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집중해서 읽을 예정입니다. 어차피 코로나라 밖에 나가지도 못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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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12-16 14: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보기만 해도 어지러워요.. ㅎㅎㅎㅎ 집콕하면서 저런 책들을 읽어보고 싶긴 한데, 완독하지 못할 것 같아요. ^^;;

짜라투스트라 2020-12-16 16:16   좋아요 0 | URL
아 그냥 아무데도 갈데도 없고 사람 만나기도 뭐해서 아무 생각없이 읽으려구요 뇌가 좀 힘들긴 하겠지만^^;;

스텔라 2020-12-16 16: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즐거운 독서되시길 응원합니다!!
저도 읽어 보고 깊은 책들이 많네요^^

짜라투스트라 2020-12-16 16:3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기회 되시면 한 번 읽어보세요.
 

다시 의미 없는 다짐을 해봅니다.

네이버나 알라딘 블로그에 자신의 읽은 책에 대해서 계속 글을 쓰시는 분처럼,

저도 꾸준히 글을 쓴다는.^^;;

근데 과연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ㅋㅋㅋ

어쨌든 꿈은 꿔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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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무스 2020-12-16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하고, 응원합니다!

짜라투스트라 2020-12-16 12:0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존재와 시간 까치글방 138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이기상 옮김 / 까치 / 199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8206.존재와 시간-하이데거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는" 이라는 낱말로 본디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할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새롭게 제기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존재"라는 표현을 이해하지 못해서 당혹스러움에라도 빠져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우선 무엇보다도 다시금 이 물음의 의미에 대한 이해를 일깨워야 할 필요가 있다.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구체적으로 정리작업하는 일이 이 책이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을 모든 개개 존재이해 일반의 가능적 지평으로 해석하는 것이 이 책의 잠정적인 목표이다.(13)

곰곰히 책을 들여다봅니다. '현존재는 오히려 그 존재자에게 그 존재함에서 바로 이 존재함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그점으로 존재론적으로 뛰어나다.' 음... 다시 들여다봅니다. '존재이해는 그 자체가 곧 현존재의 규정성의 하나이다. 현존재의 존재적인 뛰어남은 현존재가 존재론적으로 존재한다는 거기에 있다.' 아... 다시, 또다시 들여다봅니다. '현존재의 '존재론적으로-존재함'은 존재론 이전의 그것이라고 지칭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예컨대 단순히 '존재론적으로-존재하는' 정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으로 존재함을 의미한다.' 하... 저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도대체 이 책은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미 <순수이성비판>으로 단련된 저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결코 독서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읽어나갈 뿐.

'만일 얼핏 존재론적으로 순수 눈앞에 있음과 가까운 듯이 보이는 이 일상적인 서로 함께 있음의 존재가 이미 이러한 눈앞에 있음과 원칙적으로 상이하다면, 본래적인 자기의 존재는 더더욱 눈앞에 있음으로서, 주체의 예외적 상태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본질적으로 실존범주의 하나로서의 그들의 실존적인 변양태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본래적으로 실존하는 자기의 동일함은 체험의 다양성 속에서도 자신을 견지하는 자아의 동일성과는 존재론적으로 하나의 심연에 의해서 갈라져 있는 것이다.'

어차피 이해는 포기했습니다. 그냥 읽고 또 읽으며 페이지를 넘기는 것에 만족합니다. 이해가 안 되도, 무슨 말인지 몰라도 읽고 또 읽다보니 결국 다 읽어냈습니다. 한번 했으니 두 번 세번은 쉬운 법이죠. 사실 두 번, 세 번, 이런 읽기를 계속하다보니 익숙해지네요. 그래도 뇌에 전해지는 무력감과 읽을 때의 고통은 피할 수가 없네요. 어쩌면 제가 이런 고통스런 읽기를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읽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음번 읽기에는 이번보다 더 이해되기를 바라며, 힘들고 괴로웠던 <존재와 시간> 읽기를 마치겠습니다.

*글을 써놓고 읽어보니 생각보다 제가 이런 책읽기를 이제는 즐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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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의 유산
존 르 카레 지음, 김승욱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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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90.스파이의 유산-존 르 카레

모두 제정신이 아냐. 당신들 스파이는 전부 그래. 당신들은 아무것도 아니야. 멍청한 게임을 하는 멍청이들. 자기가 존나 우주에서 제일 현명한 거물인 줄 알고. 당신들은 아무것도 아냐, 알아? 당신들이 어둠 속에 사는 건, 망할 햇빛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야.(413)

이제야 묵은 빚을 청산할 때가 되었다. 어려운 질문에 솔직한 대답을 들을 때가 되었다. 조지, 나의 인간적인 면을 일부러 억압한 겁니까? 아니면 나 역시 부수적인 피해자였나요? 당신의 인간성은 어떻습니까? 예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이제는 뭐가 뭔지 콕 집어낼 수도 없는, 뭔가 고결하고 추상적인 대의에 밀려서 왜 인간성이 항상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겁니까?

