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위대함 교부문헌총서 28
아우구스티누스 지음, 성염 역주 / 분도출판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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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50.영혼의 위대함-아우구스티누스

'내가 보기에 영혼이란 신체를 다스르기에 적합한, 이성을 갖춘 어떤 실체일세.'(105)

쓸데없는 말.

제가 분도출판사의 책을 읽을 날이 올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기독교인도 아니고, 기독교에 큰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서요. 그런데 중세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기독교 관련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분도출판사의 책을 읽을 수밖에 없더군요. 앞으로도 중세철학 관련 책을 계속 읽게 된다면, 분도출판사의 책들을 종종 읽게 될 거 같습니다. 이게 좋은 일인지 좋은 일이 아닌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저 눈앞에 닥친 흐름을 거부하지 않고 따라가는 것이라고 생각하렵니다.

영혼.

어느 순간인가 저는 영혼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을 제 주변에서 볼 수 없었습니다. 제가 기독교를 믿고 교회나 성당에 다닌다면, 그래도 많이 들을 수 있었을텐데. 제가 기독교인도 아니고 교회나 성당을 다니는 사람이 아닌데다가, 제 주변에 교회나 성당 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영혼이라는 말을 쓰는 이가 거의 없거든요. 분명히 사전에는 존재하는데 제 주변에서 들을 수 없고, 저 자신도 쓰지 않기 때문에, 영혼이라는 단어는 저한테 '사어'처럼 느껴집니다. 존재하지만 죽은 단어. 사전에만 존재하고 생명력 없이 사전에 박제된 단어. 영혼은 저한테 그런 단어입니다.

이상한 경험.

영혼이라는 단어가 저한테 분명히 죽은 단어입니다. 그런데 중세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영혼이라는 단어가 너무 많이 나와 기분이 묘합니다. 저한테는 생명력이 없고 죽은 단어인데, 중세철학을 다룬 책에서는 생생히 살아 있는 단어로 나와서. 이게 참 이상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아무도 쓰지 않고 저도 이제는 거의 잊어버린 단어처럼 느껴지는데, 제가 읽는 책에서는 생생히 살아 숨쉬며 계속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니까요. 현실의 존재감 없음과 책 속의 생명력이 보여주는 괴리감. 이걸 이상한 경험이 아니라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영혼의 위대함>이라는 책.

현실에서 거의 쓰지 않는 단어이든 아니든, 현실과 책의 괴리감을 느끼든 아니든, 저는 제 자유의지에 따라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영혼의 위대함>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영혼론 삼부작 중의 하나로, <독백>과 <영혼불멸>에 이어 3부작의 마지막 작품입니다.구성은 영혼론 삼부작의 다룬 두 편과 마찬가지로, 대화편의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실제 아우구스티누스의 제자인 에보디우스가 대화의 상대방으로 나오고, 대화를 통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에보디우스를 깨우치며 자신의 논리를 전개시켜나갑니다. 뭐가 떠오르지 않나요?^^ 맞습니다. 이 책은 플라톤의 대화편을 떠올리게 합니다. 플라톤 대화편에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도 당연히 떠오르고요.

영혼의 위대함.

책은 '영혼이 얼마나 큰가요?'라는 질문부터 시작합니다. 영혼의 크기를 묻는 제자의 질문에서 시작한 둘의 대화는 영혼이 물질이냐 아니냐 하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영혼을 물질로 파악하려는 유물론적 시각을 논파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이 물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영혼이 물질이 아니라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이 비물질적 실체라고 주장합니다. 자, 비물질적 실체라는 말이 나온 이상 이 말을 살펴볼 수밖에 없습니다. 비물질적 실체라는 말은, 물질이 아닌 비물질이지만 실체가 있다는 말이겠죠. 물질이 아닌 비물질인데 실체가 있다라... 그게 무슨 말이죠?^^;; 현대를 살아가는 저의 입장에서는 이 말이 잘 이해가 안 될 겁니다. 하지만 영육이원론이 일반화된 중세인들은 이 말을 잘 이해할 겁니다. 중세인들의 세계관에서는 형이하의 세계에 속하는 물질과 형이상의 세계에 속하는 정신은 구분됩니다. 물질의 세계는 의미 없고 실체 없는 것들이 가득한 평범한 감각의 세계입니다. 여기에 속하는 것들은 신이 창조하긴 했지만 신과의 거리가 너무나 멉니다. 반대로 형이상의 세계에 속하는 정신과 영혼은, 그 자체로 물질의 세계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물질보다 신에게로 향하는 길에서 앞서 있습니다. 그래서 중세인들은 영혼은 위대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은 육체를 다스리는 것으로, 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은 육체와 같은 물질이 아니지만, 본질적인 가치를 지닌 비물질적인 실체입니다. 영혼은 신이 창조한 세계에서 이성을 가지고 신이 창조한 세계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영혼은 신을 믿고 사랑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혼은 신이 창조한 세계의 진리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이런 가치와 힘과 능력을 지닌, 이성이 위대하지 않다면 뭐가 위대하겠습니까? 중세철학의 큰 틀을 형성하는 교부철학을 대표하는 아우구스티누스는 <영혼의 위대함> 같은 책으로 중세인들의 시각을 대표하면서 그것을 더욱 더 강화해나갑니다.

