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30.마르크스의 자본,판도라의 상자를 열다-강신준(4)
총페이지:240p
읽는 기간:2021.4.26~2021.4.27
읽은 책에 대하여:
다시 자본의 세계로 돌아왔다. 자본의 세계로 돌아와서 '어서오세요.' 하고 나를 반긴 책이 <마르크스의 자본,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였다. 책을 펼치고 내 기억과 독서노트를 뒤져봤다. 그제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 책을 네 번째로 본다는 사실을. 처음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독서모임에서 <자본>을 쉽게 설명한 책을 찾다가였다. 독서모임 사람들과 같이 <자본>을 쉽게 설명한 책을 찾다가 이 책을 만났고, 함께 읽으면서 이 책만큼 <자본>을 쉽게 설명한 책이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첫 만남이 행복해서였을까. 나는 주기적으로 이 책을 한 번씩 펼쳐서 읽어본다. 신기한 건,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이 든다는 점.^^;; 내 기억이 <자본>을 잊어갈 때 즈음에 다시 만나서 기억을 떠올리고,또다시 잊어버리면 이 책을 읽고 기억을 되살리는 것의 반복이랄까.
반복 속에서 지속적으로 떠올리는 건 이 책의 쉬운 난이도다. 청소년도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 <자본>을 해설하기 위한 저자의 노력이 빛을 발했다고 해야할까. 저자는 마르크스의 <자본>이 품고 있는 사상을, 마르크스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식으로 말한다. 개미와 배짱이의 비유를 함께 섞으면서. 그럼 마르크스가 열었던 판도라의 상자는 무엇일까? 미흡하지만 네 번째 읽은 기념으로 한 번 적어본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 이전에는 농업 중심의 자급자족 사회였다. 자급자족 사회에서는 폐쇄적인 마을 공동체가 삶의 기반이 되고, 폐쇄적인 마을 공동체의 경제 생활은 생산한 사람이 자신의 생산물을 소비하는 순환 고리를 형성한다. 자기가 농작물을 심어서 키우고, 그걸 직접 먹는 식으로. 말 그대로 생산자와 소비자가 일치하는 자급자족. 교환이 있을수도 있지만, 그건 자급자족의 부차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그러나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자급자족 중심의 사회는 교환 중심의 사회로 변화한다. 생산자가 공장에서 물건을 생산하고, 그걸 시장을 거쳐 소비자와 교환을 하는 식으로. 여기서 생산자는 생산수단을 가진 자로, 임금 노동자를 고용하고, 임금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통해 물건을 생산하면, 그걸 시장에서 소비자와 교환을 통해 이득을 얻는다. 마르크스의 말을 이용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자는 자본가라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소비자는 시장에서 생산자가 생산한 제품을 사는 사람이다. 이번에도 마르크스의 말을 빌리면, 소비자는 주로 노동자라고 할 수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 분리된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에서, 생산자가 이득을 얻는 건 생산과 소비의 중간 단계인 교환이다. <자본>은 그 중간 단계인 교환의 비밀을 푸는 책이고.
여기까지 말하면 대충 책의 내용을 설명한 것이 된다. 그러나 책을 네 번째로 읽은 사람인 나는 멈출 수 없다. ^^;; 이번에는 어떻게든 더 나아가보려고 한다.
교환은 분리된 생산과 소비를 연결해준다. 중요한 건,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합의를 통해 교환을 한다는 사실이다. 다른말로 하면, 두 사람 사이의 합의로 교환과정에서 가격이 결정된다는 뜻이다. 가격이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에 대해서 이 책에 나온 마르크스의 사상을 더 따라가보자. 마르크스는 가격은 그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시간을 나타낸다고 말한다. 생산에 걸리는 노동시간이 길면 상품의 가격은 비싸고, 반대로 노동시간이 짧으면 가격은 낮다. 경제학을 아는 사람이라면 여기에 딴지를 걸 수도 았다.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하는 거 아니야?'라고. 마르크스는 마치 그런 질문이 제기되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처럼, '수요와 공급은 가격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정해져 있는 가격을 변동시키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말한다. 마르크스의 말을 따라가보면 시장에서 나타나는 부의 크기는 수요와 공급이 아니라 인간의 노동량에 의해 결정된다. 이걸 교환과정에 대입해보면, '생산자기 제시한 노동량을 소비자가 받아들여 상품을 구입할 때 가격이 성립한다'라는 말이 된다. 이것만 놓고보면 교환과정은, 동등한 것이 교환되는 등가교환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자본>은,자본주의 하에서의 교환과정은 결코 등가교환이 아니라고 말한다. 자본주의하에서의 교환은 등가교환이 아니라, 자본가가 이득을 얻는 불균등한 과정이 된다. 그건 과연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교환에서 자본가가 이득을 챙기는 교환의 마법은 가치를 변동시키는 생산요소에 달려 있다. 생산요소는 본래 인간의 노동력과 다른 물적 요소(원료나 기계)라는 두 가지로 구성된다. 그 중에서 노동력만이 가치를 변동시킬 수 있다. 물적 요소는 노동력이 가치를 변동시키는 걸 도와줄 뿐, 직접적으로 가치를 변동시키지 못한다. 그러니까 교환의 마법은 노동력에 달려있다. 따라서 자본가는 노동력을 이용하여 교환과정에서 이득을 취한다. 그들은 이득을 취하기 위해 크게 노동력을 이용한 두 가지의 방법을 쓴다.