이 질문을 다르게 표현할 수도 있다. 자유의 이름으로 우리가 인간적인 감정을 얼마나 깎아 내면 스스로 인간이라거나 자유롭다는 생각을 더 이상 안 하게 되는 겁니까? 아니면 이제 세계적인 선수가 아닌데도 꼭 세계적인 게임을 하고 싶어 하는 영국병이라는 불치병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겁니까?(430~431)

존 르 카레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 건 역시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입니다. 제가 이 전설적인 스파이 소설의 이름을 알게 된 건, 오래전에 읽은 한 서평 때문입니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알라딘에서 추리소설 서평으로 이름을 날린 '물만두'라는 블로거의 글을 읽다가, 저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스파이 소설에 대한 어떤 문장을 접하게 됩니다. 그 글에서 물만두는, 존 르 카레가 써낸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읽다보면 스파이는 존재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너무 오래전에 읽은 것이라 이 말이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대충 의미가 들어맞는다고 한다면, 존 르 카레라는 스파이 소설의 거장은, 스파이가 나오는 스파이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글을 통해 스파이를 부정하는 행위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해 스파이가 활약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자 그런 현실에 대한 부정을 자신의 소설을 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이 너무 흥미로웠습니다. 존 르 카레가 하는 소설쓰기가 일종의 자기 소설의 핵심을 지속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의 글쓰기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소설의 핵심 주제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글. 이걸 더 확장해보면 자기 소설에 대한 부정이자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나아갈 수도 있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직접 스파이기도 했던 스파이 소설의 거장 존 르 카레는 평생동안 자기가 몸담아온 스파이 세계에 대한 비판과 부정을 스파이 소설을 통해서 시도했던 겁니다. 이 끊임없는 부정을 그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 전개시켜 나갑니다. 독자들이 재미에 빠져 읽다보면 어느새 스파이라는 직업이, 스파이의 삶의 현실이, 스파이가 존속되는 정치적인 구조가 얼마나 모순적이고 문제가 있는지를 깨닫는 식으로.

저는 생각해 봅니다. 스파이는 뭐가 문제인가. 스파이의 삶이 왜 힘들고 고통스러우며, 스파이가 존재하는 현실은 뭐가 문제인가. 존 르 카레의 소설들을 지속적으로 읽다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어느 정도 떠오릅니다.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읽다보면 저 질문에 대한 답들이 어느 정도 흐릿하게나마 손에 잡힙니다. 그것들을 한 번 써볼께요. 우선 스파이는 누구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스파이가 자신의 업무와 연관된 이들을 모두 도구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한 국가나 한 사회의 시스템의 존속와 안녕, 평화와 질서유지를 위해서 적국이나 다른 나라의 정보를 얻거나 자신들의 정보를 지키기 위한 안보 업무를 담당하는 스파이의 특성상, 인간에 대한 믿음이나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의를 위해서,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인간은 언제나 도구로 쓰이고 버려지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대의를 지키거나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만 하면 되니까요.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에서 벌어진 비극적인 사건의 진실을 50년이 지나 밝혀내는 형식의 책인 <스파이의 유산>만 봐도 이것이 너무나 잘 드러납니다. 믿고 의지하던 동료가 자신들이 계획한 일 때문에 죽어도 스파이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자신들의 목적이 중요하지 동료의 죽음은 부수적인 일에 불과하니까요. 사랑하던 여인도 참혹하게 살해당해도, 그 살인범이 상관에 의해 이중간첩으로 다시 적국에 돌아가도, 사랑하던 여인의 타살이 자살로 둔갑해도, 스파이는 입을 다물어야 합니다. 이중간첩을 통한 적국의 정보 얻기가 더 중요하니까요. 이 세계에 인간성이나 인간에 대한 애정, 인간 생명에 대한 존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직 목적과 대의, 도구로서의 인간만 가득합니다. 이렇게 사는 데 어떻게 인간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을 믿을 수 없고, 인간을 모두 도구로 보는데 익숙한데 어떻게 삶이 피폐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쉽게 존중하지 못하고, 누구도 쉽게 인간으로서 대하지 못하는 삶이 힘들지 않다면 뭐가 힘들겠습니까? 누구도 믿을 수 없고, 누구도 인간답게 대하지 못하는 스파이의 세계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죠. 인간 삶의 측면에서.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스파이의 삶에서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의 구분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스파이의 삶이란, 남을 속이는 삶 그 자체입니다. 남을 속이다 못해 자기 자신도 속이는 경지에 다다라야 첩보 업무를 잘 할 수 있는 법입니다. 거기에 선과 악의 윤리적이고 도더적인 기준이 뭐가 필요합니까? 거짓과 진실의 구분도 마찬가지죠. 미시마 유키오가 쓴 <가면의 고백> 속 화자의 말처럼, 가면을 쓴 삶이 일반화되어 더 이상 가면을 쓰지 않는 삶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삶. 가면 자체가 일반적인 것이 되어버린 삶. 스파이는 가면을 가면으로 생각하지 않고, 가면이 얼굴이 되어버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스파이로서 제대로 일할 수 있으니까요. <스파이의 유산>의 주인공인 은퇴한 스파이 피터 길럼이 과거 사건의 진실을 알려는 이들을 상대로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거짓을 꾸며내는 건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것이 스파이로서 자연스럽다 말해 일상적인 것이니까요. 어떻게 보면 그들의 삶은 삶 자체가 거짓인 것처럼 보입니다.