글을 마치며.

현대인인 저는, 제가 가지고 있는 생각과 관념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읽은 중세철학 책들은 현대인인 저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과 반대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물질은 중요하지 않고, 정신이 더 중요하며, 영혼은 더욱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어쩌면 제가 중세철학 책들을 읽는 이유 중 하나는 너무 낯설어서 일 것입니다. 너무 낯설어서 매력적이라는 말이죠. 제 독서의 흐름이 고대철학을 거쳐 중세철학에 머무르는 한, 이 낯선 매력을 마음껏 누려보도록 하겠습니다. 낯선만큼 무언가 다른 가르침과 의미를 주는 것이 있겠죠. 그걸 믿으며 두려움없이 중세철학의 숲 속으로 다시 떠나보겠습니다. <영혼의 위대함>을 읽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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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적 지진 가라타니 고진 컬렉션 18
가라타니 고진 지음, 윤인로 옮김 / 비(도서출판b)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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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9.사상적 지진-가라타니 고진

'한신의 지진에서 내가 감지한 것은 탈구축이라기 보다는 파괴가 더 근저적인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건축은 무엇보다 자연에 의한 파괴에 대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좀 더 말하자면, 저는 형이상학의 탈구축보다도 그 비판적 재구축, 체계적인 건축을 지향해야 한다는 예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가 새로이 칸트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 또한 거기에 있다고 하겠습니다.'(15)

<사상적 지진>은 가라타니 고진의 세 번째 강연집입니다. 1995년부터 2015년까지 가라타니 고진 자신이 했던 강연 중에서, 중요하고 남겨둘만하다고 여겨진 강연들을 기록하고 모은 책이죠.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1995년이라는 해입니다. 한신 대지진과 오움진리교의 사린 가스 지하철 테러 사건이 있었던 해. 무라카미 하루키도 1995년에 있었던 오움진리교 사건에 충격을 받아 <언더그라운드>라는 논픽션을 짓고,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상을 탐구했죠. 가라타니 고진도 한신 대지진과 오움진리교 사건의 영향으로, 자신의 사상에 지진을 겪고 사상적으로 변화했다고 말합니다. 어떤 변화냐면, 바로 문학평론가에서 철학자로의 변화입니다.

사실 책을 보면 1990년대 초부터 가라타니 고진은, 변화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 흐름의 중심에는 문학, 특히 문학 중에서 소설의 쇠퇴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은 그걸 '근대문학의 종언'이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을 이야기하지 않고는 진행이 되지 않기에 조금 더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민족주의가 탄생하고, 근대적 국가가 민족주의에 힘입어 유럽에서 탄생하던 시절부터, 문학, 특히 문학 중에서 소설은 사회에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에서 보듯이, 근대 국가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지역을 하나의 국가로 묶어야 했습니다. 거기서 가장 중심이 됐던 것이 언어입니다. 지역마다 정서가 다르고 문화와 가치관이 다른 상황에서, 이질적이고 다양한 것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던 것이 '표준어'로 불리는 '언어의 통일'이었던 것입니다. 표준어로 쓰여진 문학들이 근대 국가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했습니다. 문학 중에서도 특히 소설이 가장 큰 역할을 했죠. 하나의 서사를 통해 정서적 연대를 쉽게 이끌어내는 소설은, 근대 국민 국가의 탄생에서 이질적이고 다양한 지역의 주민들을 하나로 손쉽게 묶어내는 도구의 역할을 충실히 해냅니다. 그 이후 소설이 중심이 된 근대 문학은 사회에서 큰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소설의 기원의 시대라 불리는 18세기에는 다양한 소설들이 모습을 드러내며 실험적이고 독특한 양상들을 보여줬고, 대문호의 시대라 불렸던 19세기에 이르면 소설의 황금시대가 열립니다. 영국의 찰스 디킨스, 프랑스의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러시아의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같은, 이름만 들어도 빛나는 소설의 거장들이 19세기에는 가득했죠. 20세기는 실험적인 모더니즘과 2차 대전 이후의 더욱 더 실험적인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조류가 힘을 발휘하면서 소설의 전성기는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말에 이르러 영상 매체의 발달로 인해 소설은 예전과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문학비평가로서 자신의 경력을 시작한 가라타니 고진은 그 미묘한 흐름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사르트르나 카뮈 같은 이들이 지배하고 있던 1960년대에 문학비평가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한 가라타니 고진은 1980년대를 거치며 문학의 힘이 줄든다는 걸 느꼈고, 1990년대에 이르자 더 이상 문학이 과거와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할 것임을 실감합니다. 거기에 1995년의 한신 대지진과 오움진리교 사건은 그의 무너져 가고 있던 사상의 궤적에 결정타를 날립니다. 이걸 책에서는 사상적 지진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탈구축과 해체의 포스트모던한 문학비평 대신 새로운 사상적 구축을 통해서 자신만의 이론과 사상을 창조하며 철학자로 나아갑니다. 칸트가 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자신의 사상의 흐름 안에서 이루어낸 것이죠. 흥미로운 건, 철학자로서의 삶을 시작했던 당시에 가라타니 고진이 깊이 파고든 철학자가 칸트와 마르크스 였다는 점입니다. 철학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다는 칸트와 그 칸트에 관심을 가진 인물이 자신의 사상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었다는 묘한 동일시가 저에게는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어쩌면 칸트의 사상은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인물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아니, 가라타니 고진이 칸트의 사상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게 더 맞는 말이겠죠. 사상적 지진을 겪고 사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위해서.

