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현대지성 클래식 31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331.공리주의-존 스튜어트 밀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 서평을 쓰면서 제가 한 말이 있습니다. 최근에 연속적으로 하나의 책에 대한 서평을 두 개 쓰는데, 처음에 쓰는 글은 책 내용을 대충 훑고, 다른 하나는 책에 대한 내 감정을 쓴다고. 그런데 <공리주의> 서평을 쓰다보니 처음에 쓴 글에 책 내용은 거의 없고 제 감정만 잔뜩 썼네요.^^;; 역시 저는 제 마음대로 어떤 형식에 관계없이 글을 쓰나봅니다. 제가 한 말에 비추어보면, 이제는 책 내용을 담은 글을 써야하는데, 제대로 될지 알 수 없네요. 그래도 어쨌든 써야 하기에 꾸역꾸역 적어 봅니다.

제가 공리주의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가장 큰 계기는 <정의란 무엇인가>였습니다. 그전에도 다른 책에서 벤담이나 밀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단편적으론 공리주의를 알긴 했지만, 관심의 정도는 떨어졌습니다. 그런데 <정의란 무엇인가>의 가장 앞 부분에 공리주의가 언급되고, 그걸 마이클 샌델이 비판하면서 저는 궁금했습니다. 공리주의가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해서. 벤담의 말대로 개인의 행복이 수량화가 되는지도 궁금했고. 그런데 <공리주의>를 보니, 밀은 벤담이 이야기하는 행복의 계량화에서 이어지는 '양적 공리주의'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그는 벤담이 부정한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합니다. 지적이고 도덕적인 쾌락이 육체적인 쾌락보다 우월하다면서.

적어놓고 보니 '공리주의'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군요.^^;; '공리주의'는 쉽게 말해서 개인의 행복과 사회 전체의 행복을 연결시키는 사상입니다. 행위의 옳고 그름은 그 행위가 인간 전체의 이익과 행복을 늘리는데 얼마나 기여했는지에 따라 결정된다는 식으로. 벤담이 말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 공리주의의 핵심 사상을 잘 표현하고 있죠. 여기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 '공리'입니다. 이 '공리'의 한문을 잘 봐야 합니다. 지금까지 저는 '공리주의'의 '공리'가 '공공이익'을 가리키는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한자가 다르더군요. '공리주의'의 '공리'는 '公利'가 아니라 '功利'였습니다. 한자말과 책의 내용을 써서 풀이해보면, '공리주의'의 '공리'는 '공공이익'이 아니라 '행복이라는 목적을 얻기 위해 도움이 되는 것 ' 정도로 쓸 수 있습니다. 공리의 원어인 'utility''에도 이 뜻이 더 잘 맞는 것 같고요.

어쨌거나 벤담처럼 밀도 공리주의자로서 개인의 행복은 사회 전체의 행복에 기여를 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위에서도 말했듯이 밀은 벤담처럼 수량화된 행복은 거부했습니다. 그는 쾌락의 질적 차이를 인정하고, 우리가 육체적인 쾌락 보다는 도덕적이고 지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합니다. 도적적 규범과 의무, 지적인 욕망을 더 높고 고귀한 행복의 추구와 연결시키는 듯한 이 주장은, 밀이 칸트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자신의 '공리주의' 안에 품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적고보니 책에 대한 이야기는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될 듯 하네요. 이제 제가 할 말을 하고 글을 끝내겠습니다.^^

10대 청소년들이 유튜브를 보고 세상을 배우는 이 시대에 <공리주의>라는 윤리학 책을 읽는 것이 어쩌면 낡은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세상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윤리학이나 도덕철학에 대해서 논의하고 사고하는 것이 고색창연한 빛을 지니게 된다고 해서, 그 빛의 중요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건재하다면, 인간 삶의 기본적인 것들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요. 우리의 삶이 지속되는 한, 우리가 인간으로서 사회를 이루고,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한,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논의들은 지속되어야 합니다. <공리주의>는 그렇게 시대를 흐르면서 지속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논의의 한 버전일 뿐입니다. 우리가 할일이란, 우리 시대의 도덕적 윤리적 논의, 우리 시대의 공리주의적인 논쟁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북다이제스터 2021-04-28 20: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리주의 자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집니다. ^^

