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명된 사실
이산화 지음 / 아작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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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8.증명된 사실-이산화

3년 동안의 학교 생활을 통해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배우기는 했으니까. 바로 세상의 법칙이란 바뀌는 법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F는 ma와 화학반응 전후의 질량은 보존되며, 무슨 사립학교 연합회 회장이기도 한 교장이 대놓고 "고등학교는 애들 대학 잘 보내려고 있는 겁니다" 같은 소리를 해도 여전히 교장이고(27)

가만히 다가가서 어깨를 맞대고 선 나의 눈에도 같은 광경이 비쳤다. 노을빛을 받아 지옥처럼 붉게 타오르는 불빛, 자습실, 교실, 운동장, 지긋지긋한 이 작은 세상.(38)

3년 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세상의 공식적인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인간관계란 수능과 같아서, 지금까지 어떻게 지냈든지 심판의 날에 친구인 사람이 진짜 친구인 법이었다.(39)

"나는 이제 온 세상을 파괴하는 자, 죽음 그 자체가 되었노라."(40)

증명된 사실과 싸우는 일은 무의미했다. 반증할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한다.(70)

천문학의 역사란 곧 주제 파악의 역사니까. 광대한 우주 속에서 인류의 위치를 가늠하는 동안 우리는 매번 우리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직면해야만 했으니까.(130)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기 전까지 나는 어떻게든 팔을 뻗어 멀어져가는 네 손을 붙들려 해. 언젠가 네가 내 손을 잡아주었듯이. 이해하고, 고민을 들어주고, 공감해주려 해. 하지만 이미 늦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어. 한순간 손가락 끝이 스치는 것 같다가도, 그 찰나의 두근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너는 벌써 먼지구름 속으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아. 다만 그 벨소리만이, 최후의 날 시계의 불길한 초침 소리처럼, 육교 저편의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이어지고 있어.(157)

화석의 질문에는 정해진 답이 없다. 아니, 답은 오래전에 땅속에 파묻혀 사라져버렸다. 그래서 고생물학자는 답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174)

<조커> 영화에 관련된 이야기를 늘어놓는 유투브 영상을 보면서 기억에 남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조커가 '예의 없는' 인간들을 용서하지 않았다는. 조커는 예의 없는 세상에서 예의 없는 자들에게 당해 미쳐버리고 예의 없는 자들을 용서하지 않게 되죠. 예의 있는 사람은 살려주고요. 뜬금없이 서평을 쓰면서 영화 <조커>와 '예의' 이야기를 왜 하냐고 하실 수 있는데요(^^;;) 그건 <증명된 사실>이 굉장히 '예의 바른' 책이라서 일 겁니다. 첫 소설집을 내는 소설가 답게 저자는 이 책에 대한 애정, 이 책에 실린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뽑내며, 각각의 작품들에 대한 일종의 후기 같은 글을 작품들 뒤에 덧붙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각각의 작품들이 어떻게 태어났고, 어떤 과정을 거쳐 완성됐는지, 그리고 필요하다면 소설 뒷부분에 붙일 수 있는 작은 이야기들도 써내며 독자들에게 굉장히 친절하고 예의바른 모습의 책을 완성합니다. 작가 스스로가 예의 바르니, 저도 이 글에서 '예의 있는' 모습을 보여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음... 잘 모르겠네요.(^^;;) 그냥 지금까지처럼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을 최대한 예의 있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 '예의 있는' 말로 무엇을 말해야 할까요. 우선 '이야기'에 관련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이야기'에 관련된 이야기? 뭔가 동어반복같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이야기니까 한번 들어보세요. 저는 소설이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이야기'라는 형태로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창작 양식이 시대를 거쳐 근대 문학이라는 영역에 들어와서 '소설화'했다고 생각하는 거죠. 물론 토마스 베른하르트 같이 '이야기 파괴자'를 자처하는 소설가들은 제 말에 경기를 일으키겠지만(ㅋㅋㅋ), 저는 그들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소설이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소설은 이야기를 빼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여깁니다.(저는 소설에서 이야기를 파괴하려는 토마스 베른하르트 같은 소설가도 '이야기 없는 이야기' 혹은 '이야기가 사라진 이야기'를 쓰는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연하게도 저에게 SF는 이야기입니다. 과학이라는 외관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이야기. 과학이라는 외관으로 자신을 포장했기 때문에, SF는 과학적인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SF는 허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과학만으로는 담을 수 없는 가상과 비현실의 면모도 보여줍니다. 과학적이면서 비과학적이고, 비과학적이면서 과학적인 이야기. 제게 SF는 그렇게 다가옵니다.

