

어디가 허구이고, 어디가 현실인지 명확하게 판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분이 중요한가.

무엇이 진실이고 허구인지 구분하는 것보다,

내가 이 미친 질투의 기록을 읽었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세상에 이런 질투가 있었다는 걸,

질투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새삼 확인 했다는 게 더 중요할 것이다.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분명 또다른 무수한 오셀로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질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집착>은 그 세상의 무수한 오셀로들에게 보내는 공감의 기록이자

경고장이다.

불타는 감정에 사로잡힌 '나'와

그 '나'를 냉정하게 관찰하는 관찰자 '나'의

아이러니가 빚어내는 모순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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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좀 여유가 있다.

며칠간은 너무 여유없이 급하게 쓴다고 정신이 없었다.

여유가 있는 만큼 편하게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러나 역시는 역시다. 오늘도 여전히 글은 떠오르지 않는다.

떠오르지 않는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맹세를 지켜야 하니까.

일단 손 가는 대로 써보자.


집착-아니 에르노

<집착>의 주인공 '나'는 한 남자를 떠나 보낸다.

이별의 선고는 누구나 겪는 뻔한 이야기이다.

사랑했다 이별하는 건 사랑을 해본 이는 누구라면 겪는 일이니까.

하지만 이 뻔한 이야기가 뻔하지 않게 되는 부분이 책의 첫 부분에 등장한다.

남자가 헤어지면서 소설 속의 '나'에게 다른 여자랑 살게 되었다고

말하는 부분.

여기부터 뻔한 이별 이야기는 무시무시한 정념의 드라마가 된다.

나는 질투에 사로잡혀 폭주하기 시작한다. 식어버린 사랑이 질투라는

불꽃에 의해 대체되는 식으로.

나는 헤어진 남자가 같이 살게 된 애인의 정체를 알기 위해

자신의 삶을 바친다.

어떻게든 반드시 그녀를 알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힌 채.

평범한 일상은 질투가 불러일으킨 집착에 잡아먹힌다.

나의 삶은 그녀가 누구인지, 그녀의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상상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나는 삶은 오직 그녀로만 가득하다. 마치 그녀라는 귀신에 사로잡힌 듯.

나의 삶에서 질투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다.

그것은 생생히 살아 있다. 아니, 그것은 삶 그 자체다.

질투=삶. 삶=질투.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시간이 지나고 질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다.

나는 질투가 불러일으킨 집착에 사로잡힌 과거의 시간들을 기록한

글을 살피며

과거의 자신을 돌아본다.

이 책은 그렇게 탄생했다.

아니 에르노 특유의 '자전적 허구' 방식 때문인지

이 소설의 '나'와 저자인 아니 에르노를 구분하는 건 쉽지 않다.

어디가 허구이고, 어디가 현실인지 명확하게 판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구분이 중요한가.

무엇이 진실이고 허구인지 구분하는 것보다,

내가 이 미친 질투의 기록을 읽었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세상에 이런 질투가 있었다는 걸,

질투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새삼 확인 했다는 게 더 중요할 것이다.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세상 어딘가에는 분명 또다른 무수한 오셀로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질투를 하고 있을 것이다.

<집착>은 그 세상의 무수한 오셀로들에게 보내는 공감의 기록이자

경고장이다.

불타는 감정에 사로잡힌 '나'와

그 '나'를 냉정하게 관찰하는 관찰자 '나'의

아이러니가 빚어내는 모순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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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다. 글 쓰는 게.

뭘 어떻게 쓸지 떠오르는 게 없다.

할 말도 없고, 에너지도 없다.

남은 건 불평불만뿐.

불평불만을 쓰며 오늘도 힘겹게 맹세를 지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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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2-07-13 08: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7일째 잘 이어오셨으니 앞으로도 가능하시리라 믿습니다. ^^

짜라투스트라 2022-07-13 11:27   좋아요 1 | URL
아이고, 감사합니다.^^

2022-07-13 1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07-13 18: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시간을 보니까 11시다. 하루를 넘길 수 없어서 허겁지겁 앉아 글을 쓴다.

근데 앉고 보니 쓸 말이 없다. 역시 언제나 내 친구는 백지다.

6일이 되었지만 아직 글은 내 친구가 아니다.^^;;

언젠가 친구가 될, 아니 될 수도 있는 글을 생각하며

뜬금없이 가라타니 고진이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에서

남긴 글 하나를 적으며

마치려 한다.