짜라투스트라 2021-04-28 23:05   좋아요 1 | URL
공리주의 자체를 깊이 생각해보지 않아서 질문을 받고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일단 저는 기본적으로 공리주의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공리주의는 그냥 ‘공리주의‘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어떤 개념이고 어떤 역사적 맥락을 가지고 있는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딱 그 정도에 그치고 맙니다. 철학책이나 고전에서 등장하는 개념으로서 알고 있지, 제 삶에는 공리주의 ‘공‘자도 등장하지 않거든요.^^

짜라투스트라 2021-04-28 23:19   좋아요 1 | URL
두 번째는 제가 생각하기에 저는 공리주의자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리주의자들을 좋아하지 않는 공리주의자, 공리주의에 비판적인 공리주의자, 필요나 상황에 따르면 공리주의를 버릴 수 있는 공리주의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공리주의라는 사상이 문제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벤담 같은 경우는 행복이나 쾌락 같은 것들을 수량화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저는 그게 수량화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벤담의 주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밀의 경우는 더욱 복잡합니다. <공리주의>에 나오지만, 밀은 인간에 대해서 생각보다 순진한 사고방식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단순히 개인의 행복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게 반드시 공공의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않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저급의 쾌락과 도덕적이고 지적인 고급의 쾌락을 구분하면서 인간은 고급의 쾌락을 추구해야 한다는 식으로 밀이 말하는데, 인간이 밀의 주장처럼 반드시 고급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그래도 벤담에 비해 밀의 주장은 더욱 더 공감이 가는 것은 맞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21-04-28 23:20   좋아요 1 | URL
결론적으로 말해서 저는 공리주의는 그 당시의 사상이고, 현대의 사상 체계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현대의 여러 가지 학문, 제도, 체계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맞지만, 공리주의 자체로 보면 지금 이 시대에 맞는 사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리주의는 지나간 사상이고, 현대의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계상을 제대로 설명하기에 한계가 있는 사상처럼 보입니다. 공리주의를 이 시대에 맞게 업그레이드 한다면 모르겠지만. 저에게 공리주의는 흘러간 옛 노래이고, 고색창연한 옛 그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옛 노래나 옛 그림에도 매력이 있기에 책을 읽으면서 그 매력을 찾으려고 노력중입니다. 여기까지가 지금 떠오르는 생각이네요. 적다보니 너무 많이 적었네요. 길게 적어서 죄송합니다.^^;; 어찌되었든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ㅎㅎㅎ

북다이제스터 2021-04-29 16:37   좋아요 1 | URL
좋은 리뷰 읽은 후 그냥 가볍고 짧게 여쭤봤는데, 긴 답글 남겨주셔서, 괜히 부담만 드린 것은 아니었는지, 후회도 되고 죄송합니다. ㅠㅠ

하여튼, 정답은 없겠지만, 말씀해 주신 답글에 상당히 공감합니다.^^

우선, 벤덤은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문제의 ‘원흉‘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행복 등 질적인 가치를 양적으로 가치화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현대인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만든 사람 중 가장 큰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고 보입니다.
예를 들면, 돈으로 환산한 양적인 가치로 필요한 질적인 가치를 살 수 있다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믿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돈이면 다 돼!)

말씀하신 것처럼, 밀은 벤덤보다 아주 조금 나았지만, 공리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점은 안타깝습니다. (제가 안타깝다는 표현을 쓴 이유는 그의 여성관 등 다른 사상은 마음에 드는 부분이 많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공리주의 한계는 너무 ‘결과‘만 중시하고 ‘과정‘은 소홀히 한다는 점입니다. 목적을 위한 과정에서 약자나 소수가 희생될 개연성이 너무 많은 사상이라고 보입니다.