<사상적 지진>은 가라타니 고진의 사상적 전환이라는 큰 틀의 주제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만 하는 것은 아니고, 그때그때 가라타니 고진이 흥미를 가지고 있었던 주제에 관한 가라타니 고진만의 독특한 사유와 철학이 담긴 글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습니다. 한 철학자의 흥미롭고 지적인 사유의 궤적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런 글들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글들은 한 철학자의 사상적 궤적의 변화에 첨가된 작은 음악들처럼 느껴집니다. 큰 연주가 있고, 잠깐잠깐 다른 형태의 음악들이 들리는 식으로. 어찌보면 저야말로 '사상적 지진'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집착하는, 아직도 저 자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루지 못한 인간에 불과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직 이루지 못했기에, 그걸 이루어낸 사람의 사상을 들여다보는 게 더 재미있는 게 아닐까요? 미완이기에 어느 정도 사상적인 완성을 이룬 이의 지적인 궤적을 바라보는 게 재미있는 것이죠. 저는 이 부분이 제가 이 책에서 재미를 느낀 포인트라고 생각합니다. ^^;;

*우주의 중심에 지구가 있고, 그 주위를 다른 행성들이 돈다는 '천동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태양이 중심에 있고 그 중심을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이 지배하는 세상으로의 변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름에 빗대어 말하는 이 변화는 실로 경천동지할만한 변화입니다. 칸트는 이런 변화를 철학에서 이끌어냅니다. 중세까지 철학의 중심은 신이었습니다. 철학자들은 신이 창조한 자연과 우주를 탐구하며 신의 신비와 위험을 밝혀내기만 하면 됐죠. 여기서 신은 주체이고 인간은 객체였습니다. 하지만 중세가 무너지면 더 이상 중세와 같은 사상은 가능하지 않게 됐습니다. 니체가 말한대로, 신 중심의 사회는 무너져 갔고, 인간의 중심이 되는, 인간이 주체가 되는 계몽의 시대가 등장하면서, 신이 아니라 인간이 주체가 되는 철학이 등장해야 했습니다. 여기서 칸트가 등장합니다. 칸트의 철학적 인식론에서는 인간의 주관적 인식이 가장 중요합니다. 칸트에 따르면, 인간 외부의 사물이나 자연은 인간에게 큰 의미가 없습니다. 인간이 관심을 가지고 파악해야 그것이 의미가 있고 인간 삶에 관여하는 무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의미 없는 무언가에 불과한 것이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칸트에 이르러서야 철학의 주체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 됩니다. 인간의 주관적 인식에 들지 못하는 것들은 철학적 객체가 되고요. 이 변화는 정말 큽니다. 이제 인간보다 우위에 있던 신이 창조한 자연은, 인간이 관심을 가져야 의미를 가지는 존재로 쪼그라듭니다. 인간이 관심을 가져야 의미를 가진다는 인식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개발하고 쓰는 존재가 된다는 것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을 도구로 보고 개발하고 쓰는 근대적 인간의 출현의 기원에 칸트의 철학적 인식론이 있다는 것이죠. 이렇게 본다면 칸트가 말한 대로 칸트의 철학은 진실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신에서 인간으로 철학의 주체를 변화시켰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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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드뷔시 전주곡 - 휠체어 탐정의 사건 파일, <안녕, 드뷔시> 외전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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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8.안녕, 드뷔시 전주곡-나카야마 시치리

'탐정 흉내라도 낼 생각이세요?'

'안락의자 탐정이라는 것이 있다지. 현장에는 한걸음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사건을 해결하는 사람... 그렇지, 휠체어 탐정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군.'(47~48)

거북이 걸음으로 제가 읽은 책들을 따라잡는 서평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책을 읽는 속도는, 제가 쓰는 서평과는 달리 엄청 앞서고 달려나가고 있지만, 글은 느릿느릿 써지네요.^^;; 어쩔 수 없습니다. 쓰는 속도가 읽는 속도를 따라잡는 건 힘드네요. 현실을 인정하고 포기하지 않고 써나가겠습니다. 일단 이 '의지의 다짐'으로 글을 시작할께요.