스파이로 사는 건 힘듭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스파이의 삶을 무조건 부정할 수 있을까요? <스파이이 부분에서 왜 헤겔이 떠오르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고전을 너무 읽어서 그런 것일까요?(^^;;) 일단 칸트 철학으로는 스파이의 세계를 표현하기가 부적절하다는 건 확실합니다. 인간을 그 자체로 존중하고, 목적으로서 대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의 태도를 꿈꾸는 칸트 철학과 존 르 카레가 그리는 스파이의 세계가 전혀 맞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자기 부정으로서의 글쓰기를 하고 있는 존 르 카레의 소설 세계는, 변증법에 기반한 헤겔의 철학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변증법을, 자기정립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자기부정을 하고, 마지막으로 자기정립과 자기부정을 통합한 다음에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방식의 자기긍정을 행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니까요. 이 관점에서 보면 존 르 카레는 자기 부정을 하는 방식으로 자기긍정을 하고 있습니다. 스파이를 부정하는 방식의 스파이 소설을 쓰는 스파이 소설가. 자기 삶을 부정하는 방식의 글을 쓰는 소설가. 부정을 통한 자기 정체성의 확립이자 자기긍정을 이룬 인물. 부정을 통한 긍정. 삶을 부정하다 다시 긍정으로 이어지는 이 지점에서 저는 오묘한 삶의 신비를 본 기분입니다. 소설 세계는 이렇게 긍정으로 분명히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삶은 어떨까요? 인간을 인간으로서 볼 수 없다면 도구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고, 자신을 도구로서 보는 삶을 일반화하게 됩니다. 도구로서의 인간 삶에 대한 긍정. 거짓과 진실에 대한 태도 또한 비슷합니다. 거짓과 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없다면 그대로 살면 됩니다. 거짓 자체가 삶이 되는 삶. 그것도 삶일 것이고, 살다보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행복할까요? 그게 좋은 삶일까요? 이런, 이런, 쓰다보니 다시 처음에 나온 글로 이어지네요. 스파이가 존재하지 않는 게 더 좋은 세상이라는 식의.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요? 중국의 고대에 나온 병법서 <손자병법>에도 전쟁에서 세작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스파이가 사라질 수 있을까요? 현실적으로 스파이가 사라지는 건 불가능할 것입니다. 대신 꿈은 꾸어볼 수 있죠. 스파이들이 존 르 카레 소설에서처럼 비참하게 죽거나 비극적인 삶을 사는 방식으로 되지 않는 것을. 조금 더 안전하고 거짓되지 않게 사는 식으로. 적고보니 이거 순환논법을 하다 이 순환논법이 다시 정-반-합의 변증법이 되는 기분이군요.^^;; 존 르 카레의 스파일 소설을 읽다 변증법으로 넘어 가는 경험은 현재 고전을 열심히 읽고 있는 저에게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네요. ㅎㅎㅎㅎ 어쩔 수 없으니 여기서 마쳐야겠네요. 그럼 이만.

