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리뷰를 나름대로 써나가다 아감벤에게 막혀버렸다.

아감벤이라는 산을 넘어서는데 한번 막히고 나니 그 다음의 글들을 도저히 쓸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오늘에 이르러서야 아감벤이든 지젝이든 바디우든 들뢰즈든,

무엇이든 걸리면 걸리는 대로 내 마음대로 쓰기로 했다.

환상과 현실을 넘나들면서.

어쩌면 이걸 핑계로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쓸려는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다시 시작하기로 했으니 언젠가 막힐 때까지 계속 써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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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
제임스 설터 지음, 최민우 옮김 / 마음산책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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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9.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제임스 설터

나의 내면에는 우리가 했던 모든 것이, 그러니까 우리 입 밖으로 나온 말들, 맞이한 새벽들, 지냈던 도시들, 살았던 삶들 모두가 한데 끌려들어가 책의 페이지로 만들어져야 한다는 고집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건 존재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존재한 적도 없게 되고 만다는 위험에 처할 테니까.(440)

'제임스 설터'하면 떠오르는 건, '작가들의 작가'나 '스타일리스트'라는 단어들입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어딘가에서 들은 저 단어들로만 유추해보면 '제임스 설터'는 대중적 인지도는 높지 않지만 작가들에게 인정받는 작가이자 유행에 휩쓸리지 자신만의 특정한 스타일을 고수하는 작가처럼 보입니다. 글이 쉽게 읽히지 않을 거라는 예측도 가능하고요. 그런데 실제 그의 소설을 읽어보면 글이 어렵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글이 쉽게 읽히고, 어려운 부분은 별로 없습니다. 토니 모리슨이나 살만 루슈디 같은 작가들처럼 혼란스럽고 뒤섞인 글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존 밴빌처럼 문장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채우는 것도 아니고, 조르주 페렉처럼 실험적인 글쓰기를 하는 것도 아니고, 사무엘 베케트처럼 부조리함 가득한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쓰지도 않습니다. 제임스 설터는 묵묵히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써내려갑니다. 자신만의 문학적인 방식으로요.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은 작가 사후에, 작가의 아내가 발견한 상자에서 발견한 글들을 기반으로, 그 중에서 '최고의 것들'을 모아서 출판한 책이라고 합니다. 형식은 인터뷰나 칼럼 같이 가리지 않고 다양하게 섞여 있고, 소재도 문학,군대,영화,스키,등반 같이 다양한 것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면서 가장 강하게 느낀 건, 이 책의 글들이 20세기를 담고 있다는 겁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의 향수를 간직한 채 잊혀지고 스러져간 그 20세기의 삶의풍경들. 작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담아낸 20세기의 풍경들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제목처럼 '쓰지 않으면 사라지는 것들'의 풍경, 체취, 실감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스키로 유명한 마을인 아스펜의 풍경, 20세기를 풍미했던 스키선수들의 모습과 그들의 열정,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노력으로 위험을 무릎쓰고 산을 오르는 20세기 등반가들, 작가가 사랑한 이사크 바벨 같은 20세기 문인들, 작가가 겪은 군대 시절의 모습, 프랑스에서의 경험들 까지, 이 책은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을 생생하게 되살려내며 책을 읽는 독자들을 20세기의 향수에 취하게 만듭니다.

1925년에 태어나 2015년에 세상을 떠나,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20세기에서 보낸 작가는 '20세기의 인간'일 수밖에 없고, 20세기의 인간이 20세기의 삶의 모습을 실감나게 되살려내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21세기를 사는 저한테 20세기의 풍경은 너무 인상적입니다. SNS도 없고, 인터넷도 없고, 휴대폰도 없이,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특정한 도구가 아니라 지금보다 더 인간적인 방식으로 연결되어야 했던 시대의 풍경은 21세기 보다 더 인간 냄새를 강하게 풍기면서 제 안에 간직하고 있었던 20세기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니까요. 어쩌면 제임스 설터는 사라진 것들, 스러져간 것들을 글로 써서 남김으로써 자기 자신의 삶 또한 되살려내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게 글이 가진 강력한 힘이자 작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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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노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5
토니 모리슨 지음, 김선형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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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8.솔로몬의 노래-토니 모리슨