그 다음은 지금 쓰고 있는 리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고백록, 순수이성비판, 대학, 자본론, 박학한 무지... 이 리뷰를 쓰기 전에 읽은 책들 제목입니다. 숨이 턱 막히네요.^^;; 이중에 원전은 아니고 해설서나 강의 책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전이 가진 힘이 책들에 배여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읽는 게, 뇌에 무리가 가는 건 사실입니다. 뇌에 압력이 계속해서 가해지면 저도 힘들기 때문에, 한번 쉬어가는 타임으로 소설을 읽었습니다.

<안녕, 드뷔시 전주곡>은 최근 새롭게 일본에서 주목받는 스토리텔러 나카야마 시치리의 데뷔작이자, 그 자신에게 소설가로서 성공을 안겨다 준 <안녕, 드뷔시> 앞의 이야기를 다루는, 스핀오프 소설입니다. <안녕, 드뷔시> 앞의 이야기인만큼, <안녕, 드뷔시>의 주인공인 하루카의 할아버지인 고즈키 겐타로가 주인공입니다. 근데 이 인물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나이는 할아버지급이 맞는데 활동량이나 에너지는 젊은 사람을 능가합니다. 아니,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젊은 사람을 능가하는 노인만의 독특한 에너지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더 주목해야 하는 사실은 고즈키 겐타로가 휠체어를 타는 인물이라는 점입니다. 휠체어를 탔다는 건, 행동에 제한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고즈키 겐타로는 휠체어를 탔다는 현실의 제약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의 행동을 이어나갑니다. 앉아서 사건을 해결하는 안락의자 탐정을 패러디한 휠체어 탐정이라는 이름으로. 부와 권력, 엄청난 에너지와 실행력, 추리력을 가진 고즈키 겐타로 앞에서 '노화'와 '휠체어'로 대변되는 장애라는 이중의 제약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이중의 제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자기 눈앞에 닥친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합니다. 자신을 돕는 이들과 함께.

노화와 장애라는 이중의 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을 그린 이 소설은, <안녕, 드뷔시>에서 고즈키 겐타로의 손녀 하루카가 겪게 될 '제약을 극복하는 과정'을 선취하고 있습니다. 스핀오프라는 뜻 그대로, <안녕, 드뷔시>의 주인공의 위기 극복 과정을 다른 방식으로 미리 보여주는 식으로. 소설은 그렇게 마지막 에피소드로 이어지고, 거기서 <안녕, 드뷔시>의 핵심적인 등장인물이자 나카야마 시치리의 유명한 시리즈의 주인공이 되는 미사키 요스케가 등장합니다. 요스케의 등장은 이 소설 이후에 두 가지 흐름이 생겨나게 될 것을 암시합니다. 하나는, <안녕, 드뷔시>에서 시작하는 피아니스트 탐정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이 시리즈는 음악에 대한 아름다운 묘사와 음악과 관련된 미스터리가 함께하는 시리즈가 될 것입니다. 나머지 하나는, 에너지 넘지고 고집이 센 휠체어 탐정 고즈키 겐타로가 주축이 되는 작품입니다. 거기서 고즈키 겐타로는 <안녕, 드뷔시 전주곡>처럼, 아니 그보다 더 심하게 자신만의 스타일에 따라서 사건들을 해결하게 됩니다. 이 두 가지 흐름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든, 아니면 둘 모두를 선택하든, 그것은 독자가 알아서 할 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의 흐름은 엄청나게 다작을 하고 있는 스토리텔러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들이 그려내는 이야기 흐름 속에 포함됩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들을 읽는다는 건, 그 거대한 이야기의 흐름 속에 접촉한다는 말과 다름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흐름 속에 계속 접속할지 아닐지를 선택하는 것 정도일 겁니다. 저는 다행히도, 나카야마 시치리의 이야기 흐름에 계속 접속하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저한테 그 세계가 즐겁고 재미있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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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학한 무지 지만지 고전선집 673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지음, 조규홍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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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7.박학한 무지-니콜라우스 쿠자누스

우리의 무지가 분명해질수록 그만큼 '진리'에 보다 더 가까워진다(11)

<박학학 무지> 같은 책들을 읽다 보면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나는 왜 이런 책들을 읽고 있는가?'. <순수이성비판1>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데 왜 읽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읽어냅니다. 자기 자신을 독려하며. 독려를 계속 하다보면 깨닫게 됩니다. 독려가 고문이라는 사실을. 무지를 감추고, 이해못한다는 고통을 겪다보면 따라오는 '독서의 무의미성'을 무마시키는 고문. 때로는 무지가 생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을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무지가 생의 무의미성을 불러오는데, 그 모든 것들을 독려는 무시하고 독서를 강행시킵니다. 독려의 의도에 따르면, 계속 읽다보면 적응도 되고, 독서의 굳은 살이 박힌다는 거죠. 그런데 아직 저한테는 그게 무리인 것 같습니다. 읽어도 잘 적응이 안 되고 잘 안 읽히네요. 다행인 건, 읽어도 모르는 '무지의 상태'가 계속되니 이 '무지의 상태'에는 익숙해진 거 같습니다. '무지의 상태'에 익숙해지니, 몰라도 읽고, 안 읽혀도 읽습니다. 읽다보면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책 한 권은 일단 다 읽게 되니까요. 그걸 얼마나 이해하는지와는 별도로.