결국, 전반적으로 보면, 공리주의는 자본주의와 무척 잘 어울리는 사상이라고 생각되며, 그렇기에 학교에서는 다른 사상보다 공리주의를 꼭 가르치는 것 같습니다.

어찌되었든, 긴 답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 넘 잘 읽었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21-04-29 19:39   좋아요 1 | URL
제가 더 감사하죠^^;;
 

8331.공리주의-존 스튜어트 밀

총페이지:216p

읽은 기간:2021.4.27~2021.4.28

읽은 책에 대하여:

해설을 보니, 이 책이 어렵다고 쓰여 있었다. 인터넷에서 서평을 찾아보니, 또 이 책이 어렵다고 쓰여 있었다. 흠... 내가 이 사람들과 똑같은 책을 읽은 게 맞은 것일까? 왜 나는 어렵지도 않고, 술술 익혔지. 이거 뭔가 이상한데...

이상함을 파고들어가보니 무언가가 나왔다. 나는 깨달았다. 그 무언가 때문에 내가 <공리주의>를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구나.

그 무언가는 무엇일까? 그건 내가 이전에 읽은 책과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순수이성비판>,<존재와 시간> 같은. 나는 그 책들을 읽기 전에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어렵다고 하지만 충분히 읽을 수 있고 해석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예상과는 달랐다. 분명히 나는 그 책들을 읽었다. 하지만 그냥 읽기만 했다. 눈 앞에서 한글이 문장을 만들고, 문장이 모여서 문단을 만들고, 문단이 모여서 책의 한 파트를 이루고, 그 파트들이 모여 하나의 책을 만들면서. 그러나 내가 파악한 것은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라' 정도였다. 도대체 책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분명히 내가 한글을 읽은 게 맞는데 왜 해석이 안 되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인지. 해석도 안 되고 이해도 안 되는데 나는 왜 이 이 책을 읽는다고 앉아 있는지. 회의감도 들고, 나의 독해력의 부족함에 분노를 느꼈다. 책을 읽는 시간인데, 왜 암호해독 시간처럼 느껴지는지도 이해할 수 없었고. '읽기의 지옥'이 있다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 보면 단테가 지옥문에서 이런 구절을 보는 장면이 있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이 문장은 내가 위의 책들을 읽으면서 느낀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나는 독해와 이해의 희망을 모두 버렸다.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되니까. 해설서라도 읽어서 내용을 대충 파악했지, 만약 해설서라도 읽지 않았다면, 나는 고전읽기를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그 정도로 내가 그 책들을 읽고 느낀 무력감은 컸다. 독서의 희망을 잃게 만들고, 책읽기의 무력감을 이 정도로 강하게 들게 했다면, 그게 읽기의 지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나 단테처럼, 나는 포기하지 않고 '읽기의 지옥'을 돌파했다. 해설서라는 베르길리우스의 도움을 받아서. 해설서 읽기에 대한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해설서는 내가 '읽기의 지옥'을 건너오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게 사실이다.

'읽기의 지옥'을 돌파한 내게 <공리주의>는 천국에 가까웠다. 일단 글을 읽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저자의 의도도 보였다.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이나 표현도 거의 없었다. 읽을 수 있고, 이해도 되고, 공리주의가 무엇인지 완벽하게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는 게 '읽기의 천국'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순수이성비판>이나 <존재와 시간> 읽기에 비하면, <공리주의> 읽기는 내게 행복한 순간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존 스튜어트 밀이 '공리주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 것이 행복이었지. 비록 <공리주의>를 읽으며 내가 느낀 행복이, 전체 사회의 행복을 늘리는 것에 기여하는지 알 수 없지만. 가장 중요한 건, 내가 행복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아니겠는가. 그 사실만으로도 내가 이 책을 읽은 값은 충분히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주니어 클래식 11
강신준 지음 / 사계절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8330.마르크스의 자본,판도라의 상자를 열다-강신준(4)