모든 사람이 흑인의 목숨을 원해. 모든 사람이. 백인 남자들은 우리가 죽지 않으면 조용히 있기를 바라지- 조용히 있는 건 죽은 거나 다름없는데.(348)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랐습니다. 책이 쉽게 읽혀서요.^^ '책이 쉽게 읽혀서 놀랐다?'라고 반문하실 수 있는데요, 네, 저는 말 그대로 책이 쉽게 읽혀서 놀랐습니다. 그 이유는 작가의 이름 때문입니다. 토니 모리슨. 흑인 여성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저 작가의 이름이 책에 쓰여 있지 않았다면, 쉽게 읽힌다고 해서 놀랄 이유는 없었을 겁니다. 지금까지 제가 읽었던 토니 모리슨의 책은 쉽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나,너,그,그녀 같은 다양한 인칭들을 마구잡이로 섞어서 쓰거나, 다양한 인물들의 목소리를 다양하게 혼합해서 쓰거나,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대를 마구 뒤섞어 놓는 것 같은 복합적이고 중층적이며 실험적인 구성,문체들이 가득했거든요. 역설적으로 저는 그래서 토니 모리슨의 책들이 좋았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실험적인 것들이 신선하고 흥미로웠거든요. 또 그것을 통해 버림받고 잊혀진 '흑인 여성' 혹은 '흑인'들의 삶의 서사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며, 그들의 삶의 현실을 문학적으로 알려주는 것도 좋았습니다. 문학이 할 수 있는 가능성의 틀을 서사를 통해 구현하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이 소설이 쉽게 술술 익혀서 놀랬습니다. 역설적으로 어렵지 않아서, 쉽게 익혀서 굉장히 좋았습니다. 읽을 때 힘들지 않으니까요.^^

소설은 일단 흑인 남성이 주인공입니다. 이것도 다른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제가 읽은 토니 모리슨의 소설에서는 다 흑인여성이 주인공이었거든요. 어쨌든 소설은 메이컨 데드 3세, 밀크맨이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의 자기의 뿌리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주인공의 별명이 왜 밀크맨인지는 소설에 나와 있어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 소설은 토니 모리슨의 다른 소설들처럼 소설의 흐름이 혼랍스럽거나 난해하지 않고, 일직선으로 흘러나갑니다. 밀크맨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흔들림 없이 하나하나 이야기해 나가는 방식으로요. 다른 인물들이 화자로 이야기에 간혹 등장하지만, 그들은 일직선인 소설의 흐름을 끊지 않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요소로서 이야기에 참여합니다.

소설은 성장소설처럼, 주인공 밀크맨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 나서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북부의 부유한 흑인 출신으로, 다른 흑인들과 달리 커다란 차별을 느끼지 않고 부유하게 살아가는 밀크맨은 흑인들의 차별이라든 억압에 무관심한 모습을 보여주며 하루하루를 보내다 우연한 사건으로 자신의 뿌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것이 집을 떠나고 싶다는 욕망과 숨겨진 금을 차지하고 싶다는 섞이며 운명의 격랑에 휘말리며 자신의 근원을 찾아 나서게 됩니다. 남부에서 자신의 땅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다 자신의 땅을 차지하려는 백인들에 의해 억울하게 살해당하고 땅을 뺏긴 메이컨 데드 1세나, 아버지의 살인으로 힘겨운 삶을 살다 북부로 흘러들어가며 거기서 처절하게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하며 가족의 사랑에 관심없는 비인간적인 삶을 사는 메이컨 데드 2세에 비해, 3세인 밀크맨은 차별을 크게 느끼지 않는 존재였지만, 자신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과정을 통해 역으로 차별을 실감하게 됩니다. 차별받는 흑인과 동떨어진 외로운 섬 같았던 밀크맨은, 자신의 근원을 찾아나서며 비로소 다른 흑인들과 다를 바 없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흑인이 됩니다. 예외적이고 개인적인 흑인에서 사회적 현실의 격랑에서 헤어나오지 못해 괴로워하며 슬퍼하고 고뇌하는 흑인 공동체에 포함되는 흑인으로의 변화. 밀크맨이라는 예외적인 개인에서, 미국의 흑인이라는 하나의 공공적인 인간으로의 변화. 이 변화의 과정을 어렵지 않고 쉬운 문체와 흡입감 있는 스토리와 인물들의 생생함을 통해 보여주니 이 책이 재밌을 수 밖에 없죠. 실제로 토니 모리슨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고요.