그렇다고 해서 <박학한 무지>가 <순수이성비판1>처럼 어려운 책은 아닙니다. 해설이 아닌, 본문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무지의 세계'로 저를 인도한 <순수이성비판1>은, 지속적으로 '무지의 상태'를 유지시키면서 책을 덮을때 쯤에는 저를 순수한 '멘탈붕괴'의 세계로 인도했습니다. 분명히 다 읽었는데 무슨 소리인지는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정신이 무너져버리게 만드는 그 세계로. <박학한 무지>는 그 정도는 아닙니다. <박학한 무지>가 어려운 건, 지금은 쓰지 않는 순수한 논리적 증명이 책에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 됨에서 비롯하는 하나 됨의 낳음은 하나 됨의 유일한 반복으로서 단 한 번(태어난) 하나 됨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두 번 혹은 세 번 혹은 그 이상 여러 번 하나 됨을 반복한 것이라면, 이미 그 하나 됨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것을 낳은 것이 될 것이다. 그로써 두 배 혹은 세 배 혹은 그 이상의 배수로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단 한 번 반복된 하나 됨은 '하나 됨이 하나 됨을 낳는다'는 사실 외에는 달리 이해될 수 없는, 그런 하나 됨의 동등성을 낳는다. 그리고 이러한 낳음은 분명 영원하다.'(58) 라거나 '그렇지만 먼저 있음이 영원성 안에서 [마치] 나중 있음과 모순되지 않는 것처럼 파악될 만하다는 점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그와 다른 식으로는 먼저 있음과 나중 있음이 무한한 것 및 영원한 것 안에서 포착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성부(아버지)는 성자(아들)보다 앞서거나 성자보다 뒤에 계시지 않고, 다만 성자가 뒤에 있지 않는 차원에서 성부가 앞서 계신다. 그렇게 성부는 첫 번째 위격으로 말하되, 성자가 그로 인해 그(성부) 뒤에 있는 것이 아님을 내포한다. 하지만 마치 성부가 먼저 있음과 무관하게 첫 번째 위력인 것처럼, 그렇듯 성자 역시 나중 있음과 무관하게 두 번째 위격이요, 성령 역시 같은 형식으로 세 번째 위격인 셈이다. 이 설명은 위에서 말한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80~81)라는 말이나 글을 지금 누가 쓰겠습니까? 중세 철학의 영향이 배여 있는 15세기 유럽에서야 신과 신학에 대한 논리적 증명이 당대 성직자나 지식인들 사이에서야 일반적일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우리 시대는 이미 신과 신학에 대한 논리적 증명을 과거의 했었던 일로 여기고, 그에 대한 언급은 거의 하지 않잖아요? 그러나 <박학한 무지>에는, 그 사실이, 신과 신학에 대한 논리적 증명이, 지금 너무나 중요하다는 듯이, 생명력을 가진 채 펄떡펄떡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마치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듯이. 그래서 고전이 어려운 겁니다. 지금과 너무 다른, 과거의 삶과 지식과 생각과 사고가 살아 숨쉬고 있으니까요. 현재의 삶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고전에 살아 숨쉬는 과거의 삶과 지식과 생각과 사고가 낯설고 다가가기 어려우니까요.

<박학한 무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신과 신학에 대한 논리 증명으로 가득한 이 책은 읽기도 어렵고, 문장도 딱딱하기 그지없죠. 그러나 그 벽을 넘을수만 있다면 새로은 그 무언가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습니다. 제목부터 무언가 모순적이고 이상해 보이는 이 책의 벽을 넘을 수 있다면 어떤 세계가 펼쳐질까요? 제가 뭐 대단한 인물도 아니라서 명확한 무언가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잠시간 그 세계를 들여다본 인물로서 제가 본 것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겠네요. 제목부터 드러나지만, 이 책의 저자인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는, 유한한 인간은 자신의 존재론적 한계와 그러한 한계가 가진 유한한 인식 때문에, 절대적 존재인 신에 대해서 아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맞는 말이죠.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절대적이고 완벽한 존재인 신에 대해서 다 안다고 떠드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럴 때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고의 행동은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신에 대해서 무지하다고 고백할 수록, 그는 신에 대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걸 '무지의 지' 아니면 '박학만 무지'라고 할 수 있겠죠. 아는 척 하지 않고, 모르면 모를수록 알아가는 역설. 신에 대한 앎은 이런 역설 속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신을 믿을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에 대해 아는 건, 신에 대한 믿음이나 사랑과는 다릅니다. 신에 대해 아는 건, 내가 신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알려고 노력해도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걸 고백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여기서 시작해야, 그나마 아는 것에 속하고, 안다고 시작하면 무지한 것입니다. 알면 모르는 것이고, 모르는 게 아는 것인 신에 대한 앎의 세계. 쿠자누스의 말에 대해 동의합니다. 그래서 저도 쿠자누스를 따라 말해보겠습니다. <박학한 무지>를 읽다보니 점점 머리가 아파지고 뇌 속이 무지해지는데, 이런 '무지의 고백'이야말로 '아는 것'일까요? 그것이 <박학한 무지>에 대한 앎의 시작이라고 한다면, 저는 어쩌면 무지를 통해 '앎'의 시작에 서 있다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런데 왜 이 말을 하고 나니 무언가 기분이 찝찝해지는 건 왜 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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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짜 넣는 노동 북클럽 자본 시리즈 5
고병권 지음 / 천년의상상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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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46.생명을 짜 넣는 노동-고병권