<증명된 사실>도 제가 생각하는 SF에 속하는 책이었습니다. 과학의 외피를 둘러쓴 과학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허구의 이야기들로. 물리학자가 귀신 보는 여인의 도움을 받아 사후 세계의 진실을 밝혀내는 이야기를, 고생물학자가 한 성당 신부의 부탁으로 공룡의 후예와 인간의 사랑을 다룬 모험담을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곤충학자가 지옥의 생물일지도 모를 벌레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야기를, 다리가 불편한 한 여인이 할아버지가 남긴 유물을 조사하여 자신의 추리력으로 중국 명나라 때의 자기 조상들의 행적을 재구성하는 이야기를, 살아남은 공룡 인간들이 인간을 사냥하는 이야기를, 수수께끼의 대기권 생물이 자신의 윤리성을 지키기 위해 사로잡힌 인간을 돕기 위해 나서는 이야기를, SF가 아니면 뭐라고 부르겠습니까? 그 이야기들은 충분히 SF적이었습니다. 동시에 그 이야기들은 작가 이름을 따서 '이산화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이 '이산화적'이라는 말은 아직 명확한 정의가 내려진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느냐에 따라서 그 말은 점점 어떤 형태로서 나타낼 겁니다. 그날까지 저도 SF 독자로서 꾸준히 SF를 읽을 것을 다짐해봅니다. 이 말은 거짓이 아닐 겁니다. 저는 과학적이면서도 비과학적인 SF의 주술에 홀린 독자이니까요. 여기까지 쓰고보니 확실해집니다. 제가 이 글을 쓴 이유는 제가 왜 SF를 계속 읽는지를 증명하고 싶어서였다는 사실을. 증명까지 하고 나니 다시 읽을 SF를 찾아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술에 걸린 독자에게 휴식은 없는 법이니까요. 영원히 충족할 수 없는 갈망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저는 다음번 SF를 향해 내달려보겠습니다.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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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연대기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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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7.돌의 연대기-이스마일 카다레

그 사지와 돌 갑옷 속에 사람의 생명을 간신히 품고 있었지만 그 생명을 찢고 할퀴며 온갖 고통으로 짓누르는 것도 사실이었다. 돌로 이루어진 도시여서 당연히 그 촉감은 거칠고 차가울 수밖에 없었다.

이런 도시에서 어린아이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8)

여기저기서 글자들이 아찔할 만큼 빠른 속도로 달린다. 자음도 달리고 모음도 달린다 그것들이 모여 말이 되거나 우박이 된다. 글자들이 다시 달린다. 단검이 만들어지고 밤이 닥치고 살인이 저질러진다. 연이어 도로가 나타나고 문들이 덜컹대고 정적이 찾아든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끝도 없이.(91)

어쩌면 그게 살육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국가를 도살장으로 데려갈지, 그들의 울음소리가 어떨지는 상상이 잘 되지 않았다. 투박한 검정 모직 옷차림의 시골 사람들. 흰옷을 입은 도살자들. 염소, 양, 새끼양 들. 그 광경을 보러 온 사람들. 기다리는 사람들. 그러다 마침내 올것이 오고야 만다. 프랑스. 노르웨이. 땅이 피로 물든다. 네덜란드가 매애매애 울어댄다. 새끼양의 모습을 한 룩셈부르크. 목에 큼직한 방울을 단 러시아. 염소의 형상인 이탈리아(125)

이 오래된 도시는 공습을 받았다. 유구한 세월 동안 노포나 대포알, 파성추의 공격을 무수히 받아온 도시. 이제 그 기반이 산산조각나 장님처럼 고통에 찬 신음소리를 냈다. 겁에 질린 수많은 유리창들이 파편이 굉음을 내며 사방으로 튀었다.(131)