그런데 변화 자체는 좋은 현상이지만, 변화가 주인공에게 과연 좋은 것이기만 할까요? 당연하게도, 이 소설은 동화가 아니고, 동화가 아니기에 만만치 않은 현실의 벽을 보여줍니다.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삶은 주인공의 극적인 변화가 이룩한 삶의 생생함에 크게 영향받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죽은 체로 살거나 죽습니다. 악독하게 살아야만 하는 아버지, 애정 없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죽은 삶을 사는 어머니, 대학을 나왔지만 흑인 여성이라는 벽에 가로막혀 죽은 듯이 사는 누이들, 밀크맨을 사랑하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죽는 헤이가, 불평들의 그늘을 견디지 못하고 백인을 죽이는 결사를 조직한 밀크맨의 친구 기타 부터 다른 이들까지. 물론 그들의 나름의 생명력을 가진 삶을 사는 것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흑인의 현실'을 넘어설 수 없죠. 결국 현실을 깨닫는 다는 것은 현실의 벽을 절절하게 느끼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마지막의 열린 결말 같은 부분도 그렇고, 토니 모리슨은 동화가 아닌 현실을 보여주며 독자에게 깨달음과 더불어 현실의 견고함도 알려줍니다.

지금 미국에서 인종 차별을 둘러싼 시위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현실을 보고 있노라니, <솔로몬의 노래>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현실의 견고함은 지금도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솔로몬의 노래>처럼 심각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견고한 차별의 벽 앞에서, 저는 <솔로몬의 노래>와 같은 또다른 흑인 서사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짐승이 아닌 인간이 되었지만, 백인에 비해서 여전히 이등 국민 같은 미국 흑인들의 삶을 위해서도 그렇고, 외부에서 그들의 차별을 서글프게 바라보는 저 같은 외부인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저는 여전히 그런 서사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토니 모리슨을 대신한 다른 누군가가 지은 또다른 형태의 '솔로몬의 노래'가 들려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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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벨리스크의 문 부서진 대지 3부작
N. K. 제미신 지음, 박슬라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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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7.오벨리스크의 문-N. K. 제미신

어쨌든 사람이란 자기 자신과 남들로 구성된다. 하나의 존재를 최종적인 형태로 빚는 것은 타인과의 관계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9)