살아 있는 노동이 죽어갈 때 죽은 노동은 살아납니다. 살아 있는 것은 죽고 죽은 것이 삽니다. 영원한 죽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존재. 마르크스는 이것을 '자본'이라고 부릅니다.(10)

1.

글을 쓴다는 것도 '운명'과 이어진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떤 글은 써야지, 써야지 하면서도, 써지지 않고, 어떤 글은 전혀 쓸 의도가 없는데도 써지는 것을 보면, '운명'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는 말입니다. 쓰고자 노력해도 써지지 않는 것과 쓰지 않으려 했는데도 써지는 것을 과연 운명이라는 말이 아니고 다른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요? 이 책의 서평을 쓰면서 저는 '운명'이라는 단어의 힘을 실감합니다. 앞에 쓰려고 했던 서평은 반드시 써야한다는 생각을 했음에도 쓰지 못해 지워버렸고, 쓸 의도가 없었고 책이미지만 덩그러니 남겨 두었던 이 책의 서평은 지금 쓰고 있는 걸 보면 진짜로 운명은 존재하나 봅니다.

이 책의 서평이 써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두 가지 요인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우선 첫번째로 <순수이성비판1> 이후에 읽은 책들은 순서대로 써야겠다는 의지. 사실 <순수이성비판1> 이전에 읽었으나 서평을 쓰지 못했던 책들의 서평을 쓰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모로 노력했지만 이상하게 안 써지더군요. 제가 게을러서 그런가?^^;; 게으름도 한 몫을 했겠지만, 쓰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고, 안 써지는 것도 사실이기에, 둘을 합치면 '안 써진다'라는 중간적인 결론으로 이어집니다. 안 써지니까 포기할 수밖에 없었죠. 혹시라도 미래에 쓸 수 있다면, 만약 그때 그 책들의 서평이 써진다면, 그때는 쓰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써지지 않으니 어쩔 수 없네요. 아무튼 <순수이성비판1>이 준 커다란 충격은 제 뇌를 공백 상태로 만들었고, 그 공백 상태 이후에는 안 써지더라도 반드시 써야한다는 강박이 남았습니다. 무지의 공백을 어떻게든 메워여 한다는 의미에서요. 이 책도 평소 같았으면 쓰지 않았겠지만, 무지의 공백이 준 강박이 저로 하여금 의자에 앉아서 글을 쓰게 만듭니다.

두번째는 제가 예전에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분의 글을 보고 나서 무언가 떠올라서였습니다. 10년 넘게 다니다 떠난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분들인데요, 그분들은 지금 나름의 독서 스터디를 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어떤 사상가의 책들을 읽었나 봅니다. 한분이 스터디가 끝나고 무언가 감명이 깊었는지 글을 남겼습니다. 저는 그 글을 읽고 참을 수 없는 글쓰기의 욕구를 느껴서 계속 그 글을 쳐다보았습니. 너무 할 말이 많아서요. 욕구를 참을 수 없어 이 책의 서평이라는 형태로 글을 쓰기로 했습니다. 왜 하필 이 책의 서평이냐구요? 이 책의 책표지가 바로 눈앞에 있고, 이 글을 쓰기로 했으니까요.ㅎㅎㅎㅎ

이제 본격적인 서평을 시작해야겠습니다. 앞에 잔뜩 글을 써놓고 본격적으로 서평을 시작한다고 하니 뭔가 이상한데요 ㅋㅋㅋㅋ,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밑에 적으려는 글이 진짜 시작이고, 그 앞에 써진 글들은 그 글을 위한 밑거름 정도이니까요. 그럼 빨리 그 글로 넘어가 볼께요.