세상이 피를 갈아치우는 게지. .. 사람은 사오 년에 한 번씩 피를 갈아치우지. 세상은 사오백 년마다 그렇고. 우리가 사는 시대는 피의 겨울이야.(319)

세상이 문학을 파괴하려 할지라도, 문학은 세상을 더 아름답고 살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애쓴다(394)

어른과 아이는 다릅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어른과 아이가 다른 이유는 삶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른은 아이보다 더 긴 시간을 살았고, 살아온 시간만큼 형성된 굳어진 '삶의 틀'이 있고 그에 따라 '어떤 전형성'을 가지게 됩니다. 반대로 아이는 어른보다 살아온 삶의 시간이 짧고, 짧은만큼 굳어진 '삶의 틀'이 없습니다. 굳어진 '삶의 틀'이 없는만큼 아이들은 저마다의 짧은 삶을 기반으로, 어른과는 다른 '삶에 대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풍부한 상상력을 토대로 굳어진 삶의 틀이 없어 전형성을 가지지 못한 아이들의 삶에 대한 인식은, 독창적이고 색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소설가들은 아이들의 시선을 이용하여 전형적인 삶에 대한 인식과는 다른, 색다른 시각을 가진 소설을 써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알바니아를 대표하는 소설가인 이스마엘 카다레가 어린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돌의 연대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설은 '나'라는 아이의 시선으로,아이가 살아가는 '돌의 도시'를 휩싼 전쟁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형적일 수 밖에 없는 전쟁의 모습은, 아이의 시선으로 새롭게 펼쳐집니다. 아이는, 도살장을 본 경험을 바탕으로 국가들간의 전쟁을, 양의 모습을 한 각 국가들이 도살장에 모여서 죽어가는 모습으로 묘사합니다. 또 다른 장면에서 아이는 국가들간의 전쟁을, 우편 수집의 양상으로 그려냅니다. 전쟁뿐만이 아닙니다. 아이가 도시와 도시의 사물을 그려내는 방식도 어른과는 다릅니다. 집의 수조와 대화하는 아이는, 도시와 집과 각각의 사물들과 자연들이 살아있다고 여기며, 도시와 도시의 사물들과 도시를 둘러싼 자연을 생생히 살아 움직이며 서로 경쟁하고 교류하는 존재로 그려냅니다. 어른들을 보는 시각도 아이는 다릅니다. 아이는 어른들을 강하며 어딘가 신비에 싸인 존재로 바라보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들의 생생한 치부를 가혹할정도로 드러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들의 영향도 강하게 받습니다. 도시를 지배하는 미신과 풍습과 관습에 현혹되어 주술을 피하고자 온갖 몸부림을 치기도 하고, 어른들이 가진 강력한 고정관념에 얽매여 있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아이는 어른들을 벗어나는 몸부림도 보여줍니다. 외가 가족들이 싫어하는 외가에 하숙하는 여인을 남몰래 연모하고, 어른들이 싫어하는 비행장의 비행기를 너무도 좋아해서 온갖 망상에 빠져 지내는 모습으로. 어른들의 세상 속에서 아이는 어른들의 세계에 속한 내부인이면서 동시에 외부인의 모습도 가지고 있는 것이죠. 이 모순적인 모습이 빚어내는 간극의 힘이 <돌의 연대기>라는 소설의 색다름과 독특함을 형성하고, 책을 읽는 독자는 거기에 빠져들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이의 시선이 소설을 색다르고 독특하게 만드는 것에만 기여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이의 시선은 비단 색다름과 독특함에만 기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의 시선은 전쟁이라는 참혹한 비극을 '아이의 눈'이라는 여과기를 통해 보여주게 함으로써, 현실을 중화시켜 보여줍니다. 참혹하기 그지없는 현실이 아이의 눈 때문에, 그 참혹함과 잔혹함이 가진 강렬함이 줄어든채로 우리에게 다가가는 것이죠. 저는 여기에 이 소설의 또다른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의 참혹함과 잔혹함을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강렬함을 줄인채로, 아이의 시선이라는 색다른 필터로 거른채로 보여주기 때문에, 진짜 리얼한 현실과 소설이 그려내는 현실 사이에는 일종의 공백이 발생합니다. 바로 이 공백 부분을 채우는 게 독자의 역할입니다. 여기서 이 소설의 또다른 독서가 시작되죠. 소설이 끝났다구요? 아닙니다. 이 소설은 끝나는 순간에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본 현실과 진짜 리얼한 현실 사이의 공백을 메우려는 '제2의 독서'를 시작하는 것이 이 소설의 결말입니다. 소설이 끝나는 순간 다시 시작되는 독서. 끝이 시작이 되는 독서. 저는 여기에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가상 사이의 공백을 메우는 독서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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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죄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은모 옮김 / 달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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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6.우죄-야쿠마루 기쿠