좋은 판타지 소설이란 무엇일까요? 아주 추상적인 질문 같지만, 판타지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는 어떻게 생각해보면 중요한 질문일 수 있습니다. 제 나름의 생각을 말해보자면, 우선 좋은 판타지 소설이란 재미있는 판타지 소설입니다. 장르 문학으로 대표되는 대중 문학 장르란 모름지기,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재미를 선사해야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재미있으려면 읽기 어렵기 보다는 읽기 쉬워야 할 것이며, 스토리텔리의 힘이 강력해야 할 겁니다.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스토리텔링으로는 재미를 주기 어려우니까요. 따라서 낯선 세계의 환상적이고 낯선 모험을 주로 그리는 판타지 소설이 재밌으려면 읽기 쉽고 이야기의 힘이 강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좋은 판타지 소설의 또다른 요건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건,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세계의 리얼함입니다. 어찌보면 이게 이상한 말인데, 왜냐하면 판타지 소설 속 세계는 작가가 만든 가상의 세계이고, 그것은 환상적이고 낭만적일 따름이지 현실의 입장에서는 리얼하기가 힘들거든요.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동떨어진 환상적이고 이상한 세계라 해도, 그 나름의 리얼함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생생함과 질감이 떨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소설을 읽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에 이 환상적 세계의 리얼함은 좋은 판타지 소설에 필수적입니다. 아무리 판타지 소설이라 해도 책 속에 등장하는 이들의 현실감이 떨어지며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면 책에 집중하기 어려워 지는 겁니다.

쉽고 재미있으며 나름의 리얼함을 갖추고 있으면 좋은 판타지 소설이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게 쉬운 일인가요? 쉽지 않은 일이죠. 쉽지 않기 때문에 판타지 소설가들은 계속 노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벨리스크의 문>은 그 노력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부서진 대지' 3부작의 두번째 작품인, 이 소설은 '부서진 대지'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처럼, 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고요 대륙'의 생생한 현실감을 구현해내려는 작가의 몸부림이 느껴집니다. 마법에 가까운 '조산술'을 쓰는 종족인 '오로진'에 대한 일반인들의 차별과 증오심(여기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인 저자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정체 불명의 존재인 스톤이터들과 그들의 예측할 수 없는 행보, 오로진을 제어하려는 수호자들의 행동과 폭력성, 저마다 각자의 생각과 이기심으로 벌어지는 폭력과 전투와 생존을 위한 몸부림, 이전 문명의 흔적들과 그것들을 움직이려는 시도까지. 이 작품은 역동적인 스토리텔링에 그것을 도와주는 판타지 세계의 생생함을 곁들여내려는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다르게 생각해보면 가상의 세계인 고요 대륙 특유의 단어나 말투,개념,사고,생각,가치관에,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과 분명하게 다를 수밖에 없는 환상적인 세계의 환경,정치적 현실, 역사,사회문화적 맥락, 삶의 방식이 너무 이질적이고, 다른 면모가 있어서 쉽게 다가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선다면, 충분히 어느 정도의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역동적인 스토리텔링, 가상 세계의 현실감을 간직한 인물들의 생명력과 투쟁, 마법과 환상적인 폭력이 난무하는 소설. 이 정도면 판타지 소설에 뭐를 더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강력한 건 '애정'입니다. 남녀 간의 애정이 아니라 가족 간의 애정. 소설의 이야기를 감싼 휘황찬란한 요소들을 제외하면 이 소설은 어머니가 딸을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 소설의 전편인 1편 <다섯 번째 계절>은 주인공인 에쑨이 남편의 폭력으로 아들을 잃고, 남편이 딸마저 데리고 떠나버리면서 딸을 찾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거기서 에쑨 자신의 과거와 지금까지 이르게 된 경위, 자신의 힘을 자각해나가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시간을 교차시키며 전개됐던 1편에 비해 2편인 <오벨리스크의 문>은 두 개의 이야기를 교차시키고 있습니다. 하나의 이야기는, 1편의 모험 끝에 지하향 카스트리마(지하도시로 봐도 됩니다.^^)에 정착한 에쑨이 거기에 머물고 있던 과거의 스승이자 애인인 인물을 만나 힘을 더 키우고, 카스트리마에 닥친 위기에 대항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이야기는, 에쑨이 찾는 대상인 딸 나쑨의 이야기가 그려지고 있습니다. 과거에 오로진으로 인해 나쁜 일을 겪고 오로진에 대한 트라우마와 증오심을 가지고 있던 에쑨의 남편 지자는, 아들의 정체를 알고 홧김에 때려죽었다 정신을 차리고 딸 나쑨을 데리고 마을을 빠져나와 방랑을 하게 됩니다. 그 와중에 에쑨을 통제했던 과거가 있으며, 에쑨과 뗄려야 뗄 수 없는 악연을 가진 수호자 샤파를 만납니다. 샤파는 다른 수호자들과 같이 어린 오로진들을 데리고 일종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고, 거기에 둘을 받아들입니다. 어머니 에쑨을 따라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던 나쑨을 아낀 샤파는 아이를 딸처럼 아끼고, 아버지가 본질적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나쑨은 샤파를 자신의 아버지처럼 여기고 따르며 그의 편에 서게 됩니다. 오로진에 대한 차별에 반대하고, 그들을 자유롭게 살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에쑨과 수호자의 편에 서서 오로진들을 통제하고 말을 안 들으면 죽일 생각까지 있는 나쑨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겠죠. 아마도 둘의 대결은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라고 할 수 있는 3편에 가면 등장할 것 같습니다.

