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87.소크라테스의 변론-플라톤(3)
*이유는 모르겠지만 북플에서는 글이 안 보인다고 해서 다시 한번 올립니다.^^
삼독.
책을 처음으로 다독하던 시절만 해도,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그때도 책을 열심히 읽었지만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읽지 않았다. 마치 독서가 하나의 스쳐지나감이라는 듯이, 한 번 나를 거쳐간 책들을 나는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놓아 주었다. 다시 읽는 것은 지겨움을 불러온다는 생각에 가득 차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읽은 책이 쌓여만 가고, 책을 읽는 경험이 늘어나면서 나의 생각은 바뀐다.
어느 순간부터 책을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한 번 읽어도 되는 책들이 있다. 시류에 영합하는 책들, 삶의 필요에 따라서 읽어야 하는 지식과 정보가 들어 있는 책들은 굳이 여러번 읽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반대로 여러 번 읽어야 이해되는 책들도 존재한다. 너무 어려워서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책들, 처음 읽었을 때의 감정과 시간이 지나서 느낀 감정이 달라질 여지가 있는 책들은 한 번 읽는 것만으로는 제대로 읽는 것이 아니다. 어려운 책들은 여러번 읽음으로써 이해의 밀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모르는 것들을 알 수 있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도 이해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감정의 변화 가능성이 존재하는 책들은, 여러번 읽음으로써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감정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에, 읽을 때마다 새로운 독서를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건 한 번 책을 읽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같은 책을 여러번 읽을 때라야 느낄 수 있는 독서의 즐거움이다. 과거의 내가 알 수 없었던 독서의 즐거움.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세 번 읽으며 나는 왜 책을 여러 번 읽어야 하는지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첫번째 읽었을 때와 세 번째 읽었을 때의 느낌의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에.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나는 소크라테스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고전독서 모임에서도 말했지만,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소크라테스가 광인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배심원들 앞에서 소크라테스는 당당하게 목을 쳐들고 말한다. 당신들의 삶이 틀렸다고. 당신의 생의 태도가 잘못됐다고. 아무리 철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옳은 말이라고 해도,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질 수 있는 상황에서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건,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더 나아가 그는 죽음이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옳은 삶에 대한 추구 없이, 돈과 권력을 추구하면서 세상에 도움도 되지 않는, 죽은 듯이 사는 것보다, 그냥 죽는 게 좋다고. 죽음 뒤에 아무 것도 없다면 그것은 깊숙한 잠을 영원히 자는 것처럼 행복한 것이고, 죽음 뒤에 사후 세계가 있다면, 이미 죽은 친구들을 만나고, 죽은 과거의 영웅들과 현인들을 만날 수 있는데 뭐가 나쁜 것이냐고 하면서. 이런 말을 한치의 망설임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건 평범함을 넘어선 비범함의 영역에 가닿아 있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없는 광인의 철학이라고 할까.
그러나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 조금씩 나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책을 처음 읽을 때 느꼈던 소크라테스에 대한 낯설음을 극복했기 때문일까. 비범함의 영역에 가닿은, 광인의 철학처럼 보이던 소크라테스의 언변이 어느 순간부터는 충분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의 용기와 당당함은 내가 따라할 수 없는 영역이지만, 그가 하는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에 설득된 것이다. 플라톤의 다른 책이나 사상 전체의 그림과 따로 떨어져서 <소크라테스의 변론>만 놓고 보면, 소크라테스의 말은 틀리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를 죽음으로 몰고간 이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간 이들이 왜 문제일까? 책을 삼독하면서 나는 그것이 표현의 자유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다.
표현의 자유.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하지만 남용되어서도 안 되고, 오용되어서도 안 될 말이다.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말이 혐오와 증오의 자유로 이어지지 않음을, 차별과 부조리의 자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표현의 자유를 혐오와 증오의 자유로 남용하는 순간, 그건 표현의 폭력이 되어 말을 듣는 이의 마음에 상처를 주니까. 내가 이 말을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삼독하면서 쓰게 되는 건 이유가 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을 변론하면서 말하는 내용이 표현의 자유와 이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서이다. 표현의 폭력이 되지 않는 표현의 자유의 영역에 머무르는 표현을 한다면, 그건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내용을 받아들인다면, 소크라테스는 표현의 자유 영역에 머무르고 있다. 그는 자신이 지혜롭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찾아가서 대화하고 말한다. 당신이 어떤 부분에서 나보다 많이 알지만 모든 것을 다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자신이 지혜롭다고 말하지만, 당신은 어떤 부분에서 무지하고 잘 모르기에 전체적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니다. 그는 이 말을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 모두에게 말했다. 특유의 대화법인 산파술을 이용하면서. 나는 자신이 지혜롭지 않다는 것을 아는데 당신들은 왜 자신이 지혜롭지 않다는 사실을 모르냐면서.
변론의 이 내용만 놓고 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여기는 힘있고 돈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진실을 알리면서 기분 나쁘게 한 것에 불과하다. 기분 나쁜 것에 그친다면 그것은 표현의 자유이다. 내가 기분 나쁘다고 해서 나를 기분 나쁘게 한 행동 자체가 죽을 범죄는 아니니까. 하지만 힘있고 돈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자신들을 기분 나쁘게 한 소크라테스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소크라테스에게 외친다. '니가 감히 나를 기분 나쁘게 해' 라면서. '나를 기분 나쁘게 했으니까 용서할 수 없어' 하면서 그들은 소크라테스를 고발하고 죽음으로 몰고간다. 당연하게도 여기에서 소크라테스의 표현의 자유는 짓밟힌다. 권력자들의 기분을 나쁘게 한 표현의 자유는 생존 이유가 없다면서.
사실 그 당시 상황을 둘러싼 역사, 정치, 사회적 맥락을 덧입히면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대한 인식이 바뀔 수 있다. 들여다보는 렌즈에 따라 시각이 바뀌는 법이니까. 더군다나 나는 소크라테스의 변론만 들었지, 소크라테스를 고발한 이들의 입장을 세밀하게 들은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들의 입장도 세밀하고 듣고 생각해보면 분명히 지금의 내 생각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삼독하면서 나는 소크라테스의 입장만 듣고 그의 말에만 집중했다. 집중한 결과로서 소크라테스에게 설득됐다면 오늘만큼은 그의 주장을 옳다고 생각하련다. 다음에 사독을 할 때는 달라진 생각으로 소크라테스를 비판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