조금이라도 관계있던 사람이 자살하면 자신에게도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아. 허울 좋은 소리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자살을 막을 수 있는 건 사람과의 유대밖에 없어. 만약 그 사람과 좀 더 깊은 인연을 맺었다면... 누군가를 잃으면 반드시 그런 후회가 아픔이 되어 찾아오지.(57)

대중은 자기보다 불행한 사람을 보고 싶어서, 남이 감추고 싶어하는 비밀을 엿보고 싶어서 돈을 내가며 주간지를 사는 거라고.(208)

늘 과거에 시달려. 어디로 달아나도 과거가 쫓아오지. 아무리 평범하게 살고 싶어도 다들 우르르 몰려들어 과거를 파헤치려고 해. 괴로워해, 괴로워해, 하고 몰아붙이지. 마치 너는 살 가치가 없으니까 죽으라는 것처럼...(276)

부모는 자식만은 절대로 체념하면 안 됩니다. 제 생각은 그래요.(443)

도망치지 말고 자신이 저지른 죄를 직시하며 살기를... 그 뿐이야.(492)

이 책을 읽다가 감정이 너무 북받쳐서 당혹스런 경험을 했습니다. 갑자기 가슴 속에 감정이 차오르더니 눈물이 솟구치려고 하더라구요. 얼마나 당혹스럽던지. 책을 읽으면서 더욱 감수성이 풍부해진 인간답게, 가끔씩 이런 일이 있는데 오랜만에 경험을 하니 놀라웠습니다. 감정의 파고가 지나가고 책에 적힌 저자의 이름을 들여다봅니다. 야쿠마루 가쿠. 이 작가가 이제 인간의 감정을 잘 파고드는 작품을 지속적으로 써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처음 이 작가를 만났을 때는 무언가 강렬한 열의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그 다음 작품에서는 어딘가 방황한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첫 작품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던 '소년법'이라는 주제에 천착하고 그 주제를 소설 세계의 굳건한 토대로 삼은채로 그에 관련된 작품을 지속적으로 써내고 나니 어느새 이 작가는 사람의 흔드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 돼 있더군요.

<우죄>도 야쿠마루 가쿠 답게 '소년법' 문제와 관련된 소설입니다. 소설은 두 명의 소년을 참혹하게 죽인 중3 학생이 소년원 사람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사람답게 변화하고 성인이 되어 사회로 돌아오며 겪는 일을, 그가 사회로 돌아와서 만나게 된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그려내고 있습니다. 살인자로 과거의 기억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채 공장으로 들어오는 스즈키, 어린 시절 왕따 당하던 친구의 자살에 큰 죄책감을 가진 채로 저널리스트의 꿈을 꾸다 현실 속에서 좌절하고 공장으로 들어온 마스다, 도쿄에서 만난 나쁜 남자친구 때문에 AV 배우 시절의 수렁에서 빠져 나오지는 못하는 공장직원 미요코, 소년원의 정신과 의사로 스즈키에게 헌신을 다하다 아들에게 소홀해서 아들에게 미움받고 본인도 아들에게 죄책감을 느끼는 야요이, 이 네 명을 토대로 그들과 관계된 인물들이 엮이면서 소설이 전개됩니다. 나쁜 소설이 쉬운 질문에 쉬운 답을 내놓고, 좋은 소설이 쉽지 않은 질문에 쉽지 않은 대답을 내놓는다고 저는 생각하데요, 그런 면에서 보면, 이 소설은 쉽지 않은 다양한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쉽지 않은 대답을 힘겹게 내놓고 있습니다. 죄와 속죄의 문제,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 가해자의 삶과 그 인물과 연관된 삶의 문제, 죄와 우정과 사랑의 관계, 직업과 가족의 문제 같은.