2.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분이 글을 남겼다. 그 분은 어떤 사상가의 책들을, 생각을 공유하는 다른 이들과 함께 읽고, 함께 공부하며 큰 감명을 받았나보다. 글 마디마디마다 그 사상가에 대한 사랑이 넘쳐났다. 그런 사랑이 가능했던 건, 다른 이들과 함께 했던 그 시간을 사랑했기 때문이며, 그 시간을 거치며 본인의 앎과 자아가 성장했다고 걸 본인이 느끼고, 본인이 그 성장에 대해서 사랑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랑은 좋다. 나 자신을 사랑하고, 함께한 다른 이들을 사랑하고, 함께 했었던 시간을 사랑하고, 함께 읽었던 책을 사랑하고, 함께 읽었던 책의 저자를 사랑한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나 문제는 그 분이 사랑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만 한다는 건, 사랑하는 대상의 삶을 제대로 모른다는 말이다. 사랑만 한다는 건, 사랑하는 대상의 삶을 다 보지 못한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평범한 사랑의 과정을 생각해보라. 만남이 있고, 만남 뒤에 사랑이 가져다주는 행복한 '낭만화'의 과정이 있다. 저 사람은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그렇게 해서 좋다. 아니, 사실 그 사람이라서 좋다. 사랑에 빠지면 낭만화의 과정은 필연적이며,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이제 냉각기가 다가온다. 낭만은 사그라지고, 관계는 일상적인 삶이 된다. 여기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사랑의 미래가 결정된다. 위기를 잘 넘긴다면, 사랑은 이어질 것이고, 위기를 넘기지 못한다면 이별의 순간이 다가온다. 이렇듯 사랑의 과정은 사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사랑의 위기와 그 위기를 넘어서는 관계의 힘 같은 것들도 사랑의 과정에 포함된다. 낭만적 사랑은 사랑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앞에 내가 이야기했던 분은, 내가 보기에 낭만적 사랑의 과정에만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너무 사랑만 하기에. 그분은 그 사상의 약점, 비판받을 수 있는 부분은 전혀 없는 것처럼 말한다. 어떻게 한 사람의 사상이 좋은 점만 있을 수 있겠는가. 보지 못해서 그런 것인지, 알면서도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사람의 사상을 사랑만 한다는 건, 나에게는 균형을 상실한 위태로운 걸음처럼 보인다. 예술 작품에 대한 감상이나 취향의 음미가 아닌, 지적인 사상과 생각들을 대할 때는 사랑만 한다는 건 얼마나 위험한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맹신이나 광신의 위험성을 그분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글에 쓰지 않았다는 것은, 아직 그 사상을 넘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그 사상을 넘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건, 그 분이 아직 그 사상을 자기화하지 못했다는 말이며, 그 사상이 가진 폭과 넓이와 깊이를 제대로 체험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 사상이 나온 시대적 맥락을 자기 삶의 맥락과 일부만 연결시켰다는 말이다. 사상을 자기화했다면, 그 사상을 객관화해서 바라봤다면, 그 사상의 맥락을 넓고 깊게 바라봤다면, 그 사상의 맥락을 자기 시대의 삶과 폭넓게 연결했다면, 결코 좋은 말만 나올 수 없다. 좋은 말만 나온다는 건, 그 사상을 자기화하지도 못했으며, 그 사상을 넘을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사상 그대로 머무른다면, 좋은 말만 해도 된다. 그러나 고인 물은 썩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고, 멈추어 선다면 뒤쳐지는 것이 세상의 흐름인데, 머무르기만 해서 되겠는가. 하나의 사상을 읽고 공부했다면, 그 사상을 넘어서기 위해 노력해야 되는 것이 공부하는 자의 자세 아니겠는가. 굳이 청출어람의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 <임제록>에 나오는 '살불살조'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너무 앞서 나가는 이야기일 수 있다. 하지만 사랑만 하는 건, 글에 사랑만 남아 있는 건, 배우는 이의 자세로 결코 좋은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함께한 이들에게 보인 글이기에 그럴 수 있다. 그러나 함께한 이들에게 보내는 글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랑만 보이는 것이 옳은가. 내 이야기가 그분에게 들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이건 과도한 오해이고 섣부른 판단일 수 있다. 앞으로 그분이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미래는 바뀔 수 있고, 지금의 내 생각은 헛된 말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 글만 보면, 그 분이 아직 사랑만 하고 있는 게 맞다. 그리고 사랑만 하고 있다면, 사랑만 하고 있는 그분의 모습은 충분히 나에게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부디 그분이 앞으로 나아가기를. 그 사상가를 사랑만 하지 말고, 그 사상가를 폭넓게 파악해서 그 사상가를 넘어서서 자기 자신만의 사유를 하기를. 이것이 지금까지 읽고 배우며 생각해온 내 삶에서 내가 '그 사상가를 사랑만 하는 그분'에게 해드릴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이다.'

3.