두 달 넘는 기간을 쉬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의도적으로 두 개의 서평을 써왔습니다. 하나는 책의 내용을 대충 정리하는 글이고, 다른 하나는 책에 관한 내 감정이나 느낌, 떠오르는 생각들을 쓰는 방식으로. <마르크스의 자본,판도라의 상자를 열다>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쓰다 보니 책의 내용을 대충 정리하는 글이 너무 길어졌네요. 그래서 두 번째 글을 쓰려고 하니 머리가 어지럽고 아무 생각도 안 떠오릅니다.^^;;

아무 생각도 안 떠오르면 안 쓰면 되는데, 내 원칙을 버릴 수 없어서, 아무 생각이 안 나면 안 나는 대로 글을 씁니다.^^;; 쓴 걸 보니 진짜 아무렇게나 막 쓰고 있습니다. 막 쓰다가 보니,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때가 떠오르네요. 제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던 때는, 제가 고전 읽기에 도전하기 시작한 시기였습니다. 원전을 몇 번 읽다가 도저히 못 읽어서 해설서 위주로 읽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해설서로 기초체력을 쌓고, 기초체력을 쌓은 뒤에 다시 원전을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자본> 해설서 읽기도 그 과정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지금 제가 읽고 있는 책들은 다 그 시기에 읽는 책들입니다.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는 너무 편하게 읽어서 인상이 깊게 남아 있었습니다. 너무 편했기에 중간중간 계속 읽었고요, 읽다보니 네 번째 독서가 됐네요.

생각해보면 다시보기는 참 좋은 것 같습니다. 일단 제 기억력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읽었던 책이라도 다시 읽으면 새로운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새로운 책을 읽는 듯한 기분이 드는데, 읽다보면 아는 것도 나오고. 그래서 다시보기는 모른 것 같은데도 알고, 아는 것 같은데도 모르는 이상한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또 다른 좋은 점으로는 지속적으로 뇌 속에 지식이 쌓인다는 점이죠. 한 번 읽으면 스쳐지나가는 지식이 되기 쉬운데, 재독,삼독,사독까지 하면 제 뇌 속에 그 책에 대한 지식이 남아 있을 확률이 높죠. 지식이 남아 있는만큼 더 알게 되고요. 그런데 분명 아는데 다시 읽으면 왜 새책 같은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책 내용에 관해서도 써야 하는데, 앞에 길게 써서 별로 쓰고 싶지 않네요. '<마르크스의 자본,판도라의 상자를 열다>는 '<자본>이 자본주의 교환과정에서 자본가들이 이득을 취하는 기적의 과정을 파헤친 책'이라고 말하는 책' 정도의 글은 쓸 수 있네요. 더 이상은 제 뇌가 말을 하지 말라고 하네요. 제 뇌가 말을 하지 말라고 해서 이만 쓰겠습니다. 앞으로 이 책의 오독 이후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때는 하지 말라고 해도 이것보다 더 길게 쓰도록 하겠습니다. ㅎㅎㅎ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8330.마르크스의 자본,판도라의 상자를 열다-강신준(4)

총페이지:240p

읽는 기간:2021.4.26~2021.4.27

읽은 책에 대하여:

다시 자본의 세계로 돌아왔다. 자본의 세계로 돌아와서 '어서오세요.' 하고 나를 반긴 책이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였다. 책을 펼치고 내 기억과 독서노트를 뒤져봤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 책을 네 번째로 본다는 사실을. 처음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독서모임에서 <자본>을 쉽게 설명한 책을 찾다가였다. 독서모임 사람들과 같이 <자본>을 쉽게 설명한 책을 찾다가 이 책을 만났고, 함께 읽으면서 이 책만큼 <자본>을 쉽게 설명한 책이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첫 만남이 행복해서였을까. 나는 주기적으로 이 책을 한 번씩 펼쳐서 읽어본다. 신기한 건,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든다는 점.^^;; 내 기억이 <자본>을 잊어갈 때 즈음에 다시 만나서 기억을 떠올리고,또다시 잊어버리면 이 책을 읽고 기억을 되살리는 것의 반복이랄까.