사실 그렇습니다. 내가 친하게 지낸 사람이 과거에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혹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과거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범죄를 저질렀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죄를 저지른 사람의 속죄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아니 속죄는 가능한가? 이런 질문에 쉬운 대답이 나올 수 있을까요? 질문 자체쉽지 않기에 대답이 쉽게 나올 수는 없습니다. 친구로 지낸 스즈키의 범죄 사실을 알고 고민하는 마스다나 연인 사이로 있다 스즈키의 과거를 알고 역시 고뇌하는 미요코의 행동은 거기에 우리 모두의 이름을 대입해도 별다를 게 없습니다. 우리 모두 고민하고 나름의 행동을 하겠죠. 하지만 그게 정답일리는 없고 그저 어쩔 수 없는 행동에 불과할 겁니다. 스즈키의 문제로 넘어가면 더 복잡해집니다. 죄와 속죄의 문제는 유구한 역사를 지닌 문제입니다. 종교,철학,법학,사회학,범죄학, 심리학 같은 다양한 영역들이 뒤섞인 복잡한 문제. 결국 작가는, 자신이 생각하는 하나의 태도를 제시합니다. 살아남아서 지속적으로 속죄하는 마음으로 산다는. 그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작가는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속죄는, 죄를 잊지 않고 그 죄의 무게를 짊어지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오지는 않고, 저지른 죄는 돌이킬 수 없기에 그게 그나마 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의 태도일 겁니다. 그때의 속죄는, 속죄하는 이에게 저주이자 축복일 겁니다. 죄의 무게감을 덜 수 있는 축복이자 죄를 영원히 짊어지고 가야 한다는 저주. 그 속죄의 압도적인 무게감을 알려주는 마지막 구절 앞에서 저는 그저 묵묵히 속죄의 어려움을 인정할 뿐입니다. 죄는 사라지지 않는 현실이고, 속죄는 그 죄의 현실감을 지우려는 불가능을 향한 몸부림일 뿐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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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채호 & 함석헌 : 역사의 길, 민족의 길 지식인마을 39
이흥기 지음 / 김영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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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5.신채호&함석헌:역사의 길,민족의 길-이흥기

국가주의에 대한 강한 비판 의식은 신채호와 함석헌을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제시한 해결 방도는 달랐다. 신채호는 폭력 혁명을, 함석헌은 인간의 새로운 변화를 말한다.(18)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민족은 능동적인 사회 역사적 주체의 자리에서는 '민중'보다는 한층 내려와 있다. 조선 민족은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으로 인해 식민지 피지배 세력으로서 인민이 되었으나 민중의 혁명을 통해 그 살길을 보전할 수 있으리라는 논리가 된다.(95)

민중을 믿지 않고는 전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마치 신을 믿지 않고서는 신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병아리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씨알이 저를 깨고 나오는 날이 올 것이다. 깨기 전엔 씨알이다. 깨면 전체다.(124)

진리는 "항상 그 시대 최고 지식을 표현의 의상으로 삼는다"(183)