*쓰다보니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네요. 고전을 너무 읽어서 스파이 소설도 이런 식으로 서평을 쓰게 되는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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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 소피스트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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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41.정치가-플라톤(정치가/소피스트)

'이 대화편에서는 철인 왕이 다스리는 이상 국가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탐색하고 있다. 마치 직조공이 모든 준비 과정을 거쳐서 날실과 씨실을 엮어 천을 짜듯, 이상적인 치자는 국가의 하부기관들을 통할하여 모든 시민이 최대한 행복해질 수 있도록 정치라는 천을 짜야 한다. 시민들의 행복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는 치자는 당파싸움을 일삼는 사이비 정치꾼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상적인 치자를 찾을 수 없을 때는 시민들이 되도록 법을 어길 수 없도록 세심하게 입법하는 것이 차선책이다.(13)

1.

<국가>,<법률>에 이어 <정치가>를 읽음으로써, 플라톤의 정치철학을 대표하는 책 세 권을 모두 읽게 되었다. 어떤 의도를 가진 것은 아니고 눈에 들어오는 대로 <국가>,<법률>,<정치가>를 순차적으로 읽었다. 책이 쓰여진 순서대로 하면, <국가>가 제일 먼저이고, <법률>은 가장 나중에 쓰였으며, <정치가>는 그 중간에 속한다. 책 내용도 쓰여진 순서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가장 먼저 쓰인 <국가>에서 플라톤의 자신의 이상주의적인 국가관을 이상주의적인 모습 그대로 주장하는 젊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면에 최후의 대작이라고 불리는 <법률>에서, 플라톤은 자신의 이상적인 국가관을 현실에 적응시키기 위해서 변용시키는 노회한 모습을 보인다. 법률의 제정이나 구체적인 법집행을 위한 세밀하고 실천적인 지침을 글로 쓰는 식으로. <정치가>는 <국가>와 <법률>의 중간적인 시기에 쓰인 책답게, 내용도 그 중간에서 맴돌고 있다. 플라톤은 이 책에서 자신의 이상적인 국가관을 피력하지만 동시에 그 이상적인 내용이 완벽하게 실현되지 않을수도 있음을 실감하면서, 그것이 안 되면 '법률'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국가관이 현실에 반영되기를 바란다.

2.

이 책은 '방문객'과 '젊은 소크라테스'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다. <소피스트>에서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 <정치가> 속 대화는, <소피스트>의 대화가 그랬던 것처럼, 분류로 나누는 방법과 분류를 한 상황에서 배타적 성격을 가진 개념을 제거하는 방법을 써서 '정치가'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당연하게도 플라톤은 이 대화 형식을 통해서 자신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왕도 정치'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통치술은 전문지식으로 다수가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다수보다는 1인이 통치하는 게 좋다는 식으로. 반면에, 플라톤은 이 책을 통해서 자신의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고 간 아테네식 민주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적개심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3.

나는 알고 있다. 플라톤이 주장하는 왕도정치의 왕이라는 지배자는, 평범한 왕이 아니라 철학을 공부하면서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자에 속하는 철인이라는 사실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진리를 추구하며 공부하는 철학자 왕이라고 해도, 그 사람이 왕이라는 사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왕은 왕이고, 왕도 정치는 왕에 의한 1인 통치다. 이것을 철학서로서 하나의 이념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이념이 아닌 현실이다. 현실은 이념으로만 재단할 수 없다. 이념은 현실 앞에서 현실화하거나 현실의 통치자나 정치가들의 필요성에 의해서 현실을 정당화하거나 덮는 도구로 자주 쓰인다. 결국 <정치가>에 나오는, 1인 통치를 주장하는 플라톤식 왕도정치 개념은, 현실에서 독재정치나 독재자를 옹호하거나 정당화하는 도구로 쓰일 확률이 높다. 이 진실 앞에서 내 머리는 현실과 이념의 혼란으로 뒤덮인다. 하지만 이 혼란은 기본 좋은 혼란이다. 하나의 책을 읽으면서 단순히 책의 내용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책의 내용을 머리 속에서 현실과 뒤섞는 현실화의 과정을 통해서, 책이 가진 한게를 나름대로 파악하고, 동시에 책의 의의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기에. 앞으로도 책을 읽으면서 계속 이런 기분 좋은 혼란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정치라는 것은 쉽게 답이 나올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쉽게 답이 나올 수 없기에 정치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이념을 표출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플라톤의 <정치가> 같이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주장하는 책이 게속 나오기를 바란다. 끝나지 않은 과정으로서 정치야말로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좋은 정치의 모습이기에. 거기서 무언가가 나와 현실의 좋은 결실을 맺는다면 그것은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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