반복 속에서 지속적으로 떠올리는 건 이 책의 쉬운 난이도다. 청소년도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자본>을 해설하기 위한 저자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고 해야할까. 저자는 마르크스의 <자본>이 품고 있는 사상을, 마르크스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개미와 배짱이의 비유를 함께 섞으면서. 그럼 마르크스가 열었던 판도라의 상자는 무엇일까? 미흡하지만 네 번째 읽은 기념으로 한 번 적어본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는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사회였다. 자급자족 사회에서는 폐쇄적인 마을 공동체가 삶의 기반이 되고, 폐쇄적인 마을 공동체의 경제 생활은 생산한 사람이 자신의 생산물을 소비하는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자기가 농작물을 심어서 키우고, 그걸 직접 먹는 식으로. 말 그대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일치하는 자급자족. 교환이 있을수도 있지만, 그건 자급자족의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자급자족 중심의 사회는 교환 중심의 사회로 변화한다. 생산자가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고, 그걸 시장을 거쳐 소비자와 교환을 하는 식으로. 여기서 생산자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로,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고, 임금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통해 물건을 생산하면, 그걸 시장에서 소비자와 교환을 통해 이득을 얻는다. 마르크스의 말을 이용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자는 자본가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소비자는 시장에서 생산자가 생산한 제품을 사는 사람이다. 이번에도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소비자는 주로 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 분리된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에서, 생산자가 이득을 얻는 건 생산과 소비의 중간 단계인 교환이다. <자본>은 그 중간 단계인 교환의 비밀을 푸는 책이고.

여기까지 말하면 대충 책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 된다. 그러나 책을 네 번째로 읽은 사람인 나는 멈출 수 없다. ^^;; 이번에는 어떻게든 더 나아가보려고 한다.

교환은 분리된 생산과 소비를 연결해준다. 중요한 건,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합의를 통해 교환을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말로 하면, 두 사람 사이의 합의로 교환과정에서 가격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가격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서 이 책에 나온 마르크스의 사상을 더 따라가보자. 마르크스는 가격은 그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생산에 걸리는 노동시간이 길면 상품의 가격은 비싸고, 반대로 노동시간이 짧으면 가격은 낮다. 경제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딴지를 걸 수도 았다.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하는 거 아니야?'라고. 마르크스는 마치 그런 질문이 제기되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수요와 공급은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가격을 변동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말을 따라가보면 시장에서 나타나는 부의 크기는 수요와 공급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 이걸 교환과정에 대입해보면, '생산자기 제시한 노동량을 소비자가 받아들여 상품을 구입할 때 가격이 성립한다'라는 말이 된다. 이것만 놓고보면 교환과정은, 동등한 것이 교환되는 등가교환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은,자본주의 하에서의 교환과정은 결코 등가교환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본주의하에서의 교환은 등가교환이 아니라, 자본가가 이득을 얻는 불균등한 과정이 된다. 그건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교환에서 자본가가 이득을 챙기는 교환의 마법은 가치를 변동시키는 생산요소에 달려 있다. 생산요소는 본래 인간의 노동력과 다른 물적 요소(원료나 기계)라는 두 가지로 구성된다. 그 중에서 노동력만이 가치를 변동시킬 수 있다. 물적 요소는 노동력이 가치를 변동시키는 걸 도와줄 뿐, 직접적으로 가치를 변동시키지 못한다. 그러니까 교환의 마법은 노동력에 달려있다. 따라서 자본가는 노동력을 이용하여 교환과정에서 이득을 취한다. 그들은 이득을 취하기 위해 크게 노동력을 이용한 두 가지의 방법을 쓴다.