소설의 이야기를 가리고 있는 휘황찬란한 것들을 거두고 나면 보이는 건 애정입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 인간 관계에 대한 갈망 같은 것들이 이 소설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죠. 오로진에 대한로 증오로 인해 딸을 사랑할 수 없는 아버지, 그 아버지 때문에 나쑨은 사랑을 갈망하다 좌절하고, 수호자의 본성을 거부하면서까지 자신을 아끼는 샤파를 만나 그를 진짜 아버지로 여기게 됩니다. 나쑨은 샤파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여기며 어머니와 반대편에 서는 것이죠. 에쑨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자가 자기가 사랑할 수 없는 인물인 걸 알고 좌절하고, 카스트리마에 가서 재회한 옛 스승을 통해 과거의 사랑을 떠올리는 에쑨도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가 기댈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습니다. 둘의 능력과 폭력이 발화하는 지점의 근원에 도사리고 있는 건, 어긋난 애정에 대한 좌절감과 진실한 애정에 대한 갈망입니다. 사실 이건 판타지 소설이 아닌 다른 소설들에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야기나 문학이 인간의 감정을 끌어올리고 극적인 사건을 구성하기 위해 인간의 가장 극단적인 감정 중 하나인 애정을 잘 사용하니까요. 그게 다 우리가 다 인간이고, 인간이라면 무릇 인간의 감정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생기는 일입니다. 그러고 보면 판타지 소설도 화려하고 환상적인 부분이 있지만 결국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의 이야기인 셈이다. 환상으로 부풀려졌지면 들여다보면 다 똑같은 인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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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캐너 다클리 필립 K. 딕 걸작선 13
필립 K.딕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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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56.스캐너 다클리-필립 K. 딕

"아직 당신 친구야."

도나는 격하게 대꾸했다. "부서진 잔해일 뿐이야."(411)

필립 K. 딕 하면 우선 떠오르는 건 그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입니다.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마이너리티 리포트> 같은. 저도 영화를 생각하면서 그의 소설들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읽으면 '뭔가 다른데'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의 느낌이랑 너무 다른 면이 있어서요. 각 영화마다 분위기가 다른 점이 있어서 무조건적으로 일반화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시간 동안에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는 영화의 특성상, 영화들이 SF적인 스토리텔링이나 시각효과에 중점을 두는 것에 비해, 필립 K. 딕의 소설들은 스토리텔링 보다 작가의 스타일에 더 집중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대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에다, 대화 속에 묵직하고 의미있는 철학적인 주제들이 들어가 있고, 환상과 현실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그만의 스타일. 여기에 덧붙일 수 있는 게 약물입니다. 약물 중독에 시달린 삶을 살았던 저자답게 그의 소설은 약물의 그림자가 어른거립니다. 실제적으로 약물이 책 속에 등장할 때도 있고, 약물이 나오지 않아도 약물의 느낌이 나는 식으로. 다른 말로 딕의 SF는 '사이키델릭'한 느낌이 강합니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스캐너 다클리>는 딕의 소설 중에서 가장 약물에 천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책을 펼치면 처음에 나오는 '등장 약물 소개'부터 이미 이 책의 약물 포스는 장난이 아닙니다. 약물을 다루는 단어들을 소개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책에서 약물은 알파이자 오메가일 수밖에 없죠. 하지만 약물 못지않게 책을 강하게 뒤덮고 있는 건 딕의 스타일입니다. 인물 간의 대화에서 언뜻언뜻 보이는 철학적이고 진지하고 묵직한 주제와 어구들, 이게 환상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안 가는 불안과 불확실함의 반영 같은 딕의 스타일은 이 소설을 딕만이 쓸 수 있는 소설로 만듭니다. 실제 약물 중독과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재활 치료의 경험을 반영한 이 소설은, 그렇게 약물 소설이자 딕의 소설이 됩니다.