'시대착오'. 이 말을 써놓고 한번 곰곰히 생각해봅니다. 현재 존재하는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거나 오히려 역행하는 것을 시대착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아마도 각 영역마다 그런 시대착오적인 것들이 있을 겁니다. 역사학이나 역사책에도 이런 '시대착오적'이라는 말을 갖다 붙일 수 있을 겁니다. 거기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민중을 역사의 중심으로 내세우며 역사적 변화를 꿈꾸는 민중사관도 흘러간 시대의 유물일 겁니다. 민족주의적 역사관은 어떤가요?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를 쓰면서 민족주의를 비판한 것처럼 민족주의적 역사관은 아직도 시대에 큰 영향을 미치고는 있지만 역사학적 흐름에서는 이미 낡은 유물에 불과하고 그 설득력도 예전만큼 못한 게 사실입니다. 거시담론?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과 미시사의 등장 이래로 역사학의 흐름 속에서 '거시담론'은 흘러간 옛 노래가 됐죠.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 과거의 유물들이 항상 나쁘냐는 겁니다. 그것들이 항상 나쁘고 항상 옳지 않은 걸까요? 이 시대의 흐름에 맞는 트렌디한 것들만이 옳고 좋은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의 흐름에 맞다고 해도 틀리고 옳지 않은 것이 있을 것이고, 과거의 것이라고 해도 좋고 지금 필요한 것들이 있을 겁니다. 우리는 과거의 것들 중에서 지금 필요한 것들을 취사선택하고 이 시대의 흐름에 맞게 쓰면 됩니다. 무조건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하며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신채호&함석헌:역사의 길,민족의 길>은 신채호와 함석헌이라는 두 인물의 삶의 궤적과 그들의 사상을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책입니다. 조선시대 말과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과 군사독재 시절에 걸쳐 독립과 저항과 자유와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두 인물의 이야기인 만큼 이 책의 서술 대다수는 과거의 목소리입니다. 조선말에 태어나 천재로 불렸지만 일본에 국가를 빼앗기게 된 상황에서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친 독립투사이자 민족 중심의 역사관을 토대로 책을 쓴 역사학자 신채호, 기독교인이지만 무교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종교관을 구축한 채 일제시대와 군사독재 시절에 걸쳐 저항하는 길을 걸어온 인물이자 민중 중심의 기독교적 역사관을 바탕으로 역사책을 쓴 함석헌. 두 인물의 삶의 궤적은 그들이 걸어온 길만큼이나 한 시대의 삶을 오롯히 증명하며 찬연히 빛을 바랍니다. 그들이 구축한 역사관과 그들이 쓴 책도 그들의 삶과 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 만큼 그 뿌리가 깊고 강건한 기개를 뽐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관과 그들이 쓴 책이 현재 우리의 삶에 무조건 적용될 수 있는 책일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아무리 뭐라고 해도 그들의 역사관은 흘러간 옛 노래입니다. 지금과는 다른 과거의 목소리가 스며 있는 시대착오적인 옛 노래.

그러나 앞에서도 적었지만 흘러간 옛 노래라고 해서 그 가치가 줄어드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닐 겁니다. 저는 오히려 신채호와 함석헌의 역사관과 그들이 쓴 책이 '시대착오적'이라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버려두고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민족주의적이고 민중 중심적인 사관은 오히려 지금이라서 더 가치가 있을 겁니다. 미시 담론에만 빠져드는 현대의 모습에 그들이 이야기하는 거시담론은 오히려 더 도움이 될 겁니다. 오직 나만 생각하기 쉬운 현대인들에게 이 사회의 전체적인 비전과 하나의 공동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사고하게 만드는 그들의 역사관은 분명히 도움이 됩니다. 오직 돈만을 생각하기 쉬운 이 시대에, 두 사람의 빛나는 삶의 궤적만큼이나 낡았지만 힘있는 역사관은 돈을 벗어나는 사람의 길을 생각하게 해줄 겁니다. 그것이 쉽지 않을지라도, 저는 우리 모두가 그렇게 사고하고 생각하기를 두 손 모아서 기도해봅니다. 그것만이 신채호와 함석헌의 삶의 유지를 이을 수 있는 우리만의 작은 길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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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운 사랑 이탈로 칼비노 전집 8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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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14.힘겨운 사랑-이탈로 칼비노

군복의 천가 실크를 사이에 두고 마치 상어들끼리 가볍게 스치듯이 군인의 다리가 부드럽게 찰나적으로 움직여 여인의 다리에 닿았고, 그는 자신의 혈관의 파동을 그녀의 혈관으로 보내듯 움직였다.(10~11)

그는 창가로 다가갔다. 발코니들이 많은 높은 건물에 에워싸인 넓은 뜰이 보였다. 하지만 뜰은 사막처럼 황량했다. 지붕들 위로 보이는 하늘은 이제 맑지 않고 희끄무레했으며 불투명한 녹청색 서서히 하늘을 뒤덮었다. 그처럼 녜이의 기억 속에서도 불투명한 흰빛이 감각의 기억들을 하나씩 지워가고 있었다. 태양은 무딘 통증처럼 선명하지 않았으며 정지된 작은 빛의 자국 같았다.(57)