1.노동시간을 늘인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상품의 가격은 인간의 노동량이 결정한다. 상품에 들어가는 인간의 노동시간이 상품의 가격을 결정한다는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간단하게 말해서 노동시간을 늘이면 된다. 노동자라는 인간을 걸레 쥐어짜듯이 쥐어짜면서. 19세기 런던에서 마르크스가 마주한 자본주의의 풍경은, 자본가가 노동자를 걸레 짜듯이 쥐어짠 풍경이었다.
1863년 6월 마지막 주, 런던의 모든 일간 신문은 '단순한 과도 노동에 기인한 사망'이라는 (...) 기사를 보도하였다. (그것은) 20세의 여성 모자 제조공 메리 앤 워클리의 사망(에 대한 기사였다.) (...) 이 젊은 여성은 매일 평균 16시간 30분 동안 노동했으며, 더구나 성수기에는 30시간 동안이나 중단 없이 노동하곤 하였다. 그리고 과로로 그녀의 노동력이 마비될 때는 종종 셰리주나 포트와인 또는 커피를 먹여가며 노동력을 되살려 내곤 하였다.(95~96)
그 당시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죽을 때까지 노동시켰다. 1분 1초가 돈이니까. '1840년에 작성된 영국 의회의 보고서도 랭커셔 지역 노동자들의 평균 수명이 겨우 15세에 불과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103) 하지만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기계가 아닌데 기계처럼 죽을 때까지 일을 시키는 것에 반발이 나오지 않을리가 없다. 당연히 무수한 반발을 불러일으킨 과도한 노동시간은 '근로기준법'을 탄생시키며 더 이상 쓸 수 없게 된다. 자본가들은 시간을 쓸 수 없게 되자 다른 방법을 쓰기 시작한다.
2.생활필수품 가격을 낮추어, 노동자들의 임금을 내린다.
이 방법은 도구를 이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도구를 이용하는 식으로 기술을 발전시키고, 기술 발전에 따라 생산력을 증대시킨다. 생산력이 증대되면 물건 생산에 들어가는 시간은 줄어들고, 시간이 줄어들만큼 상품의 가격도 낮아진다. 자본가들은 도구를 이용한 생산력의 증대를 생활필수품 가격을 낮추는 데 사용하고, 생활필수품 가격이 낮아지는 만큼, 소비자들인 노동자들의 임금도 낮춰버린다.
얼핏 보면 이 방법은 아주 유용하다. 과도한 노동시간처럼 눈에 보이는 노동자들의 피해가 있는 것도 아니니 반발도 크지 않고, 도구의 발전 같은 기술의 증대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처럼 보이고. 그러나 문제는 기계의 발전이 극대화되면서 인간의 노동력이 예전보다 많이 쓰이지 않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자본가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 기계를 이용한 기술의 발전, 생산력의 증대에 힘을 쏟는다. 그것이 어느 순간에 다다르면 노동자들의 수가 줄어드는 지점에 다다르고, 노동자들의 수가 줄어들면 줄어들만큼 자본가들의 부의 원천인 노동시간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득을 얻기 위한 행동이 자신의 부를 줄어들게 만드는 국면으로의 전환. 뿐만 아니라 자본가들은 줄어든 전체 몫에서 자신들끼리 치열한 경쟁을 하게 되고, 경쟁은 자본가들의 몫을 또다시 줄어들게 만든다. 이 책에서는 이 이야기 뒤에 공황 부분으로 이어지고 마르크스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안 같은 것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평소의 나보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기에 이쯤에서 그치려 한다.
사실 네 번째 읽은 책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길게 이야기 하지 않았을 것이다. 네 번째라는 의무감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도 무언가 하게 만들었다. 네 번째 읽었으면 이제 그만두어도 되건만, 내 예감으로 앞으로도 종종 이 책을 기회가 날 때마다 읽을 것 같다. 그때에 내가 다시 서평을 쓰게 된다면, 이것과 다른 서평을 쓸 것 같다. 그때의 분위기와 내 기분에 따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