1.노동시간을 늘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상품의 가격은 인간의 노동량이 결정한다. 상품에 들어가는 인간의 노동시간이 상품의 가격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하게 말해서 노동시간을 늘이면 된다. 노동자라는 인간을 걸레 쥐어짜듯이 쥐어짜면서. 19세기 런던에서 마르크스가 마주한 자본주의의 풍경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걸레 짜듯이 쥐어짠 풍경이었다.

1863년 6월 마지막 주, 런던의 모든 일간 신문은 '단순한 과도 노동에 기인한 사망'이라는 (...) 기사를 보도하였다. (그것은) 20세의 여성 모자 제조공 메리 앤 워클리의 사망(에 대한 기사였다.) (...) 이 젊은 여성은 매일 평균 16시간 30분 동안 노동했으며, 더구나 성수기에는 30시간 동안이나 중단 없이 노동하곤 하였다. 그리고 과로로 그녀의 노동력이 마비될 때는 종종 셰리주나 포트와인 또는 커피를 먹여가며 노동력을 되살려 내곤 하였다.(95~96)

그 당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죽을 때까지 노동시켰다. 1분 1초가 돈이니까. '1840년에 작성된 영국 의회의 보고서도 랭커셔 지역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이 겨우 15세에 불과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103) 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기계가 아닌데 기계처럼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는 것에 반발이 나오지 않을리가 없다. 당연히 무수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과도한 노동시간은 '근로기준법'을 탄생시키며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다. 자본가들은 시간을 쓸 수 없게 되자 다른 방법을 쓰기 시작한다.

2.생활필수품 가격을 낮추어, 노동자들의 임금을 내린다.

이 방법은 도구를 이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도구를 이용하는 식으로 기술을 발전시키고, 기술 발전에 따라 생산력을 증대시킨다. 생산력이 증대되면 물건 생산에 들어가는 시간은 줄어들고, 시간이 줄어들만큼 상품의 가격도 낮아진다. 자본가들은 도구를 이용한 생산력의 증대를 생활필수품 가격을 낮추는 데 사용하고, 생활필수품 가격이 낮아지는 만큼, 소비자들인 노동자들의 임금도 낮춰버린다.

얼핏 보면 이 방법은 아주 유용하다. 과도한 노동시간처럼 눈에 보이는 노동자들의 피해가 있는 것도 아니니 반발도 크지 않고, 도구의 발전 같은 기술의 증대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나 문제는 기계의 발전이 극대화되면서 인간의 노동력이 예전보다 많이 쓰이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자본가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기계를 이용한 기술의 발전, 생산력의 증대에 힘을 쏟는다. 그것이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노동자들의 수가 줄어드는 지점에 다다르고, 노동자들의 수가 줄어들면 줄어들만큼 자본가들의 부의 원천인 노동시간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득을 얻기 위한 행동이 자신의 부를 줄어들게 만드는 국면으로의 전환. 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은 줄어든 전체 몫에서 자신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고, 경쟁은 자본가들의 몫을 또다시 줄어들게 만든다. 이 책에서는 이 이야기 뒤에 공황 부분으로 이어지고 마르크스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 같은 것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평소의 나보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기에 이쯤에서 그치려 한다.

사실 네 번째 읽은 책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번째라는 의무감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무언가 하게 만들었다. 네 번째 읽었으면 이제 그만두어도 되건만, 내 예감으로 앞으로도 종종 이 책을 기회가 날 때마다 읽을 것 같다. 그때에 내가 다시 서평을 쓰게 된다면, 이것과 다른 서평을 쓸 것 같다. 그때의 분위기와 내 기분에 따라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간 불평등 기원론 펭귄클래식 85
장 자크 루소 지음, 김중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8329.인간 불평등 기원론-루소

*​서평을 쓰기 전에 하는 말.