생생함을 자연스레 포착한다는 스냅 사진을 좋아하는 취향이 자연스러움을 죽이고 현재에서 멀어지게 만들어. 사진에 찍힌 현실이 곧 시간의 날개 위로 달아난 기쁨에 대한 향수를 불러 일으키지. 그제 찍은 사진일지라도 기념의 성격을 띠게 된다고.(64)

페이지 표면 그 너머에서는 이쪽 세계의 삶보다 훨씬 더 삶다운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물결처럼 넘실거리는 고운 모래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고 반은 동물이고 반은 식물인 존재들이 사는 초록빛이 감도는 푸른 바다 세계와 우리를 갈라놓는 수면처럼.(98)

어둠이 바닥이 없는 땅이어서 그는 아무리 땅을 파도 지칠 줄 몰랐다. 거리에서 마침내 노란 불빛이 켜진 네모난 창문들이 여기저기 난 집들 위로 눈을 들어 별이 총총한 하늘을 보았다. 그리고 별들이 깨진 달걀처럼 으스러져 하늘에 흩어져 있는 게 아니라 날카로운 빛으로 꽂혀 그 주위에 무한한 공간을 열어 놓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117)

사실 모든 침묵은 그 침묵을 에워싼 미세한 소음들의 그물망으로 이루어져 있다.(142)

중요한 것은 여타의 것들을 모두 사라지게 내버려 둔 채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실만 전달하고 우리 자신을 본질적인 의사소통으로,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는 반짝이는 신호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와 동시에 복잡한 우리 개성과 상황과 얼굴 표정을 지워 버리고 전조등들에 의해 모습을 감추는 어둠 속에 남겨 두어야 한다.(166)

칼비노의 소설은 환상과 비현실, 실험들로 가득한 새로운 문학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세계였습니다. 저는 언제나 칼비노의 소설을 볼 때면 그가 어떤 독특하고 새로운 세계를 보여줄지 기대합니다. 그런데 <힘겨운 사랑>은 느낌이 달랐습니다. <힘겨운 사랑>에 펼쳐진 칼비노의 소설 세계는 지극히 현실적인 세계였습니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당혹스러울 정도로.

<힘겨운 사랑>에서 칼비노는 평범한 이들의 일상에 찾아온 새로운 변화의 경험을 디테일하고 촘촘하게 묘사합니다. 너무 디테일하게 묘사해서 마치 의사의 손에 인간의 정신이 해부되어 거린 것처럼. 기차에서 미망인과의 사소한 피부 접촉에 망상을 품은 군인, 바닷가에서 헤엄치다 속옷을 잃어버린 부인, 낯선 여인과의 하룻밤의 경험 때문에 설레어하는 회사원,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러 가는 기나긴 기차여행을 견디는 남자... 이들 모두는 칼비노의 손 끝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세밀하게 드러내며 도시인들의 사랑이 얼마나 힘겨운지, 원자화되고 파펴환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갑자기 찾아온 낭만적이고 새로운 경험을 얼마나 받아들이기 힘든지를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자신만의 삶에 빠져서, 자신만의 개인적인 원안에 틀어박혀서 자신에게 찾아온 새로운 경험을, 사랑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삶의 일반적인 요소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우리에게 사랑은 힘겨운 일입니다. 적고 나니 서글퍼지네요. 사랑이 힘겹다니. 그래도 부정하지는 않으렵니다. 힘겨운 것을 힘겹지 않다고 속이는 것은 공허한 일일 테니까요. 날카로운 관찰자의 시선으로 일상을 헤부하며 그 안의 세세한 디테일을 잡아내는 칼비노의 현실적인 소설이 빚어내낸 쓸쓸한 감성 앞에서 다짐을 해봅니다. 그것이 힘겹더라도 포기하지는 않겠다고요. 내게 찾아온 사랑을 힘겹더라도 놓치지 않겠다고요. 그게 칼비노가 바라는 것일 테고, 저 자신도 거기에 동의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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