써놓고 보니 마르크스 책인데, 마르크스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전혀 다른 이야기만 계속 하고 있군요.^^;; 그래도 위에 글을 쓰고 나니 속이 시원해지네요. 속이 시원해지고 싶어서 이 글을 썼기 때문에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습니다. '속이 시원해진다'는 목적을 달성했기에 이제 위의 글과 <생명을 짜넣는 노동>을 연결시켜서 적어보겠습니다. 위에 글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어는 '사랑'이겠죠. 이 '사랑'이라는 단어는 마르크스 <자본론> 1권을 상세하고 세밀하게 해설하는 총 12권의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시리즈'의 5권인 <생명을 짜넣는 노동>과 이어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어떻게 자본과 사랑이 이어지느냐? 그건 '자본의속성' 및 '자본과 자본가의 관계'와 연관이 있습니다. 자본주의 체제의 자본은 화폐와 차이가 있습니다. 단순한 교환에서 그치고 마는 화폐에 비해, 자본은 자기 자신의 증식을 목표로 합니다. 자본을 투자해서 자본을 늘리는 무한순환.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늘리는 흐름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본가는 그 흐름 속에서 자본의 자기 증식을 대행하는 존재입니다. 자본주의라는 큰 흐름 속에서, 자본의 욕망을 좇아서, 자본가는 자본의 욕망을 대리하여 자본의 자기 증식을 행합니다. 아마도 자본가는 그런 착각을 할 것입니다. 자본의 자기 증식이 자기의 욕망이라고. 이걸 사랑이라는 단어로 바꿔보겠습니다. 자본가는 자본을 사랑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자본가는 자본의 자기 증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끊임없는 자본의 자기 증식을 사랑하는 자본가. 바꿔 말해도 됩니다. 자본도 자본가를 사랑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대행해주니까요. 제 생각에는 자본가가 자본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자본이 자본가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자본의 자기 증식이라는 욕망을 알아서 수행해주는 도구니까요. 자본주의는, 자본과 자본가의 사랑이 넘쳐나는 사회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빠진 존재들이 있습니다. 자본과 자본가의 사랑 사이에서, 자본의 자기 증식을 수행하는 실체적인 존재들인 노동자들.

4.

자본의 자기 증식이든, 자본가가 자본의 욕망을 따라서 행하는 자본의 자기 증식이든, 실체적으로 이 욕망을 이루어내는 존재는 노동자들입니다. 원료와 재료를 합해서 상품을 만드는 존재도 노동자들이고,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력을 바치고 잉여가치를 통해 자본가들에게 이득을 선사하는 존재들도 노동자들이고, 자본의 자기 증식을 몸으로 손으로 이루어내는 존재들도 노동자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에게 사랑은 머나먼 이야기입니다. 자본가에게 고용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통해 만들어진 상품이 자기 것이 아니기에 생산품에서 소외되어 있고, 자신이 하는 노동 자체가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자본가의 의지에 따라 하는 것이기에 노동에서도 소외되어 있습니다. 이 이중의 소외는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을, 자신의 노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상품을 사랑하지 않게 만듭니다. 이건, 노동자가 자본과 자본가 상호간의 사랑에 끼여들지 못하게 합니다.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 자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면, 노동자는 자본주의가 형성해내는 자본과 자본가의 사랑에 끼여들 수 없습니다. 노동자로 계속 산다면 평생 그 사랑에 끼여들 수 없는 것이죠. 사랑이라는 입장에서면, 노동자는 자본주의가 외치는 자본가와 자본의 사랑 노래에 끼여들지 못하는

자본주의 사랑 노래의 객체인 것입니다.

5.

불행은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노동을 살펴보면, 노동자는 생명력 없는 원료들을 가공하며 자본의 자기 증식 욕망이 생생히 살아 있는 상품들을 만들어냅니다. 죽은 것들을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노동자의 노동. 자본가는 노동자의 노동을 통해 자본의 자기 증식 욕망(마치 그것이 자신의 욕망인 것처럼)을 실현하고,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낍니다. 당연히 자본도 그 과정을 통해 생생히 살아 있게 되죠. 반대로 노동자는 자신의 생명력을 짜넣고 생명력 없는 물질들을 자본의 욕망이 살아 숨쉬는 상품으로 만듬으로써, 애정없이 소외된 채 죽음으로 달려나갑니다. 생명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노동자의 노동, 죽은 물질에서 자본주의의 욕망이 살아 숨쉬는 상품의 탄생을 통해 죽음에서 생명으로 향하는 자본과 자본가. 이 둘의 교차가 <생명을 짜넣는 노동>이 그려내는 모습입니다.

6.

위에 빨간색 글씨로 쓴 글을 이제 저 자신에게 돌려줄 차례입니다. 저는 아직 마르크스에 대해 잘 모릅니다. 당연히 <자본론>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잘 모르니까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더군다나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지켜본 인물로서 마르크스가 다 옳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공부가 더 필요하겠죠. 공부하고 파악해서 마르크스라는 인물의 사상을 내 나름대로 사유할 생각입니다. 그게 가능하다면 나만의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비판도 가능하겠죠. 이 때의 비판이란, 시중에 떠도는 정치적인 비판과는 결이 다를 겁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나만의 비판이니까요. 그 비판이 가능할 때 비로소 저만의 공부가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겁니다. 그때까지 계속 공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만 하지 않고, 마르크스를 넘어서기 위한 공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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