두 달 넘게 쉰 이후에 읽은 책 서평을 쓰면서, 책 제목 옆에 계속 숫자를 붙였습니다. 이게 제가 미쳐서 제 멋대로 붙인 게 아닙니다.^^;; 제목 옆에 붙인 숫자가 나타낸 것은 제가 책을 읽은 횟수입니다. 2를 붙여다는 건, 제가 그 책을 두 번 읽었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두 달 넘어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미 읽었던 책들을 계속 읽어왔습니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 옆에 숫자가 붙지 않았다는 건, 제가 처음으로 이 책을 읽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제가 다시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만난 재독을 하지 않은 책입니다. 저와 이 책의 만남은 지금에서야 처음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마르크스 이전에 루소가 있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루소가 있은 뒤에 마르크스가 있었다'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둘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지 정확하게 말할 수 없지만, 제가 보기에 루소는 마르크스의 조상격인 비판적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루소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이 있습니다. 그런데 묘합니다. <자본론> 관련된 책들을 열광적으로 읽은 뒤에, 더 이상 <자본론> 관련 책들이 아닌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이 <자본론>의 조상 같은 느낌이 드니까요. 지금 저의 독서 상황은 아무리 노력해도 <자본론>을 벗어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자본론>을 벗어나든, 벗어나지 않았든, 저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을 읽었습니다. 읽으면서도 느꼈고, 읽은 뒤에도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이지만, <인간 불평등 기원론>은 마르크스의 사상과 <자본론>과 비슷하면서도 다릅니다. 자연상태에서 평등하고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이 문명사회로 삶의 형태를 변화시키고, 소유권과 사유재산제를 등장시키면서 불평등해지고, 가진 자들이 자신의 재산을 유지하고 안정화시키 위해 법과 제도를 만들었다는 루소의 주장은, 마르크스의 주장에 이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 급진적인 사고와 태도도 비슷하고요. <자본론>에 나오는 사고실험 같은 경우도, 루소가 <인간 불평등 기원론>에서 이미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자연인이 문명인이 되어 불평등해지고 예속 관계의 노예가 되었다는 주장은, 마르크스 말하는 자유롭고 독립적이었던 수공업자가 공장제 대기업의 등장으로 자본가에게 예속된 임금 노동자가 되었다는 주장으로 이어집니다. 여기까지는 정말 닮아보입니다.

그러나 둘은 다릅니다. 전제군주제에 대한 태도가 대표적입니다. 마르크스는 전제군주제는 거의 언급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힘을 쥐고 휘두르는 자본주의의 정치사회적인 구조에 대해서 비판의 칼을 겨눕니다. 반대로 루소는 불평등의 최후 지점으로서 전제군주제를 언급하면서 비판하고, 자연인인 인류가 그 단계에서 최종적으로 타락했다며, 거기까지 가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둘의 결정적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의 인간입니다. 마르크스는 역사적으로 절대왕정의 몰락을 지켜본 인물로서, 왕정의 힘보다는 자본가의 힘이 강력해진 시대를 살았던 인물입니다. 결론적으로 마르크스는 19세기의 인간이죠. 그에 비해 루소는 프랑스 대혁명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절대왕정이 힘을 발휘하던 시대의 인간으로서 절대왕정이 무너지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절대왕정 같은 전제군주제의 힘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18세기의 인간이니까요. 하지만 사상사적으로 봤을 때, 앞에서도 말했지만 루소 없이는 우리가 아는 마르크스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도도하게 흘러가는 비판적 사고의 흐름에서, 루소는 앞선 흐름을 만들어낸 이니까요.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지는 그 사고의 흐름은 19세기의 비판적 사고로 이어지고, 그 세례를 받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뒤를 이어 마르크스가 등장하는 것이니까요. 물론 헤겔이나 포이어바흐를 빼고 마르크스 사상을 말할 수 없긴 하지만, 급진적인 사고의 흐름에서 루소가 마르크스에게 끼친 영향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분명합니다. 어찌되었든 루소라는 급진적인 사고의 앞선 흐름을 읽었으니, <자본론>으로 복귀할 시간이네요. 이제 저는 <자본론>의 세계로 다시 들어가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