제가 이 소설에 흥미롭게 본 부분은 이 소설이 성장소설의이 '거울상' 같다는 점입니다. 성장소설이 뒤집힌 형태라고 할까. 일반적으로 성장소설은 주인공이 어떤 경험을 통해 성장하고 성숙해지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원래 상태에서 어떤 식으로든 성장해서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죠. 하지만 이 소설은 그것의 반대입니다. 소설의 처음에, 주인공인 비밀 요원 프레드는 소설에서 가장 멀쩡한 상태로 등장합니다. 그는 경찰이지만, 밥 아크터라는 가명으로 마약상을 하며 신종 마약 'D물질'의 공급원을 뒤쫓고 있습니다. 일종의 잠입요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죠. 약물중독이 일상화되어 있고, 약을 공급하는 이들이 차고 넘치는 상황에서, 그는 자신만의 최선을 다합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D물질'을 수시로 접하며 약물중독자가 됩니다. 상부의 명령으로 그는 상부가 주목하는 이의 삶을 상부가 몰래 설치한 홀로스캐너로 관찰하게 됩니다. 재미있는 건, 상부에서 그에게 관찰하라고 명령한 이가 바로 '밥 아크터'라는 점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홀로스캐너로 관찰하고 보고해야 합니다.자신을 관찰하면서 그는 자신의 모습이 거울상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진짜 자신은 약물중독으로 삶이 파괴되어가고 있었던 것이죠. 이 소설은 그 과정을 통해 멀쩡한 인물이 약물 중독으로 인해 몰락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가장 정상적이고 멀쩡한 상태에서 시작한 그의 모습은 책을 넘기면 넘길수록 파괴되어 갑니다. 인지 능력이 약화되는 것부터 해서 뇌가 서서히 무너져가다가 자기 자신을 잃는 식으로. 가장 좋은 상태에서 가장 최악의 상태가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 소설의 형식은 '성장소설'의 반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몰락의 소설이자 약물 중독으로 인한 자아상실을 보여주는 소설.

약물 중독을 통한 몰락의 과정을 보여준다고 해서 이 소설이 오직 약물중독에 매달린 약물 소설인 것만은 아닙니다. 소설은 프레드의 경찰 동료로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프레드의 약물 중독을 방관한 이가 프레드의 몰락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그를 돕기 위해 나서는 것도 보여줍니다. 그 사람을 통해 프레드가 있는 치료소에 가서 프레드를 돕는 다른 요원의 모습도 있죠. 대화 중간중간에 나오는 묵직하고 철학적인 고찰이나 무게감 있는 문장들은 이 소설을 오직 약물의 굴레에만 매이지 않게 해줍니다. 약물을 떠나서, 저는 마지막 부분에 도달하면 이 소설에 존재하는 이상한 따스함을 감지해냅니다. 비록 약물로 인해 파괴됐지만 삶을 포기하지 않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그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꿈꾸는 따스함. 아마도 그건, 약물중독으로 인한 고생하던 작가 자신의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감의 반영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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