비평은 이론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이론과 실천 사이의 거리, 사유와 존재 사이의 거리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다.(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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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집 1 펭귄클래식 25
이디스 워튼 지음, 최인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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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의 집1-이디스 워튼


내게 이디스 워튼은 풍속소설 작가다. 제인 오스틴처럼, 이디스 워튼은 자신이 살아온 그 시대의 삶과 풍속을 세밀하게 잘 그려내는 작가처럼 여겨진다. 19세기 말에 뉴욕 상류층에서 태어난 이디스 워튼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미국 뉴욕에서 살아가는 상류층의 삶과 풍속을 여과없이 정밀하게 표현한다. 그들이 가진 통속성과 위선, 경박함, 피상성을 더도 덜도 없이 리얼하게. <기쁨의 집>은 이디스 워튼에게 작가로서의 명성을 안겨 준 출세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디스 워튼의 출세작이자 대표작답게 <기쁨의 집>에는 20세기 초반 뉴욕 상류층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여기까지 적고 보면 이어지는 글이 그 시절 미국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절 미국을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책에 나오는 것 이상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당연히 관심이 없기 때문에 20세기 초반 미국 상류층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건 소설의 주인공인 릴리 바트라는 여인에 대해서이다.

릴리 바트. 미국 뉴욕의 상류층으로 태어나 당시 미국 상류층 여성답게 과소비와 화려한 문화의 한가운데를 즐긴 인물이다. 그녀에게 불행이 닥친 건 아버지의 파산과 뒤이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부터이다. 자신이 돈을 얼마나 쓰는지도 관심이 없고, 오직 화려한 소비만 하던 그녀에게 아버지의 파산과 어머니의 죽음은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다. 부유한 친척 부인이 연민을 느껴 그녀를 맡지만, 친척 부인은 돈을 아끼는 구두쇠과의 인물이다. 그녀는 과거와 같은 소비를 하지 못하고,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오직 하나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야만 한다. 그래서 소설 내내 그녀의 관심사는 부유한 남자와의 결혼뿐이다. 다행이 그녀에게는 무기가 있다. 미모라는 무기.

하지만 애석하게도 미모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녀의 결혼은 성사되지 않는다. 무슨 마가 끼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부자남과의 결혼 프로젝트는 번번이 무산되고, 그녀는 29살에 도달하게 된다. <기쁨의 집>은 29살에 도달한 릴리 바트가 조바심을 내며 부자남자와의 결혼을 어떻게든 성사시키려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배경을 다 쓰고 이제서야 내 생각을 써보려 한다. 나는 읽으면서 릴리 바트 때문에 답답해 죽을 뻔 했다. '답답해 죽을 뻔'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내가 답답해 죽으려 했던 건 릴리의 행동 때문이다. 위에 적어 놓은 걸 보면 릴리 바트는 철저하게 속물처럼 보일 것이다. 일단 그녀가 속물이라는 점은 맞다. 속물은 맞는데, 아쉽게도 그녀는 철저한 속물이 아니다. 철저하지 못한 속물이랄까. 속물로서 부자 남자를 차지하려면, 철저하게 속물적으로, 이기적으로, 계산적으로 행동하면 된다. 그런데 그녀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가 마음에 둔 지적이고 멋진 남자 셀던이 나타나자 셀던을 의식하여 속물적이고 계산적인 행동을 그만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지. 속물적인 목적을 이루려면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속물적이고 계산적인 행동을 하면 될 것을. 그렇다면, 속물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면, 반대인 낭만과 이상의 길로 나아가면 된다. 릴리 바트는 여기서도 어그러진다. 그녀는 셀던이 돈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와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다. 자신의 행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녀는 다시 조바심을 내어 부유한 남자와 결혼할 생각을 한다. 이게 문제다. 그녀는 철저한 속물이 되지도 못하고, 반대인 낭만의 길로 가지도 못한다. 그녀는 속물과 낭만주의자의 그 어디 쯤에서 어정쩡하게 머문 채, 속물과 낭만 사이를 헤매며 실패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내가 그녀에게 분노했던 건, 그녀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나도 릴리와 같다. 속물적인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철저하게 속물적이고 계산적인 모습을 보이지도 못하고, 반대로 낭만과 이상의 길로는 용기가 없어 쉽게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나도 릴리처럼, 속물과 낭만의 그 어디쯤엔가 어정쩡하게 위치한 채, 그 무엇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 나의 부정적인 모습을 릴리가 보여 주기 때문에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더군다는 그녀는 추문에 휩싸인 채 실패로 빠져들지 않는가. 그녀의 실패와 나의 실패가 겹쳐지는 것 같아 나의 분노는 커져만 간다. 그러나 내 분노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녀의 삶은 작가에 의해 결말이 정해져 있는데. 보봐리 부인, 안나 카레니나, 에피 브리스트, 더버빌 가의 테스와 같은 길로. 하지만 나와 릴리는 차이가 있다. 나는 아직 실패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릴리와 다른 결말을 꿈꾸며, 나의 <기쁨의 집> 읽기는 2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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